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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임진왜란 …

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임진왜란 공신 이구 선생

1. 의병으로 활동한 영천 이씨 이구 선생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양산시 물금읍 가촌로 181에 임란공신 이구 선생을 모시는 세덕사가 있다. 영천 이씨 이구(李鳩) 선생은 고려 말 절의자 남곡(南谷) 이석지(李釋之)의 후손이다. 남곡공파(南谷公派)의 지파인 서파공파(西坡公派)의 후손이다. 이구의 본관은 영천, 시조인 고려 평장사 이문한 공의 후손으로 중시조인 고려시대 영양군(永陽君) 문정(文貞) 대영(大榮) 공의 14세손이다. 문헌상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구 선생의 공적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선조 임금 초반 1570년대에 출생하여 인조 후반 1640년대에 타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묘소 안내판에 나와 있다. 이구 선생은 임진왜란 때 양산에서 이수생(李秀生), 최흥국(崔興國) 등과 창의하여 의병 활동을 하다가, 왜적의 포로가 되어 송담(松潭) 백수회(白受繪, 1574~1642) 선생과 함께 일본으로 피랍되었다. 3년간의 포로 생활 동안 끝내 적에게 굴복하지 않아 왜적이 그 절의에 감복했다고 한다. 이구는 피랍된 지 3년 뒤 귀국하여 정유재란 때 경상남도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 공로와 절의로 인해 선무원종공신 3등 훈련원 판관에 녹훈되는 한편, 포로 생활을 같이 한 백수회의 매제가 되었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등재하여 벼슬이 훈련원정(訓鍊院 正)에 이르렀다. 이구 선생은 2012년 9월 양산시 교동 춘추공원내 충렬사에 송담 백수회 선생 등 임란공신 28위와 함께 위패가 봉안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군수 조영규가 송상현 동래부사를 돕기 위해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하였기 때문에 양산에서는 체계적인 군의 동원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밀양부사 박진 지휘 하의 일부 지원군도 늦게 도착하여 양산은 쉽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양산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된 시기는 대략 4월 17일이었다. 양산이 함락당하고 양산읍성에 왜군이 가득찼지만 양산군민들은 왜적을 물치기 위하여 의병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양산의 이구(李鳩), 김영호(金永浩) 삼부자, 정호인(鄭好仁)・정호의(鄭好義) 형제, 안근(安瑾) 삼부자와 종제・종질, 최흥국(崔興國), 유정(柳汀)과 그 일문, 이수생(李秀生), 이몽란(李夢鸞), 방익(房翼), 윤옥(尹沃)과 윤발(尹潑) 형제 등이 의병으로 나서 왜군을 퇴치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2. 세덕사 이구 선생은 영천 이씨 김해・양산의 입향조로서 1987년에 건립한 세덕사에서 봉향하고 있다. 배위는 숙부인 부여 백씨로 송담 백수회 선생의 누이동생이다. 부인의 묘소는 당초 물금읍 가촌리 청룡등에 있었으나 물금 신도시 계획사업으로 1998년 이장 후 현재 남편의 묘소와 합봉하였다. 백수회 선생은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9년간 억류되었는데, 이구 선생은 3년간 억류되었다. 두 사람은 처남과 매제 사이로 절의의 표상이 되었다. 비록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으나 일본 관리에 굴하지 않고 끝내 애국 충절의 절개를 지켰으며 고향 양산으로 귀국하였다. 이구 선생을 모신 세덕사와 백수회 선생을 모신 송담서원은 가까운 거리에 있다. 영천 이씨 양산 문중은 1982년 말에 재실 건립을 발의하여, 1987년 4월 26일 물금읍에 사당인 세덕사(世德祠)와 재실인 경정재(景正齋)를 낙성하였다. 사당에는 이구의 위패와 선조 가운데 관직을 역임했던 산수정(山水亭) 이종양(李宗讓), 이제손(李悌孫 혹은 李俤孫), 이구수(李龜壽)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987년 처음 건물을 낙성했을 때는 대문에 편액이 없었고, 재실의 현액은 ‘경정재’라 했으며, 사우의 현액은 ‘세덕사’라 하였다. 1999년 후손 이유민(李裕民)이 주도하여 경정재 편액을 내리고, 그 자리에 조상의 훌륭한 가르침을 후손들이 강마(講磨)한다는 의미에서 ‘명교당(明敎堂)’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대문에도 ‘숭정문(崇正門)’으로 현액하였다. 이유민은 명교당과 숭정문이라는 명칭은 물론이고 「명교당기문(明敎堂記文)」을 직접 지었다. 「명교당기문」은 현재 목판에 새겨져 명교당 건물 안쪽에 걸려 있다. 2005년 발간된 『양산의 누정재지』에는 경정재에 대해 “원래 양산시 원동면 내포리에 세웠으나 1974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구의 11세손인 이종찬은 1987년 물금읍 가촌리에 처음 경정재를 건립하였고, 원동면 내포리에 있는 재실은 이구의 후손을 모신 재실로 경정재와는 별개라고 하였다. 영천 이씨 김해・양산 후손들이 1999년 이구 선생의 4대조 제단을 설치하여 매년 음력 10월 10일 후의 첫 일요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이번 필자의 답사에서 후손의 도움으로 사진 촬영을 할 수 있었는데 감사드리는 바이다. 3. 화왕산성 전투 이구 선생이 참전한 화왕산성 전투를 소개한다. 화왕산성은 가야시대에 축조되었고, 신라를 거쳐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방어하는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다. 평화 교섭이 결렬되자 다시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이어졌다. 울산, 부산포, 거제 등지에서 장기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안의를 거쳐 전주로 향하면서 남부지방 도처를 공격하고 약탈했다. 경상좌도 방어사로 있던 홍의장군 곽재우는 밀양, 영산, 창녕, 현풍 네 지역의 군사를 이끌고 창년의 화왕산성으로 들어가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에 보면 그 당사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정유년 가을 왜적이 두 번째 침범해왔다. 재우가 방어사로서 창녕의 화왕산성을 지키며 사수할 뜻을 보이니 온 군중이 적의 군사가 많음을 두려워하여 벌벌 떨었다. 적병이 이미 성에 다가왔는데도 재우는 조용히 웃으며 다만 굳게 지키라고 명령하여 말하기를 ‘제 놈들도 병법을 알 터이니 어찌 경솔하게 덤벼들 수 있겠는가’ 하더니 과연 하루 밤낮을 지나자 적이 싸우지 아니하고 강을 건너갔다. 적이 황석산성을 공격하고 남원을 함락해 각 진이 모두 무너지니 체찰사 이원익이 공에게 군사를 철수시킬 것을 명령했다. 공(곽재우)이 사람을 보내 보고하기를 ‘제(齊)나라의 72성 중 즉묵성만은 홀로 보전되었으며, 당나라의 군사가 100만 명이었으나 안시성은 능히 그들을 당해냈는데 어찌 모든 성이 파했더라도 홀로 지켜내지 못할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왜군이 경상우도를 침입했을 때 곽재우 홀로 화왕산성을 굳게 지키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곽재우는 화왕산성으로 군사를 모은 후 자신이 머무르던 객사에 섶을 쌓아 죽기를 결심하고 지킬 뜻을 보인다.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어 군사들이 두려워할까 미리 취한 조치였다. 곽재우는 인근 성이 모두 무너질 때도 동요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물러나는 적의 배후를 기습해 전과를 올린다. 왜적은 마침내 낙동강을 건너 서쪽으로 가서 안음의 황석산성을 공략하고 전라도 남원성을 함락했다. 체찰사 이원익이 곽재우에게 적은 병력으로는 성을 지킬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그에게 피하라고 명령했으나, 곽재우는 혼자 힘으로 왜적에 대항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표명했다. 그의 탁월한 용기와 판단력으로 승리를 거둔 전투가 화왕산성전투였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8일에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한 치계(馳啓)에 곽재우 장군에 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의령(宜寧)에 사는 고(故) 목사(牧使) 곽월(郭越)의 아들인 유생(儒生) 곽재우(郭再祐)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위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재우는 그 아비가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에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 철릭(帖裏)을 입고서, 지금 장사(將士)들을 거느리고 의령현의 경내 및 낙동강 가를 마구 누비면서 왜적을 보면 그 수를 불문하고 반드시 말을 달려 돌격하니, 화살에 맞는 적이 많아서 그를 보면 바로 퇴각하여 달아나 감히 대항하지 못합니다. 왜적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돌아와 ‘왜적들이 「이 지방에는 홍의 장군(紅衣將軍)이 있으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고 했다 합니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송담 백…

양산시 물금읍 가촌서2길 14-13에 가면 백수회 선생을 기리는 송담서원이 있다. 현종실록 18권, 현종 11년 윤2월 9일 병신 1번째 기사(1670년)에 보면 절개를 세운 고 찰방 백수회에게 증직하고 정문을 세워주라는 현종의 명이 나온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송담 백수회 선생의 우국충정과 가사문학

송담 백수회 선생의 우국충정과 가사문학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송담 백수회 선생의 본관은 양산(梁山), 자는 여빈(汝彬), 호는 송담(松潭), 원래 부여(扶餘)백씨다. 백수회는 1574년(선조 7년)에 양산군 동면 사배리에서 출생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당시 19세였으며, 재실에서 독서를 하다가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가서 억류되었다가 9년 만에 귀환했다. 일본에서의 포로 시절 충절과 기개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며 이때 지은 가사나 한시들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양산시 물금읍 가촌서2길 14-13에 가면 백수회 선생을 기리는 송담서원이 있다. 현종실록 18권, 현종 11년 윤2월 9일 병신 1번째 기사(1670년)에 보면 절개를 세운 고 찰방 백수회에게 증직하고 정문을 세워주라는 현종의 명이 나온다. 현종은 고(故) 찰방 백수회(白受繪)에게 증직하고 정문을 세워주라고 명하였다. 백수회는 양산(梁山) 사람으로 나이 19세에 임진왜란을 만나 적에게 함몰당하자 ‘차라리 이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개와 양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영위이씨귀 부작견양신(寧爲李氏鬼 不作犬羊臣)’이라는 10자(字)를 등에 써 붙였다. 왜적들이 항복시키려고 가마솥에 삶겠다고 협박하였으나 끝내 두려워하지 않자, 왜인이 의롭게 여겨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광해(光海) 때 길에서 흉소(凶疏)의 통문을 보고 통곡하면서 찢어버렸다. 인조(仁祖) 때에는 연신(筵臣)의 계달로 인해 자여 찰방(自如察訪)에 제수되었다가 죽었다. 이때에 와서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앞뒤로 절개를 세운 일을 진달하자 예조가 정문을 세워주고 포상할 것을 계청하여, 이 명이 있었다. 송담 백수회 선생은 12세에 부모를 잃고, 14세에 현감 석지의 딸 칠원 배씨와 결혼하였다. 경남 양산 물금 가촌의 산방에서 학행에 힘썼고, 어렸을 때부터 의지와 기상이 출중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였지만 고국에 대한 충절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왜인을 감탄케 하였다. 송담 선생은 1696년에 양산 충렬사에 조영규 군수와 함께 배향되었다가 문중에서 서원을 별도로 세워 그곳에 배향하였다. 숙종이 1717년(숙종 43) 사액(賜額)을 하사한 양산의 유일한 사액서원이다. 송담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5년에 가을에 사우를 중건(重建)하였다. 매년 3월 중정일에 유림이 향사(享祀)하고, 매년 음력 5월 20일에 후손이 제향(祭享)해오고 있다. 송담 선생은 조선으로 돌아온 후 10년이 넘도록 외부와 단절한 채, 어떠한 교류도 하지 않았다. 선생은 옳고 그름에 사리가 밝았다. 40세가 되던 해 광해군의 폐모사건이 일어나고, 광해군의 난정으로 민심이 흉흉함을 보고 여러 번 상소하여 맹렬히 비판하였다. 조정에서 날아온 폐모 통문(通文)을 받고는 이런 흉역지서(凶逆之書)를 받을 수 없다고, 찢어버렸다. 이로 인하여 점차 명사들과 교류의 길이 트이고 잠시 벼슬길에 나아가기도 하였는데, 1623년 인조반정 후 사옹원(司饔院)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을 지낸 후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을 지냈다. 1628년(인조 6년) 상소를 올린 것이 각하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후학에 힘쓰며 여생을 보내다가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백수회 선생이 타계하고 28년이 지난 후인 1670년(현종 11년)에 나라에서 통정대부 호조참의라는 벼슬을 추증하였다. 송담 백수회 선생의 시조와 가사문학 송담 백수회 선생이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억류 생활할 때 소회를 읊은 시조는 일편단심 충절의 정신을 표현라며 귀국을 소원하고 있다. 일본에 끌려가 억류되었던 9년 동안의 회한과 고국을 그리워하는 정을 비장한 어조로 읊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포로 생활의 고독한 심사를 시편이나 가사로 지었다. 해운대 여윈 날에 대마도 돌아들어 눈물 베서고/ 좌우를 돌아보니 창파만리를 이 어디라 할 게이고/ 두어라 천심조순(天心順助)하면 사반고국(使返故國) 하리라. 송담 선생의 ‘도대마도가’ 국문시가는 타국에서의 조국애가 서려 있는 몇 안 되는 우리 민족의 애국 시다. 어와 하도할샤(아! 많기도 하구나)/ 이내 분별 하도할샤(이내 생각이 많기도 하구나)/ 남모르는 근심을 못내 하여 설운지고(남모르는 근심이 말할 수 없이 많아 슬프구나)/ 언제나 하늘이 이 뜻을 알으셔 사반고국 하려니고(언제나 하늘이 뜻을 알아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려는가). 포로생활 중 일본 경도에서 안인수(安仁壽)라는 사람을 만나 지은 화답시조가 ‘화경도인안인수가(和京都人安仁壽歌)’이다. 안인수가 시가를 지어 위로하였다. 이 가사는 이에 화답하여 지은 작품으로, 형식은 4음보 1행을 기준으로 5행의 짧은 가사이다. 한등객창에 벗 없이 혼자 앉아/ 님 생각하면서 좌우를 돌아보니 북해인가 연옥인가 이 어디라 할 게이고/ 청풍과 명월을 벗삼은 몸이 위국단심을 못내 슬퍼하노라./ 해석은 다음과 같다. 객창의 차가운 등불아래 벗 없이 혼자 앉아/ 고국을 생각하며 사방을 둘러보니 북풍한설 몰아치는 북해인지, 불길에 휩싸인 연옥인지 여기가 어디라 할 것인가?/ 청풍명월을 벗 삼았지만 조국으로 돌아갈 마음만 있을 뿐 못내 슬프기만 하구나./ 재일본장가(在日本長歌)는 술회가사(述懷歌辭)로 송담 백수회 선생의 나라를 위한 단심(丹心)과 부모를 그리워하는 효심(孝心)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재일본장가’는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있을 때 지은 가사이다. 박인로(朴仁老)의 ‘태평사’, ‘선상탄’과 함께 전쟁 가사 중 하나이다. 나라를 위한 단심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나고 있다. 백수회의 작품은 박인로의 가사들과 함께 국문사학사에서 찬연히 빛나고 있다. 극도의 혼란과 참혹한 살육전이 벌어진 임진왜란 때는 한가하게 시조를 읊고 기록을 남길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 두 분의 작품은 가사 문학 공백기의 맥을 이어주고 있어 중요하다. 아아! 이 내 몸이 일일도 삼추로다./ 해동 이역을 이 어디라 할 것인가?/ 천심이 블조하니, 만리 표림이라./ 눈물을 씻고서 좌우를 돌아보니,/ 어음이 부동하고, 풍속이 상위로다./ 청의를 메었고, 성전에 절하며,/ 이제의 채미와 소무의 한절과/ 천상의 위국단심을 잊지 않은 이내 마음/ 조조 모모에 서산을 창망하니,/ 일촌 간장이 끊는 듯 잇는 듯/ 건곤을 부앙하고, 고사를 사량하니,/ 부모의 은덕과 형제의 우애를 못다 갚은 잔구로다./ 침상에 꿈꾸어 고국에 돌아 오니,/ 궁실이 여전하고, 송국이 황무로다./ 부모께 절하며, 이제를 덥썩 잡고,/ 중년 불견하며, 양생 상비/ 이르며 물으면서 체루를 상휘하고,/ 적적 전정을 못내 베푼 사이에/ 이요 난이하니, 원접 경회하도다. 송담 백수회 선생과 박인로 선생의 가사 작품의 가치 양산 출신 백수회 선생은 왜국에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고독한 마음을 시편이나 가사로 글을 지었다. 오늘날 한시 11수, 서적 1권, 편지 1통, 국문시가 4편이 전해오고 있다. 시가 4편은 국문학사에서 중요작품으로 거론되고 있다. 박인로, 김상헌의 작품과 비교해 보기로 한다. 박인로(朴仁老) 선생의 가사들과 함께 임진왜란기의 가사문학에 있어서 공백기의 맥을 이어주는 국문학사적 의의와 적지에서 불굴의 우국충정을 노래했다는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 때 수군 만호로 참전한 박인로(朴仁老) 선생이 광해군 3년(1611)년에 지은 누항사(陋巷詞)라는 가사는 구성이 서사, 본사, 결사의 3단으로 4음보의 연속체다. 서사는 길흉 화복을 하늘에 맡기고 안빈 일념으로 살려는 심정을 나타냈다. 본사 1은 충성심으로 백전 고투했던 왜란의 회상, 본사 2는 전란 후 돌아와 몸소 농사를 짓는 심정을 읊었다. 본사 1을 소개한다. 배고픔과 추위가 몸을 괴롭힌다 한들 일편단심을 잊을 것인가./ 의에 분발하여 내 몸을 잊어서 죽어서야 말겠노라고 마음 먹어/ 전대와 망태에(전쟁할 때 쓰는 무기들을) 한 줌 한 줌 모아 넣고/ 임진왜란(전란) 5년 동안에 죽고 말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주검을 밟고 피를 건너는 혈전을 몇백이나 치루었던가. 재일본장가(在日本長歌)는 단시조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도대마도가(到對馬島歌)는 단시조에서 벗어나고 있어 파격을 보여주고 있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백수회 선생, 수군 만호로 참전한 박인로 선생의 시조와 가사문학 작품에서 나오는 우국충정은 국민들이 본받아야 하겠다. 백수회 선생이 탄생한 사배리는 마을 전체가 수용되어 사송신도시로 조성 중인데 백수회 선생의 고향에 대한 표석과 안내문을 세울 필요가 있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신기산성…

양산시의 신기리산성은 사적 제97호로 양산시 신기동, 북정동, 호계동에 걸쳐 있다. 양산시 동북의 성황산(해발 330.6m) 정상부에 띠를 두르듯이 돌로 쌓은 퇴뫼식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황산은 양산군 동북 5리에 있다고 하였다. 방위와 거리로 보아 이곳으로 추정된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신기산성 성황사,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

1. 성황사는 지역정신의 구심체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학 박사 심 상 도 양산시의 신기리산성은 사적 제97호로 양산시 신기동, 북정동, 호계동에 걸쳐 있다. 양산시 동북의 성황산(해발 330.6m) 정상부에 띠를 두르듯이 돌로 쌓은 퇴뫼식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황산은 양산군 동북 5리에 있다고 하였다. 방위와 거리로 보아 이곳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성황산성의 성벽은 둘레 4,368척, 높이 6척으로 성안에 우물과 6개의 연못, 그리고 2개소의 군창(軍倉)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의 행정구역명을 붙인 신기리산성은 원래 성황산성으로 불리우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국조오례의서례』의 풍운뇌우산천성황단조와 토속신앙인 서낭당의 위패 위치에 큰 차이가 있음으로써 서낭신앙이 중국의 성황신앙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중국 송나라대의 성황신앙이 수용되자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지방 호족을 대표하는 인물이 성황신으로 일부 좌정하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된 336개의 성황사 가운데 밀양도호부에 손긍훈, 양산군에 김인훈, 의성현에 김홍술, 곡성현에 신숭겸, 순천도호부에 김총, 대흥군에 소정방 등이 성황사의 사신으로 각각 죄정하게 된 것이다. 신라 지역인 경상도 양주 지역의 장수(良州 將帥) 김인훈(金忍訓)이 위급함을 당해 궁예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왕건은 김인훈을 구하는 활약을 하게 되어 이 공로들로 알찬(閼粲)에 승진하였다. 신기(新基)마을 성황사(城隍祠) 역시 지산리의 국사당과 함께 양산 지역 주민의 정신을 결집하는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양산 지역에서는 지역 단위의 국사당이나 성황사가 있고, 각 마을 단위의 신당이 있어 이원 체계를 이루며, 양산만의 독특한 신앙 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신기동 신기마을 성황사는 양산 지역 민간신앙의 독특한 형태를 보여준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94호인 지산리부부상의 주인공인 김서현 부부 영정을 촬영한 사진을 모시고 있다. 박천수(朴天銖)가 쓴 「중수기」에 의하면, “사신(祠神)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본 산은 군 동쪽에 있는데, 군 동쪽의 5리라고 한 것은 성황이 아닌 듯하다. 만일 성황 같으면 반드시 신사의 기록문이 있을 터인데 증거하는 글이 아무것도 없고, 또 사신(祠神) 김인훈(金忍訓) 장군의 초상이라 하나 확실하지 않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역민들은 신기마을 뒤 신기산성 성황사 사당이 허물어져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사재를 기증하여 성황사를 중수하고 1년에 한 차례씩 제사를 올린다. 성황사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성황사는 양산시 신기동 신기마을 뒤편 성황산에 위치한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294호인 지산리부부상을 촬영한 사진을 모시고 있다. 성황사는 성황산 정상부 바로 아래에 있으며, 지역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산군 산천조에는 고려 태조 때 문하시중 김인훈이 죽어 성황사신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부터 나말여초에 양산의 대표적 호족이었던 김인훈이 성황사에 배향되었던 신임을 알 수 있다. 현재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 294호인 지산리부부상을 촬영한 사진을 모시고 있다. 1906년에 지역인인 배기윤이 사재를 내어 지붕을 수리했고, 1938년에 신기마을 출신으로 중추원의관을 지낸 박상률이 의연금을 모아 중수했으며, 박천수의 중수기명(重修記銘)이 전해지고 있다. 이후 1991년 지역주민들의 진정으로 허물어진 사당을 개수하였다. 성황사는 1년에 한 번씩 양산주민들이 제향을 지내면서 양산의 정신을 결집하는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다. 2.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의 러브 스토리 삼국통일을 완수한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배경에는 재미있는 러브 스토리가 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은 일찍이 서라벌의 길에서 만명부인을 보고 마음으로 기뻐하며 눈짓으로 꾀어, 중매도 거치지 않고 야합하였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김서현의 생애가 간략하게 나온다. 김서현이 하루는 길을 가다 진흥왕의 조카인 만명(萬明)을 만났는데, 서로가 마음에 들어 사랑하게 되었다. 서현과 만명공주의 사랑은 그 당시 가야인과 신라인의 결혼을 금하는 사회상으로 보면 위험천만한 사랑이었다. 마침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가게 되어 만명부인과 함께 떠나려 하니 숙흘종이 그때에야 비로소 딸이 김서현과 야합한 사실을 알고 두 사람의 결합을 반대하여 만명공주를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벼락이 별채 문간에 떨어져 지키던 사람이 놀라 혼란스러운 틈에 도망해 김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 만명부인(萬明夫人, 574년 ~ ?) 혹은 만명공주(萬明公主)는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어머니이다. 신라 진흥왕의 아우 숙흘종과 만호태후 김씨 사이의 딸이며, 김서현의 아내이다. 진평왕의 포매(씨 다른 누이)이기도 하다. 595년 만명부인이 신축일 밤에 한 어린이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곧바로 임신해 20개월여 만에 김유신을 낳았다. 만명부인은 김유신이 젊은 시절 날마다 엄한 훈계를 하였고, 한때 김유신이 기생 천관에게 혹하여 타락하였을 때 “나는 이미 늙어서 밤낮으로 네가 성장하여 공명을 세워 임금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기를 바라고 있는데 지금 네가 천한 아이들과 함께 음란한 집에서 놀아난단 말이냐?” 하고 울면서 책망하자 김유신은 크게 뉘우쳤고 이에 천관과의 관계를 끊게 하였다(『삼국사기』). 김서현 장군은 백제의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한 김무력 장군의 아들로 양주(오늘날 낙동강 동쪽인 창녕, 밀양, 양산 등을 포함한 광대한 행정구역) 대총관(양주의 군총사령관)으로 양산 신기산성에서 주둔하며 백제의 침략을 물리치고 국방을 튼튼히 했다.. 3. 양산 지산리부부상 기증 양산지산리부부상은 원래 마을의 당집에 모셔졌던 초상으로서 신앙물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무속인이었던 황기준이 이를 모시고 있다가 1984년 김해 김씨 가락종친회에 넘겼다. 황기준의 동생 황당룡에 의하면 1926년 경 자신의 집안이 마을수호신을 모시던 신기리 당집으로 이사와 살게 되었다. 점을 봐주던 어머니는 당집에 있는 이 초상화를 모시고 당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 당집은 당시 양산의 거부(巨富)였던 배영복이 지어준 것이다. 배영복은 당집을 지으면서 화가를 불러 부부상 2점을 그리게 하였다. 그림은 각각 성황사와 당집에 모시도록 했다고 한다. 이처럼 양산지산리부부상은 마을을 수호하는 당집의 부부신으로서 오랫동안 모셔지다가 1980년대 들어서 김해 김씨 가락종친회의 사당에 이전되어 봉안된 것이다. 양산시립박물관(관장 신용철)은 2016년 6월 28일에 경남 문화재자료 제294호 양산 지산리 부부상을 김해 김씨 양산종친회로부터 기탁받아 양산시민들에게 공개하였다. 양산 지산리 부부상은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의 부친으로 양주총관을 역임한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상 2점으로 조선말기에 민화풍으로 그린 희귀 작품이다. 지산리 부부상은 북정동 고분군의 부부총 근처에 있던 사당에 모셔져 있었는데, 1959년 태풍으로 훼손되자 인근 무속인이 수습해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고 그 후 1970년경부터 가락김씨 양산종친회 재실인 취서사에 보관해 왔다. 김해 김씨 종친회에서는 안전한 보존과 활용을 통해 삽량주의 기틀을 굳건히 한 김서현 장군 부부의 업적을 모든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시립박물관에 기탁하였다. 양산시립박물관은 5월 10일 취산재에서 이운식을 겸한 고유제를 마치고 작품의 보존상태를 점검한 후 6월 28일부터 상설전시실에서 공개했다. 신용철 박물관장은 양산 지산리 부부상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일한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의 초상화로 조선 후기 회화사, 복식사, 민속학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하였다. 신기산성을 답사할 때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을 모신 성황사를 참배하며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하겠다. 요즘도 무속인들은 성황사를 자주 방문하며 기도를 하고 있다.

양산팔경 임경대와 물금 철광산 연…

양산팔경 임경대와 물금 철광산 연계 개발

1. 양산팔경 임경대의 역사적 유래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임경대((臨鏡臺)는 일명 고운대(孤雲臺), 최공대(崔公臺)라고 하는데, 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이 황산강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하여 시를 한 수 남겼다. 임경대는 황산강(낙동강의 옛 이름) 서쪽 절벽 위에 있다. 절벽에는 최치원의 시가 새겨져 있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마모되어 없어지고, 시만 전해진다. 임경대는 오봉산 자락의 절경에 자리잡고 있어 낙동강과 화제리, 강 건너편 김해의 산, 들판 등의 수려한 산천을 조망할 수 있는 훌륭한 명소다. 물금에서 국도 1022호선을 따라 원동면 화제리 방면으로 가다 보면 물금과 원동의 경계 지점 왼편에 육각의 정자를 만날 수 있다. 이 정자는 양산시에서 관광객들의 쉼터로 만든 것이다. 임경대는 이곳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부산광역시가 2011년 8월 23일에 해운대구 우 1동 710-4 동백섬의 맨 꼭대기에 조성한 고운 최치원 유적지 공원 중앙에 최치원 선생의 시비를 건립하였다. 노산 이은상 시인이 우리말로 번역한 것을 병기하여 오석에 세로로 함께 새겨놓았다. 노산 이은상 선생의 시 번역이 가장 공감이 가고 무난하다. 烟巒簇簇水溶溶(연만족족수용용) 메뿌리 웅긋중긋 강물은 늠실늠실 鏡裏人家對碧峯(경리인가대벽봉) 집과 산 거울인 듯 서로 마주 비치는데 何處孤帆飽風去(하처고범포풍거) 돛단배 바람 태워 어디로 가버렸나 瞥然飛鳥杳無蹤(별연비조묘무종) 나는 새 어느결에 자취 없이 사라지듯. 임경대는 신라말(서기 875년경)에 고운 최치원 선생이 남주(南州)에 유상(遊賞)할 적에 이곳에 머물다 간 곳이다. 양산군지(梁山郡誌) 고적조(古蹟條)에 ‘임경대 일운(一云) 최공대(崔公臺) 재군서(在郡西) 황산강상(黃山江上) 層巖絶壁地上(층암절벽지상) 최고운(崔孤雲) 유상지처야(遊賞之處也) 금유지완연(今遺址宛然)’이라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양산군 고적조에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해동의 문장가이며, 대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겼던 분이라 이곳에 당도하니 저만치 강물이 맑고 깨끗하여 천하의 거울을 대함과 같다 라고 하여 임경대라 칭하고 다음 칠언절구의 한시를 남겼다. 화제팔경을 읊었으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임경대는 양산팔경 중의 하나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임경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양산시에서 향토 사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현재의 위치에다 새로운 정자를 건립하였다. 임경대에서 낙동강을 바라보면 강물이 마치 한반도 지형처럼 생겨서 관광객들의 감탄사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멋진 풍경이 교량 건설로 인하여 영향을 받게 되었다. 현재 국가지원지방도 60호선의 낙동강 횡단 교량이 원동면 화제리의 토교마을에서 김해 상동쪽으로 교각공사를 하고 있다. 교량이 완성되면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며 한반도 지도를 그려낸 모습이 상당부분 휘손될 위기에 처해 있다. 영산대 법학과 방준식 교수는 극단적으로 다리건설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양산시와 김해시를 연결하는 오랜 숙원사업을 중단하기는 곤란한 일이다. 임경대에서 바라보는 낙조가 아름다워 사진 동호인들이 즐겨 찾고 있다. 또한 낙동강에는 안개가 끼는 경우가 있어 별천지가 나타나기도 한다. 장마철이나 태풍이 불어 폭우가 내리면 낙동강은 옛날에 부르던 황산강으로 변하여 온통 황톳물이 도도하게 흘러내리는 장관을 볼 수도 있다. 2. 임경대 접근로의 개선 방안 임경대는 1022번 도로변에 주차장,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어 관광객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다. 주차장 입구에서 임경대까지는 220m 정도 되며, 주차장 끝에서 임경대 가는 길은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왼쪽 길은 120m, 오른쪽 길은 150m이다. 왼쪽 편으로 가는 길 아래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조선시대 양산군수를 지낸 이연상 선생의 묘소가 있고, 옛날 임경사라고 불리던 절터가 남아있다. 대나무도 울창하여 경치가 좋지만 길이 없어 걸어갈 수는 없다. 이곳을 연결하는 데크로드를 조성하고 스토리텔링 안내판을 설치하여 역사 안내 코스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임경대에서 용화사 방향으로 데크로드를 따라 800m 정도 가면 용화사가 나온다. 그러나 이 코스는 중간의 높은 곳에서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지만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번갈아 나타나는 힘든 코스로 노약자는 쉽게 갈 수 없는 게 단점이다. 누구나 용화사를 구경하고 난 후에 임경대로 원점회귀를 해야 하는데, 엄청나게 힘들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거의 이용을 하지 않는다. 힘들게 용화사까지 갈 필요 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임경대 주위를 일주할 수 있게 새로운 코스를 설정해야만 한다. 신설 코스는 임경대 입구 왼쪽 아래에 있는 이연상 양산군수 묘소 → 임경사 절터 → 대나무 숲 → 임경대로 연결하면 된다. 이 코스가 신설되면 아이를 동반한 가족 관광객, 노약자도 안심하고 산책할 수 있는 순환형 코스가 되어 인기를 끌 수 있을 것이다. 황산베랑길 자전거도로는 낙동강 위로 철구조물을 세우고 개설하였다. 자전거도로는 보행자도 통행이 가능하기 때문에 걸어가면서 경부선 철도 밑을 자세히 보면 황산잔도 옛길이 남아 있다. 임경대에서 물금레미콘 공장 근처, 경부선 철도 밑을 지나는 길을 신설하면 관광객이 편하게 답사할 수 있게 된다. 3. 경기도 광명동굴 개발 광명동굴은 일제 강점기부터 금과 은을 캐던 곳인데 폐광 후 40여년간 방치되던 것을 광명시가 개발하였다. 현재 2.2km가 개방됐는데 동굴 벽면을 활용한 영상 미디어 쇼를 감상할 수 있고, 동굴내 와인바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생산된 와인도 맛볼 수 있다. ‘한국 100대 관광지’로 선정되고, 경기도 10대 관광지로 뽑혔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2016년 관광 지점별 입장객 랭킹에서 41위에 랭크되었다. 2015년 4월 4일 유료화한 이후 2019년 5월까지 광명동굴을 찾은 관광객은 총 500만 1천 97명이다. 유료화 첫해인 2015년 92만 6천여 명, 2016년 142만 6천여 명, 2017년 123만 6천여 명, 2018년 116만여 명이 입장했다. 현재 1년에 100만명 이상이 관람하고 여름철 성수기 주말에는 하루에 1만 명 이상이 방문할 정도로 유명 관광 시설로 자리 잡았다. 광명동굴 주변이 2026년 6월까지 자연, 문화, 관광, 쇼핑, 커뮤니티가 융합된 세계 최고 수준의 '자연주의 테마파크'로 개발된다고 한다. 광명시는 앞으로 광명동굴 인근 56만㎡를 새로 개발한 뒤 기존 광명동굴 및 가학산 근린공원을 포함한 이 일대를 문화관광복합단지로 조성할 계획이다. 광명시는 광명동굴 추가 개발, 문화관광복합단지 내 각종 시설 운영에 글로벌 기업인 '디스커버리'도 참여시킬 예정이다. 4. 임경대와 물금 철광산의 연계 개발 물금 철광산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레미콘 공장을 매입하고, 가야시대 이래의 철기문화를 알리는 전시관을 설치하고 다양한 공간으로 활용, 도로 개선, 주차장을 확보해야만 한다. 국내외 사례를 벤치마킹해야 하는데 경기도 광명시의 광명동굴은 개발 모델이 될 수 있다. 임경대, 물금 철광산, 오봉산을 연계하여 개발하면 시너지 효과를 올릴 수 있다. 양산에는 제철유적이 많이 있는데, 화제리, 물금, 범어 등에서 발견되었다. 양산물금유적(梁山勿禁遺蹟)은 양산시 물금읍에 있는 삼국시대 제철 관련 유물산포지, 제철유적으로 우리나라 최대 제철유적의 하나이며, 제철조업과 관련된 45기 이상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양산시에서 물금 철광산을 문화체육관광부의 공모사업을 통해 관광자원화 할 필요가 있다. 1980년대까지 철을 생산한 물금 철광산. 오봉산 주변의 풍부한 제철 유적을 연게한 전시관을 건립하여 가야시대, 신라시대, 조선시대, 현대의 제철산업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면 외지 관광객을 많이 유치할 수 있다. 임경대, 둘레길, 황산베랑길, 물금 철광산을 종합적으로 연계하여 광명동굴처럼 개발한다면 양산은 동남권의 핵심 체재형 관광지로 도약할 수 있다. 임경대가 단순한 역사 유적지로 둘러보고 가는 경유형 관광지로 남아있는 한 관광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다. 단기적으로 임경대 둘레길 신설과 황산베랑길 연결, 장기적으로 물금 철광산과 오봉산을 포괄하여 출렁다리, 케이블카, 관광동굴, 제철 전시관 등의 종합관광지로 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충북 영동…

양산팔경은 영국사, 강선대, 비봉상, 여의정, 용암, 함벽정, 자풍당, 봉황대를 말한다. 영동군 양산 천태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영국사는 풍광 좋은 절로서 양산팔경의 정수(1경)다. 영동에 가면 꼭 들러야 하는 영동 제1 관광지로 천태산과 영국사를 꼽는다. 영국사 은행나무는 천 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노익장을 자랑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충북 영동군 양산팔경과 양산시 양산 홍보의 비교

1. 충북 영동군의 양산팔경과 한천팔경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학 박사 심상도 양산팔경은 영국사, 강선대, 비봉상, 여의정, 용암, 함벽정, 자풍당, 봉황대를 말한다. 영동군 양산 천태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영국사는 풍광 좋은 절로서 양산팔경의 정수(1경)다. 영동에 가면 꼭 들러야 하는 영동 제1 관광지로 천태산과 영국사를 꼽는다. 영국사 은행나무는 천 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노익장을 자랑하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양산팔경 중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곳이 바로 강선대(2경)이다. 강선대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가에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오롯이 서 있는 육각정자로 멀리서 보면 주변 노송들과 어울려 우아하고 고상하다. 조선의 이안눌과 ‘한우가’로 유명한 임제의 시가 정자 안에 걸려 있어 풍류를 더한다. 강선대는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했던 곳이다. 송호관광지 안에 여의정(6경)이 있는데, 양산팔경이다. 조선시대 때 연안부사(延安部使)를 지낸 만취당 박응종이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해 강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붙여 ‘만취당’이라 한 것을 1935년에 후손들이 다시 짓고 ‘여의정’이 라 이름을 고쳤다. 함벽정(5경)은 봉황대의 동쪽 강변 바위에 있는 정자로 이 강변 백사장에는 물새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비봉산 낙조를 볼 수 있는 위치 때문에 옛날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시를 읊고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봉황대(4경)는 포구 앞 절벽 위에 있던 누각인데 예전의 정자는 소실되고, 2012년 지금의 정자가 세워졌다. 봉황대 앞산 붕화산에는 과거 통신 수단의 하나로 쓰이던 봉수대가 있었다. 옛날 봉화대 앞으로 돌아오는 돛단배의 풍경이 아름다워 양산팔경 제4경으로 꼽았다. 묵묵히 양강의 물살을 견디고 있는 용암(8경)의 경치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여름이면 여름대로 푸르게, 가을이면 색색이 단풍으로 강가를 화려하게 수놓는 송호관광지의 나무들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이루기 때문이다.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한 곳이라는 강선대와 목욕하는 선녀를 보느라 승천하지 못하고 강가에 남게 되었다는 용암의 이야기가 짝을 이룬다. 한천팔경은 충북 영동군 황간면에 있는 월류봉의 여덟 경승지를 일컫는데, 월류봉, 산양벽, 청학굴, 용연대, 냉천정, 법존암, 사군봉, 화헌악이다. 우암 송시열선생이 머물던 한천정사에서 이름을 땄다고 전해진다. 높이 약 400m의 봉우리로 동서로 뻗은 능선은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달이 머무르는 봉우리’라는 뜻의 이름처럼 직립한 절벽에 걸려 있는 달의 정경이 참으로 아름답다. 2. 관광열차 관광열차는 와인코리아와 주관이 되어 정규 무궁화호 열차에 식당칸을 개조한 와인트레인 두 개를 연결하고 운행하였는데 이는 2006년 12월부터 시작하였다. 현재는 충북영동국악와인열차 라는 이름으로 운행되고 있으며, 전용 도색 기관차가 있다. 운행을 할때에는 보통 서울역과 영동역을 왕복하나, 어떤 때에는 부산, 강릉, 목포 등 지방에서 출발하는 경우도 있다. 2011년 6월부터 롯데시네마도 열차 운영에 참가하면서 시네마 객실이 탄생하였다. 이 때부터 와인시네마 트레인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2016년 2월 22일에 충북영동국악와인열차로 리뉴얼 되었으며, 2018년 2월 22일에 리미트 객차로 교체하였다. 영동국악와인열차는 서울역을 출발해 영등포역, 수원역, 평택역, 대전역을 거쳐 영동역에 도착하는 관광열차다. 열차 안에서는 와인 강좌, 7080 라이브 공연, 신명나는 국악 한마당이 펼쳐진다. 필자는 물금역에서 출발하는 5만 8천 원의 관광열차 상품을 이용하여 12월 7일 충북 영동군을 다녀왔다. 아침 7시 31분에 출발하여 영동역에 10시에 도착하였다. 이시일 시인의 제안으로 참석하였는데 일행은 6명이었다. 부산에서 온 관광객과 합류하여 버스 한 대로 영동군 관광지를 답사하였다. 관광열차의 테마가 김장 담그기 체험이어서 약간 걱정을 하였는데,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다양한 관광코스가 포함되어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영동역에는 감과 포도의 상징 조형물을 설치하여 좋은 첫인상을 주었다. 영동역 광장에 독립투사 송병순 선생의 동상이 있었다. 1905년 11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의 유림에게 배포하며,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두문불출하였다. 영동군 양산의 일본 헌병대가 은사금을 가져오자 이를 질책하여 거절하였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3. 레인보우 영동과 '양산팔경 금강둘레길 걷기축제' 영동군은 인구 48,877명의 소도시로 관광, 와인, 과일 등을 특화시켜 ‘레인보우 영동’으로 외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충북 영동군 양산면(陽山面)에는 양산팔경(陽山八景)이 있다. 양산시(梁山市)와 한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한글로 쓰면 똑같아서 친근감이 든다. 양산시와 충북 영동군이 자매결연을 맺었으면 좋겠다. 중국에는 수호지의 본산 양산시가 있는데 한자명도 똑같다. 인터넷 네이버, 구글에서 양산팔경을 검색하면 거의 대부분이 영동군 양산면에 있는 양산팔경이 나온다. 관광홍보 측면에서 인구 35만 명을 자랑하는 양산시가 인구 5만 명도 안 되는 영동군의 양산팔경에 완패하고 있다. 경부선 물금역과 영동역을 비교하면 물금역에는 인상적인 상징 조형물이 없는데, 영동역에는 특산품인 포도와 감 상징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영동군의 가로수는 감나무를 심어서 운치 있는 가로수길을 조성하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양산 송호 숲에서 출발하는 걷기대회가 있어서 반가웠다. 송호관광지는 수령 300년이 넘는 송림이 울창하고 금강 상류가 흐르는 곳으로 28만 4천㎡ 부지에 캠핑장, 산책로, 카라반, 어린이 놀이터, 물놀이 시설 등을 갖춘 국민관광지다. 도착하자마자 행사장에 가보니 걷기대회 준비운동으로 에어로빅 강사의 시범을 따라 하는 춤을 추고 있었다. 참가자들이 웃으면서 신나게 몸을 풀었다. 송호 관광지 앞은 바로 금강이다. '양산팔경 금강둘레길 걷기축제'는 천혜의 절경인 양산팔경을 체험하면서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행사로 날씨도 좋고 춥지 않아 좋았다. 양산팔경 둘레길은 금강변에 펼쳐진 양산팔경의 빼어난 경치 덕분에 한국관광공사에서 11월에 걷기 좋은 여행길 선정한 ‘영화, 드라마 속 걷기 여행길 5선’에 포함됐다. 송호관광지에서 '양산팔경 금강둘레길 걷기를 시작하면 양산팔경 중 다섯 곳을 볼 있다. 송호관광지 안에 여의정, 금강변의 용암을 볼 수 있고, 다리를 건너가면 강선대, 솔숲을 걸어가면 함벽정, 봉황대를 볼 수 있다. 이번 축제는 'Good Air City(맑은 공기 모범도시)' 선정 1주년을 기념해 영동군에서 주최, 주관하였다. ㈔세계맑은공기연맹과 ㈔한국공기청정협회가 후원 단체로 나섰다. 둘레길은 금강변을 따라 걷다가 큰 다리를 건너 다시 금강변 소나무 숲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걸어보니 공기는 아주 맑고 쾌적하였다. 둘레길은 반인 3km를 걷고 점심식사를 하였다. 양산의 둘레길 걷기 행사는 관변단체가 주관하여 워터파크 등에서 양산천을 따라 걷는 행사르 주로 하는데, 외지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 매력적인 코스를 설정하여 관광객을 유치해야 한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김장 담그기 체험을 하였다. 2층으로 올라가 영동 와인을 시음하였다. 김치는 투어가 끝난 후 기차를 탈 때 선물로 주었다. 오후에는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난계 박연(1378~1458) 선생을 기리는 국악체험촌에서 세계 최대의 북인 천고를 구경하였다. 국악기 연주 및 명상체험 등의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는 소리창조관을 방문하였다. 국악기 체험 후 300석 규모의 공연장을 갖춘 우리소리관에서 16인조 난계국악단의 국악 연주를 감상하였다. 마지막 코스로 영동와인터널을 구경하였다. 오래된 와인의 역사를 알려주는 와인 문화관, 대한민국 No.1 포도와인의 메카 영동을 홍보하는 영동와인관, 세계와인관, 포토존, 영화속 와인, 와인체험관, 환상터널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난계국악축제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뽑은 우리나라 대표 '지역 공연예술제'로 6년 연속 뽑혔고, 와인 축제는 지난해 세계축제협회(IFEA)가 주는 베스트 포스터 부분 동상을 받았다. 영동역에서 오후 5시 1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탑승하여 양산에는 저녁 7시 30분에 도착하였다. 인구는 적지만 관광산업과 홍보에서 앞서가는 영동군을 양산시에서 벤치마킹할 것이 많았다. 양산시는 원동매화축제 때 관광열차 운행을 하여 외지 관광객 유치에 힘써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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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충렬사 삼조의열인 양산군수 조영규

1.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성 전투에서 순국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양산의 충렬사는 양산 정신의 근간인 삼조의열 3위(三位)를 비롯해 임란공신 28위, 항일 독립운동 유공자 39위의 충혼을 모신 곳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1535~1592)는 동래부사 송상현(정읍 출신)과 함께 동래성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삼조의열 중의 한 분이자 충효의 상징인 조영규 양산군수는 양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조영규의 자는 옥첨(玉瞻), 본관은 직산(稷山)이며, 수의부위 준(準)의 아들로서 중종 30년(1535) 장성부 백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조영규는 1554년(명종 9년)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초관(訓練院哨官), 사복시 주부, 제주 판관, 무장 현감, 영암 군수, 용천 군수, 낙안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업무를 행함이 엄격하고 투명하였으며, 청렴결백하였고, 나이 들어서는 더욱 독실(篤實)하였다. 무장에 있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해 벼슬에서 풀려 집에 돌아가니 집에는 한 섬의 양식이 없을 정도였으며, 효성도 지극하였다. 1592년(선조 25) 양산 군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읍성에 가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성을 지키고, 나라를 위해 죽을 결심을 하였다. 송상현 부사에게 양산으로 돌아가 모친께 하직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약속하였다. 송상현 부사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가려고 핑계를 대는 줄 알았다. 조영규 양산군수는 아들 조정로(趙廷老)에게 부탁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하여 싸움터에 나아가니 너는 할머니를 잘 모시고 고향에 돌아가라”고 하였다. 조영규 군수는 약속대로 동래읍성으로 돌아와 북문으로 달려갔다. 성을 포위하고 있는 왜병들을 노호(怒號) 질타(叱咤)하며 성문 앞 가까이 이르자 왜병들도 감복하여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송상현 부사를 도와 힘껏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아들 조정로는 할머니를 모시고 한 달이 넘도록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고향인 장성에 도착하여 할머니를 깊은 벽지(僻地)에 모셨다. 부친이 이미 죽은 줄 알고 머리를 풀고 걸어서 동래에 이르니 온 성에 시체가 쌓여 가득하므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초혼(招魂)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허장(虛葬 : 시신 없는 무덤 조성)하였다. 조정로는 적과 함께 하늘을 같이할 수가 없다며, 한 개의 토실(土室)을 지어 문을 닫고 나오지 않고 20년을 애모(哀慕)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1667년(현종 8)에 이르러 장성 사람들이 조영규 부자를 모암 서원(慕巖書院)에 모시고, 2년 후 송준길(宋浚吉)이 왕에게 조영규 부자의 충효를 아룀으로써 정려(旌閭)를 명하고 충효 양문(兩門)을 세우게 하였다. 조영규 정려(趙英圭 旌閭)는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1985년 2월 15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었다. 조영규는 1696년(숙종 22년) 양산 충렬사에, 1709년(숙종 35년) 동래 충렬별사(忠烈別祠)에, 1736년(영조 12년) 동래 충렬사에 각각 모셔졌다. 숙종 때 조영규에게는 호조 참판을, 아들 조정로에게는 빙고 별검(氷庫別檢)을 각각 추증하였다. 2. 동래부순절도에 묘사된 조영규 양산군수 조영규 양산군수는 보물 제392호인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에 나와 있다. 1963년 9월 1일 보물 제392호로 지정되었다. 견본설채(絹本設彩). 1폭. 145×96cm. 육군사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동래부의 전속 화원(畵員)인 변박(卞璞)이 1760년(영조 36년)에 개모(改摹)하였다. 원래는 송상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안락서원(安樂書院)에 봉안되어 있었다. 1592년 4월 15일 왜구에 맞서 대항하다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동래부민의 저항을 중심으로 동래성의 전투 상황을 묘사한 일종의 전쟁기록화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동래부순절도의 제작은 원래 1658년(효종 9년) 동래부사 민정중(閔鼎重)이 처음 구상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1709년(숙종 35)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이 사당을 짓고 그 벽 좌우에 벽화 형식으로 처음 시도한 것이다. 그 후 1760년(영조 36년) 동래부사 홍명한(洪名漢)이 훼손된 순절도를 동래 사람 변박(卞璞)에게 다시 그리도록 하고 그 그림을 충렬사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조선에 상륙한 왜군은, 14일에 부산진(釜山鎭)을 공략하고, 15일에는 동래부를 공략하여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 등 군민(軍民)이 모두 순절하였다. 부산진 순절도와는 달리 교전 양상을 다양하게 설명하였으며 사경(寫景)을 곁들인 부성(府城)을 부감압축(俯瞰壓縮)시켜 교전에 얽힌 설화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모든 형상의 등차비례(等差比例)가 상당히 간과되었으나 권계(勸戒)를 목적으로 한 이 그림의 초점은 절의의 상징인 송상현과 비충겁약(非忠怯弱)한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을 서로 대조시킨 데 있다.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에 게안(揭安)되어 있다가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비겁한 경상좌병사 이각은 동래읍성을 벗어나 울산병영성으로 돌아와 첩과 재물을 도피시키고, 또다시 탈출하였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한양을 지나 임진강까지 도망을 갔다. 한강 방어선을 지키지 않고 후퇴하는 도원수 김명원 부대로 합류하였다. 경상도에 있어야 할 이각을 본 도원수 김명원은 이각을 참수하였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보유한 함선과 장비들을 파기하였다. 왜군의 갑작스런 대규모 기습을 받아 경상좌수영 진포 태반이 쓸려나가며 제때 대응하지 못했고 이후 동래성으로 향했으나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 동래성 구원을 포기하고 한양으로 후퇴했다. 이후 좌위대장에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패했다. 그 뒤로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다.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귀향하다 병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울산군수 이언성은 동래성을 구원하러 왔다가 왜군에 포로가 되었다. 왜군은 나중에 이언성에게 강화를 요청하는 서찰을 주어 석방하였다. 이언성 군수는 서찰을 전하지 않고 도망쳐 왔다고만 변명하였다. 이런 비겁한 관리들에 비하면 조영규 양산군수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영원한 충신이 되어 양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충렬사에 모셔졌다. 2. 동래부사 권이진의 상소 숙종 36년 11월 10일(1710년) 동래 부사(東萊府使) 권이진(權以鎭)이 장계(狀啓)를 올렸다. "임진 왜란(壬辰倭亂) 때에 양산 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圭), 동래 교수(東萊敎授) 노개방(盧蓋邦), 제생(諸生) 문덕겸(文德謙), 비장(裨將),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希壽), 부리(府吏) 송백(宋伯), 부민(府民) 김상(金祥), 송상현(宋象賢) 부사(府使), 겸인(傔人) 신여로(申汝櫓)가 국난(國難)에 함께 순절(殉節)하였으니, 포장(褒奬)을 더하여 윤상(倫常)을 부지(扶持)함이 마땅한데, 쓸쓸히 1백 년 동안 절일(節日)에 한 그릇의 밥을 놓고 충혼(忠魂)을 위로한 적이 없었습니다. 신이 이미 여러 사람이 순절(殉節)한 옛 땅에 빈 터를 사서 조영규(趙英圭)를 제사하게 하고 노개방과 제생 문덕겸은 또 낭무(廊廡)를 지어 제사하게 하였습니다. 비장(裨將)·부리(府吏) 이하 항절(抗節)한 자들에게 사액(祠額)을 내려 주시고, 관원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셔서 1백 년의 충혼(忠魂)을 위로하고, 변민(邊民)의 관첨(觀瞻)을 용동(聳動)시키소서." 하였다. 조선 숙종 37년 2월 21일(1711년) 동래 부사(東萊府使) 권이진(權以鎭)이 상소(上疏)하였다. 충렬사(忠烈祠) 별묘(別廟)의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윤문거(尹文擧)가 부사(府使)가 되었을 때에 사당[廟] 가운데에 별옥(別屋)을 지어 정발(鄭撥)을 따로 향사(享祀)하려고 했으니, 이에 별묘(別廟)를 만들어서 다른 사절 제인(死節諸人)을 향사하였습니다. 신이 도임(到任) 초에 즉시 그 자리에 별묘(別廟)를 세워서 양산 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圭), 교수(敎授) 노개방(盧盖邦) 이하 여러 사람을 향사하였는데, 예조(禮曹)에서 계하(啓下)한 관문(關文)에 별묘(別廟)를 철거하고 본사(本祠)에 합향(合享)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민(吏民)이 반드시 별묘를 세우려고 하는 데는 다 곡절(曲折)이 있는데, 본묘(本廟)가 협착(狹窄)하여 반드시 뜯어고쳐야 하고 별묘(別廟)를 철거하여 옮기는 데도 또한 공력(功力)을 허비하게 되니, 청컨대 다시 처분(處分)을 내려 주시어 읍인(邑人)의 소망을 위로하소서." 하고, 끝으로 해변을 방어하는 일을 여러 조목(條目) 논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충렬 별묘(忠烈別廟)는 임진년(1712) 5월에 복계(覆啓)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칼럼/춘추공원의…

심상도 박사의 화요칼럼/춘추공원의 역사 문화 자원과 공원개발

1. 춘추공원의 유래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학 박사 심 상 도 춘추공원은 양산시의 대표적인 근린공원으로 생활권 공원의 하나이며, 면적 규모로 보면 도시 지역권 근린공원이다. 춘추공원은 면적 740,000m²의 근린공원으로 조성될 계획이다. 춘추공원은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도시 관리 계획으로 결정된 근린공원이며 2010년까지 공원개발을 하였다. 춘추공원은 양산의 역사 위인을 기리고, 양산시민들에게 애향의 정신을 전승하고 시민들의 휴식 공간 및 화합의 장소로 활용할 수 있는 도시 지역권 근린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하여 2003년 3월부터 공원에 편입된 토지를 매수하기 위한 협의가 시작되었고 2004년 5월~6월 실시 설계 용역을 실시하였으며 2007년 3월 교통 영향 평가 심의를 결정하였다. 지난 2010년까지 공원조성을 위한 계획을 추진하면서 토지매입을 하였다. 춘추공원 지역은 옛날부터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었으며 애향 단체인 춘추계가 공원 이름을 춘추원으로 고쳐 부르고 삼조의열비를 세우고, 입구에 삼조의열단(三朝義烈壇), 삼조의열(三朝義烈), 만년춘추(萬年春秋)란 석각 기둥을 세운 양산의 정신적 명소로 자리매김해왔다. 장충단의 삼조의열비는 원래 양산읍내에 있던 것을 춘추원으로 옮겨왔다. 삼조의열비는 충렬사를 건립하며 또다시 옮겼다. 그 후 춘추공원에는 김서현 장군 기적비, 윤현진 의사 비, 이원수 노래비가 세워졌다. 일제 때 일본인들은 봄철이면 춘추공원에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 '도산원(挑山園)'이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36년에 발간된 『면세개람(面勢槪覽)』(1936)에 "봄에는 벚꽃과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가을에는 단풍이 절경이고, 겨울은 설경을 볼 수 있는 공원으로 500년이 넘는 포구나무가 오랜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복 후 1949년 5월 양산의 애향단체인 춘추계에서 공원 이름을 춘추원으로 고쳐 부르다가 지금은 춘추원과 춘추공원이 두루 쓰이고 있다. 춘추공원은 양산시 중심가를 흐르는 양산천 서쪽, 교동 157-1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신불산이 남으로 뻗어내려 영축산을 이루고, 한편 서남으로 내려오면서 선암산을 거쳐 마고산성에 이르러 원맥은 오봉산으로 뻗고 한 줄기는 양산읍을 향해 동남으로 비켜 백로봉(白鷺峰)에 다다른 곳이 곧 춘추공원이다. 춘추원사라는 절이 있는데, 옛날에는 흥무사라고 하였다. 백로봉에는 6·25 전몰군경의 충혼탑이 있고, 장충단 뜰 아래에는 이원수 노래비가, 그 아래에는 3·1 독립투사 윤현진의 비와 신라 김서현 장군비가 있다. 공원 서편에는 국궁장인 춘추정(春秋亭)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충혼탑은 6.25 전쟁 당시 북한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구국의 길에 나서 용감하게 싸우다 승화한 용사들의 유업과 현충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8년 7월 양산군에서 군민의 성금으로 건립하였다. 1994년 8월 양산군에서 봉안각을 신축하여 춘추원사에 모셔져 있던 위패를 이전 봉안하였다. 현재 봉안각에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산화한 영현 765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충혼탑은 양산시의 대표적 현충시설로서 2006년 충혼탑을 총사업비 9억 5천만 원을 들여 재건립하였다. 국비(분권교부세) 2억 6천 6백만 원, 지방비 6억 8천 4백만 원을 투입하였다. 2007년에는 충혼탑 주변 난간대 및 용사상 5위를 양산시비 3억 원을 들여 설치하였다. 진입도로가 협소하여 생기는 참배객들의 불편을 덜기 위해 직선화 계단 조성 사업을 실시하여 245계단을 설치하였다. 2. 춘추공원의 역사적 인물 춘추공원 입구에는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의 부친인 김서현 장군을 기리는 비석이 서있다. ‘신라대양주도독김서현장군기적비’라고 적혀있다. 김서현 장군은 만노군 태수, 소판으로서 대양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양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를 역임하였고 관등은 이찬에까지 이르렀다. 삼국사기 제43권 김유신 열전 하(下)에는 양주총관(良州摠管)으로 나온다. 김무력 장군의 아들인 김서현 장군은 양주 총관이 되어 여러 차례 백제와 싸워서 예봉을 꺾음으로써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변경의 백성들은 편안히 농사에 종사하였고, 나라의 근심을 덜게 되었다. 김서현 장군의 부친인 김무력 장군의 묘소는 통도사 근처에 있다. 김서현 장군과 그의 부인인 만명(萬明)을 그린 부부상 그림은 양산 신기리 신기산성 성황사에 모셨던 초상화로 20세기 전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2001년 5월 3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9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의 취서사(鷲棲祠)에서 보관하고 있다. 지역민들은 신기산성 성황사 사당을 중수하고 1년에 한 차례씩 제사를 올린다. 독립투사 우산(右山) 윤현진(尹顯振) 선생은 양산 출신으로 1914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신익희, 김성수, 장덕수, 송진우 등과 조국광복동맹결사단을 조직,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안희제 선생과 비밀 결사인 대동청년당에서 활동하였다. 양산에 의춘학원(宜春學院)을 설립하여 후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지사인 이시영, 이동녕, 김구, 이회영, 노백린, 여운형, 신익희 등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윤현진 선생은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정 문제 해결에 힘썼다. 항일독립투사 윤현진 선생의 흉상과 기념비를 춘추공원 내에 세웠다. 청동주물로 제작된 흉상은 높이 2.3m, 좌대 가로 3.1m, 세로 1.5m로 조명을 설치하였다. 흉상은 윤현진 선생이 27세 때 상해 임시정부 재무차장(현재 기획재정부 차관) 재직 당시 찍은 사진을 토대로 얼굴과 양복 입은 모습을 참고해 제작했다. 윤현진 독립투사의 손자 윤석우 씨의 인물 고증도 거쳤으며, 2017년 12월 18일에 거행된 흉상 제막식에는 손자도 참석하였다. 춘추공원에는 ‘고향의 봄’ 작사가인 이원수(1911~1981) 선생의 노래비가 있다. 전국민, 해외동포가 즐겨 부르는 노래인 '고향의 봄' 작사가 이원수 선생은 우리나라 근대 어린이 문학, 문화운동의 선구자이며, 어린이 문학을 어른의 눈이 아닌 어린이의 눈으로 보고 쓴 분이라 칭송받고 있다. 양산의 북정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양산에 거주했기에 양산시는 추모사업을 진행했으나 호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친일파 논쟁으로 중단되었다. 이사 간 마산에서 추모사업을 하고 있어 안타깝다. 유족은 양산에서 탄생한 것을 인정하였다. 3. 춘추공원 개발 예산 63억 원으로 춘추공원 내부인 교동 306번지에 조성하는 양산독립공원은 전체 부지면적 4,102㎡, 기념관 연면적 1,025㎡(지하 2층, 지상 1층) 규모로 건립된다. 독립공원은 기념관, 조형물, 추모공간을 금년 말에 착공하여 2020년에 준공 계획으로 추진되고 있다. 윤영석 의원은 독립공원 조성을 위해 독립운동에 관련된 토론회를 열고, 박승춘 국가보훈처장과 기획재정부를 비롯한 중앙부처 담당자들과의 면담 설득 등을 통해 국비 18억 원을 확보한 바 있다. 양산시는 지난 10월까지 9천 6백만 원을 들여 교동 일대 74만㎡ 규모의 춘추공원 조성계획변경을 위해 용역을 진행하면서 주민 의견을 수렴한 바 있다. 춘추공원의 시설이 시민 편의 위주로 대폭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역사교양지구와 운동시설지구로 나누고, 역사교양지구는 추모문화 공간과 숲 체험 공간, 정원문화 공간으로 세분하여 개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숲 체험 공간에는 인공폭포(254㎡), 북카페(571㎡), 숲속 놀이터(1716㎡), 정원문화 공간(5,510㎡)에는 보타닉 가든과 가든광장, 운동시설지구에는 관람석이 있는 축구장(1만 895㎡), 화목원(1,027㎡), 피크닉장(1,339㎡), 어린이 놀이터(1,881㎡) 등이 추진된다. 공원 입구에서 충혼탑까지 모노레일 설치를 검토 중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춘추공원 개발의 문제점으로 유의할 사항은 난개발과 홍수 피해 등이 있다. 춘추공원 아래 마을인 향교가 있는 교동은 비가 많이 내리면 상습 침수 피해를 입는 지역이다. 2016년 10월 5일에 태풍 차바가 양산을 지나가면서 많은 비가 내려 피해가 컸다. 교동의 향교 근처 마을도 침수되었는데, 저지대라는 측면도 있지만 배수장 수문관리도 부실하여 인재가 겹쳐 피해가 커졌다. 당시 심경숙 양산시의원이 확보한 배수장 CCTV에는 수문을 늦게 닫은 것으로 나왔다. 춘추공원과 충혼탑, 충렬사 등 양산을 대표하는 공원과 역사유적지를 찾는 방문객을 위해 마련된 주차장이 주중에는 인근 기업체 직원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어 주차하기 힘들어 대책이 요구된다. 김해양산환경운동연합은 공원 개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반대를 하고 있다. 앞으로 제반 환경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여 난개발을 방지해야 하겠다.

배 모양으로 생긴 배내골과 배가 …

배 모양으로 생긴 배내골과 배가 드나든 선리 선창가

1. 배내골은 배 모양의 행주형 모습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원동면 배내골의 고점마을, 대리, 선리, 장선리 등은 깊은 골짜기에 길쭉하게 이어져 풍수지리학적으로 배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행주형이라고 한다. 배내골을 하나의 배로 가정할 때 배내골의 두 진입로 중 해발고도가 낮은 영포리에서 들어오는 배태고개를 뱃머리로 보았으며, 약간 더 높은 배내고개를 배의 뒷부분인 선미로 여겼다. 배내골을 감싸고 있는 영남알프스 남서부, 남동부 능선은 각각 밀양 얼음골이나 양산 통도사에서 보면 거의 직벽이라 양쪽 산줄기를 배의 측면으로 간주했다. 옛날에는 행주형 지세에서 배가 떠나면 마을이 망한다 하여 풍수 비보(裨補) 차원에서 인근에 지명으로나마 포구를 만들었다. 배태고개 아래 마을인 원동면 영포리(泳浦里), 내포리(內浦里), 함포리(含浦里) 등이 포구와 연관 있는 지명이다. 지명에 포(浦)가 들어가면 포구(浦口)였을 가능성이 높다. 옛날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원동천을 통해 배가 들어올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상류인 내포리, 영포리까지도 하천따라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 안동 하회마을은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짐을 싣고 떠나가는 배의 모양인 행주형이다. 하회(河回)마을은 조선시대 영남의 4대 길지였고, 오늘날에는 경주 양동마을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이곳은 미국 부시 대통령 부자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하기도 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마을이다. 하회마을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수행하여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를 구할 위대한 인물인 이순신 장군의 인물 됨됨이를 일찌감치 알아보고 파격적으로 발탁하게 한 서애 류성룡(1542~1607)이 태어난 곳이다. 류성룡의 9대조 류난옥은 자손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만한 땅을 구하기 위하여 지관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터를 정하고 3대에 걸쳐 적선을 한 후 서애의 6대조 류종해 공이 이곳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그 후 600여 년을 이어오면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하회마을은 산태극, 수태극, 태극형(太極形, 산과 물이 태극 모양)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물위에 떠 있는 연꽃 모양)이다. 백두대간 태백산맥에서 뻗어온 지맥이 화산(花山, 327m)을 이루고 낙동정맥에서 뻗어온 지맥이 남산과 원지산, 부용대를 이루면서 서로 만난 곳을 낙동강물이 S자로 감싸주면서 돌아 마을이름을 물돌이동 하회(河回)라고 지었다. 2. 배내골의 선리 선창가 양산시 원동면 선리 마을에 실제로 배가 드나들던 선창(船倉) 마을이 있었다. 배내골에는 하천이 있는데, 흔히 배내천이라 하지만 공식 이름은 단장천이고 마을 곳곳에 단장천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옛날에 심심산골인 배내골에 배가 사람과 짐을 싣고 드나들었다고 하면 양산 시민들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현재는 밀양댐으로 인해 물길이 완전히 막혔지만 예전에는 배가 다닐 수 있었다. 배내골에서 흘러내리는 단장천은 밀양으로 연결되어 단장면, 산외면을 거쳐 밀양시 내일동에서 훨씬 큰 강인 밀양강과 이어진다. 밀양강은 삼랑진읍 삼랑리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삼랑진(三浪津)’이라는 명칭 자체는 삼랑진읍에 있는 삼랑리에서 따온 것이다. 삼랑리는 석 삼(三), 물결 랑(浪), 나루 진(津)으로 세 개의 물결이 합해지는 곳이다. 삼랑리는 옛날에 낙동강 조창(漕倉)이 있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낙동강과 밀양강이 만나고, 거기에 큰 조차(潮差)로 인해 부산 인근의 남해 바닷물도 역류해와 3개의 물결이 있다는 데서 삼랑리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 배내골 선리 마을에 있는 ‘선리 선창가’ 안내판에 배내골에서 밀양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연결되는 물류 흐름이 잘 나타나 있다. 시 한 수가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 “버드나무 꺾어드리며 눈물로 그대를 이별한 곳/ 기약 없는 그대 기다려 망부석이 될지언정/ 오늘도 물안개를 맞으며 이곳에 서있습니다.” 필자가 방문한 11월 25일 오후에 마침 가랑비가 흩날리고 있어 물안개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집으로 오는 길에 에덴밸리 리조트 정상에는 실제로 안개가 자욱하였다. 선리 선창가 안내판에 적혀있는 시와 실제 기상이 맞아떨어진 것은 필자의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역사 유적지를 찾아 열심히 현장을 다니다 보면 이런 운이 찾아오는 것 같다. 배내골 선리 마을의 선창가에서 주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배에 싣고, 단장천을 따라 밀양의 단장면 소재지에 팔기도 하고, 단장천에서 더 내려가 밀양강을 만나 밀양의 각 지역에도 판매하고, 더 내려가 낙동강에 도달하여 삼랑진, 김해 등지에도 팔았다. 옛날에 먹고살기 위해 나룻배를 타고 선리 선창가를 출발하여 단장천을 따라 내려가 단장면 장터 등에 농특산물을 팔고, 돌아올 때는 생활필수품을 사오는 고된 여정을 이어나갔다. 선창가는 배내골 주민들의 삶의 애환이 서린 역사적인 현장이다. 선창이 있었기에 이곳에는 뱃사공을 위한 주막도 형성되었을 것이다. 3. 일제의 풍수 탄압과 지명의 강제 변경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배내골이 풍수지리적으로 배 모양의 행주형이고, 산천이 수려하기 때문에 큰 인물이 탄생할 것을 우려하여 지명을 강제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양산의 다방 마을 역시 일제 강점기 때 한자 지명이 바뀐 사례가 있다. 양산시 다방동은 차나무가 많은 동네여서 옛날부터 마을 이름을 다방(茶房)이라고 하였다. 차(茶)와 연관된 지명은 일제강점기 때인 1914년 많을 다(多) 꽃다울 방(芳)으로 마을 이름을 변경했다. 꽃처럼 아름다움이 넘치는 마을도 좋은 이름이지만 차나무가 자생하는 마을이라는 상징성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한글로 발음할 때는 여전히 똑같지만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선리에 있는 배내골 홍보관 입구에 가면 개울 옆에 배가 한 척이 떠 있다. 농림부의 ‘배내골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을 할 때 ‘선리 선창가’를 스토리텔링하여 마을의 유래를 설명하는 안내판, 돛단배 조형물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소공원을 조성하고 실내 체육관을 건립하였다. 원동면 영포리에는 원동매화축제의 기반시설인 쌍포매실다목적광장에 센터, 주차장을 조성하였다. 이 사업 덕분에 원동매화 축제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2007년 당시 배내허브랜드의 정석진 대표가 추진위원장을 맡아서 양산 최초로 농림부 공모사업에 도전하여 따낸 농촌개발 사업이었다. 지금은 농림부의 일반농산어촌 개발사업으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양산의 읍면 지역에서 실시되는 농촌개발사업은 현재 그 권역의 역사와 문화를 스토리텔링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초창기에 옛날 배가 드나들던 선창의 유래를 밝히고 배 조형물을 세운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한민족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풍수지리설을 악용하였다. 위대한 인물이 탄생하지 못하도록 명산의 정상에 지기를 억제하기 위해 쇠말뚝을 박기도 하였다. 일제는 쇠말뚝을 박아서 지맥을 끊는 풍수 침략을 자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혹자는 이런 일이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일제의 악랄성은 역사, 문화 전반에 걸쳐 교묘하게 진행되었다.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라꽃으로 사랑한 무궁화나무를 전국 곳곳에서 뽑아 불태우기도 하였다. 종교 탄압과 아울러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칼럼/소설가 김…

심상도 박사의 화요칼럼/소설가 김정한 선생의 수라도와 용화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소설 수라도 수라도는 김정한 선생이 1969년 6월 『월간문학』 8호’에 발표한 중편 소설이다. 이 작품은 구한말부터 광복 직후에 이르는 `가야부인`의 일생을 통하여 ‘허진사’ 가족의 역사와 한민족 수난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이다. 작가 김정한은 “역사를 과거의 일로서만 묻어 버리지 않고 현재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보고 싶다.”고 했는데, 이러한 작가 정신은 외손녀 분이의 회상 속에서 가야부인의 일생이 밝혀지는 소설 구성으로 이어진다. 민족의 수난사를 바라보고 직접 그 가운데 위치했던 가야부인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수라도’(악귀 세계)를 헤치는 고행의 연속이다. ‘수라도’라는 소설 제목은 우리 민족이 살아온 역경의 시공간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여성으로서 인고, 처절, 초월의 삶을 살아온 가야부인의 불교적인 역경 극복 방식을 암시하기도 한다. 오봉 선생의 서릿발 같은 기상과 지조는 우리 전통 유학의 혼을 당당히 계승하고 있다. 가야 부인의 효성 역시 유교에서 강조하는 전형적인 여인상에서 비롯된다. 시아버지 오봉 선생의 대쪽 같은 성품이 일제의 억압적 상황과 맞지 않아 집안은 온갖 시련을 겪어야 했다. 시할아버지 허 진사는 한일합방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서간도에서 유골로 돌아오고, 시동생 밀양 양반은 3.1 운동 때 일제에 죽임을 당하고, 오봉 선생은 한산도 사건이라는 애국지사 박해 사건에 걸려 갖은 고초를 겪는다. 가야부인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수용해나가며 가족을 위한 살신성인에 가까운 헌신,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 자애로운 정신, 불의의 세력에 맞서서 투쟁하다 옥고를 치르는 시아버지 오봉 선생을 공경하는 지극한 효성은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의 며느리다운 고결한 품격을 보여준다. 2. 미륵당과 용화사 가야부인은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의 희망을 보기 위해 미륵불에 의존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미륵불 신앙이 희망의 신앙으로 수용되어 폭넓게 전승되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억 7천만 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부처님이다. 미륵불의 세계인 용화세계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현실세계에서의 갖가지 노력이 요청된다. 즉,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독송하거나, 옷과 음식을 남에게 보시하거나, 지혜와 계행(戒行)을 닦아 공덕을 쌓거나, 부처님에게 향화(香華)를 공양해야 한다. 고통받는 중생을 위하여 깊은 자비심을 내거나, 인욕과 계행을 지켜 깨끗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기르거나, 절을 세워 설법하거나, 탑과 사리를 공양하며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생각하거나, 사람들을 화해시켜 주거나 하는 등의 공덕으로 용화회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소설 ‘수라도’ 중 미륵당을 묘사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강 건너 고암산이 이쪽 미륵당 아래의 강 구부렁이로, 그 웅장한 그림자를 쑥 내밀고 있었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물빛이 한결 시퍼런 강 구부렁이 쪽으로 사타구니가 벌어져간 골짜기의 오목한 부분에, 미륵당이란 절이 납작하게 앉아 있다. 그래서, 모신 미륵불은 어지간히 크긴 해도 절 이름을 미륵암이라고 부르지 않고, 보살 할머니들은 그저 미륵당이라고만 불렀다’ 미륵당은 이 소설의 핵심 배경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가야부인은 허 진사의 입제날(제사 하루 전날)에 제사상을 봐 황산 베리를 지나다가 바람이 너무 불어 잠시 피할 곳을 찾는다. 그러다 우연히 땅에 묻혀 있던 미륵불을 발견하게 되고 절을 지어 모시기로 한다. 미륵당이 서게 된 배경이다. 가야부인은 시집간 고명 딸이 괴질로 죽었다고 하여 솔밭 속에 체봉(가매장)해 놓은 것을 원통해 한다. 집안 몰래 그녀는 사위를 시켜 불가의 방식으로 화장을 한다. 그리고 뼛가루를 돌부처가 있는 곳으로 가지고 가서 불공을 드리고 강에 뿌린다.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꿈이 꺾이는 것 같아서 가야부인은 절을 짓지 못하면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사위가 대신 절을 짓겠다고 한다. 사위 집에서 같이 묵으면서 일을 서둘러 절을 거의 마무리해 갈 무렵 오봉 선생이 일경에 붙잡혀 구금된다. 불온한 시를 지었다는 죄명이다. 대동아전쟁은 얼른 끝나지 않고 공출과 징용만 늘어간다. 친정에서 데려다가 식모라기보다는 양딸처럼 길러온 옥이에게 정신대 징용 영장이 나온다. 옥이는 이를 비관하여 자살을 기도한다. 절을 지으면서 정이 들었던 가야 부인의 사위 박서방은 옥이가 배에 오르려던 순간에 나타나 자기의 처로 호적에 실은 호적등본을 보여주고 옥이를 구출한다. 두 사람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결혼한다. 해방이 되자 가야부인의 자손들은 큰 벼슬을 하고 가야부인도 큰 소리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떠들어 대지만 친일파가 득세한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학병을 피해 도망다니던 가야부인의 막내아들은 이를 비관하여 반거충(무엇을 배우다가 중도에 그만두어 다 이루지 못한 사람)이가 된다. 가야부인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집에서는 시어머니처럼 천수나 치고 미륵당에 나가면 미륵불 앞에 나가서 가만히 눈을 감고 지낸다. 물금 용화사에 미륵불이 모셔지게 된 설화도 수라도의 미륵당 이야기와 비슷하다. 오래전 어느 농부가 낙동강에서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하는 물체를 발견하고 건졌더니 그것이 미륵불이었다. 한 스님이 건져다가 용화사에 모셨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김해시 상동면 감로리 절터에 있던 미륵불을 1947년에 옮겨왔다고 한다. 소설가 김정한 선생의 처가가 원동면 화제리였기 때문에 이러한 전설을 이미 알고 소설 수라도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3. 불교 신화의 아수라와 한일 분쟁 아수라(Asura)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숨, 생명’을 뜻하는 ‘아수(asu)’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점차 힌두교의 주신들과 대립하는 악신(惡神)의 일족으로 여겨지게 되면서 천계의 신들을 뜻하는 ‘수라(sura)’에 부정을 뜻하는 ‘아(a)’라는 접두어가 붙어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하는 속설도 나타났다. 한자로 비천(非天)·비류(非類) 등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아수라는 인도의 많은 신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부터 숭배되었던 신으로 베다 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생명과 생기(生氣)를 관장하는 선신(善神)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힌두교의 주신들인 브라흐마(Brahma)·비슈누(Vishnu)·시바(Shiva) 등에 대한 숭배가 확립되면서 점차 이 신들과 대립하는 악신과 그의 일족들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수라와 신들 사이의 전쟁이 인도 신화의 중요한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불교는 인도의 신화를 수용하여 그것에 등장하는 신들을 부처의 가르침에 감화하여 불법을 지키는 신장(神將)들로 변화시켰다. 그러면서 그 신들을 천룡팔부(天龍八部)나 팔부중(八部衆)이라고 불리는 8개의 종족으로 구분하여 ‘팔부신중’이라고 하였는데, 아수라도 야차(夜叉), 건달바(乾闥婆), 가루라(迦樓羅) 등과 함께 팔부신중의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팔부신중(八部神衆) 가운데 하나인 불교의 수호신이다. 보통 세 개의 얼굴과 여섯 개의 팔을 지닌 삼면육비(三面六臂)의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여덟 개나 네 개의 팔을 지닌 삼면팔비(三面八臂)나 삼면사비(三面四臂)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불교 전승에서 아수라는 수미산(須彌山) 북쪽에 살면서 제석천(帝釋天)과 싸움을 영원히 계속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아수라가 제석천과 싸운 장소를 아수라장(阿修羅場)이라고 하는데, 싸움이 벌어져서 매우 시끄럽고 혼란한 장소나 상태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의 사정이 수라도에서 상징하는 아수라장과 비슷하다.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는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 시절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한일 양국 정부간에 타결된 합의이다. 합의문 전문은 한일 정부가 공동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한일 양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으로, 불가역적으로 종결되었음을 선포하였다. 후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일 위안부 TF 결과 발표와 관련해 이의를 제기하며 문제가 복잡해졌다.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신일철주금의 상고를 기각하고 "신일철주금은 피해자들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원고승소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일본은 이에 대응하여 2019년 7월 1일, 한국에 대해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 리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등 3개 품목 수출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우대)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였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은 11월 23일에 종료되는데, 한국정부는 연장 의사가 없다. 후폭풍으로 아수라장이 연출되지 않기를 바란다. 소설가 김정한 선생의 수라도 무대인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용화사는 안내판이 잘 설치되어 있다. 김정한 조분금 부부는 사후에 양산의 신불산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김정한 선생이 양산을 무대로 쓴 소설인 ‘수라도’, ‘메깃들’, ‘사밧재’, ‘산서동 뒷이야기’, 김정한 선생의 외가인 금산리 등을 관광코스로 연결하여 관광벨트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양산 다방동 차나무 군락지와 고유…

양산 다방동 차나무 군락지와 고유지명 회복/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야생 차나무 군락지 보호 양산숲길보전회에서는 3월 24일 다방동 야생 차나무 군락지 답사를 하며 환경정화 활동을 하였다. 현장에 가보니 칡을 캐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구덩이를 파놓았고 칡도 일부 남겨놓아서 어수선하였다. 답사 전에 낫을 3자루 구입하여 칡덩굴을 제거할 준비를 하였다. 낫은 조상현・정진헌・이기천 회원이 사용하며 굵은 칡덩굴과 잡목을 제거하였다. 나머지 회원들은 차나무를 뒤덮고 있는 칡덩굴과 잡풀 덩굴을 손으로 일일이 걷어냈다. 필자는 6월 13일 이용식 시의원의 고향마을인 안다방마을과 야생 차나무 군락지를 방문하였다. 경부고속도로 개설로 이용식 시의원의 생가는 철거되었는데, 집터를 함께 둘러보았다. 다방마을 마을회관에서 통장과 주민들을 만나 차나무 군락지에 보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을 안내판을 세워 야생 차나무 군락지, 다방동 마을 이름 유래 등을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의원과 야생 차나무 군락지를 둘러보며 차나무 보호대책에 대해 의논을 하였다. 양산시 공공근로를 통하여 차나무 군락지의 칡덩굴 제거, 잡목과 신우대 제거를 당부하였다. 소중한 자원인 차나무 군락지를 보호할 수 있도록 안내판도 세워야 한다고 얘기하였다. 이용식 시의원은 차를 활용하여 녹차 전시관,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였으면 좋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다방동에는 차를 끓이는데 알맞은 황산새미가 있어 안성마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11월 7일 오후에 이시일 시인과 함께 다방동 야생차 군락지를 답사하여 칡덩굴을 제거하기로 논의하였다. 이시일 시인이 낫 두 자루를 준비하였다. 각각 하나씩 들고 야생 차나무 군락지로 올라갔다. 마을을 가로질러 올라가면서 밭 옆으로 난 오솔길을 간신히 찾아서 천천히 걸어갔다. 칡덩굴은 온 사방에 널려 있어 그 끈질긴 생명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칡덩굴이 말라죽은 것이 보였는데, 짐작에 이용식 시의원에게 부탁했던 공공근로로 제거한 것 같았다. 오솔길을 따라가며 보니 작은 차나무가 새롭게 올라오고 있었다. 이시일 시인은 농사지으며 익힌 능숙한 솜씨로 굵은 칡덩굴을 잘랐다. 필자의 어설픈 낫질을 보더니 이시일 시인은 낫을 쉽게 사용하는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 방식대로 하니 한결 쉽게 나무를 자를 수 있었다. 야생 차나무가 많은 곳에 당도하여 열심히 칡덩굴을 잘라내었다. 차나무 역시 생명력이 강하여 온갖 덤불에 짓눌리고 있어도 쉽게 죽지는 않았다. 3월에 덩굴을 제거하고 거의 8개월 만에 와서 관찰해보니 칡덩굴의 성장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2. 칡은 위해(危害) 식물 필자가 어릴 때는 나라 전체가 못사는 형편이었기에 아이들은 봄이 되면 군것질거리로 산에 가서 칡을 캐어 먹거나 찔레를 꺾어 껍질을 벗긴 다음에 먹었다. 곡괭이를 들고 단단한 땅을 파서 칡을 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칡을 캐서 뜯어먹으면 입술이 새파랗게 변했다. 요즘은 칡은 판매하는 분들이 소형 포클레인을 동원하여 쉽게 캐기도 한다. 산림청이 조사한 덩굴류 분포 산림은 약 4만ha로 4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방제를 위해서는 물리적 제거와 화학적 제거로 나눌 수 있는데, 물리적 제거는 칡 생육기에 지상부 예초작업과 주두부 굴취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런 물리적 방법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완전방제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 화학적 방제방법은 전문 약제를 사용해서 방제하는 것인데, 고독성 약제의 환경문제와 주변 농작물로의 2차 피해 등 안전 문제가 발생한다. 칡과 같은 덩굴류는 햇빛을 좋아하고 생명력이 강해서 나무를 타고 올라간다. 칡덩굴은 나무를 감아 돌아가서 목을 조이듯이 뒤덮어 버리기 때문에 사람이 제거해 주지 않으면 나무는 고사한다. 칡은 나무가 광합성을 못하도록 덮어버리고 결국은 나무가 고사하기 때문에 산림 피해가 심각한 실정이다. 칡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 분포하며, 현재는 미국 내 문제 식물로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심각한 위해귀화식물로 분류되어 있다. 칡이 우점된 지역에서는 다른 식물들이 생존할 수 없어 식물다양성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 다년생 식물로 지상부를 제거해도 다시 줄기가 나오고 가을이 되면 종자를 맺어 번식할 뿐만 아니라, 토양 내 덩이줄기에서 뿌리를 지속적으로 내려서 번식하기 때문에 칡 제거에는 많은 노동력과 비용이 발생한다. 충남 홍성군은 올해 들어 11월까지 총 2회에 걸쳐 생활권 주변 임야에 2억 2천만 원의 예산을 투입해 나무의 생육에 피해를 주고 경관을 해치고 있는 칡덩굴을 제거했다. 칡덩굴 제거 사업은 주요 도로변 및 가시권 산림 100ha에 번성한 칡덩굴을 절단하고 약제(글라신액제) 처리 후 약제가 유실되지 않도록 비닐랩으로 밀봉하는 방법으로 실행했다. 홍성군은 지난 5월부터 6월까지 1차 칡덩굴 제거 사업을 진행하고 임야 내 덩굴분포를 재조사해 제거되지 않은 칡덩굴에 대해 지난 10월부터 11월까지 가을철 추가 제거 사업을 실시했다. 양산시도 홍성군처럼 다방동 야생 차나무 군락지의 칡덩굴 제거사업을 실시해야 하겠다. ㈜경농이 사업중인 칡덩굴 전문약제 ‘하늘아래 미탁제’는 덩굴성 칡을 포함하여 잡관목 등 효과적으로 방제할 수 있는 제초제라고 한다. 3. 다방동 고유 지명의 회복 양산시립박물관의 신용철 관장은 19세기 초반에 제작한 '양산군지도'(梁山郡地圖)를 구입하였다. 최근 일본 요코하마 경매에 나와 한 개인이 사들인 것을 양산시립박물관이 유물 공개구입을 통해 확보했다고 한다. 양산군지도는 조선 후기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박물관 측은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종이에 수묵담채 기법으로 상세하게 지역을 그린 지방지도로서 웅상지역을 제외한 양산 전체, 구포(부산 북구), 대저 권역까지 포함돼 있다. 기존의 읍지(邑誌) 속에 공개된 군현지도 보다 양산지역 수맥과 영남대로 황산도 지형을 상당히 상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지도는 제작 당시 방안선을 전체적으로 그려 지형 간 거리 비율을 고려했고, 다른 지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다방'(茶方), '주점'(酒店) 등을 써넣어 옛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다방동은 차나무가 많은 동네여서 다방(茶房)이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 1914년 일제 때 많을 다(多), 꽃다울 방(芳)으로 마을 이름을 변경했다. 자연생 차나무가 많은 마을이므로 다방(茶房)으로 부르는 게 자연스럽고 운치가 있다. 원래의 다방으로 돌아가야 하겠다. 본래 읍내면에 속해 다방리(茶房里)라고 불렸으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동으로 승격되어 다방동(多芳洞)이라 하였으며, 1918년 읍내면이 개칭된 양산면에 속하였다. 양산군지도에서는 다방(茶房)이 아니고, 다방(茶方)리로 표기되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다연원(茶淵院)이라 하여 차 마시는 장소가 있었으며, 고려시대는 다방(茶房)이라는 용어도 등장한다. 고려시대의 다방은 차와 술, 과일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국가기관이었다. 고려시대는 팔관재(八關齋), 공덕재(功德齋) 등의 불교의식과 관련하여 차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사찰에서는 차촌(茶村)을 두어 차를 재배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는 다방(茶房)이 이조(吏曹)에 속하는 관사로서 차례(茶禮)라는 명목으로 외국사신들의 접대를 맡아 보았다. 1405년(태종 5) 다방도목(茶房都目)이 제정되었고, 1411년 새로 부임한 관리는 모두 다방에 속하게 하였다. 1447년(세종 29)에 사준원(司罇院)으로 승격되었다. 관원으로는 약 15명 정도가 있었고, 별감(別監), 행수(行首), 도목(都目) 등의 직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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