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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민방에서 소개하는 ‘화제의 양산인물’ - 26일 저녁 방송 KNN 휴먼토크 예능 프로그램 <꿈의 대화> -삶의 터전인 우리의 지역을 사랑하고 그곳에서 꿈을 키워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KNN의 휴먼토크 예능 프로그램 <꿈의 대화> 양산시편(연출 이장희, 구성 이민정)이 오는 26일(토) KNN을 통해 방송된다. MC로는 이만기와 양산 출신 트롯 가수 정민찬이 함께 하고, 첫 번째 손님으로 나동연 양산시장을 만나 3선 시장으로서의 애환과 지역 균형발전에 대한 꿈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또, 시민의 힘으로 자신의 지역 웅상을 바꿔나가고 있는 네이버 카페 ‘웅상 이야기’의 진재원 운영자를 만난다. 지역 주민의 90% 이상이 가입하게 된 과정과 사고 유가족을 위해 1억4천만원을 모금하게 된 사연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리고 양산 출신의 젊은 영화감독으로 로마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과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수상한 정지혜 감독을 만난다. 어릴 적 소와 달리기를 하고 선생님의 도움으로 영화캠프에 참가했던 사연 등 양산에서의 정감 넘치는 추억과 지역에 뿌리를 둔 영화인으로서의 꿈을 들어본다. 마지막으로 꿈과 즐거움, 배움을 잇는 서창중학교 윈드오케스트라를 찾아가 자발적으로 운영되는 오케스트라의 즐거움과,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을 희생해 친구들을 응원하는 등굣길 이음음악회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특히 BTS의 노래들을 편곡한 메들리와 나동연 양산시장과 협연한 ‘찐이야’등 흥겹고 멋진 무대를 만나보고, 또한 MC들과 함께 학교를 방문한 나동연 시장과의 즉석 Q&A 타임을 통해 양산의 교육과 문화 인프라 발전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지역에 터전을 두고 그곳에서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 KNN <꿈의 대화> 양산시 편은 오는 8월 26일(토) 저녁 8시 35분에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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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과학기술대학교 2023년 해외취업 연수사업(K-Move스쿨) 운영기관 선정동원과학기술대학교(총장 손영우)는 지난 17일(목)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주관하는 ‘2023년 해외취업 연수사업(K-Move스쿨) 운영기관으로 선정되었다. 2016년부터 진행되어 온 해외취업 연수사업은 2016년, 2017년, 2018년, 2021년까지 연수과정 및 운영기관 평가 A등급을 획득해 해외취업 사업에 대한 운영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이번에 선정된 2023년 해외취업 연수사업(K-Move스쿨)은 <호주 조리&Hospitality 자격증 취득 및 해외취업 연수과정>으로 9월까지 연수생을 모집하여 영어교육을 비롯한 직무교육을 국내에서 실시할 예정이다. 본 프로그램에 참가할 연수생들은 2024년 2월 중 호주 시드니로 출국하여 시드니 ECA에서 영어 어학연수를 수료하고 호주 ‘Commercial Cookery IV & Diploma of Hospitality’ 자격증을 취득한 후 취업할 예정이다 손영우 총장은 “ 지난 2016년부터 우리대학 학생들은 해외취업(K-Move스쿨)을 통해 다양한 경험과 안목을 넓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앞으로도 도전적인 청년들의 해외취업 꿈 실현을 위한 취업지원 시스템 구축 등에 더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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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 럼 화랑도 세속오계와 가슬갑사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슬갑사의 위치 삼국사기 제45권 열전 제5(三國史記 卷第四十五 列傳 第五) 귀산(貴山) 전에 귀산은 602년전투 중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 정신으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 열전에 원광법사로부터 세속오계를 전수받는 과정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원광법사가 수나라 유학을 다녀와서 가실사(加悉寺)에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귀산(貴山)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서 아버지는 아간 무은(武殷)이다. 귀산은 어려서부터 같은 부의 사람 추항(箒項)과 벗이 되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가 선비나 군자와 함께 교유하기를 기대하면서도,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는다면 욕됨을 면치 못할까 두려우니, 어찌 어진 사람 곁에서 도를 배우지 않겠는가?” 당시에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수나라에 유학을 다녀와서 가실사(加悉寺)에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에게 높은 예우를 받고 있었다. 귀산 등이 그 문하에 이르러 옷자락을 여미고 나아가 말하였다. “속세의 선비가 어리석고 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사오니, 한 말씀 해주시어 종신토록 계율로 삼게 해주소서.” 법사가 말했다. “불가의 계율에 보살계(菩薩戒)가 있어 그것이 열 가지로 구별되어 있으나, 그대들이 남의 신하로서는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으니, 첫째 임금을 섬기는 데는 충성으로 하고, 둘째 부모를 모시는 데는 효성으로써 하고, 셋째 벗과 사귀는데 신의로써 하고, 넷째 전쟁에 임하여서는 물러서지 않으며, 다섯째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 그대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함이 없게 하라!”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 원광서학(圓光西學)에 가슬갑사의 위치에 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일연 스님은 운문사 동쪽 9천 보쯤 되는 곳에 가슬현에 있는데,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다고 하였다. 그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가슬갑(嘉瑟岬)[가서(加西)라고도 하고 또 가서(嘉栖)라고도 하니 모두 우리말이다. 갑(岬)을 세속에서는 곳(古尸)이라 하기 때문에, 곳절(古尸寺)이라 하니, 갑사(岬寺)라는 말과 같다. 지금 운문사(雲門寺) 동쪽으로 9천 보쯤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가슬현(嘉瑟峴)이라고도 한다.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는데 바로 이곳이다.] 원광법사가 가슬갑사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찾아가서 이렇게 아뢰었다. “세속의 선비라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부디 한 말씀 내려주시면 평생 명심하여 실천하겠습니다.” 2. 점찰법회와 운문사 사적에 나오는 가슬갑사의 위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운문사 동쪽 9천보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으며, 현의 북쪽에 가슬갑사가 있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원광은 가슬갑사에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고 점찰보(占察寶)를 두었으며,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 점찰법회(占察法會)는 무교의 점복 행위와 유사한 방법으로 점을 쳐서 과보의 차별을 살피고 그에 따라 참회 수행하게 하는 법회였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무교에서는 신의 뜻에 좌우된다고 보고 그것을 점쳐서 살피고자 하였다면, 불교에서는 그것을 숙세의 과보로 보고 참회하고 선업을 지어 내세를 밝힐 것을 가르친 것이다. 점찰법은 업설에 입각하여 숙업에 대한 참회를 강조하였다. 점찰법회는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 근거하는데, 이 경은 중국에서 지어진 위경(僞經)으로 여겨지고 있다. 『점찰경』 상권에서는 불멸 후 악세에서 출가·재가 중생이 세간과 출세간의 인과법에 대하여 확고한 신심을 내지 못하고 여러 가지 장애를 만나 의혹이 일어나거든 ‘목륜상법(木輪相法)’을 써서 선악의 숙세(宿世)의 업과 그 과보를 점찰하여 참회 수행할 것을 설하였다. 처음 점찰법으로 교화한 승려는 원광이었다. 그는 600년(진평왕 22) 수나라에서 귀국한 뒤 ‘귀계멸참(歸戒滅懺)’의 법으로 가서갑(嘉栖岬)에 점찰보(占察寶)를 두고 항규로 삼아 점찰법회를 설행하였다. 원광은 삼기산에서 수행하던 중 신술(神術)을 행하는 신을 접하고 그의 권유로 중국에 구법하였으며 그의 부도도 삼기산에 있다고 전한다. 원광은 무교 신앙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점찰법에 관심을 두고 교화 방법으로 삼았을 것이다. 또한, 왕의 질병에 밤마다 심오한 법을 말하고 계를 받게 하여 참회하게 했더니 왕이 크게 신봉하였고 드디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것 역시 귀계멸참의 법을 설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점찰보는 현전하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우리나라 보 가운데 최초의 것으로, 진평왕 때의 고승이었던 원광(圓光)이 가서사(嘉栖寺)에다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설치시기는 알 수 없다. 설치목적 또한 분명하지 않지만, 점찰법회를 운영하기 위한 재원으로서의 기금을 마련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원광이 설치한 점찰보에 어느 정도의 기금이 모였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한 청신녀(淸信女 : 女信徒)가 이 곳에 전답 100결(結)을 시납하였으며 그것이 고려 후기까지도 보존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원광의 점찰보는 이 100결의 전답을 기금의 일부로 하고, 이를 경작하여 얻어지는 생산물을 법회의 운영자금으로 활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호거산(虎踞山)의 흉맥을 진압하기 위하여 대작갑사를 세웠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나머지 네 개의 갑사는 동서남북 갑지에 흉맥을 진압하기 위해 세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오갑사는 신라 수도인 경주의 서쪽 방어를 위한 군사, 교통의 요충지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가슬갑사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하천과 관련이 있는 갑(岬)이 될 수 있는 지형적 조건, 점찰법회를 열었던 만큼 교통의 요지이며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넓은 장소가 요구되며, 산릉의 흉맥을 진압하기 위해 세운 사찰인 만큼 지맥의 끝이 되는 갑지라는 비보적 조건을 갖춘 곳이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요건을 갖춘 곳은 현재 바깥 삼계리 일원을 비롯한 몇 군데로 추정되고 있으나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3. 오갑사의 폐사 신라시대 이래 이 군의 사원으로서 작갑사 이하 크고 작은 사원은 삼국이 난리로 인하여 망해갈 즈음 대작갑, 소작갑, 소보갑, 천문갑, 가서갑 등 5갑의 절이 모두 파괴되고, 5갑의 기둥을 합쳐서 대작갑사에 두었다. 조사 지식(知識: 위의 글에서는 보양이라고 하였음)이 대국에서 불법을 전수받고 돌아오다 서해 가운데 이르렀을 때 용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고 금실로 수놓은 비단가사 한 벌을 주었다. 겸하여 한 아들 이목을 주어 받들어 모시고 뒤따라가게 하면서 부탁하기를, “지금 삼국이 소란하여 불법에 귀의한 군주가 없지만, 만약 내 아들과 더불어 본국의 작갑으로 가서 절을 짓고 거처하면 적병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몇 년 안에 반드시 불교를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 삼국을 안정시킬 것이요.”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서로 이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스스로 원광이라고 일컫는 노승이 인궤(印櫃)를 안고 나타나서 전해주고 사라졌다. [살피건대 원광은 진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개황 연간에 동쪽으로 돌아와서 가서갑에 머무르다가 황룡사에서 죽었으니, 계산해 보면 청태 초에 이르기까지 무려 300년에 달함. 이제 여러 갑사가 모두 황폐한 것을 비탄하다가 보양이 와서 장차 일으키려고 한 것을 기뻐하여 고한 것이리라]. 이에 보양이 황폐해진 절을 일으키려고 북령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5층 황탑이 있었으므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자취가 없었다. 다시 올라가서 바라보자 여러 마리의 까마귀가 땅을 쪼고 있었다. 이에 바다의 용이 작갑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찾아 파보니 과연 무수한 벽돌이 남아 있었으므로 모아서 높이 쌓아 탑을 완성하자 남은 벽돌이 없었다. 이에 이곳이 전대의 절터였음을 깨닫고 절을 세워서 건주하며 인하여 작갑사라고 이름하였다. 얼마 후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법사가 이곳에 절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듣고 5갑의 전답 500결을 합하여 이 절에 주고, 청태 4년 정유에 운문선사란 액호를 내렸으며 가사의 영음을 받들었다. 이목이 항상 절 옆에 작은 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도왔는데, 어느 해 갑자기 가뭄으로 밭의 채소가 타게 되자 보양이 이목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다. 그러자 한 경내에 흡족하게 비가 내렸는데, 천제가 자신도 모르게 하였다며 장차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목이 법사에게 급히 고하였다. 법사가 이목을 상 아래에 숨겼는데, 얼마 후 하늘의 사자가 뜰에 이르러서 이목을 내놓으라고 청하였다. 법사가 뜰 앞에 있는 배나무를 가르키자 벼락을 내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벼락을 맞은 배나무는 부려졌는데, 용이 어루만져주자 즉시 소생하였다(또는 보양이 주술로써 살렸다고 함). 그 나무가 근년에 쓰러지자 어떤 사람이 방망이를 만들어서 법당과 식당에 두었는데, 그 방망이 자루에 명(銘)이 있었다. 신라말의 혼란기에 오갑사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후삼국 시기에 견훤과 왕건이 패권을 다투면서 전란이 격화되었고, 후백제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인 청도 지역이 전투의 피해를 보게 되면서 오갑사가 대부분 파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가슬갑사의 위치 학술조사 경북대 박물관(관장 윤용진)은 청도군으로부터 용역을 받아 1993년 한 해 동안 실시한 가슬갑사지 지표조사와 문헌조사 보고서를 통해 운문산의 중앙부에 해당하고 운문령에서 발원하는 바깥 삼계리천과 문복산에서 발원하는 개살피계곡과 합치되는 산곡지인 바깥 삼계리가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폐사가 돼버린 가슬갑사의 터로 추정했다. 경북대 박물관은 지표조사를 통해서는 가슬갑사지의 유구 확인에는 실패했으나 운문사(옛이름 대작갑사) 동쪽으로 구천 걸음쯤 떨어진 곳에 고개가 있고 이 고개 북쪽에 가슬갑사가 있었다고 기록된 삼국유사 등 문헌자료를 종합분석해서 위치를 규명했다. 경북대 박물관은 조사보고서에서 가슬갑사는 산간불교의 도장으로서 존재하면서 한편으론 산중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이정표와 가야지방의 교화를 위해서 또 신라 호국불교의 도장으로서 역할을 했으나 삼국통일 이후 시대적 변화에 따라 이러한 조건이 사라지고 자연히 역할도 쇠퇴한 것으로 분석하였다. 청도군의 용역을 받아 2004년 이 일대에서 토기 요지(窯址)를 발굴한 중앙승가대 불교사학연구소가 펴낸 발굴조사 보고서를 통해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50번지와 42번지 일대가 원광 스님이 세속오계를 설한 가슬갑사지로 추정된다고 발표하였다. 불교사학연구소는 보고서를 통해 신원리 42번지 일부 지역에서 통일신라시대 토기를 생산하던 요지 1기와 재 폐기장 2곳, 요지와 관련된 석축 기단 1개소 등 생산·공방 유적을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사지(寺址)와 관련된 유구나 문화층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 일대가 사원 또는 사하촌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불교사학연구소는 폐사된 지 1,000여 년이 지났고, 자연적·인위적으로 지형이 삭토·교란된 점 등을 들어 폐사지가 완전히 유실된 것으로 보고, 사지의 원 위치를 42번지 남쪽 산구릉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러한 조사들은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5. 가슬갑사 표지석이 있는 곳 답사 운문터널을 나와 국지도 69호선을 따라 운문사 방향으로 가다가 청도군 운문면 삼계리에서 ‘청도가는길 커피 펜션’ 건너편의 ‘삼계리 경로당’ 표지석이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면 등산로 안내판이 나온다. 문복산 등산로를 따라서 약초농원 방향으로 가면 된다. 약초농원 입구 안내 표지판에 나온 대로 약초농원에 들어가지 않고 계곡 옆으로 난 등산로로 가면 된다. 문복산 등산로 표지판을 따라 계곡을 건너가면 커다란 돌로 다져진 등산로가 나온다. 등산로 왼쪽 아래는 계살피계곡으로 작은 폭포와 소가 있다. 돌 너덜길이 반복되는 등산로로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가슬갑사 표지석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 표지석을 지나서 계속 올라가면 문복산 등산로와 연결된다. 오른쪽 등산로는 산 중턱으로 나 있는데 문복산으로 갈 수 있다. 계곡 상류에서 이 두 등산로는 결국 만나게 된다. 필자는 무더위가 절정인 지난 8월 14일 오른쪽 등산로로 올라갔다. 이곳은 등산객이 거의 다니지 않아 조용하다. 힘든 오르막도 없고 평탄한 등산로다. 길에는 산악회 등산 리본이 이따금씩 보여 길을 알려주고 있다. 처음 가는 길인데, 가슬갑사 표지석이 나오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올라가니 예상한 대로 계곡이 나오고 멋진 폭포가 있었다. 청년들 일행 여러 명이 폭포에서 물놀이하고 있어 물어보니 필자와 반대로 문복산 방향에서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하였다. 신라시대 화랑도의 세속오계와 관련 있는 가슬갑사 표지석 있는 곳을 물어보니 모른다고 하였다. 계곡을 건너 반대편으로 가니 등산로와 이정표가 있었다. 가슬갑사 표지석이 있는 곳은 문복산 방향과는 반대로 하산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좌측의 계살피계곡에는 아름다운 폭포와 소가 계속 나타나 사진을 찍었다. 등산객이 이따금 나타났는데, 계곡에서 혼자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도 있고, 계곡의 물을 거슬러 올라 문복산 방향으로 가는 일행도 있었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예상대로 가슬갑사 표지석이 나왔다. 등산로에서 우측으로 올라가니 옛날 가슬갑사가 있었던 유적지가 나왔다. 입구에는 무너진 돌탑이 보이고, 우측으로 커다란 돌탑이 있었다. 돌탑 뒤로 올라가니 수도자가 기도하던 제단이 나왔다. 이병길 씨의 2017년 8월 16일 답사기에 보니 김유신 장군의 후손이 이곳에서 돌탑을 쌓으며 기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손은 평소에 충청도에서 명리학을 공부하다가 꿈에서 김유신 장군을 만나 현몽을 받고 조상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하였다. 이번 답사에서 이 수도자를 만나기를 기대하였는데,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는 ‘남부지방산림청 구미국유림관리소’에서 경작, 분묘 설치 등 불법 행위를 금지한다는 안내 팻말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기도자가 사용하던 낡은 돗자리, 녹슨 가스통, 폐비닐 등도 방치되어 있었고, 물통, 냄비, 망가진 휴대용 가스레인지 등이 바위 틈에 숨겨져 있었다. 바위 절벽 앞의 제단에는 향로가 쓰러져 있어 필자가 뚜껑을 찾아 덮어서 바로 세워놓았다. 수도자가 더이상 이곳에서 생활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병길 씨가 6년 전 답사했을 때 김유신 장군 후손인 수도자가 절터를 반듯하게 정리하면서 발견한 도자기 파편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번에 둘러보니 보이지 않았다. 필자는 작은 도자기 파편 하나만 발견하였다. 절터에서 도자기 파편이 보이고, 주변에 신우대가 자라는 것을 보니 이곳에 옛날 절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가슬갑사 절터는 등산로에서 약간 산 위로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된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은 가슬갑사 유적지를 잘 모르고 관심도 갖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계단 위로 올라가면 큰 돌탑이 나오고, 평지에 올라서면 왼쪽에 약간 무너진 작은 돌탑이 있다. 더 올라가서 축대로 만든 큰 건물지에 오르면 입구에 작은 돌탑이 있고, 앞에 정교하게 쌓은 커다란 돌탑이 있다. 기도처로 오르는 돌계단도 있다. 다만 1400여 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원광법사가 점찰법회를 열고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한 가슬갑사가 있었던 곳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절터는 남향으로 햇빛이 잘 들었다. 사지(寺址)가 아주 넓지는 않았지만 바로 앞의 계곡에 물도 풍부하고, 삼계리와도 그리 멀지 않아 조용한 환경에서 수행하기에는 알맞은 곳이었다. 이번 가슬갑사 사지 답사 과정 중 삼계마을에서 마을주민 문상덕 씨를 만나서 주요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오전에 올라갈 때도 만나고 답사 후 오후에 내려올 때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편에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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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 세속오계와 가슬갑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슬갑사의 위치 삼국사기 제45권 열전 제5(三國史記 卷第四十五 列傳 第五) 귀산(貴山) 전에 귀산은 602년전투 중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 정신으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 열전에 원광법사로부터 세속오계를 전수받는 과정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원광법사가 수나라 유학을 다녀와서 가실사(加悉寺)에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귀산(貴山)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서 아버지는 아간 무은(武殷)이다. 귀산은 어려서부터 같은 부의 사람 추항(箒項)과 벗이 되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가 선비나 군자와 함께 교유하기를 기대하면서도,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는다면 욕됨을 면치 못할까 두려우니, 어찌 어진 사람 곁에서 도를 배우지 않겠는가?” 당시에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수나라에 유학을 다녀와서 가실사(加悉寺)에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에게 높은 예우를 받고 있었다. 귀산 등이 그 문하에 이르러 옷자락을 여미고 나아가 말하였다. “속세의 선비가 어리석고 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사오니, 한 말씀 해주시어 종신토록 계율로 삼게 해주소서.” 법사가 말했다. “불가의 계율에 보살계(菩薩戒)가 있어 그것이 열 가지로 구별되어 있으나, 그대들이 남의 신하로서는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으니, 첫째 임금을 섬기는 데는 충성으로 하고, 둘째 부모를 모시는 데는 효성으로써 하고, 셋째 벗과 사귀는데 신의로써 하고, 넷째 전쟁에 임하여서는 물러서지 않으며, 다섯째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 그대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함이 없게 하라!”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 원광서학(圓光西學)에 가슬갑사의 위치에 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일연 스님은 운문사 동쪽 9천 보쯤 되는 곳에 가슬현에 있는데,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다고 하였다. 그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가슬갑(嘉瑟岬)[가서(加西)라고도 하고 또 가서(嘉栖)라고도 하니 모두 우리말이다. 갑(岬)을 세속에서는 곳(古尸)이라 하기 때문에, 곳절(古尸寺)이라 하니, 갑사(岬寺)라는 말과 같다. 지금 운문사(雲門寺) 동쪽으로 9천 보쯤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가슬현(嘉瑟峴)이라고도 한다.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는데 바로 이곳이다.] 원광법사가 가슬갑사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찾아가서 이렇게 아뢰었다. “세속의 선비라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부디 한 말씀 내려주시면 평생 명심하여 실천하겠습니다.” 2. 점찰법회와 운문사 사적에 나오는 가슬갑사의 위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운문사 동쪽 9천보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으며, 현의 북쪽에 가슬갑사가 있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원광은 가슬갑사에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고 점찰보(占察寶)를 두었으며,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 점찰법회(占察法會)는 무교의 점복 행위와 유사한 방법으로 점을 쳐서 과보의 차별을 살피고 그에 따라 참회 수행하게 하는 법회였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무교에서는 신의 뜻에 좌우된다고 보고 그것을 점쳐서 살피고자 하였다면, 불교에서는 그것을 숙세의 과보로 보고 참회하고 선업을 지어 내세를 밝힐 것을 가르친 것이다. 점찰법은 업설에 입각하여 숙업에 대한 참회를 강조하였다. 점찰법회는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 근거하는데, 이 경은 중국에서 지어진 위경(僞經)으로 여겨지고 있다. 『점찰경』 상권에서는 불멸 후 악세에서 출가·재가 중생이 세간과 출세간의 인과법에 대하여 확고한 신심을 내지 못하고 여러 가지 장애를 만나 의혹이 일어나거든 ‘목륜상법(木輪相法)’을 써서 선악의 숙세(宿世)의 업과 그 과보를 점찰하여 참회 수행할 것을 설하였다. 처음 점찰법으로 교화한 승려는 원광이었다. 그는 600년(진평왕 22) 수나라에서 귀국한 뒤 ‘귀계멸참(歸戒滅懺)’의 법으로 가서갑(嘉栖岬)에 점찰보(占察寶)를 두고 항규로 삼아 점찰법회를 설행하였다. 원광은 삼기산에서 수행하던 중 신술(神術)을 행하는 신을 접하고 그의 권유로 중국에 구법하였으며 그의 부도도 삼기산에 있다고 전한다. 원광은 무교 신앙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점찰법에 관심을 두고 교화 방법으로 삼았을 것이다. 또한, 왕의 질병에 밤마다 심오한 법을 말하고 계를 받게 하여 참회하게 했더니 왕이 크게 신봉하였고 드디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것 역시 귀계멸참의 법을 설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점찰보는 현전하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우리나라 보 가운데 최초의 것으로, 진평왕 때의 고승이었던 원광(圓光)이 가서사(嘉栖寺)에다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설치시기는 알 수 없다. 설치목적 또한 분명하지 않지만, 점찰법회를 운영하기 위한 재원으로서의 기금을 마련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원광이 설치한 점찰보에 어느 정도의 기금이 모였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한 청신녀(淸信女 : 女信徒)가 이 곳에 전답 100결(結)을 시납하였으며 그것이 고려 후기까지도 보존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원광의 점찰보는 이 100결의 전답을 기금의 일부로 하고, 이를 경작하여 얻어지는 생산물을 법회의 운영자금으로 활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호거산(虎踞山)의 흉맥을 진압하기 위하여 대작갑사를 세웠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나머지 네 개의 갑사는 동서남북 갑지에 흉맥을 진압하기 위해 세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오갑사는 신라 수도인 경주의 서쪽 방어를 위한 군사, 교통의 요충지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가슬갑사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하천과 관련이 있는 갑(岬)이 될 수 있는 지형적 조건, 점찰법회를 열었던 만큼 교통의 요지이며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넓은 장소가 요구되며, 산릉의 흉맥을 진압하기 위해 세운 사찰인 만큼 지맥의 끝이 되는 갑지라는 비보적 조건을 갖춘 곳이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요건을 갖춘 곳은 현재 바깥 삼계리 일원을 비롯한 몇 군데로 추정되고 있으나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3. 오갑사의 폐사 신라시대 이래 이 군의 사원으로서 작갑사 이하 크고 작은 사원은 삼국이 난리로 인하여 망해갈 즈음 대작갑, 소작갑, 소보갑, 천문갑, 가서갑 등 5갑의 절이 모두 파괴되고, 5갑의 기둥을 합쳐서 대작갑사에 두었다. 조사 지식(知識: 위의 글에서는 보양이라고 하였음)이 대국에서 불법을 전수받고 돌아오다 서해 가운데 이르렀을 때 용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고 금실로 수놓은 비단가사 한 벌을 주었다. 겸하여 한 아들 이목을 주어 받들어 모시고 뒤따라가게 하면서 부탁하기를, “지금 삼국이 소란하여 불법에 귀의한 군주가 없지만, 만약 내 아들과 더불어 본국의 작갑으로 가서 절을 짓고 거처하면 적병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몇 년 안에 반드시 불교를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 삼국을 안정시킬 것이요.”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서로 이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스스로 원광이라고 일컫는 노승이 인궤(印櫃)를 안고 나타나서 전해주고 사라졌다. [살피건대 원광은 진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개황 연간에 동쪽으로 돌아와서 가서갑에 머무르다가 황룡사에서 죽었으니, 계산해 보면 청태 초에 이르기까지 무려 300년에 달함. 이제 여러 갑사가 모두 황폐한 것을 비탄하다가 보양이 와서 장차 일으키려고 한 것을 기뻐하여 고한 것이리라]. 이에 보양이 황폐해진 절을 일으키려고 북령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5층 황탑이 있었으므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자취가 없었다. 다시 올라가서 바라보자 여러 마리의 까마귀가 땅을 쪼고 있었다. 이에 바다의 용이 작갑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찾아 파보니 과연 무수한 벽돌이 남아 있었으므로 모아서 높이 쌓아 탑을 완성하자 남은 벽돌이 없었다. 이에 이곳이 전대의 절터였음을 깨닫고 절을 세워서 건주하며 인하여 작갑사라고 이름하였다. 얼마 후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법사가 이곳에 절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듣고 5갑의 전답 500결을 합하여 이 절에 주고, 청태 4년 정유에 운문선사란 액호를 내렸으며 가사의 영음을 받들었다. 이목이 항상 절 옆에 작은 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도왔는데, 어느 해 갑자기 가뭄으로 밭의 채소가 타게 되자 보양이 이목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다. 그러자 한 경내에 흡족하게 비가 내렸는데, 천제가 자신도 모르게 하였다며 장차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목이 법사에게 급히 고하였다. 법사가 이목을 상 아래에 숨겼는데, 얼마 후 하늘의 사자가 뜰에 이르러서 이목을 내놓으라고 청하였다. 법사가 뜰 앞에 있는 배나무를 가르키자 벼락을 내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벼락을 맞은 배나무는 부려졌는데, 용이 어루만져주자 즉시 소생하였다(또는 보양이 주술로써 살렸다고 함). 그 나무가 근년에 쓰러지자 어떤 사람이 방망이를 만들어서 법당과 식당에 두었는데, 그 방망이 자루에 명(銘)이 있었다. 신라말의 혼란기에 오갑사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후삼국 시기에 견훤과 왕건이 패권을 다투면서 전란이 격화되었고, 후백제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인 청도 지역이 전투의 피해를 보게 되면서 오갑사가 대부분 파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가슬갑사의 위치 학술조사 경북대 박물관(관장 윤용진)은 청도군으로부터 용역을 받아 1993년 한 해 동안 실시한 가슬갑사지 지표조사와 문헌조사 보고서를 통해 운문산의 중앙부에 해당하고 운문령에서 발원하는 바깥 삼계리천과 문복산에서 발원하는 개살피계곡과 합치되는 산곡지인 바깥 삼계리가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폐사가 돼버린 가슬갑사의 터로 추정했다. 경북대 박물관은 지표조사를 통해서는 가슬갑사지의 유구 확인에는 실패했으나 운문사(옛이름 대작갑사) 동쪽으로 구천 걸음쯤 떨어진 곳에 고개가 있고 이 고개 북쪽에 가슬갑사가 있었다고 기록된 삼국유사 등 문헌자료를 종합분석해서 위치를 규명했다. 경북대 박물관은 조사보고서에서 가슬갑사는 산간불교의 도장으로서 존재하면서 한편으론 산중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이정표와 가야지방의 교화를 위해서 또 신라 호국불교의 도장으로서 역할을 했으나 삼국통일 이후 시대적 변화에 따라 이러한 조건이 사라지고 자연히 역할도 쇠퇴한 것으로 분석하였다. 청도군의 용역을 받아 2004년 이 일대에서 토기 요지(窯址)를 발굴한 중앙승가대 불교사학연구소가 펴낸 발굴조사 보고서를 통해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50번지와 42번지 일대가 원광 스님이 세속오계를 설한 가슬갑사지로 추정된다고 발표하였다. 불교사학연구소는 보고서를 통해 신원리 42번지 일부 지역에서 통일신라시대 토기를 생산하던 요지 1기와 재 폐기장 2곳, 요지와 관련된 석축 기단 1개소 등 생산·공방 유적을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사지(寺址)와 관련된 유구나 문화층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 일대가 사원 또는 사하촌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불교사학연구소는 폐사된 지 1,000여 년이 지났고, 자연적·인위적으로 지형이 삭토·교란된 점 등을 들어 폐사지가 완전히 유실된 것으로 보고, 사지의 원 위치를 42번지 남쪽 산구릉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러한 조사들은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5. 가슬갑사 표지석이 있는 곳 답사 운문터널을 나와 국지도 69호선을 따라 운문사 방향으로 가다가 청도군 운문면 삼계리에서 ‘청도가는길 커피 펜션’ 건너편의 ‘삼계리 경로당’ 표지석이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면 등산로 안내판이 나온다. 문복산 등산로를 따라서 약초농원 방향으로 가면 된다. 약초농원 입구 안내 표지판에 나온 대로 약초농원에 들어가지 않고 계곡 옆으로 난 등산로로 가면 된다. 문복산 등산로 표지판을 따라 계곡을 건너가면 커다란 돌로 다져진 등산로가 나온다. 등산로 왼쪽 아래는 계살피계곡으로 작은 폭포와 소가 있다. 돌 너덜길이 반복되는 등산로로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가슬갑사 표지석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 표지석을 지나서 계속 올라가면 문복산 등산로와 연결된다. 오른쪽 등산로는 산 중턱으로 나 있는데 문복산으로 갈 수 있다. 계곡 상류에서 이 두 등산로는 결국 만나게 된다. 필자는 무더위가 절정인 지난 8월 14일 오른쪽 등산로로 올라갔다. 이곳은 등산객이 거의 다니지 않아 조용하다. 힘든 오르막도 없고 평탄한 등산로다. 길에는 산악회 등산 리본이 이따금씩 보여 길을 알려주고 있다. 처음 가는 길인데, 가슬갑사 표지석이 나오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올라가니 예상한 대로 계곡이 나오고 멋진 폭포가 있었다. 청년들 일행 여러 명이 폭포에서 물놀이하고 있어 물어보니 필자와 반대로 문복산 방향에서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하였다. 신라시대 화랑도의 세속오계와 관련 있는 가슬갑사 표지석 있는 곳을 물어보니 모른다고 하였다. 계곡을 건너 반대편으로 가니 등산로와 이정표가 있었다. 가슬갑사 표지석이 있는 곳은 문복산 방향과는 반대로 하산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좌측의 계살피계곡에는 아름다운 폭포와 소가 계속 나타나 사진을 찍었다. 등산객이 이따금 나타났는데, 계곡에서 혼자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도 있고, 계곡의 물을 거슬러 올라 문복산 방향으로 가는 일행도 있었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예상대로 가슬갑사 표지석이 나왔다. 등산로에서 우측으로 올라가니 옛날 가슬갑사가 있었던 유적지가 나왔다. 입구에는 무너진 돌탑이 보이고, 우측으로 커다란 돌탑이 있었다. 돌탑 뒤로 올라가니 수도자가 기도하던 제단이 나왔다. 이병길 씨의 2017년 8월 16일 답사기에 보니 김유신 장군의 후손이 이곳에서 돌탑을 쌓으며 기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손은 평소에 충청도에서 명리학을 공부하다가 꿈에서 김유신 장군을 만나 현몽을 받고 조상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하였다. 이번 답사에서 이 수도자를 만나기를 기대하였는데,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는 ‘남부지방산림청 구미국유림관리소’에서 경작, 분묘 설치 등 불법 행위를 금지한다는 안내 팻말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기도자가 사용하던 낡은 돗자리, 녹슨 가스통, 폐비닐 등도 방치되어 있었고, 물통, 냄비, 망가진 휴대용 가스레인지 등이 바위 틈에 숨겨져 있었다. 바위 절벽 앞의 제단에는 향로가 쓰러져 있어 필자가 뚜껑을 찾아 덮어서 바로 세워놓았다. 수도자가 더이상 이곳에서 생활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병길 씨가 6년 전 답사했을 때 김유신 장군 후손인 수도자가 절터를 반듯하게 정리하면서 발견한 도자기 파편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번에 둘러보니 보이지 않았다. 필자는 작은 도자기 파편 하나만 발견하였다. 절터에서 도자기 파편이 보이고, 주변에 신우대가 자라는 것을 보니 이곳에 옛날 절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가슬갑사 절터는 등산로에서 약간 산 위로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된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은 가슬갑사 유적지를 잘 모르고 관심도 갖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계단 위로 올라가면 큰 돌탑이 나오고, 평지에 올라서면 왼쪽에 약간 무너진 작은 돌탑이 있다. 더 올라가서 축대로 만든 큰 건물지에 오르면 입구에 작은 돌탑이 있고, 앞에 정교하게 쌓은 커다란 돌탑이 있다. 기도처로 오르는 돌계단도 있다. 다만 1400여 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원광법사가 점찰법회를 열고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한 가슬갑사가 있었던 곳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절터는 남향으로 햇빛이 잘 들었다. 사지(寺址)가 아주 넓지는 않았지만 바로 앞의 계곡에 물도 풍부하고, 삼계리와도 그리 멀지 않아 조용한 환경에서 수행하기에는 알맞은 곳이었다. 이번 가슬갑사 사지 답사 과정 중 삼계마을에서 마을주민 문상덕 씨를 만나서 주요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오전에 올라갈 때도 만나고 답사 후 오후에 내려올 때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편에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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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애서(愛徐),‘숲애서 즐기는 숲배움’교원연수 성료- 지난 16일부터 18일까지, 초중고등학교 교사 및 교육전문 직원 30여명 참석 - 양산시시설관리공단(이사장 박성관) 숲애서는 지난 16일부터 3일간 제1기 교원 직무연수를 성공리에 실시하였다. 이번 연수프로그램은 ‘숲애서(愛徐) 즐기는 숲배움’을 주제로 초·중·고등학교 교사, 교육전문직원 30명을 대상으로 일상 속 탄소중립 실천과 심신치유 등 지원을 통한 교육활동 의지 고취를 위해 실시하였으며, △탄소중립 △기후변화등 이론교육과 △학교 숲가꾸기 △노르딕워킹 △버려지는 산림자원 활용 만들기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하였다. 연수 참가자는 “실생활 속에서도 탄소중립을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환경교육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라고 전했다. 숲애서 권해주 팀장은 “숲애서가 가진 산림환경을 적극 활용하고, 역량 있는 강사진을 통한 연수의 전문성 확보하여 교육공동체를 위한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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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핀란드 상공회의소 회장, 평산책방 찾아 문 전 대통령 만나경남 양산시가 네팔, 인도, 통도사 등 민간 문화교류를 시작으로 국제문화도시로 성장하기 위해 발돋움하고 있다. Zena Chung(제나정) 한-인도 비즈니스센터 회장(IKBC:Indo-Korea Business Center)과 Heikki Ranta(헤이키 란타) 주한 핀란드 상공회의소 회장이 한-인도 국제문화교류 협력을 위해 지난 19일 평산책방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을 만났다. 제나 정(Zena Chung) 회장은 “인도 국민은 문재인 전 대통령님의 따뜻한 마음을 잘 알고 있으며 많이 존경한다며 인도 열차 참사 때도 희생자와 유가족에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하셨다며 이렇게 직접 만나뵙게 되어 매우 영광이다.” 말했다. 이 자리에서 제나 정(Zena Chung) 회장은 “세계적인 문화유산 통도사를 처음 방문해 우수한 자연환경과 역사성에 놀랐다며 한-인도 비즈니스 센터를 인도 수도인 뉴델리를 포함해 29개 주와 인도 전 지역에 한국-인도 비즈니스 센터를 오픈할 예정이라며 통도사를 비롯한 한국의 불교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문화·교육·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교류협력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 자리를 주선한 김성훈 부산외대 특임교수는 “통도사는 인도와 통한다는 뜻으로 역사적으로 인연이 깊다며 민간 교류를 확대시켜 순례와 명상 등 다양한 프로그램 연계를 통해 국제교류 협력이 확대되어 양산시의 경제발전을 견인하고 국제적인 도시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가교역할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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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양산시가 네팔, 인도, 통도사 등 민간 문화교류를 시작으로 국제문화도시로 성장하기 위해 발돋움하고 있다.Zena Chung(제나정) 한-인도 비즈니스센터 회장(IKBC:Indo-Korea Business Center)과 Heikki Ranta(헤이키 란타) 주한 핀란드 상공회의소 회장이 한-인도 국제문화교류 협력을 위해 지난 18일 양산시 통도사 방문했다. 이들은 양산시와 인도 유럽 등 국제문화교류의 장을 넓히기 위해 통도사, 미타암, 기업체 방문을 시작으로 물꼬를 트고 있다. 이들은 영축총림 통도사를 방문해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을 참배하고 현덕 주지스님과 친견했다. 일행은 환영 인사와 덕담을 나누며 인도와 통도사간 다양한 분야 민간 교류 확대와 우호 증진과 국제교류협력에 대한 많은 부분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 자리에서 제나 정(Zena Chung) 회장은 “세계적인 문화유산 통도사를 처음 방문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며 미국 캐나다 인도 등 세계 다양한 외교적 네트워킹을 기반으로 한-인도 비즈니스 센터를 인도 수도인 뉴델리를 포함해 29개 주와 인도 전 지역에 한국-인도 비즈니스 센터를 오픈할 예정이라며 통도사를 비롯한 한국의 불교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문화·교육·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교류협력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현덕 주지스님은 “통도사를 방문해 주셔서 깊이 환영하고 통도사와 인도는 역사적으로 부처님과 인연이 깊다며 인도와 다양한 분야 활발한 소통을 통해 더욱 발전하고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아지길 기대한다” 화답했다. 이 자리를 주선한 김성훈 부산외대 특임교수는 “통도사(通度寺)는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파한 인도의 영축산에서 지명이 유래했으며 인도(印度)의 도(度)와 음이 같아 통도사는 인도와 통한다는 뜻으로 역사적으로 인연이 깊다며 이번 만남을 계기로 민간 교류를 확대시켜 순례와 템플스테이, 명상 등 다양한 프로그램 연계를 통해 국제교류 협력이 확대되어 양산시의 경제발전을 견인하고 국제적인 도시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가교역할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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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문화교류네팔시, 양산시, 통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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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 휴가철 물가안정 캠페인 실시- 바가지요금 근절, 착한가격업소 이용 홍보 등 - 양산시는 지난 17일 남부시장에서 ‘여름 휴가철 물가안정 캠페인’을 전개했다. 휴가철 건강한 소비문화를 장려하고, 착한가격업소 이용 활성화를 위해 진행한 이날 캠페인에는 관련 공무원, 물가모니터요원, 소비자 단체 등 20여명이 참여했다. 이번 캠페인을 통해 가격표시제 이행, 농산물 원산지 표시 등을 점검하고 특히 바가지요금 근절을 위한 상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당부드리며 시민들을 대상으로 양산시가 지정한 착한가격업소* 적극 이용을 홍보했다. 한편 시는 5개반의 합동지도 점검반을 편성하여 피서지 바가지요금 근절, 가격·원산지표시 이행, 요금 담합행위 등 불공정거래행위 등에 대하여 중점적인 지도점검‧관리를 위해 오는 8월 31일까지 물가대책종합상황실 운영한다. 양산시 관계자는 “물가 상승이 지속됨에 따라 소비자와 사업주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며 “건전한 유통거래 질서를 확립해 지역물가 안정 관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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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의회·통도사 찾은 네팔 둘리켈·배리시 시장 “한-네팔 간 국제문화교류 협력” 약속양국 의회-지자체 간 우호 증진·국제교류 협력 다짐 석가모니 부처님의 고향 네팔에서 둘리켈(Dhulikhel)시 시장, 베리(Bheri)시 시장이 경남 양산시를 방문해 국제문화교류 확대가 기대된다. 양산시와 네팔의 국제문화교류는 네팔의 둘리켈시 시장과 배리시 시장이 지난 16일 양산시의회와 통도사를 방문하면서 국제교류의 물꼬를 열고 있다. 시장 일행은 이날 양산시의회를 방문해 이종희 양산시의회 의장을 비롯해 정숙남 기획행정위원장·이묘배·최복춘·신재향·강태영양산시의원, 네팔 재외동포포럼(Overseas of Nepal Porum, ONP) 한국대표 스리저나 네팔리, 김성훈 부산외대 특임교수 등과 간담회 자리에서 환영 인사와 덕담을 나누며 양국 의회와 지자체 간 우호 증진과 국제교류협력에 대한 높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 자리에서 이종희 의장은 “멀리 네팔의 젊은 정치지도자가 양산시를 방문한 첫 사례”라며 “양산지역 대학들과 기업 간 문화 예술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교류 협력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고 환영 인사를 했다. 이어 네팔 일행은 자리를 옮겨 영축총림 통도사를 함께 방문해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을 참배하고 영축총림 통도사 현덕 주지스님과 다과를 나누며 친견했다. 이 자리에서 어속 쿠마르 비안주 슈레스타(ASHOK KUMAR BYANJU SHRESTHA), 네팔 둘리켈시 시장과 찬드라 프라카쉬 가르티(CHANDRA PRAKASH GHARTI) 네팔 배리시 시장은 “통도사에서 평화로움과 부처님의 따뜻한 기운을 느꼈다”며 “환영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나눴다. 이어 “통도사와 네팔은 역사적으로 부처님과 깊은 인연이 있다며 통도사와 국제문화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면서 “기회가 되면 통도사 주지스님과 여러 스님을 네팔로 초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통도사 현덕 주지스님은 “멀리 부처님의 고향 네팔에서 통도사를 방문해 주셔서 깊이 환영하고 양산시와 네팔 도시 간 활발한 소통을 통해 더욱 발전하고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아지길 기대한다”면서 “기회가 되면 네팔을 방문하겠다”고 화답했다. 시장 일행은 통도사 주지스님께 네팔의 거우덤 불상과 네팔 희말라야 현지 차를 선물했다. 한편, 이 자리에는 통도사에서 수행하고 있는 네팔 출신의 젊은 유학생 스님이 배석해 통역을 담당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네팔 일행은 현덕 주지 스님의 세심한 배려에 깊이 감동했고, 서로 네팔 고향의 정을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인구 3천만 명의 네팔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산맥을 품은 안나푸르나의 에베레스트, 랑탕과 함께 히말라야 3대 트래킹 코스로 전 세계인들이 찾는 관광도시다. 또 네팔 룸비니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한 곳으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세계 많은 사람이 찾는 세계문화 유적지로도 유명하다. 이 자리를 주선한 김성훈 부산외대 특임교수는 “양산의 통도사와 천성산과 영취산을 중심으로 테마가 있는 네팔의 산악 및 성지 순례 코스를 연계해 국제적인 관광벨트를 형성하고 문화·체육, 교육·의료,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 협력을 통해 양산시의 경제발전을 견인하고 국제적인 도시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가교역할을 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