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4 (토)

  • 맑음속초7.2℃
  • 구름조금5.7℃
  • 맑음철원2.6℃
  • 맑음동두천5.0℃
  • 맑음파주5.0℃
  • 맑음대관령1.7℃
  • 구름많음백령도3.9℃
  • 맑음북강릉7.2℃
  • 맑음강릉8.9℃
  • 맑음동해7.2℃
  • 맑음서울5.8℃
  • 맑음인천4.6℃
  • 맑음원주5.3℃
  • 비울릉도4.2℃
  • 맑음수원6.1℃
  • 맑음영월7.0℃
  • 맑음충주6.0℃
  • 맑음서산6.1℃
  • 맑음울진8.9℃
  • 맑음청주7.3℃
  • 구름조금대전8.8℃
  • 맑음추풍령6.1℃
  • 맑음안동8.1℃
  • 맑음상주7.8℃
  • 맑음포항11.2℃
  • 구름조금군산7.9℃
  • 구름조금대구9.1℃
  • 구름많음전주7.9℃
  • 맑음울산10.6℃
  • 맑음창원9.7℃
  • 맑음광주9.7℃
  • 맑음부산12.0℃
  • 맑음통영12.8℃
  • 구름조금목포6.5℃
  • 구름조금여수11.2℃
  • 구름많음흑산도7.0℃
  • 구름많음완도10.3℃
  • 구름조금고창7.4℃
  • 구름조금순천9.2℃
  • 구름조금홍성(예)6.2℃
  • 구름많음제주10.8℃
  • 구름많음고산9.6℃
  • 구름많음성산10.2℃
  • 구름많음서귀포13.7℃
  • 맑음진주11.6℃
  • 맑음강화4.5℃
  • 맑음양평6.6℃
  • 맑음이천7.0℃
  • 맑음인제6.2℃
  • 맑음홍천6.6℃
  • 맑음태백4.3℃
  • 맑음정선군5.2℃
  • 맑음제천5.9℃
  • 맑음보은7.0℃
  • 맑음천안6.2℃
  • 맑음보령7.0℃
  • 구름조금부여8.4℃
  • 구름조금금산8.0℃
  • 구름조금부안7.6℃
  • 구름많음임실7.3℃
  • 구름조금정읍7.4℃
  • 구름많음남원8.9℃
  • 구름많음장수7.0℃
  • 구름조금고창군7.2℃
  • 구름조금영광군7.3℃
  • 맑음김해시12.4℃
  • 구름조금순창군8.2℃
  • 맑음북창원8.4℃
  • 맑음양산시12.4℃
  • 구름조금보성군11.0℃
  • 구름조금강진군9.9℃
  • 구름조금장흥9.6℃
  • 구름많음해남9.2℃
  • 구름조금고흥10.3℃
  • 구름조금의령군12.5℃
  • 구름많음함양군10.3℃
  • 구름조금광양시11.2℃
  • 구름많음진도군8.1℃
  • 맑음봉화7.1℃
  • 맑음영주7.0℃
  • 맑음문경7.4℃
  • 맑음청송군7.9℃
  • 맑음영덕10.5℃
  • 맑음의성10.0℃
  • 구름조금구미8.5℃
  • 맑음영천10.1℃
  • 맑음경주시10.5℃
  • 구름많음거창9.7℃
  • 구름조금합천11.2℃
  • 구름조금밀양11.2℃
  • 구름조금산청9.7℃
  • 맑음거제10.8℃
  • 구름조금남해11.7℃

기고/칼럼

전체기사 보기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충렬사 …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충렬사 삼조의열인 양산군수 조영규

1.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성 전투에서 순국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양산의 충렬사는 양산 정신의 근간인 삼조의열 3위(三位)를 비롯해 임란공신 28위, 항일 독립운동 유공자 39위의 충혼을 모신 곳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1535~1592)는 동래부사 송상현(정읍 출신)과 함께 동래성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삼조의열 중의 한 분이자 충효의 상징인 조영규 양산군수는 양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조영규의 자는 옥첨(玉瞻), 본관은 직산(稷山)이며, 수의부위 준(準)의 아들로서 중종 30년(1535) 장성부 백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조영규는 1554년(명종 9년)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초관(訓練院哨官), 사복시 주부, 제주 판관, 무장 현감, 영암 군수, 용천 군수, 낙안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업무를 행함이 엄격하고 투명하였으며, 청렴결백하였고, 나이 들어서는 더욱 독실(篤實)하였다. 무장에 있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해 벼슬에서 풀려 집에 돌아가니 집에는 한 섬의 양식이 없을 정도였으며, 효성도 지극하였다. 1592년(선조 25) 양산 군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읍성에 가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성을 지키고, 나라를 위해 죽을 결심을 하였다. 송상현 부사에게 양산으로 돌아가 모친께 하직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약속하였다. 송상현 부사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가려고 핑계를 대는 줄 알았다. 조영규 양산군수는 아들 조정로(趙廷老)에게 부탁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하여 싸움터에 나아가니 너는 할머니를 잘 모시고 고향에 돌아가라”고 하였다. 조영규 군수는 약속대로 동래읍성으로 돌아와 북문으로 달려갔다. 성을 포위하고 있는 왜병들을 노호(怒號) 질타(叱咤)하며 성문 앞 가까이 이르자 왜병들도 감복하여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송상현 부사를 도와 힘껏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아들 조정로는 할머니를 모시고 한 달이 넘도록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고향인 장성에 도착하여 할머니를 깊은 벽지(僻地)에 모셨다. 부친이 이미 죽은 줄 알고 머리를 풀고 걸어서 동래에 이르니 온 성에 시체가 쌓여 가득하므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초혼(招魂)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허장(虛葬 : 시신 없는 무덤 조성)하였다. 조정로는 적과 함께 하늘을 같이할 수가 없다며, 한 개의 토실(土室)을 지어 문을 닫고 나오지 않고 20년을 애모(哀慕)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1667년(현종 8)에 이르러 장성 사람들이 조영규 부자를 모암 서원(慕巖書院)에 모시고, 2년 후 송준길(宋浚吉)이 왕에게 조영규 부자의 충효를 아룀으로써 정려(旌閭)를 명하고 충효 양문(兩門)을 세우게 하였다. 조영규 정려(趙英圭 旌閭)는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1985년 2월 15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었다. 조영규는 1696년(숙종 22년) 양산 충렬사에, 1709년(숙종 35년) 동래 충렬별사(忠烈別祠)에, 1736년(영조 12년) 동래 충렬사에 각각 모셔졌다. 숙종 때 조영규에게는 호조 참판을, 아들 조정로에게는 빙고 별검(氷庫別檢)을 각각 추증하였다. 2. 동래부순절도에 묘사된 조영규 양산군수 조영규 양산군수는 보물 제392호인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에 나와 있다. 1963년 9월 1일 보물 제392호로 지정되었다. 견본설채(絹本設彩). 1폭. 145×96cm. 육군사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동래부의 전속 화원(畵員)인 변박(卞璞)이 1760년(영조 36년)에 개모(改摹)하였다. 원래는 송상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안락서원(安樂書院)에 봉안되어 있었다. 1592년 4월 15일 왜구에 맞서 대항하다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동래부민의 저항을 중심으로 동래성의 전투 상황을 묘사한 일종의 전쟁기록화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동래부순절도의 제작은 원래 1658년(효종 9년) 동래부사 민정중(閔鼎重)이 처음 구상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1709년(숙종 35)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이 사당을 짓고 그 벽 좌우에 벽화 형식으로 처음 시도한 것이다. 그 후 1760년(영조 36년) 동래부사 홍명한(洪名漢)이 훼손된 순절도를 동래 사람 변박(卞璞)에게 다시 그리도록 하고 그 그림을 충렬사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조선에 상륙한 왜군은, 14일에 부산진(釜山鎭)을 공략하고, 15일에는 동래부를 공략하여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 등 군민(軍民)이 모두 순절하였다. 부산진 순절도와는 달리 교전 양상을 다양하게 설명하였으며 사경(寫景)을 곁들인 부성(府城)을 부감압축(俯瞰壓縮)시켜 교전에 얽힌 설화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모든 형상의 등차비례(等差比例)가 상당히 간과되었으나 권계(勸戒)를 목적으로 한 이 그림의 초점은 절의의 상징인 송상현과 비충겁약(非忠怯弱)한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을 서로 대조시킨 데 있다.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에 게안(揭安)되어 있다가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비겁한 경상좌병사 이각은 동래읍성을 벗어나 울산병영성으로 돌아와 첩과 재물을 도피시키고, 또다시 탈출하였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한양을 지나 임진강까지 도망을 갔다. 한강 방어선을 지키지 않고 후퇴하는 도원수 김명원 부대로 합류하였다. 경상도에 있어야 할 이각을 본 도원수 김명원은 이각을 참수하였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보유한 함선과 장비들을 파기하였다. 왜군의 갑작스런 대규모 기습을 받아 경상좌수영 진포 태반이 쓸려나가며 제때 대응하지 못했고 이후 동래성으로 향했으나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 동래성 구원을 포기하고 한양으로 후퇴했다. 이후 좌위대장에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패했다. 그 뒤로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다.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귀향하다 병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울산군수 이언성은 동래성을 구원하러 왔다가 왜군에 포로가 되었다. 왜군은 나중에 이언성에게 강화를 요청하는 서찰을 주어 석방하였다. 이언성 군수는 서찰을 전하지 않고 도망쳐 왔다고만 변명하였다. 이런 비겁한 관리들에 비하면 조영규 양산군수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영원한 충신이 되어 양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충렬사에 모셔졌다. 2. 동래부사 권이진의 상소 숙종 36년 11월 10일(1710년) 동래 부사(東萊府使) 권이진(權以鎭)이 장계(狀啓)를 올렸다. "임진 왜란(壬辰倭亂) 때에 양산 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圭), 동래 교수(東萊敎授) 노개방(盧蓋邦), 제생(諸生) 문덕겸(文德謙), 비장(裨將),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希壽), 부리(府吏) 송백(宋伯), 부민(府民) 김상(金祥), 송상현(宋象賢) 부사(府使), 겸인(傔人) 신여로(申汝櫓)가 국난(國難)에 함께 순절(殉節)하였으니, 포장(褒奬)을 더하여 윤상(倫常)을 부지(扶持)함이 마땅한데, 쓸쓸히 1백 년 동안 절일(節日)에 한 그릇의 밥을 놓고 충혼(忠魂)을 위로한 적이 없었습니다. 신이 이미 여러 사람이 순절(殉節)한 옛 땅에 빈 터를 사서 조영규(趙英圭)를 제사하게 하고 노개방과 제생 문덕겸은 또 낭무(廊廡)를 지어 제사하게 하였습니다. 비장(裨將)·부리(府吏) 이하 항절(抗節)한 자들에게 사액(祠額)을 내려 주시고, 관원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셔서 1백 년의 충혼(忠魂)을 위로하고, 변민(邊民)의 관첨(觀瞻)을 용동(聳動)시키소서." 하였다. 조선 숙종 37년 2월 21일(1711년) 동래 부사(東萊府使) 권이진(權以鎭)이 상소(上疏)하였다. 충렬사(忠烈祠) 별묘(別廟)의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윤문거(尹文擧)가 부사(府使)가 되었을 때에 사당[廟] 가운데에 별옥(別屋)을 지어 정발(鄭撥)을 따로 향사(享祀)하려고 했으니, 이에 별묘(別廟)를 만들어서 다른 사절 제인(死節諸人)을 향사하였습니다. 신이 도임(到任) 초에 즉시 그 자리에 별묘(別廟)를 세워서 양산 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圭), 교수(敎授) 노개방(盧盖邦) 이하 여러 사람을 향사하였는데, 예조(禮曹)에서 계하(啓下)한 관문(關文)에 별묘(別廟)를 철거하고 본사(本祠)에 합향(合享)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민(吏民)이 반드시 별묘를 세우려고 하는 데는 다 곡절(曲折)이 있는데, 본묘(本廟)가 협착(狹窄)하여 반드시 뜯어고쳐야 하고 별묘(別廟)를 철거하여 옮기는 데도 또한 공력(功力)을 허비하게 되니, 청컨대 다시 처분(處分)을 내려 주시어 읍인(邑人)의 소망을 위로하소서." 하고, 끝으로 해변을 방어하는 일을 여러 조목(條目) 논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충렬 별묘(忠烈別廟)는 임진년(1712) 5월에 복계(覆啓)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칼럼/춘추공원의…

심상도 박사의 화요칼럼/춘추공원의 역사 문화 자원과 공원개발

1. 춘추공원의 유래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학 박사 심 상 도 춘추공원은 양산시의 대표적인 근린공원으로 생활권 공원의 하나이며, 면적 규모로 보면 도시 지역권 근린공원이다. 춘추공원은 면적 740,000m²의 근린공원으로 조성될 계획이다. 춘추공원은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도시 관리 계획으로 결정된 근린공원이며 2010년까지 공원개발을 하였다. 춘추공원은 양산의 역사 위인을 기리고, 양산시민들에게 애향의 정신을 전승하고 시민들의 휴식 공간 및 화합의 장소로 활용할 수 있는 도시 지역권 근린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하여 2003년 3월부터 공원에 편입된 토지를 매수하기 위한 협의가 시작되었고 2004년 5월~6월 실시 설계 용역을 실시하였으며 2007년 3월 교통 영향 평가 심의를 결정하였다. 지난 2010년까지 공원조성을 위한 계획을 추진하면서 토지매입을 하였다. 춘추공원 지역은 옛날부터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었으며 애향 단체인 춘추계가 공원 이름을 춘추원으로 고쳐 부르고 삼조의열비를 세우고, 입구에 삼조의열단(三朝義烈壇), 삼조의열(三朝義烈), 만년춘추(萬年春秋)란 석각 기둥을 세운 양산의 정신적 명소로 자리매김해왔다. 장충단의 삼조의열비는 원래 양산읍내에 있던 것을 춘추원으로 옮겨왔다. 삼조의열비는 충렬사를 건립하며 또다시 옮겼다. 그 후 춘추공원에는 김서현 장군 기적비, 윤현진 의사 비, 이원수 노래비가 세워졌다. 일제 때 일본인들은 봄철이면 춘추공원에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 '도산원(挑山園)'이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36년에 발간된 『면세개람(面勢槪覽)』(1936)에 "봄에는 벚꽃과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가을에는 단풍이 절경이고, 겨울은 설경을 볼 수 있는 공원으로 500년이 넘는 포구나무가 오랜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복 후 1949년 5월 양산의 애향단체인 춘추계에서 공원 이름을 춘추원으로 고쳐 부르다가 지금은 춘추원과 춘추공원이 두루 쓰이고 있다. 춘추공원은 양산시 중심가를 흐르는 양산천 서쪽, 교동 157-1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신불산이 남으로 뻗어내려 영축산을 이루고, 한편 서남으로 내려오면서 선암산을 거쳐 마고산성에 이르러 원맥은 오봉산으로 뻗고 한 줄기는 양산읍을 향해 동남으로 비켜 백로봉(白鷺峰)에 다다른 곳이 곧 춘추공원이다. 춘추원사라는 절이 있는데, 옛날에는 흥무사라고 하였다. 백로봉에는 6·25 전몰군경의 충혼탑이 있고, 장충단 뜰 아래에는 이원수 노래비가, 그 아래에는 3·1 독립투사 윤현진의 비와 신라 김서현 장군비가 있다. 공원 서편에는 국궁장인 춘추정(春秋亭)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충혼탑은 6.25 전쟁 당시 북한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구국의 길에 나서 용감하게 싸우다 승화한 용사들의 유업과 현충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8년 7월 양산군에서 군민의 성금으로 건립하였다. 1994년 8월 양산군에서 봉안각을 신축하여 춘추원사에 모셔져 있던 위패를 이전 봉안하였다. 현재 봉안각에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산화한 영현 765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충혼탑은 양산시의 대표적 현충시설로서 2006년 충혼탑을 총사업비 9억 5천만 원을 들여 재건립하였다. 국비(분권교부세) 2억 6천 6백만 원, 지방비 6억 8천 4백만 원을 투입하였다. 2007년에는 충혼탑 주변 난간대 및 용사상 5위를 양산시비 3억 원을 들여 설치하였다. 진입도로가 협소하여 생기는 참배객들의 불편을 덜기 위해 직선화 계단 조성 사업을 실시하여 245계단을 설치하였다. 2. 춘추공원의 역사적 인물 춘추공원 입구에는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의 부친인 김서현 장군을 기리는 비석이 서있다. ‘신라대양주도독김서현장군기적비’라고 적혀있다. 김서현 장군은 만노군 태수, 소판으로서 대양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양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를 역임하였고 관등은 이찬에까지 이르렀다. 삼국사기 제43권 김유신 열전 하(下)에는 양주총관(良州摠管)으로 나온다. 김무력 장군의 아들인 김서현 장군은 양주 총관이 되어 여러 차례 백제와 싸워서 예봉을 꺾음으로써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변경의 백성들은 편안히 농사에 종사하였고, 나라의 근심을 덜게 되었다. 김서현 장군의 부친인 김무력 장군의 묘소는 통도사 근처에 있다. 김서현 장군과 그의 부인인 만명(萬明)을 그린 부부상 그림은 양산 신기리 신기산성 성황사에 모셨던 초상화로 20세기 전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2001년 5월 3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9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의 취서사(鷲棲祠)에서 보관하고 있다. 지역민들은 신기산성 성황사 사당을 중수하고 1년에 한 차례씩 제사를 올린다. 독립투사 우산(右山) 윤현진(尹顯振) 선생은 양산 출신으로 1914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신익희, 김성수, 장덕수, 송진우 등과 조국광복동맹결사단을 조직,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안희제 선생과 비밀 결사인 대동청년당에서 활동하였다. 양산에 의춘학원(宜春學院)을 설립하여 후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지사인 이시영, 이동녕, 김구, 이회영, 노백린, 여운형, 신익희 등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윤현진 선생은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정 문제 해결에 힘썼다. 항일독립투사 윤현진 선생의 흉상과 기념비를 춘추공원 내에 세웠다. 청동주물로 제작된 흉상은 높이 2.3m, 좌대 가로 3.1m, 세로 1.5m로 조명을 설치하였다. 흉상은 윤현진 선생이 27세 때 상해 임시정부 재무차장(현재 기획재정부 차관) 재직 당시 찍은 사진을 토대로 얼굴과 양복 입은 모습을 참고해 제작했다. 윤현진 독립투사의 손자 윤석우 씨의 인물 고증도 거쳤으며, 2017년 12월 18일에 거행된 흉상 제막식에는 손자도 참석하였다. 춘추공원에는 ‘고향의 봄’ 작사가인 이원수(1911~1981) 선생의 노래비가 있다. 전국민, 해외동포가 즐겨 부르는 노래인 '고향의 봄' 작사가 이원수 선생은 우리나라 근대 어린이 문학, 문화운동의 선구자이며, 어린이 문학을 어른의 눈이 아닌 어린이의 눈으로 보고 쓴 분이라 칭송받고 있다. 양산의 북정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양산에 거주했기에 양산시는 추모사업을 진행했으나 호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친일파 논쟁으로 중단되었다. 이사 간 마산에서 추모사업을 하고 있어 안타깝다. 유족은 양산에서 탄생한 것을 인정하였다. 3. 춘추공원 개발 예산 63억 원으로 춘추공원 내부인 교동 306번지에 조성하는 양산독립공원은 전체 부지면적 4,102㎡, 기념관 연면적 1,025㎡(지하 2층, 지상 1층) 규모로 건립된다. 독립공원은 기념관, 조형물, 추모공간을 금년 말에 착공하여 2020년에 준공 계획으로 추진되고 있다. 윤영석 의원은 독립공원 조성을 위해 독립운동에 관련된 토론회를 열고, 박승춘 국가보훈처장과 기획재정부를 비롯한 중앙부처 담당자들과의 면담 설득 등을 통해 국비 18억 원을 확보한 바 있다. 양산시는 지난 10월까지 9천 6백만 원을 들여 교동 일대 74만㎡ 규모의 춘추공원 조성계획변경을 위해 용역을 진행하면서 주민 의견을 수렴한 바 있다. 춘추공원의 시설이 시민 편의 위주로 대폭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역사교양지구와 운동시설지구로 나누고, 역사교양지구는 추모문화 공간과 숲 체험 공간, 정원문화 공간으로 세분하여 개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숲 체험 공간에는 인공폭포(254㎡), 북카페(571㎡), 숲속 놀이터(1716㎡), 정원문화 공간(5,510㎡)에는 보타닉 가든과 가든광장, 운동시설지구에는 관람석이 있는 축구장(1만 895㎡), 화목원(1,027㎡), 피크닉장(1,339㎡), 어린이 놀이터(1,881㎡) 등이 추진된다. 공원 입구에서 충혼탑까지 모노레일 설치를 검토 중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춘추공원 개발의 문제점으로 유의할 사항은 난개발과 홍수 피해 등이 있다. 춘추공원 아래 마을인 향교가 있는 교동은 비가 많이 내리면 상습 침수 피해를 입는 지역이다. 2016년 10월 5일에 태풍 차바가 양산을 지나가면서 많은 비가 내려 피해가 컸다. 교동의 향교 근처 마을도 침수되었는데, 저지대라는 측면도 있지만 배수장 수문관리도 부실하여 인재가 겹쳐 피해가 커졌다. 당시 심경숙 양산시의원이 확보한 배수장 CCTV에는 수문을 늦게 닫은 것으로 나왔다. 춘추공원과 충혼탑, 충렬사 등 양산을 대표하는 공원과 역사유적지를 찾는 방문객을 위해 마련된 주차장이 주중에는 인근 기업체 직원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어 주차하기 힘들어 대책이 요구된다. 김해양산환경운동연합은 공원 개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반대를 하고 있다. 앞으로 제반 환경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여 난개발을 방지해야 하겠다.

배 모양으로 생긴 배내골과 배가 …

배 모양으로 생긴 배내골과 배가 드나든 선리 선창가

1. 배내골은 배 모양의 행주형 모습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원동면 배내골의 고점마을, 대리, 선리, 장선리 등은 깊은 골짜기에 길쭉하게 이어져 풍수지리학적으로 배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행주형이라고 한다. 배내골을 하나의 배로 가정할 때 배내골의 두 진입로 중 해발고도가 낮은 영포리에서 들어오는 배태고개를 뱃머리로 보았으며, 약간 더 높은 배내고개를 배의 뒷부분인 선미로 여겼다. 배내골을 감싸고 있는 영남알프스 남서부, 남동부 능선은 각각 밀양 얼음골이나 양산 통도사에서 보면 거의 직벽이라 양쪽 산줄기를 배의 측면으로 간주했다. 옛날에는 행주형 지세에서 배가 떠나면 마을이 망한다 하여 풍수 비보(裨補) 차원에서 인근에 지명으로나마 포구를 만들었다. 배태고개 아래 마을인 원동면 영포리(泳浦里), 내포리(內浦里), 함포리(含浦里) 등이 포구와 연관 있는 지명이다. 지명에 포(浦)가 들어가면 포구(浦口)였을 가능성이 높다. 옛날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원동천을 통해 배가 들어올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상류인 내포리, 영포리까지도 하천따라 배가 드나들 수 있었다. 안동 하회마을은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짐을 싣고 떠나가는 배의 모양인 행주형이다. 하회(河回)마을은 조선시대 영남의 4대 길지였고, 오늘날에는 경주 양동마을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이곳은 미국 부시 대통령 부자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하기도 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마을이다. 하회마을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수행하여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를 구할 위대한 인물인 이순신 장군의 인물 됨됨이를 일찌감치 알아보고 파격적으로 발탁하게 한 서애 류성룡(1542~1607)이 태어난 곳이다. 류성룡의 9대조 류난옥은 자손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만한 땅을 구하기 위하여 지관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터를 정하고 3대에 걸쳐 적선을 한 후 서애의 6대조 류종해 공이 이곳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그 후 600여 년을 이어오면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하회마을은 산태극, 수태극, 태극형(太極形, 산과 물이 태극 모양)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물위에 떠 있는 연꽃 모양)이다. 백두대간 태백산맥에서 뻗어온 지맥이 화산(花山, 327m)을 이루고 낙동정맥에서 뻗어온 지맥이 남산과 원지산, 부용대를 이루면서 서로 만난 곳을 낙동강물이 S자로 감싸주면서 돌아 마을이름을 물돌이동 하회(河回)라고 지었다. 2. 배내골의 선리 선창가 양산시 원동면 선리 마을에 실제로 배가 드나들던 선창(船倉) 마을이 있었다. 배내골에는 하천이 있는데, 흔히 배내천이라 하지만 공식 이름은 단장천이고 마을 곳곳에 단장천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옛날에 심심산골인 배내골에 배가 사람과 짐을 싣고 드나들었다고 하면 양산 시민들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현재는 밀양댐으로 인해 물길이 완전히 막혔지만 예전에는 배가 다닐 수 있었다. 배내골에서 흘러내리는 단장천은 밀양으로 연결되어 단장면, 산외면을 거쳐 밀양시 내일동에서 훨씬 큰 강인 밀양강과 이어진다. 밀양강은 삼랑진읍 삼랑리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삼랑진(三浪津)’이라는 명칭 자체는 삼랑진읍에 있는 삼랑리에서 따온 것이다. 삼랑리는 석 삼(三), 물결 랑(浪), 나루 진(津)으로 세 개의 물결이 합해지는 곳이다. 삼랑리는 옛날에 낙동강 조창(漕倉)이 있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낙동강과 밀양강이 만나고, 거기에 큰 조차(潮差)로 인해 부산 인근의 남해 바닷물도 역류해와 3개의 물결이 있다는 데서 삼랑리라는 지명이 만들어졌다. 배내골 선리 마을에 있는 ‘선리 선창가’ 안내판에 배내골에서 밀양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연결되는 물류 흐름이 잘 나타나 있다. 시 한 수가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 “버드나무 꺾어드리며 눈물로 그대를 이별한 곳/ 기약 없는 그대 기다려 망부석이 될지언정/ 오늘도 물안개를 맞으며 이곳에 서있습니다.” 필자가 방문한 11월 25일 오후에 마침 가랑비가 흩날리고 있어 물안개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집으로 오는 길에 에덴밸리 리조트 정상에는 실제로 안개가 자욱하였다. 선리 선창가 안내판에 적혀있는 시와 실제 기상이 맞아떨어진 것은 필자의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역사 유적지를 찾아 열심히 현장을 다니다 보면 이런 운이 찾아오는 것 같다. 배내골 선리 마을의 선창가에서 주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배에 싣고, 단장천을 따라 밀양의 단장면 소재지에 팔기도 하고, 단장천에서 더 내려가 밀양강을 만나 밀양의 각 지역에도 판매하고, 더 내려가 낙동강에 도달하여 삼랑진, 김해 등지에도 팔았다. 옛날에 먹고살기 위해 나룻배를 타고 선리 선창가를 출발하여 단장천을 따라 내려가 단장면 장터 등에 농특산물을 팔고, 돌아올 때는 생활필수품을 사오는 고된 여정을 이어나갔다. 선창가는 배내골 주민들의 삶의 애환이 서린 역사적인 현장이다. 선창이 있었기에 이곳에는 뱃사공을 위한 주막도 형성되었을 것이다. 3. 일제의 풍수 탄압과 지명의 강제 변경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배내골이 풍수지리적으로 배 모양의 행주형이고, 산천이 수려하기 때문에 큰 인물이 탄생할 것을 우려하여 지명을 강제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양산의 다방 마을 역시 일제 강점기 때 한자 지명이 바뀐 사례가 있다. 양산시 다방동은 차나무가 많은 동네여서 옛날부터 마을 이름을 다방(茶房)이라고 하였다. 차(茶)와 연관된 지명은 일제강점기 때인 1914년 많을 다(多) 꽃다울 방(芳)으로 마을 이름을 변경했다. 꽃처럼 아름다움이 넘치는 마을도 좋은 이름이지만 차나무가 자생하는 마을이라는 상징성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한글로 발음할 때는 여전히 똑같지만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선리에 있는 배내골 홍보관 입구에 가면 개울 옆에 배가 한 척이 떠 있다. 농림부의 ‘배내골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을 할 때 ‘선리 선창가’를 스토리텔링하여 마을의 유래를 설명하는 안내판, 돛단배 조형물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소공원을 조성하고 실내 체육관을 건립하였다. 원동면 영포리에는 원동매화축제의 기반시설인 쌍포매실다목적광장에 센터, 주차장을 조성하였다. 이 사업 덕분에 원동매화 축제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2007년 당시 배내허브랜드의 정석진 대표가 추진위원장을 맡아서 양산 최초로 농림부 공모사업에 도전하여 따낸 농촌개발 사업이었다. 지금은 농림부의 일반농산어촌 개발사업으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양산의 읍면 지역에서 실시되는 농촌개발사업은 현재 그 권역의 역사와 문화를 스토리텔링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초창기에 옛날 배가 드나들던 선창의 유래를 밝히고 배 조형물을 세운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한민족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풍수지리설을 악용하였다. 위대한 인물이 탄생하지 못하도록 명산의 정상에 지기를 억제하기 위해 쇠말뚝을 박기도 하였다. 일제는 쇠말뚝을 박아서 지맥을 끊는 풍수 침략을 자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혹자는 이런 일이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일제의 악랄성은 역사, 문화 전반에 걸쳐 교묘하게 진행되었다.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라꽃으로 사랑한 무궁화나무를 전국 곳곳에서 뽑아 불태우기도 하였다. 종교 탄압과 아울러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칼럼/소설가 김…

심상도 박사의 화요칼럼/소설가 김정한 선생의 수라도와 용화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소설 수라도 수라도는 김정한 선생이 1969년 6월 『월간문학』 8호’에 발표한 중편 소설이다. 이 작품은 구한말부터 광복 직후에 이르는 `가야부인`의 일생을 통하여 ‘허진사’ 가족의 역사와 한민족 수난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이다. 작가 김정한은 “역사를 과거의 일로서만 묻어 버리지 않고 현재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보고 싶다.”고 했는데, 이러한 작가 정신은 외손녀 분이의 회상 속에서 가야부인의 일생이 밝혀지는 소설 구성으로 이어진다. 민족의 수난사를 바라보고 직접 그 가운데 위치했던 가야부인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수라도’(악귀 세계)를 헤치는 고행의 연속이다. ‘수라도’라는 소설 제목은 우리 민족이 살아온 역경의 시공간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여성으로서 인고, 처절, 초월의 삶을 살아온 가야부인의 불교적인 역경 극복 방식을 암시하기도 한다. 오봉 선생의 서릿발 같은 기상과 지조는 우리 전통 유학의 혼을 당당히 계승하고 있다. 가야 부인의 효성 역시 유교에서 강조하는 전형적인 여인상에서 비롯된다. 시아버지 오봉 선생의 대쪽 같은 성품이 일제의 억압적 상황과 맞지 않아 집안은 온갖 시련을 겪어야 했다. 시할아버지 허 진사는 한일합방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서간도에서 유골로 돌아오고, 시동생 밀양 양반은 3.1 운동 때 일제에 죽임을 당하고, 오봉 선생은 한산도 사건이라는 애국지사 박해 사건에 걸려 갖은 고초를 겪는다. 가야부인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수용해나가며 가족을 위한 살신성인에 가까운 헌신,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 자애로운 정신, 불의의 세력에 맞서서 투쟁하다 옥고를 치르는 시아버지 오봉 선생을 공경하는 지극한 효성은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의 며느리다운 고결한 품격을 보여준다. 2. 미륵당과 용화사 가야부인은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의 희망을 보기 위해 미륵불에 의존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미륵불 신앙이 희망의 신앙으로 수용되어 폭넓게 전승되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억 7천만 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부처님이다. 미륵불의 세계인 용화세계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현실세계에서의 갖가지 노력이 요청된다. 즉,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독송하거나, 옷과 음식을 남에게 보시하거나, 지혜와 계행(戒行)을 닦아 공덕을 쌓거나, 부처님에게 향화(香華)를 공양해야 한다. 고통받는 중생을 위하여 깊은 자비심을 내거나, 인욕과 계행을 지켜 깨끗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기르거나, 절을 세워 설법하거나, 탑과 사리를 공양하며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생각하거나, 사람들을 화해시켜 주거나 하는 등의 공덕으로 용화회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소설 ‘수라도’ 중 미륵당을 묘사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강 건너 고암산이 이쪽 미륵당 아래의 강 구부렁이로, 그 웅장한 그림자를 쑥 내밀고 있었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다. 물빛이 한결 시퍼런 강 구부렁이 쪽으로 사타구니가 벌어져간 골짜기의 오목한 부분에, 미륵당이란 절이 납작하게 앉아 있다. 그래서, 모신 미륵불은 어지간히 크긴 해도 절 이름을 미륵암이라고 부르지 않고, 보살 할머니들은 그저 미륵당이라고만 불렀다’ 미륵당은 이 소설의 핵심 배경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가야부인은 허 진사의 입제날(제사 하루 전날)에 제사상을 봐 황산 베리를 지나다가 바람이 너무 불어 잠시 피할 곳을 찾는다. 그러다 우연히 땅에 묻혀 있던 미륵불을 발견하게 되고 절을 지어 모시기로 한다. 미륵당이 서게 된 배경이다. 가야부인은 시집간 고명 딸이 괴질로 죽었다고 하여 솔밭 속에 체봉(가매장)해 놓은 것을 원통해 한다. 집안 몰래 그녀는 사위를 시켜 불가의 방식으로 화장을 한다. 그리고 뼛가루를 돌부처가 있는 곳으로 가지고 가서 불공을 드리고 강에 뿌린다.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꿈이 꺾이는 것 같아서 가야부인은 절을 짓지 못하면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사위가 대신 절을 짓겠다고 한다. 사위 집에서 같이 묵으면서 일을 서둘러 절을 거의 마무리해 갈 무렵 오봉 선생이 일경에 붙잡혀 구금된다. 불온한 시를 지었다는 죄명이다. 대동아전쟁은 얼른 끝나지 않고 공출과 징용만 늘어간다. 친정에서 데려다가 식모라기보다는 양딸처럼 길러온 옥이에게 정신대 징용 영장이 나온다. 옥이는 이를 비관하여 자살을 기도한다. 절을 지으면서 정이 들었던 가야 부인의 사위 박서방은 옥이가 배에 오르려던 순간에 나타나 자기의 처로 호적에 실은 호적등본을 보여주고 옥이를 구출한다. 두 사람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결혼한다. 해방이 되자 가야부인의 자손들은 큰 벼슬을 하고 가야부인도 큰 소리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떠들어 대지만 친일파가 득세한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학병을 피해 도망다니던 가야부인의 막내아들은 이를 비관하여 반거충(무엇을 배우다가 중도에 그만두어 다 이루지 못한 사람)이가 된다. 가야부인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집에서는 시어머니처럼 천수나 치고 미륵당에 나가면 미륵불 앞에 나가서 가만히 눈을 감고 지낸다. 물금 용화사에 미륵불이 모셔지게 된 설화도 수라도의 미륵당 이야기와 비슷하다. 오래전 어느 농부가 낙동강에서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하는 물체를 발견하고 건졌더니 그것이 미륵불이었다. 한 스님이 건져다가 용화사에 모셨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김해시 상동면 감로리 절터에 있던 미륵불을 1947년에 옮겨왔다고 한다. 소설가 김정한 선생의 처가가 원동면 화제리였기 때문에 이러한 전설을 이미 알고 소설 수라도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3. 불교 신화의 아수라와 한일 분쟁 아수라(Asura)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숨, 생명’을 뜻하는 ‘아수(asu)’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점차 힌두교의 주신들과 대립하는 악신(惡神)의 일족으로 여겨지게 되면서 천계의 신들을 뜻하는 ‘수라(sura)’에 부정을 뜻하는 ‘아(a)’라는 접두어가 붙어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하는 속설도 나타났다. 한자로 비천(非天)·비류(非類) 등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아수라는 인도의 많은 신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부터 숭배되었던 신으로 베다 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생명과 생기(生氣)를 관장하는 선신(善神)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힌두교의 주신들인 브라흐마(Brahma)·비슈누(Vishnu)·시바(Shiva) 등에 대한 숭배가 확립되면서 점차 이 신들과 대립하는 악신과 그의 일족들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수라와 신들 사이의 전쟁이 인도 신화의 중요한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불교는 인도의 신화를 수용하여 그것에 등장하는 신들을 부처의 가르침에 감화하여 불법을 지키는 신장(神將)들로 변화시켰다. 그러면서 그 신들을 천룡팔부(天龍八部)나 팔부중(八部衆)이라고 불리는 8개의 종족으로 구분하여 ‘팔부신중’이라고 하였는데, 아수라도 야차(夜叉), 건달바(乾闥婆), 가루라(迦樓羅) 등과 함께 팔부신중의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팔부신중(八部神衆) 가운데 하나인 불교의 수호신이다. 보통 세 개의 얼굴과 여섯 개의 팔을 지닌 삼면육비(三面六臂)의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여덟 개나 네 개의 팔을 지닌 삼면팔비(三面八臂)나 삼면사비(三面四臂)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불교 전승에서 아수라는 수미산(須彌山) 북쪽에 살면서 제석천(帝釋天)과 싸움을 영원히 계속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아수라가 제석천과 싸운 장소를 아수라장(阿修羅場)이라고 하는데, 싸움이 벌어져서 매우 시끄럽고 혼란한 장소나 상태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의 사정이 수라도에서 상징하는 아수라장과 비슷하다.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는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 시절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한일 양국 정부간에 타결된 합의이다. 합의문 전문은 한일 정부가 공동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한일 양국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으로, 불가역적으로 종결되었음을 선포하였다. 후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일 위안부 TF 결과 발표와 관련해 이의를 제기하며 문제가 복잡해졌다.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신일철주금의 상고를 기각하고 "신일철주금은 피해자들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원고승소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일본은 이에 대응하여 2019년 7월 1일, 한국에 대해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 리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등 3개 품목 수출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우대)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였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은 11월 23일에 종료되는데, 한국정부는 연장 의사가 없다. 후폭풍으로 아수라장이 연출되지 않기를 바란다. 소설가 김정한 선생의 수라도 무대인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용화사는 안내판이 잘 설치되어 있다. 김정한 조분금 부부는 사후에 양산의 신불산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김정한 선생이 양산을 무대로 쓴 소설인 ‘수라도’, ‘메깃들’, ‘사밧재’, ‘산서동 뒷이야기’, 김정한 선생의 외가인 금산리 등을 관광코스로 연결하여 관광벨트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양산 다방동 차나무 군락지와 고유…

양산 다방동 차나무 군락지와 고유지명 회복/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야생 차나무 군락지 보호 양산숲길보전회에서는 3월 24일 다방동 야생 차나무 군락지 답사를 하며 환경정화 활동을 하였다. 현장에 가보니 칡을 캐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구덩이를 파놓았고 칡도 일부 남겨놓아서 어수선하였다. 답사 전에 낫을 3자루 구입하여 칡덩굴을 제거할 준비를 하였다. 낫은 조상현・정진헌・이기천 회원이 사용하며 굵은 칡덩굴과 잡목을 제거하였다. 나머지 회원들은 차나무를 뒤덮고 있는 칡덩굴과 잡풀 덩굴을 손으로 일일이 걷어냈다. 필자는 6월 13일 이용식 시의원의 고향마을인 안다방마을과 야생 차나무 군락지를 방문하였다. 경부고속도로 개설로 이용식 시의원의 생가는 철거되었는데, 집터를 함께 둘러보았다. 다방마을 마을회관에서 통장과 주민들을 만나 차나무 군락지에 보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을 안내판을 세워 야생 차나무 군락지, 다방동 마을 이름 유래 등을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의원과 야생 차나무 군락지를 둘러보며 차나무 보호대책에 대해 의논을 하였다. 양산시 공공근로를 통하여 차나무 군락지의 칡덩굴 제거, 잡목과 신우대 제거를 당부하였다. 소중한 자원인 차나무 군락지를 보호할 수 있도록 안내판도 세워야 한다고 얘기하였다. 이용식 시의원은 차를 활용하여 녹차 전시관,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였으면 좋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다방동에는 차를 끓이는데 알맞은 황산새미가 있어 안성마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11월 7일 오후에 이시일 시인과 함께 다방동 야생차 군락지를 답사하여 칡덩굴을 제거하기로 논의하였다. 이시일 시인이 낫 두 자루를 준비하였다. 각각 하나씩 들고 야생 차나무 군락지로 올라갔다. 마을을 가로질러 올라가면서 밭 옆으로 난 오솔길을 간신히 찾아서 천천히 걸어갔다. 칡덩굴은 온 사방에 널려 있어 그 끈질긴 생명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칡덩굴이 말라죽은 것이 보였는데, 짐작에 이용식 시의원에게 부탁했던 공공근로로 제거한 것 같았다. 오솔길을 따라가며 보니 작은 차나무가 새롭게 올라오고 있었다. 이시일 시인은 농사지으며 익힌 능숙한 솜씨로 굵은 칡덩굴을 잘랐다. 필자의 어설픈 낫질을 보더니 이시일 시인은 낫을 쉽게 사용하는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 방식대로 하니 한결 쉽게 나무를 자를 수 있었다. 야생 차나무가 많은 곳에 당도하여 열심히 칡덩굴을 잘라내었다. 차나무 역시 생명력이 강하여 온갖 덤불에 짓눌리고 있어도 쉽게 죽지는 않았다. 3월에 덩굴을 제거하고 거의 8개월 만에 와서 관찰해보니 칡덩굴의 성장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2. 칡은 위해(危害) 식물 필자가 어릴 때는 나라 전체가 못사는 형편이었기에 아이들은 봄이 되면 군것질거리로 산에 가서 칡을 캐어 먹거나 찔레를 꺾어 껍질을 벗긴 다음에 먹었다. 곡괭이를 들고 단단한 땅을 파서 칡을 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칡을 캐서 뜯어먹으면 입술이 새파랗게 변했다. 요즘은 칡은 판매하는 분들이 소형 포클레인을 동원하여 쉽게 캐기도 한다. 산림청이 조사한 덩굴류 분포 산림은 약 4만ha로 4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방제를 위해서는 물리적 제거와 화학적 제거로 나눌 수 있는데, 물리적 제거는 칡 생육기에 지상부 예초작업과 주두부 굴취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런 물리적 방법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완전방제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 화학적 방제방법은 전문 약제를 사용해서 방제하는 것인데, 고독성 약제의 환경문제와 주변 농작물로의 2차 피해 등 안전 문제가 발생한다. 칡과 같은 덩굴류는 햇빛을 좋아하고 생명력이 강해서 나무를 타고 올라간다. 칡덩굴은 나무를 감아 돌아가서 목을 조이듯이 뒤덮어 버리기 때문에 사람이 제거해 주지 않으면 나무는 고사한다. 칡은 나무가 광합성을 못하도록 덮어버리고 결국은 나무가 고사하기 때문에 산림 피해가 심각한 실정이다. 칡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 분포하며, 현재는 미국 내 문제 식물로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심각한 위해귀화식물로 분류되어 있다. 칡이 우점된 지역에서는 다른 식물들이 생존할 수 없어 식물다양성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 다년생 식물로 지상부를 제거해도 다시 줄기가 나오고 가을이 되면 종자를 맺어 번식할 뿐만 아니라, 토양 내 덩이줄기에서 뿌리를 지속적으로 내려서 번식하기 때문에 칡 제거에는 많은 노동력과 비용이 발생한다. 충남 홍성군은 올해 들어 11월까지 총 2회에 걸쳐 생활권 주변 임야에 2억 2천만 원의 예산을 투입해 나무의 생육에 피해를 주고 경관을 해치고 있는 칡덩굴을 제거했다. 칡덩굴 제거 사업은 주요 도로변 및 가시권 산림 100ha에 번성한 칡덩굴을 절단하고 약제(글라신액제) 처리 후 약제가 유실되지 않도록 비닐랩으로 밀봉하는 방법으로 실행했다. 홍성군은 지난 5월부터 6월까지 1차 칡덩굴 제거 사업을 진행하고 임야 내 덩굴분포를 재조사해 제거되지 않은 칡덩굴에 대해 지난 10월부터 11월까지 가을철 추가 제거 사업을 실시했다. 양산시도 홍성군처럼 다방동 야생 차나무 군락지의 칡덩굴 제거사업을 실시해야 하겠다. ㈜경농이 사업중인 칡덩굴 전문약제 ‘하늘아래 미탁제’는 덩굴성 칡을 포함하여 잡관목 등 효과적으로 방제할 수 있는 제초제라고 한다. 3. 다방동 고유 지명의 회복 양산시립박물관의 신용철 관장은 19세기 초반에 제작한 '양산군지도'(梁山郡地圖)를 구입하였다. 최근 일본 요코하마 경매에 나와 한 개인이 사들인 것을 양산시립박물관이 유물 공개구입을 통해 확보했다고 한다. 양산군지도는 조선 후기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박물관 측은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 종이에 수묵담채 기법으로 상세하게 지역을 그린 지방지도로서 웅상지역을 제외한 양산 전체, 구포(부산 북구), 대저 권역까지 포함돼 있다. 기존의 읍지(邑誌) 속에 공개된 군현지도 보다 양산지역 수맥과 영남대로 황산도 지형을 상당히 상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지도는 제작 당시 방안선을 전체적으로 그려 지형 간 거리 비율을 고려했고, 다른 지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다방'(茶方), '주점'(酒店) 등을 써넣어 옛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다방동은 차나무가 많은 동네여서 다방(茶房)이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 1914년 일제 때 많을 다(多), 꽃다울 방(芳)으로 마을 이름을 변경했다. 자연생 차나무가 많은 마을이므로 다방(茶房)으로 부르는 게 자연스럽고 운치가 있다. 원래의 다방으로 돌아가야 하겠다. 본래 읍내면에 속해 다방리(茶房里)라고 불렸으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동으로 승격되어 다방동(多芳洞)이라 하였으며, 1918년 읍내면이 개칭된 양산면에 속하였다. 양산군지도에서는 다방(茶房)이 아니고, 다방(茶方)리로 표기되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다연원(茶淵院)이라 하여 차 마시는 장소가 있었으며, 고려시대는 다방(茶房)이라는 용어도 등장한다. 고려시대의 다방은 차와 술, 과일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국가기관이었다. 고려시대는 팔관재(八關齋), 공덕재(功德齋) 등의 불교의식과 관련하여 차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사찰에서는 차촌(茶村)을 두어 차를 재배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는 다방(茶房)이 이조(吏曹)에 속하는 관사로서 차례(茶禮)라는 명목으로 외국사신들의 접대를 맡아 보았다. 1405년(태종 5) 다방도목(茶房都目)이 제정되었고, 1411년 새로 부임한 관리는 모두 다방에 속하게 하였다. 1447년(세종 29)에 사준원(司罇院)으로 승격되었다. 관원으로는 약 15명 정도가 있었고, 별감(別監), 행수(行首), 도목(都目) 등의 직책이 있었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소설가 …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소설가 김정한 선생의 수라도와 화제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1. 소설가 김정한 요산(樂山) 김정한 선생은 1908년 음력 9월 26일 부산시 금정구 남산동 663의 2번지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 범어사 부설 사립 명정학교를 거쳐 동래고보를 나와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고등학교 문과를 다녔다. 김정한 선생이 증조부가 세운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배우다가 12세에 들어간 명정학교는 범어사에서 세운 사립학교였다. 범어사와 명정학교는 만해 한용운과도 관련이 있다. 만해의 불교활동의 중심지였고 ‘불교대전’을 간행한 곳이다. 만해의 제자인 김법린이 범어사에서 스님이 되어 명정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3ㆍ1운동에도 관여하다가 투옥되는데, 김정한은 1919년에 이 학교에 입학했고 3.1운동 당시 상급생들이 범어사와 범어사 입구를 오가며 만세를 부를 때 김정한도 함께 했다는 기록이 있다. 요산은 1931년 조선유학생 학우회에서 펴낸 ‘학지광’의 편집을 맡았다. 1936년 일제강점기의 궁핍한 농촌의 현실과 친일파 승려들의 잔혹함을 그린 ‘사하촌’이 조선일보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 후 ‘항진기’, ‘기로’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민중을 선동하는 요주의 작가’로 지목되기로 하였다. 1940년(33세)에 ‘낙일홍’, ‘추산당과 곁사람들’, ‘월광한’ 등을 발표하였으며, 3월 교원직을 사직하고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인수하여 동래로 이사하여 지국 일에 전념하던 중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피검되었다. 8월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이 시기부터 붓을 꺾고, 경남도청 상공과 산하 면포조합 서기로 취직하여 해방될 때까지 근무하였다. 1947년(40세) 부산중학교 교사로 취임, 1949년(42세) 부산대학교에 출강하고, 경남 중등교사 자격 심사위원으로 위촉, 1950년(43세) 부산대학교 조교수로 발령받았다. 1959년(52세) 제3회 부산시 문화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부산일보 논설 집필, 칼럼 및 수필 등 다수 발표, 경상남도 지명 제정위원에 위촉되었다. 1960년(53세) 5월부터 부산대학교 문리대 문학부장으로서 학장 취임, 1961년(54세) 5.16혁명으로 6월 학교에서 물러나 부산일보 상임 논설위원이 되었다. 1963년(56세) 9월부터 부산대학교에 출강, 1965년(59세) 부산대학교 전임강사로 복직하여 11월 조교수로 승진하였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고문과 1987년 그 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초대 의장을 맡았다. 한국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남해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가졌던 농민 문학에 대한 선생의 관심은 「사하촌」 이후 민족 문학으로 확장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항일 의지가 광복 후 독재 정권 하에서 민주 의지로 승화되었다. 2. 화제리를 배경으로 한 수라도 김정한 선생의 대표작으로 ‘모래톱 이야기’, ‘수라도’, ‘사하촌’, ‘인간단지’, ‘제3 병동’ 등이 있다. 김정한은 1932년에 단편 ‘그물‘을 문학건설에 발표한 뒤, 1936년에 ’사하촌(寺下村)‘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등단하였지만 1940년대 이후에는 거의 절필 상태로 지냈다. 25년 동안 창작을 중단하였다가 환갑을 앞둔 나이(59세)에 ’모래톱 이야기‘를 내놓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후 수라도’, ‘인간단지’, ‘산거족’ 등 빛나는 작품들을 연이어 내놓았다. ‘모래톱 이야기’는 '땅의 문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낙동강 하류의 외진 곳을 무대로 민중의 편에서 이 땅의 부조리함을 고발했다. 1인칭 소설로 되어 있으며 ‘사하촌’ 이후 26년 만의 문단 복귀 작품이었다. 1969년 중편소설 ‘수라도’로 제6회 한국문학상과 부산시 문화상을 받았으며, 1971년 11월 작품 ‘산거족’으로 제3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하였다. 그해 12월에 16편의 역작을 수록한 제2창작집 ‘인간단지(人間團地)’를 발간하였다. ‘수라도(修羅道)’는 김정한이 지은 중편소설로 1969년 6월 『월간문학』 8호에 발표되었고, 1975년 삼중당에서 간행한 같은 제목의 단편집에 수록되었다. 가야 부인이라는 한 개인의 생애를 중심으로,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허씨 문중의 가계와 오봉산 밑 촌락의 변화를 통하여 한국 근대사의 변천을 보여준 작품이다. 소설 제목 ‘수라도’는 불교 신화에서의 아수라를 의미한다. 불교 전승에서 아수라는 수미산(須彌山) 북쪽에 살면서 제석천(帝釋天)과 싸움을 영원히 계속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팔부신중(八部神衆) 가운데 하나인 불교의 수호신이다. 보통 세 개의 얼굴과 여섯 개의 팔을 지닌 삼면육비(三面六臂)의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여덟 개나 네 개의 팔을 지닌 삼면팔비(三面八臂)나 삼면사비(三面四臂)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소설 ‘수라도’는 아수라와 같은 시대적 혼란을 헤쳐가는 가야부인을 통해 유교와 불교의 조화, 신분을 뛰어넘은 인간애, 남녀평등 실천 등을 구현하고자 했던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가야 부인은 김해의 명문가에서 역시 양반 가문인 양산 화제리 허씨 집안으로 시집을 왔다. 그러나 시아버지 오봉 선생의 대쪽 같은 성품이 일제의 억압적 상황과 맞지 않아 집안은 온갖 시련을 겪어야 했다. 시할아버지 허진사는 한일 합방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서간도에서 유골로 돌아오고, 시동생 밀양 양반은 3.1 운동 때 일제에 죽임을 당하고, 오봉 선생은 한산도 사건이라는 애국지사 박해 사건에 걸려 갖은 고초를 겪는다. 일본에 건너가 대학을 다니던 아들은 학병을 피해 숨어다녀야 했고, 양딸 구실을 하던 옥이마저 정신대에 끌려갈 뻔 한다. 가야 부인은 기울어져 가는 집안 살림을 도맡는다. 가야부인은 우연히 산기슭에서 발견한 돌미륵을 모실 미륵당을 지어 의지할 데 없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한다. 시아버지 오봉 선생은 출옥 후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듬해 광복은 되었지만 허씨 문중의 형편은 그 이전보다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친일 행각을 일삼은 집들은 더욱 번창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야 부인은 막내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임종을 맞는다. 3. 김정한 선생과 양산의 인연 김정한 선생은 양산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1932년 양산(梁山) 농민봉기사건에 관련하여 피검되어 학업을 중단하였다. 양산과 관련된 소설은 ‘수라도’, ‘메깃들’(현대문학.1959.7), ‘사밧재’(현대문학.1971.4) 등이 있다. 김정한은 1927년(20세) 3월에 경남 양산군 하서면 화제리 풍양인 조희원 씨의 장녀 조분금(趙分今)과 결혼하였다. 1996년 11월 28일에 89세를 일기로 타계하여 부산 남천성당에서 사회장을 치르고, 양산의 어곡동 신불산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부인 조분금 여사가 2004년 11월 20일에 서울 강남병원에서 노환으로 향년 97세로 별세하여 남편 곁에 합장하였다. 조분금 여사는 1908년 원동면 화제리에서 태어났는데, 1950년대 요산이 정치적 탄압을 받을 때 몸소 행상에 나서 살림을 꾸리는 등 헌신적 내조를 했다. 김정한 선생은 처가가 있는 화제리를 배경으로 ‘수라도’를 집필하였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지명들은 모두가 실제 이름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마을의 위치마저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처가 마을인 화제리와 주변 마을을 문학 현장의 주 무대로 삼았다. 오봉 선생댁은 명언마을에 있고 대밭각단은 죽전(竹田)마을에 위치한다. 냉거랑다리는 화제교이고 태고나루터는 토교마을 근처에 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지명을 머리에 떠올리며 답사를 하면 멋진 문학기행을 할 수 있다. 대밭각단과 명언마을에는 요산 문학 안내비가 서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냉거랑(화제천) 건너 오봉 선생의 유일한 글 친구인 양접장이 사는 대밭각단(죽전마을), 가야부인의 시아버지가 살았다는 명언마을을 둘러볼 때 요산의 수라도 소설을 손에 들고 가면 더욱 의미가 깊을 것이다. 필자는 부산에 있는 요산문학관에서 김정한 선생의 소설집을 구입한 바 있다. 대나무가 여전히 남아 있는 죽전마을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인체에 해로운 석면 슬레이트 지붕을 이고 있는 옛날 집이 아직도 남아 있다. 명언마을에는 ‘2005년 범죄없는 마을’이라는 커다란 돌 안내비가 있다. 마을 당산나무를 지나 마을 안길로 들어가면 마을회관이 나온다. 수라도를 주제로 한 문학기행을 주요 관광상품으로 개발하면 인기가 있을 것이다. 대밭각단 들머리에는 솔밭이 있다. 소나무 사이로 듬성듬성 작은 무덤들이 있는데, ‘수라도’에서 괴질에 비명으로 죽은 고명딸의 시신이 있던 곳이다. 소설 속 지명은 거의 현재의 지명과 겹친다. 가야부인이 모신 미륵당인 용화사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한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천국부와…

천국부는 원래 양산 화제 출신으로 40이 넘도록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 아무리 머슴살이를 하며 고생을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버선을 하나 신으면 바닥은 다 닳아 버리고 버선목만 달고 다녔다고 한다. 하루는 구포장으로 가기 위해 용당 앞 큰길을 지나다가 세상 살맛이 나지 않아 신계들에 벌렁 누워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과객이 지나다가 천 씨를 보고 걸음을 멈추고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천국부와 위폐 범죄인 사주전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학 박사 심 상 도 1. 양산 화제리 출신의 큰 부자인 천국부 부산시 북구 화명동 와석 마을에 옛날 배를 가지고 소금장사를 해서 큰 부자가 되었던 천국부(千國富)의 집이 있었다. 이곳에 장터걸이 있는데 천국부 한 사람의 재력으로 장(場)이 섰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필자는 천국부의 흔적을 따라 10월 26일 부산의 화명정수장, 대천천, 화신중학교, 화잠초등학교, 와석장터로, 장터길, 와석공원, 화명1치안센터 등지를 답사하였다. 와석마을은 화명정수장과 한전 변전소가 들어서면서 주변상황이 많이 변하였지만 지명으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와석마을에 못이 있었는데 천국부의 돈(엽전)을 씻던 못이었다고 한다. 그당시 와석동네는 천국부 집과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 마을을 형성했다고 할만큼 천 씨가 큰 부자였다. 그러한 연유로 천국부(千國富)라는 사람 이름, 와석장터로가 여전히 전해져 오고 있다. 천국부가 이처럼 큰 부자가 된 사연이 극적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천국부가 소금 배를 타고 낙동강 상류로 장사를 다니면서 그 당시 가짜 엽전을 싸게 사들여 그것을 배 밑에 깔아 가마니를 덮어놓고 소금물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내 엽전에 녹이 슬어서 진짜와 구분하지 못할 정도가 되므로 이것을 자연스럽게 유통시켜서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옛날 민간인이 가짜로 엽전을 만드는 것을 사주전(私鑄錢)이라고 했는데 조선시대에 처벌이 매우 엄했다.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 2월 26일 임신 3번째 기사 1424년에 보면 경상도, 전라도에 주전소를 설치, 별감을 나누어 보내어 그 공역을 감독하게 하였다. 앞서 경기(京畿) 양근군(楊根郡)에 일찍이 주전소를 설치하고 대호군(大護軍) 남급(南汲)을 시켜 감독하게 하였다. 천국부는 원래 양산 화제 출신으로 40이 넘도록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 아무리 머슴살이를 하며 고생을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버선을 하나 신으면 바닥은 다 닳아 버리고 버선목만 달고 다녔다고 한다. 하루는 구포장으로 가기 위해 용당 앞 큰길을 지나다가 세상 살맛이 나지 않아 신계들에 벌렁 누워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과객이 지나다가 천 씨를 보고 걸음을 멈추고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이구 이놈 봐라! 너가 지금은 거지처럼 이렇게 맥이 빠져 길가에 누워 있지만 너는 꼭 큰 부자가 될거다.” 천 씨는 하도 기가 차서, “왜 그런 소리를 하오?” 했더니 과객은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너는 부자가 될 것이 틀림없으니 그리 알아라.” 하고 지나가 버렸다. 그 이후 천 씨는 머슴살이를 하면서 고되게 살아왔는데 하루는 양산 화제 갯벌에 나가서 보니 강에 광선(廣船)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그런데 그 배에는 사람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천씨가 배에 들어가 보니 엽전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래서 마누라에게 급히 달려가 함께 배 있는 곳으로 데려와서 이 엽전을 밤새도록 이고 지고 집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천 씨는 이 돈으로 논밭을 사서 큰 부자가 되었다. 이 엽전도 사주전(私鑄錢)인 것이다. 천씨가 부자가 되어 소금 배를 사고 화명 와석에 와서 살게 되었다. 이처럼 큰돈을 벌었던 천국부가 갑자기 망했다. 그것은 천국부가 새 집을 지으면서 욕심을 내어 너무 큰 집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전해 온다. 옛날 왕궁을 지을 때는 대문을 100간 짜리로 지을 수 있어도 백성은 아무리 부자라도 99간 밖에 짓지 못한다고 했는데, 천국부가 집을 지을 때 아들이 100간짜리를 짓겠다고 고집했다. 산성에서 굵은 나무들을 베어다가 켜고 불메를 차려 놓고 연장을 제작하여 큰일을 벌이자 천국부는 아들에게 집을 너무 크게 짓지 말라고 타일렀다. 하루는 천국부가 볼일이 있어 마차를 타고 그 당시 관행로였던 용당 쪽으로 가다가 용당 말랑걸에 마차를 대놓고 바로 건너다보이는 와석의 자기 집 짓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이 때 마부가 너무 거창하게 일을 시작하여 집을 미처 짓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집터에서 찌끼미(진대)가 나가더라고 일러 준다. 이처럼 큰 집을 짓는 아들을 말리지 못했는데 천국부는 뒤에 역적으로 몰려 결국 패가망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천국부가 망한 이유로 대원군 때 궁궐을 지으면서 상놈이 너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여 돈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결국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던 상놈으로서 돈을 벌었지만 양반의 세도에 밀려 망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와석마을에는 천국부의 집터가 있고 그 후손들은 이 동네에 살다가 뒤에 사상으로 이주해 갔다. 망해 버린 천국부 집의 기와는 동래 범어사로 가고 목재는 명호(명지) 소금밭의 땔감으로 가져가서 쓰였다고 한다. 필자는 천국부가 태어났다는 화제리를 10월 27일에 둘러보았다. 외화마을, 도덕골, 낙동강변 등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천국부가 살았던 조선시대 말과 현재의 화제리는 크게 달라졌지만 낙동강변에서 강물을 보며 소금 배를 떠올리고 다양한 상상을 하였다. 2. 위폐범 처벌 천국부는 위폐를 구해서 유통시킨 범죄자로서 만약 발각되었다면 조선시대 국법에 의거 사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위폐범은 경제를 통째로 뒤흔들기 때문에 기본으로 중형을 받는 범죄다. 근대 형법 제정 이전에도 각 국가들이 위폐범에 대해 매우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로마 제국에서는 위폐를 만들면 생매장에 처했다. 원나라는 위폐를 만들거나 유통하면 사형, 특히 참수형에 처한다고 지폐 앞면에 박아놓은 저화를 유통했다. 명나라에서는 대명률에 위폐범을 최하 교수형에서 최대 능지처참 후 부관참시까지로 정해놓았다. 영국에서는 1790년 위폐범에 대한 처형 방법을 참수형으로 바꾸기 전까지 화형에 처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13년까지 위폐범을 민간인, 군인 구분 없이 총살형에 처했다. 우리나라의 형법 제207조 1항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화폐, 지폐 또는 은행권을 위조 또는 변조한 자는 무기 또는 2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게 된다. 위조 실행 이전에 예비, 음모만 하다 적발되어도 형법 제213조에 의해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은병을 위조하면 참수형에 처한다고 했지만, 은병을 출시한 지 3년 만에 위조 은병이 전국적으로 발견되어 고려 정부의 행정력이 무색해졌다. 조선 초기의 경우에도 위폐를 만들다 발각된 자는 중국의 대명률에 정해진 형벌만을 집행하고, 잔혹한 처벌을 꺼리는 사회 특성상 교형이 많았지만 사형에 처해졌다.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된 조선시대 후기에 가면 위조화폐범 처벌은 효수로 처벌 수위가 강화되었다. 숙종실록 65권, 숙종 46년 6월 4일 기해 2번째 기사 1720년 기록에 의하면 임금의 환후 위중으로 대관, 중신을 보내 제사 지내고 죄수를 석방하였다. 강상(綱常), 저주(詛呪), 살옥(殺獄), 사주전(私鑄錢), 강도(强盜), 인신 위조(印信僞造)에 관계된 외에는 곧바로 승지를 보내어 모두 석방시키라고 하였다. 사주전은 엽전인 상평통보를 위조하는 중대 범죄를 의미한다. 3. 흥선대원군의 원납전과 당백전 흥선대원군은 1865년(고종 2년)에 오랫동안 황폐한 빈 터만 남은 경복궁의 중건계획을 세웠다. 국고만으로는 건설 경비를 조달할 수 없어 원납전(願納錢)이라는 기부금을 강제로 걷었다. 재상 이하 모든 관원은 능력에 따라 헌금하게 하고, 백성들은 스스로 기부금을 납부하면 액수에 따라 벼슬과 상을 주었다. 백성들의 원성을 받으며, 첫해에는 근 500만 냥이 납부되었으며, 1866년 147만 냥, 1867년 11만 7,000냥으로 점차 감소하여 공사비가 부족하게 되었다. 백성들로부터 원납전(怨納錢)이라는 별명을 얻은 이 강제기부금은 공사가 끝난 뒤 정산에 따르면 727만 7,784냥이 민간의 것이고, 종실에서 34만 913냥, 왕실에서 11만 냥을 내어 모두 772만 68,697냥에 이르렀다. 대원군은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하는 한편, 결두전(結頭錢), 문세(門稅) 등을 신설하고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여 국가재정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당백전은 1866년 (고종 3년) 11월에 발행된 화폐로 6개월 간 유통되었다. 조선 후기에 일반적으로 쓰이던 화폐는 상평통보였는데, 당백전은 명목상의 가치는 100배에 해당했다. 당백전 주화에 새겨진 한자는 '이 화폐는 다른 화폐의 100배 값어치가 있다.'라는 뜻의 호대당백(戶大當百)이다. 소재 가치는 상평통보의 5~6배에 지나지 않았다. 당대에 유통되던 상평통보의 총액은 대략 1천만 냥 정도 되었는데, 대원군이 발행한 당백전의 총액은 공식적으로 1600만 냥쯤 되었다. 일반 백성들은 당백전을 불신하여 상평통보와 교환을 하려 하지 않았고, 상인들도 이를 꺼려서 물물 교환의 모습까지 일어났고 물가는 치솟았다. 천국부는 그 당시 상놈에서 위폐 범죄로 졸부가 되었으나 원납전(怨納錢)이라는 별명의 강제기부금의 피해자였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위정자가 백성에게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하고 재물을 빼앗고 기업가를 괴롭히면 나라가 망하게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양산부산…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양산부산대학교병원 유휴부지 문제와 호박 축제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양산부산대 캠퍼스 유휴부지 문제 부산대는 2002년 양산캠퍼스를 조성하기 위해 한국토지주택공사로부터 물금신도시 내 부지 112만 2,000㎡를 3.3㎡당 15만 원에 매입하는 특혜를 받았다. 부산대는 양산캠퍼스 중 본관과 대학병원 부지만 개발하고 첨단산학단지, 실버산학단지 등 52만 8,000㎡는 17년이 지난 현재까지 개발하지 않고 방치하며 당초의 개발 약속을 위반했다. 양산의 정치인과 시민들은 이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해왔다. 국립대학인 부산대학교 측은 개발에 소요되는 국비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부지를 방치해왔다. 이 결과 물금 신도시 개발은 차질을 빚었으며, 신도시 상권이 침체되고, 물금신도시 주민들은 교통, 주차, 상가이용, 공원 활용에 큰 불편을 겪어오며 무한정 인내할 수 없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여론에 민감한 정치인들이 유휴부지 문제 해결에 앞장서게 된 것이다. 한옥문 양산시의회 의장은 양산부산대학교병원 개원 7주년 기념 축하식에서 캠퍼스 유휴부지 활용에 대해 부산대학교를 강하게 압박한 바 있다. 한옥문 의장은 부산대가 당초 약속과 달리 의과대학 정도만 들어왔고 17만 평에 대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국민의 혈세로 부동산을 매입해놓고 그동안 일체의 계획도 없이 방치한다는 것은 국정조사를 해서라도 시정해야 할 일이라며 일침을 가했다. 양산캠퍼스 착공 이후 12년 지난 시점인 지난 2014년 4월에 양산시의회는 ‘부산대학교 양산캠퍼스 유휴부지활용 촉구 건의문’을 의결하여 부산대학교 측에 전달하기도 했지만 대학은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개발에 열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며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2. 양산시 의회 부산대 양산캠퍼스 도로 개설 압박 양산시의회는 2019년 4월 17일 양산부산대 캠퍼스를 관통하는 도로 개설을 촉구하는 건의문을 채택했다. 임시회 본회의를 열어 자유한국당 김효진 부의장이 대표 발의한 ‘부산대 양산캠퍼스 관통도로 개설 촉구 건의문’을 참석의원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건의문은 교육부와 부산대 등 관련 기관에도 전달하였다. 부산대가 도로 개설에 협조하지 않으면 유휴부지 반환운동을 전개하는 강경 대응을 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도로 개설 계획은 캠퍼스를 관통해 삽량로와 물금로를 잇는 길이 720m, 왕복 4차로로 구상하고 있다. 삽량로가 부산대 양산캠퍼스에서 끊겨 증산 신도시나 물금 원도심으로 가려면 먼 거리를 우회해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도로를 개설하게 되면 증산 신도시 상가 접근성이 개선되어 상권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도로 개설 문제는 지난해 초 부산대 반대로 난항을 겪고 있다. 양산시의회는 부산대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버산업단지의 구체적 개발 계획을 확정하고 조속히 캠퍼스 관통도로 개설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실버산단을 개발하려면 교통영향평가를 받아야 한다. 본관과 연결되는 도로가 필수적으로 개설되어야 하며 이 도로를 시가 기부채납받아 캠퍼스 관통도로로 활용하면 된다는 게 양산시의회의 지론이다. 막대한 사업비도 절감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양산시의회에서 주장하고 있다. 부산대가 양산캠퍼스를 조성하면서 많은 혜택을 입었지만 양산시민 편의 향상과 상권 활성화에 도움이 되는 관통도로 개설에는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바람에 강력한 경고성 건의문을 채택했다. 양산시의회는 부산대가 양산캠퍼스 관통도로 개설에 조속히 나서지 않으면 부지매입 당시 가격으로 유휴지 전체를 양산시에 반환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유휴부지를 양산시가 환수한 다음 국비, 경남도비를 유치하여 양산부산대학병원과 조화를 개발을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3. 성공적인 호박 축제 물금 신도시에 위치한 부산대학교 양산캠퍼스 내 유휴부지를 활용하기 위해 양산시는 다각도로 검토를 해왔다. 부산대는 해결 능력이 없어 17년간 방치해왔는데 양산시가 마냥 기다릴 수 없어 과도기적인 해결책을 강구하였다. 7천~8천 평에 호박을 심어 정성껏 가꾸어왔다. 꽃과 호박을 심는 방안을 채택하여 코스모스 경관단지를 조성하고, 호박 농사를 짓게 된 것이다. 호박 축제는 신선한 아이디어로 상당한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가을에 수확된 호박을 활용하여 '2019 양산호박축제'를 양산시 주관으로 개최하게 된 것이다. 실버산학단지(물금읍 범어리 2762-12번지) 일원에서 10월 19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축제를 개최하였다. 양산시는 2019년 4월부터 10월까지 도심지 내 방치된 유휴부지에 경관조성 및 미세먼지 저감을 위해 코스모스 경관단지를 조성하였다. 양산시 농업기술센터 주도로 호박을 심어 잘 가꾸어 왔다. 수확된 호박을 활용하여 호박따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마음에 드는 호박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하고, 즉석에서 호박을 잘라 호박전을 부쳐먹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양산시민들이 농촌의 정서를 느낄 수 있게 호박 축제를 기획한 것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최된 축제는 시민들과 함께하는 호박요리(호박전 만들기) 경연대회와 호박 가공품 전시관을 운영하였다. 다양한 지역 농특산물 및 가공품을 전시하고 판매할 수 있는 부스도 마련되었다. 축제 프로그램은 양산시 우수농산물 홍보, 농산물 판매전, 양산시 농업기술센터의 호박 가공품 전시, 민속놀이, 호박 따기, 호박 판매 호박요리 체험(호박전 부치기 13시~18시) 등이 마련되었다. 호박요리 경연대회는 가족팀, 직장팀, 사회배려팀, 일반팀으로 경연이 진행되었다. 참가자는 선착순 50팀(4인 1조) 한정으로 사전 접수를 받았다. 경연대회가 끝난 후에는 현장접수를 통해 관람객들도 호박전을 만들 수 있게 배려하였다. 축제장에 오후 3시 반에 도착해보니 축제장 옆에는 코스모스 경관단지가 넓게 조성되어 볼거리가 있었고, 주차장도 있어 축제를 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수많은 의례적인 축제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갔는데, 양산시가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양산시민들이 즐거워하는 표정을 보고 놀랐다. 양산시는 부산대 양산캠퍼스 유휴부지(실버산학단지)에 임시 주차장을 조성해 2018년 10월 26일부터 무료로 개방하였다. 주차장은 물금읍 신도시 ‘CGV양산물금’, ‘에이스 스파・사우나・레포츠’ 상가 맞은편 1만 4천㎡에 320대 주차 규모로 조성되었다. 이곳은 물금신도시 한가운데 있는 양산 캠퍼스 부지인데, 그동안 유휴지로 방치돼 도시미관 저해, 비산먼지 발생 등의 집단민원이 발생하는 진원지였다. 축제장에서 호박은 1kg당 600원에 판매하였다. 오후 5시부터는 대폭 세일하여 판매함으로써 많은 시민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필자는 9kg의 호박을 3천 원에 저렴하게 구입하였다. 양산시는 호박체험과 판매로 인한 수익은 사회복지과를 통해 전액 사회 기부한다고 하였다. 양산시 협동조합협의회 이진호 이사장을 중심으로 협동조합원들이 양산시 농특산품 판매 부스를 운영하였다. 식자재 전문 빌리브유통협동조합 이진호 이사장은 삽량빛문화축전 때 보다 판매가 잘 되었다고 얘기하였다. 임정섭 양산시의회 도시건설위원회 위원장은 오후에 호박축제장에서 축제 운영위원들, 관람객들과 대화를 나누며 축제가 성공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임정섭 시의원에 따르면 올해 처음 농사를 지은 호박단지 땅이 안정화되면 내년에는 호박농사가 더욱 잘 될 것이라고 하였다. 필자가 축제 진행 요원에게 호박을 심은 면적이 얼마 정도 되는지를 물었더니 1ha(3천 평) 정도 된다고 했는데, 임정섭 도시건설위원장은 아마 7~8천 평은 될 거라고 하였다. 코스모스를 심은 곳 옆에서 시작되는 호박단지가 반도유보라 4차아파트 경계선까지라고 하면서 면적이 매우 넓다고 강조하였다. 김일권 시장은 축제가 끝날 때까지 축제장에서 시민들과 시종 유쾌한 대화를 나누었다. 양산시는 방치된 유휴부지를 활용하여 성공적인 호박축제를 진행하였다. 소규모 축제였지만 모처럼 만에 보는 멋진 축제였다. 내년에는 축제 규모를 더욱 확대하고 알찬 축제를 기획함으로써 많은 양산시민들이 즐겁게 참여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배 모양…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배 모양으로 생긴 상삼마을의 자연보호 정신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마을은 풍수지리학적으로 배 모양으로 생겼다고 한다. 상삼마을에 황산선정(黃山船亭)이라는 정자와 쉼터가 있다. 황산선정이라는 단어는 한글로 표기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황산선정(黃山船亭)을 한자로 쓰면 한자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황산선정(黃山船亭)은 황산선이라는 정자를 의미한다. 황산선정 정자 아래 도로인 충렬로변의 커다란 돌 표지석은 1995년 1월 1일에 만들었다. 황산(黃山)이라는 말은 옛날 삼국시대에 양산의 물금지역 낙동강을 황산강이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장마가 지면 물금 근처의 낙동강은 누런 황토물이 흐르는 문자 그대로의 황산강이었다. 황산하(黃山河) 또는 황산강(黃山江)이라 불렀다. 태풍 미탁이 10월 2일 우리나라의 남부지방을 지나가면서 많은 비를 뿌렸다. 10월 2일 오후 9시 40분 전남 해남군에 상륙한 미탁은 밤사이 남부 지방을 관통한 뒤 3일 오전 6시경 경북 울진을 통해 한반도를 빠져나갔다. 필자가 태풍이 지나가고 10월 3일 오전에 물금읍에 있는 황산공원에 가보니 낙동강은 누런 탁류가 도도히 흘러가고 있어 옛날 황산강이라 부르던 상황을 실감할 수 있었다. 황산공원은 배수로 일부가 침수되었으나 낙동강과 양산천이 만나는 하류지역은 침수되었다. 낙동강홍수통제소는 부산 구포대교 일대에 10월 3일 오전 8시 20분에 홍수주의보를 발령했다. 이 일대는 수위가 4m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될 때 홍수주의보가 내려지는데, 오전 10시에는 4.1m까지 올라갔다고 했다. 수위가 높아지면서 부산 북구 화명생태공원 일부가 물에 잠겼다. 체육시설과 주차장 일부가 물에 잠겼지만, 다행히 생태공원 내 제방까지는 침수되지 않아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낙동강 하구에 홍수주의보가 내려진 것은 2012년 이후 7년 만이었다고 한다. 구포대교 바로 위 삼랑진 구간은 불어난 물로 인해 홍수 특보가 발효되기도 했다. 밀양 낙동강 삼랑진교의 수위가 7.3m를 기록하며 홍수경보가 발효됐다. 제18호 태풍 ‘미탁’이 몰고 온 많은 비로 3일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와 김해시 생림면 마사리를 연결하는 낙동강 삼랑진교에 홍수경보가 내려져 누런 흙탕물이 주변 둔치를 삼켜 버렸다. 낙동강 수계 중 함안군 계내리, 합천군 황강교, 의령군 정암교 등 3곳에서도 홍수주의보가 발효됐다. 4대강 정비사업을 하면서 물금읍의 낙동강은 준설을 통해 물그릇을 키우고 둔치의 농지를 매입하여 홍수피해를 예방하게 되었다. 제방을 보강하고 배수 펌프장을 증설하여 물이 범람하는 현상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3년 전의 태풍 차바, 태풍 미탁에도 피해를 최소화했다. 현재 물금읍 동부리, 서부리는 예로부터 황산진(黃山津), 황산역이 위치하여 그 주변에 큰 마을이 형성되어 왔다. 황산장(黃山場)은 물금장의 옛 명칭이다. 1832년(순조32) 양산읍지에 양산군의 장이 읍장(邑場)은 매순 1일과 6일, 황산장(黃山場)은 매순 5일과 10일장이었다고 나와 있다. 물금장은 현재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장날에도 사람들이 별로 없다. 신라 51대 진성여왕(재위 887∼897)은 정강왕이 후사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진성여왕은 신라의 제48대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의 딸이며, 신라 50대 정강왕의 누이동생이다. 측근의 권력 남용으로 나라가 어지럽게 되었고, 민심이 동요하여 전국적인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서자 요(嶢)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며 실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태자에게 왕권을 양위하였다. 황산에서 말년을 보냈는데, 병이 악화되어 북궁(경주)에서 붕어하여 화장한 후 황산에 뿌렸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진성여왕이 말년 황산에 있었던 곳이 지금의 어곡동 어실마을이다. 어실(御室)마을은 진성여왕이 퇴위 후 잠시 살았으며, 묘소도 어곡동에 있다고 전해진다. 황산(黃山)이라는 지명은 양산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상북면 상삼마을의 황산선정도 이러한 황산에서 연유하였다. 황산에 배를 의미하는 선(船)이 붙어 황산선(黃山船)이 된 것이다. 황산선정(黃山船亭)은 황산의 배가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상삼마을은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면 배 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 즉, 풍수지리학적으로 마을 지형이 배 모양인 형국이다. 상삼마을은 배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식수를 사용하기 위하여 우물을 많이 파게 되면 배가 침몰되어 마을이 망한다고 믿었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의 동서남북 네 군데에 하나씩 우물을 파서 식수로 이용하고 더 이상의 우물을 파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다고 한다. 필자가 상북마을의 황산선정 현지답사를 위하여 방문하였을 때 마을 할머니들이 더위를 피해 황산선정에 모여 쉬고 있었다. 대화를 해보니 할머니들은 황산선정의 유래와 마을의 풍수지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전설을 미신으로 치부하여 무분별한 개발과 자연파괴를 하면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환경보호를 철저히 해온 우리 조상들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 우물은 지하수맥과 연결되어 있어 마을 인구가 늘어나고 무분별하게 많이 파게 되면 식수가 고갈될 위험이 커진다. 지하수맥의 변동으로 인한 지반 침하 현상은 최근 양산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양산시 북부동 일대에 발생한 지반 침하는 취약 지반과 급격한 지하수위 변동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중간 조사결과가 나왔다. 대한토목학회 부산・울산지회는 최근 양산시청에서 북부동 지반 침하 원인 조사와 관련한 중간용역 보고회를 갖고 이같이 분석했다. 2018년 북부동의 한 신축 아파트 공사장에서 20m 깊이 지하굴착공사로 다량의 지하수를 퍼내면서 일대 지하 수위가 급격히 내려갔다. 토목학회의 조사결과 하상 퇴적토의 경우 지하 수위 변화에 민감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양산 구도심 일대에서 발생한 급격한 지하 수위 변동이 지반 침하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는데, 최종 결과는 11월경에 나온다고 한다. 상북면에 있는 황산선정 주변이 공원으로 재정비된 것은 상북면 상삼마을이 농림부에서 주관하는 ‘일반농산어촌개발사업’이라는 공모사업에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상삼마을 창조적 마을만들기 사업에 4억 7천 1백만 원을 투입하여 2015년 1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사업을 완료하였다. 사업은 도로 등 기반시설, 문화경관시설, 마을 정비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실시할 수 있다.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주민편익을 향상시키는데 국비(70%)와 경남도비 9%, 양산시비(21%)를 투입하였다. 101가구(농가 64호, 비농가 37호) 227명이 살고 있는 상삼마을의 구체적 사업 내역은 다음과 같다. 주민들이 함께 거주하는 공동 홈 조성, 황산선정 리모델링, 마을 안길 정비, 쉼터 정비, 마을주민 역량 강화 등이다. 건물 신축(RC조 50㎡) 1동, 황산선정 보도블럭 포장(인조 화강석) 332㎡, 칼라 아스콘 포장(보도용) 234 ㎡, 마을 안길 도로 확포장(폭 3.5m, 면적 442㎡), 블록 담장 설치(높이 2m, 길이 126m), 쉼터 정비 보도 블록 포장(인조 화강석) 166㎡, 지역 역량강화(리더 교육, 주민교육, 선진지 견학, 컨설팅) 등의 사업을 실시하였다. 2016년 말에 끝난 상삼마을 창조적 마을만들기사업은 양산시 건설과(문영진 과장, 김지욱 팀장, 강효정 주무관, 강석욱 주무관)에서 지원하여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양산시는 농림부의 일반농산어촌개발사업을 통해 양산의 농촌마을의 전설과 전통문화 보존에 기여하였다. 오늘날에도 조상대대로 이어져온 자연보호 정신을 이어받아 주민들이 피해를 입는 난개발은 막아야 하겠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통도사,…

자장율사는 신라로 귀국하여 나쁜 용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에게 설법을 하여 제도하고 못을 메워 그 위에 금강계단을 쌓았다. 통도사 산문에서 무풍한송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구룡지에 살던 용이 자장율사의 법력을 피해 하늘로 도망쳐 날아가다가 떨어져 죽으면서 흘린 피가 묻은 바위가 있다. 실제로 보면 하얀 바탕의 바위에 검은색이 섞여 있다. 이 바위를 용피바위 또는 용혈암이라고 한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통도사, 부석사의 창건설화에 나타난 토속신앙과의 갈등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자장율사사 당나라 유학 때 문수보살이 나타나 그대의 나라 남쪽 축서산(鷲栖山 : 영축산의 옛이름) 기슭에 독룡(毒龍)이 거처하는 신지(神池)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毒害)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 : 물, 바람, 불의 재앙)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天龍)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리라.”하였다. 자장율사는 신라로 귀국하여 나쁜 용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에게 설법을 하여 제도하고 못을 메워 그 위에 금강계단을 쌓았다. 통도사 산문에서 무풍한송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구룡지에 살던 용이 자장율사의 법력을 피해 하늘로 도망쳐 날아가다가 떨어져 죽으면서 흘린 피가 묻은 바위가 있다. 실제로 보면 하얀 바탕의 바위에 검은색이 섞여 있다. 이 바위를 용피바위 또는 용혈암이라고 한다. 자장율사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마리는 상북면 외석리에 있는 오룡골로,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다. 오직 한 마리의 눈먼 용만은 굳이 그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으므로 스님은 그 용의 청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구룡지인데 불과 네댓 평의 넓이에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 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 통도사 창건설화와 관련된 독룡은 그 당시 양산에서 고유종교를 믿는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자장율사가 설법을 하여 제도하고 한 마리의 눈먼 용에게 구룡지에 남아 불법을 수호하라고 한 것은 일종의 타협책이다. 끝까지 저항하는 나머지 용들과는 도술 대결을 벌여 몰아내었다. 이것은 수도자로서의 법력, 또는 선덕여왕의 비호 아래 군사력을 이용하여 우리 고유의 토속 신앙인들을 설득 내지는 무력으로 제압한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통도사 산문과 가까운 곳에 땅바우공원이 있다. 여기에서 자장율사와 양산의 토속 종교인들이 대담을 통해 협상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땅바우공원은 현재 오른쪽에 W모텔, 왼쪽에 허브모텔이 있어 숙박업소로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다. 안내판에 설명하는 땅바우공원의 유래가 종교와 연관되고 있다. 기묘한 바위와 용처럼 꿈틀거리는 소나무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답고 신비한 곳이다. 땅바우란 불쑥 솟은 바위를 말하며 이 지역은 예부터 기묘하게 생긴 큰 바위들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있어 땅바우로 불리었다. 바위에는 선사시대 종교적 흔적으로 보이는 바위 구멍이 여러 곳 남아 있으며, 바위 언덕에는 과거 비석들이 꽂혀있던 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바위구멍은 선돌이나 고인돌 등 특정한 바위에 집중적으로 새겨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바위 꼭대기나 바닥 등 위치와 방향을 고려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암반 전체를 종교적 대상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공원 조성 당시 ‘삼방공원’이라 불리었으나 2006년 지역 특성에 맞는 공원 이름을 지정해달라는 주민들의 의견에 따라 ‘땅바우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바위의 구멍은 흔히 성혈로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주술적 의미에서 돌을 갈아 만들었다. 홈구멍〔性穴, cup-mark〕은 바위그림의 한 종류로서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을 말한다. 주로 고인돌(支石墓)의 덮개돌(上石)이나 자연암반에 새겨진다. 형태적 차이는 있지만 민속에서는 ‘알구멍’, ‘알바위’, ‘알터’, ‘알미’, ‘알뫼’ 등으로도 불린다. 땅바우공원은 종교적으로 의미깊고 신성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장율사와 양산의 토속 종교 대표가 모여서 대화를 통해 설득과 회유책을 주고받으며 협상을 하기에는 알맞은 공간이다. 한 나라에 새로운 종교가 전파될 때 거부감이 강하므로 여러 가지 마찰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양산의 주민들이 외래종교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기존의 토속 신앙을 고수하려고 할 때 자장율사는 구룡지의 전설처럼 강온책을 구사했을 것이다.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은 난랑비(鸞郞碑) 서문(序文)에서 풍류교를 언급하였다. ‘우리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풍류교를 만든 근원은 신사역사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우리 풍류교에 접목되어 각각 다른 종파로 분리되어간 유교, 도교, 불교의 삼교의 핵심이 다 이 속에 포함되어 있다. 집으로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공자) 유교의 취지요, 매사에 무위로 대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노자의 도교이며, 악한 일들을 하지 말고 오로지 착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석가모니의 불교로 변해갔다.’ 최치원 선생이 밝힌 바와 같이 유불선의 모체종교가 우리나라에 있었고, 이 모체종교를 신교, 풍류도, 신선도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신교를 통해 심신을 수련한 지도자가 각 시대별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배달국시대의 제세핵랑군(濟世核郞軍) 3천 명이 그 뿌리라 할 수 있고, 고조선 시대의 삼랑, 부여의 국자랑,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이 있었다. 이들은 삼신상제님을 받들고, 수도를 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봉사를 하였다. 신라시대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 보물 제1411호)’은 30㎝ 길이의 돌에 화랑의 결의가 새겨진 비석이다. 거기 쓰인 일흔네 자의 글씨를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임신년 6월 16일 우리 둘은 더불어 맹세하며 여기에 기록한다. 앞으로 3년 이후에도 충성스런 도리를 가슴에 새겨 이를 지키며 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만약 우리 가운데 하나가 이 다짐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늘로부터 큰 벌을 받을 것이다. 나라가 어지럽고 세상이 크게 불안해진다고 해도 이 맹세는 지켜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한 지난날 약속했듯 다양한 책을 읽어 학업에도 정진할 것임을 다짐한다.” 절친한 두 명의 화랑이 자신들의 맹세와 다짐을 뜨거운 불과 세월의 풍화작용으로도 온전히 없앨 수 없는 돌에 명백하게 새겨 스스로를 다잡고자 만든 것이 ‘임신서기석’이다. 역사학자 최광식은 “화랑도의 지도 이념은 풍류도”라고 주장했다. 소백산과 연결되는 선달산(仙達山)이라는 산이 있다. 선달이란 이름은 선도의 무리라는 의미로 배달겨레의 그 배달이 바로 선달이다. 선달산 남쪽에 부석사가 있다. 부석사 창건 설화에서는 선달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의상이 부석사 터를 정하고자 했는데 사교의 무리 500여 명이 방해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다름 아닌 선도의 집단으로 우리의 토속신앙을 믿는 원주민들이다. 의상대사가 배를 타고 당나라로 유학갔을 때 양주의 한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 딸 선묘(善妙)가 의상을 사모하였다. 의상대사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자 그 소식을 들은 선묘낭자가 의상대사를 위해 준비했던 법복과 그 밖의 물건들을 함에 가득 넣었다. 이윽고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의상의 배는 이미 멀리 떠나고 있었다. 선묘 낭자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하였다. 선묘가 배를 수호하여 인도하니 의상이 탄 배는 무사히 신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의상대사는 사찰을 창건하라는 왕명을 받고 봉황산에 갔는데 그곳에 먼저 자리 잡은 토속 종교를 믿는 토박이 주민들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때 선묘용(善妙龍)이 나타나 큰 바위를 공중으로 세 차례나 들어 올렸다 놓는 신비한 힘을 보여주었다. 토속신앙을 믿던 주민들은 신비로운 이적을 목격한 후 더이상 사찰 짓는 것을 방해하지 않게 되었다. 부석사(浮石寺는) 뜬 바위(浮石) 절이라는 의미다. 각 나라마다 고유의 종교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고유한 토속신앙은 풍류교였다. 현재 무속인들에 의해 태백산, 마니산 등에서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에는 유불선을 합한 선도 사상, 용과 산신을 숭배하는 토속종교가 있었다. 통도사와 부석사의 창건 설화에서 우리의 토속신앙과 외래 종교인 불교의 갈등을 볼 수 있다. 불교계에서는 우리의 전통 신앙을 일부 받아들인 산신각, 칠성각, 가람각이 있다. 통도사 가람각은 토지신을 모시는 도교와 연관된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속신앙과의 갈등을 거쳐 일부는 수용하는 형태를 취했다.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