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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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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진 용신제의 국가무형문화재 지…

가야진용신제는 부정을 쫓아내는 ‘부정가시기’를 시작으로, 칙사를 모시고 제단으로 향하는 ‘칙사영접굿’, 칙사가 제당에 당도하면 삼용신에게 제를 올리는 ‘용신제례’, 나룻배에 돼지를 실은 뒤 낙동강 용왕에게 제물로 바치는 ‘용소풀이’에 이어 제례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제단으로 돌아와 풍악놀이를 즐기며 대동마당을 만드는 ‘사신풀이’순으로 진행된다.

가야진 용신제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신청과 탈락/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학 박사 심상도 1. 가야진 용신제의 역사적 기원 1983년 가야진사가 경남도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됨과 동시에 원동면 용당마을 주민을 비롯한 원동면민들이 뜻을 모아 용신제 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가야진용신제 발굴 및 보존위원회를 확대 재정비하여 제27회 경남도 민속예술 경연대회에 출연한 결과 우수상을 획득하면서 1997년 경남도 문화재 제19호로 지정받았다. 가야진용신제는 부정을 쫓아내는 ‘부정가시기’를 시작으로, 칙사를 모시고 제단으로 향하는 ‘칙사영접굿’, 칙사가 제당에 당도하면 삼용신에게 제를 올리는 ‘용신제례’, 나룻배에 돼지를 실은 뒤 낙동강 용왕에게 제물로 바치는 ‘용소풀이’에 이어 제례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제단으로 돌아와 풍악놀이를 즐기며 대동마당을 만드는 ‘사신풀이’순으로 진행된다. 삼국시대부터 구한말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던 가야진용신제는 일제의 억압으로 가야진사가 헐리고 용신제가 금지되는 등 존폐의 위기에 처했다. 고 이장백 옹을 비롯한 용당리 당곡마을 주민들이 인근 천태산 비석골에 사당을 모시고 밤중에 몰래 지게를 지고 제수를 운반하여 제향을 올리며 가까스로 그 명맥을 이어왔다. 현재는 ‘가야진 용신제 보존회’ 김진규 회장(제례 보유자), 박홍기 사무국장(예능 보유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활성화되고 있다. 삼국사기 권 32 제사(祭祀)조에는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를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구분하고 있다. 대사에 삼산(三山)이 있고, 중사에는 오악(五岳)을 필두로 사진(四鎭), 사해(四海), 사독(四瀆), 그리고 표제(標題)가 없는 6개의 산(山), 성(城), 진(鎭)이 있으며, 소사에는 24개의 산이 있다. 대사는 나라의 수도인 왕경을 방호하고, 중사는 국토를 방호하고 소사는 지역을 방호하였다고 한다. 가야진은 중사의 사독에 해당하며 사독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 있는 큰 하천을 가리킨다. 고대에 있어서 양산은 낙동강을 경계로 서로는 가야, 바다를 경계로 남으로는 왜구와 대치하는 등 신라의 국방상으로 매우 중요한 국경지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의 사전(祀典)제도에도 대사, 중사, 소사를 두었으며, 양산의 가야진은 역시 중사의 사독에 해당하여 해마다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소재관(所在官 :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가야진은 공주(公州) 웅진과 함께 남독(南瀆)으로 삼았으며 중사(中祀)로 중요시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 22 양산군 산천조(山川條)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가야진을 소개하고 있다. `가야진은 일명 옥지연(玉池淵)이라고도 하며, 고을 서쪽 40리 황산강 상류에 있다. 우리 세종조 때 황룡이 물속에 나타났으며, 가물 때 비를 빌면 문득 효험이 있었다.` 중종 11년 4월의 기록에도 가뭄으로 팔도의 악해독(嶽海瀆)의 신에게 빌었다고 하는 기록이 나온다. 2. 스토리텔링의 보고인 용의 전설 옛날 양산고을 사또가 대구의 경상감사에게 서신을 전하기 위해 한 전령을 보냈다. 전령이 가는 도중에 절세가인이 미행하고 있음을 알고 마음이 끌렸다. 해질 무렵 용당에 도착하였고, 그 곳 주막에 숙소를 정하니 아니나 다를까 따라온 미인도 옆방에 숙소를 정하는 것이었다. 전령은 미인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까지 뒤척이다 답답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미인이 투숙한 방을 보려고 문을 열었다. 바로 그때 마당 한가운데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놀란 전령이 정신을 가다듬고 구렁이에게 연유를 물었더니 청룡이 대답을 하였다. "저는 황산강 용소에 사는 황룡의 본처입니다. 당신을 뒤따른 이유는 간곡한 청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남편 되는 황룡이 첩을 좋아해 내일 첩이 되는 청룡을 데리고 승천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제가 내일 정오에 황룡과 청룡을 용소에서 싸움을 붙일 터이니, 당신이 내일 아침 일찍 용당장에 가서 첫눈에 보이는 물건을 구입하여 배를 타고 용소로 와서 두 용이 싸울 때 부디 첩인 청룡을 죽여주길 부탁합니다. 만일 이 약속을 이행하면 당신에게 복이 따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신변에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이 말을 남기고 미녀로 변신했던 구렁이(청룡)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음날 전령은 장터에 가서 첫눈에 보이는 큰 장대 낫을 사 가지고 정오경에 배를 타고 용소로 나갔다. 때마침 강물이 끓어오르면서 황룡(남편 용)과 청룡(첩용)이 강물 위로 솟구쳐 올라 싸움을 하므로 엉겁결에 낫을 내리쳤으나 첩용이 아닌 남편 용을 죽이고 말았다. 뜻하지 않은 실수로 청용의 요청과는 정반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노한 청룡은 남편을 죽인 전령에게 용궁으로 갈 것을 강요했다. 전령은 벙거지와 장대낫 등을 용당의 가야진사 앞 강변에 버리고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 일이 있은 후 용당마을에는 가뭄이 지속되거나 각종 변고가 발생하였다. 주민들은 용을 달래는 제례를 지냄으로써 재앙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가야진사의 낙동강 건너편 마을은 김해시 상동면 여차리인데, 옛날에 나루터가 있었다. 김해 대동 동대구간 민자고속도로 밑을 지나면 용산마을이다. 마을회관과 경로당을 지나면 길은 여차제방으로 막히는데 이 근처에 옛날 용당나루터가 있었다. 양산에도 가야진사가 있는 곳이 원동면 용당마을이다. 낙동강을 마주한 마을에 용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두 마을의 용은 서로 분리되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합해져야만 하나의 완벽한 용이 된다. 양산이 숫룡, 김해가 암룡이란 말이 주민들 사이에 전승되어왔다. 3. 가야진 용신제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탈락에 대한 사유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는 일정한 형태가 없는 문화재를 의미한다. 국가무형문화재는 보존 가치가 크다고 인정되는 문화적 소산 가운데 국가에서 문화재로서 지정한 것을 말한다.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온 무형의 문화적 유산은 전통적 공연・예술, 공예, 미술 등에 관한 전통기술, 한의약, 농경・어로 등에 관한 전통지식, 구전 전통 및 표현, 의식주 등 전통적 생활관습, 민간신앙 등 사회적 의식(儀式), 전통적 놀이・축제 및 기예·무예 분야로 나뉘어 있다.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높은 가치와 문화적 기능을 지닌 사람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하여 그 기능을 후계자에게 전수할 수 있도록 하며, 그 비용은 국가가 부담한다. 문화재보호법, 제5조에 따르면 중요무형문화재의 지정은 문화재를 지정할 때 그 문화재의 보유자를 인정해야 하며 또 추가로 인정할 수 있다. 양산시는 2019년 12월 8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가야진 용신제의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단체종목 지정을 위한 ‘지정 가치 지표조사’ 결과 ‘국가 문화재로서의 지정 가치가 없다’는 공문을 받았다고 발표하여 기대를 걸었던 가야진 용신제 관계자들과 양산시민들이 크게 낙담하였다. 2015년 첫 번째 탈락에 이어 두 번째라 아쉬움이 더욱 컸다. 문재인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에 대한 관심과 예산지원으로 가야문화권인 경남북, 전라도 지역에서는 앞다투어 지역의 가야문화 발굴과 복원에 나섰다. 양산시 역시 가야문화권에 속해 있어서 북정동 고분군과 신기동 고분군 발굴을 진행해왔다. 또한 가야진 용신제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추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실패의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문화재청에서 1999년 이후 국가지정문화재 단체종목 승격이 없어 불리했으며, 문화재청이 가야진 용신제에 대해 ‘국가 제례의식에 풍물놀이 등 민속학이 추가로 담겨 국가 문화재로서의 지정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문화재 위원들의 고루하고 편협한 시각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제례, 기우제, 풍물놀이, 대동제가 조화된 보존가치가 높은 문화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였다. 문화재청에서 하는 일이 합리성이 결여되어 비판받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가야진 용신제는 탈락했지만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로 무형문화재 보유자 9명과 보유단체 4개를 새로 인정하였다. 이 가운데 승무, 태평무, 살풀이춤, 제와장은 기존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고 김천금릉빗내농악과 남원농악은 올해 9월 승격되면서 새로 국가무형문화재가 됐다. 삼베짜기와 불복장작법은 신규로 올해 처음 지정된 국가무형문화재다. 문화재청은 보유자 후보 11명을 선정했는데 명단에 태평무 종목 양성옥씨가 올라 논란이 됐다. 문화재청은 앞서 4년 전인 2015년 12월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에 관한 보유자 11명에 관한 인정 심사를 진행하고 이 가운데 양씨만 보유자로 인정 예고했다. 탈락한 다른 후보들을 중심으로 무용계 일각이 이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결국 이듬해 인정을 철회한 바 있다. 승무 종목에서는 전수교육조교가 아닌 이수자 채상묵씨가 보유자가 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양산 갑구의 국회의원선거에서 윤영석 후보자, 이재영 후보자 모두 가야진사가 있는 원동면 출신이다. 공단 조성, 교통문제 해결, 부산대 부지 문제에 대한 공약을 경쟁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가야진 용신제 국가유형문화재 승격 등 문화 부문 공약에도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양산 시…

양산 시목(市木)인 이팝나무는 시화보다는 인지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왜냐하면 양산시내 중요도로의 가로수, 황산공원의 조경수, 아파트단지나 공원의 조경수로 많이 식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양산 시화인 목련꽃에 대한 대접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학 박사 심 상 도 1. 양산 시화로 목련을 지정해놓고 홍보에 무관심한 양산시 양산 시화(市花)는 목련으로 양산시청 홈페이지의 양산소개 중 상징물에서 시기(市旗) 다음으로 소개되고 있다. 1981년 6월 15일에 시목인 이팝나무와 함께 지정되었다. 2020년 2월 말 기준으로 양산시 인구는 351,457명인데, 과연 양산시민 중에서 양산 시화로 목련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양산 시목(市木)인 이팝나무는 시화보다는 인지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왜냐하면 양산시내 중요도로의 가로수, 황산공원의 조경수, 아파트단지나 공원의 조경수로 많이 식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목련의 특징 및 시화 지정 사유를 보면 ‘꽃은 백색이며 4월 중순 잎이 나오기 전에 피며 열매는 9~10월에 익는다. 꽃은 부드럽고 너그러운 시민 상을 상징하며 푸른 잎은 시민의 여력성을 뜻하고 줄기는 상부상조의 단결심을 나타낸다.’고 나와 있다. ‘여력성’은 일반인이 얼핏 쉽게 이해하기 힘든 단어이다. 사전에서 뜻을 알아보면 여력(餘力)은 ‘어떤 일에 주력하고 아직 남아 있는 힘’을 의미한다. 즉, 푸른 잎은 시민의 여력성을 뜻한다는 말은 양산시민의 남아 있는 힘으로 해석된다. 굳이 어려운 단어를 쓰지 말고 ‘푸른 잎은 시민의 생생한 활력을 뜻하고’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는 ‘푸른 잎은 시민의 힘찬 역동성을 뜻하고’와 같은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바꿔도 무방할 것 같다. 양산 시화로 목련꽃을 지정만 해놓았지 시민들에 대한 홍보는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있다. 3월 19일 양산시청을 방문해보니 양산 시목인 이팝나무가 있는 시청정원에 작은 목련나무 한 그루에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양산 시목인 이팝나무 아래에는 시목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었지만 시화인 목련에 대한 안내판은 없었다. 시청에 있는 시목인 이팝나무는 굉장히 큰 나무이고, 꽃이 활짝 피면 매우 아름답다. 반면 시화인 목련나무는 볼품없이 작은 나무에 불과하다. 혹시 시청 내에 다른 곳에 큰 나무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양산문화예술회관에서 주차장으로 가는 길목에 조금 더 큰 목련이 있었다. 그리고 주차장 왼쪽의 고속도로 다리 밑으로 가는 도로변 울타리에 목련이 4그루가 있었다. 양산에는 여러 곳에 큰 목련이 많이 자라고 있으므로 소유주의 협조를 받아서 수형이 아름답고 건강한 목련을 시청 정원에 이식하여 시화를 적극 홍보하는 대책을 강구해야 하겠다. 필자가 양산시를 여러 곳 방문해보니 원동면 화제리, 원리 등에 아주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목련나무가 많이 눈에 띄었다. 양산시 인구가 35만 명을 넘었고, 향후 50만 명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시화인 목련꽃을 시민들이 잘 알고 자주 볼 수 있도록 많이 심어야겠다. 한편 양산 시화, 시목 공원을 조성하는 것도 고려해야만 한다. 시민 대부분이 외지에서 왔기 때문에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 시화, 시목 홍보는 절실하며, 애향심을 기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2. 목련의 특색과 전설 목련의 꽃말은 숭고한 정신, 고귀함, 자연애, 연모(戀慕), 연정(戀情), 자주색 목련 꽃말은 믿음이다. 겨울을 막 벗어나 웬만한 나무는 잎눈조차 틔우지 못한 3월에 홀로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서 꽃망울을 터트린다. 순백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 사람들에게 봄 소식을 전한다. 매화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흰색의 꽃은 청순미를 자랑한다. 목련(木蓮)은 나무에 피는 연꽃이라고 하여 목련이라고 했다. 아름도 다양하여 옥처럼 깨끗하다고 '옥수', 난초 같은 향기가 있다고 '옥란', 꽃봉오리가 붓끝을 닮았고 '목필' 등으로 불린다. 꽃이 피어나는 방향이 모두 북쪽이라 '북향화'라고도 한다. 백목련은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다고 영춘화(迎春花)라고도 하고, 자목련은 봄이 끝나갈 무렵에 핀다고 망춘화(亡春花)라고 한다. 목련은 우리나라 제주 숲속에 드물게 자생하는 나무로 꽃이 백목련에 비해 화려하지 않아 주로 수목원에서 자원용으로 식재되어 관리되고 있다. 자생 목련은 화피 밑 부분에 연한 붉은 줄이 있고 활짝 피지 않는 특징이다. 목련은 교목으로 크게는 20m 넘게 자라는 개체도 있다. 우리가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는 것은 백목련이다. 백목련은 중국 원산으로 꽃이 아름다워 인가 주변에 가장 많이 식재되어 있다. 목련과 다르게 화피 아래쪽에 붉은 줄이 없고 만개하면 꽃잎이 뒤로 젖혀질 정도로 활짝 핀다. 또한 잎 끝이 거북꼬리처럼 뾰족하게 생긴 게 목련과 다른 점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비교적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목련 중에 자주목련이 있다. 자주목련은 백목련의 다른 품종으로 화피 바깥쪽은 자주색이고 화피 안쪽은 흰색인 게 특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주목련을 '자목련'이라 잘못 부르는데, 자목련은 따로 있다. 중국 원산인 자목련은 쉽게 볼 수 없으며, 자목련은 화피의 겉과 속이 모두 자주색이다. 목련꽃이 피기 전의 꽃망울을 신이(辛夷)라 한다. 이 신이가 알레르기 비염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 백목련 꽃봉오리를 말려 두었다가 차를 해서 마시면 축농증, 만성비염에 좋다. 꽃봉오리가 맺는 시기를 지나 꽃 피운 것을 약으로 쓰면 고혈압을 예방하는 데도 효과가 있다. 목련에 코로나 19 바이러스를 치료할 수 있는 성분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 김수로왕(金首露王) 7년(서기48) 7월 27일 기록에 보면 아직도 장가를 들지 않고 총각인 임금을 딱하게 여긴 신하들이 장가들 것을 권하자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니 짝을 얻는 것도 하늘의 뜻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점잖게 거절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바다 서쪽에서 붉은 돛을 단 배가 붉은 깃발을 휘날리면서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왕은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어 목련(목련나무)으로 만든 키를 정돈하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가서 그들을 맞아들였다. 배 안에는 아리따운 공주가 타고 있었는데, 이 분이 바로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으로서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왕비가 된다. 꽃이 아닌 나무로서 목련나무의 쓰임새로는 최초의 기록이다. 충남 태안군 소원면 천리포1길 187 천리포수목원에서는 매년 4월에 목련축제가 열린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식물종(16,752 분류군)을 보유하고 있는 천리포수목원은 서해바다와 접하고 있어 바다와 숲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올해 840 분류군의 목련이 따사로운 봄 햇살을 받아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한국 최대의 무려 400여 종류의 목련나무를 보유하고 있다. 비공개 지역을 포함한 전체 면적이 17만 평에 이르는 천리포수목원은 ‘푸른 눈의 한국인’으로 불렸던 고(故) 민병갈 (미국명 : Carl Ferris Miller) 원장이 40여 년 동안 정성을 쏟아 일궈낸 우리나라 1세대 수목원이다. 천리포수목원은 2000년 세계에서는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인증받았다. 2010년에는 G20 정상회담을 맞아 한국농어촌공사로부터 국내 수목원으로는 유일하게 관광명소로 선정되기도 했다. 목련꽃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하늘나라에 아름다운 공주가 살고 있었다. 공주의 아름다움과 착한 마음씨에 이끌린 하늘나라의 젊은이들은 공주에게 구애를 하였다. 그러나 공주는 늠름한 젊은이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공주는 언젠가 북쪽 마을의 바다지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의 늠름한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다지기는 이미 결혼을 하여 아내가 있었다. 그러나 착하고 예쁜 공주는 그의 건장한 모습에만 홀딱 반해서 마음속에는 오직 바다지기뿐이었다. 어느 날 밤 공주는 아무도 몰래 궁궐을 빠져나와 바다지기가 사는 먼 곳으로 길을 떠났다. 공주는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곳에 도착해서야 공주는 바다지기가 결혼해서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공주는 너무나 실망이 커서 안타까운 심정을 혼자서 달래지 못하고 결국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바다지기는 뒤늦게야 그런 사실을 알았다. 바다지기는 공주의 사랑에 감동하여 시체를 거두어다가 잘 묻어 주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바다지기는 그 날부터 기운이 없어 보였고 말도 잘 하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걱정되어 왜 그러냐고 자꾸 물어보았으나, 그는 그런 아내를 점점 귀찮아하기 시작했고 결국 아내에게 잠자는 약을 먹여 아내를 죽이고 말았다. 하늘나라의 왕은 나중에야 딸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래서 바다지기를 사모해 죽은 공주와 바다지기의 아내를 꽃으로 태어나게 했다. 공주의 넋은 하얀 백목련(白木蓮)으로, 바다지기 아내의 넋은 자줏빛 목련인 자목련(紫木蓮)이 되었다고 한다. 3. 목련꽃과 관련된 아름다운 시 4월의 노래 - 박목월 -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아 멀리 떠나와 이름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낙화 - 나태주 - 너 내게서 떠나는 날 꽃이 피는 날이었으면 좋겠네 꽃 가운데서도 목련꽃 하늘과 땅 위에 새하얀 꽃등 밝히듯 피어오른 그런 봄날이었으면 좋겠네 너 내게서 떠나는 날 나 울지 않았으면 좋겠네 잘 갔다 오라고 다녀오라고 하루치기 여행을 떠나는 사람 가볍게 손 흔들듯 그렇게 떠나보냈으면 좋겠네 그렇다 해도 정말 마음속에서는 너도 모르게 꽃이 지고 있겠지 새햐얀 목련꽃 흐득흐득 울음 삼키듯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려앉겠지 목련화 가곡 - 작사 조영식, 작곡 김동진, 노래 엄정행 - 1. 오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희고 순결한 그대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 길잡이 목련화는 새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오 내사랑 목련화 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처럼 순결하게 그대처럼 강하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라 2. 오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내일을 바라 보면서 하늘 보고 웃음 짓고 함께 피고 함께 지니 인생의 귀감이로다 그대 맑고 향긋한 향기 온누리 적시네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처럼 우아하게 그대처럼 향기롭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값있게 살아가리 오 내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사랑 목련화야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값있게 살아가리라.

양산의 아름다운 벚꽃과 진달래꽃/…

양산의 아름다운 벚꽃과 진달래꽃/심상도/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

1. 양산에서 가장 빨리 피는 유광화성의 벚꽃양산 유산일반산업단지의 ㈜유광화성 정원에 있는 벚나무가 양산에서 매년 꽃을 가장 빨리 피운다. 12년 근무한 직원 금동화 씨에게 물어보니 벚나무 수령은 2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정원에는 또 한 그루의 벚나무가 있지만 훨씬 늦게 핀다고 한다. 벚나무는 양산천 옆 충렬로 도로변의 양지바르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있어 개화가 빠른 것으로 추측되나 원래 품종이 독특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지난 3월 14일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니 몇 개의 가지에 벚꽃이 피어 있었다. 3월 18일에 방문하여 사진을 찍었는데, 완전 만개 상태였다. 직원 금동화 씨에 의하면 이미 3일 전에 만개하였다고 한다. 인쿠르트(Incruit) 채용정보에 의하면 1996년 11월 25일에 설립되었으며, 종업원은 21명이다. 2018년 기준 자본금 7억 6,401만 원, 매출액 69억 744만 원, 순이익 248만 원으로 나타나고 있다. 금동화 씨에 의하면 생산제품은 고무화합물이고, 외국에 수출도 하고 국내업체에 공급한다고 한다. 코로나 19사태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정상가동되고 있어 다행이었다.화연인증원에서 품경영시스템 인증을 받았다. 한국화시험연구원에서 품질보증업체로 지정되었다. 하나은행에서 유망중소기업으로 인정하였다. 필자가 볼때 (주)유광화성은 작지만 탄탄한 강소기업으로 세계적인 코로나 19 전염병 확산에 의한 경제위기를 잘 극복해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양산일반산업단지, 어곡일반산업단지에 수많은 공장이 있지만 공장 안에 화단을 조성하고, 초화류와 꽃나무를 심어놓은 공장은 흔치 않다. (주)유광화성은 박지석 대표와 직원들이 꽃과 식물을 귀하게 여기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니고 있어 귀감이 되고 있다. 근무허기 좋은 직장으로 보인다.2. 김소월의 진달래꽃봄이 오면 전국 곳곳의 산하에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요즘 산이 많은 양산에도 온통 진달래꽃이 붉은 피를 토하듯 앞다퉈 꽃을 피우고 있다. 필자는 진달래꽃을 찾아 임경대, 어곡공단에서 화제리로 넘어가는 새미기고개에서 마고산성으로 올라가면서 진달래꽃을 사진에 담았다. 진달래꽃 하면 먼저 떠오르는 시인은 김소월이다. 진달래꽃은 국민들이 아끼며 애송하는 시다. 김소월(金素月)의 본명은 정식(廷湜)으로 평안북도 구성에서 1902년 8월 6일(음력)에 태어났다.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도쿄상대[東京商大]에 입학하였으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오산학교 시절에 조만식(曺晩植)을 교장으로 서춘(徐椿), 이돈화(李敦化), 김억(金億)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그의 시재(詩才)를 인정한 김억을 만난 것이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소월이 두 살 나던 1904년 정주와 곽산을 잇는 철도를 부설하던 공사장에서 일본인들에게 폭행당해 정신이상자가 됐다. 할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자란 소월은 오산학교 2학년이던 1916년 14세에 할아버지 친구 홍명희의 딸 홍단실과 결혼했다. 당시 그는 오순이라는 세 살 연상의 소녀와 연정을 나누고 지내던 터였다고 한다. 시작활동은 1920년『창조(創造)』에 시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춘강(春崗)」 등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작품발표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22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인데, 주로 『개벽』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로는, 1922년『개벽』에 실린 「금잔디」, 「첫치마」,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개여울」, 「제비」, 「강촌(江村)」 등이 있고, 1923년 같은 잡지에 실린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삭주구성(朔州龜城)」, 「가는 길」, 「산(山)」, 『배재』 2호의 「접동」, 『신천지(新天地)』의 「왕십리(往十里)」 등이 있다. 그 뒤 김억을 위시한 『영대(靈臺)』 동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에 발표한 대표적 작품들을 게재지별로 살펴보면, 『영대』에 「밭고랑 위에서」(1924), 「꽃촉(燭)불 켜는 밤」(1925), 「무신(無信)」(1925) 등을 『동아일보』에 발표, 「나무리벌노래」(1924), 「옷과 밥과 자유」(1925)를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발표, 「물마름」(1925)을 『문명(文明)』에 발표, 「지연(紙鳶)」(1925)을 발표하였다. 1925년에 그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매문사(賣文社)에서 간행되었다. 소월의 조부가 하던 광산사업이 실패하였다. 소월은 구성군(郡) 남시(南市)에서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하였으나 운영에 실패하였으며, 그 후 실의의 나날을 술로 달래는 생활을 하였다. 33세 되던 1934년 12월 23일 부인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는데, 이튿날 음독자살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삶의 의욕을 잃고 술만 마시다 32세로 요절했다. 불과 5, 6년 남짓한 짧은 문단생활 동안 그는 154 편의 시와 시론(詩論) ‘시혼(詩魂’을 남겼다. 평론가 조연현(趙演鉉)은 “그 왕성한 창작적 의욕과 그 작품의 전통적 가치를 고려해 볼 때, 1920년대에 있어서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이었다”고 평하였다.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시비가 서울 남산에 세워져 있다. 저서로 생전에 출간한 『진달래꽃』 외에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1939), 하동호(河東鎬)·백순재(白淳在) 공편의 『못잊을 그사람』(1966)이 있다. 진달래꽃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영변(寧邊)에 약산 (藥山)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이 시의 화자는 이별의 슬픔을 감내하면서 임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은근히 드러내는 인종(忍從)적인 여성의 어조를 보이고 있다. '진달래꽃'은 김소월의 대표작으로, 이별의 슬픔을 인종의 의지로 극복해 내는 여성 화자를 설정하여 이별의 정한이라는 문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 시는 '이별의 정한(情恨)'을 민요조의 7·5조 3음보 율격으로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의 화자는 어조와 태도를 통해 여성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표면적으로는 임과 이별하더라도 그 슬픔을 참고 견디겠다는 인종과 체념의 자세를 보여 준다. 특히 '드리우리다', '뿌리우리다', '가시옵소서', '흘리우리다' 등 여성적 어조의 종결형을 통해 더욱 애절하고 간절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시적 화자의 이러한 정서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가시리', '서경별곡(西京別曲)', '아리랑'으로 계승되어 면면히 흘러내려 오는 우리 민족의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정서인 '이별의 정한(情恨)'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또, 꽃을 뿌리는 행위는 향가 '도솔가( 率歌)'의 '산화공덕(散花功德)'과 관련시킬 수 있다. 진달래의 꽃말은 ‘사랑의 기쁨’이다. 전국 어디서나 아름답고 화려한 진달래꽃을 볼 수 있다. 진달래는 꽃잎으로 차를 끓여 마시거나 화전을 지져 먹을 수도 있으며 꽃이 피어있을 땐 잎이 없는 것이 꽃과 잎이 같이 피는 철쭉과 다르다. 철쭉꽃에는 독성이 있어 먹을 수 없다. 필자도 어린 시절 산으로 돌아다니며 진달래꽃을 따먹기도 하였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두연대와…

두연대지(斗淵臺址)는 임진왜란 당시 전공을 세운 최흥국 선생이 자신이 거처하는 집 곁에 지은 정자터다. 남계 최흥국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양산으로 귀향하여 한강 정구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망우당 곽재우 등과 함께 화왕성 전투 등에 참전하여 전략을 세우고 진두지휘하여 전공을 세웠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두연대와 최흥국 선생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학 박사 심 상 도 1. 두연대를 건립하고 후진 양성에 힘쓴 최흥국 선생 두연대지(斗淵臺址)는 임진왜란 당시 전공을 세운 최흥국 선생이 자신이 거처하는 집 곁에 지은 정자터다. 남계 최흥국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양산으로 귀향하여 한강 정구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망우당 곽재우 등과 함께 화왕성 전투 등에 참전하여 전략을 세우고 진두지휘하여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최흥국은 공신 책봉을 사양하고 현재의 양산시 어곡동 지역으로 와 자신이 거처하는 집 곁에 두연대라는 정자를 짓고, 양산의 사호(四豪)라 일컫는 안근(安瑾), 이수생(李秀生), 이몽란(李夢鸞) 등과 함께 후학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두연대와 관련하여 일야당(一也堂) 안효필(安孝弼)의 시가 전하고 있다. 현재 두연대는 터만 남아 있으며, 1997년 어곡리 4차선 도로 확장공사에 의해 옮겨진 두연대유허비가 유산천 개울가 동편에 자리하고 있다. 두연대는 2002년 5월 10일 조성된 어곡주민공원에 있다. 공원에는 야외무대, 체육시설, 화장실, 실내 게이트볼장, 산책로, 어실교 등이 설치되어 있다. 농협 어곡동지점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조금 걸어가면 두연대 유허비를 만날 수 있다. 1077번 지방도로에서 유산천 위에 설치된 도보 전용 어실교를 건너서 갈 수도 있다. 양산천 자전거도로를 따라서 유산천으로 진입하면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있다. 어곡공단 방향으로 계속 올라오면 어곡주민공원 안에 있는 두연대유허비를 볼 수 있다. 최흥국은 자가 강후(康侯)고 호는 남계(南溪)로 1550년(명종 5) 4월 6일, 양산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경주로 고운 최치원 선생의 후손이다. 1588년(선조 21) 33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주, 화왕산, 팔공산 등지에서 대구의 손처약(孫處約). 손린(孫遴), 밀양의 손기양(孫起陽), 박수춘(朴壽春) 등과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이러한 의병활동을 연고로 그는 전후 대구부 창산동(昌山洞)에 피난하며 거주했다. 남계 최흥국은 대구 유림들과 갈등 없는 관계를 유지했으며 특히 손처눌을 중심으로 좌도와 우도를 잇는 문화적 교량역할을 하였다. 남계는 대구의 문인들과 폭넓은 교유를 하였고 17세기 대구 문화의 발전에 기여했다. 박세욱의 연구에 따르면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의 모당일기(慕堂日記)에 최흥국 선생과 관련된 활동 기록이 많이 나온다. 모당(慕堂)은 30년간 자신의 삶을 기록한 일기를 보면 25년 동안 강후(康侯) 최흥국(崔興國) 선생과 교유(交遊)했다. 모당일기는 17세기 대구지역 유학 중흥의 과정을 보여주는 가장 생생한 기록으로 평가된다. 모당의 일기를 통해 보면 최강후는 임진왜란 이후 모당이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과 더불어 대구지역의 유학을 재건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를 함께하며 활발하게 교유하였다. 모당은 남계보다 세 살 아래지만 친구로서 약 13년 동안 자주 만나서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짓고, 술을 마시고, 명승지와 사찰을 유람하며 우정을 돈독히 하였다. 모당의 기록에는 남계의 활동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아쉽게도 남계의 문집이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2. 최흥국 선생의 스승 한강 정구 최흥국 선생이 스승으로 모신 한강 정구는 조선시대의 저명한 유학자였다. 정구(鄭逑, 1543년~1620년)는 호가 한강(寒岡), 시호가 문목(文穆)이다.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하였다. 13세인 1555년 성주향교 교수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건(乾), 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 나머지 괘는 유추해 스스로 깨달았다고 한다. 1563년에 이황(李滉)을, 1566년에 조식(曺植)을 찾아 뵙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 무렵 성운(成運)을 찾아 뵙기도 하였다. 156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김우옹(金宇顒)이 추천해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는 등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어도 사양하다가 1580년 창녕현감, 1584년 동복현감을 거쳐, 이듬해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으로 『소학언해』·『사서언해』 등의 교정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1593년 선조의 형인 하릉군(河陵君)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 강원도관찰사, 형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냈다. 학문은 성리학과 예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 역사, 산수(算數), 병진(兵陳), 의약(醫藥), 복서(卜筮), 풍수지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박학하였다. 문인으로는 서사원(徐思遠), 송원기(宋遠器), 손처눌(孫處訥), 한준겸(韓浚謙), 문위(文緯), 장흥효(張興孝), 이윤우(李潤雨), 허목(許穆), 황종해(黃宗海) 등이 있다. 최흥국 선생이 교유한 학자들은 한강 정구, 낙재 서사원, 여헌 장현광, 괴헌 곽재겸, 아헌 송원기, 문탄 손린, 오매정 손처약, 동고 서사선, 국담 박수춘, 귀정 류사온, 사월당 류시번, 쌍벽당 이원생 등이 있다. 곽재겸(郭再謙)은 의병장 곽재우의 사촌형으로 역시 임란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곽재겸은 벼슬을 사양하고 대구 해안(解顔, 현재 대구시 동구)에서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여 17세기 대구 유학 중흥에 일조하였다. 곽재겸은 대구지역 문인으로는 가장 일찍 최흥국과 교유하였다. 남계가 대구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양산으로 돌아간 것은 정구 선생이 봉산욕행을 했던 해인 1617년 1월이었다. 남계는 고향인 양산에 돌아가서도 정구 선생의 봉산욕행의 과정에서 교유의 흔적을 남겼고 대구와의 교류를 끊지 않고 봄가을의 중요한 행사에 참여하며 좌도와 우도의 교량역할을 하였다. 사월당선생문집(沙月堂先生文集) 연보(年譜)에 따르면 1617년 7월 ”한강 선생을 모시고 온정(溫井)에 목욕하러 가다“란 조 아래 남계 최흥국 일기에 한강 선생이 온천으로 떠났는데 뒤따라오는 벗들이 있었다. 손처약, 정사상, 도여유, 허사중, 류시번, 이종노, 김응명, 이난귀, 정헌도, 이상진 약간의 사람들이다. 류연정은 당시 감기를 앓고 있었으나 아픈 몸을 부축하여 배알하러 왔다. 3. 최흥국 선생이 참전한 화왕성 전투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이끄는 화왕성 전투에 최흥국 선생이 참전하였다.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화왕산 일대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이 있다. 이 성곽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64호로 지정되었다. 명나라와 왜의 화의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1597년 즉 정유년 정월에 왜적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이제는 의병장이 아니라 방어사가 된 곽재우 장군은 그해 7월 21일, 밀양, 영산, 창녕, 현풍의 네 고을 피난민과 병력을 거느리고 화왕산성으로 들어가는 청야(淸野) 전술을 펼쳤다. 가토 기요마사 군대는 울산을 점령한 뒤 창녕, 합천을 거쳐 전라도로 들어가 남해로 건너온 병력과 합세해 남원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의 창과 칼은 햇빛에 빛나고 깃발은 들을 덮었으며, 들을 채우고 이어지는 행렬이 눈길 닿는 데까지 끝이 없을 정도로 기세등등하게 곽재우가 농성하던 화왕산성 부근으로 들이닥쳤다. 왜장의 당면 목적은 한시바삐 전라도 남원으로 진격해 그곳을 함락하는 데 있었으므로 화왕산성을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았다.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난 곽재우 장군이 지키던 화왕산성을 공략하며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곽재우 장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가토군은 하루 밤낮 동안만 화왕산성 일대에서 군사 시위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산성의 형세가 험난하고 조선군의 진영이 잘 갖추어진 모습을 보고는 공격을 하지 않고 떠났다. 계획대로 가토 군대는 순조롭게 진군해 8월 1일에 안음의 황석산성을 격파하고, 호남에 진출해 남원을 쳤다. 하영휘 박사는 화왕산성 전투가 성을 무사히 지켜내기는 했지만 적의 앞길을 막거나 타격을 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크게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홍의장군으로 알려진 곽재우 장군 때문에 왜군은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덕분에 큰 전투 없이 화왕산성 안의 군사들과 피난 온 백성들도 무사하였다. 진주성 혈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것을 생각하면 방어를 잘 한 것도 큰 공이라 할 수 있다. 최흥국 선생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임진왜란 때 구국의 일념으로 화왕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공신 책봉을 사양한 것은 후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역대 정부의 고위관료, 공공기관 간부, 정치인들의 자질이 떨어지고, 심지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뇌물을 받고 범죄를 저질러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나라를 구하려는 충정에서 목숨 걸고 싸우고 논공행상에 참여하지 않은 최흥국 선생은 진정한 애국자였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물금읍 …

물금읍 신도시에는 고층아파트가 즐비하고 도로망도 잘 구축되어 있으며, 각종 편의시설과 양산부산대병원도 있어 생활하기에 편리하다. 그러나 물금읍의 원도심이자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물금읍 동부마을, 서부마을은 옛 모습을 간직하며 발전과 동떨어져 있다. 물금역을 지나 구도심으로 진입하면 마치 금방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느낌이 든다. 시간이 멈춘듯한 지역이다. 한 마디로 이곳은 첨단의 물금 신도시와는 딴판으로 소외되고 낙후한 마을이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물금읍 동부마을과 서부마을의 발전 방안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1. 현대적 물금 신도시에서 가장 낙후된 동부마을, 서부마을 물금읍 신도시에는 고층아파트가 즐비하고 도로망도 잘 구축되어 있으며, 각종 편의시설과 양산부산대병원도 있어 생활하기에 편리하다. 그러나 물금읍의 원도심이자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물금읍 동부마을, 서부마을은 옛 모습을 간직하며 발전과 동떨어져 있다. 물금역을 지나 구도심으로 진입하면 마치 금방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느낌이 든다. 시간이 멈춘듯한 지역이다. 한 마디로 이곳은 첨단의 물금 신도시와는 딴판으로 소외되고 낙후한 마을이다.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안고 생활하고 있다. 과거에 허허벌판이고 논밭이었던 신도시 지역은 계획도시로 우후죽순 고층아파트가 들어섰고, 경부선 철도 물금역 주변의 원도심은 정반대로 개발에서 소외되어 주민들이 상대적 박탈감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과거 한때 물금역 주변은 양산에서 사람과 물류의 이동이 가장 활발하고, 상권이 활성화된 지역이었다. 이제는 반대로 신도시 개발로 주변 지역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동안 원도심인 동부마을과 서부마을은 정체도 아닌 퇴보를 거듭하는 사이에 마을의 젊은이는 신도시로 떠나고 연로한 계층들만이 모여 사는 외딴 섬처럼 변했다. 마치 양산시에서는 물금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의 마을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하여 첨단도시와 비교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구도심 마을에 대한 투자와 개발을 억제하며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금읍 동부마을과 서부마을의 도시계획 미집행으로 지역의 낙후성은 매우 심각하다. ‘장기 미집행 도시계획시설 일몰제’를 규정한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국토계획법) 조항이 합헌 결정을 받았다. 도시계획시설 일몰제는 도시계획시설로 지정하고도 20년이 지나도록 사업을 집행하지 않으면 도시계획시설 지정을 취소하도록 하는 제도다. 물금읍의 동부마을과 서부마을 주민들도 헌법에 입각하여 양산시민으로서 정당한 복지혜택을 받고, 환경권을 누리며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나갈 당당한 권리가 있다. 필자는 동부마을과 서부마을 주민들의 억울하고 소외된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주민대표를 통해 듣고 2018년에 두 번에 걸쳐 마을의 실상에 대해 양산신문에 칼럼을 쓴 바 있다. 지난 3월 7일 마을 대표들이 필자에게 윤영석 국회의원에게 제출하는 청원서에 서명을 해달라고 요청하여 흔쾌히 응하였다. 3월 8일에는 그간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서부마을의 옥영호 씨 농막을 방문하여 주민 대표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백대현 김영자 부부, 박갑원 류순란 부부, 옥영호 최혜경 부부, 윤경석 씨 등과 만났다. 그동안 양산시, 양산시의회, 물금읍사무소, 나동연 전 시장, 김일권 시장에게 도시계획시설과 관련하여 민원을 제기한 내용을 들었다. 답변은 대체로 상투적이고 의례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동부마을과 서부마을도 신도시 계획에 포함하여 개발하였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개발을 억제하며 방치하다가 주민들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자 무책임한 미봉책으로 일관하고 있어 문제다. 1. 주민들의 도시계획도로 개설 요구에 대한 양산시 답변 주민 박갑원 씨가 제안한 민원(2016년 10월 14일 접수)에 대한 양산시의 답변(주무관 박희지, 정책기획담당 김진일, 기획관 박창일)은 다음과 같다. 물금 서부마을 언덕 일대는 1986.5.20.(경상남도 고시 제1986-109호)로 용도지역(제1종 일반주거지역) 지정 및 이에 적합한 기반시설(도로, 공원, 녹지 등)이 결정되었으며, 상기 지역은 용도지역 지정 이후 미개발지로서 개발여부가 불투명한 현 시점에서는 기반시설 확충은 어려운 실정이나 현재 추진 중인 2020 양산 도시관리계획 재정비 시 주변여건, 토지이용, 시설입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주민 박갑원 씨가 요청한 도로개설 민원(2017년 11월 1일 접수)에 대한 양산시 물금읍장의 답변(주무관 문경곤, 환경담당 권수현, 총무과장 최기주, 물금읍장 박종태)은 다음과 같다. 귀하께서 요청하신 도시계획도로는 현재 교통 수요, 주변 상황, 우리 시 재정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현 시점에서 조기개설은 어려운 실정임을 알려드리오니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백병식 외 140명의 주민이 물금리 일원 도시계획도로 개설 청원(2018.2.12.) 요구로 양산시에 제출한 민원에 대한 양산시의 답변(주무관 이정연, 도로시설1팀장 강정구, 도로시설과장 주흥식, 안전도시국장 이상옥, 부시장 강덕출, 시장 나동연)은 다음과 같다. 귀하께서 우리시 물금읍 물금리 일원에 개설 요구하신 도시계획도로(소3-115호선 외 5개소 길이 1,617m)는 1979년 도시계획시설(도로)로 결정되어 현재까지 미개설로 남아 있어 타 지역에 비하여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은 충분히 공감됩니다. 그러나 해당 도시계획도로는 도시계획시설을 일관된 체계로 정비하고자 수립한 도시계획시설 단계별 집행계획상 2-2단계로 2021년 이후 계획되어 있으며, 현재 미개설로 인한 교통소통의 시급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기 어렵고, 교통수요량, 주변상황 및 우리 시 재정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조기 개설은 어려운 실정임을 알려드리오니 널리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민 백병식 씨가 양산시의회에 제출한 민원(2018년 2월 21일 접수)에 대한 도시과의 답변(주무관 최정금, 의사담당 연가, 기획행정전문위원 이득수, 국장 김상구, 의장 정경효, 협조자 도시건설전문위원 주원회)은 다음과 같다. 도시계획도로(소3-115호선 외 5개소 길이 1,617m)는 1979년 도시계획시설(도로)로 결정되어 현재까지 미개설로 남아있어 물금리 481번지 일원이 타 지역에 비하여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충분히 공감하고 있으나 해당 도시계획도로는 도시계획시설을 일괄된 체계로 정비하고자 수립한 도시계획시설 단계별 집행계획상 2-2단계로 2021년 이후 계획되어 있으며, 현재 해당지역의 도시계획도로 미개설로 인한 교통 소통 등의 시급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기 어렵고 교통 수요량과 주변상황, 그리고 시 재정여건 등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조기개설은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 민원에 대한 도로시설과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현재 물금리 삼전무지개아파트 일원의 도시계획도로(소3-116선)의 경우 일부는 개설(길이 145m, 폭 6m)되어 있고, 일부는 미개설(길이 380m, 폭 6m)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도시계획도로 개설은 집단주거형성지역 주민들의 이용률을 고려한 장기집행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고 있으며, 미개설된 도시계획도로의 경우 주변여건 변화 등을 고려하여 2018년 단계별 집행계획 수립 시 검토하겠습니다. 양산시 당국은 주민들이 바라는 청원에 대한 해결책은 뒤로 미루고 호도하는데 급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신도시가 완성되며 발전하는 모습을 소외된 입장에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정당한 주장을 하는 주민들의 요구를 하루빨리 수용해야 할 책임이 양산시에 있다. 3. 해운대 달맞이 고개 벤치마킹 물금읍 동부마을과 서부마을이 향후 발전 방안의 하나로 벤치마킹할 대상은 해운대 달맞이고개다. 자연환경에서 해운대 바다의 절경과 대비되는 것은 물금의 낙동강이다.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 개설된 문탠로드는 갈맷길 2코스에 속해 있다. 갈맷길의 2코스의 총 소요 거리는 18.3㎞, 소요 시간은 약 6시간이다. 물금에는 낙동강 자전거도로인 황산베랑길이 있다. 또한 황산베랑길은 조선시대 영남대로 구간으로 유명한 옛길이다. 역사유적지인 영남대로 황산역이 있어 장래에 복원된다면 역사관광의 최적지며, 황산공원의 캠핑장, 야구장, 파크골프장 등과 연계한 체험관광 등이 가능하다. 달맞이 고개 길은 벚나무와 송림이 울창하게 들어찬 호젓한 오솔길로 8km에 달하는 드라이브 코스를 형성하고 있어 해운대 바다 경관을 감상하기 좋다. 물금에는 1022번 도로가 드라이브 코스다. 달맞이 길에서는 달빛과 어우러진 바다의 정취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달맞이 고개에는 길을 따라 도로변에 현대적인 각종 미술갤러리와 카페, 식당들이 자리하고 있어 ‘문화의 거리’로 불리는데, 물금 지역도 도로만 개설되면 금방 명소가 될 수 있다. 문탠로드에서 문탠은 선탠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달빛으로 태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마디로 달빛을 즐기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문탠로드는 달맞이 언덕을 오르다 코리아아트 갤러리 맞은편 숲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부드러운 흙길을 밟으며 수십년 된 해송숲 사이로 동해남부선 철도가 보이고, 솔향과 솔바람, 바다 냄새, 바다 바람, 파도소리가 일상의 피곤함을 잊게 해준다. 해가 지면서부터 밤 11시까지, 새벽 5시부터 해가 뜰 때까지 가로등이 켜져 있어 밤이나 새벽에도 어려움 없이 거닐 수 있다. 두 달에 한번 음력 보름 전후 토요일 문탠로드 따라 걷기 행사를 진행한다. 문탠로드는 총 2.5km 구간에 달빛꽃잠길, 달빛가온길, 달빛바투길, 달빛함께길, 달빛만남길 등 각각의 코스마다 의미 있는 이름이 붙어있다. 곽종포 시의원에 의하면 서부마을 끝에서 용화사, 임경대 방향으로 둘레길을 개설한다고 한다. 기존의 황산베랑길과는 별도로 개설하는 둘레길은 해운대 문탠로드와 비슷하게 만들어 양산의 새로운 명물로 탄생시켜야 하겠다. 마을 주민인 옥영호 대표는 서울 남산의 둘레길 조성을 예로 들며 둘레길이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게 잡목도 일부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둘레길에는 주차장, 화장실, 전망대, 운동시설, 야간조명 등을 설치해야 한다. 이 둘레길은 임경대와 연관된 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의 이름을 붙여 ‘최치원 길’로 명명하는 것이 좋다. 동부마을과 서부마을의 도시계획도로는 신도시 개발에서 소외된 주민들에 대한 보상차원으로 신속하게 개설하여 보답을 해야 한다. 주민 대표들은 도로, 공원, 주차장 등이 개설되면 자체적인 투자로 카페, 식당 등을 만들어 해운대처럼 양산의 최고 명소를 만들 각오를 하고 있다. 개발과정에서 낙동강과 황산공원, 금정산 조망권을 위해 반드시 고도제한이 필요하다. 계획대로 잘 추진이 되면 황산베랑길, 새로운 둘레길, 임경대를 방문하는 양산시민과 부산시민 등 외지인을 유치하여 양산의 경제활성화에 기여하고 지역주민 소득증대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양산시는 도로개설이라는 최소투자로 해운대 달맞이길과 같은 명소를 만들 수 있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양산의 …

청도 김씨 시조 영헌공(英憲公)의 휘(諱)는 지대(之岱), 초휘는 중룡(仲龍)이며, 신라 경순왕의 9세손으로 고려 명종 20년 1190년 청도 대성리에서 태어났다.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8세손이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양산의 청도김씨 재실 죽산재와 김동휘 상공부장관

1. 청도 김씨 시조 영헌공 김지대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청도 김씨 시조 영헌공(英憲公)의 휘(諱)는 지대(之岱), 초휘는 중룡(仲龍)이며, 신라 경순왕의 9세손으로 고려 명종 20년 1190년 청도 대성리에서 태어났다.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8세손이다. 김지대는 1217년(고려 고종 4) 거란군의 침입과 몽골군의 북변 침입을 막는데 공을 세웠다. 1241년(고종 28)에는 진주 촉석루를 창건하였다. 원종 즉위 초 정당문학, 이부 상서(吏部尙書)가 되고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졌고, 시호(諡號)는 영헌공(英憲公)이다. 그 후 오산이 청도로 개칭되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청도로 하였다. 경남 밀양시 청도면 두곡리 361번지에 있는 남계서원(南溪書院)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9호로 1996년 3월 11일에 지정되었다. 영헌공 김지대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김지대(1190∼1266)는 고려 고종 때 문신으로 청도 김씨의 시조이다. 고종 4년(1217)에 거란이 침입하자 병환 중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가 싸워 충과 효를 동시에 이루었다. 남계서원은 조선 숙종 30년(1704)에 지었다. 밀양시 청도면 두곡리 366에 있는 영헌공실기책판(英憲公實記冊板)은 경상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304호이다. 이 책판은 고려중기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영헌공(英憲共) 김지대(金之岱)가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전쟁터에 종군(從君)하면서 지은 시(詩)와 그의 행적(行蹟) 등에 관한 기록을 후손들이 모아 판각(板刻)한 44장을 말한다. 그의 후손들은 영헌공(英憲公)의 종군시(從軍詩) "국환신지환 친우자소우 대친여보국 충효가쌍수(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에서 충효쌍수(忠孝雙修)의 위업을 숭상하기 위해서 쌍수당(雙修堂 : 南溪書院)을 짓고 이 책판을 보관하고 있다. 시의 뜻은 다음과 같다. “나라의 걱정은 신하의 걱정이오, 어버이의 근심은 아들이 근심할 바이요,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하면 충(忠)과 효(孝)를 함께 하는 것이요,” 2. 고산자 김정호 선생 김정호 선생은 청도 김씨 봉산파로 황해도 토산에서 1804년 무렵에 태어났다. 생몰 연도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청도 김씨 대동보에 따르면 청도 김씨 봉산파는 현재 한국 전쟁으로 실계(失系)되었으며, 한국 전쟁 이전에 편찬된 예전 족보에도 김정호는 실려있지 않다고 한다. 가정 형편은 빈한했고 지도 제작 등에 필요한 지식 등에 비추어 볼 때 몰락한 양반이나 중인으로 추정된다. 언제 한양으로 이주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주한 뒤에는 남대문 밖 만리재에 살았다고 한다. 김정호 선생 덕분에 우리나라는 대동여지도라는 세계적인 지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대동여지도란 ‘큰 조선 땅의 지도’라는 뜻이다. 대동여지도란 뜻은 조선(大東) 여지(輿地) 도(圖)로 여지는 수레라는 의미에서 파생해서 땅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실물의 16만 분의 1이다. 대동여지도는 전국을 남북 22층, 동서 2∼8면으로 구획해 가로 39.5㎝, 세로 29.5㎝ 크기의 지도 총 120장에 나눠 실어놓은 지도다. 지도 120장을 모두 이으면 전체 크기가 가로 3.8m, 세로 6.7m에 달한다. 크기는 3층 높이 정도의 공간이 있어야만 전체를 펼칠 수 있을 만큼 거대하다. 김정호 선생은 대동여지도를 200여 개의 조각으로 나눠서 제작한 후 다시 연결하여 접었다가 펼칠 수 있도록 고안하였다. 대동여지도의 제작은 1800년대 역사에서 실학과 지리정보학 측면에서 큰 획을 그은 업적이다. 김정호가 교류했던 신헌, 김정희 등이 권력자인 흥선대원군의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창안한 기호체계로 기록되어, 과거에 일일이 한자로 써넣었던 지도에 비해 편리하고 직관적이다.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훨씬 정확해졌으며, 대량 인쇄 보급도 가능했고, 인구와 면적 등이 조사된 통계자료까지 포함하고 있다. 김정호 선생의 작품인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를 3대 작품으로 꼽는다. 김정호는 지리서도 제작했는데,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를 그의 3대 지리서라고 한다. 지리서는 그림으로 표현 못 하는 기록과 묘사를 글로 적은 것인데, 당시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3. 청도 김씨의 양산 죽산재 청도 김씨 재실인 죽산재(竹山齋)는 양산시 월리길 12-29에 있다. 석산 일동미라주아파트 바로 옆에 있어 찾기 쉽다. 김정희 전 양산시의원의 안내로 죽산재 내외부를 자세히 둘러볼 수 있었다. 죽산재 건물은 죽산파 문벌에서 1980년 4월 21일 공사를 착공하여 그해에 본건물, 축대, 대문, 객사를 완공하여 내부 정리를 하고 첫 제사를 지냈다. 1983년까지 옹벽공사, 진입로 공사, 유허비 설단 공사를 하였다. 죽산재는 양산 입향 중조(中祖) 진강공(振綱公)의 부친 의산공(義山公)을 모시고 중조공 아래 후손이 없는 선대와 제주로부터 삼대 선조의 위패를 상시 모시고 제주의 대가 바뀔 때마다 삼대조의 위패를 제단에 봉안하는 일은 대대손손 계승할 것이며, 매년 음력 10월 9일부터는 선조의 덕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면서 대대손손 영겁을 이어갈 것이니라. 계해 서기 1983년 10월 13일 죽산재 건립추진위원장 종친회장 29세손 김덕량, 종친회 총무이사 31세손 김형철 찬문(부산대학교 박지홍 교수의 고증을 받음) 의산조(義山祖) 설단(設壇) 기념비는 죽산(竹山), 교항(橋項), 은산(殷山), 합천(合川), 이천(梨川), 진남(鎭南)에 분파된 일천여 세대 후손들이 실전된 의산조 묘소를 복원키 위한 숭조목종의 숭고한 정성으로 성금을 모아 설단 사업이 준공을 보게 됨에 따라 1984년 9월에 세웠다. 4. 김동휘 상공부장관 추모비의 건립 취지와 경위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28분 버마의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행사장에 도착하기 2분 전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폭탄이 터져 그 자리에서 대통령의 동남아 5개국 순방에 수행했던 인사 17명이 숨졌다. 북한의 테러 도발로 당시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재익 경제수석,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자부 장관과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기자 등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 대통령을 겨냥한 북한의 테러였지만 전 대통령은 자동차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했다. 김동휘 상공부 장관은 양산의 다방동 출신으로 청도 김씨의 후손이다. 1954년 서울대 재학 당시 외무고등고시에 합격했으며, 주 이란대사, 주 이란대사를 역임하고, 1982년 5월 21일부터 1983년 10월 9일까지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양산의 죽산재에 김동휘 장관의 추모비가 있는데, 추모비의 건립 경위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선진조국 창조를 앞당겨 실현하고자 하는 숭고한 사명을 띤 서남아순방길에서 대통령 각하의 공식 수행원 일행이 서기 1983년 10월 9일 버마국 아웅산국립묘지에서 잔악한 북괴 만행으로 순국하심에 통념함과 애석함을 금치 못하며, 특히 본군 출신이신 김동휘 상공부장관의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애국심과 청렴한 공직자상은 타의 귀감이 되었기에 선조의 얼이 담긴 이곳에 추모비를 건립하여 군민의 산 교육장이 되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본도 이규효 지사께서 손수 비문을 지으셨고, 그 통념함과 애석함을 금치 못하며,1984.8.31일 군정자문위원회에서 군민의 전체 뜻으로 건립하기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의하여 1984.9.1.일 양산향교 전교를 위원장으로 본위원회가 발족되었음. 본위원회는 양산상공회의소 회장단을 비롯한 군민의 협찬으로 1주기를 맞이하여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추모비 건립은 서기 1984년 10월 9일 자문위원 군수 안강식, 경찰서장 전병익, 교육장 박덕기, 위원장 향교전교 김두성, 부위원장 새마을운동군지회장, 라이온스클럽 회장 이종관, 감사 사회정화협의회장 이형우, 위원 평통군협의회장 안상원, 군정자문위원장 정경모, 상공회의소회장 노성권, 문화협의회부회장 김치덕, 로타리클럽 회장 윤근수, 청년회의소회장 박정창, 군정자문위원 박봉수, 청도 김씨 죽산파 문중회장 김덕량, 감사 상공인 회장 배복만 등이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이만도 …

과거 양산시장들의 구속 등의 비리와 견주어보면 이만도 양산군수의 선행은 더욱 돋보인다. 백성을 사랑한 이만도 군수는 이양산(李梁山)으로 불릴만큼 신뢰를 받았다. 임경대 시비공원에 이만도 군수의 시가 있다.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이만도 양산군수의 선정과 독립투쟁

이만도 양산군수의 선정과 독립투쟁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1. 양산군민들에게 선정을 베푼 이만도 군수 이만도는 1876년 양산군수 시절 흉년에 어려움을 겪는 백성을 위해 구휼미를 풀어 칭송이 자자했다. 또한 조세를 감면하면서 관찰사의 가렴주구를 항의하였다. 이만도 양산군수는 훌륭한 목민관으로서 백성의 존경을 받았다. 과거 양산시장들의 구속 등의 비리와 견주어보면 이만도 양산군수의 선행은 더욱 돋보인다. 백성을 사랑한 이만도 군수는 이양산(李梁山)으로 불릴만큼 신뢰를 받았다. 임경대 시비공원에 이만도 군수의 시가 있다. 선말 나라가 망하던 무렵에 왕은 신하들에게 의미 없는 벼슬의 위계를 높여서 내라는 경우가 많았다. 이만도 군수는 1907년에는 가선대부, 1909년인 68세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위계에 올랐으나 일절 받지도 않았고 사용하지도 않았다. 당상관인 동부승지가 마지막 벼슬이었고, 제대로 행한 벼슬은 양산군수가 마지막이었다. 그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전라도의 홍금산(洪錦山 : 금산군수 홍범식), 경상도의 이양산(양산군수 이만도)이라고 호칭하며,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푼 대표적인 군수로 숭앙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여 지방관리들의 횡포가 심했으며, 백성들은 수탈에 시달렸다. 토지에 매기는 세금인 전정(田政), 군대 가는 대신 포(布)를 내도록 한 군정(軍政), 보릿고개를 넘도록 쌀을 빌려주는 환정(還政)을 삼정이라고 하였다. 전국적으로 무리하게 세금을 걷는 삼정(三政)의 문란이 만연하였다. 지방관리들이 행정권, 사법권, 세금징수권까지 갖고 독점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부패가 만연하였다. 백성들이 가혹한 세금을 피해 멀리 도망가는 현상이 빈발했다. 조선시대 백성들은 가혹한 세금, 과도한 부역, 아전들의 횡포 등으로 시달렸다. 군포(軍布)는 조선시대의 군정(軍丁)에게 역(役)을 면제해주는 대가로 받던 베로 어린아이나 이미 죽은 자를 장정으로 편입시켜 부족분을 충당하는 등 군정이 문란해졌다. 군정의 폐해로 관리들의 수탈은 노골화되고 양인들의 부담만 더욱 가중되었다. 조선시대 양산의 낙동강과 양산천은 제방 부실로 홍수가 빈발하여 많은 집과 농토가 유실되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가뭄도 오래 지속되어 훙년이 자주 발생하여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이만도는 25세에 장원급제한 이래, 명문의 후예라야만 가능한 여러 청직(淸職)을 거치며 많은 벼슬을 역임한다. 성균관의 전적(典籍),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명예로운 옥당벼슬인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오른다.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임금에게 곧은 진언(進言)을 하기 시작하자 대신들의 칭찬이 자자했고, 국가의 장래와 미래에 대한 원대한 포부를 밝힐 때 모두가 옛날 대신의 풍모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옥당(홍문관 벼슬)에 들어간 이후에는 교리, 부교리, 장령을 역임했다. 그 후 지평, 병조좌랑, 응교, 부응교, 사간원 집의, 성균관 사성, 장악원정 등의 여러 버슬을 역임했다. 그 뒤 조정에서 고향 가까운 양산군수로 임명하여 부모님 봉양에 편하도록 조치해주었으니, ‘이양산(李梁山)’이라는 호칭은 그래서 얻게 되었다. 이만도 군수 영세불망비가 가야진사에 있다. 41세이던 1882년에는 통정대부의 위계에 올라 공조참의, 동부승지라는 당상관에 제수되었다. 그때는 벌써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던 때로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곧장 고향으로 내려와 책을 읽고 뜻을 구하며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42세 때에도 연달아 동부승지의 제수(除授)가 있었지만 전혀 응하지 않고 본격적인 학문연구와 후학들과의 강학, 학문연마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2. 이만도 선생 순국 이만도 군수(1842년~1910년)의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 경상북도 예안 출신이다. 선생은 퇴계의 11세손으로 경북 봉화군 봉성면에서 태어나 14세 때 선대 고향인 안동군 도산면 하계마을로 돌아왔다. 이만도 선생의 부친 이휘준은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고 할아버지 이가순 역시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응교를 지낸 3대 문과 급제 가문이다. 이만도, 이만규 형제는 둘 다 과거에 급제했다. 형 이만도 선생은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동생 이만규 선셍은 문과 갑과에 2등을 하였다. 형제는 벼슬에 나아가 홍문관 등 요직을 거쳤지만 나라가 망하자 독립운동이라는 가시밭길을 스스로 걸어갔다. 향산 이만도는 나라 잃은 잘못이 자신에게 있다며 단식 24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아우 유천 이만규도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도 형을 따라 단식을 하려고 했지만 향산의 만류로 후일 파리장서 운동에 참여한다.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년, 선생은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여 올린 상소를 두둔하여 파직당하였으며, 1882년 한미수호조약으로 나라가 혼란하자 낙향한 뒤, 같은 해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다시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1895년 명성황후 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의분을 견디지 못한 향산은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왕의 밀령이 전달받고 거병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소모관 이용호가 일본군에 붙잡히는 바람에 뜻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 소식까지 들려오자, 안동지역에서는 통문이 돌기 시작했다. 선생은 가장 앞선 예안통문에 참여하고, 의병을 일으켜 대장을 맡아 선성의진을 이끌었다. 그러나 의진이 구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안동의진이 패하자 선성의진이 와해되었다. 선생은 대장에서 물러나 의진을 정비하였고 집안 후손인 이중린, 이인화, 이중언 등이 이를 이어 3월 태봉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일본군대를 쳐부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도모를 시도하면서 참았다. 1905년에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죽어야 한다는 뜻을 더욱 굳혔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 9월 17일 단식을 시작했다. 나라를 잃고 군왕이 치욕을 당하게 된 것에 대해 죽음으로 책임을 다하고자 함이었다. 단식 21일째 되던 날, 경찰이 와서 강제로 음식을 먹이려 하자 선생은 크게 소리쳐 꾸짖으며 그들을 물리쳤다. 10월 10일 선생은 단식 24일째 되던 날 순국했다. 3. 이만도 선생 후손의 독립운동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명성황후 시해 후 예안 선성의진을 결성하였으며, 을사조약 파기와 을사오적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경술국치에 이르자 병탄에 항거하여 단식 순국한 이만도 선생을 2012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바 있다. 이만도 선생의 아들 이중업은 아버지가 을미의병을 일으키자 당교격문(唐橋檄文)을 지어 안동, 예안, 상주, 봉화 등지의 장터에 내다 붙이며 경북 북부지방 독립운동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독립운동가 김대락(金大洛)의 여동생인 김락(金洛)과 결혼했다. 이중업은 곽종석 등과 함께 파리장서를 작성해 서명 운동을 일으켰다. 중국 쑨원(孫文)과 우패이푸(吳佩孚)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려고 시도했다. 이중업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락( 1862∼1929)은 만 18세 때 양산군수 이만도의 장남인 이중업(李中業)에게 시집갔다. 시아버지 이만도는 을미사변과 단발령 반포에 반발해 예안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남편 이중업도 아버지와 함께 의병에 가담했다. 김락의 친정 오빠 김대락과 형부 이상룡이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중업 김락 부부의 장남 이동흠은 1917년 무렵 광복회에 들어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데 힘쓰다가 1918년 광복회가 발각되면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 17일 김락이 살던 예안군에서 3.1 운동이 발발했다. 경찰은 이에 강경 진압했지만 3월 22일에 2차 시위를 벌였다. 이때 김락은 시위에 참가했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두 눈을 실명했다. 정부는 2001년 김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안동의 이중업 김락 부부는 ‘경북 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이만도(李晩燾)의 손자 이동흠 역시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는 1918년 4월 2일 경북 봉화군(奉化郡)의 부호 이정필(李廷弼)에게 군자금으로 천원을 헌납하라는 광복회 명의의 통고문을 발송하였으나, 이와 관련하여 면장(面長) 이명호(李明鎬)와 함께 일경에 피체되어 1918년 1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6년 1월 경북 달성(達城), 영양(英陽) 등지에서 최해윤(崔海潤), 이현병(李鉉秉)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펴던 중 1926년 5월 10일 일경에 피체되었다. 1927년 2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둘째 손자 이종흠도 1926년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돼 1년의 옥고를 치렀으며,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이만도 군수 집안과 며느리 김락 친정 집안을 모두 합하면 100명이 넘는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명문 집안이다. 양산의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나라가 망하자 독립운동에 떨쳐나서 순국한 이만도 양산군수처럼 양산의 시장들도 청렴결백하게 봉직하며 양산시민들과 국가를 위해서 헌신하길 기대한다.

백운암 스님을 사모한 마을 처녀와…

단군신화에 곰과 호랑이가 등장한다. 우리나라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위서(魏書)』를 인용한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紀異篇)>에 실린 자료가 있다.

백운암 스님을 사모한 마을 처녀와 통도사 호혈석/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1. 한민족과 친근한 호랑이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단군신화에 곰과 호랑이가 등장한다. 우리나라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위서(魏書)』를 인용한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紀異篇)에 실린 자료가 있다. 옛날 환인의 아들 환웅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므로,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헤아려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 사람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의 신단수(神壇樹)에 내려와 신시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세상을 다스렸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 안에 살면서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렀다. 곰과 범은 이것을 먹고, 곰은 37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고 범은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어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배게 해달라고 축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하여 혼인하여서 아이를 낳으니, 그가 곧 단군 왕검(王儉)이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3분의 2가 산으로 이뤄져 옛날부터 호랑이가 많이 살아 ‘호랑이의 나라’로 불릴 정도였다. 호랑이는 단군신화 뿐만 아니라 민화에 나오는 까치호랑이로 우리 민족에게 친숙한 한류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호랑이를 표현한 미술 작품도 많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는 호랑이를 형상화한 ‘호돌이’였다. 2018 평창 겨울올림픽의 마스코트는 백호(白虎)를 형상화 한 ‘수호랑’이었다. 전국 사찰의 산신각에서는 영물로 형상화 된 호랑이의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산신각은 불교 토착화의 한 형태로, 민간신앙이었던 산신 사상과 불교가 습합되면서 나타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다. 호랑이는 인간을 보호해 주는 수호적 존재이자 호환을 방지하기 위한 존재로 신격화 되면서 산신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원효대사가 중국에서 건너온 천여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내원사 입구에 도달했을 때 지금의 산령각이 있는 곳에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는 산신령을 의미한다. 원효대사 앞에 무릎을 꿇은 호랑이는 꼬리로 원적산을 가리켰다고 한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대사는 지금의 내원사로 갔고, 추운 겨울날 칡꽃 두 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며 여기에 암자를 짓고 머무르게 되었다. 호랑이가 중간에서 가로막았다고 이곳을 중방이라 부르게 되었다. 2. 호랑이에 피해를 당한 백성들 호랑이의 균형 잡힌 거대한 몸집과 강렬한 눈빛, 포효하는 울음소리, 늠름한 기품 등은 조상들에게 있어 숭배의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호랑이로 인한 재앙, 호환을 두려워한 조상들은 오히려 호랑이에게 잡귀를 물리치는 영물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제를 지내기도 했다. 호식총(虎食塚)은 산간지역에서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고 난 뒤에 남긴 유구(遺軀)를 거두어 장사(葬事) 지낸 무덤으로 강원도 삼척시 등에 일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팔자에 없으면 범에게 잡혀가도 먹히지 않는다든가 눈썹이 길면 호환을 당할 운명이라든가 하는 속신(俗信)도 있었다. 산길을 걷는 사람들 중에 앞뒤의 행렬 순서와 관계없이 호환(虎患)의 피해를 당하며, 방 안에서 자는 사람들을 습격해도 한가운데 있는 사람을 호랑이가 데려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호랑이에 의한 호환은 단순한 사고가 아닌 신령에 의한 운명적 사건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호환을 당한 사람의 영혼은 ‘창귀(倀鬼)’라는 귀신이 되어 죽어서도 호랑이의 부림을 받는 딱한 처지가 된다. 이 창귀는 다른 사람을 유인하여 호랑이에게 바쳐야만 창귀의 신세를 면하고 보통의 귀신이 될 수 있다고 전해져왔다. 창귀는 호랑이의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상 희생자를 찾는데 가족과 인척들 순으로 찾아간다. 때문에 호환을 당한 집안과는 사돈의 팔촌하고도 혼사를 맺지 않는다. 이런 물귀신 행위를 ‘다리 놓기’나 ‘사다리’라 한다. 창귀는 이런 교대를 통해 호랑이에게서 벗어난다. 옛날 통도사 뒷산이 영축산, 신불산, 간월재 등에는 호랑이, 표범 등 맹수들이 많았다. 신불산에는 호랑이, 간월산에는 늑대, 배내봉에는 표범이 서식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먹이감으로 노렸다. 인적이 드문 간월재를 오르내리는 주민들, 장사꾼들은 호시탐탐 노리는 맹수 때문에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일곱 사람 이상이 모여 산길을 걸어갔다. 모이는 장소는 간월마을 당수나무 아래로, 일제강점기에 제재소가 있었던 인근이었다. 3. 백운암 스님을 짝사랑한 마을 처녀와 호혈석 옛날 호랑이가 많을 때 통도사까지 내려와 사람을 물어가는 호환이 발생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에 얽힌 재미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통도사 부속암자인 백운암은 영축산 8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 백운암에 젊고 잘생긴 스님이 수행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훌륭한 강백이 되기를 희망하던 이 스님은 불경 공부를 열심히 하며 수행에 몰두하고 있었다. 장차 통도사의 강백이 되어 스님들을 가르치고자 하는 꿈을 지니고 있었다. 날이 저물면 인적이 끊기는 백운암에서 인기척이 나며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문을 연 스님 앞에 나물 캐러 온 처녀가 나타났다. 통도사 근처 마을에 사는 처녀는 나물 캐러 나왔다가 그만 길을 잃고 헤매다가 백운암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날은 저물고 호랑이가 출몰하는 밤길이 위험하므로 처녀는 하룻밤 묵어갈 것을 스님에게 요청하였다. 암자의 방이 하나뿐이라 스님 입장에서 매우 난처하였지만 단칸방의 아랫목을 그 처녀에게 내주고 윗목에 정좌한 채 밤새 경전을 읽었다. 스님의 불경을 읽는 낭랑한 목소리가 처녀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스님의 단아한 모습과 듣기 좋은 염불 소리에 반한 처녀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처녀는 날이 밝자 백운암을 떠나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으나 마음속에 늠름한 스님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스님을 연모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병이 들어 몸은 여위어만 갔다. 처녀는 결국 상사병애 걸리게 되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처녀는 병에 좋다는 약을 다 썼으나 백약이 무효로서 부모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좋은 혼처도 마다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끙끙 앓는 딸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처녀의 어머니는 안타깝기만 했다. 어머니가 병석의 딸을 간호하며 딸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병의 원인을 어렵사리 알아냈다. 나물 캐러 갔다가 백운암에서 만났던 젊은 스님을 잊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고 하였다. 처녀의 부모는 자식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백운암의 스님을 찾아가 한 살림 차려 줄 것을 약속하며 혼인을 애원하였으나 젊은 스님의 수행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그 후 처녀는 스님을 잊지 못하고 사모하는 한을 가슴에 품은 채 죽었다. 한이 맺힌 처녀는 영축산 호랑이가 되었다고 한다. 스님은 계속 흔들림 없이 공부하여 서원하던 통도사 강백이 되었다. 여러 학승들에게 경전을 가르치던 어느 날 강원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일며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큰 호랑이가 전각 지붕을 넘나들며 포효하고 문을 할퀴며 위협을 했다. 호랑이의 행동을 지켜보던 대중들은 스님 중의 누군가와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는 데 중지를 모았다. 각자 저고리를 벗어 밖으로 던져 그 연이 누구와 이어졌나를 알아보기로 하였다. 저고리를 벗어 하나씩 밖으로 던졌으나 호랑이는 본체만체하더니 강백 스님의 저고리에 반응을 보였다. 강백 스님은 주저없이 속세의 인연인가보다 하고 호랑이 앞으로 나갔다. 호랑이는 기다렸다는 듯 그 스님을 입으로 덥석 물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통도사의 모든 스님들은 강백 스님을 찾아 온 산을 헤맸다. 스님은 백운암 옆 산등성이에서 발견되었다. 죽은 강백 스님을 자세히 살펴보니 남성의 상징이 보이지 않았다. 그 후에도 통도사 스님들이 호환 피해를 계속 입게 되자 호랑이의 기를 누르기 위해 호혈석(虎血石), 또는 호석(虎石)을 경내 두 곳에 배치하였다. 마치 강백 스님의 피가 묻은 것처럼 붉게 보이는 바위는 응진전 바로 옆과 극락전 옆 북쪽에 남아 있다.

양산군수 이연상 묘소, 임경사지와…

이연상 군수가 편찬한 『양산읍지(梁山邑誌)』 불우조(佛宇條)에는 ‘在郡西 黃山麓 大江上 今廢’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양산군수 이연상이 쓴 『양산읍지 불우조』에 “군의 서쪽 황산 기슭 큰 강 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사되고 없다(在郡西黃山麓大江上今廢).”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양산군수 이연상 묘소, 임경사지와 임경대

1. 이연상 군수 묘소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임경대는 물금에서 1022번 지방도를 따라 원동면 화제리로 가다가 물금과 원동 경계를 지나 왼쪽에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서 약 300m 지점에 임경대가 있으며, 인근에는 조선 순조 때 양산군수를 지낸 이연상(知足堂 李淵祥, 1788~1846년)의 묘소가 있다. 묘소 앞은 바로 임경사가 있던 절터다. 현재 잡풀이 우거져 있으며, 땅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와편이 흩어져 있다. 구전에 따르면, 인근 임경대에서 관원과 풍류객들이 풍악을 울리고,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임경사는 폐사되었다고 한다. 이연상 군수가 편찬한 『양산읍지(梁山邑誌)』 불우조(佛宇條)에는 ‘在郡西 黃山麓 大江上 今廢’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양산군수 이연상이 쓴 『양산읍지 불우조』에 “군의 서쪽 황산 기슭 큰 강 위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사되고 없다(在郡西黃山麓大江上今廢).”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를 통해 이연상이 군수로 있었던 1832~1834년에 임경사는 이미 폐사되었다고 추정된다. 건물 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건물 초석과 기와편들이 발견되었다. 이연상(李淵祥) 군수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계우(季愚)로 이언적(李彦迪)의 9세손이다. 이실중(李實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헌일(李憲一)이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이정진(李鼎搢)이며, 어머니는 손극중(孫克中)의 딸이다. 이연상(1788년, 정조 12년~1846년 헌종 12년)은 사간원정언, 양산군수,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819년(순조 1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대교・봉교, 세자 시강원설서,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은 조선 시대에, 예문관에서 사초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정구품 벼슬이다. 사관은 역사의 기록을 담당하여 역사의 초고(草稿)를 쓰던 관원을 말한다. 사관은 국사가 논의되는 조회(朝會), 조참(朝參), 상참(常參), 윤대(輪對), 경연 등에 참석한다. 중신회의, 백관회의, 의정부, 중추원, 육조 등의 대신이나 삼사 관원이 국왕을 면대하는 장소, 국왕의 각종 행차 등에 입시, 호종하며 사초를 기록하였다. 사초는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인 사관이 작성한 기록으로 실록을 만드는 데 기초 자료이자 가장 중요한 자료였다. 사관은 왕이 참석하는 모든 행사에 동행해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실록이 공정하게 만들어지려면 실록의 재료인 사초부터 공정하게 기록되어야 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왕은 사초를 볼 수 없었다. 세자(世子) 시강원(侍講院)은 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로 왕세자를 모시고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강의하며 도의(道義)를 가르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이연상이 역임한 세자 시강원 설서(說書)는 정7품이다. 이연상은 이후 10여 년간 홍문관의 문한직에 종사한 뒤 양산군수로 나갔다. 1836년(헌종 2)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당상관에 오르고, 1840년 대사간이 되었다. 성품이 민첩, 강직하였고 검약, 검소한 생활로 시종하였다. 사간원(司諫院)은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했던 기관이며,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을 담당한 관청이다. 간원(諫院), 미원(薇院)이라고도 한다. 사헌부와 함께 대간(臺諫)이라 불렀고, 홍문관(弘文館), 사헌부와 함께 삼사(三司)라 하였고, 형조(刑曹), 사헌부와 함께 삼성(三省)이라 하였다. 수장은 대사간이었으며 정3품의 벼슬이었다. 관료는 첫째, 국왕에 대한 간쟁, 신료에 대한 탄핵, 당대의 정치, 인사 문제 등에 대하여 언론을 담당했으며, 둘째, 국왕의 시종신료로서 경연(經筵), 서연(書筵)에 참여하였고, 셋째, 의정부 및 6조와 함께 법률 제정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였으며, 넷째, 5품 이하 관료의 인사 임명장과 법제 제정에 대한 서경권(署經權)을 행사하였다. 이처럼 간관의 임무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화요직(華要職)으로 인정되어 학문이 뛰어나고 인품이 강직한 사람 가운데서 선발하였고, 교체시에도 지방관으로 폄출하지 않았으며, 승진시에는 파직 기간도 근무 일수에 포함시켜 주었다. 2. 독립투사 이석채 이연상 양산군수 묘소 아래에 그의 4대손인 독립투사 이석채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경주시 양동마을에 강학당이 있다. 강학당은 여주이씨 집안의 서당으로 지족당 이연상(知足堂 李淵祥)이 먼저 터를 정하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이후 문중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고종 4년(1867)에 학당을 세워 큰 아들 경암 이재목(敬庵 李在穆, 1817~1879)이 많은 후학들을 길렀다. 공부하는 곳이니만큼 대문과 담장 없이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었으며 앞마당에서 마을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강당은 명리재(明理齋)이며 장판각(藏板閣)이라는 편액이 걸린 방은 책과 경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동쪽에 있는 행랑채는 서당의 살림살이를 맡았던 곳이다. 여주이씨 집안은 이 서당 이외에도 규모가 좀 더 큰 양좌서당이 있었고 경산서당도 있다. 강학당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주요 터전으로 활용되었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이석채(李錫埰, 1892~1948)는 이연상의 4대손이며 이 집에서 태어나 활약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원(外務員)으로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이석채는 1919년 12월경 경남 동래(東萊)에서 군자금 2,000원을 모금하였고, 이를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해줄 목적으로 1920년 1월 만주 유하현(柳河縣)으로 망명하였다. 1월 중순경에 유하현에 도착한 이석채는 그곳에서 임시정부 요원인 노백린(盧伯麟)을 만나 1,000원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의 외무원이 되어 국내의 민정을 시찰하고, 임시정부원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입국하였다. 1920년 2월경에 국내로 돌아온 이석채는 이후 경성과 강원도 일대에서 임시정부원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강원도 강릉군 주문진에 거주하는 최명일(崔命一)과 삼척군 삼척면 읍상리에 거주하는 김동석(金東錫) 등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이 일로 이석채는 일본 경찰에게 피체되어 1920년 4월 12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 이연상 군수의 아들 이재목 묘소 이재목(李在穆)은 이연상 군수의 아들이며, 조선 후기 유학자다. 호는 경암(敬庵)이며, 본관은 여주(驪州)다. 증조부는 이헌일(李憲一)이고, 조부는 이정진(李鼎搢)이다. 부친 이연상(李淵祥)과 모친 경주최씨(慶州崔氏 : 최현진(崔鉉鎭)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이병운(李秉運)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다. 슬하에 2남 이능엽(李能燁)과 이능찬(李能燦)을 두었다. 1878년(고종 15) 영남의 유림들과 함께 서원 복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저서로 『경암집(敬庵集)』이 있다. 이 책은 1905년(광무 9) 그의 종질 능렬(能烈)과 윤인석(尹仁錫) 등이 편집, 교정하고 그의 손자 상구(庠久)가 간행하였다. 문집은 선생이 이학(理學)의 심오한 뜻을 새롭게 해석한 바가 많은 것으로 우리나라 유학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여주 이씨(驪州 李氏)는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3파(派)가 있다. 이인덕(李仁德)을 시조(始祖)로 받드는 교위공파(校尉公派)가 있고, 이은백(李殷伯)을 시조(始祖)로 하고 이규보(李奎報)를 중조(中祖)로 모시는 문순공파(文順公派)가 있으며, 이세정(李世貞)을 시조(始祖)로 받드는 경주파(慶州派)가 있다. 경주파(慶州派)는 ‘을축대동보(乙丑大同譜)’부터 ‘여강(驪江)’이란 관향(貫鄕)을 정(定)하였다. 그러다가 근년에 이르러 ‘여흥(驪興)’, ‘영의(永義)’, ‘하음(河陰)’ 등의 관향(貫鄕) 이름을 ‘여주(驪州)’로 단일화(單一化)했다. 경주파(慶州派)에서 독자적(獨自的)으로 사용(使用)한 ‘여강(驪江)’이란 관향(貫鄕)도 갑자보(甲子譜)부터는 ‘여주(驪州)’라는 관향(貫鄕)과 함께 쓰기도 하였다. 이연상 군수, 그의 아들 이재목, 4대손 이석채 묘비는 모두 여강 이씨로 나와 있다. 양산시는 후손들과 협의하여 이연상 군수의 묘소와 임경대, 대나무밭을 연계하여 안내판 설치하고 관광객을 위한 데크로드를 만들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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