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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여근곡에서 백제군을 물리친 신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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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여근곡에서 백제군을 물리친 신라군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여근곡

경북 경주시 건천읍 신평리에 여근곡(女根谷)이 있다. 옥문곡(玉門谷)이라고도 한다. 오봉산 아래의 산세 모양이 여성의 국부 모양을 닮아서 여근곡이라 부른다. 옛날부터 풍수지리적으로 음과 양을 중시하는 풍수가들은 음양의 조화를 따졌다. 전국의 산세 중에 여근곡이라 볼 수 있는 곳이 몇 곳 있지만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여근곡이 제일 유명하고,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도 나올 정도로 역사적 연원도 오래되었다.

건천읍 신평리에는 등산객을 위한 여근곡 주차장이 넓게 조성되어 있으며, 안내판, 등산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마을 안으로 약간 들어가면 연못, 정자가 있다. 건천읍 신평2리 마을회관 옆의 식당은 단체가 예약하면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마을회관 옆의 ‘여근곡 기 박물관’은 요즘에는 운영을 하지 않고 있다. 희귀한 수석을 전시하고 있으며, 건물 옥상에 여근곡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수석박물관은 매각을 위해 내놓았다고 한다.

여근곡(女根谷)은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에 관한 전설 중의 하나에서 유래하는 지명이다. 여근곡의 위치는 자인(玆仁)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는 마곡산(馬谷山) 밑의 회곡치(回谷峙)가 있었던 곳으로 지형의 생김새로 보아 여근곡이었을 것으로 본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근곡이 있는 마을인 신평리 일대의 들판은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에 ‘샙들’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이 마을주민들은 여근곡 아래의 들이라 하여 듣기에 민망한 ‘X들’이라 부르고 있었다. 오봉산을 오르는 산행 들머리는 이 샙들을 지나 여근곡의 회음부에 해당하는 위치에 자리 잡은 유학사에서 시작한다. 유학사, 여근곡 옥문지, 부산성, 오봉산, 주사암, 마당바위 등을 차례로 둘러볼 수 있다.

유학사에는 산신각이 있는데, 여근곡의 영향인지 산신도의 산신은 여신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유학사에서 물이 나오는 샘이 있는 옥문지로 가는 등산로는 절 왼쪽에 표지판이 있다. 완만한 계단을 올라 다리를 건너면 금방 옥문지에 도착한다. 옥문지를 1월 5일에 답사하였는데, 생명수인 물이 나오고 있었다. 가는 물줄기 때문에 호스를 연결하여 놓았다. 주변에 작은 계곡이 몇 개가 있어 물이 마르지 않았다. 습기가 많으니 음기도 강한 것으로 보였다.

옛날에는 작은 샘물인 옥문지를 휘저으면 마을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고 금기시하여 청년들이 지켰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과거 보러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은 여근곡을 보면 부정을 타서 과거에 낙방한다는 속신 때문에 이 근처를 지날 때 애써 고개를 돌려 여근곡을 외면하고 지나갔다고 전해진다. 여근곡을 사진 찍기 위해서는 오전에 가는 것이 좋다. 오후가 되면 역광으로 빛이 반사되어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2. 선덕왕의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선덕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善德王知幾三事)은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에 나온다. 제27대 덕만(德曼)[만(曼)을 만(萬)이라고도 한다.]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서기 632)에 왕위를 올라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앞일을 미리 안 것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당 태종이 붉은색ㆍ자주색ㆍ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왔는데, 왕이 그 그림을 보고 말하였다.

“이 꽃은 정녕 향기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씨를 뜰에 심도록 명하였다. 그 꽃이 피었다 지기를 기다렸는데, 과연 그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

둘째, 영묘사(靈廟寺)의 옥문지(玉門池)에서 겨울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서 3~4일 동안이나 울어대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어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급히 각간인 알천(閼川)ㆍ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예병 2천 명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물어보면 그곳에 반드시 적군이 있을 것이니, 습격해서 죽이라고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백 명이 그곳에 숨어 있기에 모두 죽여버렸다. 백제의 장군 우소(亐召)란 자가 남산(南山)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는 것을, 또 포위하여 활을 쏘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뒤에 병사 1,200명이 왔지만 역시 쳐서 죽였으니,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셋째, 왕이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여러 신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짐은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속에 장사 지내라.”

여러 신하들이 그곳을 몰라 다시 어디인지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다.”

 

그달 그날이 되자 왕은 과연 세상을 떠났다. 여러 신하들이 낭산의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왕의 무덤 아래에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때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게 되었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물었다.

“모란꽃과 개구리의 두 일이 그러할지 어떻게 미리 아셨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꽃은 그렸지만 나비는 없었소. 그래서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소. 이것은 당나라 황제가 내가 남편이 없는 것을 비웃은 것이오. 개구리가 화가 난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고, 옥문(玉門)이란 여자의 음부요.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쪽을 뜻하오. 그래서 적군이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소. 남근이 여근 속으로 들어오면 반드시 죽는 법. 그래서 쉽게 잡을 줄도 알았소.”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왕의 성스러운 지혜에 탄복하였다.

 

세 가지 색깔의 꽃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것일까? 선덕ㆍ진덕(眞德)ㆍ진성(眞聖)이 이들이다. 당나라 황제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는 이 선덕왕 대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한다.

 

3. 여근곡에서 백제군을 물리친 김유신 장군

 

김유신 장군은 선덕여왕대부터 왕의 측근 실세가 된 김춘추와 함께 많은 활약을 한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김유신은 이 치열한 항쟁의 선봉에서 활약했다(우리역사넷).

 

당시 신라에서 김유신의 역할과 위상은 다음 일화에서 잘 알 수 있다. 644년(선덕여왕 13) 9월에 그는 대장군으로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7성을 격파하고 가혜진(加兮津, 지금의 경북 고령군 인근으로 추정)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신라 왕성으로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보고하려고 하였는데, 미처 왕을 뵙기도 전에 백제 대군이 쳐들어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왕이 다시 김유신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삼아 이를 막도록 명령하자, 그는 바로 다시 말을 타고 전장으로 나아가 적군을 격파하였다.

 

3월에 다시 왕을 뵙고 명령을 완수했음을 보고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다시 백제가 대군을 동원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이에 왕이 다시 김유신에게 출정할 것을 명한다. 그는 잠시 집 앞에서 장수(漿水, 숭늉 내지 미음)만을 마시고 잠시도 쉬지 않고 바로 전장으로 나아갔다.

 

647년(선덕여왕 16) 선덕여왕이 위중하자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이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김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이 반란을 진압하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을 옹립하였다. 이로써 김춘추와 김유신은 권력을 장악하고 신라가 삼국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군사동맹을 맺는데 성공했고, 김유신은 여러 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나갔다. 적의 침입을 막아내는데 그치지 않고, 공격하여 많은 성을 탈취하고 백제의 장졸들을 격살하였다.

]

648년에 백제의 공격을 옥문곡(玉門谷)에서 저지하며 백제 장군 8명을 사로잡고 1,000명에 달하는 적군을 목 베었다. 이때 포로로 잡은 백제 장군과 김춘추의 딸 부부 유해를 교환하여 김춘추의 한을 일부 풀어주기도 하였다.

 

이어 승세를 몰아 공격해 악성(嶽城) 등 12성을 빼앗으며 2만여 명을 죽이고 9천 명을 생포하였다. 또 더 진격하여 진례성(進禮城) 등 9성을 공파(攻破)하고 9천 명을 죽이고 600명을 생포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오봉산을 등산 목적지로 설정하면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여근곡, 옥문지를 볼 수 있고, 천년 고찰인 주사암, 신라시대 성인 부산성도 답사할 수 있다. 주사암은 신비로운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주사암에는 김유신 장군과 화랑도들의 수련장인 마당바위에서 인생샷을 찍을 수 있다. 마당바위는 인기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등산로는 일부 구간이 가파르지만 중간에 포장된 임도도 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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