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9 (토)

  • 구름많음속초14.0℃
  • 맑음8.0℃
  • 맑음철원7.6℃
  • 맑음동두천9.1℃
  • 맑음파주10.1℃
  • 흐림대관령9.6℃
  • 구름많음백령도15.5℃
  • 흐림북강릉14.7℃
  • 흐림강릉14.8℃
  • 구름많음동해15.2℃
  • 맑음서울12.6℃
  • 맑음인천13.8℃
  • 맑음원주9.5℃
  • 비울릉도14.5℃
  • 맑음수원10.7℃
  • 맑음영월11.5℃
  • 구름많음충주11.7℃
  • 구름조금서산11.9℃
  • 맑음울진14.1℃
  • 구름조금청주13.1℃
  • 구름조금대전13.7℃
  • 구름많음추풍령11.8℃
  • 박무안동12.6℃
  • 구름많음상주13.1℃
  • 비포항15.6℃
  • 구름많음군산12.2℃
  • 박무대구14.3℃
  • 맑음전주12.9℃
  • 흐림울산15.9℃
  • 구름많음창원15.5℃
  • 맑음광주13.9℃
  • 흐림부산16.1℃
  • 구름많음통영15.5℃
  • 박무목포15.7℃
  • 구름조금여수16.5℃
  • 맑음흑산도16.0℃
  • 맑음완도16.1℃
  • 구름많음고창11.6℃
  • 구름조금순천13.1℃
  • 구름조금홍성(예)8.8℃
  • 흐림제주19.3℃
  • 구름많음고산19.0℃
  • 흐림성산18.2℃
  • 구름조금서귀포17.3℃
  • 맑음진주14.5℃
  • 맑음강화10.5℃
  • 맑음양평9.7℃
  • 맑음이천8.8℃
  • 맑음인제7.5℃
  • 구름많음홍천8.9℃
  • 구름많음태백10.0℃
  • 구름많음정선군10.8℃
  • 구름조금제천9.6℃
  • 구름많음보은12.3℃
  • 맑음천안9.0℃
  • 맑음보령12.3℃
  • 구름많음부여8.5℃
  • 흐림금산11.0℃
  • 구름조금부안11.0℃
  • 구름많음임실11.2℃
  • 구름많음정읍11.3℃
  • 맑음남원12.5℃
  • 구름많음장수12.3℃
  • 구름많음고창군10.9℃
  • 구름많음영광군11.2℃
  • 구름많음김해시15.3℃
  • 맑음순창군12.7℃
  • 구름많음북창원12.4℃
  • 구름많음양산시15.7℃
  • 구름조금보성군15.4℃
  • 맑음강진군14.2℃
  • 맑음장흥13.7℃
  • 맑음해남13.5℃
  • 구름조금고흥14.4℃
  • 구름많음의령군14.6℃
  • 구름조금함양군12.1℃
  • 구름많음광양시15.8℃
  • 맑음진도군17.0℃
  • 맑음봉화11.3℃
  • 맑음영주10.1℃
  • 구름조금문경10.3℃
  • 구름많음청송군12.5℃
  • 맑음영덕15.3℃
  • 구름많음의성12.6℃
  • 구름많음구미13.5℃
  • 구름조금영천14.0℃
  • 구름많음경주시14.5℃
  • 구름많음거창12.7℃
  • 구름많음합천13.4℃
  • 구름많음밀양14.5℃
  • 맑음산청13.0℃
  • 흐림거제16.8℃
  • 맑음남해15.9℃

사람사람

전체기사 보기

영수증을 체계적으로 수집해온 한국…

세상에는 다양한 물품을 수집하는 수집가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수집을 계속하고 있다. 우표, 동전, 잡지, 골드 바, 책, 영화 포스터, 복권, 전화기, 볼펜, 양주병, 성냥곽, 골동품, 레코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품목을 모으고 있다.

영수증을 체계적으로 수집해온 한국 최고의 수집가/남북 통일을 염원하며 물방울을 모은 통일운동가 성봉경 씨의 인생

이색적인 영수증 수집가 성봉경 씨세상에는 다양한 물품을 수집하는 수집가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수집을 계속하고 있다. 우표, 동전, 잡지, 골드 바, 책, 영화 포스터, 복권, 전화기, 볼펜, 양주병, 성냥곽, 골동품, 레코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품목을 모으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시간이 지나면 돈이 되는 품목을 선호하며 수집가들끼리 정보를 교환하며 서로 사고팔기도 한다. 동전이나 우표는 당장 팔면 현금화 할 수 있다.필자 심상도 역시 몇 가지를 수집하고 있다 관광 문화 전문가답게 관광지 입장 영수증을 모으고 있다. 수석, 한겨레신문 창간호, 월간조선, 신동아, 잡지 창간호 등을 모았다.종이로 된 영수증을 모은다는 것은 현대사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자료이기에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영수증 수집은 돈이 되지 않는다. 당장 사고 팔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가치하게 보이기 때문에 아무도 수집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성봉경 씨(71세)는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영수증을 주목하고 수집에 나섰다. 적십자 회비, 신문 구독료, TV시청료, 국민연금, 건강보험료, 전기요금, 전화요금, 자동차 운전면허 학과시험 접수증, 부산지검 벌금납부 영수증, 춘계도로정비 출역의무자 대납영수증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종류가 많다.부산에서 30여년간 사진관을 운영했던 성봉경 씨는 영수증을 꼬박꼬박 수집했던 덕분에 낭패를 면한 경우가 있다. 고가의 사진관 장비를 구입하면서 대금을 냈는데도 착오로 두 번째 청구서가 우편으로 날아왔다. 영수증을 잘 챙겨둔 덕분에 큰 손해를 막을 수 있었다. ● 성봉경 씨의 인생사해방 이후인 1948년에 출생한 성봉경 씨는 혼란한 시대를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왔다. 정치적으로 6.25전쟁, 이승만 정부, 4.19혁명, 5.16혁명 등을 몸소 겪으며 시대와 역사의 아픔을 고비마다 겪었다.개인적, 가정적으로 부친의 명에 따라 공부보다는 일찍부터 생활전선에 나가 돈을 벌어야 했다. 생업전선에 나가 막노동, 선원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하며 생계를 도왔다. 돈을 벌어 동생들 학업 뒷바리지를 하며 희생하였다.1972년 백마부대 월남전 참전 용사로서 머나먼 월남의 정글 속을 누비며 국가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며 애국자로서 활약했다.참전기념패, 병장 성봉경, 백마 경비특공대 일동, 1972년 7월 4일 상관 박원규 중사가 부하 성봉경 병장에게 준 개선 기념패 치열한 전쟁터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를 넘기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그래서 아파트 문에는 국가유공자의 집이라는 자랑스런 명패가 붙어있다. 울산 방어진에서 1984년까지 거주하다가 부산으로 이주하여 30여년간 사진관을 운영하였다. 2008년 살기좋은 양산으로 이사와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이따금 건강이 악화되어 사회적 활동을 잠시 접기도 하였지만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며 오뚝이처럼 재기하고 있다. 젊었을 때부터 통일운동을 하며 마라톤으로 다져진 체력 덕분인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성봉경 씨는 생계유지를 위해 사진관을 운영하며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결코 평범하지 않은 남다른 위대한 삶을 살아왔음을 직감할 수 있다.통일운동에 나서 2000년 1월 1일 제주도 한라산에서 출발하여 20일간 경기도 임진각까지 마라톤으로 달려가며 주요도시 시장 군수, 통일부 차관까지 만나며 통일운동을 하였다. 마라톤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통일 염원을 한데 집약하여 통일 물방울을 모았다. 이런 통일운동은 누구도 감히 상상하거나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인 위대한 통일운동이었다.효문화관 건립을 위한 황영조 효마라톤에서 산악인 허영호와 함께 황영조 효마라톤에서 마라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선수와 함께 황영조 효 마라톤 황영조 효 마라톤 통일 마라톤에서 통일부 차관 만남 통일마라톤 후 통일부 차관 면담 통일마라톤 후 만난 통일부 대변인 남편의 영수증 수집, 통일운동에 대한 열정과 집념을 말없이 지켜보며 묵묵히 내조해온 부인 이월출 여사는 전형적인 현모양처다. 자녀들을 훌륭하게 교육을 시켰는데 아드님은 소방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제주도에서 임진각까지 남편이 태극기를 들고 통일 열망으로 힘차게 달려갈 때 지원군으로 운전을 하며 도운 일등공신은 바로 부인이다.● 스마트폰으로 지방세 납부 양산시에서는 7월부터 스마트폰 앱으로 지방세 고지서를 받아보고, 신용카드로 결재하는 지방세 모바일 고지·납부제가 확대 시행된다고 밝혔다.지방세 고지서 모바일 송달은 종이고지서 없이 납세자 스마트폰의 앱을 통해 고지서를 확인하고 납부할 수 있는 서비스로, 기존에 스마트위택스와 은행, 금융결제원 앱에서 시행하던 서비스를 카카오페이, 네이버페이, 페이코까지 확대 시행하는 것이다.앞으로 점점 모바일화가 진행된다면 종이 영수증은 추억의 한 장면으로 사라질 것이다. 불과 한세대 남짓한 사이에 우리의 생활 환경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 세금 납부는 국민의 4대 의무헌법상규정된국민의6대의무는국방,납세,교육,근로,공공복리에적합한재산권행사,환경보전의의무다.일반적으로'국민의4대의무'라하면국방,근로,교육,납세의의무를말한다. '국민의6대의무'라하면여기에환경보전의의무,공공복리에적합한재산권행사의의무가더해진다.이중국방의의무,납세의의무를제외하고는권리인동시에의무에해당된다.대한민국 헌법 제36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납세의 의무를 진다. 납세의 의무란 공권력의 주체가 재정확보를 목적으로 반대급부 없이 국민이조세를 납부할 의무이다. 납세의 의무의 주체는 원칙적으로법인을 포함한 국내에서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이다. 외국인도 국내에 재산을 가지고 있거나 과세대상이 되는 행위를 할 때에는 과세대상이 된다.그러나 영수증은 일반 국민 누구나 받지만 소중하게 여기지 않기에 받는 순간 찢어버리거나 바로 쓰레기통에 버린다. 과거에 이따금 세금 영수증을 5년간 보관 안 했다고 관청에서 이미 납부한 고지서가 또 날아와 낭패를 당하는 국민이 더러 있었다. 이건 순전히 갑인 관청이 을인 국민들에게 일방적으로 부리는 횡포에 불과했다. 이제는 전산화되어 이런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영수증 수집의 중요성성봉경 씨(71세)가 영수증 수집에 나서 체계적으로 수집하게 된 계기는 선친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작고한 선친은 일제시대의 신문기사, 대중교통 차표, 영수증 등을 수집해서 몇 권의 스크랩 북을 남긴 수집가였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수집활동을 지켜보며 자란 것이 은연중에 성봉경 씨 유전자 DNA에 자연스럽게 각인되었다.영수증은 서민들이 살아가는 생생한 발자취이자 자료들인데 무관심으로 인해 방치되고 천덕꾸러기로 버려지는 것이 안타까워 수집에 나서게 되었다.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한 후에는 국민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언론과 인터뷰를 시작하였다. 주요 방송, 일간지, 부산일보, 국제신문, 양산신문, 양산시보 등에 보도되었다.하찮게 보이는 영수증도 모으면 그 속에 시대의 역사, 서민의 삶이 녹아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1982년 방범비 영수증을 통해 37년 전의 생활상 일부룰 엿볼 수 있다. 국민들의 가정을 안전하게 지켜주던 지켜주던 방범료가 주택보유자는 매월 200원, 셋집 거주자는 100원으로 차등 징수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영수증을 살펴보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적으로 사라진 것, 팔요에 따라 새로 생겨난 것들도 알 수있다. 영수증을 통해 서민의 미시적인 생활사를 정말하게 복구할 수 있다. 정치적인 문제는 국민 누구나가 관심을 갖고 참견을 하고 매일 언론에 보도되어 자료가 풍부하다. 그러나 서민들의 자질구레한 일상사는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가운데 자료는 점차적으로 멸실되고 있다. 성봉경 씨가 얼뜰하게 모아둔 영수증은 현재도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앞으로 시간이 더욱 흐른다면 일반 국민들의 샹활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귀중한 역사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성봉경 씨의 꿈평생을 영수증 수집에 열정을 바쳐온 성봉경 씨는 전시회를 열어서 귀중한 영수증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한다. 시민들에게 영수증 전시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알려주고, 청소년들에게는 부모, 조부모 세대들이 어떻게 어려움을 헤치며 살아왔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사소하게 보이는 영수증을 계기로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간의 소통을 강화하고 상호간의 이해를 높일 수게 된다. 영수증을 수집한 것을 구경하게 되면 수집의 중요성도 깨닫게 된다. 또한 수집한 자료를 어떻게 보관하고 분류하는지를 배울 수 있어 젊은 세대에게 교육적인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성봉경 씨는 그동안 수집한 영수증을 시민들에게 선보이는 전시회를 구상하고 있다. 영수증 전시관을 설립할 수 있는 독지가나 후원자를 바라고 있다. 1 궁극적으로 수집한 영수증, 전단지, 복권, 볼펜, 생활용품 등으로 전시관을 만들어 영원히 보관하여 2세들의 교육자료로 활용하고자 한다. 양산에 거주하고 있는 성봉경 씨는 양산시민으로서 먼저 양산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고 싶어한다.● 성봉경 씨와 심상도의 인연필자가 성봉경 씨를 알게 된 것은 양산숲길보전회 활동을 하면서 부터다. 초창기 활동을 할 때 삽량문화축전에서 양산숲길보전회 홍보 부스를 운용하면서 부스에서 인사를 나누었다.그후 양산숲길보전회 정기답사 때 천성산 답사에 동참하면서 회원들과 안면을 넓혀나갔다. 답사 때 회원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간단한 마술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성봉경 씨는 수집가답게 양산숲길보전회 초기 자료도 수집하여 보관하고 있다.자연스럽게 친해지면서 대화를 나누다보니 영수증 수집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집에 초대를 받아서 수많은 영수증, 수집품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건강이 악화되어 연락이 뜸하다가 6월 18일 전화가 와서 댁으로 방문하여 오랫만에 만나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성봉경 씨는 영수증 정리를 마치고 전시회를 열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영수증 관련 사진을 찍고, 양산시민들에게 이 중요한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성봉경 씨의 수집 열정에 감복하여 이를 널리 알리는 것이 심상도의 의무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전시회를 양산시청에서 할 수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6월 21일 11시 반경에 양산시청 비서실을 방문하여 하승종 비서실장을 면담하였다. 하실장은 친절하게 설명해주어 성봉경 씨가 궁금해하던 내용을 명쾌하게 알려주었다.하실장은 양산시 청사를 전면 리모델링 공사 중이라 시청민원실이 협소하여 영수증 전시회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공사 후에는 검토해보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실장은 시청민원실을 안내해주고 소통 전화기 조형물도 보여주고 설명해주어서 고마웠다. 시장님과 시민들간의 소통의 상징 조형물 실물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승종 비서실장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 SBS 방송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통일운동가 성봉경 씨는 2012년 3월 22일에 SBS 방송에 출연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통일운동을 알려 세상의 이목을 모은 바 있다.통일운동 방식을 마라톤과 접목하여 제주도에서 경기도 파주 임진각까지 달리며 국민들의 성원이 담긴 소중한 물방울을 모아서 보관하였다.SBS 방송에 보도된 내용을 소개한다.부산의 갈매기떼와 해변을 달리는 한 남자가 있다.이른 새벽 알몸에 반바지 패션을 고수하는 사람이 있다는 제보! 어두운 해변가! 옷을 벗은 채 태극기를 들고 달리는 남자를 발견한 제작진!1년 365일, 달린다. 추위도 모른채 물방울을 모으는 남자, 성봉경 씨. 길거리로 시민들에게 물방울을 기증 받는 이 남자. 어리둥절한 시민들.그러나, 성봉경씨는 굴하지 않고 기증받은 물방울과 함께 사람들과 사진을 찍는다! 30년동안 사진관을 운영한 아저씨. 남북통일 염원이 꿈이라는데~사진관 한켠에 사람들에게 기증받은 물통이 고스란히 보이고, 8천만 국민들에게 기증받은 물방울이 모이면 남북통일이 이뤄진다고 믿는(?) 남자!물방울도 모잘라 전단지에 영수증까지!! 통일을 위해 그가 꾸민 프로젝트의 그 첫째날! 함께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본다.

양산의 여름을 물들이는 ‘모래조각…

지난 9일, 양산역환승센터에 원두막 옆 소녀가 수박화채 주스를 마시는 모습이 완성된 것을 시작으로 문화예술회관 광장에는 시원한 팥빙수 모양, 물금워터파크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상어가족의 모습이 모래에 조각될 예정이다. 8월 말까지 여름을 테마로 한 작품을 전시한 후에는 <모래조각, 가을이 오면>이라는 테마로 작품을 전시해 가을의 아름다움을 도심 속에서 감상하는 기회를 이어나가게 된다.

양산의 여름을 물들이는 ‘모래조각’ 전시/ 모래조각, 여름테마와 함께 시원한 여름 보내세요

지역의 유명 모래조각가이자 국내 모래조각 창시자인 김길만 작가의 ‘움직이는 모래조각 전시 프로젝트’가 봄을 테마로 한 작품을 3월부터 전시하면서 시민들의 색다른 감상과 호응을 이끌어낸 가운데 여름을 테마로 한 작품이 6월 중 양산역환승센터, 문화예술회관 광장, 물금워터파크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지난 9일, 양산역환승센터에 원두막 옆 소녀가 수박화채 주스를 마시는 모습이 완성된 것을 시작으로 문화예술회관 광장에는 시원한 팥빙수 모양, 물금워터파크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상어가족의 모습이 모래에 조각될 예정이다. 8월 말까지 여름을 테마로 한 작품을 전시한 후에는 모래조각, 가을이 오면이라는 테마로 작품을 전시해 가을의 아름다움을 도심 속에서 감상하는 기회를 이어나가게 된다. 한편 지난 8일 오전 양산문화예술회관 광장 ‘모래에 봄을 조각하다-바이올린’의 작품이 훼손된 채 발견됐다. 양산시가 CCTV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전날인 7일 오후 9시 경 중학생으로 보이는 청소년 4명이 모래조각 작품에 올라가 훼손하는 정황이 목격됐다. 훼손된 작품은 봄에서 여름으로 테마를 바꿀 시기에 훼손돼 안타까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지만 향후 동일 사항 발생할 경우에는 수사의뢰 등 강경하게 대처할 방침이다. 양산시 관계자는 “시민들에게 바쁜 일상 속에서 해변에서나 볼 수 있는 작품을 감상하며 힐링을 준 모래조각이 훼손되어 매우 안타깝다”며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문화작품을 많은 사람이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이어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양산가수 이미순, 단독 첫 팬미팅…

아직 새내기 가수이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음색은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호소력 있는 특유한 소유자로 어디를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주 훌륭한 양산의 가수라는 정평이 나 있다. 인생의 끝자락을 향해 가는 어르신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무료 봉사하며 자신이 더 행복해하는 유리알처럼 맑은 사람이 바로 이미순 가수 아닐까 싶다.

양산가수 이미순, 단독 첫 팬미팅 토크쇼 개최 / 6일, 서면 1004 나눔 공연장

지난 6일 서면 1004 나눔 공연장에서 양산가수 이미순이 단독 첫 팬미팅 토크쇼를 개최했다. 이날 쇼에는 200명 이상 모여들여 감동의 콘서트가 되었다. 음악을 사랑하고 노래가 있어 행복한 사람 이미순 가수, 꽃이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사람의 인향은 더 오래 남는 것, 가냘픈 몸이지만 강직하고 봉사정신이 강한 이 시대의 꽃 그녀만의 매력 포인트다. 아직까지 때가 묻지 않는 청순함이 몸에서 풍겨져 바라보는 우리들 마음에 고스란히 베어져 나온다. 수줍음도 많지만 남을 먼저 배려 하는 이해심도 많아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가수인 것 같다. 특히, 어떤 일에서는 강한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 일 욕심이 많아서 항상 모범적이고 의욕이 넘쳐나 봉사 단체 활동하는 곳에도 으뜸자로 손꼽힌다고 한다. 어느 매체에서도 밝히듯 이미순 가수는 어릴 적부터 음악의 재능이 엿보여 합창단 단원 생활부터 탄탄하게 해온 것이 오늘날 훌륭한 트로트 가수로 또한 우리나라 경기민요도 멋들어지게 잘 부른다고 한다. 아직 새내기 가수이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음색은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호소력 있는 특유한 소유자로 어디를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주 훌륭한 양산의 가수라는 정평이 나 있다. 인생의 끝자락을 향해가는 어르신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무료 봉사하며 자신이 더 행복해하는 유리알처럼 맑은 사람이 바로 이미순 가수 아닐까 싶다. 노래가 좋아서 취미로 봉사 공연을 어디든 다니면서 사랑과 행복을 전파하는 사람, 그의 무대는 안 보면 더 그리워지는 저녁노을의 석양 같다. 평상시에는 아주 소박하고 얌전한 것 같아도 그녀의 바쁜 일상 스케줄을 모두 소화해내는 억척의 여인 똑 소리가 난다. 모든 건 혼자서 행사 기획하고 준비하며 진행으로 아주 매끄럽게 추진하는 파워를 가지고 있다. 즐겁고 행복하며 삶 자체가 고귀한 우리 모두의 에너지가 아닐까 란 생각으로 손수 곳곳에 찾아다닌다.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 경로당, 마을회관, 도시 지하철 노인들이 모여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찾아가서 봉사하지만 차후 봉사 단체을 만들겠다는 깊은 꿈을 갖고도 있다. 지금은 중앙예술봉사단에 가입하여 나름대로 손잡고 함께 동행하며 그녀만의 특색 있는 모습으로 오늘도 눈코 뜰 새 없이 또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녀의 삶에 한줄기 빛이 스며들어 그녀가 원하는 곳, 그녀를 애타게 찾는 관중들 앞으로 당당히 무대 위에서 자주 볼 수 있기를 모두가 바라고 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드디어 2019년 6월 6일 서면 1004 나눔 공연장에 단독 첫 팬미팅 토크쇼를 개최했다. 200명 이상 모여들여 감동의 콘서트 현장이 펼쳐진 가슴 뭉클한 공연을 마쳤다. 관중들은 동시 모두 엄지 척이란 사인을 하여 공연 내내 기쁨과 환희의 물결을 함께 나누었던 멋진 공연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처음 가진 공연이었지만 앞으로도 더 나은 팬들을 위해 한 층 더 업그레이드된 모습을 많이 보여주려고 한 단계씩 계단을 올라가고있다. 그녀는 매일 즐겁고 행복하며 삶 자체가 고귀한 우리 모두의 에너지가 아닐까 란 생각으로 손수 곳곳에 찾아다닌다. 봉사정신이 투철하여 꼭 해내고 마는 양산의 꽃 이미순 가수를 찾아주시고 사랑해주면 큰 힘이 되지않을까 생각한다. 앞으로 양산역 3번 출구 상설 공연장에서 매주 2~3차례 문화공연을 중앙예술봉사단에서 실시한다. 누구나 시간이 있는분 꼭 가셔서 공연 보시고 마음에 힐링을 하시면 삶에 보람을 느끼지 않을까 한다. 35만 양산시민의 지하철 이용객뿐만 아니라 누구나 와서 함께 듣고 보고 사랑하고 아껴주면 큰 힘이 될 것이다. 제공=강동환SNS

심상도 문화박사의 현충일 특집/백…

6월 6일 현충일을 맞이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목숨바쳐 투쟁한 선열들을 생각하며 백범 김구 선생과 백농 이규홍 선생의 독립투쟁과 두 분의 인연을 알아보기로 한다. 우리 민족이 잘 되는 길은 교육을 통해 문화강국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임시정부 활동 전에는 교육에 매진했다.

심상도 문화박사의 현충일 특집/백범일지 속에 기록된 양산출신 독립투사 이규홍 선생

백범일지 속에 기록된 양산출신 독립투사 이규홍 선생● 백범 김구백범 김구 선생은 전 국민이 다 아는 열혈 애국 투사다. 김구 선생의 호인 백범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백범의 ‘흰 백(白)’은 당시 가장 미천한 계층을 상징하는 백정을 뜻하고, ‘무릇 범(凡)’은 평범한 사람을 의미한다. 김구 선생은 신분이 낮고 배움이 적은 평범한 사람들도 배우기만 하면 나라를 바로 세울 인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김구 선생 유묵, 자료는 양산시립박물관 '1919 양산으로부터 울림' 전시회에서 촬영 노당익장, 늙어서도 기운이 더욱 좋아지다. 조선 후기, 뇌홍식 권총 우리 민족이 잘 되는 길은 교육을 통해 문화강국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임시정부 활동 전에는 교육에 매진했다. 6월 6일 현충일을 맞이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목숨바쳐 투쟁한 선열들을 생각하며 백범 김구 선생과 백농 이규홍 선생의 독립투쟁과 두 분의 인연을 알아보기로 한다.맨 왼쪽 백범 김구 선생, 친동생, 이동녕, 엄항섭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 김구 선생 서명 태극기 김구 선생 유묵, 지행합일, 아는 것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 필자 심상도는 이규홍 선생의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 행적을 연구하던 중 김구 선생이 쓴 백범일지가 생각났다. 상권, 하권을 단숨에 독파하였다.독립투사 김구 선생의 일생은 위기의 연속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독립을 위한 김구 선생의 열망을 느낄 수 있었고, 청년시절 동학 지도자인 접주가 되어 관군과 싸운 일,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토전양량(土田讓亮:쓰치다 조스케)이란자를 국모 민비 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 때려 죽인 일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치열한 독립투쟁 과정, 투옥, 탈옥, 사형당할 위기, 고문,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중국 내륙 깊숙한 곳으로 피신하여 임시정부의 명맥을 유지했던 일을 읽으며 스릴을 느끼는 동시에 굴하지 않는 애국심에 감복하였다.그토록 원하던 해방을 맞이하여 대한민국에 환국하여 자신을 도와준 분들을 만나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머리깎고 출가하였던 마곡사를 찾는 장면은 그야말로 금의환향의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다. ● 백범일지백범일지의 첫 시작은 ’인, 신 두 아들에게’라는 글로 시작된다.너희들이 아직 어리고 반 만리 먼 곳에 있어 수시로 나의 이야기를 말해 줄 수 없구나. 그래서 내가 겪어온 바를 간략히 적어 몇몇 동지에게 맡겨 너희들이 아비의 경력을 알고 싶어 할 정도로 성장하거든 보여주라고 부탁하였거니와, 너희가 아직 나이 어리기 때문에 직접 말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지만 어디 세상사가 뜻과 같이 되느냐.내 나이는 벌써 쉰셋이건마는 너희는 이제 열 살과 일곱 살밖에 안되었으니 너희의 나이와 지식이 자라질 때에는 내 정신과 기력은 벌써 쇠할 뿐 아니라, 이 몸은 이미 원수 왜에게 선전포고를 내리고 지금 사선에 서 있으니 내 목숨을 어찌 믿어 너희가 자라서 면대하여 말할 수 있을 날을 기다리겠느냐?● 백범일지에 나오는 교훈김구 선생이 젊은 시절에 만난 유학자 고능선 선생은 이런 말로 교훈을 주셨다."예로부터 천하에 흥하여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고, 망해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도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며, 그와는 반대로 백성이 여러 패로 갈라져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외국에는 아첨하고 제 동포와는 싸워서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다. 마치 요즘의 정치세태를 백범이 질타하는 것 같다. 대한민국 번영을 이끌어주고 지원해준 미국을 배신하고, 6.25전쟁 때 백만대군을 보내 침략하여 동포를 죽인 중국에 아부하는 정치인들은 정신차려야 한다.● 백농(白農) 이규홍 독립투사 약력- 1893.9.27 경남 양산군 상북면 대석리 397 출생(조선 고종 30년)- 1916. 일본 도쿄 명치대학 법학부 졸업- 1917. 부산에서 일광상회 개업, 상업(백산 안희제 선생의 백산상회 건너편)백농 이규홍 독립투사 이규홍 선생의 글, 동아일보, 1925년 2월 11일 상해에서 이규홍 선생 글 내용 해석 - 1919.4.23 서울에서 국민대회(3.1독립운동) 참석 후 양산 동향인 윤현진 씨와 함께 중국 상해로 망명- 1919.4 상해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수립(산하 청년단 출판부장)- 1919.9.11 상해 임시정부 내무차장- 1919.11.14 상해 임시정부 학무차장- 1920.1.15 상해 임시정부 내무차장- 1921.3 의정원(오늘날 국회) 의원 선출- 상해 국민대표회 기성회 조직의원- 상해 대한적십자 상의원- 1924. 상해 임시정부 재무총장(제4차 대통령제)- 1925. 외무총장, 재무총장(제5차 대통령제)- 1926.12.8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국회 부의장)- 1926.12.14 임(任). 국무원(장관, 제8차 국무령제, 국무령 : 김구)- 1926.12.15 면(免).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1926.12~1930.11 임. 국무원(제9차 국무령제, 국무령 : 김구)- 1927.1.15 상해 임시정부 약헌 기초위원(2.15 의정원 통과, 3.5 공포, 4.10 발표), 개정된 헌법 명칭 : 임시 약헌- 1932.4.29 윤봉길 의사 상해 홍코우공원 폭탄 투척 의거 성공, 윤의사 채포되자 자전거로 프랑스 조계(租界)에 거주하는 한국인 애국지사들에게 피난할 것을 알림(국가보훈처 발행, 독립운동사 제7권 의열투쟁사, 1979, p.761)- 1935. 독립운동하느라 과로와 영양부족으로 법정 전염병인 폐결핵 감염되어 상태가 위중함, 그 당시 결핵에는 치료약이 없었음, 회복 가망이 없어 고향 양산으로 모셔가라는 연락을 받고 가족이 모셔옴.- 고향집인 경남 양산군 상북면 대석리 397번지로 귀국, 일본 경찰 감시하에 가택 연금당함, 양산읍내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왕진하며 치료, 일본 경찰은 별채에 거주하며 외부인 차단시키고 감시하며 우편 검열.- 1939.5.20 폐결핵 악화로 46세 젊은 나이에 타계- 묘소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 월평리 산1-3(현재 7번국도 월평5거리 근처)● 상해임시정부 활동 현대식으로 해석1919년 3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청년단 출판부장, 경상도 대표 국회의원 선출, 내무부 차관, 교육부 차관, 재무부장관, 외무부장관, 김구 주석 밑에서 장관, 국회 부의장, 임시 헌법 제정 위원으로 활동했다.이규홍 독립투사는 요즘 말로 스펙이 매우 화려하다. 중요한 요직을 다 거치고 백범 김구 선생과 의기투합하여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분투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처럼 이규홍(李圭洪) 독립투사도 호에 백이 들어가 백농(白農)이다. 그 당시 독립투사 중 호에 백(白)이 들어간 백봉 나용균 등 6명을 6백(六白)이라 불렀다.● 백범일지 상권에 나오는 윤현진 독립투사필자 심상도는 최초로 백범일지를 분석하여 양산 출신의 독립투사 윤현진 선생, 이규홍 선생 이름을 발견하였다. 윤현진 선생 이름이 먼저 나온다.윤현진 선생 훈장증 사용한 도장 영정 사진 묘소 묘비 상해임시정부에서 양산을 대표하는 독립투사는 우산 윤현진 선생(1892~1921)과 백농 이규홍 선생(1893~1939)이 있다. 두 분은 양산출신의 위대한 인물인 동시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독립투사들이다. 윤현진 독립투사는 상해 망명 후 임시정부 재무차장을 맡아 2년 정도 활동하다가 전염병애 걸려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백농 이규홍 선생은 윤현진 선생보다 한 살 어린데, 상해 임시정부에서 무려 16년간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차관, 장관, 국회 부의장, 헌법 제정 위원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다음은 백범일지의 내용이다. 임시정부의 조직에 관하여서는 후일 국사에 자세히 오를 것이니 약하거니와, 나는 위원의 한 사람으로 뽑혔었다. 얼마 후에 안창호 동지가 미주로부터 와서 내무총장으로서 국무총리를 대리하게 되고, 총장들이 아직 모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차장제를 채용하였다. 나는 안 내무총장에게 임시정부 문 파수를 보게 하여달라고 청원하였다. 도산은 처음에는 내 뜻을 의아하게 여기는 모양이었으나 내가 이 청원을 한 동기를 말하자 쾌락(快諾)하였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에 순사 시험 과목을 어디서 보고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혼자 답안을 보았으나 합격이 못 된 일이 있었다. 나는 실력이 없는 허명을 탐하기를 두려워할뿐더러, 감옥에서 소제를 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 번 우리 정부의 청사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줍소서 하였단 말을 도산 동지에게 한 것이었다.안 내무총장은 내 청원을 국무회의에 제출한 결과 돌연 내게 경무국장의 사령을 주었다. 다른 총장들은 아직 취임하기 전이라 윤현진, 이춘숙, 신익희 등 새파란 젊은 차장들이 총장의 직무를 대행할 때라 나이 많은 선배로 문 파수를 보게 하면 드나들기에 거북하니 경무국장으로 하자고 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순사 될 자격도 못 되는 사람이 경무국장이 당(當)하냐고 반대하였으나 도산은,"만일 백범이 사퇴하면 젊은 사람들 밑에 있기를 싫어하는 것 같이 오해될 염려가 있으니 그대로 행공하라." 고 강권하기로 나는 부득이 취임하여 사무하였다.위에서 새파란 차장으로 언급된 윤천진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보다 16새 연하이다.● 백범일지 상권에 나오는 이규홍 독립투사민국 8년 12월에 나는 국무령으로 선거되었다. 국무령은 임시정부의 최고 수령이다. 나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을 보고, 아무리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국가라 하더라도 나같이 미미한 사람이 한 나라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의 위신에 관계된다 하여 고사하였으나 강권에 못 이기어 부득이 취임하였다.나는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으로 내각을 조직한 후에 헌법 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독재적인 국무령제를 고쳐서 평등인 위원제로 고치고, 지금은 나 자신도 국무위원의 하나로 일하고 있다.내 육십 평생을 돌아보니 상리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건마는, 나는 귀역궁 불귀역궁(貴亦窮 不貴亦窮:귀한 신분이 되어도 가난하게 지내고 귀한 신분이 아니어도 역시 가난하게 지냄)으로 평생을 궁하게 지내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날에는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거니와 지금의 나는 넓고 넓은 지구상에 한 치 땅, 한 칸 집도 가진 것이 없다.위의 내용과 같이 민국 8년(1926년) 백범 김구 선생은 국무령이 되었다. 국무령은 임시정부의 최고 지도자, 수반(首班)을 의미한다. 국무령은 김구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임시정부의 수령이다.이규홍 선생은 김구 선생이 조직한 내각 5인 중의 한 명이다. 김구 선생은 독재적인 국무령제를 고쳐 평등인 위원제로 개정했다고 밝혔다.● 백범일지 하권에 나오는 이규홍 독립투사 임시정부에는 사람도 돈도 들어오지 아니하여 대통령 이승만이 물러나고 박은식이 대신 대통령이 되었으나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쳐 놓았을 뿐으로 나가고, 제 1대 국무령으로 뽑힌 이상룡은 서간도로부터 상해로 취임하러 왔으나, 각원을 고르다가 지원자가 없어 도로 서간도로 물러가고, 다음에 홍면희(나중에 홍진)가 선거되어 진강으로부터 상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조직에 실패하였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한참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져서 의정원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하루는 의정원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국무령이 되기를 권하였으나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사양하였다. 첫째 이유는 나는 해주 서촌의 일개 김 존위(경기도 지방의 영좌에 상당한 것)의 아들이니 우리 정부가 아무리 아직 초창 시대의 추형(雛形:축소판 형태)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나같이 미천한 사람이 일국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에 큰 관계가 있다는 것이요, 둘째로 말하면 이상룡, 홍면희 두 사람도 사람을 못 얻어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거늘 나 같은 사람에게 더욱 응할 인물이 없을 것이란 것이었다. 그런즉 이씨 말이 첫째는 이유가 안 되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고, 둘째로 말하면 나만 나서면 따라 나설 사람이 있다고 강권하므로 나는 승낙하였다. 이에 의정원의 정식 절차를 밟아서 내가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나는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심상도 보충 설명 : 윤기섭 내무장, 오영선 군무장, 김갑 재무장, 김철 법무장, 이규홍 외무장-외무부장관) 등으로 내각을 조직하고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번번이 곤란할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래서 나는 국무위원의 주석이 될 뿐이요, 모든 국무위원은 권리에나 책임에나 평등이었다. 그리고 주석은 위원들이 번차례로 할 수 있으므로 매우 편리하여 종래의 모든 분리를 일소할 수가 있었다.이렇게 하여 정부는 자리가 잡혔으나 경제 곤란으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 길이 망연하였다. 정부의 집세가 30원, 심부름꾼 월급이 20원 미만이었으나, 이것도 낼 힘이 없어서 집주인에게 여러 번 송사를 겪었다.김구 선생이 임명한 5명의 국무위원에 이규홍 선생이 있다. 국무위원은 동등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최고 책임자인 주석은 국무위원이 돌아가며 맡기로 하였다.● 백범일지에 나타난 독립운동가 감소 이유한창 적에는 1000여 명이나 되던 독립운동자가 이제는 수십 명도 못 되는 형편이었다.왜 이렇게 독립운동자가 줄었는가. 첫째로는 임시정부의 군무차장 김희선, 독립신문 사장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같은 무리는 왜에게 항복하고 본국으로 들어가고, 둘째로는 국내 각 도, 군, 면에 조직하였던 연통제가 발각되어 많은 동지가 왜에게 잡혀갔고, 셋째로는 생활난으로 하여 각각 흩어져 밥벌이를 하게 된 때문이었다.이러한 상태에 있어서 임시정부의 할 일이 무엇인가? 첫째로 돈이 있어야 할 터인데 돈이 어디서 나오나?본국과 만주와는 이미 연락이 끊겼으니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에게 임시정부의 곤란한 사정을 말하여 그 지지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내 편지 정책이었다. 나는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의 열렬한 애국심을 믿었다. 그것은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의 훈도를 받은 까닭이었다.위의 내용을 통해 짐작해보면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운동가 대폭 감소하였고 독립자금도 끊겨 매우 곤궁하게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규홍 독립투사는 어려운 와중에도 김구 선생을 도와서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어가고 있음을 수 있다.● 이규홍 독립투사의 손자 이경우 씨의 고군분투이경우 씨는 할아버지의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다. 필자에게 연락하여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사연을 들어보니 너무도 안타깝고 딱하여 발벗고 나서서 도와드리고 있다.연구자로서 최선을 다하여 각종 자료를 찾아내고 양산의 정치인들에게 찾아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하였다. 서형수 국회의원, 표병호 경남도의원이 협조를 하고 있다.이경우 씨는 할아버지가 독립 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해 아주 어려운 생활을 해왔다. 옛날부터 독립운동을 하면 집안 3대가 망한다고 하였는데, 이경우 씨 집안도 마찬가지다. 이경우 씨는 월남전 참전용사로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국가에 충성을 하였다. 파병 때 고엽제를 만진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다.양산시립박물관 전시회 때 양산 방문한 이경우 씨 통도사 구하스님이 독립자금 제공한 영수증 사본을 들고 이경우 씨 형님은 할아버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분서주하다가 결혼도 못하고 병고에 시달리다가 일찍 돌아가셨다. 집안 재산도 친척들이 몰래 빼돌리거나 사정을 아는 지인들이 명의를 변경하여 차지하는 바람에 후손들은 더욱 곤궁한 삶을 살아왔다. 이경우 씨의 부친도 사재를 털어 마을주민을 위하여 상북면 대석리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현재는 한국농어촌공사 소유로 넘어갔다.이규홍 독립투사 집안은 만석꾼 부자는 아니었지만 몇 천석지기 부자였다. 이경우 씨 외갓집도 양산의 알아주는 부자였다. 이런 재산을 팔아서 상해 임시정부에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제공하였다. 이규홍 독립투사는 상해임시정부에서 16년 동안 헌신하며 재산 대부분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다가 치명적인 법정 전염병인 퍠결핵에 감염되어 귀국하였다. 일본경찰의 감시하에 자택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요양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5년 후 타계하였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는 이유상해에서 폐결핵 감염 후 귀국하여 가택연금 당했다. 귀국후가촌토지주식회사사장,환영자동차합자회사무한책임사원근무기록이남아있어친일활동으로의심받아독립유공자로인정받지못하고있다.이규홍 선생의 아들 이종문 씨가 처남 지영대 씨와 사업을 하면서 부친 명의의 재산으로 출자하여 형식상 이름만 올라간 것이다. 사업하여 번 돈, 집안의 논밭을 판 돈 등이 지속적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 보내졌다. ● 친일 행적 여부이규홍 선생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명단에 올라가지 않았다. 손자 이경우 씨가 동아일보 도쿄 지사장에게 의뢰하여 일본 외무성 자료를 조사하였다. 요시찰 인물로만 기재되어 있었고 변절 기록은 없었다고 한다.● 통도사 주지 현문 스님 증언서현문 스님이 손자 이경우 씨에게 써준 증언서를 보면 이규홍 선생이 돌아가신 후 장례식에서 제문을 지어 조문한 지인들이 일본 경찰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시달렸다는 내용이 나온다.만약 이규홍 선생이 친일행적이 있었다면 일본경찰이 이런 탄압을 할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규홍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16년 동안 요직을 맡아 독립운동을 하며 재산 대부분읊 바치고 끝내 목숨까지 바쳤다. 위대한 독립투사를 뚜렷한 증거도 없이 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미루고 후손들에게 증거자료를 제출하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표병호 교육위원장의 노력표병호 경남도의원이자 교육위원회 위원장은 필자의 설명을 듣고 적극 도와줄 것을 약속하였다. 양산의 중요 행사에서 만날 때 마다 필자는 표병호 위원장에게 부탁을 거듭하였다.표병호 경남도의회 교육위원장 표병호 위원장과 필자 김판석 전문위원, 표병호 위원장 표병호 교육위원회 위원장은 경남도의회 김판석 전문위원을 소개해주어 여러차례 전화로 소통을 하며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마침 현충일을 하루 앞둔 6월 5일 오후에 아직까지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이규홍 선생이 떠올라 표병호 위원장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경남도의회가 개회 중이라 창원에 있다고 하여 즉각 창원으로 달려갔다.마침 표병호 교육위원장실에 같은 교육위원회 소속인 장규석 도의원, 원성일 도의원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표병호 위원장은 동료 의원들에게 필자를 소개해주었다. 이규홍 선생의 억울한 사연을 간략히 소개하고 도와줄 것을 부탁드렸다.두 분은 진주시에도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한 분이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독립투사를 연구하는 분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표병호 위원장은 경남도 교육위원회 차원에서 보훈처에 조속한 조취를 취할 것을 요청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김판석 전문위원을 위원장실로 불러서 소개해주었다. 그동안 전화로만 얘기를 나누다가 처음 대면하니 반가웠다. 표병호 위원장은 여러가지 해결방안을 설명해주어 그동안 막막하고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졌다. 표병호 위원장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옆에서 돕는 필자의 심정이 이럴진대 손자 이경우 씨는 수십년간 관료적으로 대하는 보훈처 직원들과 증언서를 주고받으며 희망없는 핑퐁게임을 할 때 느꼈을 절망감이 다소나마 이해되었다.이경우 선생이 이제는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고 꽃길만 걸었으면 좋겠다. 현충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경제강국으로 발전하는데 밑거름이 된 독립투사들의 헌신과 희생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심상도 문화 박사의 제30대 통도…

원행 총무원장은 이날 "종단의 여러 불사에 많은 협조를 부탁드리며, 통도사 대중들과 화합해 본사를 잘 이끌어주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심상도 문화 박사의 제30대 통도사 주지 현문스님 취임에 따른 Storytelling

현문스님 사진=(재)영축문화재단홈페이지 대한불교조계종은 5월 29일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 주지로 자장암 감원, (재)영축문화재단 이사장인 현문스님이 임명됐다고 밝혔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29일 오전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4층 접견실에서 현문 스님에게 통도사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날 아침 영축총림 방장 성파 스님은 신임주지 추천서를 조계종 총무부에 제출, 종무회의를 통과한 뒤 주지 임명장 수여식이 진행됐다.현문 스님 맨 왼쪽, 서운암 전국문학인 꽃축제 참석 원행 총무원장은 이날 "종단의 여러 불사에 많은 협조를 부탁드리며, 통도사 대중들과 화합해 본사를 잘 이끌어주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현문스님도 "종단 불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현문 스님은 두 번째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소회를 밝혔다. 현문 스님은 “최근 통도사는 방장스님 주도 아래 염불원도 개원하는 등 불지종가이자 총림으로서 위상을 제대로 갖췄다”며 “방장스님의 뜻을 잘 받들어 미력하나마 총림과 불교발전에 힘을 다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자장암 현문 스님 거처 정면 현판, 향경다실, 차를 마시며 향과 경전을 함께 하는 곳 측면 현판 현문스님은 1966년 1월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0년 4월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그간 영축총림선원, 봉암사 태고선원, 덕숭총림선원 등지에서 안거 수행을 했다. 2006년 9월 총무원 총무부장, 흥천사 주지 등을 지냈다.백팔계단 백팔계단 옆의 수국 백팔계단은 실제 계단이 108개가 넘는다. 끝나는 지점을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외부 주차장에 주차하고 잠시 걸어와 백팔계단을 오르며 백팔번뇌를 잠깐동안 잊으면 좋다. 힐링이 저절로 되는 아름다운 곡선의 길이다. 현문 스님 통도사 주지 권한대행 2001년 7월 13일 양산 통도사 주지권한 대행으로 현문스님이 임명되어 주지를 역임한 바 있다.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이날 통도사 주지권한 대행으로 임명된 현문스님은 월하 전 종정의 상좌로 통도사 자장암 감원을 지냈다.통도사는 전 주지 신허 스님이 직무대행으로 취임한지 1년이 넘도록 총무원으로부터 임명을 받지 못한데 이어 6월말께부터 주지선출을 둘러싸고 영축총림의 양대 문중인 월하 경봉 문중이 의견을 달리는 바람에 진통을 겪어 왔다. 통도사 주지는 암묵적으로 경봉 스님 제자가 하면 다음은 월하 스님 제자가 맡아서 교대로 하는 것이 관례였다.현문스님은 “종교내분으로 실추된 영축총림의 위상과 월하 큰 스님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총무원과 협의, 현재 진행중인 각종 소송의 취하를 유도하고 큰 스님의 방장직 회복을 반드시 이뤄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취현루, 다실로 영축산을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마애여래불상 이후에도 통도사 문중의 의견 대립으로 통도사가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현문스님이 구원투수로 등장하여 주지직무대행을 5회 역임하였다.현문스님은 통도사 초대 방장을 역임한 전 조계종 종정월하스님의 유지를 받드는 사업을 하는 (재)영축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아왔다. 통도사에 동진출가(童眞出家 : 어린 나이에 출가함)하여 노전, 원주, 총무, 암주, 주지까지 다 거쳤다. 요직을 다 거쳐서 일명 '통도사의 황태자’로 불리기도 했다. 다른 별명으로 명품 스님이라 불리기도 한다. 터가 좁은 자장암을 잘 가꾸어 아기자기한 불국토를 만든 걸 보면 이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현문 스님은 통도사 아랫마을에서 열세 살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와 동진출가했다. 부친과 친한 극락암 경봉 스님이 중을 만들자고 했다. 아이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구하 스님을 먼저 뵈었다. 절을 받고 나자 안경을 코에 건 큰스님이 “발바닥 문대봐라” 하면서 발을 내미셨다. 아이는 노스님이 싫지 않았고 그렇게 했다. 잠시 후 아버지는 스님께 인사하고 혼자 돌아갔다.통도사 승가대학 대교과를 졸업했다. 스님은 통도사 규정국장, 총무국장, 표충사 주지, 통도사 자장암 감원, 조계종 중앙선관위 위원, 불교TV 이사 등을 역임했다.필자 심상도의 양산신문 2013년 10월 23일자 칼럼자장암은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하기 전에 움막을 짓고 기도하던 곳이다. 자장암의 관음전은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 건립한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 거북이 머리, 등, 꼬리처럼 생긴 바위를 깨지 않고 그 위에 건립하여 자연을 아끼는 조상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바위를 살려서 관음전 건립 관음전 안에 있는 바위 관음전 뒤에 있는 거북 머리 자장율사가 바위에 구멍을 뚫어 살도록 한 금와보살의 전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어 행운을 시험하는 참배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자장암은 자장율사(慈藏律師)가 통도사를 짓기 이전에 이곳의 석벽 아래에서 움막을 짓고 수도하였으며 나중에 통도사를 창건하였다. 옛 이름은 자장방이라 하여 통도사 경내 칠방의 하나였으며, 자장율사의 사후 제자들이 수양하던 암자이다. 금와공 금와보살이 있는 금와공 법당 뒤쪽 암벽에는 석간수(石間水)가 나오는데 자장율사가 손가락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어 금개구리를 살게 하였다는 소위 금와공(金蛙孔)이 있어 유명하다.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하권(下卷) '승유어급변화금와(僧遺魚及變化金蛙)'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축서산 통도사의 자장암 곁의 커다란 암벽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는데 그 속에 작은 개구리가 있다. 몸은 청색이고 입은 금색인데 어떤 때는 벌이 되기도 하여 그 변화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다. 여름철에 바위가 과열되면 뜨겁기가 솥과 같으나 그 위를 자유로이 뛰어다닌다. 사승(寺僧)이 이를 일러 금개구리라 하더라. 그런데 이 금개구리는 도무지 산문(山門) 밖을 나가지 아니한다고 하므로 한때 어떤 관리가 그 말을 믿지 아니하고 그 개구리를 잡아 함 속에 넣어 단단히 닫고서 손으로 움켜쥐고 돌아가다가 도중에 열어보니 없어졌다. 세간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神通)으로 자라게 한 것이라 말한다." 필자 심상도는 통도사와 여러 부속암자를 수시로 방문하고 있다. 특히 자장암을 찾으면 마음이 편안햐짐을 느낄 수 있다. 필자는 금와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자주 자장암을 방문한 끝에 소원을 이뤘다.금와보살을 친견한 불자도 여러 명 만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몇 년 전 초파일 때 아들과 같이 온 할머니 한 분이 금와보살을 친견하는 극적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이 남성은 연로한 노모를 모시고 왔는데 키도 작고 허리도 굽어 금와공을 들여다 보기에는 키가 약간 작았다. 미리 알고 작은 보조 의자 받침대를 가져왔다. 할머니가 의자에 올라 금와공을 들여다보는 순간 금와보살이 구멍에서 나와 할머니 손에 앉았다. 기뻐서 어쩔줄 모르는 할머니에게 도로 금와공에 넣어드리러고 필자가 말씀 드렸다.금와보살은 불심이 돈독해야만 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필자도 수없이 자장암을 찾은 끝에 금와보살을 친견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아주머니는 금와보살 친견 후 교통사고가 났는데, 별로 다치지 않았다고 얘기했다.기억에 남는 사람으로 서울에서 승합차를 타고 온 아주머니가 있었다. 승합차에 식수, 이불, 살림살이를 싣고다녔다. 이 분은 금와보살 친견 후 휴대폰으로 찍어 명함크기의 사진 수백장을 인화하여 코팅 후 지인들에게 보시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필자도 한 장 받아 지갑에 넣고다녔다. 금와보살을 찬견하기 위해 서울, 수도권, 전국 각지에서 방문객이 몰려든다. 자장암은 연대는 미상이나 회봉(檜峰)이 중건하였고, 1870년(고종 7)에 한 차례의 중수를 거쳐 1963년에 용복(龍福)이 중건하였으며, 1987년부터 1993년까지 현문화상이 감원실, 금와당, 취현루 등을 건립하였다. 자장암은 국내 사찰 중 전망이 좋기로 소문이 났는데, 프랑스 르몽드지 사장이 자장암의 다실에서 바라보는 경치에 최고의 찬사를 보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자장암에서 영축산 정상을 바라보는 풍광이 매우 아름다우며, 정면으로 보이는 영축산 줄기의 능선도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져 있다.관음전은 거북바위라는 암반 위에 지었는데 암반을 깨지 않고 그대로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법당 바닥에 바위가 살아있다. 거북바위 위에 그대로 전각을 올려서 자연미를 살린 우리 조상들의 자연보호 정신과 건축기술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관음전 앞에는 거북의 꼬리 부분, 법당 안에는 거북의 몸통 부분 일부, 관음전 뒤에는 거북의 머리 부분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몇 년 전에 강릉의 한 식당에 식사를 하러갔을 때 방의 한 가운데에 돌출된 커다란 바위가 있어 주인의 자연보호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바위를 살려서 식당을 지어 입소문이 나는 바람에 영업이 더 잘 된다고 한다.자장암 중창 불사1982년부터 암주로 주석하면서 금와당, 취현루, 감원실 3동을 중건했는데, 금와보살로 유명한 자장암의 감원(監院)을 맡아왔다. 현문 스님은 불사를 하더라도 옛 건축과 조화가 되도록 경주 양동마을과 안동 하회마을도 가보고 전통건축을 참고하여 지었다고 한다.요사채, 자장암 마당 밑에 자리잡고 있어 자연과 조화를 이뤄 있는듯 없는듯 절묘하게 자리잡고 있다. 여러 개의 방이 있고, 안엔 수세식 화장실도 있어 스님들이 수행하기에 알맞다.현문 스님의 자장암 중창불사를 보면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 탁월한 공간 감각, 전문가 못지 않은 건축 안목, 통도사 창건주 자장율사가 기도한 전통 도량을 수호하기 위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관음전 현문 스님은 2층의 다실인 취현루를 건립하였다. 2017년까지 중창불사에 나서 한옥 요사채, 백팔계단을 정비하였다. 2019년 5월에는 한옥 화장실을 완공하였다.최근 완공된 한옥 화장실 통도사 모랭이길, 배내골 장터길로 연결되는 길목에 화장실을 신축하여 답사객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구하 스님 시봉현문 스님은 출가 후 93세 구하 큰스님(1872∼1965)을 1년 3개월간 시봉했다. 구하 스님은 노환으로 몸이 불편했지만 현문 스님은 최선을 다하며 힘든 내색없이 모셨다. 구하 스님은 하루 종일 시봉하고 곤히 자는 현문 스님을 새벽예불 시간되면 들어와서 깨웠다.구하 스님은 개화기와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한국불교의 근대화를 위한 산파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일제시대 명진학교를 설립해 인재룰 양성하고, 스님들을 일본에 유학보내고, 40세의 나이에 통도사 주지로 취임한 후 14년에 걸쳐 연임하며 개혁을 선도했다. 또한 30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에 선출돼 당시 불교계를 이끌었다.자장동천, 바위 위 다람쥐 자장동천의 바위에 새겨진 세이석(洗耳淅)이라는 글자는 자장율사의 친필로 전해 온다. 당시 정계는 진골 출신의 외아들이며 지혜를 겸비한 그를 산속에 가만 놔두지 않았다.선덕여왕이 그를 재상에 앉히려고 누차 불렀으나 응하지 않자 칙령을 내려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 하였지만 자장은 “하루를 살다 죽을지언정, 파계를 하여 백년을 살지 않겠다."고 답하였다. 일언지하에 거절한 후 자장동천에 흐르는 물로 귀를 깨끗이 씻고 세이석이라 각서하였다 한다. 일제강점기시대 한국불교를 대표했기에 표면적으로 친일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을 칭송하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1920년대 중후반 「조선불교총보」등에 친일 성향의 글을 발표해 불자들의 친일에 앞장서기도 했다.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파 명단에 올렸다. 구하 스님이 겉으로는 친일을 가장하여 일본 경찰의 감시망에서 일단 벗어났다. 그러나 은밀하게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자금을 제공하고 지원을 했다. 현문 스님이 그 증거를 공개하여 은사를 친일파 명단에서 당당하게 뺄 수 있었다.구하스님의 독립자금 지원 영수증 공개한 현문 스님2005년 현문스님은 일제시대 당시 통도사 주지를 지냈던 김구하 스님이 비밀리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음을 증명하는 자료를 발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공개한 자료들은 독립자금 관련 영 수증 5장, 안창호 선생 등 10명에게 자금을 지원했음을 나타내는 ‘사변시(3·1운동을 지칭) 출금증’ 등으로 구성돼 있다.독립자금 서류 독립자금 제공 영수증 구하 스님은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상해임시정부에 5천 환을 보내고 여기저기 모두 1만 3천 환의 군자금도 비밀리에 대주었다. 안창호라는 이름이 쓰인 자금 내역은 현문스님이 주지로 재직했던 2005년 세상에 공개됐다.5천 원 안창호 상해임정 국무총리할 때2천 원 백최승(초월) 경성서 혁신공보사장 할 때3천 원 이종욱 군자금 수집1천 원 정인섭 독립운동 직접 계산 온천5백 원 오이산 스님 상해 있을 때 범어사와 공동보조5백 원 장재륜 독립운동 직접 전달 동래5백 원 신정흔 독립운동 직접 전달 통도3백 원 김포광 상해있을 때 노비로 급하게 경성1백 원 정탁 독립운동 참여시 계산 통도1백 원 양만우 동시 관광 계산'구하 스님 독립운동 지원’ 영수증 자료였다.상해임정 요인 이규홍 선생 독립유공자 서훈상해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 외무총장,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국무원, 의정원 경상도 의원, 청년단 출펀부장 등 요직을 역임한 이규홍 독립투사가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현문 스님은 이규홍 선생의 손자인 이경우 씨를 위해 증언서를 두 차례에 걸쳐 써주었다. 현문 스님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양산시립박물관 특별기획전 "1919 양산으로부터의 울림" 전시회 이규홍 독립투사 코너 상해 임시정부 거물 백농 이규홍 선생 이규홍 선생 관련 일제강점기 신문 기사 현문 스님이 쓴 이규홍 선생을 위한 증언서, 현문 스님이 이번에 두 번째로 쓴 증언서가 마력을 발휘하여 이규홍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으면 좋겠다. 보훈처의 무성의한 의례적인 답변서 필자인 심상도는 이경우 씨를 위해 증언서를 써드렸다. 연구를 하고,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여 A4용지 11페이지에 걸친 상세한 자료의 증언서를 작성하였다. 이경우 씨는 할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매년 보훈처에 자료를 제출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였다. 그 이유는 사업을 했다는 것이 친일활동이라는 단순 논리다. 이규홍 선생의 친일 활동 흔적은 알본 기록애도 한국기록에도 없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명단에도 오르지 않았다.필자는 이경우 씨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도와드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경우 씨 사례를 통해 보면 독립운동을 하면 집안 3대가 망한다는 전형적인 케이스다.이경우 씨 형님은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애쓰다가 이미 고인이 되었다. 이경우 씨는 월남전 참전용사로 역시 애국자다. 고엽제 후유증으로 요즘 고생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해 평생을 어렵게 살아왔다. 양산시민들이 적극 나서서 도와야 한다.양산시립박물관 전시장 ● 월하 스님 시봉현문 스님이 시봉한 또 한 분은 월하 큰스님이다. 거동할 수 있는 순간까지 손수 빨래를 하셨던 월하 스님은 구하 스님의 상좌답게 검소함 그 자체였다고 한다. 월하 스님의 열반송은 “가고 머뭄을 논하지 마라. 곳곳이 나의 집이니라.” 월하 스님의 다비식 때 불을 놓기 전 “불 들어갑니다” 소리친 것은 현문스님이었다.● 현문 스님의 법문2005년 현문 스님이 통도사에서 ‘진정한 열반의 의미’를 주제로 법문한 내용을 소개한다.이번 달은 부처님의 출가일(음력 2월 8일)과 열반일(음력 2월 15일)이 함께 들어 있는 달인만큼, 부처님 열반일을 맞이하여 ‘진정한 열반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부처님이 지향한 마지막 경지는 해탈하여 열반(니르바나)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열반은 대체 어떤 경지일까? 그 모습을 말로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선은 ‘평온한 경지’라고 정의를 해 봅시다. 우리들의 생활은 평온과는 정반대 되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운 요즈음 생활고는 물론이요, 우리 인간은 ‘사고팔고(四苦八苦)’라는 생로병사의 근본 괴로움을 짊어진 존재입니다. 이런 고달픔에서 벗어나는 것, 해방되는 것이 바로 해탈이며, 열반인 것입니다."이 세상에서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식별하여 마음에 드는 사물에 대한 욕망이나 탐욕을 제거하는 것이 불멸의 열반의 경지이다.”● (재)영축문화재단2011.11.28 재단법인 "영축문화재단" 설립허가(경상남도 NO 제 2011-24호초대 임원 구성이사장(성파스님)이사(현문스님, 산옹스님, 상우스님, 법진스님, 오심스님)감사(병천스님, 도광록 회계사)사무국장(홍성표-울산시립노인요양원장)2012.11.27제2대 이사장 현문스님 취임2012.12.23신규이사 취임(정우스님, 혜남스님)2015.1.28신규이사 취임(동주스님)2015.2.25정관상 법인 명칭 변경 "대한불교조계종 재단법인 영축문화재단"2016.5.15신규이사 취임(최순자)2017.12.28신규이사 취임(동진스님)재단법인영축문화재단(이사장현문스님)이제7회영축문화대상수상후보자를모집한다.자장전 자장율사 영정 시상부문은부처님자비사상과불살생정신으로화합과상생의사회를만드는데실천하는사람에게수여하는봉사실천상,전통문화계승발굴로정신문화복원에기여한사람에게수여하는학술문화상,돈독한신심으로수행정진과홍포에매진함으로서정법수호와불교인재양성,가람수호에기여한사람에게수여하는포교원력상등3분야다.자장암 낙락장송, 금강송은 자장암의 명품 중의 하나이다. 각시상후보기준은해당분야수공기간이10년이상이며동종의공적으로정부관련포상을받은경우는5년이상경과되어야신청가능하다.국적,연령,성별,직업,학력,종교에구분이없으며,스님일경우조계종소속이어야한다.소속기관대표자나조계종재적사찰주지혹은기관장이추천할수있다. 초파일 불자들에게 연꽃차 대접 모집기간은오는10월 31일까지며11월중서류심사를거쳐.12월 1일재단및불교신문등에발표한다.시상은월하대종사추모다례재가열리는12월7일거행한다.2018년 3월 6일 영축문화재단(이사장현문스님)이어려운이웃들을위한자비나눔기금으로2천만 원을쾌척했다.조계종단에서모금운동열기가뜨거운‘푸에르토리코허리케인피해성금’으로도1천만 원을후원했다.영축문화재단이사장현문스님은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4층접견실에서조계종총무원장설정스님을예방하고재단법인아름다운동행에각각기금을전달했다.

양산숲길보전회 회원 북한이탈주민 …

양산숲길보전회 회원 북한이탈주민 자녀장학금 전달

5월 22일 오후 4시 양산경찰서에서 양산숲길보전회 회원들이 150만의 장학금을 마련하여 북한이탈주민들의 자녀 5명에게 1인당 30만 원씩 전달하였다. 직장 관계로 장학생 학부형 대표 1명이 참석하였다. 양산경찰서 보안계의 추천을 받아 모범적인 초중고 학생 5명을 장학생으로 선발하였다. 장학생은 박0원 고교생, 류0선 중학생, 문0채 초등생, 송0영 초등생, 김0석 초등생 5명이다. 양산경찰서장실에서 이정동 경찰서장, 심상도 양산숲길보전회 회장이 함께 전달하였다. 양산경찰서에서 이정동 경찰서장, 김병주 정보 보안과장, 구현진 보안계장, 이선희 경사가 참석하였다. 양산숲길보전회에서는 심상도 회장, 김상근 부회장, 서광판 감사, 김희숙 사무국장, 강동환 홍보이사가 참석하였다.이정동 경찰서장은 대표로 참석한 학부형에게 어디서 왔으며, 탈북은 어떻게 했는지 질문을 하였다. 앞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열심히 생활하라고 격려의 말씀과 덕담을 했다. 심상도 회장은 양산숲길보전회의 장학금 전달 경위, 북한이탈주민 초청하여 양산숲길보전회 회원들과 함께 걷기 행사를 하는 취지를 설명하였다. 심상도 회장은 자유 민주 국가인 대한민국에 와서 힘든 일이 많겠지만 노력하여 성공하기를 바라고, 향후 지속적으로 돕겠다는 약속을 했다.양산숲길보전회에서는 5월 26일 상북면 내석마을 구불사에서 출발하는 장터길 걷기 북한이탈주민 초청행사를 실시하며 소정의 선물을 증정하고, 점심식사를 대접할 예정이다. 양산숲길보전회에서는 매월 숲길 걷기 행사를 통해 등산로 쓰레기 수거, 산불예방 캠페인,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