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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여근곡에서 백제군을 물리친 신라군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여근곡 경북 경주시 건천읍 신평리에 여근곡(女根谷)이 있다. 옥문곡(玉門谷)이라고도 한다. 오봉산 아래의 산세 모양이 여성의 국부 모양을 닮아서 여근곡이라 부른다. 옛날부터 풍수지리적으로 음과 양을 중시하는 풍수가들은 음양의 조화를 따졌다. 전국의 산세 중에 여근곡이라 볼 수 있는 곳이 몇 곳 있지만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여근곡이 제일 유명하고,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도 나올 정도로 역사적 연원도 오래되었다. 건천읍 신평리에는 등산객을 위한 여근곡 주차장이 넓게 조성되어 있으며, 안내판, 등산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마을 안으로 약간 들어가면 연못, 정자가 있다. 건천읍 신평2리 마을회관 옆의 식당은 단체가 예약하면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마을회관 옆의 ‘여근곡 기 박물관’은 요즘에는 운영을 하지 않고 있다. 희귀한 수석을 전시하고 있으며, 건물 옥상에 여근곡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수석박물관은 매각을 위해 내놓았다고 한다. 여근곡(女根谷)은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에 관한 전설 중의 하나에서 유래하는 지명이다. 여근곡의 위치는 자인(玆仁)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는 마곡산(馬谷山) 밑의 회곡치(回谷峙)가 있었던 곳으로 지형의 생김새로 보아 여근곡이었을 것으로 본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근곡이 있는 마을인 신평리 일대의 들판은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에 ‘샙들’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이 마을주민들은 여근곡 아래의 들이라 하여 듣기에 민망한 ‘X들’이라 부르고 있었다. 오봉산을 오르는 산행 들머리는 이 샙들을 지나 여근곡의 회음부에 해당하는 위치에 자리 잡은 유학사에서 시작한다. 유학사, 여근곡 옥문지, 부산성, 오봉산, 주사암, 마당바위 등을 차례로 둘러볼 수 있다. 유학사에는 산신각이 있는데, 여근곡의 영향인지 산신도의 산신은 여신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유학사에서 물이 나오는 샘이 있는 옥문지로 가는 등산로는 절 왼쪽에 표지판이 있다. 완만한 계단을 올라 다리를 건너면 금방 옥문지에 도착한다. 옥문지를 1월 5일에 답사하였는데, 생명수인 물이 나오고 있었다. 가는 물줄기 때문에 호스를 연결하여 놓았다. 주변에 작은 계곡이 몇 개가 있어 물이 마르지 않았다. 습기가 많으니 음기도 강한 것으로 보였다. 옛날에는 작은 샘물인 옥문지를 휘저으면 마을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고 금기시하여 청년들이 지켰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과거 보러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은 여근곡을 보면 부정을 타서 과거에 낙방한다는 속신 때문에 이 근처를 지날 때 애써 고개를 돌려 여근곡을 외면하고 지나갔다고 전해진다. 여근곡을 사진 찍기 위해서는 오전에 가는 것이 좋다. 오후가 되면 역광으로 빛이 반사되어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2. 선덕왕의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선덕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善德王知幾三事)은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에 나온다. 제27대 덕만(德曼)[만(曼)을 만(萬)이라고도 한다.]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서기 632)에 왕위를 올라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앞일을 미리 안 것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당 태종이 붉은색ㆍ자주색ㆍ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왔는데, 왕이 그 그림을 보고 말하였다. “이 꽃은 정녕 향기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씨를 뜰에 심도록 명하였다. 그 꽃이 피었다 지기를 기다렸는데, 과연 그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 둘째, 영묘사(靈廟寺)의 옥문지(玉門池)에서 겨울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서 3~4일 동안이나 울어대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어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급히 각간인 알천(閼川)ㆍ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예병 2천 명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물어보면 그곳에 반드시 적군이 있을 것이니, 습격해서 죽이라고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백 명이 그곳에 숨어 있기에 모두 죽여버렸다. 백제의 장군 우소(亐召)란 자가 남산(南山)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는 것을, 또 포위하여 활을 쏘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뒤에 병사 1,200명이 왔지만 역시 쳐서 죽였으니,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셋째, 왕이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여러 신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짐은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속에 장사 지내라.” 여러 신하들이 그곳을 몰라 다시 어디인지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다.” 그달 그날이 되자 왕은 과연 세상을 떠났다. 여러 신하들이 낭산의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왕의 무덤 아래에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때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게 되었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물었다. “모란꽃과 개구리의 두 일이 그러할지 어떻게 미리 아셨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꽃은 그렸지만 나비는 없었소. 그래서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소. 이것은 당나라 황제가 내가 남편이 없는 것을 비웃은 것이오. 개구리가 화가 난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고, 옥문(玉門)이란 여자의 음부요.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쪽을 뜻하오. 그래서 적군이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소. 남근이 여근 속으로 들어오면 반드시 죽는 법. 그래서 쉽게 잡을 줄도 알았소.”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왕의 성스러운 지혜에 탄복하였다. 세 가지 색깔의 꽃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것일까? 선덕ㆍ진덕(眞德)ㆍ진성(眞聖)이 이들이다. 당나라 황제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는 이 선덕왕 대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한다. 3. 여근곡에서 백제군을 물리친 김유신 장군 김유신 장군은 선덕여왕대부터 왕의 측근 실세가 된 김춘추와 함께 많은 활약을 한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김유신은 이 치열한 항쟁의 선봉에서 활약했다(우리역사넷). 당시 신라에서 김유신의 역할과 위상은 다음 일화에서 잘 알 수 있다. 644년(선덕여왕 13) 9월에 그는 대장군으로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7성을 격파하고 가혜진(加兮津, 지금의 경북 고령군 인근으로 추정)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신라 왕성으로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보고하려고 하였는데, 미처 왕을 뵙기도 전에 백제 대군이 쳐들어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왕이 다시 김유신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삼아 이를 막도록 명령하자, 그는 바로 다시 말을 타고 전장으로 나아가 적군을 격파하였다. 3월에 다시 왕을 뵙고 명령을 완수했음을 보고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다시 백제가 대군을 동원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이에 왕이 다시 김유신에게 출정할 것을 명한다. 그는 잠시 집 앞에서 장수(漿水, 숭늉 내지 미음)만을 마시고 잠시도 쉬지 않고 바로 전장으로 나아갔다. 647년(선덕여왕 16) 선덕여왕이 위중하자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이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김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이 반란을 진압하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을 옹립하였다. 이로써 김춘추와 김유신은 권력을 장악하고 신라가 삼국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군사동맹을 맺는데 성공했고, 김유신은 여러 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나갔다. 적의 침입을 막아내는데 그치지 않고, 공격하여 많은 성을 탈취하고 백제의 장졸들을 격살하였다. ] 648년에 백제의 공격을 옥문곡(玉門谷)에서 저지하며 백제 장군 8명을 사로잡고 1,000명에 달하는 적군을 목 베었다. 이때 포로로 잡은 백제 장군과 김춘추의 딸 부부 유해를 교환하여 김춘추의 한을 일부 풀어주기도 하였다. 이어 승세를 몰아 공격해 악성(嶽城) 등 12성을 빼앗으며 2만여 명을 죽이고 9천 명을 생포하였다. 또 더 진격하여 진례성(進禮城) 등 9성을 공파(攻破)하고 9천 명을 죽이고 600명을 생포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오봉산을 등산 목적지로 설정하면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여근곡, 옥문지를 볼 수 있고, 천년 고찰인 주사암, 신라시대 성인 부산성도 답사할 수 있다. 주사암은 신비로운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주사암에는 김유신 장군과 화랑도들의 수련장인 마당바위에서 인생샷을 찍을 수 있다. 마당바위는 인기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등산로는 일부 구간이 가파르지만 중간에 포장된 임도도 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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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김유신 장군과 화랑도의 수련장인 경주 마당바위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천년 고찰 주사암 주사암은 경상북도 문화재 제 522호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 말사이다. 오봉산 정상의 주사암은 부처님의 가피가 심어진 복밭으로서 신라 30대 문무왕 3년(서기 663년) 오봉산 남쪽에 있는 부산성을 축조하던 시기에 의상대사의 원력으로 이룩된 사찰이다. 처음은 주암사라고 불렀으나 어떤 연유로 인하여 폐사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사명 유정 스님의 도움으로 중창불사를 이룬 이후 주사암으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사암은 오봉산의 주봉인 주사산(해발 682m) 정상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 서. 북쪽은 바위로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으며 남쪽은 훤히 보여 부산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사암은 영산전을 위시하여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요사채 5동, 그리고 자손을 점지해 준다는 삼신당(주사굴)이 있다. 영산전에는 삼세 제불인 제화갈라불(과거), 석가모니불(현재 본존불), 미륵불(미래), 16나한 소상, 그리고 신중탱화를 모시고 있다. 삼성각에는 좌로부터 의상대사 영정, 산왕대신, 치성광여래(칠원성군), 독성님, 용왕대신 등의 탱화를 모시고 있다. 1300여 년의 역사와 원력으로 각 단에 모셔져 있는 불보살, 산신의 가피력이 지중하므로 신심있게 기도하면 소원 성취할 수 있는 도량이다. 법당 뒤 부처님 얼굴 바위, 두꺼비 바위, 지맥석(마당바위), 좌선대, 소원성취 바위, 코끼리바위 등 신비한 바위들이 많다. 오봉산을 둘러싸고 있는 부산성, 일몰, 야경 등이 아름답다. 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건천읍, 경부고속도로, 주변의 명산 경치 또한 오봉산 주사암의 자랑거리라 할 수 있다. 2. 김유신 장군과 화랑도가 호연지기를 기른 마당바위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천촌리 오봉산 정상 근처의 주사암에서 50m 떨어진 곳에 마당바위가 있다. 거대한 바위 위에는 100명 이상의 사람이 앉을 수 있다. 삼면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추락하면 목숨이 위험하다. 일명 벼랑바위라고도 한다. 이곳은 김유신 장군과 화랑들이 호연지(浩然之氣)기를 기르던 유서 깊은 곳이다. 많은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로 탁 트인 조망이 좋다. 신라 때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훈련시키며 바위 위에 쌓아둔 보리로 빚어 군사들에게 먹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러한 연유로 마당바위는 지맥석(持麥石)이라 한다. 바위에 쌓아둔 보리가 비에 젖어 막걸리로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필자가 마당바위를 면밀하게 관찰해보니 전체 전경이 나오는 모습은 주사암에서 마당바위로 가는 중간에 큰 전망바위가 있는데, 여기서 촬영기사, 사진가가 찍고, 드라마 주인공, 관광객과 등산객은 마당바위 위에서 멋진 포즈를 잡으면 된다. 돌출된 마당바위로 가는 곳에 아름다운 소나무도 있고, 작은 돌탑도 있다. 마당바위는 주사암 쪽에서 보면 전체가 일체로 된 바위로 보였으나, 바위 위에 올라와 주사암 쪽을 보니 가장자리 바위에 틈새가 보였다. 또한 마당바위 오른쪽 끝으로 가서 보니 약간 우뚝 솟은 바위가 있었는데, 마당바위 본체와 약간 분리되어 있었다. 마당바위 삼면이 절벽으로 가장자리에 다가갈수록 추락 공포로 인해 오금이 저렸다. 김유신 장군과 화랑도, 군사들이 훈련할 때 호연지기, 담력을 키우기 알맞은 장소로 보였다. MBC에서 방영되었던 인기드라마 ‘선덕여왕’이 마당바위에서 촬영되었다. ‘동이’, ‘밤을 걷는 선비’, ‘신사임당’, ‘왕이 된 남자’, ‘역적’, ‘대박’, ‘달이 뜨는 강’ 등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천년고도 경주에서 다양한 드라마 촬영 등으로 경주지역에 미치는 직접적인 효과는 다양하다. 촬영기간에 배우, 스탭, 엑스트라 등 관계자들이 경주에 머물면서 숙박비, 식비 등의 지출로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간접적인 경제적 효과로는 드라마 본방송, 재방송, 예고편, 보도 등을 통한 경주와 관광지, 알려지지 않았던 비경 등의 무료광고와 지역의 홍보효과를 들 수 있다. 드라마 시청을 통한 경주를 방문할 잠재 관광객까지 미칠 여파를 환산하면 향후에도 많은 경제적 효과가 예상된다. 3. 김유신 장군과 화랑도가 연마한 호연지기 호연지기는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뜻을 풀이하고 있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도의(道義)에 근거(根據)를 두고 굽히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바르고 큰 마음,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 큰 정기(精氣), 공명정대(公明正大)하여 조금도 부끄럼 없는 용기(勇氣)라고 하였다. 호연지기의 출전은 맹자(孟子)의 공손추편(公孫丑篇)라고 하였다. 맹자의 대장부론, 대장부의 조건은 ① 부동심(不動心), ② 지언(知言), ③ 호연지기(浩然之氣) 세 가지를 들었다(인문학포털, 아트앤스터디). 첫째, 부동심(不動心)은 욕심이 나는 커다란 이익을 앞에 두고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둘째, 지언(知言)은 다른 사람의 주장의 요지, 실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통찰력을 말한다. 끝으로,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온 세상에 가득 찬 큰 기운을 말한다. 호연지기는 말로써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 기운이 크고 강해서 바르게만 기르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그 기는 의(義)와 도(道)를 따라 길러지며 이것이 없으면 시들고 만다. 이것은 자신 속에 올바른 것을 쌓아 올림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옛날 중국 제나라 시절 맹자와 제자인 공순추와 나눈 대화에서 호연지기가 나온다. 남회근(『맹자와 공손추』, 남회근 지음/설순남 옮김, 부키, 2014)은 맹자의 호연지기 사례로 남송의 시인으로 원나라에 저항하다 감옥에서 죽은 문천상의 ‘정기가’를 인용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투항을 권유하였기에 고개만 숙이면 부귀영화가 보장됨에도 불구하고 충절을 지키기 위해 끝내 처형을 요구했다. 자신의 남송에 대한 변치 않는 충성심을 ‘정기가’라는 시로 표현하였다. 감옥살이 3년 만에 처형이 확정되자 쿠빌라이에게 ‘자신의 요구를 들어줘서 감사하다’며 읍을 올린 문천상의 기개를 소개하며 “이것이야말로 온 천지를 가득 채운 호연지기”라고 하였다. 정기가를 지으며 절개를 지킨 문천상은 중국, 한국에서 만고충신으로 존중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몽주, 임진왜란 때 순절한 송상현 동래부사도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김유신 장군과 화랑도의 얼이 살아있는 주사암의 마당바위를 가는 등산코스는 여러 갈래가 있다. 필자는 건천읍 유학사를 통해 여근곡, 전망바위, 코끼리바위, 부산성, 오봉산, 주사암, 마당바위, 동전바위, 주사굴을 거쳐 4시간 반 정도 걸려 원점 회귀하였다. 올라가는 등산로는 가파르지만 내려올 때는 내리막길로 수월하게 하산하였다. 전망도 좋고 볼거리가 많아 힘은 들었지만 등산하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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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군위군 김유신·소정방·이무 장군을 모신 효령사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효령사 김유신이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이끌고 오는 군사를 마중 나가 기다린 장소가 지금의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라고 한다. 장군리에 진을 친 장수들인 김유신, 이무, 소정방은 모여 앉아 어떻게 하면 백제를 쳐 신라의 승리로 이끌 것인가를 의논했다고 한다. 장군리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장군들이 머리를 맞대었던 의미 있는 장소였다.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 효령사(孝靈祠)는 신라 명장 개국공 태대각간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 신구도대총관 소정방(神丘道大摠管 蘇定方), 대사마 좌위 중랑장 신라연안후 이무(大司馬左衛中郞將 新羅延安侯 李茂) 삼공(三公)을 모신 사당이다. 효령사 제단에는 김유신·소열(정방)·이무 장군 세 사람의 신장(神將)을 적은 위패가 있다. 신라장수 김유신, 당나라장수 소열(정방), 그리고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화한 이무 장군이다. 효령사는 장군당(將軍堂)이라고도 한다. 현지에서는 ‘장군댕’이라고도 불린다. 고려 말엽 이곳 주민들이 옛일을 추모하기 위하여 효령사에 매년 3월 3일에 향사를 지내다가 요즘은 김해 김씨와 연안 이씨 양 문중에서 단오에 향사를 지낸다고 한다. 1881년 이곳 군위현감이 쓴 효령사 중수상량문에는 ‘백제통합 삼한일광(百濟統合 三韓一匡)’이라는 글이 들어 있다. ‘백제를 통합하는 것이 삼한을 바로잡는 시작이 된다.’는 뜻이다. 군위는 지리적으로 삼국시대 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전초기지이자 그 길목에 위치했다. 김유신 장군이 경주에서 출발하여 영천, 신령을 거쳐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 마을에 주둔했다. 김유신 장군이 당나라 소정방과 합세하여 백제를 치기 위한 작전 계획을 숙의하였다. 금강으로 해서 광주 공주로 진군하는 나당 연합 작전 계획을 장군리에서 하룻밤 유숙하면서 수립하였다. 장군리라는 마을 지명이 여기에서 유래 되었다. 제동서원 왼쪽에 효령사로 올라가는 시멘트로 만든 계단이 있다. 계단이 무려 309 계단으로 한참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기 쉽게 일직선이 아니라 방향을 꺾어 구불구불하게 만들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구릉의 정상인 장군봉에 이른다. 일명 장군당 (將軍堂)이라고도 하는 효령사(孝靈祠)의 편액이 걸려 있다. 사당 옆 오른쪽에 효령사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효령사 사당의 정문은 잠겨있으며, 현판은 일통문(一統門)이라고 적혀 있다. 일통문은 삼국통일의 주인공인 김유신 장군, 신라를 도와서 삼국통일에 기여한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과 이무 장군을 모신 효령사의 출입문에 어울리는 문구이다. 정문에서 왼쪽 담장으로 돌아가 보니 출입문 나무 사이의 흙벽이 떨어져 있어 수리가 시급하다. 효령사에서 아래 들판을 내려다보니 나뭇가지가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을, 논밭, 농협 하나로마트 등이 보였다. 1363년 전 신라시대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 정벌을 위해 장군리 들판에 진을 친 모습을 상상하며 들판을 내려다보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백제처럼 지도층이 사치와 향락을 일삼고 부패하면 나라가 망하고, 신라처럼 왕과 신하, 백성들이 일치단결하면 나라가 부흥한다는 사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실이다. 2. 장군당의 단오 행사 지난 6월 22일 단오에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에서 ‘제5회 군위 삼장군 단오축제’를 개최하였다. 군위삼장군단오축제는 군위문화원이 주관하여 열렸다. 효령면 장군리에 위치한 효령사에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하는 데 협력한 김유신, 소정방, 이무 세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5월 5일에 관민이 모여서 단오제를 올리고 단오놀이를 한 것에 유래한 전통 행사이다. 고려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오랜 기간 중단되었다가 근래 다시 부활하였다. 군위군이 대구직할시로 편입되지만 군위 삼장군 단오축제는 전통문화를 살리는 의미에서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강릉 단오제에서 김유신 장군이 대관령 산신으로 모셔지는 행사는 수백 년간 이어져 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김유신 장군과 인연이 되어 단오제 행사가 열리는 군위군과 강릉시는 상호 자매결연을 맺어 교류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단오제는 삼장군 통일로드 행렬을 시작으로 투호 던지기, 제기차기, 창포비누만들기, 목판체험, 장군단오 놀음, 단오 팔씨름대회, 단오가요제 등 다양한 단오놀이와 지역 예술동아리·전문공연팀 공연, 각종 전시행사를 비롯해 단오날 마을에서 신에게 올렸던 공동체 제의를 재현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당나라에 청병(請兵)하고, 당은 원군(援軍)을 파견하였는데, 원군의 대장은 소정방, 부장은 이무였다. 이들이 신라로 오고 있을 무렵, 신라에서는 김유신 장군과 많은 군사를 보내어 마중하게 했다. 김유신 장군은 장군리 넓은 들에서 당군(唐軍)과 만나게 되었다. 나당연합군은 잠시 효령에 군사를 머물게 했으며, 삼장군은 장군봉에 지휘소를 마련하고 백제를 공략할 작전을 수립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후 삼장군은 다시 효령에 들러 장군봉에 올라 큰 소리로 “삼국통일이 되었으니, 안심하고 살아라.”라고 말한 뒤에 떠났다(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이런 일이 있은 후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삼장군을 잊고 지냈다. 그런데 고려 후기 어느 때부터인지 장군봉 인근에서는 말을 타고 그냥 지나가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장군봉 밑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우고, 말을 탄 사람은 반드시 내리게 하였다. 또 장군봉 정상 부근에 접근하는 사람이나 가축이 변을 당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그 까닭을 캐어 보니 삼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해주었는데도 백성들이 고마움을 모르고 제사도 올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살던 사공씨(司空氏)가 나라에 상소하여 마침내 나라의 명으로 삼장군당을 짓고, 매년 오월 단오에 관민이 합심하여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삼장군제는 19세기 후반까지 전승되어 왔다. 단옷날이 되면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영신(迎神) 행진을 한다. 현의 우두머리 아전이 말을 탄 채 앞장서고, 울긋불긋한 여러 깃발을 들고 말에 실은 큰 북을 둥둥 치면서 거리거리를 누빈다. 이렇게 영신 행진이 끝나면 장군당에 다같이 올라가서 삼장군께 경건한 제사를 올린다. 제사가 끝나면 꽹과리, 징, 북, 소고를 울리며 뒤풀이를 한다. 이때는 삼신(三神)을 모시고 신유(神遊) 행진을 계속한다. 19세기 후반에 들어 음력 정월 보름 제사가 추가되어 일반 동제와 같은 성격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당제에 대한 관의 지원이 끊어지고, 18세기 후반에 불로리에 입촌한 김해 김씨들이 제사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제례는 김유신 장군의 후손으로서 제사권을 주장하는 김해 김씨가 맡고 풍물, 영신 등 오신행위(娛神行爲)는 인근 마을의 사공씨를 중심으로 한 주민들이 맡았다. 이 무렵 제례에 향사적 성격의 홀기(笏記)가 등장하여 민속신앙적 의례행사가 점차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 들어 일제의 간섭이 심해져 제의 규모가 극도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제의 주체가 주민에서 김해 김씨에게로 넘어가면서, 마침내 제례가 향사(享祠)로 변하게 된다. 1953년 김해 김씨들이 장군봉 아래에 세운 제동서원(濟東書院)이 자리를 잡자, 삼장군의 신좌를 서원의 숭무전으로 옮기게 된다. 제일(祭日)도 단오에서 삼월 초정일(初丁日)로 바뀌었다가 1981년부터 삼월 삼짇날에 지낸다. 1995년 원래의 장군당 초석 위에 효령사(孝靈祠)라는 삼칸 와가(瓦家)로 복원하고, 세 장군의 위패 또한 바꾸었다. 현재 삼장군제는 단옷날 오전 10시를 기하여 행해진다. 제관들은 미리 선정하는데, 군수가 초헌관을 담당한다. 제물은 조, 쌀, 돼지머리, 녹포, 대구포, 육포, 어포, 미나리, 무, 대추, 잣, 밤, 은행, 호도 같이 날 것을 사용하고 제상(祭床)에는 수저가 없다. 옛날 장군들은 날짐승을 칼로 베어 먹었기 때문이다. 3. 신라로 귀화한 이무 장군 장군당의 삼장군 중의 한 분인 이무 장군(李茂)은 당나라 장수로 참전하였다. 총사령관 소정방 장군의 부장으로 신라에 왔는데, 후일 신라 여인(백제 출신)과 결혼하였으며 당나라로 귀국하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여 연안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소정방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도와주러 왔으나 내심으로는 신라까지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품고 있었다. 부장인 이무 장군은 소정방의 오만한 의도를 말리며 신라의 입장을 존중해준 장군이었다. 이무 장군과 비슷한 사례는 주한 미군에도 있었다. 미국의 장군으로 한국에 근무하면서 진정으로 한국을 사랑하고 도와준 고마운 장군의 사례를 소개한다. 주한미군의 장성 중에도 1977년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에 반대하였다가 예편당한 존 싱글러브 육군 소장은 진정한 군인이었다. 주한미군 덕분에 북한의 남침을 억제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는 경제발전을 하여 빈곤 국가에서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도약하였다. 1977년 5월 29일 자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 때문에 군복을 벗게 되었다. 이 인터뷰에서 존 사르 기자는 싱글러브 장군에게 “귀하는 카터 대통령의 철군 계획이 전쟁을 부를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싱글러브 장군은 “만약 (카터의) 철군 계획대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면, 그다음에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일개 육군 소장이 대통령의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反旗)를 든 것이다(월간조선, 2022년 3월호). 이무 장군은 백제를 평정(平定)하는 데 공을 세워 연안백 (延安伯)과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고, 그 후 신라에 귀화하여 살게 되었다. 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황해도 연안(延安) 땅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조선조 연안 이씨는 총 250여 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이 되었다. 연안 이씨 시조 이무 장군은 당나라 장군이었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이 대총관이 되고 이무는 부총관겸 독군(군사 감독관)이 되어 13만 당나라 대군을 인솔해 지금의 덕적도와 기벌포로 들어와 신라의 김유신 장군,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같이 백제의 수도 부소성(부여)를 공격하였다. 이무 장군은 소정방과 김유신 장군과의 주도권 분쟁이 있을 때 조정, 화해시켰다. 당군이 백제를 점령한 후 독단으로 백제를 식민통치하면서 동맹국인 신라마저 공격할 때는 소정방을 사전 저지시키고 나당 관계를 원만이 이끌어 준 공로로 660년 8월 25일 신라국에서 연안백 작위와 귀빈 대우를 받았다. 668년 9월 15일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 평양성 함락시키고 삼국통일 때는 신라국 대장군 김유신 장군의 추천으로 연안백(延安伯)에서 한 등급 올려서 직위가 높은 연안후(延安侯) 작위와 연안 지방 1000호 식읍을 받았다. 당시 당나라는 측천무후의 섭정으로 국정이 어수선했던 때라 이무 장군은 본국인 당나라로 귀국하지 않았다. 1300여 년 전 신라가 세계적인 대제국인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승만 대통령의 현명한 판단 덕분에 세계 최강국이자 민주국가인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급속하게 경제가 발전하였다. 반대로 북한은 공산주의로서 공산국가인 소련, 중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세계 최빈곤국이 되고 말았다. 국가는 생존을 위해 동맹이 필요하며, 자유 민주 체제가 우월함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이무 장군은 신라를 돕기 위해 당나라 장군으로 왔지만 신라 정복의 야욕을 품은 소정방을 설득하여 신라에 큰 도움을 주었다. 삼국통일 후 귀국하지 않고 연안 이씨의 시조가 되어 명문가를 이루었다. 개인에게는 친구가 중요하고 국가는 동맹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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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 김유신 장군 사당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주민들이 장군신으로 모시는 김유신 장군 경상북도 군위에 있는 김유신 사당에 대해서는 『동국세시기』 단오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군위군 효령(孝靈) 서악(西岳)에 김유신 사당이 있는데, 속칭 삼장군당(三將軍堂)이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매년 단오에 그 고을 수석 아전이 고을 사람들을 데리고 역마로 깃발을 들고 북을 치며 가서 신을 맞이해 동리로 내려와 제사하는 풍속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유신은 특히 단오제와 관련하여 숭배되었다. 강원도의 대관령산신당은 김유신을 산신으로 모시고 있는데, 강릉단오제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 惺所覆瓿藁』 권14 대령산신찬조(大嶺山神贊條)의 내용에는 그가 여름에 강릉에 가서 단오제를 구경한 일이 있다. 5월의 길일을 택해 대령신(大嶺神 : 대관령 산신)을 맞으러 갈 때 그 신에 대해 이속(吏屬)에게 물어보니 “그 신은 다름아닌 신라대장군 김유신”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두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강릉단오제와 군위의 김유신장군제는 같은 계열의 축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대로 왕이나 대장군을 치제(致祭)하던 유풍이 단오축제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경상도 군위현에 김유신 신사(金庾信 神祠)가 있는데 거기에는 그의 어머니 만명(萬明)을 모시고 있으며, 무녀들이 그 만명을 섬기는데 신당에는 반드시 명도(明圖)라는 구리거울을 걸어 놓았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김유신과 함께 그의 어머니 만명공주도 신격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무속에서 받드는 ‘말명할머니’는 다름 아닌 ‘만명’인 것이다. 2. 장군당 660년(무열왕 7)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백제를 공략하기 위해 경주를 출발하여 사비성으로 향하던 중 영천, 신녕, 소계(현재 효령면 화계리)를 거쳐 이곳 장군당이 있는 장군리에 진을 치고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를 기리기 위해 고려 말엽 이곳 사람들이 산 위에 조그마한 사당을 지어 장군당이라 하고, 김유신의 위패를 모셨다. 매년 단오날이면 사당 주위에 많은 기치창검을 둘러 세우고 북을 치며 현감 이하 여러 관원과 지방민들이 제사를 지냈다. 일각문인 일통문(一統門)을 정문으로 두고 담장 안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초익공 맞배지붕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사당의 중앙에는 ‘효령사(孝靈祠)’라는 현판을 달았다. 효령사는 1993년에 새롭게 중건한 건물이다. 대구광역시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는 장군당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신라 김유신 장군이 백제를 치기 위해 소정방 장군과 함께 이 마을에서 진을 쳤다. 세월이 흘러 비만 오면 마을 뒷산에서 풍물소리가 들려왔고, 이유를 따져본즉 마을에 그와 같은 내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김유신 이하 장군들의 위패를 모신 장군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자 그 소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대구광역시 군위군 효령면(孝令面) 장군리(將軍里)는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장군당, 웃장군댕이, 못안, 구효령, 찬샘골, 나실, 늑동 등이 있다.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어 불리게 된 ‘장군당’, ‘웃장군댕이’는 장군당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못안’은 구을지라는 못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구효령’은 과거에 효령면의 소재지가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며 ‘찬샘골’은 찬샘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 한다. 군위군 효령면에 위치한 효령사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위해 김유신 장군이 병력을 이끌고 장군리에서 주둔한 곳으로 고려 말엽 이곳 주민들이 추모를 위해 건립했다. 이곳 장군당(효령사의 옛이름)은 고려 말 효령에 정착한 사공 중상(司空 仲常) 공의 상소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김해 김씨 및 연안 이씨 문중에서 운영하고 있다. 철종 13년 (1862) 효령사 화재로 중수한 다음 오랜 세월이 지나 퇴락되어 1946년 후손들의 성금으로 제동서원(濟東書院) 창건시 숭무전을 신축해 위패를 봉안하고 산상(山上)에는 유적비를 세워 매년 5월 5일 단오날에 대제를 봉행한다. 현재 효령사 제단에는 김유신·소열(정방)·이무 장군 등 세 사람의 신장(神將)을 적은 위패가 있다. 그들은 신라 장수 김유신, 당나라 장수 소정방, 그리고 당나라 장수에서 신라로 귀화한 이무 장군이다. 장군당은 12월 2일에 답사하였는데, 지명도 장군리라 부르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도로명 주소로 바뀐 것도 ‘장군당 1길 35’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잘 살렸다. 백제 정벌에 나선 신라 김유신 장군, 당나라군 총사령관 소정방(蘇定方), 부장 이무(李茂) 장군이 이곳에서 만나 백제 정벌에 관한 군사 전략을 논의한 유서 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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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김유신 장군이 전공을 세운 낭비성은 상당산성인가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상당산성 축성은 김유신 장군 아들이 쌓았다는 설 김유신 장군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고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낭비성은 청주에 있는 상당산성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지난 11월 22일에 청주의 상당산성을 답사하였다. 청주의 상당산성(上黨山城)에서 상당(上黨)이란 뜻은 높은 지위의 무리가 있다는 뜻과 주변에 비해 높은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백제시대 상당현에서 유래한 듯하며, 현재 청주시 상당구의 어원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름 붙여진 청주 상당산성은 우리나라에서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조선 중후기의 대표적인 석성이다. 둘레는 4.2㎞, 내부면적은 22만 평에 이른다. 오목한 분지를 싸안고 등성이를 둘러쌓은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산성의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다.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쌓았다는 설, 김유신 장군의 셋째 아들 원정공(元貞公)이 쌓은 서원술성(西原述城)이라는 설이 있다. 또는 궁예(弓裔)가 쌓았다는 설도 있다. 원래 청주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토성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축성되었는데, 특히 조선왕조 숙종~영조 사이에 대대적인 개축이 있었다. 오늘날의 산성 모습은 대체로 그 당시에 개보수된 것이다. 조선후기 청주읍성에는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이 있었다. 청주 상당산성에는 병마우후가 있었다. 당시 상당산성에는 남·동·서의 세 문과 수문, 암문과 동장대·서장대, 산성의 지휘관이 거처하는 관사와 여러 부속 건물, 창고, 구룡사(九龍寺)와 남악사라는 두 절, 청심암이라는 암자, 승군 창고, 연못 다섯 군데와 우물 열다섯 개가 있었다. 영조 때는 주둔군이 모두 238명이었고 비축된 양곡은 5,000석 가량이었다. 성안에 절이 있었던 것은 성을 지키는데 필요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승군이 거주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규모를 가진 청주 상당산성은 19세기에 점점 퇴락하고 문루도 모두 없어졌지만,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1970년 10월 1일 사적 제212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71년부터 성벽과 누문을 복원, 수리하기 시작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의하면 상당산성은 지정면적 180,826㎡. 원래 그 자리에 백제시대부터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상당산성은 1716년(숙종 42)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백제시대에 청주목(淸州牧)이 상당현(上黨縣)이라 불렸고, 숙종 때 축성기록에 ‘上黨基址 改石築(상당기지 개석축)’이라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8부 능선에서 시작하여 성안의 골짜기를 포함하고 있는 동서의 등성이를 타고 사행(蛇行)하는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4.2㎞의 유구가 잘 남아 있는 서벽과 동벽의 높이는 약 3∼4m에 이른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성벽 위에 설치하였던 성가퀴[城堞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성벽의 안쪽은 돌을 깨뜨려 틈을 메운 뒤 흙을 채우고 다지는 공법을 사용하였다. 청주 상당산성에는 3개의 큰 문이 있다. 남문은 공남문 또는 공작루, 동문은 진동문, 서문은 미호문으로 부른다. 공남문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공남문은 수차례 붕괴되었으나, 1977년에서 1978년까지 보수공사를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공남문의 문 옆벽에는 1802년에서 1836년까지 성을 개·보수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공남문 앞은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어 시민들의 사적공원으로 크게 이용되고 있다. 공남문을 들어서면 옹벽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이것은 남아 있는 용도(甬道)의 일부다. 공남문을 지나 서쪽으로 오르는 성둑 길에는 성둑을 따라 돌멩이가 박혀 있다. 이는 성둑 위에 다시 쌓는 여장(女墻)의 흔적으로, 공남문 서쪽길에 여장의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우리말로 ‘성가퀴’라고도 한다. 요철로 된 부분을 통해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되치는 기능을 하였다. 일부에서는 이 산성을 삼국시대 김유신(金庾信)장군의 전적지인 낭비성(娘臂城)으로 비정하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둑 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작은 문이 나타난다. 이것은 비밀통로 역할을 한 암문(暗門)이다. 암문은 남암문과 동암문 두 곳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청주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청주는 물론 증평, 오창, 미원으로 이어지는 벌판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2. 상당산성 발굴 조사 청주 상당산성은 1970년대부터 꾸준한 발굴조사와 복원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청주대학교 이원근 교수와 충북대학교 박물관은 각각 1978년과 1982년에 지표조사를 하였는데, 모두 간략한 조사에 그쳤다. 본격적인 발굴 조사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 시작되었다(디지털청주문화대전).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는 1994년에 동장대의 옛터를 시굴 조사하여 보화정을 복원하였으며, 1995년도에는 발굴조사를 통해 서장대의 규모와 위치가 확인되었다. 서장대 혹은 제승당은 15평 규모였다. 2000년에도 성벽보수구간을 중심으로 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그와 동시에 산성 복원도 꾸준히 이루어져 어느 정도 조선시대의 산성 원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2002년에는 청주시의 의뢰를 받은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북벽의 수구에서 미호문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목적은 2001년 1차 시굴조사를 바탕으로 향후 성벽보수공사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발굴 결과 미호문 밖 고석축을 포함한 성벽구간, 옛 산성으로 추정되는 성벽과 북벽 수구의 집수시설, 건물지 2개소가 밝혀졌다. 이와 같은 발굴 결과 청주 상당산성의 실체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청주 상당산성에는 진동문, 미호문, 공남문의 3개문과 동암문, 남암문의 2개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있었다. 현재의 저수지는 본래 수문이 홍수로 없어진 후 1943년에 보다 확장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서문은 3곳의 성문 가운데 가장 특이한 평면을 가지고 있는데, 성밖으로 좌우에 성벽을 돌출시켜 방어에 유리하도록 옹벽(擁壁)을 만들고, 문안에서 왼쪽으로 휘어 돌아 문루(門樓)에 오르게 하였다. 이는 흔히 암문(暗門)에서 볼 수 있는 형식으로, 서문에 이를 응용하여 비용을 줄이고 전술 효과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 문루는 1978년 복원 후, 지반이 침하되어 변형이 일어나 2015년 해체후 원형 복원하였다. 미호문(弭虎門)에서 바깥으로 38m 떨어진 곳에 옛 서문 자리가 남아 있다. 문길의 길이는 590cm이고 측벽은 대부분 유실되었다. 옛 서문 유구는 발굴조사 자료를 토대로 2003년도에 정비하였다. 상당산성 미호문(弭虎門 : 서문)은 그간 수차례 부분 보수가 이루어졌다. 문루여담 및 육축구간의 면석선단석이 이완 및 기울어짐이 심하여 관람객 안전을 고려하여, 문화재 전문가의 자문과 고증을 거쳐 성벽 및 자연석 미석, 여장 하부 1단 등을 2014년 10월부터 2015년 6월까지 전면 해체 보수하였다. 3. 북한 무장간첩 김동식 공작장비 비밀 매설장소(드보크) 상당산성 1호 치성(서남 치성) 근처의 드보크는 북한 직파간첩이 지하당 건설 및 요인 암살 등 대남공작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권총, 실탄, 무전기, 난수표 등 공작장비 25종 80점을 매설한 장소로서 검거 간첩 김동식에 의해 확인 발굴되었다. 2015년 12월 청주시는 시민들과 청소년들이 북한 대남공작 현장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안보의식 함양에 도움이 되도록 새로이 단장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김동식은 1990년 5월 제주도 서귀포 해안을 통해 국내로 침투해 1980년부터 서울에서 활동하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이선실(본명 이화선, 권력서열 19위)을 접선해 대동(帶同) 복귀시켰던 무장간첩이다. 1990년 10월 북한으로 돌아간 김동식은 ‘공화국 영웅 호칭’을 받았다(월간조선, 2015년 3월호). 김동식은 다시 1995년 9월 제주도 온평리 해안을 통해 2차 침투해 공작임무를 수행하다 적발돼 총격전 끝에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체포됐다. 당시 그의 임무는 이선실 복귀 때와 같이 암약 중이던 고첩 ‘봉화 1호’를 북으로 호송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조선노동당 창건 50주년이 되는 1995년 10월 10일을 즈음해 김정일에게 선물할 공작성과로 ‘봉화 1호’의 복귀를 결정했다. 물론 김정일에게 보고해 결재까지 받았다고 한다. 김동식은 ‘봉화 1호’를 복귀시키는 호송원으로 선발된 것이다. 김태욱씨는 “김동식이 복귀 호송하려던 ‘봉화 1호’는 이미 1980년 검거돼 우리 정보기관을 위해 역용(逆用) 공작을 하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역용 공작이란 침투 간첩을 포섭해 역이용하는 공작을 말한다. 무려 15년간 북한 공작지도부에 들키지 않고 고첩으로 활동해 온 것이다. 정각사를 나온 김동식이 사찰 인근에 숨어 있던 간첩 박광남과 함께 걸어가자, 뒤를 밟던 김 요원이 “손들어!”를 외쳤다. 그러자 김동식과 박광남은 안주머니에서 소음기가 부착된 브라우닝 권총을 꺼냈다. 총격전이 벌어졌고 김동식은 관통상을 입고 붙잡혔지만, 박광남은 인근 석성산 쪽으로 달아났다. 당시 군경 6000여 명이 투입됐고 헬기 4대와 군 수색견 16마리, 심지어 반지름 4km 안의 모든 생물체를 감별할 수 있는 열상탐지기(TOD) 등 첨단 전자장비까지 동원했다. 10월 27일 11시경 부여군 초촌면 신암리 야산에서 총상을 입은 박광남을 검거, 경찰병원으로 후송 중 오후 5시 37분쯤 사망했다. 그러나 부여경찰서 소속 나성주 순경(당시 30세)과 장진희 순경(당시 31세)도 작전 중 안타깝게 순직했다. 청주 상당산성은 김유신 장군이 공격하여 함락시킨 낭비성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상당산성 축성은 부친 김서현 장군, 3남 술원공이 쌓았다는 설이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쟁패의 현장임은 분명하다. 또한 현시대의 남북대결이 전개되며 북한에서 남파한 간첩들이 공작 도구를 은닉한 장소가 상당산성 치성 앞에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상당산성 답사를 통해 호국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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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오늘의뉴스남북통일을 위한 안보 교육(사)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양산시회 주최로 12월 14일(목) 오후 3시부터 두 시간 동안 양산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북한이탈주민 배윤희 강사를 초청하여 통일교육을 실시하였다. 남북통일을 위해 ‘소통과 공감하는 생생 통일교육’을 주제로 120여 명이 참석하여 교육을 받았다. 허창훈 사무국장의 사회로 행사를 진행하였다. 식전행사로 황수현 가수 등의 노래 공연이 있었다. 이어서 개회선언, 국민의례, 유기석 회장의 환영사, 배윤희 강사의 통일교육(90분)을 하였으며, 참석자 모두가 함께 태극기와 통일기를 들고 통일의 노래를 부르고, 김상걸 부회장이 만세삼창을 한 다음 폐회선언으로 행사를 마쳤다. 유기석 회장은 환영사를 통해,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가 낮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안보 교육을 하는 의미가 매우 크다고 강조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배윤희 강사의 강의를 경청하고 북한의 실상을 이해하며, 앞으로 한반도 평화통일을 하는 데 있어서 중심 역할을 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통일교육을 한 배윤희 강사는 남북통일의 이해, 북한에 대한 이해, 남북관계, 윤석열 정부의 통일정책, 통일의 미래상 등에 대하여 북한에서 살면서 직접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실감나게 알려 주었다. 참석자들은 교육을 통해 북한의 궁핍한 경제 실상을 알게 되었다. 북한 돈은 가치가 없으며, 노동자들은 한 달 월급으로 쌀 몇 kg밖에 살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북한 돈은 일상에서 거의 쓸모가 없으며, 중국 돈 위안화, 미국 달러가 통용되고 있다. 화폐 개혁이 실패한 후 대신 ‘돈표’를 사용하여 외화를 강제적으로 회수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 방문 외국인들은 달러를 ‘돈표’와 바꿔야만 사용할 수 있다. 공산주의 통제 경제 속에서도 소수의 자본가들이 늘어나며 이른바 ‘돈주’가 활동하고 있다. 외화벌이 일꾼, 아파트를 건설하는 건설업자, 고위 당 간부 등이 ‘돈주’로 음성적인 지하경제를 움직이고 있다. 북한 경제가 파탄나자 주민들은 자구책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장마당에서 장사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에 젊은 계층의 MZ세대가 있다면 북한에는 장마당 세대가 증가하여 당 간부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 먹고살기 힘들어 대한민국으로 탈출한 북한이탈주민들이 돈을 벌어 북한으로 송금하는 액수가 많아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혜택을 보고 있다. 북한에서 결혼 배우자로 인기 있는 사람은 탈북자 가족이라고 한다. 탈북민 가족은 북한에서 김일성 가족의 백두혈통에 빗대 소위 ‘한라산줄기’라고 부러워하고 있다. 결혼 중매할 때 남조선에서 돈을 송금하는 가족이 있는지 제일 먼저 물어본다고 한다. 통일교육을 통해 북한 독재체제에서 신음하고 있는 북한 주민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북한은 3대 세습 독재하에서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핵개발과 미사일 개발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며 독재자 우상숭배에만 몰두하고 있다. 한국 드라마, 영화, 노래 등을 보고 들으면 엄하게 처벌하고 있다. 오늘 참석한 VIP 회원은 유기석 울산양산경영자총회장, 김상걸 전 양산시의회의장, 황윤영 전 양산시의원(양산도시문화연구원 대표), 황신선 전 양산시여성협의회장, 심상도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전 동원과기대 교수), 이정호 양산시자율방재단장, 박종욱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양산시연합회장, 김상주 천주평화연합(UPF)양산시 지회장, 이용운 산수원애국회 양산시회장, 김재원 노인대학장, 최정례 웅진콘테이너 대표, 황수현 (사)한국대중음악인연합회 양산지회장, 조가보 대한노인회 분회장, 허민도 교수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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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김유신 장군 백제 정벌 출정 때 깃발을 꽂았던 기둥1. 전(傳) 김유신 장군 기간지주(旗竿支柱) 김유신 장군이 백제 정벌 출정 때 이곳에 진을 치고 깃발을 꽂았던 기간지주이다. 경주시 건천읍 건천 2리 206번지 안기복(安基福) 씨의 집 앞뜰에 있는, 화강석으로 된 둥근 사다리꼴의 기간지주이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이 지주(支柱)는 깃대를 고정시키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원래는 이런 기둥이 두 개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한 기둥만 남아 있다. 기둥의 크기는 아래쪽이 너비 47cm 두께 40cm이고, 현재 높이는 60cm 남짓하다. 지주의 안쪽 면 상부에는 깃대를 잡아주는 간(杆)을 걸쳤던 긴 홈(杆溝)이 있으며, 크기는 너비 7cm· 길이 12cm·길이 40cm이다. 이 지주의 겉모습은 당간지주(幢竿支柱)와 같으며, 위로 갈수록 조금씩 좁아지는 사다리꼴(梯形)이다. 또한 지주의 네 모서리에는 희미하나마 모죽임이 남아 있다. 한편 이 기간지주는 김유신 장군이 이곳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약 500m 거리에 있는 작성에서 백제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수많은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을 때, 군대의 깃발을 달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기간지주가 있는 작원마을의 골목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라는 김유신 장군의 어록도 적혀 있다. 신라 향가인 모죽지랑가도 써놓았다. 화랑도가 기간지주 앞에 깃발을 들고 무릎 끓고 있는 모습의 벽화도 있으며, 매화꽃도 그려놓았다. 말을 타고 달리는 화랑도가 뒤돌아서 활을 쏘는 장면도 있다. 2. 백제의 공주와 작원성(鵲院城) 경주시 건천읍에는 작원성, 또는 작성(鵲城)이라는 토성이 남아 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이 성의 이름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을 남기고 있다. 백제를 공격할 당시 김유신 장군이 서라벌 왕궁에서 30리가량 떨어져 있는 이곳에 주둔하였다. 백제의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걱정하자, 둔갑술에 능하여 적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싸우는 자용병기(自勇兵器)라는 신비한 무기를 부릴 줄 알았던 공주가 왕을 안심시키고자 자청해서 까치로 변신하여 신라 진영을 염탐하기 위해 이곳으로 날아왔다. 서쪽에서 날아온 까치 한 마리가 대장기 끝에 앉아 울자 군사들은 불길한 징조로 생각해 진중(陳中)이 크게 어수선해졌는데, 김유신 장군이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빼 들고 까치를 향해 겨누자, 까치는 땅에 떨어져 버렸고 그만 변신이 풀려 본래 사람 모습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김유신 장군은 까치가 이미 백제의 공주임을 알고 소리쳤다. 공주는 눈물을 흘리며 엎드려 빌었고 이후 이 성의 이름을 까치 작(鵲) 자를 써서 작성(鵲城)이라 부르고, 마을 이름을 작원(鵲院)이라고 하였다. 3. 건천의 지명 유래 1) 연혁 - 조선말기 : 경주군 내서면 - 1910.10 : 경주군 서면으로 개칭 - 1913.03 : 면사무소를 모량리에서 현 건천리로 이전 - 1917.10 : 광명동을 경주면에, 고지동을 영천면에 편입 - 1928.01 : 19개 행정리동을 29개로 분동 - 1952.07 : 29개 리를 35개 리로 분동 - 1955.09 : 경주읍의 시 승격으로 월성군 서면으로 개칭 - 1973.07 : 11개 법정리, 24개 행정리로 분리, 건천읍으로 승격 - 1989.01 : 월성군 명을 경주군으로 환원 - 1995.01 : 시군통합으로 경주시제 실시 2) 유래 - 건천리(乾川里) 마을은 약 150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번창하였다. 마을 옆 건천강변이 배수가 잘되어 물이 고이지 아니하고 항상 건조되어 한발이 심했으므로 건천이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 태종 23년에 경주 대도독부, 조선시대에는 경주부에 예속, 1895년 경주군 서면에 속해 오다가 1914년 부군통폐합 시 마을이름을 건천(乾川)이라고 하였고 1973년 읍(邑)으로 승격하면서 건천읍 소재지가 되었다. - 건천(乾川)[마을] : 거치내, 건치내라고도 하며, 천포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 건천(乾川)[내] : 거치내, 건치내, 건천내라고도 하는 건천 앞으로 흐르는 내. - 건천교(乾川橋)[다리] : 건천 앞 국도에 있으며, 모량과 아화를 잇는 다리이다. - 건천읍장(乾川邑場)[장] : 건천에 있는 건천읍의 시장으로 건천장, 서면장이라고도 했다. 예전에는 3일, 8일에 섰으나 지금은 5일, 10일에 장이 선다. 건천읍장은 가게가 아주 많아서 장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작원마을 주민들에게 작원성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작원마을, 건천마을을 일주하면서 작원성을 찾아다녔다. 마을 외곽을 지나는 도로인 대경로 밑으로 지나가니 커다란 하천인 대천이 나왔다. 대천 건너편에 야산이 보였는데, 작원성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었다. 자료를 검색해보니 대곡리 쪽의 작원성이 있던 임야를 경주시에서 민간에게 매각하여 유적 훼손의 우려가 있다고 하였다. 작원마을에 김유신 장군이 백제 정벌을 위해 출정하면서 진을 치고 있을 때 깃발을 꽂았던 기둥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은 마치 기적과 같은 일이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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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문경시 당교사적비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당나라 군사와 관련된 다리인 당교 경북 문경시의 시청 건물 민원실 앞에 당교사적비가 있다. 정면에서 시청 건물을 바라볼 때 오른쪽이다. 행정구역이 현재는 문경시이지만 건립 당시는 점촌시였기 때문에 점촌시장 이름이 나와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 전쟁 당시 김유신 장군이 당나라 소정방의 흉계를 물리친 역사의 현장을 기록한 기념비이다. 역사적 기록은 삼국유사 권제일 기이 제일(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태종 춘추공(太宗 春秋公) 편에 나와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은 자료를 소개하면서 자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문경시와 상주시의 지명에 당나라 소정방 군사와 관련된 당교, 뙤다리, 도로명 주소에 당교로, 때대로 등이 남아 있어 소정방과 그 부하 군사들이 몰살을 당한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당교 부근에는 전투에 관한 지명이 많다고 한다. ‘머리뫼(頭山)는 당병의 머리를 잘라 묻었다는 곳이며, 다방터(唐兵터), 뙤밭, 뙤비탈, 또 반쟁이, 반전이(反轉), 이진, 위진(衛鎭) 등 당병의 주둔지로 추정되는 지명이 있다. 점촌5동(茅田洞)의 띠밭, 섶밭, 모전(茅田)은 옛날 이곳에 띠가 무성하여 사람이 살 수 없다고 하며, 경주이씨가 이주하여 개척한 후 동리가 형성되어 모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옛 신라시대 당군의 주둔지라 하여 띠밭(뙤밭)으로 추정된다. 불바다는 당교와 현 시청사 주변 일대의 넓은 들을 말한다. 2. 당교사적비 민족 통일의 성업은 국조(國祖) 단조의 개국 이래 우리 민족의 최대 염원이었으니 이러한 숙원을 풀어준 나라가 신라(新羅)였다.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청소년들의 건전한 거품과 자기 문화를 키운 강력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강한 고구려(高句麗)와 날쌘 백제(百濟)를 아우르기 위하여 일시 당(唐)의 세력을 빌렸지만 통일을 이룩하고는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당나라와도 의연히 맞서 싸워 당군의 말 발굽을 우리 땅에서 말끔히 지워버렸다. 이 어찌 장한 자주 정신의 발로가 아니랴! 당이 신라의 통일성업을 도운 것은 신라마저 속국으로 삼기 위한 욕심에서였다. 신라는 이름 재빨리 간파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맞이하며, 당나라의 침략 야욕을 여지없이 분쇄했다.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장군이 침략자로 돌변한 당의 소정방(蘇定方)을 물리친 역사적 다리가 바로 되다리 당교이다. 우리 고장에 있는 찬란한 호국의 명소이건만 지금은 잊혀진 다리가 당교(唐橋)이다. 통일의 비원을 싣고 달리는 3번 국도 옆에 당교사적비를 세움은 통일의 의지를 오늘에 다시 확고히 하려는 것이다. 통일 신라의 자주정신과 통일 위업을 이 시대의 점촌시민도 마땅히 본받아 조국 통일의 과업을 앞당겨 실현시키는 횃불이 되자. 1990년 4월 국사편찬위원 문화재위원 한국 교원 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鄭永鎬 짓고 심경 黃圭郁 쓰다. 시민의 뜻을 받들어 점촌시 교육장 송지홍 점촌문화원장 이창교 당교사적비건립추진위원의 자문을 받아 점촌시장 신의웅 세우다. 3.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태종 춘추공(太宗 春秋公) 또 『신라고전(新羅古傳)』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토벌하고 나서 또 신라를 공격하려고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김유신이 그 음모를 알고 당나라 군사에게 독약을 먹여 모두 죽여 묻어버렸다.” 지금도 상주 경계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당나라 군사를 묻은 땅이다. [『당사』에 보면 그들이 죽은 이유를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하였으니 어째서일까? 그 일을 감추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신라고전』이 근거가 없는 것일까? 만약 임술년 고구려 싸움에서 신라군이 정방의 군대를 죽였다면 훗날 총장 무진년에 어떻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일이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신라고전』이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진년에 고구려를 멸한 뒤에 당나라에 신하라고 일컫지 않고 그 땅을 차지하였을 뿐, 소정방과 이적 두 사람을 죽이는 데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又新羅古傳云 定方旣討麗濟二國 又謀伐新羅而留連 於是庾信知其謀 饗唐兵鴆之 皆死 坑之 今尙州界有唐橋 是其坑地[按唐史 不言其所以死 但書云卒何耶 爲復諱之耶 鄕諺之無據耶 若壬戌年高麗之役 羅人殺定方之師 則後總章戊辰 何有請兵滅高麗之事 以此知鄕傳無據 但戊辰滅麗之後 有不臣之事 擅有其地而已 非至殺蘇李二公也] 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경상도(慶尙道) 함창현(咸昌縣) 교량(橋梁)조 “당교(唐橋). 현의 북쪽 6리에 있다.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소정방(蘇定方)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여기에 머물렀을 때, 김유신(金庾信)이 그 계획을 알고, 당의 군사에게 잔치를 베풀어 취하게 하고 모두 여기에 묻어 죽였다. 뒷날 사람들이 그것으로 당교라고 이름 지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慶尙道 咸昌縣 橋梁 唐橋 在縣北六里 新羅古記 蘇定方旣討麗濟 又謀伐新羅留屯于此 金庾信知其謀 粲唐兵醉而皆抗之 後人因名唐橋 5. 문경시, 『聞慶誌 上』, 당교전투(唐橋戰鬪) 삼국유사 기이편 제1권(三國遺事 紀異編 第一卷)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신라 옛 전기에 소정방(蘇定方)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를 치고서 또 신라를 치려는 속셈으로 머무르고 있으므로, 유신공이 그 꾀를 알고 당병(唐兵)을 대접하면서 짐주()를 먹여 죽여 쓸어 묻었으니 지금 상주경내(尙州境內)에 있는 당교(唐橋)라는 곳이 바로 그 곳이라 한다”라 하였다. 당군(唐軍)은 백제와 고구려를 친 다음에 신라마저 저 없애고 자기들의 군현을 만들어 한반도 전체를 당나라의 영토로 하려고 획책하니 신라에서는 그와 같은 그 들의 속셈을 간파하고 당교(唐橋 : 오늘의 모진동과 함창읍 윤직리 부근)에서 소정방의 대군을 쓸어 묻고 실질적인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는 결정적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문경은 기쁘고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로 문희경서(聞喜慶瑞)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 보러 가는 양반들은 문경새재를 통과하여 한양으로 올라갔다. 추풍령으로 가면 과거시험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통과하면 쭉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문경 새재를 즐겨 이용하였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김유신 장군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집어삼키려 한다는 야욕을 미리 간파하고, 그 당시 문경과 상주 일원에 주둔하던 당군에게 독이 든 술을 권하여 군사를 몰살시켜 파묻었던 다리가 바로 당교이다. 김유신 장군의 지혜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경사스럽고 기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지명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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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 김유신 장군 묘소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김유신 장군의 사망 문무왕 13년(서기 673년, 당 고종 함형 4년) : 김유신 향년 79세에 죽다(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三國史記 卷第四十三 列傳 第三). 함형(咸亨) 4년(서기 673) 계유는 곧 문무대왕 13년이다. 그해 봄에 요성(妖星)이 나타나고 지진이 나자 대왕이 이를 걱정하였다. 유신이 나아가 말했다. “오늘의 변괴는 그 재액이 소신에게 있는 것이지 국가의 재앙이 아닙니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시옵소서.” 대왕이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과인의 큰 걱정거리요.” 왕은 담당관에게 재액을 물리치도록 기도하게 명하였다. 여름 6월에 융복(戎服, 군복)을 입고 병기를 든 수십 명이 유신의 집에서 울면서 나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이 간혹 있었다. 유신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이는 필시 나를 보호하던 음병(陰兵)이 나의 복이 다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니,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그 후 십여 일 지나서 유신이 병으로 눕게 되자 대왕이 몸소 행차하여 위문하였다. 유신이 말하였다. “신이 모든 힘을 다하여 임금을 모시려 하였으나 소신의 몸에 병이 들어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 이후로 다시는 용안을 뵈옵지 못하겠습니다.” 대왕은 울면서 말했다.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마치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으오. 만약 피치 못할 일이 생긴다면 백성들을 어떻게 하며 이 나라는 어찌하란 말이오!” 유신이 대답하였다. “신은 어리석고 못났으니 어찌 국가에 보탬이 되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현명하신 임금께서 의심 없이 등용하고, 변치 않고 임무를 맡겨 주셨기에, 대왕의 밝으심에 의지하여 하찮은 공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지금 삼한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들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비록 태평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조금 안정되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보옵건대 예로부터 제왕의 자리를 잇는 임금들이 처음에는 잘하지 않는 이 없지만 끝까지 이루어내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심히 통탄할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공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시며 수성하는 것 또한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소인배를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위로는 조정이 화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을 편안하게 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대대로 왕업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왕이 울면서 이 말을 받아들였다. 가을 7월 1일, 유신이 자기 집의 침실에서 죽으니 향년 79세였다. 대왕이 부음을 듣고 매우 애통해하며 채색 비단 1천 필과 벼 2천 섬을 부조하여 상사(喪事)에 쓰게 하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사람) 1백 명을 보내 주었다. 금산원(金山原)에 장사 지내고 담당관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워서 그의 공명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또한 민가를 정하여 묘소를 지키게 하였다. 2. 김유신 장군의 묘소 김유신(595~673년)의 묘는 송화산(松花山)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전망이 좋은 구릉 위의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자리 잡고 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579,569㎡이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에 의하면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때에 이르러, 공을 흥무대왕(興武大王)에 봉하였다.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 북쪽에 동으로 뻗은 봉우리에 있다. 삼국사기에는 흥덕왕(興德王) 10년(835년), ‘흥무왕(興武王)’으로 추존되어 사후 왕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삼국유사에는 경명왕 때 추존되었다고 하여 차이가 있다. 김유신 묘소는 지름이 30m에 달하는 원형의 큰 무덤이다. 봉분 둘레에는 둘레돌[護石]을 두르고 그 외곽에는 바닥에 깐돌[敷石]을 깔았으며, 돌난간[石欄干]을 둘렀다. 둘레돌은 대체로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둘레돌과 같은 양식으로서 벽석(壁石)·연헌석(緣軒石), 연대석(緣臺石)으로 짜여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둘레에는 95㎝ 높이의 탱주석(撐柱石)을 세웠는데 소면석(素面石)과 신상석(神像石)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신상석은 모두 12개로 자상(子像: 쥐) · 축상(丑像: 소) · 인상(寅像: 호랑이) · 묘상(卯像: 토끼) · 진상(辰像: 용) · 사상(巳像: 뱀) · 오상(午像: 말) · 미상(未像: 양) · 신상(申像: 원숭이) · 유상(酉像: 닭) · 술상(戌像: 개) · 해상(亥像: 돼지) 등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이 십이지신상은 다른 왕릉이 갑주무장상(甲胄武裝像)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평복에 무기를 들고 있으며 모두 오른쪽을 향하고 있고 몸[身部]은 ‘을(乙)’자형으로 틀었다. 새김은 대체로 엷게 새긴 느낌을 주나 그 수법은 세련되고 능숙하다. 김유신장군 묘소의 호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상은 그 크기가 각각 세로 96cm, 가로 61cm이다. 모두 문관복을 입고 발을 양옆으로 벌린 정면상이나, 몸과 머리는 오른쪽으로 향한 측면상이다. 손에는 삼지창이나 검 또는 도끼 등의 무기 를 들고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긴 저고리를 허리띠로 묶어 늘어뜨린 옷을 입고, 밑에는 바지를 입었다. 길게 늘어진 소매는 팔뚝에서 묶여져 있고, 옷자락이 늘어진 부분이 바람에 젖혀진 듯 풍성한 옷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상 전체의 신체 비례가 알맞고 팔다리의 표현이 자연스럽다. 또한 각 상의 동물형 얼굴은 그 특징을 살려 세부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조성 시기는 조각 기법으로 미루어 묘를 축조한 이후인 8세기 후반경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능묘 주변에서는 이 밖에도 12방위에 따라 매장된 납석제 십이지신상 중 4개의 상이 발견된 바 있는데 그 조각 솜씨가 뛰어나고 무관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양식적으로는 8세기 중엽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납석제의 십이지신상 1벌을 무덤 주위에 따로 파묻어 이중으로 배치한 것은 이 전김유신묘와 헌덕왕릉 뿐이다. 김유신 장군 묘비석 끝 글자에 릉(陵)과 묘(墓) 자가 겹쳐진 상태를 보이고 있다. 김유신 장군 묘에는 정면에 1710년께 세운 비석이 있고 묘를 마주보고 오른쪽에는 1930년대 후손들이 만든 비석이 서 있는데 오른쪽 비석에서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비석의 비문은 ‘개국공순충장열흥무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릉’과 ‘묘’라는 한자가 같은 위치에 드러나 있다. 특히 비석에 물이 스며들 경우 두 글자 가운데 '묘' 자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문중에서는 오래전에 비석을 세운 데다 관리도 경주시에서 하고 있어 명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이 ‘흥무대왕’으로 추봉된 사실을 모르고 ‘묘’ 자를 새겼다가 이를 바로잡기 위해 그 자리를 돌가루로 메우고 ‘릉’자를 다시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문중에서는 ‘묘’ 자를 메우는데 사용된 돌가루가 비석의 돌과 다른 성분이어서 세월이 흐르면서 형태를 드러냈고 물기가 스며들면 더욱 선명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3. 김유신 장군 묘소의 논란 전에는 이 묘 아래에 수묘(守墓)의 금산재(金山齋)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없어졌다. ‘태대각’이라 새긴 신라비편(新羅碑片)이 경주 교동에서 발견되어 김유신의 기공비편(紀功碑片)으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이 비편에 의해 김유신이 죽자 당시 문무왕이 왕명으로 예를 갖추어 후대한 예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아울러 기공비가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석비는 1710년(조선 숙종 36)에 경주부윤(慶州府尹) 남지훈(南至熏)에 의해 건립된 것이다. 문인석, 무인석, 석상(石床) 등은 모두 수년 전 보수할 때 첨가된 후보물(後補物)들이다. 그런데 학계 일각에서 이 무덤은 김유신묘가 아니고 신무왕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 김유신이 묻힌 금산원의 무덤은 『삼국유사』에는 서산 모지사(毛只寺) 북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고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모지사 북쪽 봉우리에 있고 부(府)와는 서쪽으로 4리 거리라고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주부 서쪽 서악리(西岳里)라 기록되었다. 김유신의 것이라 전하는 묘소는 오늘날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산 7-10번지에 있는데 이것이 진짜 김유신의 무덤인가에 대한 의문이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 4. 김유신 장군에 대한 사후 평가 김유신 장군은 신라 당대부터 나라를 크게 일으킨 충신이자 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숭앙받았다. 주석지신은 나라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신하이다. 주석(柱石)은 기둥과 주춧돌을 가리키는 말로 주석지신은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 노릇을 하는 신하를 의미한다.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 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사후 동해의 용이 되었다 알려진 문무왕과 함께 김유신은 33천의 하나가 되어 신라를 진호(鎭護 : 난리를 진압하고 나라를 지킴)한다는 의식이 널리 퍼졌다. 신라에서 무열왕에게 당 태종과 같은 '태종'의 묘호를 붙인 것을 당이 항의하며 지우도록 요구했을 때, 신라 조정은 당 태종이 현신(賢臣) 위징(魏徵)을 얻어 대업을 이룬 것과 무열왕이 성신(聖臣) 김유신을 얻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룬 것은 동격이라는 논리로 거절하고 있다. 고려의 현종(顯宗)은 최치원·설총과 더불어 그를 개국공(開國公)에 봉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열전의 총 분량(10권) 가운데 3권을 모두 김유신에게 할애하고 있을 정도로 김유신을 존중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열전 10권에 모두 51인이 실려 있는데, 열전의 첫 3권이 모두 김유신에 대한 것이다. 분량으로 보나 열전에 기재된 순서로 보나 고려시대까지 김유신이 얼마나 중요시되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우리역사넷). 조선조에는 무묘(武廟)를 세워 배향해야 할 인물의 한 명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삼국사기』 열전 말미에서 김부식은 유신의 재능뿐 아니라 신라 조정에서 그를 중용하여 믿고 일을 맡겨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공업을 이루었다며 신라 조정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으면 영영 잊혀질 뻔했는데 김유신 같은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칭송하여 사대부는 물론 꼴 베고 나무하는 아이까지도 능히 알고 있다며,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차이가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김유신은 신라 화랑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연이어 섬기면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한 신라를 대표하는 장군이자 죽을 때까지 신라의 앞날을 걱정한 충신이었다. 자신의 아들 원술이 당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도망쳐오자, 비록 그가 패배의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하는 지위가 아니었음에도 군율에 따라 처형할 것을 주장한 것은, 사사로운 정 대신 국가에 대한 충의를 선택한 대표적 사례라 할 만하다. 김유신의 부인 지소부인 역시 김유신이 죽은 이후에도 아들 원술을 만나지 않았고, 원술 자신도 후에 큰 전공을 세워 상을 받았지만, 끝내 자신의 행위가 부모를 실망시킨 것을 부끄러워하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고 하니 그 집안 전체가 충의와 명예를 우선시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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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김유신 장군의 강릉지역 군사 훈련장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대관령산신제(大關嶺山神祭) 대관령산신제는 대관령 산신각에서 음력 4월 15일에 산신인 김유신(金庾信) 장군을 모시고 지내는 제의이다. 강릉단오제의 시작을 알리는 대관령 산신제는 대관령에 위치한 산신각에서 시작한다. 대관령 산신제는 대관령을 지키는 산신을 기리는 제사로 김유신이 명주(溟洲)에서 검술을 배워 삼국을 통일하고 강릉을 수호하는 신격이 되었다고 한다. 대관령 산신제가 강릉단오제의 시작이었다는 기록은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14, 「문부」11, 「대령산신찬병서(大嶺山神贊幷書)」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이보다 앞서 남효온[1454~1592]은 『추강선생문집(秋江先生文集)』 권5,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서 산신제에 대하여 “영동 민속에는 매년 3,4,5월 중에 날을 가려 무당과 함께 바다와 육지에서 나는 음식을 아주 잘 장만하여 산신제를 지낸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부자는 말 바리에 음식을 싣고 가고 가난한 사람은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가서 신의 제단에 제물을 진설한다. 피리 불고 북을 치며 비파를 뜯으며 연 3일을 즐겁게 취하고 배불리 먹은 후 집으로 돌아와 비로소 매매를 시작한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조그만 물건도 얻을 수도 없고 주지도 않는다(嶺東民俗, 每於三四五月中擇日迎巫, 極辦水陸之味以祭山神, 富者駄載, 貧者負戴, 陳於鬼席, 吹笙鼓瑟, 嬉嬉連三日醉飽, 然後下家, 始與人買賣, 不祭則尺布不得與人).”라고 하였다. 이 기록은 남효온이 1471년에 고성 삼일포를 지나며 산신제를 지내는 행사를 언급한 것이다. 여기서는 비록 강릉을 지칭하지 않았으나 영동 민속이라고 언급한 것으로 미루면 강릉 지방이 포함된다. 산신제를 지내고 축제를 여는 모습이 강릉단오제와 흡사하며 더구나 3월부터 축제 준비를 하여 4월과 5월 단오날을 택해서 제를 지내는 모습이 같다. 제관의 선정 및 역할은 다음과 같다. 강릉시장을 비롯하여 단오제 위원장, 단오제 제례부분 기예능보유자를 삼헌관으로 선정하고 강릉단오제보존회에서 제집사를 맡아서 진행한다. 대관령 산신제는 홀기에 따라 진행되는데 신을 뵙는 행참신례(行參神禮)로부터 폐백을 드리는 행전폐레(行奠幣禮), 초헌관이 드리는 행초헌례(行初獻禮), 폐백과 축문을 소각하는 행망료례(行望燎禮), 신위를 사뢰하는 행사신례(行辭神禮)로 끝난다. 제물, 용품, 제구는 다음과 같다. 반병미백미삼승삼합(飯餠米白米三升三合), 제주일승(祭酒一升), 우육생이근(牛肉牲二斤), 육오근(肉五斤), 해물우락어(海物遇樂魚) 또는 열강어오미(悅江魚五尾), 문어일조(文魚一條), 명태어십오미(明太魚十五尾), 대구포중일미(大口脯中一尾). 계란 열개, 조일승(棗一升), 율사승(栗四升), 건시일접(乾柿一接), 배 또는 사과 열 개, 산자 또는 과자, 소채류 약간, 조미료 약간 등이다. 축문, “모년 4월(간지삭) 15일(간지) 모관 모인은 감히 밝게 대관령 산신님께 아뢰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데 존령님은 저희 대동땅[영동지방]에 있어서 종요로운 자리에 계시오며 저희들을 보살피고 도와주시옵니다. 비바람을 조절하시어 풍년이 들게 하심과 악을 제거하시고, 재앙을 물리치시는 이 모두가 존령님의 공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오래도록 제사를 받들어 복을 빌기를 그치지 아니하여 삼가 마련한 제물로 공경을 다하여 정성껏 올리오니 흠향하옵소서(維歲次 某年干支 四月干支朔 十五日干支 某官 某敢召告于大關嶺山神之神 伏惟 尊靈 重鎭大東 保佑我人 出雲興雨 除惡去災 罔非神功 永言報祀 求福不回 謹以淸酌 脯醯祗薦于神 尙 饗).” 대관령 산신제는 음력 4월 15일 10시부터 제관들의 삼헌과 홀기에 의해 진행되고 제물은 규모에 따라 신축성이 있다. 음복은 시민들의 헌미(獻米)로 단오신주와 시루떡을 만들어 나누어준다. 2. 군웅(軍雄) 굿 강원도 강릉시에서 행해자는 굿으로 별칭은 놋동우굿,놋동이굿,논동우굿,장수굿,군웅장수굿 등이다. 강릉단오굿과 강원도 지방 별신굿 등에서 장군신을 모셔 행하는 굿이다. 군웅장수굿 또는 논동우굿이라고도 불리우는데 군웅의 성격은 상당히 복합적이다. 조상신, 농신, 사신이나 장수의 신으로 모셔지기도 하고 외부에서 들어와 잡귀를 물리치는 신으로도 나타나는데 강릉단오굿의 군웅은 장수신의 성격이 강하다. 별신굿에서는 김유신을 비롯한 여러 장군을 청한 뒤 무당이 놋동이를 입에 물고 장군의 위엄과 위력을 보인다. 군웅장수굿의 장단은 청보 1장~6장까지이고 각 장수들이 들어올 때는 굿거리장단으로 친다. 굿은 청배무가와 춤, 놀이굿, 장수풀이, 놋동이물기, 축원, 수부물림 등으로 진행된다. 군웅굿의 장수신은 욕심 많고 탐심이 많아 잘 모셔야 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이름이 난 우리나라의 여러 장수들을 부르는 장수풀이를 한 뒤 음식을 차려 잘 대접한다. 특히 술타령이 건드러진다. 장수신의 도움으로 자손들이 복을 받기를 기원한다. 놋동이가 사용된다. 무가의 구연이 끝나면 무당이 무거운 놋동이를 입에 물어 올려 신의 위력을 보여준다. 놋동이는 상과 채를 여러 개 놓고 그 위에 놓기 때문에 상당히 무거워지고 그렇게 높아진 놋동이를 입으로 무는 무당의 힘과 신의 위력은 그만큼 크게 느껴진다. 사람들은 다투어 앞으로 나와 놋동이 안에 돈을 넣고 놋동이를 만져 신과 직접 접촉하려고 한다. 무녀는 철릭 모양의 활옷을 입고 머리에는 전립을 쓴다. 단오굿 제차의 하나로 행해지고 있다. 3. 김유신 장군이 주둔한 영채(營寨) 강원도 강릉시 송정동에 있는 들로서 별칭으로 하평(下坪)이라고 한다. 영채(營寨)는 이곳 넓은 들에 신라 군사들이 훈련을 하면서 머무는 진영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신라 때 강릉 지역으로 자주 침범하는 말갈족을 물리치기 위해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을 훈련을 시켰는데, 훈련을 시킨 진지, 진영이 있었다고 한다. 영채는 남대천 하구에 있는 넓은 들이어서 하평(下坪)이라고도 한다. 영채 앞에는 남대천이 흐르고, 포남동의 넓은 들, 젠주의 넓은 들, 초당 앞의 들과 이어진다. 영채에서 동쪽으로 가면 젠주가 되고, 서쪽으로 가면 포남동 들이 되고, 남쪽으로 가면 남대천이 되고, 북쪽으로 가면 억지다리([초당동과 경계 지역]가 된다. 영채에는 억지다리, 삼형제다리, 동명초등학교 등이 있다. 억지다리에서는 2월 좀생이날[묘성]에 북쪽에 있는 초당마을과 횃불싸움을 했다고 한다. 4. 말갈족(靺鞨族) 6세기~10세기경 만주 동북부 지역에 거주하였던 주민 집단. 북제(北齊) 무성제(武成帝) 하청(河淸) 2년(563년)에 조공한 것으로 처음 등장하여 요(遼) 태종(太宗) 회동(會同) 원년(938년)까지 기록이 보인다. 거주 지역과 풍속의 유사성 등을 근거로 숙신-읍루-물길의 후예이자 여진의 선조로 언급되기도 한다. 말갈의 계통에 대해서는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 · 여진으로 이어지는 퉁구스계 종족이라는 일원적 계통론과 말갈로 통칭되는 집단 속에 예맥계(濊貊系)와 숙신계(肅愼系)가 섞여 있다는 다원적 계통론으로 대별할 수 있다. 일원적 계통론은 혈연적 동질성에, 다원적 계통론은 문화적 동질성에 초점을 두며, 수 · 당 시기 중국인이 동북아시아 이종족을 낮추어 불렀던 비칭(卑稱)이란 견해와 고구려의 일부 피지배 주민을 가리키는 종족명이었다는 설이 있다. 말갈의 의미로는 원음(原音)이 Moxo, 또는 Moho로서 여진어의 물[水]을 뜻하는 Muke와 연결하는 견해가 대표적이며, 이 경우 ‘말갈은 물가에 사는 사람들’의 뜻이다. 말갈에 관한 기록과 정보를 모아 별도의 열전으로 구성한 것은 『수서(隋書)』가 처음이고, 이후 『구당서(舊唐書)』에는 말갈열전이, 『신당서(新唐書)』에는 흑수말갈열전이 수록되었다. 『구오대사(舊五代史)』와 『신오대사(新五代史)』에는 흑수말갈열전이 있다. 따라서 『수서』 말갈열전에서 전하는 정보가 말갈 연구의 기초가 된다. 『수서』 말갈열전에 따르면 속말부(粟末部), 백돌부(伯咄部), 안거골부(安車骨部), 불열부(拂涅部), 호실부(號室部), 흑수부(黑水部), 백산부(白山部)의 7개 부(部)로 나뉘어 있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인용된 북번풍속기(北藩風俗記)에는 수나라 때 속말부의 거수(巨帥) 돌지계가 자신의 부인 궐계부(厥稽部)를 비롯하여 홀사래부(忽賜來部), 굴돌시부(窟突始部), 열계몽부(悦稽䝉部), 월우부(越羽部), 보호뢰부(步護賴部), 파해부(破奚部), 보보괄리부(步步括利部) 등을 이끌고 수에 귀부했다고 하였다. 5. 고구려, 발해와의 관계 『수서』 말갈열전에는 속말부가 정예로운 병사가 수천 명으로 늘 고구려를 침략한다고 하였고, 『구당서』 말갈열전에는 백산부가 본래 고구려에 부용되었다고 했으며, 실제로 수나라 말에 속말부 소속의 돌지계가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자 자신의 부와 주변 부락을 이끌고 수나라에 귀부한 사실이 있다. 고구려는 598년에 영양왕이 말갈병을 거느리고 요서 지방을 침입하였으며, 645년 당 태종의 침입 시 안시성 전투에 말갈병을 동원하였는데 3천여 명이 당군의 포로가 되어 생매장당한 일이 있다. 이로 보아 고구려는 일부 말갈에 대해 강한 영향력과 통제력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의 자치를 허용하며 간접적으로 지배했다고 생각된다. 다만 645년 안시성 전투에는 당군으로 참전한 말갈병도 있어 고구려가 말갈 전체를 지배한 것은 아니며, 말갈 부락이 자신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고구려와 중국 왕조를 선택하여 살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멸망 이후 말갈의 일부 세력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발해 건국에 참여하였으며, 『신당서』 말갈열전에는 발해 건국자 대조영(大祚榮)이 속말부 출신이란 기록도 있다. 일본의 『유취국사(類聚國史)』에는 학승(學僧) 영충(永忠)의 전언을 바탕으로 발해 촌리(村里)가 모두 말갈 부락이고 백성은 말갈이 많고 토인(土人)이 적다고 하였는데, 발해 전체가 그렇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말갈이 발해 주민의 주요 구성 부분의 하나였음은 인정된다. 6. 강릉 안목해수욕장과 커피거리 김유신 장군은 강릉지역에 대한 말갈족의 침략을 방어하고 백성들의 생명을 지킨 수호신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와 강릉지역에 주둔하면서 국경의 방어를 튼튼히 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던 송정동의 넓은 들판은 해변 가까이 있다. 논밭이 펼쳐진 넓은 벌판도 상전벽해로 변해 송정해수욕장, 안목 커피거리, 아파트 지구로 변모하고 있다. 옛날 신라시대 군사훈련장에는 동명초등학교도 들어서 있다. 해안가는 강한 바닷바람을 막는 방풍림이 조성되어 해송, 금강송이 우거져 있고, 산책로가 조성되어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강릉지역의 송림은 수령 40~80년으로 해안가 모래 위에 서식하며 바람과 염분 피해를 줄여주는 방풍림 역할과 함께 산책코스로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해안가에는 김유신 장군의 후예인 군인들이 바다를 지키는 초소도 자리잡고 있다. 안목해변과 송정해변을 거쳐 강문해변, 경포해변까지 이어진 해변솔밭길은 강릉 바우길 5구간과 해파랑길 39코스가 이어지는 아름다운 숲길이다. 해변에서는 요즘 유행인 맨발걷기를 하는 관광객도 보였다. 해안가로 펼쳐진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힐링할 수 있는 금강송 명품 숲길이다. 아름드리 금강송과 해송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향긋한 솔향과 피톤치드향을 맡으며 걸을 수 있다. 강릉시가 반려동물과 함께 걷는 여행길인 ‘시민과 함께하는 강릉 바우길 펫산책 구간’을 2022년 8월 23일 개통하였다. 바우길 펫산책 구간은 총 3개 코스로 첫번째 코스는 바우길 바다호숫길 중 안목 입구에서 송정 해변쉼터까지 1.1㎞ 구간으로 송정 해송 군락지 및 금빛 모래사장 산책을 즐기게 된다. 펫구간에는 올바른 반려문화 정착 및 청결한 산책 환경 조성을 위해 배변 봉투함과 안내 입간판이 설치됐다. 동반 가능 반려견은 중‧소형견 및 맹인 인도견으로 견주는 반드시 목줄을 의무착용하고 간격 2m를 유지해야 한다. 지난 4월 산불로 송림 일부가 불에 타는 피해를 본 강릉시에서 바닷가 소나무 방풍림을 지키기 위해 바닷가 곳곳에 소화전을 설치하고 있다. 강릉시는 예산 6억 8천만 원을 투입하여 올해 말까지 견소동에서 사천면에 이르는 6.3㎞ 구간 해변도로에 소화전 34개를 설치하고 있다. 강릉 커피거리는 강릉항에서 안목해맞이공원까지의 516m의 거리를 말한다. 제15회 강릉커피축제가 지난 10월 12일부터 15일까지 강릉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장, 경포 호수광장, 안목 커피거리에서 진행되었다. 안목 커피거리는 원래 횟집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전국의 유명 바리스타들이 강릉으로 이전 하면서 이곳은 커피거리로 바뀌었다. 대표적으로 박이추 바리스타의 보헤미안, 김용덕 대표의 테라로사 등이 있다. 바다를 보면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낭만적인 곳인데, 커피박물관, 커피 공장, 로스터리 카페 등이 있다. 송정 바닷가에 있는 안목 커피거리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주변 들판에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강릉을 수호하기 위하여 주둔하고 군사훈련을 했던 역사적 사실을 떠올릴 수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김유신 장군은 대관령 산신령으로서 강릉단오제의 주신의 한 명으로서 여전히 강릉시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또한 전국의 많은 무속인들이 떠받드는 장군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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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장군을 모신 강릉 화부산사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 추향대제 화부산사(花浮山祠)는 강릉시 율곡로 2967번길, 임영고개 마루에 위치하고 있다. 화부산사는 김유신(金庾信)장군을 모신 사당(祠堂)으로 흥무왕사(興武王祠)라고도 한다. 강릉향교(전교 권우태)는 지난 10월 22일 오전 10시 교동 소재 ‘화부산사 고직사’에서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의 위업과 덕망을 추모하는 추향대제를 봉행했다. 제향은 매년 봄가을로 봉행하고 있으며, 춘향대제(春享大祭)는 음력 5월 5일 단오날에 가락강릉종친회 주관으로 봉행하고, 추향대제(秋享大祭)는 양력 10월 22일 강릉향교 주관으로 강릉 유림과 가락 후손이 함께 봉행하고 있다. 추향대제 제향은 전폐례,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음복례, 망예례 순으로 진행되었다. 제향의 초헌관은 권우태 전교, 아헌관은 김남규 성균관유도회 강릉지부 부회장, 종헌관은 김장회 성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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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 럼,대관령 산신이 된 김유신 장군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허균의 기록에 나타난 단오제 주신 김유신 장군 허균은 조선 선조 36년(1603) 여름 단오 무렵, 그의 나이 34세 때에 당시 수안군수를 역임하고 잠시 모친과 함께 외가인 강릉 사천의 애일당에 내려와 약 4개월 간 머물렀을 때 강릉단오제를 직접 보았다. 당시 이 행사를 주관한 책임자에게 산신제를 지내는 모습을 보고 신격이 김유신임을 알았다. 또한 지역에서 그를 신봉하여 산신제를 지내고 강릉으로 모셔 축제를 베푸는 것에 감동하여 두 편을 병서(竝書)로 썼다. 이 글은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실려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인 성소(惺所) 허균이 편찬한 시문집이다. 총 26권 8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허균이 칩거 생활, 유배 생활을 하던 동안에 저술했던 시와 산문들을 모은 책으로서 시부(詩部), 부부(賦部), 문부(文部), 설부(說部) 4부로 나누어 정리했다. 강릉단오제는 대관령산신제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자료이고, 직접 산신제를 보고 기록한 자료로서 신빙성이 높다. 400년 전에는 산신인 김유신 장군을 강릉으로 모시고 5월 단오날에 축제를 베풀었다는 점에서 강릉단오제 원형을 되찾는다면 김유신 산신을 봉안하는 행사로 바뀌어야 하겠다. 기록 가운데 고을 사람들이 괫대받이(괫대는 강릉 단오제에 쓰는 깃대. 장나무에 쇠붙이를 둥글게 달고 오색 천으로 꾸민다.)를 하면서 잘 들리면 풍년이 든다고 하는 모습은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진다. 허균이 쓴 글은 구성상 두 편으로 나뉘는데 전편은 산문으로 대관령 산신제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고, 후편은 김유신의 공을 기리는 찬시(贊詩)이다. 산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묘년(선조 36년, 1603) 여름이었다. 나는 명주[지금의 강릉]에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룻날에 대령신(大嶺神)을 맞이한다 하기에 그 연유를 수리(首吏 : ‘이방아전’을 달리 이르던 말. 각 지방 관아의 여섯 아전 가운데 으뜸이라는 뜻이다.)에게 물으니, 수리가 이렇게 말하였다.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명주에서 공부하였는데, 산신이 검술을 가르쳐주었고, 명주 남쪽 선지사(禪智寺)에서 칼을 주조하였는데, 90일 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은 햇빛을 무색하게 할 만큼 번쩍 거렸답니다. 공이 이것을 차고 성내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오곤 하였는데,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하였답니다. 그러다가 죽어서는 대령(대관령)의 산신이 되어 지금도 신령스런 이적이 있기에, 고을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번개(旛蓋 : 깃발과 우산 모양의 장식물)와 향화(香花 : 향과 꽃)를 갖추어 대령에서 맞아다가 명주부사에 모신답니다. 그리하여 닷새 되는 날, 갖은 놀이로 신을 기쁘게 해드린답니다. 신이 기뻐하면 하루 종일 괫대가 쓰러지지 않아 그 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괫대가 쓰러져, 그 해는 반드시 풍재(風災)나 한재(旱災)가 있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상하게 여겨, 그 날 가서 보았다. 과연 괫대가 쓰러지지 않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경사롭게 여겨 서로 손뼉 치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건대, 김유신 장군이 살아서는 왕실에 공을 세워 삼국 통일의 성업을 완성하였고, 죽어서는 수천 년이 되도록 오히려 이 백성에게 화복을 내려서 그 신령스러움을 나타내니, 이는 진정 기록할 만한 것이기에 드디어 다음과 같이 찬한다.” 후편은 4언 64구의 찬시로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글은 교산 허균이 대관령 산신인 김유신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한 글로 산신제의 역사를 밝히고, 그의 공적을 시로 읊은 명작이다. “갸륵하다. 귀족의 후손이여, 씩씩하고도 우람스럽도다. 나라의 용장되어, 북채 들고 단에 오르도다. 무장하고 군문에 나서니, 기상이 고구려·백제를 삼킬 듯하다. 비호같은 장수들을 채찍질하며, 용감한 정예부대 몰고 가네. 오구를 차고 가니, 곤오산의 쇠로세. 시뻘겋고도 아름다워, 붉은 불꽃 뿜어낼 듯, 웅진에서 말을 베고, 당나라 배 만 척이 와서 도왔네. 백마강에서 기약에 뒤지자, 백제 삼군은 겁에 질렸건만, 공의 수염이 분노에 뻗쳐, 칼을 어루만지며 고함지르니, 붉은 용이 번득이는 듯, 놀라운 번개가 칼집을 에워싸니, 왕사 드디어 힘을 어울러, 능히 백제를 멸망시켰네. 꿈틀대는 고구려족, 서녘 모퉁이서 날뛰네. 군졸을 풀어 가서 치니, 황제의 위엄 우뢰인 양 떨치네. 동쪽 군사 일만을 거느리고, 북을 치며 앞장서서, 긴 창 모아 굳세게 무찌르니, 멧부리 쪼개지고 연못은 치솟을 듯, 갑옷 쌓아 두고 창 던지니, 소라바다에 썩은 시체 답쌓여라. 이적이 웃음 지으니, 칠부 군종 땅에 무릎 꿇고, 이웃 발악 제거함에, 나라의 걱정거리 없어졌네. 해와 달도 툭 트여 해맑고, 천지도 다시 빛나네. 삼한의 우리를 에워, 모조리 판도 안에 넣으니, 큰 공훈 정의와 기상에 새기고, 사책에 실어 영원히 빛나도록, 동해의 동녘에서, 그 공 미칠 이 없네. 웅장한 풍도에 영특한 기개, 이제 수천 년이 되었건만, 대령산 꼭대기에서, 아직도 제사 받아, 해마다 드리는 분향, 누구라서 감히 소홀히 하랴, 공의 넋은 어둡지 않거니, 복 내림도 크기도 커라. 구름타고 바람결에, 살포시 내려오네.” 2. 허균의 성소부부고 부부고(覆瓿藁)는 ‘장독 뚜껑을 덮을 만한 보잘것없는 원고’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이는 허균이 자신의 시문을 겸손하게 표현한 용어이다. 권수에 중국 명나라의 문인인 이정기(李廷機)가 만력제 계축년(癸丑年)에 쓴 시문(詩文)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613년(명나라 만력(萬曆) 41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위키백과). 권미에는 이항복이 지은 〈성소잡고서〉(惺所雜稿序)가 수록되어 있다. 국립도서관본, 규장각본, 홍문관본, 연세대학본, 박종화본 등의 필사본이 전한다. 『성소부부고』는 허균이 스스로 편집하였고, 체재에 있어서의 참신성으로 후대 문집에 좋은 모범이 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8권 1책. 필사본. 작성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만력(萬曆) 계축에 쓴 이정기(李廷機)의 서문으로 미루어 보면 1613년(광해군 5) 봄이나 그 전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허균의 일생 중에서 가장 불우했던 시기이다. 그가 칩거하면서 그동안 저술한 시와 산문들을 모아 시부(詩部)·부부(賦部)·문부(文部)·설부(說部) 등 4부로 나누어 정리한 초고이다. 외손인 이필진(李必進)의 발문에 “부부고라는 것은 외조부 교산의 유고이다. 부부·문부의 6권 외에 또 시부가 있어 모두 8권인데 전질을 손수 썼다. 「갑진명주고(甲辰溟州藁)」·「서관행록(西關行錄)」·「계축남유초(癸丑南遊草)」·「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 제2권은 옥사가 일어나자 마침내 모면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이것을 정리하여 우리 집에 보내게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발문에 적힌 「갑진명주고」 이하 몇 권의 저술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년의 저술들이 이 책에 수록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허균은 역적의 괴수로 극형을 받고 죽었기 때문에 그의 문집은 공간될 수 없었다. 그래서 몰래 필사하여 전해졌으므로 오자낙서가 적지 않다. 저본은 1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사본이다. 책마다 첫 장에 정조대왕이 세손 때에 사용한 장서인인 ‘관물헌(觀物軒)’과 ‘이극지장(貳極之章)’이라는 어인이 찍힌 귀중본이다. 규장각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1961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처음으로 영인하여 소개되었고, 그 뒤에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하여 출간되었다. 3. 허균의 생애 허균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아버지 허엽은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이자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동인의 영수였고,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등을 지냈다. 이복형 허성은 이조판서를 지내는 등 순탄한 관료생활을 하였고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둘째 형 허봉 역시 서장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온 후 최초의 연행일기인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남겼다. 두 형과 누이 허난설헌까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허균은 1569년(선조 2) 11월 3일 초당 허엽과 강릉김씨 김광철(金光轍)의 딸 사이에서 3남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열 살 즈음 『논어』와 『통감』을 읽었고 아버지로부터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웠다. 1580년(선조 13) 열두 살에 아버지를 잃은 허균은 아버지 같은 형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둘째 형은 자신의 친구인 유성룡(柳成龍)과 이달(李達)을 스승으로 소개시켜주었다. 이달은 삼당시인(三唐詩人)중의 하나인데 서얼출신으로 허균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후에 허균은 스승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짓기도 하였다. 과거공부에만 매달리던 허균을 진정한 문학의 세계로 이끌어준 인물이다. 둘째 형은 좋은 스승을 소개시켜줬을 뿐만 아니라 스승의 역할도 했다. 1586년(선조 19, 18세) 허균은 둘째형을 따라 본격적인 글공부를 시작했다. 둘째형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 중에 허균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한 사람이 더 있는데 유정[사명대사](惟正(四溟大師))이다. 허균은 사명당과 형제같이 사귀면서 그에게서 불교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임진왜란은 그의 생애에 굴곡을 남긴 사건이었다.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만삭 아내와 함께 피난생활을 하다가 아내와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겼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국방의 문제점에 대하여 고민도 하고 그의 첫 저서 『학산초담(鶴山樵談)』을 펴내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허균은 1594년(선조 27, 26세)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7년(선조 30, 29세)에 예문관검열이 되고 세자시강원설서를 겸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예문관검열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직책으로 엄격히 선발되는 자리였던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그의 문장과 실력을 인정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즈음 문과 중시에 장원을 하였고 그 덕분에 예조좌랑으로 승진한 후 중국길에 올랐다. 중국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병조좌랑으로 임명되었고 중국 장수들을 접대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1599년(선조 32, 31세)에는 다시 황해도도사로 승진하였다. 그는 지방 관리의 부정과 불법을 사찰하여 규탄하고 과시를 맡아보는 임무를 띠고 임지인 해주로 내려갔다. 그러나 6개월 만에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후 허균은 약 18 여년의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 파직을 당하였다. 1614년(광해군 6, 46세) 호조참의에 임명되어 다시 관직으로 돌아왔다. 이해 여름에 천추사가 되어 중국을 다녀왔고 이듬해에도 동지겸진주부사가 되어 중국을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귀국할 때에 많은 책을 가지고 오고 변무사에 대해서도 다방면으로 견문하여 보고하였다. 이와 같은 사행의 공로로 그는 가자되었고 형조판서(정2품)에까지 올랐다. 이렇게 해서 그는 광해군의 신임을 받으며 권력의 핵심에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1617년(광해군 9, 49세) 폐모론 정국에서 폐모를 주장한 허균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졌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허균은 폐모론을 성사시킨 공으로 좌참찬에 임명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奇俊格)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역적은 오히려 허균이라고 하면서 그의 혁명계획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에 허균이 다시 반박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고발과 탄핵 정국으로 돌변하였다. 대질심문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허균과 손을 잡았던 이이첨(李爾瞻)이 등을 돌리면서 허균은 역모를 꾸민 죄인으로 몰렸다. 결국 그는 1618년(광해군 10, 50세) 8월 형신도 받지 않고 결안도 없이 사형을 당했다. 이후 허균은 조선시대 내내 역적이라는 이름을 벗을 수 없었다. 허균의 거사 계획은 확실치 않아서 실제로 그가 어떤 식으로 혁명을 이루려 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남긴 기록과 행적으로 보아 혁명의 주역은 조선왕조의 사회체제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이었을 거라는 추정을 할 뿐이다. 4. 허균의 문학 사상과 홍길동전 허균은 시인이었다. 그의 형과 누이도, 그의 스승도 모두 시인이었다. 그는 일찍 죽은 형과 누이를 위해 그들이 남긴 시를 모아 『하곡집』과 『난설헌집(蘭雪軒集)』을 냈다. 또 스승을 위해 그의 시집 『손곡집』을 간행하였고 최고의 학당파 시인으로 평가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임진왜란 피난 시절인 1593년(선조 26, 25세)에 『학산초담』을 지었다. 동시대 시인들에 대한 시화와 시평이 주요 내용이다. 전라도 함열현 유배시절에는 『성수시화(惺叟詩話)』를 지어 최치원(崔致遠)부터 동시대 시인들까지 약 800여 년에 걸친 시화들을 모아 품평하며 우리나라 시의 흐름을 보여주었다. 1607년(선조 40, 39세) 『국조시산(國朝詩刪)』을 펴냈다. 책 뒤에 덧붙인 제시산후(題詩刪後)에서 그는 시산(詩刪)과 시선(詩選)의 차이점을 설명하며 시산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큰 바다에 구슬이 하나 빠졌다고 비난할 사람은 있을 테지만 물고기 눈깔과 진주가 섞여 있다고 꾸짖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넣을 것은 있을지 몰라도 뺄 것은 없다는 뜻으로 자신의 시산 작업에 의의를 부여했다. 이 책은 조선 초 정도전(鄭道傳)부터 당대의 권필에 이르기까지 35명의 시를 분류하고 비와 평을 붙였는데 홍만종(洪萬宗)의 『시화총림(詩話叢林)』에서 조선조 최고의 시산으로 평가받았다. 5편의 전을 지었는데 모두 유교적 신분사회에서 소외당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현실고발소설의 성격을 띤다. 「손곡산인전」의 이달이 천첩소생의 서얼이고, 「남궁선생전」의 남궁두는 아전이며, 「장생전」의 장생은 비렁뱅이 천민이다. 또 「엄처사전」의 엄처사는 몰락한 양반이고 「장산인전」의 장산인은 중인이다. 허균은 이 5편의 전 이외에도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저자로 인정되고 있다. 허균이 『수호전』을 모방하여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그의 제자 이식(李植)이 밝힌 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스승 이달과 자신을 따르던 서양갑(徐羊甲)이나 심우영(沈友英) 같은 이들이 모두 서얼로서 소외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신분제도의 불평등과 사회체제의 부조리를 비판하기 위해 『홍길동전』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은유하여 현실을 비판하는 소설 말고 논설을 통해서도 직접적인 사회비판을 시도하였다. 「호민론(豪民論)」, 「유재론(遺才論)」, 「관론(官論)」, 「정론(政論)」, 「병론(兵論)」, 「학론(學論)」이 그것이다. 「병론」에서 그는 양반 사대부들이 군대에 가지 않기 때문에 군사가 적다고 하면서 조선에 군사가 없는 책임을 왕에게 돌렸다. 학론에서 참다운 학자를 등용하여 경륜을 펼치게 할 책임도 왕에게 돌렸다. 정론에서 당파싸움에 성행한 것에 대한 책임도 왕에게 돌렸다. 천하에 두려워할만한 자는 오직 백성뿐인데 그 중에서도 호민이 가장 두려운 존재라는 「호민론」에서 그는 사회가 어지러울 때 호민을 중심으로 응집하여 봉기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가 소설에서 구현한 홍길동과 같은 자가 바로 호민이다. 그의 문학과 사상은 다양한 문화를 포용한 위에 핍박받고 소외된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와 사회에 대한 입장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이자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가였다. 5. 대관령 국사성황사와 산신당은 무속인의 성지 대관령 국사성황사에 있는 산신각은 10월 27일, 28일 이틀간에 걸쳐 답사하였다. 27일에는 강릉지역과 대관령에는 비가 약간 내렸다. 대관령은 원래 변화무쌍한 날씨를 보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27일 오후에 산신각을 둘러보는 도중에 비가 그쳤다. 28일에는 일기예보와 달리 강릉의 날씨는 맑았다. 오후에는 구름이 몰려와 하늘은 흐렸다가 약간 햇빛이 비치기도 하였다. 대관령 국사성황사와 산신각을 연달아 방문하면서 놀란 점은 무속인들이 많이 찾아와 기도를 올린다는 것이었다. 27일 범일국사를 모신 국사성황사에서 기도하는 무속인이 돌아간 이후 틈을 내어 사진을 찍었다.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산신각에도 기도하는 3명의 무속인이 있어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이들이 떠난 후에 사진을 찍었다. 28일 토요일 오후에 방문했을 때 주말 인기 관광지처럼 무속인들이 모여 굿을 하거나 기도를 올렸다. 국사성황사와 산신당 뒤쪽에는 칠성단과 용왕단이 있었는데, 무속인들이 와서 무당으로 입문하는 신출내기 여러 명에게 신내림을 지도하고 있었다. 기도를 올릴 때 촛불과 향을 피우는 것이 필수이므로 우발적인 산불을 방지하기 위하여 소화기도 비치되어 있었다. 용왕단에는 샘물이 있어 바가지로 떠먹어보니 물맛이 좋았다. 기도에는 제물을 정성껏 준비하여 신에게 올리는 것이 필수이다. 신의 응답을 받기 위하여 제주도 준비해야 한다. 술은 막걸리가 많았고, 소주도 일부 있었다. 국사성황사와 산신당 주변에는 막걸리 냄새가 진동하였다. 기도 후 부산물로 나오는 쓰레기를 담는 자루도 있었다. 제물로 올린 과일을 가져가지 않고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담아두었다. 이곳의 행정구역은 평창군이지만 관리는 강릉시에서 하고 있다. 관리인이 주변을 청소하고 제물도 정리하였다. 천년 넘게 이어져 오는 강릉단오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는 경사가 있었다. 단순한 무속인의 성지가 아니고 한국의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대관령 국사성황사의 주신인 범일국사와 산신당의 산신령인 김유신 장군을 떠받들고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고, 사후에도 신으로 모시고, 끊임없이 무수한 무속인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리니 역사적 위인이 틀림없었다. 일반인들도 찾아와 제물을 갖추어 기도하였고, 대관령 옛길, 선자령, 양떼목장을 답사하는 등산객들도 수시로 찾아와 기도하거나 구경을 하였다. 범일국사는 신라의 왕들이 서라벌로 초빙하여 국사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거절하고 강원도 지역 여러 곳에 굴산사, 신복사, 삼화사 등 사찰을 건립하고 불사를 하면서 백성과 불자들의 스승으로 중생을 구제하였다. 김유신 장군은 삼국을 통일하고, 외적의 침략을 방비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백성들의 수호자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강릉지역에 주둔하면서 말갈족의 침략을 격퇴하고 민생을 보살핀 공으로 강릉 주민들이 받드는 대관령의 산신령이 되어 여전히 존경받고 있으며, 무속인들의 신앙 대상이 되어 여전히 국민들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영웅이다. 6. ‘대관령옛길’ 걷기 국사성황사와 산신당을 답사하면서 이틀 동안 ‘대관령옛길’을 답사하였다. 27일에는 저녁 5시 무렵부터 반정에서 출발하여 1km 정도 걸었는데, 단풍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다시 주차한 반정으로 돌아올 때는 깜깜해졌다. 밤중이라 도중에 등산객은 한 명도 없었다. 28일 아침 8시경 대관령 아래 마을인 어흘리를 거쳐 우주선펜션·카페, 우주선 화장실이 있는 곳에 주차하고 대관령옛길을 걸어서 주막까지 올라갔다. 왼쪽으로 흐르는 계곡의 바위와 물, 단풍이 매우 아름다웠다. 28일에는 어흘리에서 9시부터 출발하는 ‘대관령옛길 걷기대회’가 있었다. 주차한 곳으로 돌아와 차를 타고 반정으로 올라가 어제 저녁에 걸었던 대관령옛길을 다시 걸으며 아름다운 단풍 사진을 찍었다. 27일 저녁에 눈으로는 황홀한 단풍을 많이 보았지만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여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다. 똑같은 코스로 쉼터까지 1km를 걸으며 환상적인 단풍 사진을 많이 찍었다. 반정으로 원점 회귀하여 대관령 국사성황사,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산신당을 다시 답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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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김유신 장군 기도처 열박산 동굴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삼국사기 기록 1) 열박산에 들어가 기원하다 삼국사기 > 열전 제1(列傳 第一 > 김유신 상(金庾信 上) > 열박산에 들어가 기원하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열박산에 들어가 기원하다 [612년 (음)] 건복 29년(612년, 진평왕 34년)에 이웃한 외적(外賊)들이 〔신라를〕 한층 더 바싹 핍박해오자, 공은 마음에 품은 장렬한 뜻이 더욱 더 강렬해져 홀로 보검(寶劒)을 들고 열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여 기원(祈願)하기를 중악(中嶽)에서 맹서한 말과 같이 하였다. 계속해서 기도하기를, “천관(天官)께서 빛을 드리워 보검에 신령(神靈)을 내려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3일째 되는 밤에 허성(虛星)과 각성(角星) 두 별이 밝게 빛을 발하며 내려와 드리우니, 마치 보검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2) 열박산(咽薄山)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산천조에 “열박산(咽薄山)은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김유신이 보검(寶劍)을 지니고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서 향(香)을 피우고 하늘에 고유(告由)하여 병법(兵法)을 기도하던 곳이다.’고 한다.”고 전한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의 내와리와 상북면의 소호리 사이에 위치한 백운산을 신라 때에 열박산이라 불렀고, 가장 높은 봉우리인 감투봉에 김유신과 관련된 전설이 전하고 있다고 한다(울산문화원, 1996). 현재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미호리에 열박재라고 부르는 고개가 있다. ‘咽薄山’에서 ‘咽’자를 ‘인’, ‘열’로 읽을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울산지역에서 부르는 명칭에 따라 ‘열’자로 읽고 있다(정구복 외, 2012, 657쪽). 〈참고문헌〉 울산문화원, 1996, 『울산의 전설과 민요』 정구복 외, 2012, 『개정 증보 국역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3) 천관(天官) 별 중에 큰 별을 말한다(정구복 외, 2012, 657쪽). 『사기(史記)』 권27 천관서(天官書)를 주석한 사마정(司馬貞)은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천문(天文)에 보건대, 5관(五官)이 있다. 관이라 함은 별을 관리하는 관리를 말한다. 별자리에도 존비(尊卑)가 있는데, 이는 사람으로 치면, 관리의 서열에 존비가 있는 것과 같으니, 이래서 하늘을 맡은 관리라고 부른다[按天文有五官 官者星官也 星座有尊卑 若人之官曹列位 故曰天官]고 하였다. 이밖에 천관을 도가(道家)에서 이야기하는 삼신관(三神官), 즉 천관과 지관(地官), 수관(水官) 가운데 천관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1977, 617쪽; 이강래, 1998, 752쪽). 〈참고문헌〉 정구복 외, 2012, 『개정 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이강래, 1998, 『삼국사기Ⅱ』, 한길사 4) 허성(虛星) 동양의 전통적인 별자리인 28수(宿) 가운데 북방에 있는 별자리이다. 이 별은 인간의 생명과 벼슬살이의 운명을 맡았다고 생각해왔다. 여기에는 두 개의 별이 있다. 한 별은 물병자리(Aquarius)이고, 다른 한 별은 조랑말자리(Equuleus)이다(박창범, 1998,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그림 분석」, 『한국과학사학회지』 20; 정구복 외, 2012, 『개정 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638쪽). 5) 각성(角星) 28수(宿)의 별자리 가운데 첫째 별자리이다. 동쪽 하늘에 있는데, 오늘날 금성(金星)을 말한다. 이 별은 인간의 형벌과 군사를 맡았다고 한다(정구복 외, 2012, 『개정 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658쪽). 3일째 되는 밤에 … 내려와 드리우니: 종래에 열박산에 들어가 기도하자, 전쟁을 담당하는 별인 허성(虛星)과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인 각성(角星)의 빛이 보검에 드리웠다는 표현은 도교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점에서 본 기록을 후대에 윤색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정구복, 2002, 「김유신(595~673)의 정신세계」, 『청계사학』 16·17, 598쪽 및 603쪽). 2. 울주군 지명지리지 1) 활천리(活川里) 본래 경주 외남면 지역으로 살근내 또는 활천이라 하였다. 경주 외남면 때는 전천(箭川)이라고도 하였다. 1906년(광무 10) 9월 울산군에 편입되고, 그 후 두서면 관할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장동(柯長洞)을 병합하여 활천리라 하였다. 현재 행정마을은 활천리 한 곳이다. 열박재(咽薄峴)는 활천 남쪽(가정)에서 미호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재의 본래 이름은 열박재(咽薄嶺)로서, 열리고 환하게 밝다는 열박산(咽薄山)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2) 내와리(內瓦里) 본래 경북 경주군 외남면 지역으로 샛골 안쪽이 되므로 아내 또는 내와라 하였는데, 옛날에 기와를 구운 곳이라 한다. 1906년(광무 10) 울산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외와(外瓦), 중점(中店), 탑곡과 경주군 내남면의 고사리(古舍里) 일부를 병합하여 내와리라 하였다. 현재 내와(內瓦), 외와(外瓦) 등 2개의 행정마을이 있다. 3) 백운산(白雲山) 신라 때는 열박산(咽薄山)이라 칭했던 산높이: 907m)으로 신라 김유신(金庾信)이 삼국통일의 영기(靈氣)를 얻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김유신이 17세 때 단석산(斷石山) 석굴에 들어가서 고구려, 백제, 말갈(靺鞨)의 적을 물리치고 나아가 삼국을 통일할 힘을 하늘에 빌고 있을 때, 난승이라는 한 늙은이가 나타나서 그로부터 방술을 배웠다. 이듬해(612년) 다시 적침(敵侵)을 당하여 더욱 비장한 마음이 들어 혼자서 보검을 들고 열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며 하늘에 빌기를 “적국이 무도하여 시랑(豺狼 : 승냥이와 이리)과 범이 되어 우리 강역(疆域)을 침요(侵擾)하여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습니다. 나는 한낱 미약한 신하로서 재주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뜻을 화란소청(禍亂掃淸)두고 있사오니, 상천(上天 : 하느님)은 하감(下瞰 : 위에서 내려다봄)하시와 나에게 능력을 빌려주십시오.”라 하였다. 그랬더니 천관신(天官神)이 빛을 내리어 보검(寶劍)에 영기(靈氣)를 얻었고, 3일째 되는 밤에 허숙(虛宿)과 각숙(角宿)의 두 별이 뻗친 신령한 빛이 환하게 내려 닿으니 동요(動搖)하는 것 같다고 전하여 온다. 위와 같은 사실을 볼 때 열박산은 예부터 신령한 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열박이라 함은 신라의 고유한 말로서 인(咽)은 이두로 된 신라의 향가 찬기파랑가(讚耆婆郎歌)에도 ‘인오이처미(咽嗚爾處米)’라 하여 나오는데, 열의 음차이다. 또 박(薄)은 ‘밝’의 음차로서, 신라의 박(朴)과도 같은 밝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 열박산은 환하게 열리고 밝은 산이라는 의미를 가진 산이다. 열박산이 언제부터 백운산(白雲山)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열의 본뜻은 그대로 가진 산이다. 옛날에는 지금의 백운산은 물론이고 그 동편 산 일대를 모두 열박산이라 한 듯, 지금도 마리골(嵋湖)에서 살그내(활천)로 넘어가는 재를 열박재 또는 열박이라 하고 있다. 백운산에서 북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김유신 장군 기도처가 나온다. 기도처를 둘러보고 다시 능선으로 올라와 북쪽으로 가면 삼강봉이 나온다. 삼강봉(三江峰 : 해발 845m) 꼭대기에 떨어진 빗방울이 지세에 따라 세 방향으로 흘러간다. 동남쪽 탑곡으로 흐른 물은 미호천과 대곡천을 거쳐 선바위를 휘돌아 태화강으로 흘러가고, 동북쪽 큰골은 경주 시내를 지나 형산강으로 흐르며, 서쪽으로 흐른 물은 소호리 동창천으로 흘러 밀양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이어진다. 강원도 태백시 적각동에 위치한 오십천 공원 ‘삼수령’도 분수령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방향에 따라 세 갈래로 갈라진다. 물방울의 운명은 한강을 따라 서해로, 낙동강을 따라 남해로, 오십천을 따라 동해로 흘러가 각각 제각각 흩어진다. 흐르는 방향이 달라지는 분수령이 된다 해서 ‘삼수령’으로 불린다고 한다. 또한 삼수령은 '피해 오는 고개'하는 뜻으로 ‘피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날부터 황지 지역은 도참설에 의해 이상향(理想鄕)으로 여겨져서 어수선한 시절에 삼척 지방 사람들이 이 재를 넘어 피난을 온 고개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삼강봉과 삼수령의 유사점은 분수령이고, 차이점은 삼강봉은 힘들게 등산해야만 올라갈 수 있고, 태백시 삼수령은 차량으로 바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삼수령에는 멋있는 문양과 아름다운 모양의 정자 삼수정과 삼수령의 기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3. 내와리의 사연많은 길 1) 탑골과 탑곡 공소 탑골은 내와마을의 탑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탑골에는 한때 많은 절들이 있었다. 그런데 한번 홍수가 나면 백운산 자락에 위치한 절의 탑들이 무너져 마을로 내려온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내와마을은 옛날부터 도시와 거리가 먼 두메산골로 교통이 불편한 곳이다. 오랜 세월 북으로는 괘밭, 덕천, 이조까지 걸어가서야 경주로 왕래할 수 있었고, 동으로는 활천과 봉계를 지나 울산으로 통하였으며, 서로는 소호령을 넘어야만 청도와 밀양 등지로 통할 수 있었다. 경주나 언양에 있는 시장으로 갈 때 말이나 소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두메산골이다 보니 박해를 피해 내와로 피난을 오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이 고종 3년(1866) 병인박해를 일으켜 천주교를 탄압하자 경주 양남 출신 김씨 일가가 박해를 피하여 깊은 산속으로 찾아든 곳이 바로 탑골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하고 신자를 확보하여 교세를 펴왔으나 현재는 ‘탑곡공소 입구’라는 팻말만 잔존하고 있다. 내와마을은 자연석으로도 유명하며, 특히 내와 흑돌은 수석애호가들에게 인기가 많다. 2) 천주교 피난길, 순례길 내와마을은 영남알프스(YEONGNAM ALPS) 둘레길이 있다. 또한 천주교 순례길도 있다. 탑골 상류에는 태화강의 발원지가 있다. 1801년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탑골에서 살기 시작했고 공소는 그 뒤 만들어졌다. 탑곡 교우촌(1839~1983. 3.)은 경주, 밀양, 의성에서 피난 온 고령 박씨, 밀양 박씨, 반남 박씨 집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였다. 이후 전성기에는 신자가 100명을 넘기도 하였다. 탑곡 공소는 예씨네 집안이 상선필로 옮겨가면서 상선필 공소의 발판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태풍 피해로 공소가 내려앉은 데다. 독가촌 강제 이주 정책으로 거의 이농하면서 현재는 공소 터만 남아 있다. 탑골공소 삼거리에는 많은 이정표가 달려있다. 탑골샘으로 가는 길은 신앙의 길로서 선원과 암자, 수련원 표지판이 많다. 주문모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강이문이 1801년 신유박해로 언양으로 귀양간 기록이 있다. 그 귀양지가 탑곡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강이문은 이곳에서 예씨 성을 가진 사람을 영세시키고, 그 예씨들이 선필로 너머가 신앙촌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3) 빨치산 활동 당시 아미산은 신불산 빨치산 남도부 부대 산하의 홍길동 부대가 은거지를 두고 활동하던 곳이다. 홍길동 부대는 울주군 두서면 선필마을과 전읍마을 주민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1949년 이승만 정권의 동계 대토벌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지역 야산대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인민군과 결합하여 다시 무장 유격대 활동을 강화시켰다. 울산 지역 야산대와 무장 유격대는 남로당 경남도당 동부지구당 소속이었다가, 전쟁이 나면서 동해남부지구당으로 바뀌었고 다시 전쟁 중에 남로당 제4지구당 제3지대로 편제되었다. 이들은 상북·두동·두서의 서부 지구와, 온양·웅촌의 남부 지구, 농소·강동의 동부 지구 등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울산 지역 무장 유격대 중 가장 세력이 컸던 부대는 서부 지구에서 활동한 남도부(본명 하준수) 부대였다. 남도부 부대는 1950년 5월 24일 북한에서 출발한 300여 명의 강동정치학원 출신 유격대원 가운데 신불산까지 같이 온 13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상북면 이천리의 681고지를 근거지로 삼았는데 병력은 최대 220여 명에 이르렀다. 자체적으로 군관학교를 세워 유격 전술 훈련, 보급 투쟁 방법 등을 교육할 정도였다. 이들의 활동 구역은 신불산을 중심으로 양산과 울주 지역이었고 주로 부산, 경상남도 일대에서 후방 교란 활동을 하였다. 4) 말구부리길과 논중바위 선필마을로 가는 마당미기길은 벽운사로 가는 길이다. 처음에는 힘들지 않지만 갈수록 가팔라진다. 말구부리길 고갯마루는 백운산, 아미산 등으로 연결된다. 이 길은 눈 푸른 신부가 탑골 공소에서 선필 마을 공소로 걸어간 신앙의 길, 순례의 길이다. 또한 백성들이 걸었던 장터길이었다. 말이 짐을 메고 올라가다 고꾸라져서 넘어질 만큼 가파른 길이라 하여 이곳 주민은 말구부리길'로 부른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독특한 바위와 마주하게 된다. 일명 '논증바위'로 이곳 인보리, 내와리 일대의 만장들판 논에 자리 잡은 큰 바위이다. 논 한가운데에 있는 논증바위는 농부가 논농사를 짓기에 매우 거추장스럽고 얄미운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선필마을은 신앙촌이었다. 기해박해를 피해 온 예씨 성들이 모여 집성촌을 이루었던 예씨골로, 간월 교우촌과 함께 언양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교우촌이다. 상선필 공소는 평범한 신앙공동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초기교회 모습이다. 소박하게 마당 한 곳에 성모마리아상이 있을 뿐이다. 길과 공소 정면이 등지고 있어 공소인지 알기 어렵다. 건물 기둥은 옛 모습으로 지붕만 개량되었다. 5) 풍천 임씨 집안의 호식과 명당이야기 내와리 탑곡에는 풍천 임씨 집안의 분묘 5기가 한곳에 있다. 원래 이곳은 내와리에 사는 안동 권씨 문중에서 묘를 쓰려고 잡았던 터였다. 당시 유명한 지관은 “여기에 묘를 쓰면 후일에 큰 인재(人材)가 나오지만 당장은 하관(下棺)과 동시에 상주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된다.”라고 일러주었다. 그 후 경주 남산에 풍천 임씨 임인중(仁重)의 처 월성 김씨 묘를 그 자리에 쓰려고 했지만 지관의 말이 떠올라 집안에서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상주가 “내가 호사(虎死)하더라도 우리 후손이 번성하면 그걸로 충분하니 내 기꺼이 묘를 쓰겠다.”라고 주장하여 하관하였다. 역시나 하관을 마치자마자 난데없이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상주를 순식간에 채어 갔고, 이후 상주의 거룩한 희생을 바탕으로 그의 자손들은 대대손손 번성하였다고 전한다. 4. 내와리 백운산 김유신 장군 기도처 답사 두서면 활천리 석문암 계곡 답사 다음 날인 10월 17일에 바로 백운산 답사를 하였다. 김유신 장군 기도처가 백운산 정상 바로 아래에 있다고 인터넷에 올라와 있었다. 백운산 등산을 위해 울주군 두서면 내와리로 향하였다. 내와마을의 사찰인 삼백육십오일사 주차장에 주차하고 등산을 시작하였다. 태화강의 발원지 백운산 탑골샘이 있는 곳을 거쳐 백운산으로 올라가기로 하였다. 김유신 장군 기도처도 답사하고 분수령인 삼강봉도 가보기로 하였다. 내와리 118에 위치한 탑골샘은 울산의 젖줄 태화강의 최장거리 발원지 (유로 연장 47.5km)이다. 백운산 계곡 해발 550m 지점의 절터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물줄기는 계곡을 따라 흘러 미호저수지와 대곡천으로 흘러 태화강으로 합류된다. 가지산 쌀바위보다 길다고 한다. 삼백육십오일사 근처에서 탑골샘으로 가는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오른쪽으로 계곡을 끼고 완만한 경사로를 올라가면 태화강 발원지인 탑골샘이 나온다. 탑골샘에 도착하여 주변을 살펴보니 바위 너덜지대였다. 장마철이 아닌데도 바위 틈새에서 계속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탑골샘에서 백운산으로 가는 등산로에는 울주군에서 만든 이정표가 없어 길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등산객들이 매달아 놓은 리본을 보며 가다가 어느 순간 리본이 없어져 난감하였다. 무작정 산 능선 위로 올라가기 위하여 직선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나무가 우거져 있지 않아 올라가기는 쉬웠다. 능선에 도착해서 우측으로 올라가는 도중 희미한 등산로를 발견하였다. 리본도 많이 달려있어 쉽게 백운산 정산에 도달하였다. 정상에서 한숨 돌리고 김유신 장군 기도처를 향해 능선 따라서 조금 가다가 산악회 리본이 잔뜩 달려 있는 곳에서 우회전하여 신 밑으로 내려갔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큰 바위가 보여 이곳이 기도처라고 판단하였다. 등산 안내 표지판이 없으므로 상황 판단을 빠르게 해야 한다. 백운산 정상 쪽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바위 하단부에 작은 굴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답사 목적지인 열박산 김유신 장군 기도처이다. 줄자를 이용하여 바위굴의 크기를 측정하였다. 바위굴은 가로 길이가 9m로 옆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었다. 굴의 높이는 1m 10cm로 허리를 구부려야 운신할 수 있었다. 굴의 깊이는 4m 60cm 정도 되었다. 기도처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어야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다. 양산의 천성산에 있는 원효대사의 기도처로 알려진 적멸굴, 큰바위 석굴 등도 거대한 암벽과 동굴이 있다. 또한 기도처의 환경 조건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물이 있어야 한다. 열박산 바위 동굴에도 바위 틈에서 석간수가 약간씩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김유신 장군이 화랑도였던 청년 시절 이열박산 동굴에 와 간절히 삼국통일을 기원하며 하늘의 응답을 받았던 기도처이다. 화랑도들은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강원도 강릉 경포대, 속초 영랑호, 금강산 등 동해안 쪽에도 화랑의 수련지가 있다. 답사 목적을 달성하고 이제 분수령인 삼강봉을 지나 내와리로 내려가면 된다. 기도처에서 다시 능선 위로 올라와 삼강봉으로 향했다. 능선 따라서 내리막길, 바위 길을 지나 삼강봉에 도착하였다. 삼강봉에서 내와마을에 있는 삼백육십오일사 절 주차장으로 원점 회귀만 하면 된다. 그런데 능선 따라 내려가는데, 등산 안내 표지판이 없었다. 우측 내와리 마을 쪽으로 내려가기 위하여 내려다 보면 나무가 울창하여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능선 끝까지 내려가니 임도가 나왔다. 기나긴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산의 바위를 파쇄하여 골재를 만드는 공장이 나왔다. 계속 내려가니 내와마을은 아니고 소호리 쪽이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배낭에 후레시를 가져와 다행이었다. 포장도로를 걸어서 내와리 삼백육십오일사 주차장에 7시 20분쯤 도착하였다. 포장된 임도에서 주차장까지 두 시간 반 정도 걸었다. 왼쪽 등산화가 작아서 엄지 발가락이 몹시 아팠다. 집에 와서 보니 엄지 발가락 발톱이 피멍이 들어 있었다. 김유신 장군 기도처를 답사하며 생긴 영광의 상처로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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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삼국통일 위해 태종과 김유신 장군 남천정 출정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백제 정벌하기 위해 신라 태종대왕과 김유신 장군 출정 필자는 남천정이 있었던 경기도 이천시의 설봉산성을 2020년 12월 28에 답사하였다. 3년 전부터 현재까지 삼국통일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혁혁한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의 역사 유적지를 틈틈이 둘러보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양산, 김해, 산청, 경주, 청도, 경산, 영천, 상주, 충북 진천, 강원도 강릉, 북쪽의 경기도 파주, 연천 등의 지역을 계속 답사하고 있다. 김유신 장군(595~673년)이 태종대왕을 수행하여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경기도 이천에 있는 남천정으로 출정했을 때는 나이가 65세였다. 그 당시에는 현재보다 평균 수명이 훨씬 짧았으므로 60대는 노인으로 전쟁터 일선에 나서기보다는 안전한 서라벌에서 벼슬을 하거나 은퇴를 하여 노후를 보낼 시기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유신 장군은 노익장으로서 전쟁의 최일선에 서서 야전 사령관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애국심도 강했지만 건강 관리도 잘했던 것으로 보인다. 660년 신라의 백제 원정시 신라 태종대왕이 직접 출전하였다. 태자 법민과 김유신 등이 이끄는 정예병은 5만 명이었으며, 국왕을 호위하고 전투지원을 하던 병력도 상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확인 가능한 병력이 최소 5만 명 이상이므로 군수 지원부대를 포함하면 약 6만~7만 명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第五)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 태종무열왕이 남천정에 이르다. 〔7년(660)〕 6월 18일에 〔왕이〕 남천정(南川停)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권제5 태종무열왕 7년 5월조에는 태종무열왕이 5월 26일에 경주를 출발하였다고 전한다. 또 본서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7년 6월조에는 태종무열왕이 남천정에 도착한 시기는 6월 18일이라 전한다. 경주에서 경기도 이천까지 대부대가 행군하는데 23일 정도가 걸렸다. 남천정(南川停)은 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지역에 있던 군단이다. 『삼국사기』 권제40 잡지(雜志) 제9 직관 하(下) 무관(武官)조에 남천정의 군관직(軍官職)으로 기병(騎兵)을 거느린 대대감(隊大監) 1명, 소감(少監) 2명, 대척(大尺) 2명과 삼천당주(三千幢主) 6명, 삼천감(三千監) 6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 권제40 잡지 제9 직관하(下) 무관조에 따르면, 진흥왕(眞興王) 29년(568)에 신주정(新州停)을 파하고 남천정을 설치했으며, 다시 진평왕(眞平王) 26년(604)에 남천정을 없애고 한산정(漢山停)을 두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제47 열전제7 해론(奚論)조에 건복(建福) 28년(진평왕 33 ; 611년)에 신주(정)가 존재하였다고 전하고, 본 기록에는 남천정이 기록이 되어 있어 무관조의 연혁에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李文基, 1997, 『新羅兵制史硏究』, 一潮閣, 80쪽). 2. 백제 정벌하기 위해 당나라 군사 출정 태종대왕 7년 경신(660) 여름 6월에 대왕과 태자 법민(法民)이 장차 백제를 정벌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남천(南川)에 이르러 진영을 설치하였다. 그때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를 요청하였던 파진찬 김인문(金仁問)이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蘇定方), 유백영(劉伯英)과 함께 군사 130,000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군사 130,000명은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7년(660) 3월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金仁問)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13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고 전한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의 세주(細注)에는 향기(鄕記)를 인용하여 “군사가 122,711명, 선박이 1,900척”이라고 전한다. 『삼국사기』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상)조에 당나라 태종이 소정방에게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고 전하나, 실제 백제 정벌에 동원된 군사는 122,711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수행하던 부하[從者] 문천(文泉)을 보내와 〔그 사실을〕 고하였다. 문천(文泉)은 신라 태종무열왕대의 인물로 대감의 벼슬에 있었다. 당에 가 있다가 소정방을 따라 고구려 원정에 참여하여 소정방의 서신을 왕에게 전하고, 문무왕의 서신도 다시 소정방에게 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은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많은 배들이 꼬리를 물고 1,000리를 이어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내주(萊州)는 지금의 중국 산둥성(山東省) 라이저우시(莱州市)에 치소를 두고 있었는데, 본래는 동래군(東萊郡)이었던 것을 당나라 초기에 내주(萊州)로 고치고 하남도(河南道)에 소속시켰다. 많은 배들이 … 동쪽으로 내려왔다. 우리나라의 삼국과 중국의 대표적인 해상 교통로는 연안항로이다. 당시 소정방(蘇定方)은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등주(登州)를 잇는 도서(島嶼) 지역을 통과한 후 연안을 따라 내려와 덕물도(德物島)에 도착하였다.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7년 6월조에 따르면, 소정방이 내주에서부터 덕물도에 이르기까지 3일의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덕물도(德物島)는 지금의 인천시 옹진군 덕적면의 덕적도(德積島)이다. 덕물도만으로는 1,900척에 달하는 당나라 선박이 모두 머물기는 어렵기 때문에 덕물도를 비롯하여 소야도, 문갑도, 굴업도 등으로 이루어진 덕적군도에 분산하여 기항한 것으로 추정된다. 식수나 땔감 등을 고려하면, 덕적군도뿐만 아니라 태안반도를 비롯한 서해안 연안지대에도 일부 정박하거나 상륙했을 가능성이 크다. 3. 경기도 이천 설봉산성에 있는 남천정 남천정(南川停)은 통일신라시대의 지방 주둔 군부대이다. 각 주(州)에 설치된 십정(十停) 군단의 하나이다. 십정은 통일신라의 9주를 기준으로 하여 각 주에 하나씩의 정(停)을 배치하였으나, 한주(漢州)만은 그 지역이 넓을 뿐만 아니라 국방상의 요지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두 개의 정이 설치되었다. 즉, 지금의 경기도 이천시에는 남천정이 설치되고, 여주시 일대에는 골내근정(骨內斤停)이 설치되었다. 소속군관으로는 대대감(隊大監) 1인, 소감(少監) 2인, 대척(大尺) 2인, 삼천당주(三千幢主) 6인, 삼천감(三千監) 6인이 있었으며, 금색(衿色)은 황색이었다. 설봉산의 최고봉인 희망봉은 해발 394m이다. 설봉산 정상 부근에서 팔각제단지(八角祭壇址)가 발굴 조사되었다. 제단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것은 이 성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제단은 설봉산성 칼바위의 서쪽 20m 지점에 복원되어 있다. 설봉산 정상에는 봉화대도 설치되었다. 팔각제단은 사직단(社稷壇)으로 보인다. 사직(社稷)은 원래 主神인 사신(社神)과 오곡(五穀)의 어른이 되는 직(稷)을 말하는 것으로서 제사를 모시는 법을 만들어 사직단(祉稷壇)이라 하였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이후로 천지인(天地人)의 삼위일체 사상이 점점 발달되면서 사(社)와 직(稷)을 하나로 합하여 토지와 곡물을 관리하는 神으로 받들어 이때부터 천자(天子)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사직(社稷)에 제사를 올리는 중요한 국가행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때에 전국의 명산에서 국가적으로 제(祭)를 받드는 관습이 있었으며 이러한 제사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서 시행되었고 주로 국가 또는 지방에서 주관하였다. 이곳 팔각제단은 그간의 발굴 출토된 각종 유물로 보아 4세기 백제를 비롯하여 삼국이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천시는 통일신라가 남천정[南川停 : 삼국 통일 후 서기 568년인 진흥왕 29년에 설치되었던 군관(軍管)]을 설치한 군사적 요충지인 것으로 보아 이곳 설봉산성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적(事蹟)임을 나타내는 시설이다. 이천시에서는 매년 가을에 개최되는 설봉문화제 행사 기간 중 이곳에서 사직제(社稷祭)를 거행함으로써 이천시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고 있다. 4. 설봉산성 『동국여지승람』에 ‘설봉산(雪峯山)은 부(府)의 서쪽 5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라는 기록이 있으며, 일명 부아악산(負兒岳山)이라 부르기도 하는 영산(靈山)이다. 산중에는 영월암과 삼국시대에 백제, 고구려,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던 축성(築城) 등 문화유적이 많다. 앞으로도 이곳은 우리나라 한복판 노른자위로 통일과 번영의 심장부가 될 것으로 이천시는 내다보고 있다. 설봉산성은 사적 제423호이며, 소재지는 경기도 이천시 사음동 산24 일원이다. 설봉산성은 관고리성지(官庫里城地) 또는 무안산성이라고도 불리며, 설봉산의 정상부에 쌓은 테뫼식의 돌로 쌓은 산성이다. 설봉산성은 관고동의 일명 기치미 고개에서 증일리에 이르는 산줄기의 연봉에 위치하고 있어 북쪽과 남쪽은 물론 주변지역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산성의 전체 둘레는 1,079m 이고 삼국 시대의 성중에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는 산성으로 전면을 다듬은 화강암 성돌을 이용하여 바른층 쌓기를 하였으며, 쐐기돌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성문은 어긋문 형태로 된 서문과 북문, 동문이 있으며,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돌출시킨 치성은 4개가 확인되고 있다. 장대는 성내의 가장 높고 지휘 관측이 용이한 칼바위 부근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노출된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 정도이다. 우물은 동문지 뒤편 평탄한 곳에 1개소가 있으며, 물 통로는 북쪽과 동쪽에 각각 1개씩 설치하였다. 단국대학교에 의한 발굴조사결과 칼바위 부근의 토광과 서문지 하부에서 백제 토기가 다수 출토되어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백제 석성일 가능성 에 대한 견해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반면 동문지 상단 및 성내 전역에서는 단각고배류와 인화문토기 등 이 출토되었으며, 함통(咸通)6년(865)명의 벼루가 출토되어 이 산성이 삼국시대에 축성되어 9세기 중엽까지도 사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부성은 규모가 각각 532m와 362m인 석축성으로서 성내에 건물지와 치성, 문 지 등의 유규가 확인되었으며, 삼국∼통일신라기의 기와, 토기,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설봉산 정상 부근에 있는 남장대지(南將臺址)의 장대는 장수의 지휘소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장대는 전투시 군사 지휘가 편리하고 산성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장소를 골라서 세웠다. 남장대지는 설봉산성에서 가장 높고 산성 전체가 내려다보여서 전투시 군사의 지휘가 편리한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초석 15기가 노출되어 있다. 초석의 형태는 일정하지 않으며 윗면과 옆면만 약간 다듬었다. 초석의 아래쪽에는 다듬지 않고 고인돌을 놓아서 수평을 맞추었으며, 초석의 배치 상태로 보아 남장대의 규모는 정면 5간, 측면 2간으로 동서 14.3m, 남북 5.7m로 추정된다. 발굴 조사시 기간, 담장, 온돌 등의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건물은 누각 형태로 사방이 트여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축조 연대는 통일신라 말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5. 영월암(映月庵) 영월암은 향토유적 제14호이며, 소재지는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438이다. 설봉산(雪山) 주봉 기슭에 자리 잡은 영월암(月庵)은 이 고장의 대표적인 유서 깊은 고찰이다. 문헌상으로는 조선 영조(英祖) 36년(1760) 이후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 이천지(利川誌)와 광무(光武) 3년(1899)에 나온 『이천군읍지(利川鄭邑誌)』에는 모두 북악사(北岳寺)란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그 이후로 영월암이라 불러오고 있으며, 현재는 조계종(溪宗)에 소속되어 있다. 영월암 중건기(重建記)에 의하면, 지금부터 1천 300여 년 전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 때 해동(海東)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인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문헌이나 금석문(金石文) 등 신빙(信憑) 자료가 없어서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경내에는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보물 제882호)과 통일신라 말~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광배(石造光背) 및 연화좌대(蓮花座臺), 그리고 석조 3층석탑(石造 三層石塔) 등의 유물, 유적이 남아 있어서 이 절이 유서 깊은 고찰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러한 유적 유물 등의 조성연대로 미루어 영월암의 창건연대는 대략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조선 후기인 영조(英祖) 50년(1774)에 이르러서야 영월(映月) 낭규 대사(郞奎 大師)가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여 큰 불사를 일으켜 중창하였다. 그 뒤 1911년 보은(普恩) 스님이 다시 중건하고, 1920년에는 당시 주지인 유신암(劉信庵) 스님이 산신각(山神)과 극락전을 옮겨 세웠으며, 1937년에는 조언우(曺彦佑) 스님이 누각인 단하라(丹霞閣)을 중건하였다. 지금의 대웅전(大雄殿)건물을 1949년 청암(淸庵) 김명칠(金明七) 스님이 이천 향교(利川 鄕校) 명륜당(明倫堂) 앞에 있었든 퇴락된 풍영루(風詠樓) 체목(體木 : 집을 지을 때 기둥, 도리 따위에 쓰는 재목)으로 옮겨 짓다가 6.25동란의 발발로 중단된 것을 1953년 11월 당시의 주지인 김해옹(金海翁) 스님이 준공하였다. 현재의 영월암은 대웅전과 부속건물(附屬建物) 3동(棟)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 석탑, 석조광배 및 팔각연화좌대 등의 유물들은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오다가, 1981년 주지 송정해(宋正海) 스님이 사계(斯界)의 고증을 받아 수습 복원해 놓은 것이다. 1989년 8월 14일 소실된 서편 요사채를 1991년 여름에 법정(法淨) 강종래(姜鐘萊) 스님이 전통한옥으로 복원하여 명실공히 전통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절 앞에 일근(一根) 이주(二株)의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640여 년, 수고 37m, 나무 둘레 5m이다. 이는 고려말의 고승 나옹 대사(懶翁 大師))가 이 절에 머물 때 꽂아놓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는 신비한 전설(傳說)을 가지고 있다. 6. 설봉산 삼형제바위 전설 아주 오랜 옛날 가난한 집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나무를 해다가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삼형제는 우애와 어머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인근 지방에 효자 아들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어느 날 설봉산으로 나무하러 갔던 삼형제가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아 속태우던 어머니는 아들을 찾아 산으로 가게 되었고 그런 줄도 모르는 아들은 나무를 한 짐씩 잔뜩하여 집으로 돌 아와 보니 어머니가 안 계셨다. 어머니를 찾아 온산을 헤매고 있을 때 어디선가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삼형제가 쏜살같이 달려가 보니 수십 길이 넘는 낭떠러지 밑에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삼형제 아들이 똑같이 뛰어내렸는데 그 순간 세 덩어리의 바위가 되었다고 하는 傳說이 있다. 또한 오랜 옛날 홀어머니 밑에 삼형제가 있었는데 3년 기한인 병졸(兵卒)로 모두 뽑혀가게 되었다. 아들 셋을 의지하며 살던 어머니는 아들의 무사함을 빌었으나 약속한 3년이 지나도 이들이 돌아오지를 않았다. 혼자서 생계를 이어 가던 홀어머니는 그리던 아들을 보지못한 채 홀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병졸의 의무를 다한 삼형제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여 어머니의 무덤에 엎드려 명복(冥福)을 빌며 일어날 줄 몰랐고 그대로 세 덩어리의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천구경(利川九景)은 제1경은 도드람산봉. 이천시 마장면 목리, 제2경은 설봉호(雪峰湖). 이천시 관고동 설봉산내, 제3경은 설봉산 삼형제바위. 설봉산내, 제4경은 설봉산성(雪峰山城). 설봉산내, 제5경=산수유마을, 제6경은 반룡성(蟠龍松) 천연기념물 제381호.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201-1, 제7경은 애련정(愛蓮亭). 이천시 안흥동, 제8경은 노성산 말머리바위. 이천시 설성면 수산리, 제9경은 이천도예촌. 이천시 사음동 신둔면 수광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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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경주통일전경주 통일전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통일전 건립 및 현황 통일전은 태종무열왕과 문무대왕, 김유신 장군 등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세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호국의 성지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신라 삼국통일의 위엄을 기리고 조국의 평화통일 염원을 담아 1977년 9월 7일 건립되었다. 통일전은 1976년부터 1977년까지 사업비 7억 3천 9백만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완성하였다. 통일전은 82,645㎡ 면적에 본전 1동, 영정 3기, 기념비 1기, 사적비 3기, 기록화 17점, 무명용사비 1기, 수련이 있는 연못가에 지어진 화랑정 정자가 있다.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인 태종 무열왕, 문무대왕, 추존 흥무대왕인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셨다. 남산 자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통일전은 소나무와 연못이 주위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통일전 바로 옆에는 청소년 정신 교육과 심신 수련장인 화랑교육원이 있어 상호 보완하여 현대의 신화랑을 배출하는 요람 역할을 하고 있다. 2016년 야간 개방한 화랑정과 주변 연지의 야경은 경주시민과 관광객의 힐링 코스로 각광받고 있으며, 통일전 앞 직선으로 뻗은 은행나무 단풍길은 대한민국의 100대 아름다운 길로 선정될 만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신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어받아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제44회 통일서원제’가 2022년 10월 13일 경주 통일전에서 열렸다. 통일서원제는 신라가 매초성 전투에서 당나라를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수한 날인 10월 7일에 즈음하여 매년 개최하고 있다. 한반도 최초 신라가 이룩한 삼국통일의 위업을 토대로 평화번영의 염원을 기원하며 1979년 첫 서원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주낙영 경주시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 경북도의원과 경주시의원, 각 기관단체장 및 사회단체, 학생과 시민 등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라고취대의 식전공연, 헌화와 분향, 통일 서원문 및 통일결의문 낭독, 도립무용단의 ‘화랑’ 갈라 공연, 초등학생들의 통일결의문 낭독,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제창, ‘통일염원 한마음 퍼포먼스’ 순으로 진행됐다. 2. 통일전 운영 경상북도가 신라 삼국통일 정신을 기리고자 건립한 경주 통일전을 직접 운영하기로 2022년 10월 3일 결정했다. 통일전 은행나무길, 경북산림환경연구소 등 주변 관광자원과 연계한 명소로 만들고 지역의 주요 호국시설로 재단장하기로 하였다. 경북도는 일반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데다 활용도가 떨어진 통일전 운영과 이용을 활성화하기 위해 2023년부터 경주시로부터 관리권을 넘겨받았다. 경북도는 통일전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2022년 9월 30일 경주시-경북독립운동기념관과 상호협력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2023년부터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이 통일전을 맡아 운영하도록 했다. 통일전은 1977년 박정희 대통령 때 신라 삼국통일 유적지 조성계획에 따라 한반도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뜻으로 짓고서 1987년부터 경주시가 도에서 관리권을 받아 36년간 운영해왔다. 초기에는 국가 차원의 관람 유도로 학생과 일반인 관람, 참배가 많았으나 현재는 예전만큼 관심이 이어지지 않고 활용도도 떨어진 상태다. 경북도는 그간 운용하던 관람 콘텐츠만으로는 통일전 활성화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장기적 발전계획 마련에 나서기로 하였다. 학술 연구,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지속 가능한 활성화 계획을 세워 국가적 차원에서 통일 정신을 계승하는 주요 호국 시설로 혁신할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3. 통일전 기록화 17점 사천왕사 호국불사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작품 규격 100호 230cm×150cm, 1977년), 황룡사 9층 탑 조영도(작가 오원배, 인천, 작품 규격 100호, 1987), 남산 신성 축성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작품 규격 100호, 1979),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100호, 작품 규격 100호, 1977), 김유신 장군 단석산 수련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작품 규격 100호, 1977), 김유신 장군 출전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작품 규격 100호, 1977). 무열왕 남천정 출전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작품 규격 100호, 1977), 황산벌 혈전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100호, 1977). 화랑 관창 용전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100호, 1977). 평양성 함락도(작가 오원배, 인천, 100호, 1987), 원효 군사 자문도(작가 박비오, 대구, 100호, 1987), 원광법사 세속오계 교화도(작가 정창섭, 충북 청주, 200호, 330cm×190cm, 1979), 강수 외교문서 작성도(작가 박비오, 대구, 작품 규격 100호, 1987). 매초성 당군 격멸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작품 규격 100호 230cm×150cm, 1977), 기벌포 대첩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작품 규격 100호 230cm×150cm, 1979), 삼국통일 영광도(작가 김태, 경기 파주, 작품 규격 500호 630cm×200cm, 1979년). 문무왕 호국 해룡도(작가 정창섭, 충북 청주, 작품 규격 200호 330cm×190cm, 1979) 등 17점의 기록화가 전시돼 있다. 17점의 삼국통일 기록화 중 오승우 화백의 작품이 10점으로 가장 많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과 직접 관련된 작품은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 김유신 장군 단석산 수련도, 김유신 장군 출전도, 황산벌 혈전도, 화랑 관창 용전도 등이다. 4. 김유신 장군 출전도와 원효 군사 자문도 기록화 중 김유신 장군 출전도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3년(644년)에 김유신은 소판(蘇判)이 되었고, 그 해 9월에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 고령), 성열성(省熱城 : 의령), 동화성(同火城 : 구미)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그다음 해 정월에 돌아왔으나, 아직 왕을 배알하기도 전에 백제의 대군이 신라의 매리포성(買利浦城)을 침공한다는 급보를 받고, 왕은 또 김유신을 상장군으로 삼아 이를 막으라고 명령하였다. 김유신은 왕명을 받고 처자도 만나보지 못한 채 출정하여 백제군을 쳐 이를 패주시키고 2,000명을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그해 3월에 왕의 귀환하라는 명령이 내렸으나, 김유신이 집으로 가기도 전에 또다시 백제의 군사들이 그 국경에 나와 주둔하고, 장차 군사를 일으켜 신라로 쳐들어오려 한다고 급히 알리자, 왕은 다시 김유신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공은 수고롭겠으나 빨리 나가서 적들이 전비를 갖추기 전에 이를 방비하라.” 하므로, 김유신은 또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곧 군사를 훈련하고 병기구를 수선한 다음, 서쪽으로 백제를 막으러 나갔다. 이때 집사람들은 모두 문밖으로 나와서 장군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김유신은 문 앞을 지나면서 돌아보지도 않고 가다가 50걸음쯤 되는 곳에 이르러서 말을 멈추고, 종자에게 집에 가서 물을 떠오라 명령하여 물을 마셔 보고 말하기를 “우리 집 물맛이 아직도 옛날 그대로구나!” 하고 그냥 길을 떠나니, 이를 보는 모든 군사들이 말하기를 “대장군도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야 어찌 골육의 가족들과 이별함을 한탄하리요.” 하며 싸움터로 나갔다고 한다. 기록화 중 ‘원효(元曉) 군사(軍事) 자문도(諮問圖)’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무왕 2년(662년) 2월에 신라의 장군 김유신 등이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평양을 포위하고 당군에게 군량을 수송하고 돌아왔다. 그 후 신라에서는 당군과 합세하기 위해 김유신은 연기(然起), 병천(兵川) 등을 보내어 화합할 기일을 물었다. 이때 당의 소정방(蘇定方)은 난새(鸞 : 난새 란)와 송아지(犢 : 송아지 독)를 그려 보냈으나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원효법사(元曉法師)에게 물었다. 원효는 “군사를 급히 돌이키라는 뜻” 이라고 그 암호를 해독했다. 이에 김유신은 모든 군사를 패강(浿江)을 건너게 한 결과 고구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처럼 원효대사가 군사 자문에 응하는 등 신라의 삼국통일에 미친 사상적 영향은 지대했다. 5. 통일전 기록화 10점을 그린 오승우 화백 이력 - 1930 6월19일 전남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서 부친 화가 오지호와 모친 지양진의 차남으로 출생 - 1950(20세) 조선대학교 국문과 입학 - 1952-54 군복무 - 1955(25세) 제4회 국전<풍경30호> 입선, 경복궁미술관 - 1957(27세) 제6회 국전<법당 내부 120호> 특선 및 <미륵불120호> 입선, - 조선대학교 예술과 졸업, 광주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로 부임 - 1958년(28세) 제7회 국전<고찰80호>특선 및 <시장 풍경100호>무감사 - 1959(29세) 제8회 국전<팔상전100호> 특선 및 <마곡사 풍경> 무감사 - 1960(30세) 제9회 국전<금강계단100호> 특선 및 <마곡사 풍경> 무감사 = 1961(31세) 제1회 개인전, <박쥐란> 외 60점 전시, 광주 Y.M.C.A화랑 - 제10회 국전 추천작가로 <신관> 출품, 경복궁미술관 - 1962(32세) 제2회 개인전, <명태>외 30점 전시, 광주 양지다방 - 서울배화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하여 서울로 이사 - 1965(35세) 제7회 개인전, <미륵불>외49점 전시, 서울 신문회관 화랑 - 1965-74 경희대, 서라벌예술대, 홍익대, 중앙대 미술과 출강 - 1967(37세) 민족기록화전시회 <용문산의 혈전1000호> 출품, 경복궁미술관 - 월남전기록화전시회에 <구출>외2점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 1974(44세) 제23회 국전 심사위원 역임, 민족기록화전시회(경제편), <포항종합제철 500호> 출품, - 1975 민족기록화전시회(전승편), <신라의 당군 격퇴와 삼국통일 500호>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 1976(46세) 제25회 국전 심사위원 역임, <계백장군의 황산싸움 500호> 출품 - 1977년(47세) 제26회국전 심사위원 역임, 경주 통일전 벽화 제작, <매초성 당군 격퇴 100호>외 7점 - 1979(49세) 제28회 국전 심사위원 역임 - 1985(55세) 제21회 경기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역임 - 1987(57세) 제6회 미술대전 운영위원 역임 - 1988(58세) 한국미술협회 고문으로 추대 - 1990(60세) 서울시문화상<미술부문> 수상 - 6회 무등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역임 - 1993(63세)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 - 1994(64세) 제13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 1995(65세)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 1997(67세) 성옥문화대상 수상 - 1998(68세)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 서울시 미술장식심의위원 역임 - 국립현대미술관 운영 자문위원 - 2000(70세)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역임 - 명예철학박사학위 수여(원광대학교) - 2001(71세) 대한민국예술원 분과위원장 - 2002(72세)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 - 2003(73세) 단원미술대전 심사위원장 - 2011 오승우 화백이 기증한 178점을 바탕으로 ‘무안군 오승우미술관’ 개관 -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사단법인 목우회 고문, 한국미술협회 고문, 환경운동연합중앙회 지도위원, 한중문화협회 상임 고문 - 2023.4.3. 93세로 별세 6. 통일전 주변 명소 통일전 주변에는 경북산림환경연구소와 조성이 끝나가는 지방 정원, 화랑교육원. 은행나무길, 남산, 정강왕릉, 헌강왕릉, 서출지 등 관광 명소가 가까이 있다. 통일전 바로 옆에 신라 정강왕릉이 있으며, 약간 떨어진 곳에 헌강왕릉이 있다. 정강왕은 통일신라의 제50대(재위 886~887년) 왕이다. 성은 김(金), 이름은 황(晃)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서 의공대왕(懿恭大王)으로 추봉된 계명(啓明)이고, 할머니는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로 추봉된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맏딸로 문의왕후(文懿王后)에 봉하여진 영화부인(寧花夫人)이다. 정(晸 : 헌강왕)·만(曼 : 진성여왕)·윤(胤)과 형제간이다. 재위기간이 짧았지만, 재위 동안에 887년(정강왕 2) 정월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였고, 이찬(伊飡) 김요(金蕘)가 한주(漢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5월에 병이 들어 시중 준흥(俊興)에게 병이 위급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아들이 없으므로 누이 만(曼)으로 왕위를 잇게 하라고 부탁하고, 7월 5일에 죽었다. 보리사(菩提寺) 동남에 묻혔다. 헌강왕은 통일신라 제49대(재위 875∼886) 왕이다. 헌강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 왕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삼국사기』권 11, 「신라본기」 11 헌강왕 6년 9월 9일(880년) 조에 의하면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서울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侍中)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신(臣)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한) 아뢰기를,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음양(陰陽)이 조화롭고 비와 바람이 순조로워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변경(邊境)은 평온하여 민간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덕(聖德)의 소치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경(卿)들이 도와준 결과이지 짐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헌강왕릉은 높이 4.2m, 지름 15.3m의 둥근형태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무덤 밑둘레에 돌을 4단으로 쌓았다. 일찍이 도굴되었으며 비에 의한 피해로 긴급조사를 하였다. 관이 놓여 있는 방은 네모 형태로 천장은 둥글게 모아져 있는 활천장(궁륭상천장)이고, 이 방과 연결된 통로인 널길(연도)은 동쪽에 있어 전체적으로 ‘ㄱ’자형이다. 여기서 꽃무늬 토기도 나왔다. 경주 남산 기슭에 위치한 통일전 가까운 곳에 서출지라는 신라시대 연못이 있다. 남산 마을 한가운데에 삼층석탑 두 기가 있고 동쪽에 아담한 연못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궁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못가에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이 건물은 연못 서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