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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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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배 모양…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배 모양으로 생긴 상삼마을의 자연보호 정신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마을은 풍수지리학적으로 배 모양으로 생겼다고 한다. 상삼마을에 황산선정(黃山船亭)이라는 정자와 쉼터가 있다. 황산선정이라는 단어는 한글로 표기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황산선정(黃山船亭)을 한자로 쓰면 한자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황산선정(黃山船亭)은 황산선이라는 정자를 의미한다. 황산선정 정자 아래 도로인 충렬로변의 커다란 돌 표지석은 1995년 1월 1일에 만들었다. 황산(黃山)이라는 말은 옛날 삼국시대에 양산의 물금지역 낙동강을 황산강이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장마가 지면 물금 근처의 낙동강은 누런 황토물이 흐르는 문자 그대로의 황산강이었다. 황산하(黃山河) 또는 황산강(黃山江)이라 불렀다. 태풍 미탁이 10월 2일 우리나라의 남부지방을 지나가면서 많은 비를 뿌렸다. 10월 2일 오후 9시 40분 전남 해남군에 상륙한 미탁은 밤사이 남부 지방을 관통한 뒤 3일 오전 6시경 경북 울진을 통해 한반도를 빠져나갔다. 필자가 태풍이 지나가고 10월 3일 오전에 물금읍에 있는 황산공원에 가보니 낙동강은 누런 탁류가 도도히 흘러가고 있어 옛날 황산강이라 부르던 상황을 실감할 수 있었다. 황산공원은 배수로 일부가 침수되었으나 낙동강과 양산천이 만나는 하류지역은 침수되었다. 낙동강홍수통제소는 부산 구포대교 일대에 10월 3일 오전 8시 20분에 홍수주의보를 발령했다. 이 일대는 수위가 4m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될 때 홍수주의보가 내려지는데, 오전 10시에는 4.1m까지 올라갔다고 했다. 수위가 높아지면서 부산 북구 화명생태공원 일부가 물에 잠겼다. 체육시설과 주차장 일부가 물에 잠겼지만, 다행히 생태공원 내 제방까지는 침수되지 않아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 낙동강 하구에 홍수주의보가 내려진 것은 2012년 이후 7년 만이었다고 한다. 구포대교 바로 위 삼랑진 구간은 불어난 물로 인해 홍수 특보가 발효되기도 했다. 밀양 낙동강 삼랑진교의 수위가 7.3m를 기록하며 홍수경보가 발효됐다. 제18호 태풍 ‘미탁’이 몰고 온 많은 비로 3일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와 김해시 생림면 마사리를 연결하는 낙동강 삼랑진교에 홍수경보가 내려져 누런 흙탕물이 주변 둔치를 삼켜 버렸다. 낙동강 수계 중 함안군 계내리, 합천군 황강교, 의령군 정암교 등 3곳에서도 홍수주의보가 발효됐다. 4대강 정비사업을 하면서 물금읍의 낙동강은 준설을 통해 물그릇을 키우고 둔치의 농지를 매입하여 홍수피해를 예방하게 되었다. 제방을 보강하고 배수 펌프장을 증설하여 물이 범람하는 현상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3년 전의 태풍 차바, 태풍 미탁에도 피해를 최소화했다. 현재 물금읍 동부리, 서부리는 예로부터 황산진(黃山津), 황산역이 위치하여 그 주변에 큰 마을이 형성되어 왔다. 황산장(黃山場)은 물금장의 옛 명칭이다. 1832년(순조32) 양산읍지에 양산군의 장이 읍장(邑場)은 매순 1일과 6일, 황산장(黃山場)은 매순 5일과 10일장이었다고 나와 있다. 물금장은 현재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장날에도 사람들이 별로 없다. 신라 51대 진성여왕(재위 887∼897)은 정강왕이 후사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진성여왕은 신라의 제48대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의 딸이며, 신라 50대 정강왕의 누이동생이다. 측근의 권력 남용으로 나라가 어지럽게 되었고, 민심이 동요하여 전국적인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진성여왕은 헌강왕의 서자 요(嶢)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며 실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태자에게 왕권을 양위하였다. 황산에서 말년을 보냈는데, 병이 악화되어 북궁(경주)에서 붕어하여 화장한 후 황산에 뿌렸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진성여왕이 말년 황산에 있었던 곳이 지금의 어곡동 어실마을이다. 어실(御室)마을은 진성여왕이 퇴위 후 잠시 살았으며, 묘소도 어곡동에 있다고 전해진다. 황산(黃山)이라는 지명은 양산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상북면 상삼마을의 황산선정도 이러한 황산에서 연유하였다. 황산에 배를 의미하는 선(船)이 붙어 황산선(黃山船)이 된 것이다. 황산선정(黃山船亭)은 황산의 배가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상삼마을은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면 배 모양으로 보인다고 한다. 즉, 풍수지리학적으로 마을 지형이 배 모양인 형국이다. 상삼마을은 배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식수를 사용하기 위하여 우물을 많이 파게 되면 배가 침몰되어 마을이 망한다고 믿었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의 동서남북 네 군데에 하나씩 우물을 파서 식수로 이용하고 더 이상의 우물을 파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다고 한다. 필자가 상북마을의 황산선정 현지답사를 위하여 방문하였을 때 마을 할머니들이 더위를 피해 황산선정에 모여 쉬고 있었다. 대화를 해보니 할머니들은 황산선정의 유래와 마을의 풍수지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전설을 미신으로 치부하여 무분별한 개발과 자연파괴를 하면 사람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환경보호를 철저히 해온 우리 조상들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 우물은 지하수맥과 연결되어 있어 마을 인구가 늘어나고 무분별하게 많이 파게 되면 식수가 고갈될 위험이 커진다. 지하수맥의 변동으로 인한 지반 침하 현상은 최근 양산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양산시 북부동 일대에 발생한 지반 침하는 취약 지반과 급격한 지하수위 변동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중간 조사결과가 나왔다. 대한토목학회 부산・울산지회는 최근 양산시청에서 북부동 지반 침하 원인 조사와 관련한 중간용역 보고회를 갖고 이같이 분석했다. 2018년 북부동의 한 신축 아파트 공사장에서 20m 깊이 지하굴착공사로 다량의 지하수를 퍼내면서 일대 지하 수위가 급격히 내려갔다. 토목학회의 조사결과 하상 퇴적토의 경우 지하 수위 변화에 민감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양산 구도심 일대에서 발생한 급격한 지하 수위 변동이 지반 침하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는데, 최종 결과는 11월경에 나온다고 한다. 상북면에 있는 황산선정 주변이 공원으로 재정비된 것은 상북면 상삼마을이 농림부에서 주관하는 ‘일반농산어촌개발사업’이라는 공모사업에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상삼마을 창조적 마을만들기 사업에 4억 7천 1백만 원을 투입하여 2015년 1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사업을 완료하였다. 사업은 도로 등 기반시설, 문화경관시설, 마을 정비사업 등 다양한 사업을 실시할 수 있다.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주민편익을 향상시키는데 국비(70%)와 경남도비 9%, 양산시비(21%)를 투입하였다. 101가구(농가 64호, 비농가 37호) 227명이 살고 있는 상삼마을의 구체적 사업 내역은 다음과 같다. 주민들이 함께 거주하는 공동 홈 조성, 황산선정 리모델링, 마을 안길 정비, 쉼터 정비, 마을주민 역량 강화 등이다. 건물 신축(RC조 50㎡) 1동, 황산선정 보도블럭 포장(인조 화강석) 332㎡, 칼라 아스콘 포장(보도용) 234 ㎡, 마을 안길 도로 확포장(폭 3.5m, 면적 442㎡), 블록 담장 설치(높이 2m, 길이 126m), 쉼터 정비 보도 블록 포장(인조 화강석) 166㎡, 지역 역량강화(리더 교육, 주민교육, 선진지 견학, 컨설팅) 등의 사업을 실시하였다. 2016년 말에 끝난 상삼마을 창조적 마을만들기사업은 양산시 건설과(문영진 과장, 김지욱 팀장, 강효정 주무관, 강석욱 주무관)에서 지원하여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양산시는 농림부의 일반농산어촌개발사업을 통해 양산의 농촌마을의 전설과 전통문화 보존에 기여하였다. 오늘날에도 조상대대로 이어져온 자연보호 정신을 이어받아 주민들이 피해를 입는 난개발은 막아야 하겠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통도사,…

자장율사는 신라로 귀국하여 나쁜 용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에게 설법을 하여 제도하고 못을 메워 그 위에 금강계단을 쌓았다. 통도사 산문에서 무풍한송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구룡지에 살던 용이 자장율사의 법력을 피해 하늘로 도망쳐 날아가다가 떨어져 죽으면서 흘린 피가 묻은 바위가 있다. 실제로 보면 하얀 바탕의 바위에 검은색이 섞여 있다. 이 바위를 용피바위 또는 용혈암이라고 한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통도사, 부석사의 창건설화에 나타난 토속신앙과의 갈등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자장율사사 당나라 유학 때 문수보살이 나타나 그대의 나라 남쪽 축서산(鷲栖山 : 영축산의 옛이름) 기슭에 독룡(毒龍)이 거처하는 신지(神池)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毒害)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 : 물, 바람, 불의 재앙)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天龍)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리라.”하였다. 자장율사는 신라로 귀국하여 나쁜 용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에게 설법을 하여 제도하고 못을 메워 그 위에 금강계단을 쌓았다. 통도사 산문에서 무풍한송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구룡지에 살던 용이 자장율사의 법력을 피해 하늘로 도망쳐 날아가다가 떨어져 죽으면서 흘린 피가 묻은 바위가 있다. 실제로 보면 하얀 바탕의 바위에 검은색이 섞여 있다. 이 바위를 용피바위 또는 용혈암이라고 한다. 자장율사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마리는 상북면 외석리에 있는 오룡골로,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다. 오직 한 마리의 눈먼 용만은 굳이 그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으므로 스님은 그 용의 청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구룡지인데 불과 네댓 평의 넓이에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 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 통도사 창건설화와 관련된 독룡은 그 당시 양산에서 고유종교를 믿는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자장율사가 설법을 하여 제도하고 한 마리의 눈먼 용에게 구룡지에 남아 불법을 수호하라고 한 것은 일종의 타협책이다. 끝까지 저항하는 나머지 용들과는 도술 대결을 벌여 몰아내었다. 이것은 수도자로서의 법력, 또는 선덕여왕의 비호 아래 군사력을 이용하여 우리 고유의 토속 신앙인들을 설득 내지는 무력으로 제압한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 통도사 산문과 가까운 곳에 땅바우공원이 있다. 여기에서 자장율사와 양산의 토속 종교인들이 대담을 통해 협상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땅바우공원은 현재 오른쪽에 W모텔, 왼쪽에 허브모텔이 있어 숙박업소로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다. 안내판에 설명하는 땅바우공원의 유래가 종교와 연관되고 있다. 기묘한 바위와 용처럼 꿈틀거리는 소나무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답고 신비한 곳이다. 땅바우란 불쑥 솟은 바위를 말하며 이 지역은 예부터 기묘하게 생긴 큰 바위들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있어 땅바우로 불리었다. 바위에는 선사시대 종교적 흔적으로 보이는 바위 구멍이 여러 곳 남아 있으며, 바위 언덕에는 과거 비석들이 꽂혀있던 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바위구멍은 선돌이나 고인돌 등 특정한 바위에 집중적으로 새겨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바위 꼭대기나 바닥 등 위치와 방향을 고려하지 않고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암반 전체를 종교적 대상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공원 조성 당시 ‘삼방공원’이라 불리었으나 2006년 지역 특성에 맞는 공원 이름을 지정해달라는 주민들의 의견에 따라 ‘땅바우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바위의 구멍은 흔히 성혈로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주술적 의미에서 돌을 갈아 만들었다. 홈구멍〔性穴, cup-mark〕은 바위그림의 한 종류로서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을 말한다. 주로 고인돌(支石墓)의 덮개돌(上石)이나 자연암반에 새겨진다. 형태적 차이는 있지만 민속에서는 ‘알구멍’, ‘알바위’, ‘알터’, ‘알미’, ‘알뫼’ 등으로도 불린다. 땅바우공원은 종교적으로 의미깊고 신성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장율사와 양산의 토속 종교 대표가 모여서 대화를 통해 설득과 회유책을 주고받으며 협상을 하기에는 알맞은 공간이다. 한 나라에 새로운 종교가 전파될 때 거부감이 강하므로 여러 가지 마찰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양산의 주민들이 외래종교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기존의 토속 신앙을 고수하려고 할 때 자장율사는 구룡지의 전설처럼 강온책을 구사했을 것이다.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은 난랑비(鸞郞碑) 서문(序文)에서 풍류교를 언급하였다. ‘우리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풍류교를 만든 근원은 신사역사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우리 풍류교에 접목되어 각각 다른 종파로 분리되어간 유교, 도교, 불교의 삼교의 핵심이 다 이 속에 포함되어 있다. 집으로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공자) 유교의 취지요, 매사에 무위로 대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노자의 도교이며, 악한 일들을 하지 말고 오로지 착한 일을 받들어 실행함은 석가모니의 불교로 변해갔다.’ 최치원 선생이 밝힌 바와 같이 유불선의 모체종교가 우리나라에 있었고, 이 모체종교를 신교, 풍류도, 신선도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신교를 통해 심신을 수련한 지도자가 각 시대별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배달국시대의 제세핵랑군(濟世核郞軍) 3천 명이 그 뿌리라 할 수 있고, 고조선 시대의 삼랑, 부여의 국자랑, 고구려의 조의선인, 신라의 화랑이 있었다. 이들은 삼신상제님을 받들고, 수도를 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봉사를 하였다. 신라시대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 보물 제1411호)’은 30㎝ 길이의 돌에 화랑의 결의가 새겨진 비석이다. 거기 쓰인 일흔네 자의 글씨를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임신년 6월 16일 우리 둘은 더불어 맹세하며 여기에 기록한다. 앞으로 3년 이후에도 충성스런 도리를 가슴에 새겨 이를 지키며 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만약 우리 가운데 하나가 이 다짐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늘로부터 큰 벌을 받을 것이다. 나라가 어지럽고 세상이 크게 불안해진다고 해도 이 맹세는 지켜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한 지난날 약속했듯 다양한 책을 읽어 학업에도 정진할 것임을 다짐한다.” 절친한 두 명의 화랑이 자신들의 맹세와 다짐을 뜨거운 불과 세월의 풍화작용으로도 온전히 없앨 수 없는 돌에 명백하게 새겨 스스로를 다잡고자 만든 것이 ‘임신서기석’이다. 역사학자 최광식은 “화랑도의 지도 이념은 풍류도”라고 주장했다. 소백산과 연결되는 선달산(仙達山)이라는 산이 있다. 선달이란 이름은 선도의 무리라는 의미로 배달겨레의 그 배달이 바로 선달이다. 선달산 남쪽에 부석사가 있다. 부석사 창건 설화에서는 선달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의상이 부석사 터를 정하고자 했는데 사교의 무리 500여 명이 방해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다름 아닌 선도의 집단으로 우리의 토속신앙을 믿는 원주민들이다. 의상대사가 배를 타고 당나라로 유학갔을 때 양주의 한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 딸 선묘(善妙)가 의상을 사모하였다. 의상대사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자 그 소식을 들은 선묘낭자가 의상대사를 위해 준비했던 법복과 그 밖의 물건들을 함에 가득 넣었다. 이윽고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의상의 배는 이미 멀리 떠나고 있었다. 선묘 낭자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하였다. 선묘가 배를 수호하여 인도하니 의상이 탄 배는 무사히 신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의상대사는 사찰을 창건하라는 왕명을 받고 봉황산에 갔는데 그곳에 먼저 자리 잡은 토속 종교를 믿는 토박이 주민들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때 선묘용(善妙龍)이 나타나 큰 바위를 공중으로 세 차례나 들어 올렸다 놓는 신비한 힘을 보여주었다. 토속신앙을 믿던 주민들은 신비로운 이적을 목격한 후 더이상 사찰 짓는 것을 방해하지 않게 되었다. 부석사(浮石寺는) 뜬 바위(浮石) 절이라는 의미다. 각 나라마다 고유의 종교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고유한 토속신앙은 풍류교였다. 현재 무속인들에 의해 태백산, 마니산 등에서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에는 유불선을 합한 선도 사상, 용과 산신을 숭배하는 토속종교가 있었다. 통도사와 부석사의 창건 설화에서 우리의 토속신앙과 외래 종교인 불교의 갈등을 볼 수 있다. 불교계에서는 우리의 전통 신앙을 일부 받아들인 산신각, 칠성각, 가람각이 있다. 통도사 가람각은 토지신을 모시는 도교와 연관된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속신앙과의 갈등을 거쳐 일부는 수용하는 형태를 취했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태풍 미…

제18호 태풍 '미탁(MITAG)'이 개천절인 10월 3일 우리나라를 강타할 것으로 보인다. 제18호 태풍 '미탁'이 느린 속도로 한반도를 향해 이동하고 있다. 미탁이 결국 한반도에 상륙할 것으로 관측됨에 올해는 약 60년 만에 가장 많은 가을 태풍이 오는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태풍 미탁의 내습에 대한 대비와 역사적 수재 피해 상황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제18호 태풍 '미탁(MITAG)'이 개천절인 10월 3일 우리나라를 강타할 것으로 보인다. 제18호 태풍 '미탁'이 느린 속도로 한반도를 향해 이동하고 있다. 미탁이 결국 한반도에 상륙할 것으로 관측됨에 올해는 약 60년 만에 가장 많은 가을 태풍이 오는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기상청에 따르면 9~10월에 태풍이 한반도까지 올라오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라고 한다. 1994년 태풍 세스(SETH) 이후 올해가 처음인데, 이는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해수면 온도가 높아질수록 9~10월에 태풍을 만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미탁'은 10월 1일 새벽 대만을 스치듯이 지난 뒤 중국 본토에 상륙해 10월 2일 오전 3시께 상하이 남쪽 약 210㎞ 육상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북동쪽으로 진행 방향을 틀어 점차 한반도를 향해 북상해 10월 2일 밤부터 3일 새벽 사이 제주도 서쪽 바다를 지나 3일 오전 전남 해안으로 상륙할 것으로 기상청은 내다봤다. 1994년 10월 '세스', 2016년 10월 '차바', 2002년 7월 '라마순'과 유사한 경로라고 한다. 태풍 사라호는 1959년 9월 17일 추석날 아침 9시에 발생하여 큰 피해를 입힌 제14호 태풍이다. 태풍 사라호는 한반도 역사상 재산 및 인명 피해 측면에서 최악의 태풍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태풍의 발생 시기가 추석 전후인 탓에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으며, 1959년 당시 재해에 대한 대비책이 미비하여 더욱 문제를 키웠다. 태풍 사라호는 전국적으로 사망・실종 849명, 부상 2500여 명, 피해액이 1천 9백억 원으로서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 이하였던 시절이었다. 사라호의 상륙지점이 충무(통영)로 부산, 경남, 울산 지역에 많은 피해를 유발하였다. 피해 규모가 너무 커서 최초로 전국적인 모금 운동이 벌어졌으며 국가적인 재난 복구에 군 병력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태풍 사라호는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태풍으로 기록되며, 태풍에 대한 재해 대책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한국에서 비교적 정확한 재해 기록이 이루어진 1900년도 이래 3번째로 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 태풍 사라호의 내습으로 양산 신기마을이 있는 북부천 북쪽 둑이 무너지면서 민가 60호를 덮쳐 32명이 사망하는 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수재민을 위로하기 위해 양산을 방문하였다. 신기마을은 북부천 남쪽 현재 위치에 우리나라 최초의 집단 이주촌으로 조성했다. 사라호 태풍 피해로 인한 집단이주 이후 고속도로 건설로 주변과 단절되는 등 낙후지역으로 전락한 신기마을을 되살리기 위한 도시재생사업이 추진된다. 양산시는 신기마을(북부동 769번지 일원) 4만 1천 685㎡를 2022년까지 모두 50억 원의 예산을 들여 추진하는 양산시 도시재생 뉴딜사업의 우리 동네 살리기 분야에서 ‘최초에서 최고로, 신기한 마을 고고씽’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1953년 1월 24일, 경상남도 거제군 명진리 허름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을 피해 남으로 자유를 찾아온 부모님이 처음 정착한 곳이었다. 이후 문재인 가족은 북한출신 피난민이 많이 살던 부산 영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영도는 고갈산 아래 산복도로를 중심으로 비탈진 언덕에 얼기설기 판잣집이 들어선 대표적 서민 달동네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곱 살 때, 사라호 태풍으로 판잣집 지붕이 날아가 뻥 뚫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던 때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박문수는 1691년(숙종 17)~1756년(영조 32) 조선후기 호조참판, 병조판서,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함경도에 북도진휼사(北道賑恤使)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천 섬을 실어다 기민을 구제해 송덕비가 세워졌다. 1730년 대사성, 대사간, 도승지를 역임했으며, 1731년 영남감진어사(嶺南監賑御史)로 나가 기민(饑民)의 구제에 힘썼다. 조선시대 영조 5년 여름, 영해(寧海: 지금의 포항 부근) 부사로부터 바다에 가축과 초가지붕이 떠내려 온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민정에 밝은데다 특히 대민 구제에 이력이 난 박문수는 북쪽에 대홍수가 났으니까 비축미가 있을 리가 만무할 것이라고 여겨 제민창의 쌀 1,000석을 즉각 선적해 보냈다. 주변에셔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윤허를 먼저 받아야 함이 마땅하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나 박문수는 백성을 구하는 것이 먼저이고 윤허를 받는 것은 나중이라며 과감하게 조치를 취하여 함경도 백성 수만 명을 구제하였다. 2016년 10월 5일 태풍 차바가 양산시 교동, 상북면, 하북면 일대를 침수시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였다. 특히 상북면 지역은 양산천과 그 지류들이 한꺼번에 범람하면서 강변에 위치한 반회의 한 아파트, 고려제강 앞의 아파트 등이 물에 잠겼다. 지하주차장에 물이 밀려들어와 차량들이 침수피해를 입었다. 정전과 단수 피해까지 발생하여 주민들이 불편을 겪었다. 양산시의 선제적인 양산천 보강 대책으로 양산 신도시는 침수를 면했다. 부산일보는 양산신도시 조성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05년 6월 15일 폭우로 인한 '신도시 침수'를 막기 위해 양산천의 둑 보강이 필요하다는 기획기사를 집중 게재했다. 양산시는 애초 제방 높이를 기존보다 조금 높인 7.96~9.4m로 계획했었다. 2005년 부산일보의 기획기사로 양산천 범람의 가능성이 크게 제기되면서 시가 계획을 바꾼 것이다. 둑은 기존 제방 높이인 7.86~8.15m보다 평균 1.2m 정도 높은 9.6~10.6m로 공사를 하여 태풍 차바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양산의 낙동강변은 태풍 차바 때 참수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정비사업으로 준설을 하면서 물 그릇을 키웠기 때문이다. 태풍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다. 미 공군과 해군 예보관들이 아내나 애인의 이름을 붙이면서 태풍에 여자 이름을 붙이는 관례로 이어졌다. 사라호 태풍 이름의 사라(sarah)는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이라고 한다. 남녀평등의식이 강해지면서 1978년부터 남녀의 이름을 번갈아 붙이다가 2000년부터는 태풍의 영향을 받는 아시아태풍위원회 소속 14개 나라에서 제출한 이름(동물명이나 지명 등)을 순차적으로 사용한다. 14개 국가에서 각각 10개씩 제출한 140개의 이름을 28개씩 5개조로 나누어 국가별 알파벳 순서에 따라 붙이고 있다. 1959년 9월 태풍 '사라호'로 대한민국 전역이 수해를 입은 당시에 북한이 대남 지원의사를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는 선전책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북한 웹 사이트 ‘조선의 오늘’은 23일 "1959년 9월, 예년에 없던 비바람과 큰물이 온 남녘땅을 휩쓸었다"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결정 60호를 채택했다"고 밝혔다. 사이트에 따르면, 당시 9월 23일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내려진 내각결정 60호는 1차적으로 쌀 3만 석, 직물 100만 마, 신발 10만 켤레, 시멘트 10만 포대, 목재 150만 재 등을 남측에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에 당시 이승만 정부는 "선전책이고 논평할 가치가 없다"고 수령을 거부했다. 1984년 8월31일부터 4일간 서울, 경기, 충청 일원에 내린 집중호우로 서울지역이 최악의 홍수사태를 겪었다. 161개 지역 2만 2천 5백 가구에서 9만 3천 8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교까지 휴교령이 내려지는 대형 수재였다. 전국적으로는 사망 및 실종 189명, 이재민 35만 1천명, 부상 153명에 피해액은 1333억 원에 달하였다. 북한은 9월 8일 방송을 통해 수해지역 이재민들에게 쌀 5만석, 옷감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 등을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남측은 이 제의를 수용할 것인지를 두고 고심했다. ‘정치공세’에 이용될 것이라는 우려가 내부에서 적지 않았다. 한해 전인 1983년 10월 9일 버마에서 발생한 아웅산 테러의 앙금도 가라앉지 않았던 시점이다. 당시 전두환 정부로서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개최를 앞두고, 한반도의 평화분위기 조성이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에 대남제의를 받아들였다. 9월 29일부터 10월 4일까지 판문점, 인천항, 동해항을 통해 북한 적십자의 수해물자가 전달됐고, 남측은 담요, 카세트 라디오, 손목시계, 양복지 등 18개 품목이 든 선물가방 848개를 북한 대표들에게 답례품으로 증정했다. 북한 쌀은 수해지역 주민들에게 33㎏에서 66㎏까지 분배됐다. 쌀이 좋지 않다고 떡을 해 먹거나 북녘 쌀로 제사를 지내겠다는 실향민들도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총 4번, 10만~50만 톤의 쌀을 차관 형식으로 북한에 지원했다. 가장 마지막 지원은 북한 수해 피해가 컸던 2010년 5천 톤 규모의 무상지원이었다. 태풍 타파도 양산에 많은 피해를 주었는데, 이번 개천절 무렵에 한반도 남부지방에 상륙 예정인 태풍 미탁에도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한편 평소에 양산천 준설, 제방 보강 등에도 신경을 써야만 한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칼럼 / 황산공…

심상도 박사의 화요칼럼 / 황산공원과 마음정원의 정비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양산시 물금읍 낙동강변에 펼쳐진 낙동강 수변공원인 황산공원의 면적은 무려 187만 3천㎡(56만 8천 평) 규모에 달한다. 지난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한 4대강 정비사업 중 낙동강 정비사업으로 조성된 황산공원을 양산시가 부산지방국토관리청으로 부터 인수하면서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처음에는 황산문화체육공원이라고 부르다가 요즘에는 줄여서 황산공원이라고 한다. 황산공원은 각종 운동시설, 자전거 도로, 캠핑장, 파크 골프장, 축구장, 강민호 야구장, 공원, 연못, 산책로, 낙동강 선착장, 역사 유적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계절별로 유채꽃, 수레국화, 양귀비꽃, 코스모스, 연꽃 등이 피어 많은 양산시민들이 즐겨 이용하고 있다. 황산공원은 최근 경남도 제2호 지방정원으로 지정되어 그 가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마음정원에 국도비 포함 60억 원이 투자되어 새롭게 변신을 할 예정이다. 필자는 이상열 도의원과 함께 지난 9월 5일 황산공원을 둘러보며 정비 방향에 대해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중앙고속도로 지선 낙동강교 밑의 주차장에서 만나 마음정원으로 가며 고속도로에서 나는 소음에 관해 그간 필자가 주장해온 내용을 설명하였다. 마음정원은 낙동강교와 인접해 있어 소음이 매우 심하여 낙동강교의 방음벽 설치, 소음차단 수목 식재가 필요하다고 얘기하였다. 마음정원의 조성 취지가 조용한 곳에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잘 만들어진 정원을 감상하며 힐링을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마음정원을 천천히 산책하면서 무궁화나무가 식재된 곳을 발견하고 살펴보니 타임캡슐을 묻어놓은 표지석이 보였다. 양산시에서 2011년 4월 1일에 ‘낙동강 황산숲 조성기념 타임캡슐’을 묻어 20년 후인 2031년 4월 1일에 개봉한다고 적혀 있었다. 필자는 마음정원 초기에 조성되었던 작은 연못, 수도 펌프 등에 대해 안내를 하였다. 지금은 다 훼손되어 없어졌다. 닉동강변에 조성된 월당나루터로 이동하여 나루터 명칭에 관해 해설을 하였다. 월당나루터는 신라와 가락국의 교통 및 국경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는 영남대로의 길목으로서 역사적 역할을 해온 장소이다. 월당나루터는 낙동강 건너편 김해시 대동면 월촌리에 있으며 낙동강과 대동운하가 만나는 곳으로 김해사람들이 양산 황산나루로 건너가던 곳이다. 월당나루터는 김해에도 있고, 황산공원에도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 월당나루터인 셈이다. 황산공원에 있는 월당나루터 안내판 이름을 황산진나루터로 바꿔야 하겠다. 양산의 입장에서는 황산진나루터라 불러야 한다. KTX울산역(통도사) 사례처럼 통도사에서 양산이 빠져 양산시민들이 반대했던 경우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역명의 문제점은 통도사가 울산에 있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김해에서 양산으로 가는 길을 황산도(黃山道)라 했다. 김해부의 남역(南驛, 김해시 삼정동)을 출발하여 덕산역(德山驛, 대동면 덕산리)을 지나고, 월당나루(대동면 월산리)에서 낙동강을 건너, 양산군의 황산역(黃山驛, 양산시 물금리)까지 가는 길이라 황산도라 했다. 『삼국사기』에는 가야와 신라가 군사적으로 충돌하던 전장을 황산진구(黃山津口)라 기록했고, 근처의 낙동강을 황산하(黃山河)라 불렀다. 고대에 황산강과 황산나루가 먼저 있었고, 고려 이후에 역원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황산하를 건너는 길이라 황산도라 부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해 백룡암이 있는 덕산은 옛 덕산역이 있던 마을의 수호산이라 불리고 있다. 특히 덕산역은 창원 자여도와 양산 황산도를 연결하며 각 지역의 교통과 체신을 담당하던 주요 거점 역이었다. 백룡암은 앞으로 빼어난 풍광과 뒤로 계곡을 가득 채운 너덜지대를 품고 있다. 황산공원의 월당나루터 복원 안내문을 황산나루터라 바꾸는 것을 고려해봐야 하겠다. 조선시대 나루터 운영권을 김해 쪽에서 주도하여 이런 사태가 초래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어찌 되었든 현재 양산의 역사성을 반영한 나루터 명칭을 붙이는 것이 합당하다. 황산공원 전체의 문제점이자 마음정원에도 해당하는 문제점인데, 큰 나무가 없고, 햇볕을 피할 정자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사례를 살펴보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 조선시대에 낙동강변과 양산천에 홍수방지를 위해 제방을 축조하고 대나무를 심은 기록이 나온다. 울산의 태화강 십리대밭보다 먼저 조성된 대나무 숲이 있었다. 조선시대 정조실록 35권(정조 16년. 1792년) 9월 15일 조에 당시 양산군수 성종인이 홍수에 의해 붕괴된 제방의 복구문제 상소문을 통해 ‘본군 남쪽 거도(巨島)의 30리(12km)리 되는 동서(東西)로 이어진 제방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성종인의 상소에 근거, 동대제종죽(東大堤種竹)과 서대제종죽(西大堤種竹)의 총 길이는 12km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방축조와 관련 정조실록 31권, 정조 14년 1790년 8월 9일 조에는 당시 양산군수였던 남학문이 군사에 관한 폐단을 등을 골자로 하는 상소문에 나온다. ‘지난 계해년에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특별히 1만여 명의 군정을 풀어 큰 둑을 쌓아 긴 강을 가로막은 덕에 수천 섬 지기의 토지가 이를 힘입어 이득을 보았다.’고 제방 축조 경위가 나온다. 역사적 근거가 확실한 대나무 숲을 조성하는 것으로 고려해봐야겠다. 현재도 황산언 유적지 근처에는 신우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생태수로 건너편에는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울산의 십리대밭처럼 대나무를 심는다면 산책로로 이용하기 좋은 그늘을 만들 수 있다. 대나무 숲이 조성되어야 할 자리에는 핑크뮬리를 심어놓았다. 핑크뮬리는 여러해살이풀로 볏과 식물이다. 핑크뮬리의 우리 이름은 분홍쥐꼬리새로, ‘꽃 이삭이 쥐꼬리를 닮은 풀’이라는 뜻에서 이름 붙었다. 쥐꼬리새는 보라색, 흰색의 꽃이 피기도 하는데 분홍색 꽃이 가장 유명하다. 미국이 주산지인 서양 억새 핑크뮬리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름조차 생소한 식물이었다. 요즘에는 유럽산 씨앗도 수입하여 많이 식재하고 있다. 핑크뮬리가 대중의 관심을 본격적으로 끌기 시작한 건 제주도에서 시작되었다. 제주에서는 모 레스토랑과 교회가 2014년 핑크뮬리를 처음 심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제주도내 한 생태공원이 2015년 포토존 형태로 핑크뮬리를 조성하면서 갑자기 유명해졌다. 경주시는 2017년에 첨성대 인근 동부사적지 빈 땅 840㎡에 핑크뮬리를 심었다. 첨성대나 대형 고분을 배경으로 핀 핑크뮬리를 보려고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려들자 2018년에는 핑크뮬리 군락지 면적을 4,170㎡로 5배가량 늘렸다. 부산 낙동강 대저생태공원에는 낙동강 관리본부가 2017년 1,350㎡, 2018년에는 6,350㎡로 재배면적을 확장하였다. 을숙도에는 자생 억새가 자라던 곳을 핑크뮬리가 상당 부분 점령하고 있다. 핑크뮬리의 문제점으로는 외래종으로 번식력이 매우 강하여 나중에 제거할 때 어려움이 많다는 점이다. 무분별하게 번식하면 토종 식물인 억새 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외래종을 심는 것은 심사숙고할 문제다. 이상열 도의원과 대화하며 원동매화축제의 주차장 확보문제도 거론하였다. 마침 황산공원에서 바라보니 1022번 지방도 굴곡 구간을 깎아서 직선화하는 공사현장이 보였다. 한옥문 도의원에 의하면 이 공사는 경남도비로 시행하기 때문에 예산확보가 중요하다고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상열 도의원과 한옥문 도의원은 모두 경제환경위원회 소속이므로 소관 위원회는 아니다. 건설소방위원회 소속인 웅상의 성동은 도의원에게 부탁하여 원동면 순매원 근처의 1022도로의 굴곡도로 직선화로 생긴 공간에 주차장을 만들 수 있도록 예산을 확보하길 당부하였다. 이상열 도의원과 함께 황산공원을 둘러보며 마음정원의 조성 방향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제점을 도출하고 대안을 제시하였다.

심상도 박사 칼럼/한국을 대표하는…

고대 서양정원의 기원은 이집트문명과 메소포타미아문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고대 이집트 정원양식의 예는 기원전 15세기 무렵 테베의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좌우 대칭형의 공간과 관개를 위한 수로, 정돈된 축 등이 극적 효과를 연출한다.

심상도 박사 칼럼/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정원인 양산의 우규동 별서 제2탄

서양의 전통정원 정원의 양식은 동양과 서양, 그리고 나라에 따라 다르다. 서양은 인간중심의 기하학적 형태를 가지고 평면에 분수, 조각 등을 중심으로 기하학적으로 디자인 되는데 반하여 동양의 정원은 자연스럽게 구부러진 나무, 길, 연못 등 곡선을 이용한 디자인 형태로 자연중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한다. 고대 서양정원의 기원은 이집트문명과 메소포타미아문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고대 이집트 정원양식의 예는 기원전 15세기 무렵 테베의 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좌우 대칭형의 공간과 관개를 위한 수로, 정돈된 축 등이 극적 효과를 연출한다. 비슷한 시기에 바빌로니아에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공중정원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서양문화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정원에 관한 유적이나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로마의 정원은 3개의 공지(空地)로 구성된 중정(中庭)식 정원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 공지인 아트리움(atrium)에 이르고, 중문(中門)을 지나면 아름다운 정원인 페리스틸룸(peristylum)이 나타나며, 뒤뜰에는 과수와 채소를 가꾸는 지스투스(xystus)가 있다. 로마시대의 정원은 거리의 소음, 먼지, 바람, 강렬한 햇빛 등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중세 수도원의 정원은 기본적으로 야채나 약용 식물을 재배하기 위한 공간으로, 유실수나 채소, 그리고 교회의 성찬대에 바칠 꽃을 심었다. 그러나 때로는 조용히 휴양할 수 있는 공간으로도 이용되었으며 이를 위해서 정원을 아름답게 디자인하기도 했다. 르네상스시대의 이탈리아에서는 노단건축식(露壇建築式) 정원이 만들어졌다. 이탈리아 지형의 특징을 살려서 경사지를 계단형으로 만드는 기법으로 근대 유럽건축의 모태로 수직적인 요소를 강조하였다. 17세기 프랑스에서는 평지가 많은 프랑스 지형의 특징을 잘 살린 평면 기하학식 정원이 유행했다. 베르사유 궁전은 수평적인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잘 살린 정원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18세기 영국에서는 프랑스와는 달리 계몽주의, 낭만주의, 자연 회귀사상 등의 영향으로 자연의 풍경을 닮은 목가적 정원을 만들었다. 동양의 전통정원 정원은 서양의 garden의 일본식 한역어다. 중국에서는 정원이라는 말보다는 주로 원림(園林)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서양의 정원이 건축물에 딸린 부속품이라는 느낌이 강한 데 비해 중국의 원림은 자연경관을 살리는 원림이 먼저고 그 속의 건축물들은 원림을 효율적으로 살리기 위해서 부속물로 존재한다. 중국 정원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 외에 산수화와 시구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정원의 모티브로서 이용되는 시화(詩畫)와 화재(畫材)는 매우 기묘하게 생긴 기암절벽과 같은 풍경이 많은데 이것은 낙양, 장안, 북경과 같은 당시 도읍지던 북방지역 주변에는 마땅한 경치가 없었다는 점과 은둔사상과 도교적인 기괴함이 가미된 심산유곡 및 기암괴석이 인기가 높은 것으로 미루어 이것이 당시의 풍경의 개념으로 정착된 듯하다. 중국에는 황제를 위한 휴식공간인 원림이 발달했다. 청나라 때 만든 북경의 이화원(頤和園), 승덕(承德)의 피서산장 등이 있다. 송대 이후에는 상업의 발달로 거상들이 등장하게 되자 일반 평민도 원림을 만들었는데, 소주(蘇州)의 졸정원(拙政園), 유원(留園) 등이 유명하다. 중국 정원은 건물과 정원의 배치형태는 상반적이다. 주거 건물군은 정형적인 질서 속에 배치되는데 반해 정원은 비정형적인 불규칙으로 상징적이고 의외의 기쁨을 맛보도록 꾸며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 엄격한 예의를 요구하는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규칙적인 건물의 배치가 요구되었던 것이며 정원의 불규칙성은 자연과의 조화 있는 생활과 불로장수를 위한 이상화를 추구하는 신선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정원은 공간구성상 원형, 장원형, 반원형, 기타 여러 형태의 출입구를 가진 높은 담장에 의해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어 각각 독립된 공간을 구성하여 자기의 이상세계를 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정원에는 교목과 관목뿐 아니라 바위, 모래, 인공 언덕, 연못, 유수 등이 예술적으로 사용된다.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서양식의 정원과는 달리 일본 정원은 전통적으로 가능한 인공적인 요소를 배제하여 자연에 가까운 경관을 조성하였다. 일본의 서원조경에서는 당초부터 차경을 고려하여 정원이 만들어진 경우가 많으며 정원내의 건물에서 정원 내의 경관과 차경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건물의 동향 혹은 남향에 문이나 창문을 두는 방식을 많이 이용했다. 경관조성을 위해 조경사들은 3가지의 기본 원칙을 따르는데 그 원칙이란 바로 규모의 축소, 상징화, ‘경치의 차용’ 등이다. 즉, 산과 강의 자연적 경관을 축소하여 만듦으로써 제한된 공간에 모두 재현할 수 있도록 하였다. 흰 모래가 바다를 상징하는 데 쓰이는 것과 같이 상징 화하였으며 정원 뒤 또는 주위의 경관을 이용하여 배경으로 활용하였다. 한국의 전통정원 정원을 조성할 때는 자연에 순응하여 지형을 함부로 변형시키지 않았다. 물의 이용도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자연의 법칙에 충실할 뿐 인공적으로 하늘을 향하는 분수를 만들지 않았다. 꽃이나 나무는 스스로 자라는 생물이기에 인공의 수형을 만드는 가지치기는 피했다. 지역에 맞는 수목을 선정하였으며 선비들은 소나무, 나무, 매화, 난, 국화, 연을 즐겨 심었다. 민가에서는 감, 대추, 모과, 앵두, 살구, 밤, 배, 산수유, 호두, 포도 등을 많이 심었다. 위로 직간(直幹)으로 자라는 나무보다 옆으로 사간(斜幹)으로 자라는 나무를 좋아하고, 인공적인 식재보다는 자연스러운 식재를 했다. 느티나무, 회화나무, 벽오동나무, 단풍나무, 참나 무, 복숭아나무, 주목, 배롱나무, 동백나무, 버드나무 등으로 원림을 조성하였다. 조형물은 자연과의 조화를 원칙으로 건물을 세울 때 터 잡는 일을 제일 중요시 했다. 정자나 자연의 조화를 생각하여 누각을 배치하였다. 연못, 강가, 산자락에 세워서 정원, 경관을 감상하는 장소로 삼았다. 궁원에는 음양오행 사상과 풍수지리사상, 사원에서는 정토사상, 서원이나 별서에서는 주자의 은둔사상이 크게 영향을 주었다. 종교적으로 신선사상도 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 전통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돌과 물이다. 돌과 물은 자연을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로 음양오행과도 통한다. 돌은 남성을 의미하기도 하며 선사시대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 여성을 의미했다. 정원의 구성에도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이를 근간으로 연못, 정자, 석등, 석탑 등이 놓여졌다. 그리고 이에 한 자연의 운치를 돋우기 위해 정원수도 갖추게 되었다. 담장은 외부와의 경계를 나타내는 '선'인 동시에 내부에서 다시 공간을 나누는 역할을 한다. 이 담장을 옛 사람들은 하나의 건물로 여겼으며 공간과 공간이 서로 맞물리는 중간역으로 해석했다. 정원에서 담장은 건물과 자연을 하나로 조화시키고 건축물과 같이 적극적으로 공간을 한정하는 수직요소로 경계의 표시와 외부 환경으로부터 방어기능을 갖는 것이 보통이나 우리나라의 담장은 이외에 장식적인 문양을 새겨 넣어 중요한 수경요소로 사용하였다. 연못은 일반적으로 네모진 것이 많으나 지형에 따라 자연을 이용한 연못을 파기도 한다. 연못에는 그 넓이와 배경의 조화에 따라 그 중간에 둥근 섬을 만들고 소나무 등의 나무를 심기도 한다. 연못에는 연을 심어 연꽃을 감상하며 연향을 맡을 수 있도록 하였다. 연못가나 섬에는 괴석을 배치하고, 연못 속에는 연꽃을 심은 것이 대부분이나, 소쇄원 지당처럼 순채를 심은 것도 있다. 못가의 나무는 버드나무, 배롱나무가 가장 많고 섬 속에는 소나무, 대나무가 가 장 많다. 순채는 연꽃잎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연못에서 자란다. 부규,순나물이라고도 하며, 중국 원산이다. 연못에서 자라지만 옛날에는 잎과 싹을 먹기 위해 논에 재배하기도 하였다. 뿌리줄기가 옆으로 벋으면서 길게 자라서 50∼100cm나 되고 잎이 수면에 뜬다. 종자는 물 속에서 익는다. 우무 같은 점질로 싸인 어린 순을 식용한다. 정자는 연못에 바짝 붙여 짓거나 정자의 두 기둥이 연못의 물에 잠기게 하여 물과의 근접성을 중시하였다. 물과 근접해 있기 때문에 정자의 바닥은 마루로 깔아 습기를 제거하였다. 정자는 최소한 지면과의 간격을 40㎝ 이상 두어 통풍이 잘 되게 하였다. 정원수는 풍수지리사상에 의해 건물의 방향에 따라 여러 형태를 나타낸다. 정원수로는 계절에 따른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수종을 심으며, 과실을 맺는 실용적인 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우리나라는 사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인공적인 식재에 있어서 상록수보다는 활엽수를 많이 심었다. 초봄의 신록으로부터 개화, 결실에 이르는 절기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꽃과 나무에서 얻도록 하였다. 꽃이 좋거나 열매가 좋은 화목은 대개 집 가까이 담 옆이나 후원가에 심었다. 우규동 별서 소한정(小閒亭) 12경(景) 한국 전통정원의 문화적 배경은 자연 숭배, 도교의 신선 사상, 불교의 정토사상, 유교사상, 음양오행설, 풍수지리설, 노장사상에 있다. 우규동 별서 역시 이러한 문화적 배경을 충실하게 반영하였다. 주인공 우규동 역시 유학자이자 관리였지만 융통성을 발휘하여 정원을 조성하였다. 유교와 대척점에 있는 불교, 도교 사상을 배척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반영하였다. 또한 다른 지역에 있는 정원과는 다른 독특한 유형도 있어 전문가들이 많이 방문하여 연구를 하고 있다. 동양 조경의 주류인 신선 사상에 입각한 방지원도(方池圓島)를 구축한 것과 대나무, 백일홍 등의 장생수와 거북, 학, 용, 봉황 등의 장생불사를 상징하는 동물의 이름을 함께 담아 12경물을 명명하는 기법은 매우 독창적인 조경 기법이다. 동양전통의 조원의 중심은 연못이며 이 주위를 언덕을 쌓고 정자와 누각을 세우고 연못 안에 섬을 조성하여 나무와 꽃을 심어 인공적인 경관을 조성한다. 연못의 형태는 여러 가지 사상이 투영되어 연못 안에 1개의 섬을 조성하여 음양오행을 구현했다. 도가사상은 3개의 섬을 조성하고,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기인한 둥근 형태의 섬을 만들었다. 연못의 용도로는 경관창출의 효과와 실용적인 목적으로 나누어지며 섬에 나무를 심기도 하고 연꽃을 심어 관상과 심미적 효과를 창출하였다. 방지원도는 음양오행설이 담겨 있으며 당시의 사상이었던 성리학의 철학을 보여주는 조선만의 독특한 정원문화였다. 성리학의 우주관이며 자연관인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을 구현한 것으로 '양은 둥글고 음은 모나다'(陽圓陰方)는 뜻도 된다. 정원의 연못에 거창한 우주관을 담았다. 방지원도는 다른 의미로 자손번영을 뜻한다. 네모난 연못은 땅이고, 둥근 섬은 하늘을 가리킨다. 유교의 근본원리인 음양설로 풀이하자면 땅을 음으로 보고 하늘은 양으로 보기에 방지원도는 음양의 결합을 뜻하는 형상이고 음양이 결합되면 자손이 많이 나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한정의 세심당(洗心塘)에서 당(塘)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池’는 ‘천지통수(穿池通水)’로 설명할 수 있다. 물을 저수하는 용기로서의 개념만이 아니라 못 안의 물이 땅속에 스며들어 통기, 통수가 조절되게 하면서 일정한 형태로 고이게 꾸며 여러 종류의 수생식물과 물고기를 기를 수 있는 생태적인 여건이 갖추어진 정원의 못을 말한다. ‘당(塘)’은 옛 문헌에 ‘착지주수(鑿池注水)’, ‘피지제안(陂池堤岸)’, ‘장사위제위당(長莎謂堤爲塘)’ 등으로 기록되고 있듯이 물을 저수하기 위해 둑을 쌓아서 만든 용수지의 일종으로 생활용수와 방화용수는 물론 농업 및 공업용수 등을 공급하기 위해 조성한 큰 댐과 저수지가 여기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서유구에 의해 편찬된 조선 후기 농업 위주 백과사전 중 하나로서 정조지 번역서인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는 못의 기능이 명시되어 있다. 첫째 고기를 길러 감상할 수 있고, 둘째 넘친 물을 논밭에 공급할 수 있으며, 셋째 사람의 마음을 물과 같이 맑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규동의 증손자인 우종신 전 농협상무는 소한정을 안내할 때 필자에게 원래 소한정이 있던 바로 아래 논이 있었던 곳을 알려주었다. 세심당 역시 연못의 기능을 가지는 동시에 논에 물을 대는 기능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한정 12경은 계곡의 상징적인 곳에 있는 자연석에 한자로 이름을 새겨놓았는데, 현재도 잘 남아 있다. 바위에 소한정을 방문한 손님들 이름도 많이 새겨놓아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비슷해서 놓치기 쉽다. 요즘의 한글 세대는 한자를 몰라서 찾기가 힘들 것이다. 소한정(小閒亭) 12경(景) 세심당(洗心塘) 남은 해를 아무 일 없이 운림에 누웠자니 가운데 방지(方池)는 수척의 깊이인데, 세상을 떠돌며 시끄러운 자리에 때 묻지 않으니 아침마다 스스로의 마음을 씻어 낸다네 침천암(沈泉岩) 근처의 돌을 쌓아 몸을 한가로이 쉬니 바위의 새와 꽃이 모두 더불어 있고, 그윽한 창(窓)애 누으니 맑고 고요한 밤이라 샘물 소리만 베개 속을 파고드네 삼미천(三美川) 동문(洞門) 깊은 곳 신선의 집을 찾아 지팡이 짚고 한가로이 읊조리니 해는 지고, 그 가운데 세 가지 아름다움을 스스로 사랑하니 물가와 그윽한 돌, 돌가의 꽃이 그것이라 사시화(四時花) 숱한 아름다운 꽃 모두 여기 있어 향기 끊이지 않고 그 차이 더하니, 어찌하여 세속은 편애함이 많은가 가을 국화와 봄 매화도 한때인 것을 칠곡수(七曲水) 일곱 굽이 찬 계곡은 굽이마다 맑고 물결을 희롱하며 때로 창을 울리네 객이 와 술상을 내니 그윽하고 한가로운 저녁인데 둘러앉아 잔을 돌리니 서정(敍情)이 족하네 녹하괴정(鹿下槐亭) 유물 위에 가을바람 부니 회화나무 잎은 지고 때로 가두어 놓은 사슴은 산에서 내려오니, 서로 사귀어 이제 친구가 되었는데 구름과 안개는 깊고 깊어 모이고는 흩어지네 천층석(千層石) 구름 끝나는 곳에 돌을 쌓아 구획 지으니 듣건대 신선이 바로 이 땅에서 노닐었다네, 신선은 가고 천년이나 소식 끊어지니 지금은 다만 흰 구름만 떠다닐 뿐이네 구상연지(龜上蓮池) 내가 연꽃을 사랑하여 작은 못을 파고 다시 보니 연잎은 신령스런 거북 사이에서 나는데, 사람의 일생은 어찌 너의 수를 누리지 못하는가 집집마다 백년수(百年壽)를 바라는데 용와운곡(龍臥雲谷) 천년 묵은 용강(龍岡)에 용이 와서 누워있고 오래도록 구름과 비는 어둡도록 서로 따르니 공명(孔明)은 가버리고 사람은 보이지 않으며 오직 청산만이 옛 모습을 띄고 있네 봉립오림(鳳立梧林) 오동나무숲 동쪽 물가에는 봉황이 있는데 서쪽 언덕을 향해 날아올라 큰 빛을 발하니, 다만 오동나무숲 아래에 선비가 있어 책 읽고 시 읊으며 더불어 돌아가고자 하네 천년석불(千年石佛) 예전에 이 봉우리에 암자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맑고 흰 구름만 떠있는데, 천년고불이 의지할 곳 없어 청산의 돌조각 가운데 머물러 있네 일쌍매학(一雙梅鶴) 찬 매화가 푸른 창 앞에 새로이 피었으니 선학(仙鶴)은 몇 해나 외로이 깃들어 있었던가, 고요하고 외로운 중문 깊이 닫혀 있으나 지식 많은 선비조차 한가로움을 시기하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양산숲길보전회 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심상도 문화박사의 화요칼럼 "원효…

심상도 문화박사의 화요칼럼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성산 원효암의 매력"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전통사찰 제76호인 원효암은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산 16번지 천성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본사 통도사 말사이다. 천성산(해발 922m) 정상 아래 750m 지점에 자리 잡은 원효암은 646년(신라 선덕여왕 15년) 원효대사(617~686년)가 창건한 유서 깊은 천년 고찰이다. 해발 730m의 절까지 차로 갈 수 있는 것이 원효암 매력 중의 하나다. 을사년(1905년)에 효은(曉隱)선사가 중창하였고, 경봉선사의 원력으로 1976년 범종각과 범종을, 1980년에는 법당을 새로 지었지만 인법당(人法堂) 형태여서 협소하고 불편하였다. 인법당은 인법당(因法堂)이라고도 쓴다. 큰 법당이 없는 절에서 승려가 머무르는 곳에 불상을 함께 봉안한 전각, 혹은 승방을 가리킨다. 정부의 보조와 불자들의 마음을 모아 2018년 5월에 범철 스님이 현재 모습의 대웅전으로 개축 불사를 하였다. 1648년(인조 26년)에 조성한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30호 ‘석조약사여래좌상’, 세존응화 1905년(世尊應化 2933)년에 조성한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31호 ‘마애아미타삼존불입상’이 있다. 문화재로 지정은 되지 않았으나 독성각에 모셔진 작은 석조불상도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애아미타삼존불입상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31호로 사찰 법당 옆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마애아미타삼존불입상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 아미타삼존불은 얇게 조각되어 평면적이며 회화적인 성격이 강화다. 본존불인 아미타여래는 입상으로 상반신에 비해 하반신이 훨씬 길어 보여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느낌이다. 본존불의 좌우에는 본존불을 향해 합장인을 하고 원형두광을 갖추고 있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좌우에 서 있다. 좌우 보살상들은 좌우대칭으로 화려한 보관에 긴 머리가 어깨를 따라 허리까지 흘러내린 유려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삼존불의 상단에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명문과 대세지보살 우측에 새겨진 세존 용화 2933년이라는 명문을 통해 아미타불이라는 본존의 존명과 1906년이라는 제작시기를 알 수 있다. 비록 조성시기가 떨어지기는 하지만 한 폭의 불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수법을 보인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또한 삼존의 아래에는 '강응수(姜膺秀)', 삼존이 새겨진 암석의 향좌측 측면 암석에는 향좌부터 '이우영(李瑀榮)', '안규행(安珪行)', '우창옥(郵創玉)', '정기남(鄭基南)' 등 발원자 이름이 음각되어 있다. 천광약사여래불은 원효암 동쪽 150m에 있다. 1991년 7월 20일 저녁 8시경 천둥 번개를 동반한 벼락에 의해 조성되었다. 그때 당시 날씨는 장마철이라 변덕이 심했고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갑자기 천성산 일대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번개가 이곳저곳에서 치고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끝없이 들려왔다. 그러나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이 약 두 시간 계속되던 중 사자봉에 불기둥이 떨어지면서 벼락이 내리쳤다. 바위에 불이 떨어지면서 깨진 돌들이 허공으로 치솟아 오른 것이 잠깐 보였다. 날이 밝아 사자봉을 바라보니 부처님 좌상이 나투신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이 교구 본사 통도사에 보고되어 방장 월하 대종사께서 직접 원효암을 방문하였다. 대종사께서 부처님의 명호는 동쪽에 나투셨으니 ‘동방만월세계약사유리광여불’로 명명하셨다. 천광(天光)이라 함은 하늘에서 빛으로 조성되었다 하여 ‘천광 약사여래불(天光 藥師如來佛)’로 명호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약 3년 반이 되는 을해년 3월에 108계단 및 배례석 불사를 하였다. 즉 1995년 3월 8일 원효암 박정수 주지가 불사를 완공하였다. 원효암은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로 화엄벌에서 원효대사가 중국에서 찾아온 천 명의 제자에게 화엄경을 강설하여 성불시킨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는 현장인 의상대, 원효대가 있다. 법당 뒤에 서 있는 신장바위는 호법신장이 절을 수호하는 듯 솟아 있는 바위로 맨 꼭대기에 있는 바위를 투구바위라고 한다. 원효대사가 원효암을 떠날 때 제자들에게 저 바위가 떨어지면 내가 열반한 것으로 알라고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원효암 범종각은 천성산의 산세가 사자 모양을 하고 있어 종을 쳐 사자를 깨움으로써 국운이 번창하고 남북통일이 빨리 이루어진다고 하여 1976년 호국사자후종각을 지었다고 한다. 원효암에서 맑은 날에 내려다보면 양산시내, 부산의 광안대교, 멀리 일본 대마도까지 보이는 명당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원효암 주지실은 양지바른 곳으로 바로 앞에 큰 바위도 있다. 원효암 담장 밑에 바위로 된 미륵불상이 있는데, 대부분의 관광객은 모르고 지나친다. 원효암에는 천성산 원효암 헌산유공기(千聖山 元曉庵 獻山有功記)가 있다.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급고독 장자가 기다태자의 동산을 금으로 덮어 그곳에 절을 지어 부처님께 보시하였다고 들었다. 구하스님은 박민순 씨가 산과 나무를 사서 원효암에 보시한 것을 급고독 장자의 부처님에 대한 보시에 비유하면서 천성산 원효암 헌산유공기(千聖山 元曉庵 獻山有功記)를 지어서 나무 현판에 새겨놓았다.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는 중인도(中印度) 교살라국(橋薩羅國) 사위성(舍衛城)의 부유한 상인 수달다(須達多)의 별칭이다. 그는 자비와 선을 베풀기를 좋아해서 종종 외롭고 쓸쓸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베풀어주었기 때문에 이런 별칭을 얻었다. 그는 왕사성(王舍城)에서 석가여래의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석가여래를 자기 나라로 초청했다. 그리고 태자 기다(祇多)의 정원을 사서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세워 석가여래에게 바치며 설법하는 장소로 쓰게 해주었다. 장자의 일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급고독 장자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감동하였다. 자신처럼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삶의 이치를 깨닫게 하기 위해 절을 지어 부처님께 바치려고 하였다. 장소를 물색하던 차에 마침 기다태자의 동산이 적당하다고 여긴 장자는 태자에게 동산을 팔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태자가 동산을 팔 리가 만무하였다. 장자가 너무나 간청하기에 팔지 않을 요량으로 그렇다면 동산을 금으로 덮으라고 하였다. 장자는 자신의 창고를 열어 동산을 금으로 덮은 뒤 태자에게 이렇게 덮었으니 자신에게 팔라고 간청했다. 태자도 그의 자초지종을 들은 뒤 감동하여 동산의 나무를 보시하였다.` 오늘날 박민순 씨가 산판과 땔감을 매입해서 이 암자에 공양 올렸다. 고금이 비록 다르지만 은혜를 베풀어 보시한 공덕은 매한가지이다. 왜냐하면 이 암자는 신라국의 원효국사께서 주석한 곳이나 유적(암자)이 퇴패(頹敗)해 천여 년이나 지나왔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효은선사가 거년 을사년(1905년)에 암자의 여러 칸을 나누어 중건하였다. 그러나 산판 측량을 소홀히 해서 그 후에 사찰의 터만 근근이 지켜왔다. 그 외 나머지의 것도 타인의 소유가 되어 버렸는데, 사찰에 머무는 스님들이 쓸 나무조차도 산주의 소유였다. 산주가 팔 때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서 절 주위를 장엄(풍치림)한 나무 한 그루까지 모조리 다 팔아버리는데도 산주의 행위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때 주지 보월선사가 근심이 막심하고 분개를 금하지 못했는데, 상북면 대석리에 사는 박민순 씨가 오로지 부처님 도량에 나무 한 그루의 풍치도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한결같은 주지 스님의 지성과 단혈(일편단심)에 감동하여 사찰 근처 산판 2정 8반과 수목 수백 그루를 매입해서 이 암자에 영구 보사(補寺)토록 하였다. 이 분의 부처님 도량을 외호한 방편지책이 참으로 장하고 훌륭하니 포금시원의 옛이야기와 조금도 다르지 않기에 내(구하스님) 기록해서 오는 이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이다(1935년). 천성산 원효암 헌산유공기(千聖山 元曉庵 獻山有功記)의 존재를 알게 된 연유는 양산경찰서 장석원 정보관이 필자에게 구하 스님의 현판을 디카로 찍어서 보내주었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자료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에서 새해 천성산 일출 행사를 마치고 장석원 정보관의 소개로 천성산숲길보존회(현재 양산숲길보전회) 회원들과 함께 원효암 범철 주지 스님을 친견하게 되었다. 범철 스님은 통도사 누룽지로 아침 공양을 마련해주고, 귀한 차도 내어주었다. 차를 마시고 주지실에 올라가 `천성산 원효암 헌산유공기` 현판 실물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 장석원 정보관과 범철 스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자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정원인 양산의…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정원인 양산의 우규동 별서 제1탄

한국 전통정원의 중요성 산림청은 2016년부터 ‘정원 진흥 기본계획’을 발표하며 한국 정원 세계화를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수목원·정원의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는 등 개청 50주년을 맞아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였다. 지난 7월에 양산의 황산공원이 경남도 제2호 정원으로 지정되는 경사가 있었다. 양산시는 오는 2021년까지 국비 30억 원을 포함, 모두 60억 원을 들여 황산공원 내 18만㎡ 부지에 지방정원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이르면 연내, 늦어도 내년 초부터 실시설계를 거쳐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는 계획이다. 기존 수로 주변 습지를 활용한 ‘창포원’에는 전통정자와 족욕장인 창포탕도 만든다. 젊은 도시 양산의 색채(흰색 꽃)를 이미지화한 ‘양산테마원(일명 하얀풍차원)’, 오감·오방색 재료를 도입한 치유정원인 ‘오감치유원’, 초화정원이자 체험광장(물길)인 ‘낙동강 12경 정원’도 들어선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도시경관과 전통정원 경관을 바라볼 때의 기억력과 사고력, 감정을 조절하는 뇌 전두엽의 혈류량이 뚜렷하게 줄어들어 두뇌 활동이 안정화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도시에서 생활하며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릴 수 있는 현대인들이 자연으로 둘러싸인 정원을 통해 부정적 감정을 해소시키고 정서를 순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실증 사례다. 우리나라는 숲 치유, 정원에 대한 개념이 선진국에 비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최근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사찰이나 궁궐이나 고택이 아니고서는 일반인들이 전통정원을 접하기가 쉽지 않다. 양산시에 우규동 별서라는 전통정원이 있어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어 다행이다. 현재 복원이 진행되는 과정에 있어 완성된 상태는 아니지만 아쉬운 대로 원형의 일부를 볼 수 있다. 서울의 전통정원 성락원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한국 전통정원인 성락원은 1만 6천㎡ 규모로 1992년 사적 제378호로 지정됐다가 2008년 명승 제35호로 다시 지정됐다. 문화재 지정 이후 여러 차례 복원사업이 진행되어왔으며, 2017년부터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성락원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여 연차별, 단계별로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성락원은 개인소유로, 4월 23일부터 6월 11일까지 하루 20명 한정 인원으로 한시적으로 개방하였는데, 관람신청이 쇄도하여 인기를 끌었다. 개방은 시설을 관리하는 가구박물관과 서울시, 문화재청이 한국의 전통정원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준비하였다.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으나, 의친왕 이강(1877∼1955)이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성락원이란 이름은 '도성 밖 자연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정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시대 서울 도성 안에 위치한 몇 안 되는 별서 정원으로 암반과 계곡 등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리고 인간의 손길을 최소화해 조선시대 정원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안뜰은 영벽지와 폭포가 있으며 바깥뜰은 송석과 연못이 있는 지역이다. 서쪽 아래 지역에 늪이 있고, 북쪽에는 물길을 파서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성락원 내원에는 자연 연못인 영벽지가 있는데, 서쪽 암벽에 '장빙가(檣氷家)'라고 새긴 글씨는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이 썼다. 의금부도사와 통정대부를 지낸 우규동이 만든 별서 양산에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우규동 별서(別墅)가 있는데,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뤄 매우 아름답다. 우규동 별서는 양산시 어곡동 산 5번지에 위치한 면적 11,820㎡이며, 1992년 10월 21일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서울의 성락원은 문화재로 잘 보호받아왔는데, 양산을 대표하는 전통정원인 우규동 별서는 양산시의 무관심으로 주변환경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할만한 한국 전통정원인 우규동 별서가 파괴되고 정자가 불태워져 원형이 심각하게 파괴된 것은 6.25 전쟁 때문이었다. 별서가 자리 잡은 새터마을은 선암산의 깊은 계곡으로 주변의 신불산 등지에 빨치산이 준동하였다. 공비들이 주민들을 납치, 식량약탈 등으로 괴롭혀 유엔군이 작전상의 요인, 주민 안전을 위해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철수시켰다. 이때 우규동 별서의 소한정, 쌍청각 역시 불태워졌다. 주민들이 철수하여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우규동 별서는 6.25 전쟁이 끝나고 치안이 안정되자 다시 주민들이 여름철 피서지로 이용하게 되었다. 어곡초등학교 학생들은 봄, 가을 소풍 때면 우규동 별서가 있는 소한정 계곡으로 놀러왔다고 한다. 김일권 양산시장은 어곡초등학교 출신인데, 어린 시절 이곳으로 소풍을 왔다고 한다. 우규동의 손자 우종신 전 양산농협 상무 역시 여기로 소풍 온 기억이 생생하다고 한다. 어곡초등학교 연혁은 1939.05.05 양산공립보통학교 부설 어곡간이학교로 인가, 1944.04.10 북물금국민학교로 승격, 1946.06.10. 어곡국민학교로 교명 변경, 2019.2.15. 제70회 졸업식 39명 졸업(총 2,994명 졸업), 2017.10. 31 학교 이설 개교기념식(양산시 두전길 30-14).어곡초등학교의 교가(작사, 작곡 : 박상호 교장)의 가사를 보면 우규동 별서를 암시하는 가사 내용이 나온다. 1절 “선암산 줄기받아 반룡대 정자/ 산 높고 물도 맑은 어실의 고장, 2절 맑은 물 흐르는 두연대라면 흘러서 유산 앞 흘러 넓은 복현수, 후렴 나날이 자라나는 어린이 강산/ 내일의 이 강산을 빛내어나갈/ 이름은 어곡학교 우리의 학교“높은 산 선암산(매봉 해발 706m)에서 흘러 내리는 삼미천의 맑은 물은 우규동 별서를 묘사하는 내용이다. 아쉽게도 소한정 대신에 반룡대 정자가 가사에 나온다. 선암산은 어곡 공단의 뒷산쯤으로 여겨져서 한때 어곡산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동네 주민들의 노력으로 제 이름을 찾았다. 영축산 남지맥의 가운데에 우뚝 서 있다. 고당봉, 달음산과 함께 부산 근교의 3대 암봉으로 손꼽히고 있다. 부산서 한 시간 거리 주말 산행지로 제격이어서 인기를 끌고 있다. 교가에 나오는 어실의 고장은 신라 진성여왕의 왕릉이 어곡에 있다는 전설과 연관되어 있다. 우규동의 증손자 우종신 전 상무의 별서 복원 노력 2016년 1월 22일 강서동주민센터에서 열린 나동연 양산시장과 시민과의 간담회에서 우규동의 증손자인 우종신 양산농협 어곡지점장은 경남도지정 문화재자료인 우규동별서에 야외 화장실 설치, 어곡제2산단 조성으로 인한 발파작업으로 발생한 피해 복구와 배상을 요청한 바 있었다. 우규동 별서 주변은 레미콘 공장, 산단 조성으로 환경여건이 좋지 않다. 양산시에서 관심을 갖고 방문객을 위한 도로정비, 주차장, 화장실, 안내표지판 설치를 해야 하겠다. 단양 우씨 문중에서 복원사업을 하고 있다. 우규동의 증손자인 우종신 양산농협 전 상무가 조상의 유적을 되살리기 위하여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한국전통 정원 전문가, 교수, 학자를 만나고 자료를 수집하였다. 또한 양산시 문화관광과와 경남도에 건의하여 5천만 원 예산으로 학술조사 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우종신 전 양산농협 상무는 어곡초 23회, 양산중 25회, 동인고 2회, 한국해양대학교에서 학사 및 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양산초 전 운영위원장, 양산중 총동창회 및 축구부 후원회 전 사무국장, 양산중 25회동기회 전 회장, 동인고 양산동문회 전 회장, 강서동문화체육회 전 회장을 역임하였다. 농협중앙회 MBA 4기 졸업, 양산농협 32년 근무, 양산농협 석산농협 지점장, 어곡지점장, 본점 총괄상무를 역임하였다. 현재 양산시 향교 장의 및 유도회 회원, 양산시 4H본부 사무국장, (사)산수보전협회 및 강서동자율방범대 자문위원을 맡아서 활발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소한정을 복원을 하기 위해서는 사전 학술조사가 중요하다. 우종신 씨가 전문가들을 통해 받은 자문에 의하면 현재 나무가 너무 우거져 숲이 되어 정원으로서 기능이 상당히 상실되었으므로 나무를 벌채할 부분이 많다고 하였다. 소한정에 처음 식재했다가 나중에 말라죽은 나무는 다시 식재한다고 하였다. 최근 복원한 정자는 단청을 하지 않았는데, 전문가에 의하면 소나무의 송진이 자연스럽게 마른 다음에 단청을 해야 한다고 한다. 복원하기 전 노후 정자에 있던 대들보를 재활용하여 신축한 정자에 옮겼다. 정자에서 위를 쳐다보면 상량문이 잘 보인다. 우종신 씨가 이번 여름에 가족과 함께 소한정에 놀러왔는데, 이미 다른 관광객이 차지하여 피서를 하고 있어 차마 주인이라는 말을 하지 못해 양보하고 정자 옆에서 돗자리 깔고 휴식을 취했다고 얘기하여 웃음이 나왔다. 필자가 강동환 씨와 9월 4일 답사를 할 때 직접 나와서 상세하게 안내를 해주었으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원래 소한정이 있던 자리, 연못이었던 세심당의 자리도 안내해주고, 칠성단도 올라가 설명을 해주었다. 비 온 직후라 계곡인 삼미천은 매우 미끄러워 한 발 내디딜 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종신 전 상무는 땀을 뻘뻘 흘리며, 한편으로는 모기에 물려가면서도 선조의 유적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어 감명을 받았다. 감사드리는 바이다. 소한정은 현재 포장도로가 나기 전에는 개울을 건너 오솔길을 따라서 접근했다고 하였다. 옛날 어곡초등학교 다니면서 소풍 올 때는 오솔길을 이용했는데, 요즘 축대가 일부 무너져서 길이 일부 단절되었다. 복원이 시급함을 알 수 있었다. 계곡을 건너기 위해서는 교량을 설치해야 한다. 도로변에서 표지판이 있는 곳에는 우편함도 설치되어 있어 사람이 거주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중에 보니 우종신 전 상무의 친척이 아직도 소한정 안쪽에 살고 있었다. 그 분도 차를 갖고 있으므로 답사객이 입구에 주차하여 가로막으면 안 된다. 다른 차들이 통행할 수 있도록 도로 한편에 바짝 붙여서 주차를 해야만 한다. 의금부도사 벽은(碧隱) 우규동(禹奎東)은 조선 후기 의금부도사와 통정대부의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우규동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세웠던 만년 휴식처로 1910년 별장처럼 따로 지었으며, 소한정, 쌍청각이라는 2개의 정자, 세심당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정자의 상량문에 경술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계곡의 아름다운 곳과 상징적인 장소에는 바위에 글자를 새겨서 12경을 만들었다. 정자 주위에는 대나무, 소나무, 배롱나무, 감나무, 매화나무, 회화나무, 배나무, 단풍나무 등을 심어 놓았고, 기암괴석도 배치하였다. 시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 주변의 자연경관에 유교, 불교, 도교(신선사상)에 입각한 12개의 이름을 각각 명명하여 12경을 만든 것이 특색이다. 조선 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推鞫)하던 의금부의 5~6품 관리를 의금부도사라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 초에 순위부(巡衛府),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로 칭호가 바뀌었다. 1414년(태종 14) 의용순금사를 의금부로 개편해 사법 전담기관으로 독립시켰다. 의금부의 구성을 보면, 1466년(세조 12) 판사 중심의 경국대전(經國大典)체제로 개편되었다. 당상관은 4인으로 판사(判事, 종1품), 지사(정2품), 동지사(同知事, 종2품)를 두었으나 모두 다른 관원으로 겸임하게 하였다. 당하관은 10인으로 경력(經歷, 종4품)과 도사(종5품)를 두었다. 『속대전』에서는 경력은 없어지고 종6품 도사 5인과 종9품 도사 5인을 두었다. 의금부의 사법기능으로 첫째, 전제왕권을 옹호하는 역할을 들 수 있다. 둘째, 유교 윤리를 옹호하는 기관이었다. 셋째, 왕의 교지를 받들어 추국하는 최고의 사법기관이었다. 넷째, 대외관계 범죄를 전담하는 기관이었다. 외국 공관의 감시, 밀무역 사범의 단속, 외국인의 무례한 행위, 외국인의 범죄 등을 다뤘다. 다섯째, 양반 관료의 범죄를 취급해 일반 백성들과는 달리 양반 관료를 우대하였다. 의금부는 사법기능 외에 여러 임무도 담당하였다. 왕명을 받들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거나 그 밖의 잡무에 종사하였다. 즉, 왕명으로 실정을 파악하거나 민폐를 금지하는 임무를 수행하거나, 몰수한 죄인의 재산을 처리하거나, 소방서에 해당하는 금화도감(禁火都監)의 주된 구성원으로 의금부의 관원이 참여하였다. 과거시험 고사장(考査場)의 금란임무를 수행했고, 나례의식(儺禮儀式)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의금부 도사를 알기 쉽게 설명하면 조선시대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저 놈의 주리를 틀어라"를 외치는 관리들이다. 또한 죄인에게 죽음을 집행하는 사약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금부도사다. 현재 정부의 공무원으로 따진다면 검찰청 평검사(4~5급) 정도의 위치로 검찰총장의 명령을 받아 죄인을 조사하는 게 기본 임무다. 의금부는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의금사로 이름이 바뀌고 법무아문(法務衙門)에 속하였다. 다음 해에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로 바뀌었다. 다시 1899년에 평리원(評理院)으로 개편되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조선시대 문신 정3품 상계(上階)의 품계명이다. 정3품 상계부터 당상관이라 하였고, 하계 이하를 당하관이라고 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문산계가 제정될 때 정3품 상계는 통정대부, 하계는 통훈대부로 정하여져 『경국대전』에 그대로 수록되었다. 조선시대 정삼품(正三品) 동반(東班) 문관(文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정삼품의 상계(上階)로서 통훈대부(通訓大夫)보다 상위 자리로 당상관(堂上官)의 말미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이후로 문관에게만 주다가,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종친(宗親:임금의 4대손까지의 친족)과 의빈(儀賓:임금의 사위)에게도 이 품계를 주었다.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관직으로는 도정(都正), 부위(副尉), 참의(參議), 참지(參知),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 판결사(判決事), 대사간, 참찬관(參贊官), 부제학, 규장각 직제학, 대사성, 제주(祭酒), 수찬관(修撰官), 보덕(輔德) 등이 있다. 처(妻)에게는 숙부인(淑夫人)의 작호(爵號)가 주어졌다. 정3품 당상관에게는 1438년(세종 20)에 정비된 녹과(祿科)에 의거하여 실직(實職)에 따라 1년에 네 차례에 걸쳐 중미(中米 : 중질의 쌀) 11석, 조미((糙米 : 매갈아서 만든 쌀) 32석, 전미(田米 : 좁쌀) 2석, 황두(黃豆 : 누런 콩) 15석, 소맥(小麥 : 참밀) 7석, 주(紬) 4필, 정포(正布) 13필, 저화 8장을 지급하였다. 아울러 정3품 당상관에게는 65결의 직전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1556년(명종 11) 직전법도 완전히 폐지되고, 이러한 정3품에 지급되던 녹봉은『속대전』에서는 당상관에게는 매달 미 1석9두, 황두 1석 5두를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양산숲길보전회 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심상도 문화박사의 화요 칼럼/홍룡…

심상도 문화박사의 화요 칼럼/홍룡폭포와 랑견관음 참배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홍룡폭포는 양산팔경 제4경으로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데,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홍룡사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가홍정을 지나 절 오른쪽 산신각 앞의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된다. 입구의 2단 폭포와 3단 폭포는 무지개 다리 위에서 잘 보인다. 삼층 비류가 흘러 내리는 상층은 높이가 80척이요, 중층은 높이가 46척, 하층은 높이가 33척이다. 전국의 폭포 중에서 이렇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폭포는 거의 없다. 특히 비가 많이 온 직후에 가면 엄청난 분량의 폭포수가 쏟아져 장관을 이룬다. 전국에서 많은 불자와 관광객이 방문한다. 양산시청에서 팔경을 선정할 때 자문위원으로 참가하여 인연을 맺은 바 있어 홍룡사와 홍룡폭포를 구경할 때마다 유심히 관찰한다. 이를 계기로 2002년 6월에 논문을 한 편 썼다. 이 칼럼을 쓰기 위하여 9월 2일 오후에 방문하였는데, 가랑비가 내리며 안개가 끼어 운치가 있었다. 비가 와서 물이 많이 떨어졌다. 가을 장마라고 하는데, 앞으로 며칠간 비가 더 오면 제대로 된 폭포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구경을 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는데, 한 부부가 다가오며 폭포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 자세히 안내해주었다. 한국관광공사는 ‘시원한 폭포여행’이라는 주제로 2015년 8월에 가볼 만한 국내 관광지 8곳을 선정해 7월 24일 발표한 바 있다. 여기에 양산퍌경인 홍룡폭포가 선정되었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추천한 관광지는 무릉계곡(강원 동해), 무주채폭포(경기 가평), 홍룡폭포(경남 양산), 내연산 12폭포(경북 포항), 수락폭포(전남 구례), 직소폭포(전북 부안), 금산 12폭포(충남 금산), 용추·수옥폭포(충북 괴산) 등이다. 전국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멋진 폭포로 접근성도 좋다. 한국관광공사는 폭포수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장관을 즐기고 싶다면 경남 양산시 홍룡폭포, 강원 동해시의 무릉계곡, 경북 포항시 내연산 12폭포, 충남 금산군 금산 12폭포를 가보라고 추천하였다. 홍룡폭포는 고즈넉한 암자와 폭포가 만들어내는 무지개로 유명하고, 무릉계곡은 신선이 노닐었다는 무릉도원에서 이름을 따왔을 정도로 경치가 수려하다. 내연산 12폭포는 12개의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폭포를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금산 12폭포를 대표하는 죽포동천폭포는 20m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룬다. 양산시는 홍룡폭포 계곡이 행락철 주차공간 부족으로 심각한 주차난이 발생하고,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2016년 말까지 주차장 조성, 휴식공간 확보 등의 사업을 실시했다. 홍룡사 계곡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무질서로 인해 양산 8경과 양산시의 이미지까지 훼손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투자를 했다. 양산시비 5억 원, 농림축산식품부의 일반농산어촌개발사업인 ‘대석권역단위 종합개발사업비’ 중 마을공동주차장 정비사업비 3억 원 등 총 8억 원을 투입하여 주차장을 증설하였다. 대형 3대, 일반 73대, 여성 배려형 11대, 장애인 4대로 홍룡사까지 버스는 진입할 수 없다. 절 입구에 승용차는 주차할 수 있는데, 단체관광객은 홍룡사 계곡 입구 주차장에서 절까지 한참 걸어가야 한다. 피서철에는 절까지 승용차 진입도 차단한다. 오근섭 전 양산시장이 2008년 5월 31일에 준공한 범종 모양의 화장실이 홍룡사 계곡의 명물이다.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 대선사가 절의 화장실은 근심을 해결하는 곳이어서 해우소(解憂所)라 명명한 바 있다. 범종 모양의 화장실에서 은은한 범종 소리를 들으며 근심을 내려놓으면 된다. 그린벨트 내 주변 환경 정비사업을 위한 사업비 1억 6,800만 원을 추가 확보하여 주차장 주변에 투자하였다. 개발제한구역 관리계획에 의한 녹지공간 2,300㎡를 관광객들의 휴식공간으로 조성하여 정자, 운동기구 등을 설치하였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편백숲과 연계하여 힐링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천성산 등산로(3km)를 정비하였다. 편백숲까지 가는 등산로 주변에 불법적으로 텐트를 치고 장기 거주하는 사람들이 있어 문제다. 9월 2일 오후에 방문했을 때 안개가 낀 상태에서 폭포는 물이 많이 떨어져 사진찍기 좋았다. 폭포 바로 옆에 관음전이 있으며, 오른쪽으로 다리를 건너가면 야외에 불상이 놓여있어 저절로 경건한 신심이 생긴다. 맑은 날에 방문하면 영롱한 무지개를 볼 수 있다. 물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물보라가 사방으로 퍼진다. 이때 물보라 사이로 무지개가 보인다. 무지개 홍(虹) 비올 롱(瀧)을 써서 홍롱사라 하였다. 일주문은 ‘홍롱사(虹瀧寺)’로 표기돼 있다. 한편 물이 떨어지며 무지개가 생기고, 그 형상이 선녀가 춤을 추는 것 같고 황룡이 욱일승천하는 것 같다고 하여 이름이 무지개 ‘홍(虹)’ 자와 용 ‘룡(龍)’자를 써서 홍룡사로 하였으며, 폭포는 홍룡폭포라 불렀다. 또 기암괴석이 폭포수가 떨어지는 뒷면에 우뚝 서 있어 물이 바위에 부딪혀 거슬러 튀어져 그 물보라가 수십 척의 사방으로 날아 퍼지니 옥을 뿜어내는 듯 구슬이 튀어나오는 듯하다. 사명(寺名)에서 터에 이르기까지 물과 깊게 관련된 홍룡사는 관음도량이다. 폭포 옆으로 백의관음(白衣觀音), 랑견관음(蒗見觀音)이 봉안된 관음전이 있다. 선방으로 이용하고 있는 무설전에는 천수천안관음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홍룡사의 랑견관음보살은 폭포에 현현(顯現)한다고 한다. 1천여 년 동안 감로수를 쏟아낸 폭포 바로 옆에 관음전이 들어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다. ‘랑(蒗)’은 폭포, 운하를 뜻하는 말로 ‘랑(낭)견’이란 말 그대로 ‘폭포를 바라보고 있는 보살’을 뜻한다. 그러므로 폭포에만 존재한다는 ‘랑(낭)견관음’은 폭포가 모든 것을 씻어내리듯 중생의 번뇌를 씻어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중생의 생각을 맑게 한다. 특히 백의관음과 함께 나란히 앉아 있는 랑견관음은 한국불교에선 유일하게 폭포를 안고 있는 홍룡사에서만 볼 수 있는 관음보살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수백 년 동안 절터만 남아 있다가, 1910년대에 통도사 승려 법화(法華)가 중창하였다. 홍룡사는 1930년경에 유영식이란 승려가 세운 조그만 암자였으나 그 후 우동범이라는 스님이 낡은 사찰을 헐고 대웅전을 지어서 내려오고 있다. 1970년대 말 우광(愚光)이 주지로 부임한 뒤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다. 재단법인 선학원서 운영하고 있다. 홍룡사는 신라 문무왕 13년(661∼681) 원효(元曉) 대사가 창건하였다. 원효대사가 천성산 화엄벌에서 당나라에서 온 제자 1천 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할 때 낙수사(落水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그 당시 승려들이 절 옆에 있는 폭포에서 몸을 씻고 원효대사의 설법을 들었다 하여 이름을 낙수사라고 하였다. 또 산 이름은 본래 원적산이었으나 1천 명이 모두 득도하여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천성산(千聖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원효대사는 장마로 인한 산사태(山沙汰)로 중국 당(唐)나라 태화사(太華寺) 승려들이 매몰(埋沒)될 것을 예견하고, "해동원효 척판구중(海東元曉 擲板救衆 : 신라 원효가 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제한다)"이라 쓴 현판을 태화사로 날려 보내 승려를 구하자 1천 명의 승려가 신라에 와서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고 했다('송고승전(宋高僧傳)' 참조). 대중들은 천성산 상봉에서 원효의 화엄강설(華嚴講說)을 듣고 모두 득도(得道)했다고 한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면 장안사(長安寺) 뒷산의 척판암(擲板菴)은 원효대사가 판자를 던진 곳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 원효는 산내에 89암자를 지어 1천 명의 대중을 가르쳤으며, 당시 각 암자에 흩어져 있는 대중을 모으기 위해 큰 북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 북을 매달아 두었던 집북재와 화엄경을 설법하던 화엄벌 등이 남아 있다. 물이 떨어지며 무지개로 피어나는 홍룡사에 가면 염리심(厭離心)이 절로 난다. ‘염(厭)’자는 싫어할 염으로서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싫어해서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다. 염리심은 윤회를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출리심(出離心)이라고도 한다. ‘깨달음(佛)을 챙긴다(念)’라는 선(禪)의 의미보다는 그저 마음이 가라앉고 고요한 평안을 느끼는 상태, 다시 말해 세속의 흐름에 들뜨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염리심에 감응하기 때문인 것 같다. 홍룡폭포를 구경한 다음 폭포 옆의 관음전에서 백의관음, 랑견관음을 참배하면 마음을 정화시키고 힐링할 수 있다. 폭포를 조용히 바라보는 것 자체가 기도고 참선이다.

심상도 문화박사의 화요칼럼 "배내…

심상도 문화박사의 화요칼럼 "배내천 트레킹길 2코스 ‘달마야 놀자’ 촬영지 선녀탕"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달마야 놀자’는 2001년 박철관 감독 데뷔작으로 히트한 영화다. 암자로 숨어들어 간 조직 폭력배와 스님들의 대결을 그린 휴먼 코미디 영화다. 각본 박규태, 박신양, 정진영, 박상면, 강성진, 김수로, 홍경인이 출연하였다. 박신양은 조폭으로 그 밑에 박상면, 강성진, 김수로, 홍경인 등은 부하로 출연했다.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정진영은 스님 수업을 받는 한편 액션 신을 위해 선무도를 익혔다고 한다. 영화는 최다 스크린(212관) 확보 기록을 세우면서 서울 관객 125만, 전국 377만 관객 동원으로 2001년도 한국영화 흥행 순위 5위를 기록하였다, 영화 배경이 되는 사찰은 경남 김해 신어산에 있는 은하사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비오는 밤, 업소 주도권을 놓고 일생일대의 패싸움을 벌인 재규(박신양) 일당은 달려가는 봉고차에 급히 몸을 싣지만 조직원 윤중이 칼에 찔려 출혈이 심한 상황이다. 고민하던 재규는 결국 차를 돌려 윤중을 병원에 데려갔고 이후 보스로부터 상황파악 될 때까지 숨어있으라는 연락을 받는다. 이후 어디 숨어있을지 의논하다가 기적처럼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다음 날 무작정 근처에 있던 한 사찰로 쳐들어간다. 이후 수양생활을 하고 있던 대봉을 인질로 잡아 이 절은 우리가 접수하겠다고 소란을 피웠고 사찰의 주지 노스님이 나타나면서 일단락된다. 노스님은 그들이 조폭이란 걸 알면서도 일주일만 머물게 해달라는 재규의 청을 순순히 들어주고 재규 일당은 스님들이 외부에 밀고할지도 모른다며 살벌하게 밀착감시를 한다. 예상과는 달리 스님들은 건달 불청객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건달들은 오히려 사찰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나며 원래 하던 밀착감시는 뒷전이 된다. 스님들이 절을 올리고 수양을 할 때 건달들은 운동을 하면서 절에서 기왓장을 깨고 난리를 쳤다. 여유까지 누리며 즐거워하지만 곧 문화와 단절된 절 생활이 따분해졌다. 그러나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어서 함부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조폭들은 일주일만 더 머물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상좌승 청명(정진영)은 수양생활에 방해된다며 반대했다. 관대했던 노스님조차도 여긴 여관이 아니라며 딱 잘라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스님들끼리 이야기해보라며 자리를 떴고 그들은 맹렬한 기 싸움만 하고 있던 그때 현각(이원종)이 청명에게 다가오더니 귓속말을 한다. 처음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무시하던 청명도 이내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 제안은 바로 삼천 배였다. 부처에게 3천 번 절을 올리는 예의며 수를 먼저 다 채우는 쪽이 원하는 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건달들도 흥미를 느끼며 순순히 받아들였다. 삼천 배 올리기에는 인사성 바르기로 유명한 김수로가 출전하지만 매일 절을 하는 스님에게 대 참패를 하고 말았다. 2차전에서는 물속에서 숨 오래 참기 시합을 했다. 복식호흡으로 단련된 이문식과 불곰 박상면의 대결로 당연히 복식호흡의 이문식이 이기는듯했다. 그러나 박상면이 물속에서 기절하면서 물을 먹어버렸다. 그 모습에 놀란 이문식이 나오면서 건달 팀이 이겼다. 바로 이 장면이 양산시 원동면 배내골의 통도골 계곡 선녀탕에서 촬영하였다. 여기는 경치도 절경이고 수심도 깊다. 선녀탕은 배내천 트레킹길 제2코스 장선마을~대리마을(4.65km) 사이에 있다. 이 코스를 다 걷지 않고 쉽게 찾아가는 방법이 있다. 배내골 배내허브랜드 가기 직전 장선2교를 건너 장선리 팜스테이마을 체험장, 축구장이 있는 곳에 주차를 하고 화장실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된다. 허브랜드 반대편인 금강산장, 아트인더밸리, 에덴밸리 표지판 쪽으로 가다가 계곡 옆으로 난 잔도를 따라가면 선녀탕 표지판이 나온다. 다음 시합으로 고스톱을 쳤는데 이건 당연히 조폭 팀이 이겼다. 그다음엔 369까지 하는데, 스님들은 밤새도록 연습을 하였다. 묵언수행 중인 스님이 묵언수행까지 깨면서 연습하여 스님팀이 이겼다. 그래도 결판이 나지 않자, 주지 스님이 밑빠진 독을 주면서 물을 채우라고 하였다. 그러자 박신양은 밑빠진 독을 물속에 던져서 꽉 눌러버렸다. 그래서 건달팀은 절에 더 머물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기고만장해진 건달팀의 민폐는 절정에 치달아 하루는 불상 청소를 하다가 김수로가 부처님은 중국사람이라고 우기고, 홍경인은 인도사람이라고 우겼다. 박상면이 나서서 정 궁금하면 불상 밑에 Made in xxx 보라고 하였다. 그걸 보다가 불상의 귀가 부러졌다. 불상은 메이드인 차이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국 사람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님들은 분노가 폭발하였다. 스님 중에 정진영 씨가 알고 보니 무술고수였다. 정진영 혼자서 박신양이 없던 틈에 부하들을 쓸어버렸다. 그때 박신양은 자신들의 신변의 안전을 알아보려고 잠시 시내에 갔는데, 형님이 자신들을 배신하고 경찰에 밀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에 돌아와 동생들이 얻어터진 걸 보고 화가 나서 정진영한테 도전하였다. 박신양도 잘 싸웠지만 무술 고수 정진영한텐 완패한 후 상하관계가 정리되어 건달팀은 화장실 청소까지 하게 되었다. 그 후에 조폭들의 형님이 절에 찾아왔다. 형님의 배신을 확신한 박신양은 동생들을 데리고 도주하지만 잡혔다. 그때 스님들이 나와서 건달팀을 구해줬다. 절에서 1달 정도 지내면서 건달들과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배신한 형님 패거리를 무찌르고 영화는 해피 엔딩 결말을 맞이했다. ‘달마야 놀자’는 한 세기를 관통하는 한국영화사의 발자취를 한 권에 담은 책으로 이세기 씨가 쓴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한국영화 1001』애 선정되었다.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에서부터 2007년 이창동 감독의 ‘밀양’까지 시대에 남을만한 한국영화 1001편을 백과사전식으로 정리하였다. 영화평론가와 대학교수, 관련 단체장을 비롯한 문화예술계의 원로 100명이 작품을 선정했으며, 각 작품에 대한 글은 본격적인 비평보다는 영화에 대한 평단의 반응과 언론자료들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한국영화사를 일궈낸 영화감독, 배우, 스태프들의 이야기를 아우른 이 책을 통해 시대성을 반영하는 다양한 걸작들을 만날 수 있다. 이세기 씨는 이화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을 졸업하였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두 시간 십분]당선, 현대문학 에 소설 추천을 받았다. MBC-TV 영화번역과 서울신문 논설위원(1991~1999),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예술' 편집위원, 세종문화회관 운영위원 (1999~2002), 한국영상자료원 이사 (2002~2005),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 (2000~2004) 등을 역임했다. ‘달마야 서울가자’는 ‘달마야 놀자’의 속편 격이다. ‘아이언 팜’(2002)으로 감독 데뷔한 육상효 연출작이다. 2001년에 개봉되어 전국 377만 관객을 동원한 ‘달마야 놀자’의 흥행 성공을 잇기 위한 속편이었지만 참패를 하였다. 전편에서는 건달들이 스님들과 밀고 버티는 맞짱 한판을 벌였던 것에 비해 이 작품은 노스님의 유언에 따라 서울에 온 스님들이 빚더미에 올라앉은 절을 구하게 되는 휴먼 코미디다. 전편의 스님 3인방인 정진영, 이문식, 이원종이 그대로 출연하고 전편의 박신양 대신 신현준이 건달 두목, 박신양은 후반부에 특별 출연했다. 부산 영상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부산 남포동에 있는 대각사에서 촬영됐다. ‘달마야 놀자’ 영화가 2주 만에 관객 200만 명을 넘겼다는 사실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스님 50명이 서울의 한 극장에 단체관람을 했다. 스님과 조폭의 밀고 당기기를 그린 영화 내용이 관객들에게 인기를 끄는 요인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스님들과의 3천 배 내기에 자신만만해 하는 조폭을 보며 과묵하던 스님들도 마침내 웃었다. 스님들은 3천 배가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선문답 같은 과제를 풀어낸 조폭의 생각에는 무릎을 치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난 스님들은 어려운 불교 이야기를 쉽게 풀어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상도 문화박사의 화요 칼럼 "배…

심상도 문화박사의 화요 칼럼 "배내천 트레킹길 1코스를 즐기는 법"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한여름의 무더위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8월 18일 오후에 배내천 트레킹길을 답사하였다. 배내천의 공식적인 지명은 단장천이다. 지난 8월 6일 내습한 태풍 프란시스코 덕분에 고점마을의 고점교 근처 밀양댐 상류는 물이 가득 차 있었다. 고점교에서 풍호마을까지는 단장천 옆으로 트레킹길이 개설되어 있어 물을 즐길 수 있다. 이 코스는 물의 시원한 느낌을 만끽할 수 있는 힐링 코스다. 배내천 트레킹길 1코스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과 특이한 관광자원을 소개하고자 한다. 배내천 트레킹길은 희귀목 연리지 나무, 단장천의 흐르는 물에 닳고 닳은 반들반들한 기암괴석, 영화 `달마야 놀자` 촬영지인 통도골 선녀탕, 수백 년 된 밤나무 군락지, 돌배나무, 고로쇠나무 군락지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어 명품 길이라 할 수 있다. 일반인들은 트레킹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산림문화・휴양에 관한 법률」 제22조의 2항에 숲길의 종류가 나와 있다. ① 등산로는 산을 오르면서 심신을 단련하는 활동(등산)을 하는 길, ② 트레킹길은 길을 걸으면서 지역의 역사・문화를 체험하고 경관을 즐기며 건강을 증진하는 활동(트레킹)을 하는 길로 둘레길과 트레킹길로 나눈다. 둘레길은 시점과 종점이 연결되도록 산의 둘레를 따라 조성한 길, 트레일은 산줄기나 산자락을 길게 조성하여 시점과 종점이 연결되지 않는 길이다. ③ 레저스포츠길은 산림에서 하는 레저・스포츠 활동(산악레저스포츠)을 하는 길, ④ 탐방로는 산림생태를 체험・학습 또는 관찰하는 활동(탐방)을 하는 길, ⑤ 휴양・치유숲길은 산림에서 휴양・치유 등 건강증진이나 여가 활동을 하는 길을 말한다. 배내천 트레킹길은 4개의 코스로 구분하여 1코스 태봉마을~장선마을 1.63km, 2코스 장선마을~대리마을 4.65km, 3코스 대리마을~풍호마을 2.4km, 4코스 풍호마을~고점교 1.09km, 관문에는 태봉마을~고점교 9.7km 약 3시간 30분 걸린다고 안내판에 나와 있다. 입산통제 안내에 보면 봄(2.1~5.15), 가을(11.1~12.15)로 장터길 4개 코스 22km를 통제하고 있다. 전 구간을 답사하려면 무려 3시간 30분이 소요되고 원점회귀를 하려면 장장 7시간이 넘게 걸리니 부분 답사를 하거나 전 구간 주파 후 차량편을 수배하여 차를 타고 원점회귀하는 방법이 무난하다. 고점교에서 배내천 트레킹길의 안내판이 붙어 있는 출발점인 관문을 지나 조금 걸어가면 연리지나무가 있는 쉼터가 나온다. 무더운 여름이지만 18일 답사 때 3~4명의 그룹을 이룬 탐방객이 간간이 지나다녀 이 길의 인기는 여전한 것으로 보였다. 연리지 나무가 있는 곳에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대팻집나무가 서로 다정하게 손을 맞잡아 하나 되어 자라는 모습을 보면 사랑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나무가 크지는 않지만 매우 희귀한 사례이기 때문에 답사객이 눈을 떼지 못한다. 탐방객이 나무를 함부로 만지지 못하도록 보호조치를 해야 하는데, 현재는 한쪽만 목책을 둘러놓아서 미흡한 감이 있다. 연리지 나무가 있는 바닥에는 풀이나 이끼가 자라지 않고 마사토가 바로 노출되어 있어 나무 생육에 좋지 않은 환경이다. 그 이유는 관광객이 연리지 나무 옆에서 사진을 찍기 위하여 바닥을 자주 밟기 때문이다. 연리지 나무 보호막을 완전하게 다시 둘러싸야 하겠다. 연리지 나무와 뿌리가 같은 왼쪽 나무의 맨 아래 가지가 말라죽은 것이 보였다. 용 모양의 소나무는 이미 오래전에 말라 죽었다. 죽은 나무를 아직 그대로 두어 소나무 모양은 감상할 수 있지만 답사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 귀중한 연리지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좀 더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겠다. 배내천 트레킹길은 2016년부터 공사에 착공해 2017년 말에 완공되었다. 이 길이 완공된 후 최초로 2017년 12월 24일에 양산숲길보전회 회원 52명이 단체 답사를 하고 숲길을 홍보한 바 있다. 양산시에서는 산림과 주관으로 2018년 1월 13일 배내천 트레킹길 걷기대회를 개최하였다. 고점교에서 풍호마을까지 1.09km를 걷는 구간에는 태풍 덕분에 밀양댐에 물이 가득 차서 이곳 고점교 위 구간 단장천에도 물이 풍부하다. 산 그림자가 단장천에 반영되어 풍광이 기가 막히게 뛰어나다. 목제 데크를 단장천 옆으로 나란히 설치하여 물 위를 걸어가는 느낌이 난다. 아무 곳에서 사진을 찍어도 멋진 기념사진이 나온다. 단장천에 1년 중 이렇게 물이 많은 기간도 길지 않으므로 답사를 서둘러야 한다. 풍호마을에 도착 후 다리를 건너가 왼쪽으로 내려가면 풍호대가 나온다. 비석이 두 개 나란히 서 있다. 조선시대 천은(川隱) 박기섭(朴基燮)이 여가 중에 대(臺)를 쌓았고, 선현들을 추모하여 풍호대(風呼臺)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행양산군수(行梁山郡守) 동래진관(東萊鎭管)을 지낸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이능화(李能華)의 「풍호대서(風乎臺序)」가 전한다. 풍호대 비석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으므로 스토리텔링 안내판도 필요하다. 아래 단장천을 내려다 보면 경치가 아주 좋다. 풍호대 절벽에 소나무가 세 그루 있는데, 오른쪽에 있는 소나무에서 풍호대를 내려다보면 돌다리가 보인다. 이 멋진 돌다리는 자연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밀양댐에 물이 최고로 가득 차면 이 돌다리도 물에 잠긴다고 하는데 요즘은 물이 거의 흐르지 않아 쉽게 볼 수 있다. 풍호대 돌다리에는 슬픈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뻥 뚫려 있는 돌다리 밑의 구멍을 막으면 마을에 벙어리가 태어나고, 막지 않고 그대로 두면 마을 여인들이 바람이 난다는 전설이 있어 고민하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자연이 만든 멋진 돌다리를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보호해온 마을 주민들의 노력과 지혜가 돋보인다. 풍호대에 이런 사유를 적은 스토리텔링 안내판을 세운다면 많은 관광객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다. 풍호대 구경을 마친 후에 되돌아서 풍호대 다리를 지나 69호선 국지도를 조금 올라가면 대리약수터가 나온다. 대리약수터는 물맛이 아주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약수를 받아가고 있다. 69호선 국가지원 지방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차공간도 충분해 접근성이 좋다. 풍호대에서 조금 올라가면 나온다. 양산시 상하수도사업소 수도과에서 실시한 2019년 2/4분기(6월 19일 채수) 수질검사 성적서가 게시되어 있는데, 모든 면에서 양호하니 안심하고 마셔도 된다. 일반 세균 제로, 총대장균군 불검출, 대장균 불검출, 암모니아성 질소 불검출, 질산성 질소 기준치 10mg/리터 이하(검출 1.6mg/리터), 과망간산칼륨소비링 기준치 10mg/리터 이하(검출 1.6mg/리터)로 모든 수치가 기준치 이하로 매우 양호하다. 약수터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연신 들러 약수를 받아간다. 물바가지도 여러 개 비치되어 있고, 크고 작은 다양한 물통에 물을 받아갈 수 있도록 깔때기도 준비하여 놓았다. 약수는 두 군데에서 나오는데, 위쪽이 수량이 더 많았다. 샘터 바닥에는 자잘한 잔돌을 깔아놓아 흙탕물이 일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바가지로 물을 떠서 먹어보니 시원하였다. 마치 냉장고에서 금방 꺼낸 물처럼 시원하였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곳의 약수를 마셔보았지만 대리약수가 제일 시원하였다. 대리약수터에는 마을의 할머니들이 손수 재배하고, 채취하여 만든 호박, 깻잎, 엑기스(매실, 복분자, 쇠비름), 된장, 꿀, 마늘, 사과, 양파, 머위 등의 농산물을 배내골을 방문한 관광객을 대상으로 판매한다. 맨 위쪽에 자리 잡은 할머니에게 장사가 잘 되냐고 물어보니 잘 안 된다고 하였다. 나라 전체의 불경기가 배내골 약수터 노점상 할머니에게도 여파가 미치고 있다. 물맛이 빼어난 대리약수를 마시고 할머니들이 판매하는 농산물을 구매한 다음 발길을 되돌려 풍호교로 내려와 배내천 트레킹길을 걸어서 고점교로 원점 회귀하면 된다. 필자가 추천하는 이 코스는 건강에 무리가 안 가고 초보자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다. 69호선 국지도 일부 짧은 구간을 걸어갈 때 차량을 조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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