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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 / 상북…

대석마을에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왕릉이 하나 있다. 천성산에서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계단 논 가운데 위치한 길이 50m, 높이 15m의 이 능은 석씨왕릉(昔氏王陵)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석탈해 왕 후손인 석씨왕(昔氏王)들 중 가장 마지막인 왕인 16대 흘해왕(訖解王)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김씨 왕 시대를 여는 첫 번째 왕인 내물왕과 펼쳤던 치열한 왕위쟁탈전에 패한 흘해왕은 양산으로 쫓겨나 죽었다고 한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 / 상북면 대석마을에 있는 신라 흘해왕릉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신라 석탈해왕의 후손인 흘해 이사금 대석마을에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왕릉이 하나 있다. 천성산에서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계단 논 가운데 위치한 길이 50m, 높이 15m의 이 능은 석씨왕릉(昔氏王陵)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석탈해 왕 후손인 석씨왕(昔氏王)들 중 가장 마지막인 왕인 16대 흘해왕(訖解王)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김씨 왕 시대를 여는 첫 번째 왕인 내물왕과 펼쳤던 치열한 왕위쟁탈전에 패한 흘해왕은 양산으로 쫓겨나 죽었다고 한다. 석씨 왕의 시조인 석탈해 이사금(昔脫解 尼師今)의 성은 석씨(昔氏)이며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 용성국(龍城國)의 함달파왕(含達婆王), 또는 완하국(琓夏國)의 함달왕(含達王) 등이라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어머니는 여국왕(女國王)의 딸 또는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이라고 한다. 왕비는 남해왕(南解王: 南解次次雄)의 딸 아효(阿孝, 阿尼, 또는 남해차차웅의 누이동생 아로-阿老)부인이다. 이처럼 탈해의 출신지와 이동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대체로 북아시아의 기마민족 계통으로 보는 북방설, 해양세력으로 중국이나 일본 열도를 거쳐 왔다고 보는 남방설, 낙랑계(樂浪系) 유이민으로 보는 낙랑설(樂浪說)이 있고, 이밖에 목지국설(目支國說), 고조선설(古朝鮮說), 사로국(斯盧國) 본토설 등이 있다. 양산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부왕(父王)인 다파나국의 왕이 비(妃)를 맞아 임신 7년 만에 큰 알〔卵〕을 낳자, 왕은 좋지 못한 일이라 하여 버리게 하였다. 이에 보물과 함께 비단에 싸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궤짝에 실린 탈해는 금관가야(金官加耶)를 거쳐 계림(鷄林) 동쪽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이때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에 의해 발견되어 길러졌다. 석탈해는 어촌에서 고기를 잡아 생업을 유지하며 양모(養母 : 거두어 준 노파)를 공양하였다. 양모인 노파는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공부를 시켜서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瓠公)의 집터가 명당임을 알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은 본래 대장장이[(冶匠)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였다. 파보니 숫돌,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해 그 집을 차지하였다. 석탈해는 철이 풍부한 양산출신의 제철기술자라는 설도 있다. 옛적 내 집이라 해서 남의 집을 빼앗았으므로 성을 석씨(昔氏)라 하였다. 또는 까치로 인하여 궤를 열게 되었으므로 '작(鵲)' 字에서 '조(鳥)' 字를 떼고 석씨(昔氏)라 하였다고도 하고, 또 궤를 풀고 탈출해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한다. “탈해이사금(토해-吐解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 때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이며 왕비는 아효부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서문). “3년, 봄 3월, 왕이 토함산에 올라가니 우산 모양의 검은 구름이 왕의 머리 위에 피어 났다가 한참 후에 흩어졌다.” (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3년조). “어느 날 토해(吐解=탈해)는 동악(東岳=토함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떠 오게 했다. 백의(白衣)는 물을 떠 가지고 오다가 중로에서 먼저 마시고는 탈해에게 드리려 했다. 그러나 물그릇 한쪽이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백의는 맹세하였다. ‘이 뒤로는 가까운 곳이거나 먼 곳이거나 감히 먼저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물그릇이 입에서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는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기이편 탈해왕조). 이는 지역의 유력한 세력인 백의를 제압하여 복종시키는 일화가 신비한 전설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2. 신라 왕호의 변천과 이사금 유래 신라의 왕호는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麻立干)→왕(王)으로 변천되었다. 왕호의 변천은 신라 사회의 성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거서간'은 불구내, 즉 태양의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신령한 제사장, 군장, 대인이라는 뜻이다. '차차웅'은 무(巫)라는 뜻을 내포한 것으로 군장의 칭호에 무당이 사용되었다. '이사금'은 연장자, 사왕(嗣王), 계왕(繼王)의 뜻을 지닌 것으로 군장의 자리를 이은 대왕이란 칭호로 나중의 임금과 연관되는 명칭이다. '마립간'은 우두머리를 뜻하는 대수장(大首長)이란 정치적 의미를 가지는 호칭이다. 후세의 군장을 의미하는 상감(上監)과 같은 뜻이라고 본 견해가 있다. 왕권의 성장을 잘 나타내 주는 것으로 신라인의 계급 제도가 정치에 반영되기 시작한 때에 불렀던 명칭이다. 신라의 제2대 임금인 남해차차웅은 박혁거세거서간(朴赫居世居西干)의 맏아들로, 시조의 무덤을 짓고 석탈해를 사위로 맞아 정치, 행정상의 일을 맡겼다. 석탈해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신하로 삼아 곁에 두었다. 석탈해가 온갖 어려운 일들을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자 맏딸과 결혼을 시켰으며, 또 대보(大輔)의 벼슬을 주어 나라의 일을 맡겼다. 남해왕이 왕위에 오른 지 21년이 되던 가을에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을 남겨 석탈해에게 왕위를 물려주라고 했다. 남해왕의 아들 유리와 신하들이 왕의 유언대로 석탈해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석탈해는 이를 반대하였다. 유리 왕자가 계속 사양하자, 석탈해는 예로부터 덕이 높은 사람은 치아가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며 떡을 깨물어 둘 중 치아의 수가 더 많은 사람이 왕위에 오르도록 제안했다. 떡을 깨물어 치아의 수를 세어 보니 유리 왕자의 것이 한 개 더 많았다. 하지만 사실 석탈해는 그전부터 유리 왕자의 치아 수가 자신보다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임금의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이런 꾀를 쓴 것이었다. 석탈해의 꾀로 유리 왕자가 신라의 세번째 왕이 되었다. 그가 바로 유리 이사금이다. ‘이사금’이라는 말은 잇자국이 많은 사람을 뜻하는데, 임금을 뜻하는 ‘이사금’이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석탈해는 유리 이사금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신라에서는 견직물과 마직물의 제직이 발달하였다. 시조 박혁거세거서간 17년(기원전 41)에 왕과 왕비가 6부를 순행하며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장려하였으며, 파사 이사금 3년(기원후 82)에도 농사와 양잠을 장려한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포가 농민들의 가내수공업으로 직조되어 상품으로 활발하게 유통되었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견직물은 국외로 수출되기도 하였다. 흘해 이사금 20년(329)에는 견 1,460필을 일본에 수출하였고, 진덕왕 4년(650)에는 왕이 신라금(新羅錦)에 오언시 태평송(太平頌)을 써서 당나라에 선물로 주었으며, 진덕왕 5년(651)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금총포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3. 도굴된 흘해왕릉과 하마비인 돌탑 석탈해 이사금의 왕릉은 경주에 있으나 후손인 벌휴 이사금, 내해 이사금, 조분 이사금, 첨해 이사금, 유례 이사금, 기림 이사금, 흘해 이사금의 능이 경주에서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석씨 계열 왕인 흘해 이사금의 왕릉이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에 있다는 것은 권력 투쟁에서 패한 결과로 보인다. 양산읍내에 있는 북부동 신기동 고분들이 석씨왕릉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울산의 향토사학자인 이양훈 씨는 일제시대인 1930년대에 발굴된 부부총과 1990년대에 발굴된 금조총이 석씨왕릉임을 배제하지 못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미 작고한 정두영 옹의 증언에 의하면 왕릉은 도굴되었고, 옛날 도굴될 당시에 왕릉에서 된장이 나왔다고 하였다. 상북면 대석리의 흘해왕릉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약 100년 전인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발견된 흘해왕릉은 안내판 조차 없으며 당국의 무관심으로 인해 방치되어 민간인 소유로 넘어가 김해 김씨 무덤이 4기가 들어섰다. 신라사에서 사라진 석씨 왕 중의 하나인 흘해 이사금 왕릉으로 알려진 이 숲은 개발 열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공단이 들어온다고 하면서 측량까지 하였다고 한다. 공단 개발은 무조건 막아야 하며 문화재 구역으로 지정을 해야만 한다. 이곳은 계단식 다랭이 논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야트막한 언덕으로 거의 평지처럼 보이지만 왕릉이 존재할만한 곳이다. 바로 옆은 천성산이 있고, 앞을 내다보면 영축산이 눈에 들어오는 명당이다. 답사하면서 마을 주민인 김수영(77세) 씨를 만나 상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원래 왕릉의 비석이 있었는데, 농민이 논의 물꼬를 막기 위해 비석을 옮겨 사용했는데, 현재는 사라져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아마 논 어딘가에 묻혀있을 거라고 하였다. 석탈해 왕의 후손들이 대석리 흘해왕릉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사라진 유적을 찾고 비석을 발견하기 위해 둘러봤지만 실패했다고 알려주었다. 왕릉을 조사하기 위한 연구원이나 교수들도 수차례 방문하였다고 들려주었다. 김수영 씨는 구소석 마을에 돌탑이 있다고 하였는데, 일종의 하마비라고 하였다. 흘해왕릉을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은 돌탑이 있는 곳에서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와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김수영 씨는 마을의 젊은이들은 돌탑의 내력을 모르니 우리 같은 나이 든 사람이 죽으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였다. 구소석 마을의 돌탑에 가보니 주택의 담장에 바짝 붙어 있었고, 돌탑 주변에 차 두 대가 주차되어 있어 사진찍기가 힘들었다. 집안에 여러 사람이 있어 한 아주머니에게 이 돌탑의 유래를 아느냐고 물어보니 모른다고 하였다. 양산시청 문화관광과에서는 안내판을 서둘러 설치해야 하겠다. 전에 인성산업 근처에 있는 조선시대 아기 기생 무덤에 안내판을 세우자고 하니 비지정 문화재는 소관이 아니라고 양산시 담당 과장이 변명하였다. 다른 도시에 알아보니 지정 문화재든 비지정 문화재든 시에서 적극 관리한다는 말을 해주었다. 왕릉의 모습을 사진 찍다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주민을 붙들고 왕릉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정말 운이 좋아서 잘 아는 분을 또 만나게 되었다. 모래불에 사는 정태규 씨(73세)는 한 20여 년 전에 왕릉이 경매로 나와서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살려고 한 적이 있다고 얘기했다. 정태규 씨는 대석마을 입구에서 태어나 왕릉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왕릉은 터가 세서 사람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건축허가도 받기 힘들다는 판단이 들어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왕릉이 있는 곳에 가려면 다른 사람의 논을 사서 길을 내야 하기 때문에 포기하였다고 한다. 풍문에 의하면 왕릉 위에 묘를 쓴 집안이 우환이 심하고 운세가 잘 풀리지 않아 고생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흘해왕릉으로 전해지는 곳의 절대농지를 없애고 공단을 개발하는 것은 결단코 막아야만 한다. 또한 구소석 마을의 돌탑은 흘해왕의 하마비로 전해지는 문화유산이므로 양산시 문화관광과에서 안내판을 설치하여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내력을 알리고 적극 보호해야만 하겠다.

통도사와 부속암자의 추사 김정희 …

통도사에서 눈여겨볼 것은 전각, 불이문에 붙여 놓은 현판 글씨다. 천년 고찰 통도사의 현판에는 추사 김정희, 흥선대원군, 석재 서병오의 글씨가 여러 개 붙어 있다. 진본은 대부분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전각에 걸려 있는 것은 모각된 것이지만 글씨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통도사와 부속암자의 추사 김정희 글씨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통도사의 추사 글씨 통도사에서 눈여겨볼 것은 전각, 불이문에 붙여 놓은 현판 글씨다. 천년 고찰 통도사의 현판에는 추사 김정희, 흥선대원군, 석재 서병오의 글씨가 여러 개 붙어 있다. 진본은 대부분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전각에 걸려 있는 것은 모각된 것이지만 글씨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먼저 추사의 글씨는 주지실 현판에 쓰인 ‘노곡소축(老谷小築)’과 ‘탑광실(塔光室)’, 노전실의 일로향각(一爐香閣)이 바로 추사의 솜씨다. ‘산호벽수(珊瑚碧樹)’도 추사의 작품인데, 뜻은 ‘바다산호와 푸른 숲처럼 크게 번성한다”는 의미다. 상로전의 가장 서쪽은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는 선원구역이다. 이곳에는 주지 스님의 처소인 탑광실, 그 옆에 보광전과 부속건물 그리고 그 뒤에 방장스님의 거처인 정변전이 자리하고 있다. 탑광실은 조선 영조 33년(1757년)에 범음대사(梵音大師)가 초창했다고 전하며, 1968년 청하(淸霞)스님이 중건하였다. 건물은 정면 8간, 측면 3간으로 주심포 양식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대웅전 맞은 편에 있으면서 불전에 공양을 짓던 부엌과 향나무를 쌓아두던 향적전(香積殿)이 있었다. 설법전 불사할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는데, 지금은 주지 스님의 집무실과 거처로 사용되고 있다. ‘노곡소축(老谷小築)’은 추사 행서의 멋과 힘이 느껴지는 과천 시절의 작품이다. 노곡(老谷)은 추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스님의 당호 같은데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한다. 소축(小築)은 소실(小室)과 같은 뜻이다. 이보다 더 눈길을 잡는 것이 ‘일로향각(一爐香閣)’ 현판이다. 노전실에 걸려있는 일로향각(一爐香閣)은 ‘한 마음을 화로에 넣고 담금질해 향기를 만든다’는 뜻이다. 글의 뜻도 뜻이지만, 예서체로 쓰인 이 글씨에서는 독특한 운치가 느껴진다. 은해사, 서울 봉은사, 경주 옥룡암, 부산 범어사 등 전국 각지에 이 글씨로 현판을 단 절집이 많다. 경매에 자주 나오는 편액 중 하나다. 일로향각 편액은 통도사 상로전에 위치한 노전인 일로향각에 걸려 있던 편액으로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1840~1848년), 북청(1850~1852년)에서의 유배생활을 마친 말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로향각 현판이 걸려 있던 전각은 철거하고 현재는 노전실에 붙어 있다. 이곳은 스님들의 수행 공간으로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다. 2. 극락암의 추사 글씨 현판 통도사 부속암자인 극락암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무량수각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극락암 현판 바로 밑에 걸려 있다. 무량수(無量壽)란, 인도말 아미타-유스(Amitāyus)의 번역어다. 아미타란 ‘한량(限量)이 없다’는 의미이며, 유스는 ‘수명’이라는 뜻이다. 즉 수명에 한량이 없는 죽지 않는 존재가 아미타불인 것이다. 이를 한자로 무량수라고 한다. 추사 글씨는 구불구불하여 글씨라기보다는 그림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无) 자를 천(天) 자로 오해해서 천량수각으로 읽기도 한다. 추사 글을 자세히 보면 무자, 각자는 머리가 크고 가운데 양자, 수자 두 자는 돌탑을 쌓은 것처럼 뾰족하다. 즉 의도적으로 음양을 맞추고 있어 예술적이다. 무(無)와 무(无)는 비슷하게 사용되지만, 원래는 사용하는 용례가 약간 다르다. 있다 없다 할 때의 없다는 무(無)고 태초부터 존재한 적이 없던 것은 무(无)다. 예를 들면 ‘먹을 것이 없다’는 무(無)고, ‘나에게 세 번째 팔은 없다’는 무(无)다. 아미타불에게 죽음은 어떻게도 존재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무(無)가 아닌 무(无) 자를 썼다. 즉 무(无)를 사용한 게 아미타불의 의미에 적합하며, 존숭(尊崇)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호쾌대활(好快大活)’은 극락암 삼소굴 옆의 원광제(圓光齊) 건물에 걸려 있다. 호쾌대활은 호쾌하게 웃어 크게 살아난다는 의미다. 일소일소 일로일로(一笑一少 一怒一老)라는 말이 있다.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지고, 한번 화내면 한번 늙는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권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통도사 부속암자인 사명암의 ‘대몽각(大夢覺)’과 ‘일화오엽루(一花五葉樓)’가 추사의 글씨다. 통도사의 추사 작품은 완숙미가 돋보이는 말년의 작품들이다. 다른 사찰의 추사 작품 대부분이 제주도 유배 전후에 쓰인 것과는 차이가 난다. 3. 각고의 노력으로 독특한 추사체 완성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년)는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으며 본관은 경주다. 조선시대 외척 세도 정치기에 활동한 조선 예원의 마지막 불꽃 같은 존재이다.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노(果老), 농장인(農丈人),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200여 개를 사용했다. 조선이 고유 문화를 꽃피운 진경시대의 세계화에 성공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진경시대의 학문 조류인 북학 사상을 본궤도에 진입시킴으로써 조선 사회의 변화 논리에 힘을 실어준 장본인이다.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의 가문은 명문 집안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추사는 영조가 지극히 사랑한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자이다. 1809년 10월 24세 때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연경에 갈 때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동참하였다. 이듬해 3월에 귀국하기까지 수 개월간 연경의 양대 경사(兩大經師)인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완원으로부터는 청나라의 고증학이 이룩해 놓은 경학(經學)의 성과를 접함으로써 서론(書論)에 심취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옹방강을 만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의 연경(硏經)자세에 공감하면서 금석고증의 방법을 전수받았고 그의 서화감식과 서학이론에 매료되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예조 참의, 설서,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추사는 귀양 가던 길에 대흥사에 들러 막역지우인 초의선사를 만났다. 추사는 대웅전에 이광사의 글씨가 걸린 것을 보고는 조선의 글씨를 망쳐놓은 원교의 글씨 따위를 걸어놓았냐며 초의선사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초의는 어쩔 수 없이 원교의 글씨를 내리고 추사의 글씨를 걸었다. 그러나 제주에서의 귀양살이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경험이었다. 이전의 영광은 저물었고 찾는 이 한 명도 없이 외롭고 쓸쓸한 나날을 견뎌야 했다. 유배 중에 아내의 상까지 당했다. 추사는 복잡한 감정들을 달래기 위해 끊임없이 글씨를 썼다. 추사체는 유배생활로 인해 완성되었다. 1848년 귀양에서 풀려나 한양으로 가던 길에 추사는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나 귀양가던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다며 내 글씨를 떼고 원교의 글씨를 다시 걸라고 말했다 한다. 그래서 지금의 대웅전에는 원교의 글씨가 걸려 있고, 옆 백설당에는 추사의 글씨가 걸려 있다.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북청에서 해배된 후 과천에 칩거할 당시에는 문예상으로 왕사정(王士禎)의 신운설(神韻說)을 따르고 불교에 의탁하여 불교적 색채가 농후해진 시기다. 1855년경에 그린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동기창의 화론에 기초하면서도 자신의 문예관과 생활 속에서 비롯되어 나타난 작품으로, 시, 서, 화, 선(禪)이 일치된 작품이다. 글씨를 잘 쓰기로 명망이 높아 우리나라 서예사를 통틀어 가장 추앙받는 서예가 중 한 사람이다. 추사 글씨의 흐름을 크게 대별하면 연경행 이후 50대 중반까지 구양순을 바탕으로 한 옹방강풍이 주류를 이룬 것이 그 하나이고, 유배 이후 10여 년간 변화를 거듭하면서 예서와 해서, 행서에서 완전한 자가풍을 창출해 낸 이른바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추사는 고증학의 성과를 수용하여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를 부흥시킨 가장 큰 공헌자다. 금석학에도 뛰어나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판독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며, 대표작인 ‘세한도(歲寒圖’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로 대표되는 불세출의 화가이기도 하다. 추사의 세한도는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아 국보 180호로 지정되었다. 제주도 유배 생활 중 원하는 서적을 구하기 힘들었던 추사 선생을 위해 제자 이상적은 중국 사신으로 나갈 때마다 최신 서적을 구해 제주도로 보냈다. 유배 전과 후, 변함없는 이상적에게 감동한 추사 선생이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림뿐이었다. 겨울이 돼서도 변함없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이상적에 비유하여 그렸다. 통도사의 추사 글씨는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인 주지실, 노전실 앞, 성보박물관에 있어 쉽게 접할 수 없다. 그러나 부속암자인 극락암에 가면 ‘극락암’(極樂庵) 현판 밑에 달린 ‘무량수각(无量壽閣)’이라는 추사의 글씨를 볼 수 있고, 옆에 있는 원광제(圓光齊)의 여러 현판 중에서 추사의 글씨인 호쾌대활(好快大活)을 볼 수 있다.

황진이 레깅스를 입다. [기고] …

레깅스 전성시대다. 한 때의 유행으로 지나칠 것 같았던 레깅스는 어느새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원마일룩(집 근처 간편히 외출할 수 있는 홈웨어룩)'으로 각광받던 레깅스가 등산, 낚시, 요가, 데일리룩 등으로 활동 영역을 점차 넓혀가고 있다.

황진이 레깅스를 입다. [기고] 박만영 콜핑 회장

황진이가 2020년에 있었더라면 당당하게 레깅스를 입었으리랏다.  레깅스 전성시대다. 한 때의 유행으로 지나칠 것 같았던 레깅스는 어느새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원마일룩(집 근처 간편히 외출할 수 있는 홈웨어룩)'으로 각광받던 레깅스가 등산, 낚시, 요가, 데일리룩 등으로 활동 영역을 점차 넓혀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 트렌드를 반영해 아웃도어 브랜드 콜핑에서도 레깅스를 출시했다. 최근 레깅스는 논란의 중심이다. 내가 뭘 입든 개인의 자유라는 주장과 보고 있으니 민망하다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런데 이 논란 어디서 많이 본 듯도 하다. 무릎 위 몇 센티까지 치마 길이를 재던 '그때 그 시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1960년대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는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패션의 역사를 새롭게 휘갈기는 큰 사건이었지만 지금은 윤복희의 앨범 자켓에 찍힌 그 정도 미니스커트가 진짜 미니인가 싶을 정도로 단정하게만 보인다. 지금은 레깅스가 우리 삶에서 뿌리 내리기 까지 과도기인 셈이다. 미니스커트가 그랬던 것처럼 레깅스를 입고 출근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날이 올 것이다. 레깅스의 주체는 여성이다. 보수적인 사회 속에서는 레깅스를 입는 여자들에게 발칙함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그 여자들이라 함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이다. 자본주의와 보수적인 사회가 창조해낸 마돈나에게 냉소적인 비웃음을 짓는 자들이다. 시대의 트렌드다. '미움받지 않을 용기'와 자존감 수업과 같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도 나를 위한 삶을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나. 심지어 90년대 생들은 자신들을 빛내줄 무대가 없는 회사면 쉽게 이직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시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자들의 자화상이다. 꼭 황진이를 닮았다. 미천한 출신이라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성리학 시대에 터부시되던 사랑을 절절하게 노래한 결과 박연 폭포, 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에 이름을 올렸다. 사람이 죽어서 남길 수 있는 것이 이름이라면 제일 명예로운 일이라고 하는데 이런 전제라면 황진이는 조선 여성 중에서도 제일 성공한 것이 아닌가. 관료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시조파트에서는 조선시대의 최고의 학자들과 견주어 소개되고 있으니 말이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一到滄海) 허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명월이 만공산 허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의 남아있는 시조 중 가장 황진이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시조이다. 표면적으로는 흐르는 시냇물이 바다에 닿으면 다시 못 오니 쉬어가라는 것이지만,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벽계수라는 사람을 유혹하는 중의적인 뜻에 있다. 이 시조를 듣고 나귀에서 떨어진 벽계수의 모습이 황진이 드라마의 명장면 중 하나로 손꼽혔다. 자신의 유혹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할 벽계수의 행동을 예측하여 시조를 부르는 장면에서 보여진 황진이의 모습은 참 당당한 조선의 여성이었다.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당당하게 소개하는 황진이의 모습은 MZ세대와 닮아있다. MZ세대는 집단보다는 개인의 행보를 중시하며 단순히 물건을 구매하는데 그치지 않고 특별한 메시지를 담은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표출하는 '미닝아웃'을 소비한다. 현 세대에게 사랑 받고 있는 레깅스는 단순 제품이 아닌 셈이다. 레깅스는 집단보다는 나의 행복이 우선이며 나의 가치를 드러내는 표현 수단인 것이다. 황진이가 만약 지금 있다면 레깅스를 기꺼이 향유했을 것이다. 국내 유명 대기업의 여성들이 임원이 되는 시대이다. 보수적이기 그지없던 관료사회에서도 여성들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여성들이여, 당당하게 레깅스를 입자. 자기 자신을 그대로 사랑하고 드러낼 수 있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레깅스는 그런 것이다.

원동면 화제리 토교 석비의 내력 …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토교마을 황산베랑길에 조선시대 석비가 있다. 화제석교비는 조선시대 영남대로 중 황산도인 양산 화제천에 있던 다리다. 원래 토교(土橋)였던 다리를 석교(石橋)로 고쳐 세우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비석이다.

원동면 화제리 토교 석비의 내력 / 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양산화제석교비(梁山花濟石橋碑)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토교마을 황산베랑길에 조선시대 석비가 있다. 화제석교비는 조선시대 영남대로 중 황산도인 양산 화제천에 있던 다리다. 원래 토교(土橋)였던 다리를 석교(石橋)로 고쳐 세우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비석이다. 비석의 내용에는 화제천을 건너기 위한 토교가 잦은 수해로 계속 무너지자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큰 돌을 모아 홍예석교(虹蜺石橋 : 무지개다리)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비석에는 다리의 이름, 위치, 세우게 된 내력, 당시 감독한 관리의 이름, 이 다리가 영남대로의 중요한 통로였음을 알려주는 내용이 적혀 있어 조선시대 교통로 연구에 중요한 사료다. 조선시대 제4로(동래로)상의 관로(官路)를 잇는 다리임을 밝히고 있다. 다리는 군의 서쪽 화제에 있는데 이는 관로의 중요한 자리다. 흙과 나무를 모아 완성했으나 큰 비를 만나면 붕괴되어 비록 바쁜 농사철이라도 갑작스레 보수해야 하니 백성들이 매우 번거롭게 생각했다. 새로 온 누군가가 그것을 고치고자 하니 백성들이 마음으로 기뻐해 몇 년을 두루 정사를 베풀었다. 지주 박공에게 시켜서 두 사람의 감동(監董)을 맡기고 돌을 잘라서 깎았다. 마침 방백인 이공께서 순행하다 보고 곡물을 내어 도왔다. 공사가 끝나고 보고하니 그 완전하고 치밀함이 나중에 번거로운 일이 없게 되었다. 길손들이 축하하며 말하기를 '양산 서쪽 백성들은 노역의 고통이 없게 됐으니 이 아름다운 일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 했다. 이때 공역에 참석한 여덟 동네는 이천, 내포, 범서, 화제, 증산, 범어, 별양, 어곡리 등이고, 세운 때는 영조 15년(건륭乾隆 4. 1739년) 기미 삼월이다. 화제석교비는 경부선 철도 아래쪽에 유실돼 있던 것을 한국수자원공사(K Water) 낙동강권역본부 울산지사의 원동취수장 건물을 지을 때 발견해 다리 곁에 두었다가 이곳에 도로가 나면서 토교마을 안으로 옮겼다고 한다. 토교마을에 거주하는 이시일 시인과 함께 화제석교비의 발견 당시부터 현재까지의 이력을 알아보기 위해 답사에 나섰다. 이시일 시인은 마을 안쪽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 한 지점에 정차하면서 화제석교비가 임시로 서 있던 위치를 알려주었다. 식수로 사용하기 위한 지하수 관정이 있던 자리라고 설명하였다. 나중에 박말태 전 시의원이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울산취수장이 잘 보이는 언덕에서 이시일 시인은 현재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는 근처에 화제석교비가 서 있었다고 내력을 언급하며, 화제석교는 원동취수장의 하얀 건물 앞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시인은 경부선 철교 밑으로 흐르는 화제천 옆에 와서 낙동강 정비사업으로 인하여 물길이 바뀐 사유를 들려주었다. 낙동강 정비사업 때 화제천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물길은 현재보다 왼쪽으로 흘러서 원동취수장 부근에 있는 큰 미루나무 쪽으로 나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물길을 새로 내면서 퍼올린 흙은 울산취수장 쪽으로 메웠다고 알려주었다. 화제석교비 상부는 옆으로 깨지 것을 붙여놓았다. 비석의 아래 부분에는 약간 깨진 흔적이 있었는데, 이시일 시인은 6.25 전쟁 때의 총탄 흔적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2019년 박정애 전 양산신문 이사와 함께 온 부산지역 낙동강 칠백리 답사단을 맞이하여 화제석교비에서 해설을 하였다. 황산베랑길을 따라 걸으며 부산취수장까지 동행하면서 중요 지점에서 해설을 하였다. 2. 우리나라와 외국의 도로 사정 비교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 한반도의 역대 왕조들은 도로정책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치도병가지대기(治道兵家之大忌: 길을 고쳐 닦는 일은 병가가 크게 꺼리거나 싫어함) 라는 조선시대 숙종의 말이 그 단적인 사례다. 군사적 측면에서 도로의 역기능이 강조됨으로써 도로 건설은 곧 외적의 침략을 부른다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런 도로들은 적군, 특히 주적이었던 북방 기마민족들의 주 기동 경로가 되어버리고 평지 특성상 방어에도 매우 취약해진다. 고구려같이 넓은 벌판을 끼고 있다면 평시에도 도로를 통한 마차의 이용이 많았으나 신라나 백제는 전쟁시가 아닌 평상시에는 도로와 마차의 사용이 매우 적었다. 침략전쟁을 주로 수행하는 나라에서는 도로를 잘 닦아 놓을 필요가 있었지만 작은 예방전쟁 이상의 국가간 전쟁은 직접 일으키려 하지 않았던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도로 개설의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물금에서 신라시대 도로가 발굴된 바 있다. 충북 옥천에서 신라시대 도로가 얼마 전 발굴되었다. 신경준(申景濬)이 1770년(영조 46)에 전국 각 지역의 육로 및 수로 교통, 중국과 일본과의 교통로를 기록한 책으로 도로고(道路考)가 있다. 서문에서 “조선조의 도리(道里)는 주척(周尺)에 의거하여 설정되었으나, 지역에 따라 이수(里數)가 일정하지 않고, 도로 표지나 시설의 배치가 불규칙하여 여행자에게 주는 불편은 물론, 국정에 미치는 피해도 크다.”고 찬술의 동기를 밝히고 있다. 이 책은 18세기 중엽 조선의 실학적 지리학을 대표하는 저작으로서, 이전의 전통적인 지리지의 방식이나 역사 지리학 등에서 벗어난 최초의 경제 지리적인 전문 저술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또한, 이것은 조선 후기에 활발하게 전개된 도로와 시장에 대한 이용과 유통량의 증대를 중시하고, 그에 대한 정확한 실정을 파악함으로써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조선 후기의 지역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홍대용, 박제가, 박지원, 홍양호 등과 같은 북학파들은 낙후된 조선의 경제를 개혁, 개발하기 위해서는 수레를 상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로개설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영조와 정조대에 이들이 평가받으며 이에 따라 한반도 전토에 도로 건설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국가 도로에 대한 총집편이 바로 도로고이다.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도로인 아피아가도는 로마와 이탈리아 남동쪽 지역에 위치해 있는 브린디시를 연결하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영어 속담은 이 아피아 가도에서 유래하였다. 아피아 가도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로마에 가면 한 번 걸어볼 만한 거리로,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아피아가도는 판석을 깔았고, 돌 양쪽에 배수로를 만들어 도로를 관리하였기에 오늘날까지 보전될 수 있었다. 로마의 감찰관이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Appius Claudius Caecus)가 기원전 312년경, 삼니움 전쟁 중에 군사 목적으로 도로를 만든 것이 그 기원으로, 아피아 가도라는 이름은 그의 이름으로부터 유래하였다. 가도 중에서 먼저 건설된 구간은 로마~카푸아 구간이고, 카푸아~브린디시 구간은 나중에 연장된 것이다. 로마는 다양한 도로를 만들었기에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중국에는 진시황 당시에 만든 고속도로인 진직도(秦直道)가 있어 놀라움을 안겨준다. 2,200여 년 전 진시황이 만든 군사도로인 진직도는 총길이가 700㎞를 넘고, 폭은 대체로 23~27m지만 가장 넓은 곳은 47m나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진직도의 북쪽 끝은 만리장성이 위치한 네이멍구 (內蒙古)자치구 바오터우 (包頭)시 주위안(九原)이고, 남쪽 끝은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咸陽) 부근의 산시성 춘화(淳化)현 베이간취안궁 (北甘泉宮)이다. 진직도는 진시황(BC 259~BC 210)의 지시에 따라 몽염의 지휘하에 30여만 명의 군인이 동원돼 2년 6개월 만에 완공하였다. 이 도로는 당시 군사용은 물론 무역, 문화 전파로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됐으며 한나라와 위(魏), 진(晋) 이후까지 주요 교통로로 쓰였다고 한다. 진시황이 건설한 '고속도로' 중 해발 1100~1300m 높이의 산시성 쯔우(子午)령에 있는 5.3㎞ 구간이 발굴되었다. 옛날 우리나라와 고대 로마, 중국 진나라의 도로정책은 매우 달랐음을 역사 기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소극적인 도로 정책을 시행한 대신에 수운을 통하여 물자를 운송하였으며 발전이 정체되었다. 현대에 들어와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의 아우토반을 시찰하고 벤치마킹하여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기간 고속도로망을 짧은 기간 내에 건설하여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고속도로 덕분에 자가용 보급도 진전되고 물류혁신을 이루었다. 전국토는 1일 생활권 내지 반나절 생활권이 되어 편리한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3. 흙다리인 토교와 섶다리 조선 태종 8년 광통교의 흙으로 만든 다리를 돌 다리로 개축하였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큰 비가 내려 물이 넘쳐서, 백성 가운데 빠져 죽은 자가 있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광통교(廣通橋)의 흙다리(土橋)가 비만 오면 곧 무너지니, 청컨대 정릉(貞陵) 구기(舊基)의 돌로 돌다리[石橋]를 만드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하천의 양쪽 기슭에 나무를 걸쳐놓고 그 위에 흙을 덮었으므로 토교라고 하였다. 섶다리는 1428년(세종 10) 경상북도 청송군 청송읍 덕리의 보광산에 위치한 청송심씨 시조묘에 사계절 전사일(奠祀日)에 용전천 강물이 불으면 유사(有司) 관원(官員)과 자손들이 건너지 못할까 걱정해 섶나무(잎나무와 풋나무 등)를 엮어 만들었다는 전설이 시초가 되었다. 한때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1996년 10월 당시 청송군수인 안의종(당시 62세)이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면서 우리 곁에 다시 다가왔다. 2009년 10월 15일에도 섶다리는 설치되었다. 길이 80m, 폭 120cm였다. 영월군 주천면 주천강에 해마다 섶다리를 놓는다. 농번기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다리를 놓는다. 기둥이 될 다리를 세우고 긴 나무를 건너지르고 그 위에 소나무 가지를 꺾어 깐다. 그 위에 흙을 깐다. 판운리에 섶다리가 설치된 유래는 1699년 조선 숙종 때부터였다. 왕은 강원관찰사에게 단종의 묘인 영월 장릉을 참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강원관찰사가 장릉으로 가는 도중 영월군 주천강에 도착하였는데, 다리가 없어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주천강 양쪽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강원관찰사 일행들이 주천강을 건널 수 있도록 주천강에 임시 다리를 놓았다. 이 교량이 바로 섶다리라고 한다. 하회마을 섶다리는 2019년 영국 엔드루 왕자가 걸은 이후 5월 한 달 동안 하회마을 관광객을 9만 5천 782명을 불러들였으며, 이는 전년 같은 기간보다 2만 5천여 명 증가하여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올해 5월 29일 새롭게 개통된 하회마을 섶다리는 하회마을 만송정 앞에서 옥연정사 방면으로 길이 114m, 폭 1.5m의 나무다리로 세워졌다. 하얀 메밀꽃, 섶다리로 유명한 평창효석문화제는 문화체육관광부 ‘2019 대한민국 우수축제’에 선정되었고, 2018년 41만 명, 2019년 35만 명이 방문하여 인구 5천 5백 명 남짓한 지역에 150억 원의 경제적 효과가 있었다. 화제토교석비가 있는 양산의 원동천, 황산공원 등에 섶다리를 만들어 외지관광객 유치에 활용했으면 좋겠다.

용화사의 황산 잔로비와 나모ᄃᆡ원…

양산 황산잔로비(梁山 黃山棧路碑)는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는 비석이다. 2015년 7월 3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93호로 지정되었다. 잔로(棧路)는 잔도(棧道)라고도 하는데 가파른 벼랑길에 나무를 걸쳐 낸 길을 말한다. 황산 비리, 황산 베리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대동여지도』에는 황산도(黃山道)로 표기되어 있다.

용화사의 황산 잔로비와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1. 황산 잔로비 양산 황산잔로비(梁山 黃山棧路碑)는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는 비석이다. 2015년 7월 3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93호로 지정되었다. 잔로(棧路)는 잔도(棧道)라고도 하는데 가파른 벼랑길에 나무를 걸쳐 낸 길을 말한다. 황산 비리, 황산 베리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대동여지도』에는 황산도(黃山道)로 표기되어 있다. 임경대에서 황산역에 이르는 비탈길을 일러 황산천(黃山遷; 황산베리) 또는 물금천(勿禁遷; 물고미잔로)이라고 한다. 밀양 검세리의 까치비리와 함께 낙동강 하류의 대표적인 비리길이다. 좁고 험하여 사고가 잦았는데, 이만도의 『양산군읍지』에 보면 "황산천은 군 서쪽 20리에 있으니 서울에서 동래까지 이르는 큰길이다. 험산을 깎아 아래로 낙동강을 굽어보면서 헤쳐나가는 험한 길이라 뾰족한 석각과 크고 험한 바위는 수레바퀴를 망가뜨리고, 말을 전패(顚沛 : 엎어지고 자빠지게 함)케 하는 우환이 일어나기가 십상이었다.“고 나와 있다. 잔로비는 황산천(黃山遷: 황산 벼리)을 따라 건설된 영남대로의 3대 잔도 중의 하나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증거가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황산 잔로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용화사 경내로 이전하였다. 황산잔로비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현재는 비신(碑身)만 남아 있다. 비신 전면과 후면에 작은 글씨로 비문이 음각(陰刻)되어 있는데, 육안으로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특히 제액인 ‘황산잔로비(黃山棧路碑)’ 다섯 글자 가운데 ‘잔(棧)’은 거의 확인 불가능하며 나머지는 어느 정도 판독이 가능한 상태다. 비문의 대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전면에는 강희(康熙) 33년(1694) 황산잔로를 정비한 후 그 일의 시말에 대해 기록했다. 군수 권성구가 탄해 스님과 별장 김효의를 시켜 깊은 곳은 메우고 험한 곳은 깎아 평탄한 길을 만든 공을 기린 것이다. 이 비석은 강희 34년 갑술년(서기 1694년)에 세워진 뒤 홍수 등으로 인해 무너진 것을 도광 23년(서기 1843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후면에는 황산잔로비가 어떤 연유로 인해 쓰러져 묻혀 있다가 1843년 주민들에 의해 다시 중수되어 세워진 일에 관해 밝혀놓았다. 따라서 전면과 후면의 내용은 각기 다른 것이며, 작성 시기도 150년 정도 시간 차이가 있다. 1739년에 양산군수 박규환(朴奎煥)이 밀양부사 임수적(任守迪)과 작원(鵲院) 황산(黃山) 등의 벼리길을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갑술 후 42년 병진년(1736)에 군수 임진하가 중 학능(學能)에게 명하여 재원을 마련하게 하고 4년 뒤 기미년(1739)에 군수 박규환이 밀양부사 임수적과 힘을 합해 작원 황산 두 잔도를 고쳤다'고 했다. 황산 잔로비는 원래 용화사 대웅전 왼쪽에 있었는데, 주지스님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황산 잔로비 안내문은 비문 옆에 있지 않고, 황산베랑길 자전거도로에 있다. 용화사에도 안내판을 설치해야 하겠다. 용화사에 들르지 않고 황산베랑길로만 가는 관광객에게는 현재의 안내판이 도움이 될 것이다. 자전거만 타고 쌩쌩 달리는 관광객에게는 주목을 받지 못한다. 2.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 비석 용화사의 황산잔로비 오른쪽에 더 큰 비석인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이라는 조선시대 고어체가 있어 국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南無大願本尊地藏菩薩)은 현대어로 고치면 ‘나무대원본존지장보살’이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황산잔로비에 집중하여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南無大願本尊地藏菩薩) 비석은 그냥 무관심하게 지나친다. 필자 역시 한자로 크게 보이는 南無大願本尊地藏菩薩은 다른 절에도 있는 평범한 비석으로 생각하고 한글로 적힌 글자는 못보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같이 간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그 비석을 살펴보더니 고어체로 적혀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시일 시인의 관찰력은 항상 감탄사를 불러일으킨다. 자세히 살펴보니 요즘 쓰지 않는 조선시대 고어체로 ‘아래 아’자를 사용하고 지장보살을 디장보살로 써 놓아서 깜짝 놀랐다.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을 다시 한 번 음미하며 비석의 옆면과 뒷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왼쪽 옆면은 글자가 마모되어 잘 분별이 되지 않았다. 오른쪽 옆면에서 확인 가능한 이름은 박춘동(朴春東), 박돌쇠(朴乭釗), 김씨 보현화(金氏 普賢花)였다. 김씨 보현화는 절에서 스님이 지어주는 법명이다. 박돌쇠라는 이름에 주목해보자. 돌쇠는 평범한 백성의 대표적인 이름으로 친근감이 있다. 지장보살은 모든 악업에서 해탈하게 하는 보살이며, 죽은 사람과 산 사람 모두를 이롭게 하는 보살이므로 박돌쇠라는 불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조상의 극락왕생을 빌거나 자기 가족의 공덕을 빌었을 것이다. “나무 유명교주 지장보살(南無 幽冥敎主 地藏菩薩), 나무 남방화주 지장보살(南無 南方化主 地藏菩薩), 나무 대원본존 지장보살(南無 大願本尊 地藏菩薩)”을 염송했을 것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유명교주이신 지장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남방화주이신 지장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대원본존이신 지장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뒷면은 비석을 축대에 바짝 붙여 세워 놓았기에 사진을 찍기가 매우 힘들었다. 뒷면에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용화사에 시주를 하고 비석을 세우는데 기여한 불자들의 이름으로 보였다. 김씨 보덕화(金氏 普德花)라는 이름이 있었다. 3. 지장보살과 지장경언해(地藏經諺解)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지옥에 몸소 들어가 죄지은 중생들을 교화, 구제하는 지옥세계의 부처님이다. 석가의 위촉을 받아, 그가 죽은 뒤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하기까지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도록 의뢰받은 보살이다. 관세음 보살과 함께 가장 많이 신앙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에게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성불(成佛)을 서두르지 않겠나이다. 그리하여 일체의 중생이 모두 제도되면 깨달음을 이루리라”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부처가 없는 시대 즉, 석가모니불은 이미 입멸하고 미래불인 미륵불은 아직 출현하지 않은 시대에 천상, 인간,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의 중생들을 교화하는 보살이다.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의 보살이다. 지장경언해(地藏經諺解)는 조선 세조 시기에 만들어진 불경 언해서로 지장보살본원경언해(地藏菩薩本願經諺解)라고도 부른다. 총 3권 1책으로 현재 중간본이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세조 시기에 고승 학조(學祖)가 왕의 명을 받아 간경도감(刊經圖監)에서 불교의 대표 경전 중 하나인 지장경(地藏經)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이후 책으로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였으며, 세조가 직접 지은 월인석보 권21에도 그 내용이 수록되었다. 하지만 세조 때 만들어진 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569년(선조 2년), 1752년(영조 28년), 1791년(정조 15년)에 중간된 것들이다. 이 중 정조 때 중간된 본은 따로 음역지장경(音譯地藏經)이라고 부른다. 비록 원본은 소실되었지만 중간본들을 통해 그 형식과 내용이 그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므로,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직후의 한국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하게 사용된다. 제작시기를 보면 1762년(영조 38)(간행), 1765년(간행), 1791년(정조 15)(간행), 1879년(고종 16)에 간행되었다. 간행 및 발행한 곳은 견성암(1762), 약사전(1765), 송광사(1791), 보정사(1879) 등이다. 1569년(선조 2) 하동 쌍계사에서 중간한 3권 1책의 판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한다. 그 밖에 1752년(영조 28)에 간행된 판(3권)은 순 한글로 되어 있고, 1791년(정조 15)에 간행된 판은 『음역지장경(音譯地藏經)』이라 하여 한글로 원문을 음독(音讀)한 것이다. 월인석보 제21(하) 지장경 ① 원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善利얻젼니내 이제 죠고맛 疑心 이리 이셔 世尊묻노니 願世尊이 慈悲샤날爲야펴니쇼셔 부톄 閻羅 天子려니샤네 무르라 내 너 爲ㅎ.야 닐오리라 지장경 ①을 현대어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선리를 얻은 까닭이니 내가 이제 조그만 의심 일이 있어 세존께 여쭈니 원하건대 세존이 자비하시어 날 위하여 펴 이르십시오. 부처가 염라천자더러 이르시되 네가 한껏 물으라. 내가 너를 위하여 말하겠다. 지장경에서 부처는 부톄로 표기되었다. 지장경언해에 나타난 국어학적 특징을 견성암판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ㄷ구개음화현상이 나타난다. 원순모음화현상이 보인다. 어두 유기음에 ○이 보인다. 어말자음 ㅅ과 ㄷ이 혼용된다. 지장경언해는 근대국어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한다. 구개음화)口蓋音化)는 ‘ㄷ, ㅌ’이 ‘ㅣ’모음을 만나 ‘ㅈ, ㅊ’으로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ㅈ, ㅊ’과 같이 혓바닥과 센입천장 사이에서 나는 소리를 구개음이라고 하는데 구개음이 아닌 ‘ㄷ, ㅌ’이 ‘ㅣ’모음과 함께 쓰이면 구개음인 ‘ㅈ, ㅊ’으로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구개음화가 일어나는 까닭은 소리를 좀 더 쉽게 내기 위해서다. 즉, ‘디’와 ‘지’를 소리내 보면 ‘지’가 혀의 움직임이 더 적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혀의 움직임이 적어야 소리내기가 쉬워진다. 용화사의 비석에 적혀 있는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이라는 조선시대 고어체는 국문학사의 귀중한 연구 자료다. ‘ᄃᆡ원’에서 ‘아래 아’ 자의 용례를 볼 수 있고, ‘디장보살’에서 지장보살로 바뀌는 구개음화 현상도 고찰할 수 있다. 용화사 안의 황산 잔로비에 안내판을 설치해야 하고,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 비석 역시 방문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상세한 안내판을 설치해야 하겠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양산의 역사 / 양산왜성의 훼손 …

양산의 역사 속에서 대표적인 임진왜란 흔적으로는 양산시 물금읍 증산리 소재 증산왜성이 경남문화재 자료 276호로 남아 있다. 증산왜성은 동서로 양쪽 봉우리에 아성을 두고 그 봉우리을 잇는 부곽을 설치하고 남북으로 문은 낸 주성과 그 아래 남쪽 등성을 이용한 부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군마훈련 장소로 비정되는 넓은 평지가 있다.

양산의 역사 / 양산왜성의 훼손 / YNEWS 조국영 향토사위원장

YNEWS 조국영 향토사위원장 물금 증산왜성(甑山倭城)의 훼손 위기 양산의 역사 속에서 대표적인 임진왜란 흔적으로는 양산시 물금읍 증산리 소재 증산왜성이 경남문화재 자료 276호로 남아 있다. 증산왜성은 동서로 양쪽 봉우리에 아성(芽城)을 두고 그 봉우리을 잇는 부곽을 설치하고 남북으로 문은 낸 주성(主城)과 그 아래 남쪽 등성을 이용한 부성 (附城)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군마훈련 장소로 비정되는 넓은 평지가 있다. 양산시는 양산시 물금읍 증산리 696번지와 구 증산 교회 일대의 부근 필지에 도시계획에 의한 계획도로 개설을 위한 측량과 기초적 수목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도로 개설 위치가 증산 왜성의 부성 전체를 관통하고 있어서 문화재 훼손의 우려가 현실화 되었다. 양산시 관계자에 문의하니 매장 문화재 지표조사 신청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측량 결과는 성벽 전체를 관통하는 도로개설이 확실함으로 훼손에 따른 명확한 대책이 필요하다. 증산리 주민 k씨에 의하면... “한 가구도 살지 않는 지역 쪽으로 문화재를 훼손해 가면서 도로를 개설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으며 기존 동네 내에도 미개설 계획도로로 불편함이 너무 많은데 예산 낭비인 것 같다.”고 한다. 또한 양산 시민 L씨는 “양산지역의 임진왜란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증산성으로 후세를 위한 산교육장이 될 수 있는 자료를 없애면 안 된다.”고 하였다. 증산성 부성 왼쪽 측면 지역은 토기들이 발굴되었던 것으로 보아 신라고분군이 있었다고 추정되며 부성을 따라 증산 마을 안쪽으로 돌아 현 증산사를 지나면서 남부동까지 신라시대의 메테식 산성의 흔적이 여러 곳 발견되며 여기에 사용된 석재들은 왜성을 쌓을 때 훼손되고 경부선 부설 때 마지막으로 없어졌다고 전한다. 학계에서도 신라 증산성에 대한 연구가 있으며 건너편 김해 각성산성과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황산지역(물금의 옛 이름)에서 가야와 신라가 많은 전쟁을 하였다.‘ 정상부 기단층에는 신라성 흔적이 보이며 그 기초 위에 왜성을 쌓았다’ 향토문화 전자대전 증산성을 일제 강점기에는 양산성이라 부르다가 해방 후 증산성이라 부르며 축성 시기는 정유재란시 울산에서부터 순천까지 방어성 구축에 필요한 7개 성을 쌓았는데, 선조 30년(1597) 12월 8일에 나가 히가시 마사이에(長束 正家), 마스다 나가오리(增田 長盛), 이시다 마쯔나리(石田 三成), 마에다 겐지가(前田 玄以)연서로서 구로다 나가마사(黑田 長政)에게 보낸 서장에서 나타난 축조 시기는 1597년 겨울에서 1598년 봄에 완성되었지만 얼마 안가서 폐기되었다가 모리 테루모(毛利 輝元)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 秀秋)등이 병사와 조선인을 징벌하여 수축하고 구로다 나가마사와 그 아들 구로다 여호수아가 수비하면서 주둔하였다. 다른 이설로는 센다이 영주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가 쌓았다고 하여 이달정종성이라고도 한다. 구로다(黑田)가보(家譜)에 의하면... ‘북쪽 왕성 가는 길목엔 양산에는 구로다가 주둔한다.’ 그 후 가토 기요마사(加藤 淸正)는 울산 왜성에 구로다는 서생포 왜성으로 옮겼다가 다시 증산성으로 왔다.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가 간행한 경남의 성지에는 다음 해 3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 秀吉)의 명령으로 감동포 왜성을 옮겼다고 가덕도 왜성으로 가서 본국으로 철수하였다고 구로다 가보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식민지 시대 증산 왜성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메기들 매립공사와 경부선 부설로 훼손도 되었고 식민사관교육에도 이용되었다. 1938년 11월 26일자 동아일보에 고적보존회가 제4회 총회에서 101종의 문화재를 새로 지정했다고 한다. 지정된 문화재 성격으로 ‘금번 지정되는 문화재는 내선 일체의 관념을 정확히 표명하는 것이어서 주목을 끌고 있다.’ 고적의 경우 경남 일원에 산재되어 있는 문화재들을 허구적 주장인 임나일본부설과 관계있는 고적들이라고 지정하였으며 내선일체의 식민지 사상을 강요하였다. 다테마사무네 이 때에 증산 왜성이 고적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이유로 다테 마사무네가 쌓은 성으로 문록경장의역(임진왜란을 일본식으로 부르는 이름)의 유적으로 등록되었다. 해방 후 1963년 1월 21일에 물금 증산성으로 명칭하고 대한민국 사적 63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1996년 11월 27일 문화재 관리국의 일제 잔재 청산 작업 일환으로 왜군에 의해 축조되었던 8개 산성을 국가 지정 문화재인 사적 지위에서 지방문화재인 지방 기념물로 격하시키고 성 이름에도 왜자를 표기했고 1977년 1월 1일에는 물금 증산성은 사적 지정이 해지되었다. 1988년 11월 13일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276호 증산리 왜성으로 등재되었으며 2018년 12월 20일 경상남도 지정문화재 (문화재 자료) 명칭 변경 고시에 따라 재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도로 개설로 훼손 위기에 처한 부성은 비록 종속적인 부성이지만 보존 상태가 주성보다 매우 양호하고, 구로다 가보에서 밝혔듯이 왕성 가는 길목인 양산의 아주 중요한 위치에 증산 왜성이 자리 잡고 있으며 구로다 부자(후쿠오카 영주), 다테(센다이 영주), 모리(하기성 영주), 고바야카와(오카야마 영주, 토요토미 양자) 등 임진왜란 전쟁 사령관들로 증산 왜성이 가장 거물급 영주들과 관계가 깊으므로 매우 중요하다고 사료된다. 증산왜성의 국가 사적을 폐지한 1996년 문화재 3분과 위원장이었던 한병삼(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당시 그 자리에서 “왜군에 의해 축조되었지만 문화재로서 보호할 가치가 있다는 판단에서 지방문화재로 인정해 주기로 했다.”고 보존의 중요성을 당시에 밝혔다. 증산왜성을 중심으로 증산 전체를 양산시가 공원일몰제에서도 다시 공원으로 지정하였으므로 앞으로 시민들의 보다 높은 삶의 질을 기대하면서 역사적 유적을 반드시 보존하고 학문적으로 정리되어서 교훈으로 남아야 한다.

양산지역의 제철 유적 / 심상도박…

양산 물금 유적에서 제련로를 비롯한 다수의 제철로가 확인되어 고대에 철생산이 대량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양산지역의 제철 유적 / 심상도박사 화요 칼럼

1. 물금지역에서 발견된 제철 유적과 고대 도로 양산 물금 유적에서 제련로를 비롯한 다수의 제철로가 확인되어 고대에 철생산이 대량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양산, 김해, 밀양 지역에는 여러 곳의 제철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양산시 물금읍 가촌리 1248-5 일원,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 2762-13 일원에서 제철유적이 발견되었다. 물금신도시 조성과정의 사전조사에서 제철 유적이 나와 동아대학교에서 발굴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아쉬운 점은 제철 유적들이 원위치에 보존되고 전시관을 만들어야 하는데, 보고서만 작성하고 유물은 그대로 땅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당시 발굴에 참여하였던 조국영 향토사학자에 의하면 제철 유적이 나온 현장은 현재 디자인공원과 부산대학교 사이에 있는 도로였다고 한다. 조국영 향토사학자 발굴조사를 마치고 제철 유적, 우물 등은 땅에 도로 묻었다고 하였다. 디자인공원 건너편 부산대학교 쪽의 인도 근처라고 위치를 알려주었다.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 1106-2, 1106-4, 1107-1번지 일원에서 신라시대 도로가 발견되었다. 이 도로는 고대 신라 왕경(王京)인 경주와 낙동강변에 있는 물금을 잇는 역할을 했다. 통일신라시대 전후 시기 제철과 관련된 도로 유적이기도 하다. 범어리 도로 유적은 6~7세기 신라의 제철 유적과도 관련된다. 이 도로는 신라의 국가 통치에 필요한 기능과 함께 물금읍 가촌리 유적과 범어리 유적에서 생산된 철을 운반하는 기능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 도로는 물금 신도시 조성으로 묻혔지만 발견된 도로의 노선 안내판을 만들어 제철유적과 아울러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필요도 있다. 양산시립박물관은 국립김해박물관에 보관돼 있던 물금 제철 유적 출토유물 243점을 2014년 3월에 인수하여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다. 양산시립박물관은 국립김해박물관에 국가 귀속된 물금 제철 출토유물 243점을 임시보관처인 동아대학교박물관으로부터 인수받았다. 2. 물금 제철유적 물금 제철유적의 배후인 오봉산 서쪽 사면에는 15세기부터 1995년까지 철광석을 채광했던 양산 물금광산이 있다. 낙동강 물금 주변에는 서북쪽 약 11㎞ 거리의 김해 상동광산을 비롯해 밀양 미촌리 유적(사촌 제철유적), 임천리 유적(금곡 제철유적), 김해 하계리, 여래리 유적, 창원 봉림동 유적 등 제철유적이 분포한다. 물금 제철유적은 우리나라 최대 제철유적 중의 하나로 손곱히고 있다. 제철조업과 관련된 45기 이상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주요한 유구를 살펴보면, 구상유구는 물을 이용해 비중선광(比重選鑛)을 하던 선광장으로 추정되었다. 수혈유구 중에는 선광된 철광석을 소결시키는 배소유구(焙燒遺構)와 배소된 광석을 제련하는 제련로가 다수 포함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패각(貝殼 : 조개 껍데기) 소성유구(燒成遺構)와 저장유구는 제련 시 조재제(造滓劑)로 사용할 패각을 소성 및 저장하던 곳이다. 도로유구와 우물은 원광석 및 생산품을 운송하고 조업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제사유구는 제철 조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길 기원하던 제의행위와 관련된 유적이었다. 유적에서 철광석, 송풍관, 노 벽체편, 철괴, 유출재 등 다수의 제철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다. 물금 제철유적은 시기적으로 5~8세기경에 제철 조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주거지, 도로 관련 유적, 고분 역시 4~7세기로 편년되고 있어 당시 이 일대에 한반도 최대규모의 제철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와 신라가 각축을 벌이던 시기에 낙동강을 경계로 양산, 밀양 지역은 신라, 김해, 창원 지역은 가야의 고지(古地)였다. 당시 철산지를 확보하기 위한 신라와 가야의 전쟁이 치열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양산은 그당시 양산천을 경계로 동쪽은 신라, 서쪽은 가야지역이었다. 어곡동에서 화제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마고산성이 있는데, 산정상을 중심으로 둘러싼 퇴뫼식 산성이다. 고대의 분쟁이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이다. 물금지역은 가야와 신라의 국경지역으로서 기능을 했다. 그후 금관가야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결국 신라에 흡수되고 말았다. 물금지역 신도시 개발사업에 앞서 1997~1998년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가촌리유적에는 삼국시대 수혈주거지 2동, 수혈유구 13기, 소형수혈 및 주혈군이 밀집분포하였다. 범어리 유적에서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걸친 수혈유구 24기, 우물 2기, 도로유구 1기, 부석(敷石) 구상유구(溝狀遺構) 3기 등 모두 30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물금유적은 오봉산(530m)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구릉이 끝나고 평지가 시작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 2~2.45㎞ 거리에는 낙동강이 북서에서 남동으로 흐르고, 동쪽 1.7~2.2㎞ 거리에는 양산천이 남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한다. 유적 앞쪽으로는 양산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양산시립도서관과 디자인공원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 범어리유적이, 남쪽에 가촌리유적이 서로 45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한다. 철을 생산하기 위한 나무가 오봉산에 풍부했고, 완성된 철을 운반하기 좋은 낙동강과 양산천이 있었다. 양산의 경우,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임경산(臨景山)에 사철이 생산된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화자포(火者浦)에서 철이 생산된다 하였다. 화자포는 원동면 화제리를 말한다. 원동면 화제리 일원의 내화마을에 자철석, 배소 흔적이 있다. 불무골이라는 지명도 있다. 필자는 이시일 시인과 답사를 한 바 있다. 이러한 기록은 이 지역이 예로부터 철산지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며, 실제로도 근대, 현대 양산에는 물금광산과 경남 철산이 자철광과 적철광의 주요산지였다. 2. 물금 제철유적의 역사적 중요성 제철로(製鐵爐)로 추정되는 유구는 상부의 삭평이 심해 원래의 형태를 알기 어렵다. 대부분 원형 혹은 방형에 가까운 평면형태를 가지며, 내부에 고온에 의해 붉은색으로 경화된 둥근 부분이 있거나, 노 벽체편, 철광석, 대구경 송풍관, 철괴, 유출재 등이 출토되어 원통형의 노(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노의 크기나 출토유물로 보아 상당수가 제련로인 것으로 보이지만 후속공정인 단야조업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패각 저장 및 소성유구에서는 제첩, 개조개, 굴 등의 패각이 다량 검출되었으며, 경사진 부석 구상유구에서는 위치에 따라 크기가 서로 다른 철광석이 다량 출토되어 물의 흐름을 이용해 철광석을 선별하던 장소로 판단되었다. 제사유구에서는 고배류를 중심으로 한 토기의 의도적 매납현상이 관찰되었다. 제련 시 철 성분과 불순물의 분리를 원활히 하기 위해 패각을 첨가했다. 유적에서 출토된 5점의 철재에 대한 금속분석 결과, 산화칼슘(CaO)과 이산화티탄(TiO₂) 함량은 그리 높지 않았고 철의 잔유량(全鐵量)은 30~50%로 확인되었다. 또한 올리바인(olivine)과 마그네타이트(magnetite) 조직이 주상(主狀)으로 나타났다. 출토된 철광석은 대부분 자철광석이고, 크기는 다양하지만 5㎝ 미만의 선광된 것도 많다. 노 벽체편은 출토량이 많지 않지만 식물성 섬유가 혼입된 점토 덩어리들이 상기한 각종 제철관련 유물들과 함께 출토된 점으로 보아 제련로의 벽체로 추정된다. 철괴는 적갈색을 띠는 등 외관상으로는 철성분이 많이 포함된 것으로 보이나 금속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성분을 알 수 없다. 유출재는 조업 중 노 바깥으로 흘려 내려 쇠똥처럼 층층이 쌓인 전형적인 제련재이다. 송풍관은 상당히 많은 양이 출토되었는데, 잔존상태가 좋지 않아 정확한 크기와 형태를 알기 어려우나 대부분 직경 13.1~18㎝의 일자(一字)형 직관(直管)이며, 외면에 자성이 강한 철재가 용착된 것이 많다. 신라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철생산지인 양산 물금지역, 밀양 지역, 김해지역을 지배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고대나 현재나 철은 여전히 산업의 쌀로서 부국강병의 필수적 소재로 쓰이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 포철회장이 포항제철을 설립하여 철강산업을 발전시켜 세계적인 자동차 생산국, 세계 1위의 조선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조국영 향토사학자의 말에 의하면 디자인공원 서쪽에 있는 황전아파트에서 디자인공원 쪽으로 작은 계곡이 내려왔는데, 제철 과정에서 물을 이용하기 좋은 자연지형이었다. 현대적인 도시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공업용수였다고 판단된다. 계곡은 신도시 조성과정에서 땅속으로 묻혔다고 한다. 도로 밑으로 묻힌 우물은 제철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거나 제철작업에도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도 양산은 첨단의 제철산업이 활발하게 작동하는 산업현장이었고, 그 전통을 이어받아 현재도 공장이 밀집한 일반산업단지가 곳곳에 조성되어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디자인공원 안에 없어진 남정마을 망향비가 서 있었다. 디자인공원은 다양한 역사적 유적을 지니고 있고, 가족단위로 운동하거나 유아 숲체험을 할 수 있는 소중한 휴식공간이다. 역사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물금 제철유적, 신라시대 도로 등에 관한 안내판도 세워야 하겠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타어평 영세불망비와 디자인공원/심…

물금읍에 있는 디자인공원 안의 작은 동산인 청룡등 5부 능선 위에 타어평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있다. 오봉산에서 좌(동쪽)는 청룡등, 우(서쪽)는 백호등(白虎嶝)이 뻗어 내렸다. 마을앞(남쪽)으로 펼쳐진 것이 타어평(鼉魚坪 : 메기들)이었다. 현재 물금 신도시가 들어섰다.

타어평 영세불망비와 디자인공원/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1. 타어평 영세불망비 비석 발견과 정비 물금읍에 있는 디자인공원 안의 작은 동산인 청룡등 5부 능선 위에 타어평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있다. 오봉산에서 좌(동쪽)는 청룡등, 우(서쪽)는 백호등(白虎嶝)이 뻗어 내렸다. 마을앞(남쪽)으로 펼쳐진 것이 타어평(鼉魚坪 : 메기들)이었다. 현재 물금 신도시가 들어섰다. 1864년 조선시대 중과세에 시달리는 양산지역 메기들 농민들에게 세금을 영구히 면제해주도록 조치한 정원용 호위영 대장, 서헌순 경상도 관찰사, 심락정 양산군수 3명의 공을 기리는 타어평 영세불망비가 있다. 홍수가 나면 물이 불어나 농사를 망치는 메기들에 세금 면제 조치를 내린 백성을 사랑하는 관리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기 위하여 양산군민이 정성을 모아 1865년에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비석이 제일 큰 것이 왼쪽에 있는 호위대장 정원용(鄭元容)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 후세 사람들이 영원히 잊지 않도록 어떤 사실을 적어 세우는 비석), 가운데는 경상도 관찰사 서헌순(徐憲淳) 휼민(恤民 : 빈민이나 이재민을 구제함) 영세불망비, 오른쪽은 군수 심락정(沈樂正) 애민(愛民 : 백성을 사랑함) 불망비가 차례로 서있다. 비석이 발견되고 정비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원래 비석이 세워진 곳은 동산 아래 옛 영남대로변이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25년경 양산수리조합의 승수로 개설로 인해 산 중턱으로 이전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비석의 머리와 본체는 흩어져 땅에 묻혀 있었다. 2006년 여름 물금읍 가촌리에 사는 최만윤 씨가 양산시에 신고함으로써 실체가 드러났다. 전 양산향토사연구회 정진화 회장이 비석의 내력을 밝히고 양산대학 엄원대 교수가 비문을 해석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006년 가을 물금읍의 지원으로 비석을 현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다. 안내판에 있는 한글로 쓰인 ‘승수로’라는 단어는 처음에 혹시 물을 보내는 송수로의 오타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승수로(承水路)는 등고선 또는 필지의 구획선을 따라서 물을 대거나 배수하는 수로이다. 승수로는 포장 내의 승수로와 포장 밖의 승수로로 구분된다. 포장 내의 승수로는 빗물의 유하에 따르는 수식(水蝕 : 물에 의한 토양의 침식)의 위험성을 방지하기 위하여 안전하게 집수로에 유도하기 위한 수로이며, 등고선에 평행하게 설치된다. 그러나 집수로는 보통 등고선에 수직으로 설치한다. 비석 3기를 다시 세웠으나 공간이 협소하여 제향을 올리기에는 불편하였다. 그 당시 홍순경 경남도의원이 경남도비 3천만 원을 유치하여 영세불망비 유적의 성역화 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하였다. 유적 정비사업이 2013년 11월 11일에 완료되어 내력을 적은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타어평 영세불망비 추모제는 물금읍, 물금읍 주민자치위원회, 물금농협, 물금라이온스클럽이 상호 협조하여 주관하고 있다. 유교의식으로 거행되는 추모제 제례의 집례는 동아인쇄문화사 김종완 대표가 맡고 있으며 초헌관은 물금읍장이 하고 있는데, 매년 농민의 날인 11월 11일에 거행한다. 2. 호위대장 정원용 호위대장 정원용(鄭元容)의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동래(東萊).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동만(東晚)의 아들로 1802년(순조 2)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 부응교(副應敎), 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내고 1821년 관서 위유사(關西慰諭使)로서 평안도의 민폐(民弊)를 조사 보고했다.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1831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1837년(헌종 3) 예조 판서, 이조 판서를 거쳐 1841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843년 판중추 부사(判中樞府事)가 되고, 1849년 헌종이 죽자 영의정으로서 덕완군(德完君) 이원범(李元範 : 철종(哲宗))의 영립(迎立)을 주장, 즉위케 했다. 그 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총호사(摠護使) 등을 지냈다. 호위청(扈衛廳)은 1623년 인조반정에 공이 있었던 김류(金瑬), 이귀(李貴) 등의 훈신들 호위청의 편제는 현종 때 호위3청으로 개편되었다. 왕권호위가 소홀하다고 하여, 반정 직후인 9월에 설치해 10월에 군영의 체제를 갖추었다. 관기(官紀)가 문란해지고 각처에서 민란(民亂)이 일어나자 암행어사 제도를 부활시키도록 건의했다. 1862년 궤장(几杖)을 하사받은 뒤 이정청(釐整廳)의 총재관(摠裁官)이 되어 삼정(三政)의 문란을 시정하려 했다. 궤장은 왕이 70세 이상의 연로한 대신들에게 내린 하사품 지팡이다. 지팡이의 머리는 비둘기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국가에서 궤장의 하사는 연로한 대신을 극진히 우대하는 예법으로서 받는 사람들이 큰 영예로 여겼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정사를 보았다. 이듬해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이 되어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호위대장 정원용(鄭元容)은 장수하여 91세의 천수를 누렸다.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임금 4대에 걸쳐 72년 동안 벼슬을 하면서 6차례나 영의정을 지냈다. 1857년에 회근(回巹)을 맞이하였다. 회근(回巹)은 해로한 부부의 혼인한 지 예순 돌을 축하하는 기념잔치다. 회혼(回婚) 또는 회근이라 한다. 1862년에 회방(回榜)을 맞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회방은 과거에 급제한 지 예순 돌이 되는 해다. 대과 및 소과에 급제한 지 60년이 된 사람은 일품계를 승급해주었다.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에도 뛰어나 20여 년간 조정의 대책(大冊)을 찬술했고, 특히 관각문(館閣文)에 조예가 깊어서 당시 종(鐘), 정(鼎), 비(碑), 판(板)에 정원용의 글과 글씨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하외도(河畏圖)’ 10폭 병풍은 정원용이 이의성(李義聲)에게 주문하여 제작한 것으로 1829년에 정원용이 남긴 발문이 적혀 있다. 3. 서헌순 경상도 관찰사, 양산군수 심락정 서헌순(徐憲淳) 경상도 관찰사의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치장(稚章), 호는 석운(石耘). 좌의정 서지수(徐志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유후(徐有後)이고, 아버지는 진사 서기보(徐基輔)이며, 어머니는 박종신(朴宗臣)의 딸이다. 1829년(순조 29)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844년(헌종 10) 성균관 대사성에 취임하였고, 3년 후 관북지방에 흉년이 들자 구제사업을 위하여 파견되었으며, 1850년(철종 1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호군(護軍),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거쳐 1854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경상도 관찰사로 오기 전에 예조판서, 한성부 판윤(오늘날의 서울시장), 병조판서, 형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는 정사를 다스리는 데 청렴결백하며, 옳고 그름을 잘 판단했다고 한다. 경상감사를 역임할 때 부인이 사택에서 가지고 온 솥이 경상도 것임을 알고 그 솥을 경상감영으로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1862년 사은정사(謝恩正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63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당시 경주 등지에서는 동학이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여 조정에서는 선전관 정운구(鄭雲龜)를 파견하여 동학교도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에 최제우(崔濟愚) 등 동학교도 20여 명이 서울로 압송되던 중 철종이 승하하여 이듬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서헌순은 대구 감영에서 이들을 조사하고 의정부의 지시방침에 따라 처형 또는 처벌하였다. 서헌순은 ‘수운이 제자들에게 글자를 써주고 돈을 받은 적은 있으나 토색질한 것은 없으며, 동학이 나라를 외적으로부터 막기 위한 학문이라 한다’면서 문초한 대로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은 동학이란 요사스러운 무리가 나타나서 많은 도당을 집결시켰다’며 동학을 서학과 마찬가지로 혹세무민의 사교로 내몰았다. 결국 수운은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참형을 언도받고 나머지 12명은 유배 등 엄형을 받는다. 형조판서의 훈령에 따라 수운은 3월 10일 관덕당에서 처형됐다. 양산군수 심락정(沈樂正)은 한양 출신이며 본관은 청송이며, 음직(蔭職)으로 1858년(철종 9년)에 가감역(假感役)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1863년 양산군수로 부임하여 재임시 호위영에서 양산 메기들(타어평)에 중과세가 하령되자 백성들의 여론과 의견들을 수렴하여 조세탕감에 앞장섰다. 필자가 지난 5월 31일에 현장을 방문해보니 타어평 영세불망비에 대한 안내표지판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청룡등에 있는 항일독립운동기념탑, ‘가촌유아숲체험원’, 운동기구, 산책로, 정자와 쉼터를 방문하고 있었지만 영세불망비 안내표지판은 없어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양산시육아종합지원센터 옆에 주차장이 있어 주차를 하고 영세불망비를 거쳐서 청룡등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 꿈나무유치원 옆으로 올라가서 ‘가촌유아숲체험원’을 지나 영세불망비로 갈 수 있으나 아무런 안내 표지판이 없어 초행자는 찾기 힘들다. 디자인공원을 방문하는 양산시민들에게 조선시대에 양산의 백성을 사랑하여 세금을 면제해준 관리들의 치적을 알릴 필요가 있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양산물금지구 택지개발사업 중 발견…

한국토지공사가 2008년 12월 물금신도시 택지개발 3단계 사업 중 하나인 증산양수장 철거공사를 벌이다가 조선시대 비석을 발견해 양산시에 신고했다. 발견 당시 지면 위로 일부 모습만 드러낸 이 비석은 높이 120㎝, 폭 100㎝ 정도 규모의 자연석 재질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이 비석은 1729년 조선 영조 5년 때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며 공사참여자 이름이 새겨진 것을 감안하면 일종의 공사실명제를 적용한 비석으로 풀이된다고 양산시 관계자가 발표했다.

양산물금지구 택지개발사업 중 발견된 수문비 유적/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양산물금지구 택지개발사업 중 발견된 수문비 유적 1. 수문비 발견 경위 및 비문 내용 한국토지공사가 2008년 12월 물금신도시 택지개발 3단계 사업 중 하나인 증산양수장 철거공사를 벌이다가 조선시대 비석을 발견해 양산시에 신고했다. 발견 당시 지면 위로 일부 모습만 드러낸 이 비석은 높이 120㎝, 폭 100㎝ 정도 규모의 자연석 재질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이 비석은 1729년 조선 영조 5년 때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며 공사참여자 이름이 새겨진 것을 감안하면 일종의 공사실명제를 적용한 비석으로 풀이된다고 양산시 관계자가 발표했다. 양산시와 한국토지공사는 이 비석을 문화재청에 신고하였다. 문화재청은 현장에서 자문회의를 갖고 비석을 완전 발굴한 뒤 새겨진 문구 해석 및 보존방안을 마련키로 했다. 비석이 발견된 곳은 낙동강과 인접한 곳으로 조선시대 때 홍수조절을 위해 수문이 축조된 곳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 비석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께 증산양수장이 건축되면서 지반을 다지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었다 수문비를 완전하게 발굴한 후 증산의 구두공원과 인접한 대방노블랜드 6차아파트 앞의 근린공원에 설치했다. 증산의 모양은 거북처럼 생겼는데, 근린공원은 거북의 머리 바로 앞에 있다. 수문비의 규모를 보면 바위 높이가 3.2m, 가로 2.8m, 폭 1.7m이다. 자연석 바위에 글자가 새겨져 있고 상태가 양호하여 눈으로 판독이 가능하다. 수문비 유적의 안내판에 다음의 내용이 적혀있다. “양산물금지구 택지개발사업 조성공사 중 2008년 12월 양산시 물금읍 증산리 1185-1번지 일원에서 수문비 유적이 매장되어 있음을 발견하여 문화재 분포조사 후 발굴되었음. 수문비 주변 일대가 일제강점기의 양배수장과 관련시설물 조성으로 인하여 원 지형이나 조선시대 수문 및 수문비가 건립되던 시기의 지형이 남아있지 않았음으로 수문비와 수문부재로 추정되는 석재를 수습하여 근린공원으로 이전 하여 보존함.”양산 황산언 석조 수문 준공기 각석(梁山 黃山堰 石造 水門 竣工記 刻石)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개축구제(改築舊堤) / 석작수문용본(石作水門用本) / 각역졸기승(各驛卒曁僧) / 군역이월내필(軍役二月基畢) / 즉옹정칠년기유(卽雍正七年己酉) / 사월결성오등내(四月結成吳等內) / 시야 감역 김진원(時也 監役 金振遠).해석은 다음과 같다. 오래된 제방을 개축하고 돌로 수문을 만들었다. 본역(本驛, 황산역) 및 각역(各驛)의 역졸과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2개월 만에 수문건축의 부역을 마쳤는데, 때는 바로 옹정7년 기유년(1729년) 이었고 황산역의 기관장인 오등내의 재임시기였다. 공사 감독인 감역(監役)은 김진원(金振遠)이다. 앞 글자가 마모되었는데, ○吏는 역리(驛史)로 추정된다. 즉 역리(驛史) 김방언(金邦彦) 박일엽(朴日曄), 앞 글자가 마모된 ○色은 역색(驛色)으로 추정된다. 즉 역색(驛色) 박중무(朴重茂), 강위도(姜渭道), 김익화(金益華), 김익황(金益晃), 김중석(金重錫), 김한석(金漢錫), 최영흘(崔榮屹), 최동흘(崔東屹), 김만종(金萬宗), 박맹엽(朴孟曄), 박세우(朴世祐), 앞 글자가 마모된 ○필(筆)은 비석 글씨를 쓴 사람으로 보이는데, 정시륜(鄭始崙)이다. 역리(驛史)는 조선시대에 역참에서 제반 업무를 담당한 아전을 말한다. 역리(驛吏)는 왕명이나 문서를 전달하는 ‘전명(傳命)’이라는 역(役)을 담당한 역민(驛民)의 하나로, 지방 이서층(吏胥層)에 해당하였다. 역리는 역리 호적에 오른 역호(驛戶)로서 대대로 세습되었다. 소속된 역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성명과 나이, 사조(四祖)와 외조(外祖) 및 처의 성명, 나이, 솔정(率丁) 등을 기재하여 역리 호적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병조와 감영, 군현 및 본역에 보관하고, 3년마다 도망자와 사망자, 입역 대상자 등을 파악하여 역리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역리의 임무는 첫째, 왕의 명령인 전명 및 공문서의 전달과, 감사를 포함한 수령의 교체에 따른 영송 및 접대를 담당하였다. 둘째, 왕명을 전달하는 사신 및 외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의 짐과 각종 진상품을 운반하였다. 셋째, 공용 역마를 길러 바치는 일을 담당하였다. 역리들은 지급받은 마위전(馬位田)을 경작하여 거기서 얻은 재원으로 말을 사육해 입대시켰는데, 말 값이 오를 경우에는 가산을 탕진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다. 조정에서 목장마를 나눠 주거나 향리를 조역(助役)으로 차정하는 조역정책(助役政策)을 실시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끝으로 변방의 요충지에 위치한 역에서는 군사 임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2. 수문비를 건립한 황산역의 역리 황산역은 조선 세조 때 만든 40개 찰방역 가운데 하나인데, 11개 속역을 두었다. 황산역 찰방은 현재 물금읍 서부마을에 위치하였다. 세조 이후에는 11개 속역 외에 동래의 휴산역, 소산역, 언양, 밀양 등의 16개 역을 관할하였다. 종6품으로 역의 업무를 관할하는 찰방을 비롯해 역리, 역졸, 역노 등 약 8,800여 명이 속해있어 규모가 큰 역이었다. 황산역의 역졸들은 관리들의 이동 편의 제공, 죄수 호송도 담당하였다. 조정에서 긴급한 사안이 생기면 군수나 현감에게 군사를 빌리지 않고, 역졸을 징발했다. 역졸은 비밀스러운 임무인 암행어사 출두에도 투입되었다. 지방 수령을 감찰하는 암행어사 출두 때 따라 나오는 군사가 역졸이다. 역에 소속된 말의 사용은 마패를 소지한 관리들만 가능했다. 마패의 상징인 말 그림은 빌릴 수 있는 말의 수로서 5 마패까지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암행어사에게 발급된 마패는 2 마패가 많았다. 원래 마패는 암행어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무로 지방 여행을 하는 관리들이 역참의 역마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증명서다. 마패는 병조에서 마문(馬文)을 발급하여 상서원(尙瑞院)에서 받을 수 있었다. 지방의 경우에는 관찰사나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가 마패를 발급할 수 있었다. 수문비에 나오는 역색(驛色)은 진주 소촌역(召村驛)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른바 6방분임(六房分任)에 따라 역리가 이방색(吏房色), 병방색(兵房色), 호방색(戶房色), 예방색(禮房色) 등으로 구분되어 실무를 나누어 담당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방은 본역, 외역의 역리와 역졸로부터 신공전을 수납하고, 신관과 구관의 영송 및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수송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호방은 공수전을 관리해 쌀과 콩을 거두고 역민으로부터 역에 필요한 물품을 징수했으며, 마위전, 복호전을 관리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예방색은 삭전(朔錢)과 수요품의 조달을, 병방은 역참에 필요한 도구를 구입하는 비용과 왕래하는 사객의 인마기세(人馬騎貰) 및 복세전(卜貰錢)을 마련하는 일, 왕이 능행할 때 역마를 입대하는 일과 마적(馬籍)을 관리하는 일 등을 맡았다. 대동색과 관청색은 본역대기(本驛垈基)에서 콩을 징수하여 역마를 기르고 대동고(大同庫)를 관리하며, 찰방의 월급과 상정미(詳定米)의 대전(代錢)을 수납하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형방색은 각종 문부(文簿)를 수보(修報)하는 일을, 승발(承發)은 문첩(文牒)을 수보하며 전관(傳關) 등을 담당하였다. 역의 운영에 필요한 각종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설정한 전지로 공수전(公須田)이 있었다. 1445년(세종 27) 7월의 전제개혁에서는 공수전의 절급 기준으로 지방관의 관품 외에 도로의 중요도에 따라 대중소의 3등급으로 구분하는 새로운 기준이 추가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지방관청의 등급과 관계없이 부, 대도호부, 목뿐만 아니라 도호부, 군, 현에도 하나같이 15결을 지급하되, 주요 교통로의 대로, 중로에 각각 10결, 5결 씩을 더 지급하였다. 반면에 역(驛)의 경우 대로, 중로, 소로의 3등급으로 구분하여 각각 20결, 15결, 5결을 지급하되,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의 대로역에는 각각 25결, 10결씩을 더 지급하였다. 3. 수문비 건립에 동원된 승군 승군(僧軍)은 나라의 위난을 구하기 위하여 승려들이 조직한 군대를 말한다. 물금신도시 조성 공사 중 발견된 황산언 수문비 기록에 보면 공사를 담당한 사람들은 역리와 승군들이었다. 조선시대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는 탄압을 받았으며, 승려들에 대한 규제도 심하였다. 승려의 증가를 억제하기 위하여 도첩제를 시행하였다. 조선 초기 궁궐을 건립하고 도성을 쌓는 일에 일반 백성을 동원하면 농사에 지장이 초래되므로 승려를 부역에 동원하였다. 승려들을 부역에 동원하여 일을 시키고 그 대가로 도첩을 수여하였다.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취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빈민 구제에도 승려들의 역할이 필요하였고, 각종 부역에도 전문기술을 지닌 승려들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도첩제가 폐지된 이후에는 호패를 주면서 승려들을 각종 부역에 동원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무도첩승을 승군으로 동원하여 일정 기간 성곽 또는 요새를 수축하게 한 뒤 그 대가로서 호패(號牌)를 급여하고 신분을 보장해 주었으나, 그 뒤의 무도첩승은 모두 환속시켜 군인으로 만들었다. 1592년(선조 25년)의 임진왜란 때 휴정(休靜)은 전국 사찰에 나라를 구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보냈고, 전국 각지에서는 의승군(義僧軍)이 궐기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분연히 나섰다. 주요 대첩은 영규(靈圭)의 청주성발성(淸州城拔城), 처영(處英)의 행주산성대첩, 유정(惟政)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평양탈환 때의 모란봉전투(牡丹峰戰鬪)와 도성수복 때의 수락산전투, 노원평전투, 송교전투 등을 들 수 있다. 병자호란 때에는 각성(覺性)과 명조(明照) 등의 의승군이 활약하였다. 각성은 1624년(인조 2년) 팔도도총섭이 되어 남한산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였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3,000명의 의승을 모아 항마군이라 이름한 뒤 스스로 승대장이 되어 북상하였으나, 도중에 왕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중지하였다. 명조는 1627년 후금이 침략해 오자, 의승군 4,000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진을 쳐서 크게 전공을 세웠고, 병자호란 때에는 군량미를 모아서 전선에 보내는 등 맹활약하였다. 예로부터 치산치수는 위정자의 근본적인 책무였다. 조선시대 물금지역의 홍수조절을 위한 수문 건립에 황산역의 역리와 승군들이 참여한 비석이 발견되어 구두공원 근린공원에 보존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홍수와 가뭄이 빈번하고 냉해, 우박 등의 자연재해가 연달아 발생하여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하였다. 역사기록에 재해, 역병에 시달린 참상이 자주 나타난다.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정비사업으로 양산의 낙동강, 양산천은 국비로 공사하여 재난을 방지하는 혜택을 보고 있다. 양산천 제방도 높인 덕분에 태풍 차바 때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낙동강 정비사업으로 1,873,000㎡ 규모의 황산공원이 조성되어 시민들이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자전거도로, 산책로, 캠핑장, 파크골프장, 야구장, 축구장, 연못, 초화류 공원이 인기를 끌고 있으며, 경남도 제2호 지방정원이 완성되면 더욱 시민들이 자주 방문하게 될 것이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고려다완과 막사발 / 도예가 / …

인류문명은 불과 함께 시작되었고, 그 불을 이용한 최초의 창작물은 흙으로 만들어 구운 토기와 도기들로서 그릇을 비롯한 생활용기들을 만들었다. 그 후 자기로 발전하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생활용기 뿐만 아니라 미적감상의 대상으로도 존재해 왔다. 또, 18세기 이전의 유럽에서는 황금으로 비유되었던 동양도자기를 누가 몇 점 소장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귀족들의 부와 명예, 그리고 사회적 등급이 다르게 존재하기도 했다. 16세기 말 일본에서는 고려 다완으로 불려지는 그릇들 가운데 다인들이 선호하는 이도 다완(井戶 茶碗)의 가치는 일국(一國) 일성(一城)을 준다고 해도 한 점의 이도 다완과는 바꾸지 않겠다고도 하였다. 이러한 도자기들은 나라마다 사회적, 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그 용도와 가치를 달리해 왔다. 본고에서는 고려 다완의 모양과 명칭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다완과 막사발 / 도예가 / 조국영

고려다완과 막사발 / 도예가 / 조국영 Ⅰ. 인류문명은 불과 함께 시작되었고, 그 불을 이용한 최초의 창작물은 흙으로 만들어 구운 토기와 도기들로서 그릇을 비롯한 생활용기들을 만들었다. 그 후 자기로 발전하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생활용기 뿐만 아니라 미적감상의 대상으로도 존재해 왔다. 또, 18세기 이전의 유럽에서는 황금으로 비유되었던 동양도자기를 누가 몇 점 소장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귀족들의 부와 명예, 그리고 사회적 등급이 다르게 존재하기도 했다. 1910년 유럽 최초의 자기 16세기 말 일본에서는 고려 다완으로 불려지는 그릇들 가운데 다인들이 선호하는 이도 다완(井戶 茶碗)의 가치는 일국(一國) 일성(一城)을 준다고 해도 한 점의 이도 다완과는 바꾸지 않겠다고도 하였다. 이러한 도자기들은 나라마다 사회적, 문화적 차이로 인하여 그 용도와 가치를 달리해 왔다. 본고에서는 고려 다완의 모양과 명칭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 오늘날 일본에서 고려다완이라 칭하는 그릇은 사실 고려시대에 찻그릇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고 15세기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조선시대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그릇을 통칭한다. 처음부터 찻그릇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용도에 관해서는 서민들의 밥사발 즉 잡기라는 설(야나기 무네요시)이 일반화되어 있다. 또한 제기설(신한균)과 스님들의 공양바루설(정동주)로 특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있다. 일본에서 고려다완이라고 최초의 기록으로 발견된 사료로선 1506년에 쓴 實隆公記의 일기 속에서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국보 기자에몬 다완 일본이 말차가 처음 보급된 것은 송나라에 유학한 승려 에이사이가 귀국하면서부터 카마쿠라, 무로마치 시대를 거치면서 서원차롤 발전하였다. 화려하고 넓은 서원에서 중국에서 수입한 천목다완에 점다를 행하는 권위적 찻법었다. 그러나 불교적 청빈함과 禪의 고즈넉함이 차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였다. 따라서 화려한 천목다완에서 송나라 민간요에서 생산한 거칠고 환원 소성이 보장되지 않은 붉은 계열의 주광 청자를 사용하게 된다(무라타 주코). 이로부터 와비차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다인들은 딱딱하고 아직도 형식이 남아 있는 청자보다 더 와비의 정서에 접근된 다완을 찾으려고 하였으며, 그 결과 고려다완을 발견하게 되면서 와비사비차가 완성된다. 그 중심에 이도다완이 있으며 대덕사 기자에몽 다완은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다완의 명칭과 형식에 관하여 조선시대 기록은 거의 없다.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국교가 1609년 기유조약으로 통교가 재개되면서 다인들의 고려다완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2년 후인 1611년 3월 초 변례집요에 의하면 『.왜인이 지참한 서계에 의하면 바라건대 도기 견본과 다기, 보아. 와기 등물을 김해부사에 청하여 김해 장인에게 만들어 달라는 연유』 즉, 왜인이 제출한 외교문서에 의하면 다완의 견본 보아는 보시기로 크기를 의미하며 와기는 질그릇과 같은 거친 것을 주문한 듯하다. 고려 다완의 주문으로 다완의 크기와 질감 등을 서술한 유일한 기록이고, 주문 다완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1639년에는 부산 두모포 왜관 밖에 하동 장인을 불러 가마를 짓고 본격적으로 다완을 생산하였다다기번조류초. 이후 초량 가마가 폐요된 1743년까지 104년간 도자기를 비롯한 다완들을 구웠다. 이 때 다완 크기와 종류는 종이에 그리고 치수를 적거나 종이로 만들거나 나무로 깎거나 흙으로 견본을 만들어 왔다고 한다. 남아 있는 일본 측 주문 사료는 원록 4년(1701년)에 주문한 어조물공과 정덕3년(1713년)에 제방어호지어소물, 어주문유 차외어조물지공 에 주문에 관한 양식과 치수, 색상, 문양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 측 도공두가 조선 도공에게 만들게 한 것이 어본 다완이다. 고려 다완의 크기와 양식에서 변례집요에 기술된 보아를 중심으로 후기 조선시대 일상용기에 관한 자료로는 1894년 작성된 분원자기 공소절목을 들 수 있다. 분원 자기 공소에서 만들어진 자기에 관한 공가를 책정하는 절목이나 내용에는 그릇별로 大大, 大, 中, 小로 나누며 치수를 기록하고 있다. 대사발 경 목척 8촌 8분 대대접 경 목척 8촌 7분 대사발 경 목척 6촌 2분 대대접 경 목척 7촌 대탕기 경 목척 5촌 5분 대보아 경 목척 5촌 5분 대종자 경 목척 3촌 7분 대대접시 경 목척 7촌 4분 대대합 경 목척 8촌 위의 기록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대사발과 대대접은 大大로 볼 수 있겠다. 고려다완의 크기와 비슷한 치수로는 구경이 14-15cm 내외의 크기로 대탕기와 대보아가 가장 근사치에 있으며 탕기는 오목하면서 깊은 형태를 띠며, 보아는 보시기의 한자어로 구연이 외반된 김치 등을 담는 그릇으로 본다면 변례집요에 언급된 다완의 크기와 양식이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릇에 관한 근세 사료로는 1931년 40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 아사카와 다쿠미가 쓴 조선도자명고를 들 수 있다. 그 해 일본에서 출간된 이 책은 도자기 명칭과 쓰임새, 형태 등을 설명과 삽화를 곁들여 기술하고 있다. 다쿠미의 조선도자기에 관한 애정과 소반을 비롯한 공예품에 조선의 미를 알리고 예술 세계로 승화시키는데 일조를 하였다. 다쿠미의 조선도자명고에서 그림과 함께 설명되는 그릇들 중에 분원자기공소절목에 기술된 그릇명이 비슷하게 등장한다. 사발-밥 담는 그릇 바라기-사발로서 입이 끝으로 벌어진 것 입기- 밑과 입이 같은 사발을 입기라 한다. 발탕기-입이 안으로 굽어진 것을 말한다. 여자들 밥 담는 그릇 탕기- 발탕기와 비슷한 꼴로 더 큰 것 탕을 담는다. 보시기(보아기)-사발보아 좀 작은 것으로 보시기 종자 종발 찻종이 있다. 보시기, 보, 보아라고도 한다. 사발 종발의 중간치 종발-종자와 같은 구실을 하는 작은 그릇 발(鉢), 접(楪), 보아(甫兒), 접(接), 종자(鍾子) 등은 원래 의미를 가지지 않는 허어로 전해 내려오는 구어를 이두식으로 적용한 것이다. 그래서 발은 밑이 깊고 구연이 약간 벌어진 그릇을 뜻하고 접은 구연이 많이 벌어진 그릇이고 보아는 작은 발과 접의 중간 형식을 띤다. 접은 구연이 많이 벌어진 접시를 뜻하고 종자는 작은 그릇으로 간장을 담아낸다. 다쿠미의 설명 탕기와 발탕기의 설명을 탕기는 탕을 담는 그릇이 그림과 일치하지만 발탕기는 입이 안으로 굽어진 게 아니라 외반한 형상을 띤다, 그리고 사발, 입기, 함, 보시기 등은 그림으로 봐서는 유사하며 종자와 탕기도 구별이 안 되는 듯하다. 다쿠미 사후 5개월 뒤 일본에서 출간하였으므로 저자가 탈고를 못하였을 것이다. 다쿠미의 조선도자명고에서도 고려 다완의 크기를 별도로 설명하지 않고 일본에서 잘못 쓰이는 다완의 종류를 나열하면서 고려다완의 일본식 명칭에 대하여 “그렇지만 이것을 조선어에 근거를 둔 것은 거의 없다. 대부분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 온 경로와 그와 관련된 지명, 또는 기물의 형태, 유약색의 변화 등과 관련해 아무렇게 붙인 이름이라면서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고려다완을 막사발이라 부르고 있다. 심지어 막사발 축제 , 막사발 공모전, 막사발 미술관 등 함부로 쓰이고 있으며, 심지어 고려다완을 소개하면서 발간되었던 책의 제목에서도 막사발로 붙인 책들이 시중에 범람하고 있다. 세계 도자사를 보면 고려다기가 출현했던 16세기에서도 자기를 구울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중국, 조선, 베트남 정도 밖에 없었다. 유럽에서도 자기는 18세기가 되어서야 만들 수 있었다.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잡아간 조선 도공을 중심으로 도자 산업을 육성 발전시켰으며 중국의 명, 청 교체기와 세 번의 난으로 인해 중국 최고의 도자 도시 경덕진의 파괴로 인하여 유럽으로 도자기 공급은 일본의 아리다 야끼로 대체되면서 일본은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이룰 수 있었다. 이때까지의 유럽은 도기 밖에 못 만들었고 동양 도자기는 엄청난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유럽의 자기는 독일 아우구스트 공의 열망과 후원으로 1710년 드레스덴에서 베르그에 의해 유럽자기가 탄생된다. 동양 도자기에 대한 유명한 일화로 아우구스트 1세는 동양도자기 100점을 얻기 위해 기병대 600명을 프러시아 왕에게 헌납하였다. 이러한 최첨단 도자기 산업을 영위해 나가던 조선의 고려다완을 오늘날에 막사발이라 부르며 스스로의 긍지와 자부심을 내팽개쳤다. 19세기 말 조선의 국운은 저물어가고 사옹원의 분원은 민영화되면서 1883년 분원자기 공소가 설립되었다. 이후 재정난과 운영 미숙으로 도공들은 지방으로 흩어져 민간요 운영자에 의지하거나 전업을 하게 된다. 한일합방 전후 일본의 도자기술자들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진보된 도자기 기술을 선보이게 된다. 오름가마를 사용하지 않고 석탄을 원료로 하는 단가마에서 소위 왜사기라는 생활식기를 생산하게 된다. 원료도 정선된 태토에 스탬프를 이용한 문양 시문으로 깨끗하고 비교적 정교한 도자기를 생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도공은 해주, 문경, 청송, 단양, 청도 등 지방에 머무르며 도자기를 생산하게 된다. 소성 방식도 조선 도공들은 상번으로 노출식 소성을 하지만 일본도공은 갑번을 하면서 깨끗하고 맑은 제품을 생산하였다. 시장에서는 서로 비교된 명칭이 탄생되었다. 일본도공의 그릇들을 왜사기라 불렀으며 조선도공의 그릇은 거칠고 매우 두터우며 투박하다하여 막사기라 불렀다. 두 제품에 우열이 심하여 가격적으로는 차이가 났으며 왜사기는 이 왕가를 비롯한 귀족들과 일본인이 주로 애용하여왔다. 1940년대에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유기공출로 도자기 사용량이 많아졌지만,조선백자는 기술개발이 없이 대량 생산되면서 막사발, 막사기라 칭해지며 팔려나갔고, 1950년 6.25동란 전후까지 성업하였다. 또, 한일합방은 일본골동품계를 흔들어 놓았으며 그에 관한 지식이 조금만 있어도 수집에 열을 올렸으며 그 중에서도 고려다완 도자기류는 단연 인기품목이었다. 그 결과 개성과 강화도의 고려 왕릉은 거의 도굴되었고, 도요지는 일본사람이 다녀가 곳이 부지기수였으며 이 때에도 일본의 수집가들은 고려다완을 한국인에게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막사발이라면서 그림 혹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해방후에도 일본 수집가와의 골동 거간꾼들은 막사발이라 당연한 듯 불렀다. 이리하여 고려다완은 제 이름을 찾지 못하고 비운의 명칭으로 남아 막사발로 계속 불리고 있다. Ⅲ. 우리나라 도자기를 사랑했던 호소카와 다쿠미는 그의 저서 조선의 소반에서 “올바른 공예품은 사용자의 손에 의해 차차 그 특유의 아름다움을 발휘한다. 따라서 사용자는 완성자”라 하였다. 고려다완이 조선도공이 만들었지만 일본다도의 쓰임새에 완성되었고 우리는 이름도 못가진 채 막사발로 치부되었다. 당시의 첨단 기술을 갖추었지만 우리는 그것은 깨닫지 못하고 자긍심과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몰락시켜버렸다. 일제 강점기 이데카와를 중심으로 한 조선공예품의 편견은 결국 고려다완을 막사발로 고착시켰다. 일본다도는 에이사이에 의해 말차가 도입되고 고려다완으로 완성되었다고 하여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고려다완을 막사발로 불러야 할 것인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베를린 샤틀로렌 부르크 궁전 내부 중국자기 수집실 주광청자 왜사기 종자 막사발 막사발 대접 왜사기 막사발 막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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