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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문화박사의 현충일 특집/백범일지 속에 기록된 양산출신 독립투사 이규홍 선생백범일지 속에 기록된 양산출신 독립투사 이규홍 선생● 백범 김구백범 김구 선생은 전 국민이 다 아는 열혈 애국 투사다. 김구 선생의 호인 백범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백범의 ‘흰 백(白)’은 당시 가장 미천한 계층을 상징하는 백정을 뜻하고, ‘무릇 범(凡)’은 평범한 사람을 의미한다. 김구 선생은 신분이 낮고 배움이 적은 평범한 사람들도 배우기만 하면 나라를 바로 세울 인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김구 선생 유묵, 자료는 양산시립박물관 '1919 양산으로부터 울림' 전시회에서 촬영 노당익장, 늙어서도 기운이 더욱 좋아지다. 조선 후기, 뇌홍식 권총 우리 민족이 잘 되는 길은 교육을 통해 문화강국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임시정부 활동 전에는 교육에 매진했다. 6월 6일 현충일을 맞이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목숨바쳐 투쟁한 선열들을 생각하며 백범 김구 선생과 백농 이규홍 선생의 독립투쟁과 두 분의 인연을 알아보기로 한다.맨 왼쪽 백범 김구 선생, 친동생, 이동녕, 엄항섭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 김구 선생 서명 태극기 김구 선생 유묵, 지행합일, 아는 것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 필자 심상도는 이규홍 선생의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 행적을 연구하던 중 김구 선생이 쓴 백범일지가 생각났다. 상권, 하권을 단숨에 독파하였다.독립투사 김구 선생의 일생은 위기의 연속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독립을 위한 김구 선생의 열망을 느낄 수 있었고, 청년시절 동학 지도자인 접주가 되어 관군과 싸운 일,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토전양량(土田讓亮:쓰치다 조스케)이란 자를 국모 민비 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 때려 죽인 일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치열한 독립투쟁 과정, 투옥, 탈옥, 사형당할 위기, 고문,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중국 내륙 깊숙한 곳으로 피신하여 임시정부의 명맥을 유지했던 일을 읽으며 스릴을 느끼는 동시에 굴하지 않는 애국심에 감복하였다.그토록 원하던 해방을 맞이하여 대한민국에 환국하여 자신을 도와준 분들을 만나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머리깎고 출가하였던 마곡사를 찾는 장면은 그야말로 금의환향의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다. ● 백범일지백범일지의 첫 시작은 ’인, 신 두 아들에게’라는 글로 시작된다.너희들이 아직 어리고 반 만리 먼 곳에 있어 수시로 나의 이야기를 말해 줄 수 없구나. 그래서 내가 겪어온 바를 간략히 적어 몇몇 동지에게 맡겨 너희들이 아비의 경력을 알고 싶어 할 정도로 성장하거든 보여주라고 부탁하였거니와, 너희가 아직 나이 어리기 때문에 직접 말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지만 어디 세상사가 뜻과 같이 되느냐.내 나이는 벌써 쉰셋이건마는 너희는 이제 열 살과 일곱 살밖에 안되었으니 너희의 나이와 지식이 자라질 때에는 내 정신과 기력은 벌써 쇠할 뿐 아니라, 이 몸은 이미 원수 왜에게 선전포고를 내리고 지금 사선에 서 있으니 내 목숨을 어찌 믿어 너희가 자라서 면대하여 말할 수 있을 날을 기다리겠느냐?● 백범일지에 나오는 교훈김구 선생이 젊은 시절에 만난 유학자 고능선 선생은 이런 말로 교훈을 주셨다."예로부터 천하에 흥하여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고, 망해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도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며, 그와는 반대로 백성이 여러 패로 갈라져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외국에는 아첨하고 제 동포와는 싸워서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다. 마치 요즘의 정치세태를 백범이 질타하는 것 같다. 대한민국 번영을 이끌어주고 지원해준 미국을 배신하고, 6.25전쟁 때 백만대군을 보내 침략하여 동포를 죽인 중국에 아부하는 정치인들은 정신차려야 한다.● 백농(白農) 이규홍 독립투사 약력- 1893.9.27 경남 양산군 상북면 대석리 397 출생(조선 고종 30년)- 1916. 일본 도쿄 명치대학 법학부 졸업- 1917. 부산에서 일광상회 개업, 상업(백산 안희제 선생의 백산상회 건너편)백농 이규홍 독립투사 이규홍 선생의 글, 동아일보, 1925년 2월 11일 상해에서 이규홍 선생 글 내용 해석 - 1919.4.23 서울에서 국민대회(3.1독립운동) 참석 후 양산 동향인 윤현진 씨와 함께 중국 상해로 망명- 1919.4 상해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수립(산하 청년단 출판부장)- 1919.9.11 상해 임시정부 내무차장- 1919.11.14 상해 임시정부 학무차장- 1920.1.15 상해 임시정부 내무차장- 1921.3 의정원(오늘날 국회) 의원 선출- 상해 국민대표회 기성회 조직의원- 상해 대한적십자 상의원- 1924. 상해 임시정부 재무총장(제4차 대통령제)- 1925. 외무총장, 재무총장(제5차 대통령제)- 1926.12.8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국회 부의장)- 1926.12.14 임(任). 국무원(장관, 제8차 국무령제, 국무령 : 김구)- 1926.12.15 면(免).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1926.12~1930.11 임. 국무원(제9차 국무령제, 국무령 : 김구)- 1927.1.15 상해 임시정부 약헌 기초위원(2.15 의정원 통과, 3.5 공포, 4.10 발표), 개정된 헌법 명칭 : 임시 약헌- 1932.4.29 윤봉길 의사 상해 홍코우공원 폭탄 투척 의거 성공, 윤의사 채포되자 자전거로 프랑스 조계(租界)에 거주하는 한국인 애국지사들에게 피난할 것을 알림(국가보훈처 발행, 독립운동사 제7권 의열투쟁사, 1979, p.761)- 1935. 독립운동하느라 과로와 영양부족으로 법정 전염병인 폐결핵 감염되어 상태가 위중함, 그 당시 결핵에는 치료약이 없었음, 회복 가망이 없어 고향 양산으로 모셔가라는 연락을 받고 가족이 모셔옴.- 고향집인 경남 양산군 상북면 대석리 397번지로 귀국, 일본 경찰 감시하에 가택 연금당함, 양산읍내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왕진하며 치료, 일본 경찰은 별채에 거주하며 외부인 차단시키고 감시하며 우편 검열.- 1939.5.20 폐결핵 악화로 46세 젊은 나이에 타계- 묘소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 월평리 산1-3(현재 7번국도 월평5거리 근처)● 상해임시정부 활동 현대식으로 해석1919년 3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청년단 출판부장, 경상도 대표 국회의원 선출, 내무부 차관, 교육부 차관, 재무부장관, 외무부장관, 김구 주석 밑에서 장관, 국회 부의장, 임시 헌법 제정 위원으로 활동했다.이규홍 독립투사는 요즘 말로 스펙이 매우 화려하다. 중요한 요직을 다 거치고 백범 김구 선생과 의기투합하여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분투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처럼 이규홍(李圭洪) 독립투사도 호에 백이 들어가 백농(白農)이다. 그 당시 독립투사 중 호에 백(白)이 들어간 백봉 나용균 등 6명을 6백(六白)이라 불렀다.● 백범일지 상권에 나오는 윤현진 독립투사필자 심상도는 최초로 백범일지를 분석하여 양산 출신의 독립투사 윤현진 선생, 이규홍 선생 이름을 발견하였다. 윤현진 선생 이름이 먼저 나온다.윤현진 선생 훈장증 사용한 도장 영정 사진 묘소 묘비 상해임시정부에서 양산을 대표하는 독립투사는 우산 윤현진 선생(1892~1921)과 백농 이규홍 선생(1893~1939)이 있다. 두 분은 양산출신의 위대한 인물인 동시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독립투사들이다. 윤현진 독립투사는 상해 망명 후 임시정부 재무차장을 맡아 2년 정도 활동하다가 전염병애 걸려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백농 이규홍 선생은 윤현진 선생보다 한 살 어린데, 상해 임시정부에서 무려 16년간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차관, 장관, 국회 부의장, 헌법 제정 위원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다음은 백범일지의 내용이다. 임시정부의 조직에 관하여서는 후일 국사에 자세히 오를 것이니 약하거니와, 나는 위원의 한 사람으로 뽑혔었다. 얼마 후에 안창호 동지가 미주로부터 와서 내무총장으로서 국무총리를 대리하게 되고, 총장들이 아직 모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차장제를 채용하였다. 나는 안 내무총장에게 임시정부 문 파수를 보게 하여달라고 청원하였다. 도산은 처음에는 내 뜻을 의아하게 여기는 모양이었으나 내가 이 청원을 한 동기를 말하자 쾌락(快諾)하였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에 순사 시험 과목을 어디서 보고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혼자 답안을 보았으나 합격이 못 된 일이 있었다. 나는 실력이 없는 허명을 탐하기를 두려워할뿐더러, 감옥에서 소제를 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 번 우리 정부의 청사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줍소서 하였단 말을 도산 동지에게 한 것이었다.안 내무총장은 내 청원을 국무회의에 제출한 결과 돌연 내게 경무국장의 사령을 주었다. 다른 총장들은 아직 취임하기 전이라 윤현진, 이춘숙, 신익희 등 새파란 젊은 차장들이 총장의 직무를 대행할 때라 나이 많은 선배로 문 파수를 보게 하면 드나들기에 거북하니 경무국장으로 하자고 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순사 될 자격도 못 되는 사람이 경무국장이 당(當)하냐고 반대하였으나 도산은,"만일 백범이 사퇴하면 젊은 사람들 밑에 있기를 싫어하는 것 같이 오해될 염려가 있으니 그대로 행공하라." 고 강권하기로 나는 부득이 취임하여 사무하였다.위에서 새파란 차장으로 언급된 윤천진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보다 16새 연하이다.● 백범일지 상권에 나오는 이규홍 독립투사민국 8년 12월에 나는 국무령으로 선거되었다. 국무령은 임시정부의 최고 수령이다. 나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을 보고, 아무리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국가라 하더라도 나같이 미미한 사람이 한 나라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의 위신에 관계된다 하여 고사하였으나 강권에 못 이기어 부득이 취임하였다.나는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으로 내각을 조직한 후에 헌법 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독재적인 국무령제를 고쳐서 평등인 위원제로 고치고, 지금은 나 자신도 국무위원의 하나로 일하고 있다.내 육십 평생을 돌아보니 상리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건마는, 나는 귀역궁 불귀역궁(貴亦窮 不貴亦窮:귀한 신분이 되어도 가난하게 지내고 귀한 신분이 아니어도 역시 가난하게 지냄)으로 평생을 궁하게 지내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날에는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거니와 지금의 나는 넓고 넓은 지구상에 한 치 땅, 한 칸 집도 가진 것이 없다.위의 내용과 같이 민국 8년(1926년) 백범 김구 선생은 국무령이 되었다. 국무령은 임시정부의 최고 지도자, 수반(首班)을 의미한다. 국무령은 김구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임시정부의 수령이다.이규홍 선생은 김구 선생이 조직한 내각 5인 중의 한 명이다. 김구 선생은 독재적인 국무령제를 고쳐 평등인 위원제로 개정했다고 밝혔다.● 백범일지 하권에 나오는 이규홍 독립투사 임시정부에는 사람도 돈도 들어오지 아니하여 대통령 이승만이 물러나고 박은식이 대신 대통령이 되었으나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쳐 놓았을 뿐으로 나가고, 제 1대 국무령으로 뽑힌 이상룡은 서간도로부터 상해로 취임하러 왔으나, 각원을 고르다가 지원자가 없어 도로 서간도로 물러가고, 다음에 홍면희(나중에 홍진)가 선거되어 진강으로부터 상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조직에 실패하였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한참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져서 의정원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하루는 의정원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국무령이 되기를 권하였으나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사양하였다. 첫째 이유는 나는 해주 서촌의 일개 김 존위(경기도 지방의 영좌에 상당한 것)의 아들이니 우리 정부가 아무리 아직 초창 시대의 추형(雛形:축소판 형태)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나같이 미천한 사람이 일국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에 큰 관계가 있다는 것이요, 둘째로 말하면 이상룡, 홍면희 두 사람도 사람을 못 얻어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거늘 나 같은 사람에게 더욱 응할 인물이 없을 것이란 것이었다. 그런즉 이씨 말이 첫째는 이유가 안 되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고, 둘째로 말하면 나만 나서면 따라 나설 사람이 있다고 강권하므로 나는 승낙하였다. 이에 의정원의 정식 절차를 밟아서 내가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나는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심상도 보충 설명 : 윤기섭 내무장, 오영선 군무장, 김갑 재무장, 김철 법무장, 이규홍 외무장-외무부장관) 등으로 내각을 조직하고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번번이 곤란할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래서 나는 국무위원의 주석이 될 뿐이요, 모든 국무위원은 권리에나 책임에나 평등이었다. 그리고 주석은 위원들이 번차례로 할 수 있으므로 매우 편리하여 종래의 모든 분리를 일소할 수가 있었다.이렇게 하여 정부는 자리가 잡혔으나 경제 곤란으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 길이 망연하였다. 정부의 집세가 30원, 심부름꾼 월급이 20원 미만이었으나, 이것도 낼 힘이 없어서 집주인에게 여러 번 송사를 겪었다.김구 선생이 임명한 5명의 국무위원에 이규홍 선생이 있다. 국무위원은 동등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최고 책임자인 주석은 국무위원이 돌아가며 맡기로 하였다.● 백범일지에 나타난 독립운동가 감소 이유한창 적에는 1000여 명이나 되던 독립운동자가 이제는 수십 명도 못 되는 형편이었다.왜 이렇게 독립운동자가 줄었는가. 첫째로는 임시정부의 군무차장 김희선, 독립신문 사장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같은 무리는 왜에게 항복하고 본국으로 들어가고, 둘째로는 국내 각 도, 군, 면에 조직하였던 연통제가 발각되어 많은 동지가 왜에게 잡혀갔고, 셋째로는 생활난으로 하여 각각 흩어져 밥벌이를 하게 된 때문이었다.이러한 상태에 있어서 임시정부의 할 일이 무엇인가? 첫째로 돈이 있어야 할 터인데 돈이 어디서 나오나?본국과 만주와는 이미 연락이 끊겼으니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에게 임시정부의 곤란한 사정을 말하여 그 지지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내 편지 정책이었다. 나는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의 열렬한 애국심을 믿었다. 그것은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의 훈도를 받은 까닭이었다.위의 내용을 통해 짐작해보면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운동가 대폭 감소하였고 독립자금도 끊겨 매우 곤궁하게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규홍 독립투사는 어려운 와중에도 김구 선생을 도와서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어가고 있음을 수 있다.● 이규홍 독립투사의 손자 이경우 씨의 고군분투이경우 씨는 할아버지의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다. 필자에게 연락하여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사연을 들어보니 너무도 안타깝고 딱하여 발벗고 나서서 도와드리고 있다.연구자로서 최선을 다하여 각종 자료를 찾아내고 양산의 정치인들에게 찾아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하였다. 서형수 국회의원, 표병호 경남도의원이 협조를 하고 있다.이경우 씨는 할아버지가 독립 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해 아주 어려운 생활을 해왔다. 옛날부터 독립운동을 하면 집안 3대가 망한다고 하였는데, 이경우 씨 집안도 마찬가지다. 이경우 씨는 월남전 참전용사로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국가에 충성을 하였다. 파병 때 고엽제를 만진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다.양산시립박물관 전시회 때 양산 방문한 이경우 씨 통도사 구하스님이 독립자금 제공한 영수증 사본을 들고 이경우 씨 형님은 할아버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분서주하다가 결혼도 못하고 병고에 시달리다가 일찍 돌아가셨다. 집안 재산도 친척들이 몰래 빼돌리거나 사정을 아는 지인들이 명의를 변경하여 차지하는 바람에 후손들은 더욱 곤궁한 삶을 살아왔다. 이경우 씨의 부친도 사재를 털어 마을주민을 위하여 상북면 대석리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현재는 한국농어촌공사 소유로 넘어갔다.이규홍 독립투사 집안은 만석꾼 부자는 아니었지만 몇 천석지기 부자였다. 이경우 씨 외갓집도 양산의 알아주는 부자였다. 이런 재산을 팔아서 상해 임시정부에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제공하였다. 이규홍 독립투사는 상해임시정부에서 16년 동안 헌신하며 재산 대부분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다가 치명적인 법정 전염병인 퍠결핵에 감염되어 귀국하였다. 일본경찰의 감시하에 자택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요양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5년 후 타계하였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는 이유상해에서 폐결핵 감염 후 귀국하여 가택연금 당했다. 귀국 후 가촌토지주식회사 사장, 환영자동차합자회사 무한책임사원 근무 기록이 남아 있어 친일활동으로 의심받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이규홍 선생의 아들 이종문 씨가 처남 지영대 씨와 사업을 하면서 부친 명의의 재산으로 출자하여 형식상 이름만 올라간 것이다. 사업하여 번 돈, 집안의 논밭을 판 돈 등이 지속적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 보내졌다. ● 친일 행적 여부이규홍 선생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명단에 올라가지 않았다. 손자 이경우 씨가 동아일보 도쿄 지사장에게 의뢰하여 일본 외무성 자료를 조사하였다. 요시찰 인물로만 기재되어 있었고 변절 기록은 없었다고 한다.● 통도사 주지 현문 스님 증언서현문 스님이 손자 이경우 씨에게 써준 증언서를 보면 이규홍 선생이 돌아가신 후 장례식에서 제문을 지어 조문한 지인들이 일본 경찰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시달렸다는 내용이 나온다.만약 이규홍 선생이 친일행적이 있었다면 일본경찰이 이런 탄압을 할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규홍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16년 동안 요직을 맡아 독립운동을 하며 재산 대부분읊 바치고 끝내 목숨까지 바쳤다. 위대한 독립투사를 뚜렷한 증거도 없이 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미루고 후손들에게 증거자료를 제출하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표병호 교육위원장의 노력표병호 경남도의원이자 교육위원회 위원장은 필자의 설명을 듣고 적극 도와줄 것을 약속하였다. 양산의 중요 행사에서 만날 때 마다 필자는 표병호 위원장에게 부탁을 거듭하였다.표병호 경남도의회 교육위원장 표병호 위원장과 필자 김판석 전문위원, 표병호 위원장 표병호 교육위원회 위원장은 경남도의회 김판석 전문위원을 소개해주어 여러차례 전화로 소통을 하며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마침 현충일을 하루 앞둔 6월 5일 오후에 아직까지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이규홍 선생이 떠올라 표병호 위원장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경남도의회가 개회 중이라 창원에 있다고 하여 즉각 창원으로 달려갔다.마침 표병호 교육위원장실에 같은 교육위원회 소속인 장규석 도의원, 원성일 도의원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표병호 위원장은 동료 의원들에게 필자를 소개해주었다. 이규홍 선생의 억울한 사연을 간략히 소개하고 도와줄 것을 부탁드렸다.두 분은 진주시에도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한 분이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독립투사를 연구하는 분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표병호 위원장은 경남도 교육위원회 차원에서 보훈처에 조속한 조취를 취할 것을 요청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김판석 전문위원을 위원장실로 불러서 소개해주었다. 그동안 전화로만 얘기를 나누다가 처음 대면하니 반가웠다. 표병호 위원장은 여러가지 해결방안을 설명해주어 그동안 막막하고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졌다. 표병호 위원장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옆에서 돕는 필자의 심정이 이럴진대 손자 이경우 씨는 수십년간 관료적으로 대하는 보훈처 직원들과 증언서를 주고받으며 희망없는 핑퐁게임을 할 때 느꼈을 절망감이 다소나마 이해되었다.이경우 선생이 이제는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고 꽃길만 걸었으면 좋겠다. 현충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경제강국으로 발전하는데 밑거름이 된 독립투사들의 헌신과 희생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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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문화박사의 일요 맛집 Storytelling, 물금읍 황전아파트 근처에 "선가"라는 이색적인 맛집이 있어 소개한다.물금읍 황전아파트 근처에 "선가"라는 이색적인 맛집이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5월 26일 양산숲길보전회에서 상북면 내석리 구불사, 장터길 답사에 북한이탈주민 10명을 초청하여 식사 대접하고 소정의 선물도 증정했다. 인솔자로 함께 참석한 양산경찰서 구현진 보안계장께서 고맙다며 식사 초대를 했다. 김상근 부회장, 김희숙 사무국장과 함께 참석하여 즐거운 담소를 나누며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식당 선가의 위치 주소는 양산시 물금읍 오봉로 6, 예약전화는 055-7323-7677 경상남도 양산시 오봉로 6 선가(宣家) 위치를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양산부산대병원 앞 큰길로 원동면 화제리 가는 길에서 황전아파트 쪽으로 우회전하면 바로 오른쪽에 있다. 디자인센터 건너편이다. 상가 앞 주차장이 있고, 자리가 없으면 조금 더 들어가 뒷골목에 주차를 하면 된다.주인장 성씨가 선(宣)으로 신선 선자가 아니고 베풀 선이다. 선경옥 대표가 운영하고 있다. 황칠나무 생고기는 음식이 아니라 보약이라고 써 있다.황칠나무는 유일하게 우리나라의 해남, 완도 등 남해안, 제주도 등지에서만 자라는 귀한 약용식물이다. 본초강목에 보면 진시황이 보낸 '서복'이 가져간 불로초가 바로 '황칠나무'였다는 기록이 있다.만병통치나무, 황금나무 또는 신비의 나무라고 불리우는 황칠나무의 학명은 만병통치약이다. 왕실의 건강식품으로 사용되어왔다. 황칠나무 성분은 혈액 속에 있는 지방분을 용해시켜 피를 맑게 해주며, 혈액순환을 원할하게 해 주고, 당뇨에도 효능이 있다. 저렴한 가격의 메뉴도 있다. 양산부산대병원이 가까워 건강을 우선시하는 부산대병원 직원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홍어와 황칠나무의 음식 궁합도 환상적이다. 오늘 점심으로 먹은 메뉴 1만 5천 원의 한우정식으로 서빙 방법이 특이했다. 선대표가 찍어준 사진인데, 미소를 짓게 하는 말솜씨도 뛰어나다. 야채는 선대표가 화제리 텃밭에서 직접 농사지은 신선한 채소다. 방아잎은 한약재 같은 향긋한 향이 진하게 나 입안에서 맴돌며 고기 맛을 북돋워준다. 반찬도 깔끔하여 입맛을 좋게 한다. 냉국도 시원하여 요즘 더워지는 날씨와 딱 맞아떨진다. 고기는 홀에서 구워서 나오기 때문에 굽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고기 부위별로 나오는데, 차돌박이 등이 연이어 나온다. 육즙이 풍부하고 부드러우며 고기 맛이 기가 막히다. 통째로 구워서 먹기좋은 정도로 알맞게 자른 버섯 된장찌개 먹기좋은 잡곡밥 된장국 식혜 선대표가 홀에서 직접 부위별로 구워서 서빙하므로 일행의 막내가 고기굽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버섯은 통째로 구워서 나중에 잘라서 서빙한다. 미리 잘라서 구으면 버섯의 고유 향취가 날아간다고 한다. 신선하고 맛있는 고기 무료 제공하는 상추, 식사 후 알맞게 집으로 가져가면 된다. 선가를 운영하는 선경옥 대표가 이렇게 베푸는 것은 선(宣) 씨의 한자가 베풀 선이기 때문이다. 주인장이 취미로 수집하는 피규어 감상, 안쪽이 거울로 되어 있어 사진이 잘 안 나온다. 화요라는 유명한 소주가 있다. 본업이 도요인 광주요에서 내놓은 소주이다. 본업이 도요인만큼 병 디자인에 공을 많이 들여서 증류식 소주 중에서는 병 디자인이 가장 세련되고 고급스럽다. 5종류가 시판되며 각각 도수가 17, 25, 41, 53도이다. XP는 41짜리를 오크통에다 숙성한 제품이다. 53도짜리는 파는 곳이 극히 적다.맛집을 소개해준 구현진 계장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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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문화 박사의 제30대 통도사 주지 현문스님 취임에 따른 Storytelling현문스님 사진=(재)영축문화재단홈페이지 대한불교조계종은 5월 29일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 주지로 자장암 감원, (재)영축문화재단 이사장인 현문스님이 임명됐다고 밝혔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29일 오전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4층 접견실에서 현문 스님에게 통도사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날 아침 영축총림 방장 성파 스님은 신임주지 추천서를 조계종 총무부에 제출, 종무회의를 통과한 뒤 주지 임명장 수여식이 진행됐다.현문 스님 맨 왼쪽, 서운암 전국문학인 꽃축제 참석 원행 총무원장은 이날 "종단의 여러 불사에 많은 협조를 부탁드리며, 통도사 대중들과 화합해 본사를 잘 이끌어주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현문스님도 "종단 불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현문 스님은 두 번째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소회를 밝혔다. 현문 스님은 “최근 통도사는 방장스님 주도 아래 염불원도 개원하는 등 불지종가이자 총림으로서 위상을 제대로 갖췄다”며 “방장스님의 뜻을 잘 받들어 미력하나마 총림과 불교발전에 힘을 다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자장암 현문 스님 거처 정면 현판, 향경다실, 차를 마시며 향과 경전을 함께 하는 곳 측면 현판 현문스님은 1966년 1월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0년 4월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그간 영축총림선원, 봉암사 태고선원, 덕숭총림선원 등지에서 안거 수행을 했다. 2006년 9월 총무원 총무부장, 흥천사 주지 등을 지냈다.백팔계단 백팔계단 옆의 수국 백팔계단은 실제 계단이 108개가 넘는다. 끝나는 지점을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외부 주차장에 주차하고 잠시 걸어와 백팔계단을 오르며 백팔번뇌를 잠깐동안 잊으면 좋다. 힐링이 저절로 되는 아름다운 곡선의 길이다. 현문 스님 통도사 주지 권한대행 2001년 7월 13일 양산 통도사 주지권한 대행으로 현문스님이 임명되어 주지를 역임한 바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이날 통도사 주지권한 대행으로 임명된 현문스님은 월하 전 종정의 상좌로 통도사 자장암 감원을 지냈다.통도사는 전 주지 신허 스님이 직무대행으로 취임한지 1년이 넘도록 총무원으로부터 임명을 받지 못한데 이어 6월말께부터 주지선출을 둘러싸고 영축총림의 양대 문중인 월하 경봉 문중이 의견을 달리는 바람에 진통을 겪어 왔다. 통도사 주지는 암묵적으로 경봉 스님 제자가 하면 다음은 월하 스님 제자가 맡아서 교대로 하는 것이 관례였다.현문스님은 “종교내분으로 실추된 영축총림의 위상과 월하 큰 스님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총무원과 협의, 현재 진행중인 각종 소송의 취하를 유도하고 큰 스님의 방장직 회복을 반드시 이뤄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취현루, 다실로 영축산을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마애여래불상 이후에도 통도사 문중의 의견 대립으로 통도사가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현문스님이 구원투수로 등장하여 주지직무대행을 5회 역임하였다.현문스님은 통도사 초대 방장을 역임한 전 조계종 종정 월하스님의 유지를 받드는 사업을 하는 (재)영축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아왔다. 통도사에 동진출가(童眞出家 : 어린 나이에 출가함)하여 노전, 원주, 총무, 암주, 주지까지 다 거쳤다. 요직을 다 거쳐서 일명 '통도사의 황태자’로 불리기도 했다. 다른 별명으로 명품 스님이라 불리기도 한다. 터가 좁은 자장암을 잘 가꾸어 아기자기한 불국토를 만든 걸 보면 이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현문 스님은 통도사 아랫마을에서 열세 살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와 동진출가했다. 부친과 친한 극락암 경봉 스님이 중을 만들자고 했다. 아이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구하 스님을 먼저 뵈었다. 절을 받고 나자 안경을 코에 건 큰스님이 “발바닥 문대봐라” 하면서 발을 내미셨다. 아이는 노스님이 싫지 않았고 그렇게 했다. 잠시 후 아버지는 스님께 인사하고 혼자 돌아갔다.통도사 승가대학 대교과를 졸업했다. 스님은 통도사 규정국장, 총무국장, 표충사 주지, 통도사 자장암 감원, 조계종 중앙선관위 위원, 불교TV 이사 등을 역임했다.필자 심상도의 양산신문 2013년 10월 23일자 칼럼자장암은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하기 전에 움막을 짓고 기도하던 곳이다. 자장암의 관음전은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 건립한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 거북이 머리, 등, 꼬리처럼 생긴 바위를 깨지 않고 그 위에 건립하여 자연을 아끼는 조상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바위를 살려서 관음전 건립 관음전 안에 있는 바위 관음전 뒤에 있는 거북 머리 자장율사가 바위에 구멍을 뚫어 살도록 한 금와보살의 전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어 행운을 시험하는 참배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자장암은 자장율사(慈藏律師)가 통도사를 짓기 이전에 이곳의 석벽 아래에서 움막을 짓고 수도하였으며 나중에 통도사를 창건하였다. 옛 이름은 자장방이라 하여 통도사 경내 칠방의 하나였으며, 자장율사의 사후 제자들이 수양하던 암자이다. 금와공 금와보살이 있는 금와공 법당 뒤쪽 암벽에는 석간수(石間水)가 나오는데 자장율사가 손가락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어 금개구리를 살게 하였다는 소위 금와공(金蛙孔)이 있어 유명하다.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하권(下卷) '승유어급변화금와(僧遺魚及變化金蛙)'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축서산 통도사의 자장암 곁의 커다란 암벽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는데 그 속에 작은 개구리가 있다. 몸은 청색이고 입은 금색인데 어떤 때는 벌이 되기도 하여 그 변화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다. 여름철에 바위가 과열되면 뜨겁기가 솥과 같으나 그 위를 자유로이 뛰어다닌다. 사승(寺僧)이 이를 일러 금개구리라 하더라. 그런데 이 금개구리는 도무지 산문(山門) 밖을 나가지 아니한다고 하므로 한때 어떤 관리가 그 말을 믿지 아니하고 그 개구리를 잡아 함 속에 넣어 단단히 닫고서 손으로 움켜쥐고 돌아가다가 도중에 열어보니 없어졌다. 세간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神通)으로 자라게 한 것이라 말한다." 필자 심상도는 통도사와 여러 부속암자를 수시로 방문하고 있다. 특히 자장암을 찾으면 마음이 편안햐짐을 느낄 수 있다. 필자는 금와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자주 자장암을 방문한 끝에 소원을 이뤘다.금와보살을 친견한 불자도 여러 명 만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몇 년 전 초파일 때 아들과 같이 온 할머니 한 분이 금와보살을 친견하는 극적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이 남성은 연로한 노모를 모시고 왔는데 키도 작고 허리도 굽어 금와공을 들여다 보기에는 키가 약간 작았다. 미리 알고 작은 보조 의자 받침대를 가져왔다. 할머니가 의자에 올라 금와공을 들여다보는 순간 금와보살이 구멍에서 나와 할머니 손에 앉았다. 기뻐서 어쩔줄 모르는 할머니에게 도로 금와공에 넣어드리러고 필자가 말씀 드렸다.금와보살은 불심이 돈독해야만 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필자도 수없이 자장암을 찾은 끝에 금와보살을 친견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아주머니는 금와보살 친견 후 교통사고가 났는데, 별로 다치지 않았다고 얘기했다.기억에 남는 사람으로 서울에서 승합차를 타고 온 아주머니가 있었다. 승합차에 식수, 이불, 살림살이를 싣고다녔다. 이 분은 금와보살 친견 후 휴대폰으로 찍어 명함크기의 사진 수백장을 인화하여 코팅 후 지인들에게 보시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필자도 한 장 받아 지갑에 넣고다녔다. 금와보살을 찬견하기 위해 서울, 수도권, 전국 각지에서 방문객이 몰려든다. 자장암은 연대는 미상이나 회봉(檜峰)이 중건하였고, 1870년(고종 7)에 한 차례의 중수를 거쳐 1963년에 용복(龍福)이 중건하였으며, 1987년부터 1993년까지 현문화상이 감원실, 금와당, 취현루 등을 건립하였다. 자장암은 국내 사찰 중 전망이 좋기로 소문이 났는데, 프랑스 르몽드지 사장이 자장암의 다실에서 바라보는 경치에 최고의 찬사를 보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자장암에서 영축산 정상을 바라보는 풍광이 매우 아름다우며, 정면으로 보이는 영축산 줄기의 능선도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져 있다.관음전은 거북바위라는 암반 위에 지었는데 암반을 깨지 않고 그대로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법당 바닥에 바위가 살아있다. 거북바위 위에 그대로 전각을 올려서 자연미를 살린 우리 조상들의 자연보호 정신과 건축기술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관음전 앞에는 거북의 꼬리 부분, 법당 안에는 거북의 몸통 부분 일부, 관음전 뒤에는 거북의 머리 부분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몇 년 전에 강릉의 한 식당에 식사를 하러갔을 때 방의 한 가운데에 돌출된 커다란 바위가 있어 주인의 자연보호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바위를 살려서 식당을 지어 입소문이 나는 바람에 영업이 더 잘 된다고 한다.자장암 중창 불사1982년부터 암주로 주석하면서 금와당, 취현루, 감원실 3동을 중건했는데, 금와보살로 유명한 자장암의 감원(監院)을 맡아왔다. 현문 스님은 불사를 하더라도 옛 건축과 조화가 되도록 경주 양동마을과 안동 하회마을도 가보고 전통건축을 참고하여 지었다고 한다.요사채, 자장암 마당 밑에 자리잡고 있어 자연과 조화를 이뤄 있는듯 없는듯 절묘하게 자리잡고 있다. 여러 개의 방이 있고, 안엔 수세식 화장실도 있어 스님들이 수행하기에 알맞다.현문 스님의 자장암 중창불사를 보면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 탁월한 공간 감각, 전문가 못지 않은 건축 안목, 통도사 창건주 자장율사가 기도한 전통 도량을 수호하기 위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관음전 현문 스님은 2층의 다실인 취현루를 건립하였다. 2017년까지 중창불사에 나서 한옥 요사채, 백팔계단을 정비하였다. 2019년 5월에는 한옥 화장실을 완공하였다.최근 완공된 한옥 화장실 통도사 모랭이길, 배내골 장터길로 연결되는 길목에 화장실을 신축하여 답사객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구하 스님 시봉현문 스님은 출가 후 93세 구하 큰스님(1872∼1965)을 1년 3개월간 시봉했다. 구하 스님은 노환으로 몸이 불편했지만 현문 스님은 최선을 다하며 힘든 내색없이 모셨다. 구하 스님은 하루 종일 시봉하고 곤히 자는 현문 스님을 새벽예불 시간되면 들어와서 깨웠다.구하 스님은 개화기와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한국불교의 근대화를 위한 산파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일제시대 명진학교를 설립해 인재룰 양성하고, 스님들을 일본에 유학보내고, 40세의 나이에 통도사 주지로 취임한 후 14년에 걸쳐 연임하며 개혁을 선도했다. 또한 30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에 선출돼 당시 불교계를 이끌었다.자장동천, 바위 위 다람쥐 자장동천의 바위에 새겨진 세이석(洗耳淅)이라는 글자는 자장율사의 친필로 전해 온다. 당시 정계는 진골 출신의 외아들이며 지혜를 겸비한 그를 산속에 가만 놔두지 않았다.선덕여왕이 그를 재상에 앉히려고 누차 불렀으나 응하지 않자 칙령을 내려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 하였지만 자장은 “하루를 살다 죽을지언정, 파계를 하여 백년을 살지 않겠다."고 답하였다. 일언지하에 거절한 후 자장동천에 흐르는 물로 귀를 깨끗이 씻고 세이석이라 각서하였다 한다. 일제강점기시대 한국불교를 대표했기에 표면적으로 친일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을 칭송하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1920년대 중후반 「조선불교총보」등에 친일 성향의 글을 발표해 불자들의 친일에 앞장서기도 했다.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파 명단에 올렸다. 구하 스님이 겉으로는 친일을 가장하여 일본 경찰의 감시망에서 일단 벗어났다. 그러나 은밀하게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자금을 제공하고 지원을 했다. 현문 스님이 그 증거를 공개하여 은사를 친일파 명단에서 당당하게 뺄 수 있었다.구하스님의 독립자금 지원 영수증 공개한 현문 스님2005년 현문스님은 일제시대 당시 통도사 주지를 지냈던 김구하 스님이 비밀리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음을 증명하는 자료를 발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공개한 자료들은 독립자금 관련 영 수증 5장, 안창호 선생 등 10명에게 자금을 지원했음을 나타내는 ‘사변시(3·1운동을 지칭) 출금증’ 등으로 구성돼 있다.독립자금 서류 독립자금 제공 영수증 구하 스님은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상해임시정부에 5천 환을 보내고 여기저기 모두 1만 3천 환의 군자금도 비밀리에 대주었다. 안창호라는 이름이 쓰인 자금 내역은 현문스님이 주지로 재직했던 2005년 세상에 공개됐다.5천 원 안창호 상해임정 국무총리할 때2천 원 백최승(초월) 경성서 혁신공보사장 할 때3천 원 이종욱 군자금 수집1천 원 정인섭 독립운동 직접 계산 온천5백 원 오이산 스님 상해 있을 때 범어사와 공동보조5백 원 장재륜 독립운동 직접 전달 동래5백 원 신정흔 독립운동 직접 전달 통도3백 원 김포광 상해있을 때 노비로 급하게 경성1백 원 정탁 독립운동 참여시 계산 통도1백 원 양만우 동시 관광 계산'구하 스님 독립운동 지원’ 영수증 자료였다.상해임정 요인 이규홍 선생 독립유공자 서훈상해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 외무총장,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국무원, 의정원 경상도 의원, 청년단 출펀부장 등 요직을 역임한 이규홍 독립투사가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현문 스님은 이규홍 선생의 손자인 이경우 씨를 위해 증언서를 두 차례에 걸쳐 써주었다. 현문 스님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양산시립박물관 특별기획전 "1919 양산으로부터의 울림" 전시회 이규홍 독립투사 코너 상해 임시정부 거물 백농 이규홍 선생 이규홍 선생 관련 일제강점기 신문 기사 현문 스님이 쓴 이규홍 선생을 위한 증언서, 현문 스님이 이번에 두 번째로 쓴 증언서가 마력을 발휘하여 이규홍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으면 좋겠다. 보훈처의 무성의한 의례적인 답변서 필자인 심상도는 이경우 씨를 위해 증언서를 써드렸다. 연구를 하고,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여 A4용지 11페이지에 걸친 상세한 자료의 증언서를 작성하였다. 이경우 씨는 할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매년 보훈처에 자료를 제출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였다. 그 이유는 사업을 했다는 것이 친일활동이라는 단순 논리다. 이규홍 선생의 친일 활동 흔적은 알본 기록애도 한국기록에도 없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명단에도 오르지 않았다.필자는 이경우 씨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도와드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경우 씨 사례를 통해 보면 독립운동을 하면 집안 3대가 망한다는 전형적인 케이스다.이경우 씨 형님은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애쓰다가 이미 고인이 되었다. 이경우 씨는 월남전 참전용사로 역시 애국자다. 고엽제 후유증으로 요즘 고생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해 평생을 어렵게 살아왔다. 양산시민들이 적극 나서서 도와야 한다.양산시립박물관 전시장 ● 월하 스님 시봉현문 스님이 시봉한 또 한 분은 월하 큰스님이다. 거동할 수 있는 순간까지 손수 빨래를 하셨던 월하 스님은 구하 스님의 상좌답게 검소함 그 자체였다고 한다. 월하 스님의 열반송은 “가고 머뭄을 논하지 마라. 곳곳이 나의 집이니라.” 월하 스님의 다비식 때 불을 놓기 전 “불 들어갑니다” 소리친 것은 현문스님이었다. ● 현문 스님의 법문2005년 현문 스님이 통도사에서 ‘진정한 열반의 의미’를 주제로 법문한 내용을 소개한다.이번 달은 부처님의 출가일(음력 2월 8일)과 열반일(음력 2월 15일)이 함께 들어 있는 달인만큼, 부처님 열반일을 맞이하여 ‘진정한 열반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부처님이 지향한 마지막 경지는 해탈하여 열반(니르바나)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열반은 대체 어떤 경지일까? 그 모습을 말로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선은 ‘평온한 경지’라고 정의를 해 봅시다. 우리들의 생활은 평온과는 정반대 되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운 요즈음 생활고는 물론이요, 우리 인간은 ‘사고팔고(四苦八苦)’라는 생로병사의 근본 괴로움을 짊어진 존재입니다. 이런 고달픔에서 벗어나는 것, 해방되는 것이 바로 해탈이며, 열반인 것입니다."이 세상에서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식별하여 마음에 드는 사물에 대한 욕망이나 탐욕을 제거하는 것이 불멸의 열반의 경지이다.”● (재)영축문화재단2011.11.28 재단법인 "영축문화재단" 설립허가(경상남도 NO 제 2011-24호초대 임원 구성이사장(성파스님)이사(현문스님, 산옹스님, 상우스님, 법진스님, 오심스님)감사(병천스님, 도광록 회계사)사무국장(홍성표-울산시립노인요양원장)2012.11.27제2대 이사장 현문스님 취임2012.12.23신규이사 취임(정우스님, 혜남스님)2015.1.28신규이사 취임(동주스님)2015.2.25정관상 법인 명칭 변경 "대한불교조계종 재단법인 영축문화재단"2016.5.15신규이사 취임(최순자)2017.12.28신규이사 취임(동진스님)재단법인 영축문화재단(이사장 현문스님)이 제7회 영축문화대상 수상 후보자를 모집한다.자장전 자장율사 영정 시상 부문은 부처님 자비사상과 불살생 정신으로 화합과 상생의 사회를 만드는데 실천하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봉사 실천상, 전통문화 계승발굴로 정신문화 복원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학술문화상, 돈독한 신심으로 수행정진과 홍포에 매진함으로서 정법수호와 불교인재 양성, 가람수호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포교원력상 등 3분야다.자장암 낙락장송, 금강송은 자장암의 명품 중의 하나이다. 각 시상 후보 기준은 해당분야 수공 기간이 10년 이상이며 동종의 공적으로 정부 관련 포상을 받은 경우는 5년 이상 경과되어야 신청가능하다. 국적, 연령, 성별, 직업, 학력, 종교에 구분이 없으며, 스님일 경우 조계종 소속이어야 한다. 소속기관 대표자나 조계종 재적사찰 주지 혹은 기관장이 추천할 수 있다. 초파일 불자들에게 연꽃차 대접 모집기간은 오는 10월 31일까지며 11월 중 서류심사를 거쳐 .12월 1일 재단 및 불교신문 등에 발표한다. 시상은 월하대종사 추모다례재가 열리는 12월7일 거행한다.2018년 3월 6일 영축문화재단(이사장 현문스님)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자비나눔 기금으로 2천만 원을 쾌척했다. 조계종단에서 모금운동 열기가 뜨거운 ‘푸에르토리코 허리케인 피해 성금’으로도 1천만 원을 후원했다.영축문화재단 이사장 현문스님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4층 접견실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설정스님을 예방하고 재단법인 아름다운동행에 각각 기금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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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문화박사의 양산숲길보전회 "구불사" Storytelling /김일권 양산시장 회원 격려5월 26일 양산숲길보전회 정기답사는 상북면 내석마을에서 더 들어간 곳에 있는 구불사와 장터길을 답사하였다. 아침 8시 반에 양산종합운동장에 집결하는데, 놀랍게도 김일권 양산시장께서 운동장으로 나오셔서 회원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시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시장님 비서가 김희숙 사무국장에게 미리 귀띔을 해주었다. 김희숙 사무국장은 시장께서 미리 오실지도 모른다고 대비하기 위해 8시에 일찍 나갔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시장님이 8시 5분쯤에 미리 나오셨다고 한다.회장은 아침부터 회원을 차에 픽업하고, 연구소 냉장고에 보관해둔 막걸리, 울금두부를 차에 옮겨싣고, 부킹노래방 이순옥 대표가 협찬한 계란을 가져오느라 8시 25분경 운동장에 도착하여 시장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시장님께 인사말씀을 부탁드렸으나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김일권 시장은 형식적인 의식을 지양하고, 실질적으로 편하게 시민들을 격의없이 대하는 스타일로 시민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양산숲길보전회 회원들은 예상치 못한 김일권 시장의 등장에 한편으로 놀라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시장님 덕분에 기분좋은 출발을 하게 되었다. 회장도 합류하여 김일권 시장님과 함께 양산경찰서 이정동 서장님도 북한이탈주민 자녀 장학금을 전달하기 위해 방문하여 처음 대면했는데, 상당히 소탈하시고 방문자들을 편하게 대해주셔서 좋은 첫인상을 받았다. 장학금을 전달하고 행사를 끝낸 후 작별인사를 했는데 청사 1층까지 내려와 배웅을 해주셨다. 다른 방문객 행사도 똑같이 한다는 말씀을 듣고 놀랐다.구불사까지는 예정 도착 시각이 9시 10분이었으나 조금 빨리 도착하였다. 지난 금요일에 구불사 주지스님께 찾아가 주차장 사용을 미리 승락받았다. 주지스님깨서는 주말에 사찰에서 큰 행사가 없기에 사용해도 좋다고 흔쾌히 허락을 해주셨다.울금노랑막걸리, 울금두부, 울금국시는 특허를 낸 모세스 이대섭 대표가 꾸준히 협찬을 하고 있어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단순한 광고효과를 보기위해 협찬하는 것은 절대 아니고, 양산숲길보전회의 발전을 순수하게 기원하기 때문이다. 부킹노래방의 이순옥 회원이 다른 일이 있어 답사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구운 계란을 협찬했다. 이와같은 회원들의 정성에 힘입어 양산숲길보전회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참여와 정성, 그리고 후원은 회원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드는 마력을 발휘한다. 우리 회원들은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협찬에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하며, 인원이 많이 모이는 대형 행사 때 울금노랑막걸리를 추천, 애용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북부시장에 울금노랑막걸리 총판이 있어 이대섭 대표(010-2436-9895)에게 주문하면 배달해준다. 최복연 회원이 아이스박스에 담아온 시원한 생수를 협찬해 무더운 날씨에 시원하게 마실 수 있어 좋았다. 이기천 회원의 한결같은 과자 협찬도 우리들에게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이번 답사에 어린아이 두 명이 따라와 과자는 멋진 선물이 되었다. 울금노랑막걸리 특허를 낸 이대섭 대표의 품질우선주의 덕분에 양산시농수산물종합유통센터, 탑마트, 농협의 하나로마트 등 대형 유통업체 입점에 성공했다. 부산, 울산 등 타지역에도 진출하고 있다.울금노랑막걸리를 마시면 숙취같은 후유증이 없으며, 울금은 항암, 항균작용이 있어 건강에 이롭다. 인도인들이 즐겨먹는 카레에 들어가는 강황은 울금의 성분과 유사하다. 인도인들이 강황을 많이 섭취하기 때문에 치매 발병률이 현저히 낮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대섭 대표가 특허를 낸 울금두부는 양산시농수산물종합유통센터에서 2회에 걸친 판촉행사를 통해 양산시민들에게 인지도를 크게 높였다. 울금막걸리에 울금두부의 음식궁합은 잘 맞는데, 여기에 울금김치를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조정남 정관장홍삼(중부점, 양산시외버스터미널 내) 대표께서 홍삼수 음료를 협찬하였다. 감사드리는 바이다. 협찬한 먹거리를 나눠주며 참가회비 인식비 1만 원을 걷고 있다. 한옥문 도의원이 구불사에 와 회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한옥문 도의원에게 양산 발전을 위한 좋은 정책 건의를 하였다. 경남도의회에서 양산 발전에 긴요한 예산을 많이 유치하길 당부드렸다. 요즘 핫한 양산스마트뉴스양산숲길보전회 답사는 심상도 회장의 양산의 역사, 문화, 관광에 대한 해설이 곁들여진다. 방문지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있는 유익하고 기억에 남는 답사다. 심회장은 "양산의 문화관광" 이라는 책을 자비 출판하여 시민들에게 무료 배부한 바 있다.또한 양산신문에 10년넘게 매주마다 칼럼을 집필해온 끈기와 집념의 칼럼리스트다. 양산신문이 일간지로 전환한 요즘은 윤규현 대표의 요청으로 주3회 칼럼을 집필하고 있다. 칼럼의 주제는 항상 양산과 관련된 것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일반적인 수필식의 칼럼은 아니고, 양산시민으로서 살아가며 느끼는 점, 관광, 문화, 지역개발, 농촌개발 전문가로서 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고 있다.양산스마트뉴스가 양산의 새로운 핫 뉴스로 등장하여 각광을 받고 있다. 김일권 양산시장의 동정이나 활동, 양산시의회 의원, 경남도 의원의 활약상, 양산시청, 각 기관 뉴스도 폭넓게 보도되고 있어 홈페이지 접속자는 하루에 2만 명이 넘는 대박을 터뜨렸다.심상도 회장은 양산스마트뉴스에 다양한 컨텐츠를 제공하며 스토리텔러로 활동하고 있다. 양산의 축제, 행사, 양산숲길보전회 답사, 상해임시정부의 요인이었던 이규홍 독립투사 등의 다양한 주제로 멋진 사진과 긴 글을 써서 올리고 있다.양산스마트뉴스의 김영식 대표는 심상도 회장의 많은 사진, 동영상, 긴 글을 100% 수용해주고 있다. 양산에 새로운 유형의 인터넷신문이 탄생한 것이다. 양산숲길보전회의 북한이탈주민 자녀 장학금 지급 뉴스는 저녁에 올리지마자 1만 명이 조회를 하였다. 현재 29,225명이 읽었는데, 조회수는 대략 양산시민 10%가 본 셈이다. 그러나 양산시민만이 보는 것이 아니고, 전국에서 보는 독자도 물론 포함된 것이다. 광고주들은 이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양산스마트뉴스에 배너 광고를 올리면 광고효과가 매우 크다.심상도 회장이 올린 글이 양산스마트뉴스의 가장 많이 본 뉴스 10개 중 4,5개를 차지하고 있다. 조회수 순서로도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보통 3만 회를 넘고 있다. 심상도의 글을 클릭한 독자들은 다양한 멋진 사진과 긴 글을 접할 수 있다. 양산의 역사, 문화를 알고 배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장터길 우리가 답사하는 장터길은 원동면 배내골 주민들, 상북면 내석마을 주민들의 애환이 서린 길이다. 장터길은 양산시 산림과 김종열 과장이 재임시 만든 길이다. 현재는 공원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아주 친절하고, 유능한 공무원으로 필자는 존경하고 있다.장터길은 교통이 불편했던 배내골 주민들이 넘나들며 농사지은 특산품을 석계시장에 내다팔고 필요한 생필품을 사서 이고지고 넘던 눈물과 고통의 길이었다. 때로는 전재산이나 마찬가지인 소를 몰고 산을 넘어 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하도 거리가 멀다보니 배내골 주민들과 내석마을 주민들은 중간지점인 산 능선에서 만나 물물교환으로 물품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이런 역사의 현장이 교통의 발달로 더 이상의 장터길은 없고 이제는 등산객들이 이용하는 등산로, 트레일이 되고 말았다.이제 내년말 울산 함양간 고속도로의 배내골 인터체인지가 개설되면 옛날 4~5시간 걸어서 넘었던 눈물과 한숨의 고개길이었던 석계장터는 20~30분 거리로 단축되는 천지개벽의 기적이 일어난다. 축지법이 따로 없다.장터길은 크게 두 개로 하나는 배내골 풍호마을, 고점마을에서 염수봉 근처 경유, 내석마을을 거쳐 석계장터로 오는길, 또 하나는 장선리 우짤낀데 펜션에서 영축산을 넘어 자장암, 금수암을 거쳐서 통도사를 지나 하북면 신평장터로 오고가는 길이 있었다.장선리 주민들이 겨울에 장보기 위해 험준한 영축산을 넘다가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 때문에 꼼짝 못하다가 얼어죽은 슬픈 사연도 있었다. 배내골 주민들은 비극적인 사건에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농사짓고, 자녀를 교육시켜 이제는 부촌으로 탈바꿈하고 관광명소가 되었다. 사과, 새송이버섯, 고로쇠 수액, 사과, 매실 등 농특산품 판매, 펜션과 민박 운영으로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요즘 나라 경제가 불황으로 펜션 고객이 감소하여 배내골 주민들의 걱정거리가 늘어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린다.두 코스의 장터길을 답사해본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남녀노소가 모인 양산숲길보전회와 같은 답사모임에서 완주는 힘들다고 판단된다. 두 번에 걸쳐 나누어 답사하면 무난하다. 2018년 9월 30일 양산숲길보전회에서 배내골 우짤낀데 민박에서 출발하여 곶감바위, 찰물샘까지 다녀온 바 있다.구불사에서 시작하여 배내골 풍호마을로 넘어가는 장터길은 오르막이 심한 편이라 이번 답사코스에서 배재하였다. 그대신 왼쪽에 있는 염수봉으로 가는 코스를 선택했다. 이 코스 역시 장터길이다. 오르막이 심한 편이라 옆으로 편안하게 가는 둘레길을 걸었다. 이 코스는 임도가 어지러이 여러 갈래로 나 있어서 의문점이 들었는데, 이시일 시인이 산판길이러고 알려주었다. 산판은 산의 나무를 벌목하여 목재로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풍호마을에서 염수봉으로 오르는 장터길도 혼자 답사한 적이 있는데, 무려 천개가 넘는 계단이 있어 힘들었다. 그대신 밀양댐, 배내골을 내려다 보는 조망은 일품이었다.염수봉에 소금 염(鹽)자가 들어가는 유래는 산불이 자주 발생하기에 산불방지를 위해 소금을 넣은 항아리를 염수봉에 묻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옛날에 천지개벽을 할 때 바닷물이 여기까지 올라와 이름 지어졌다는 전설도 있다. 인터넷에 염수봉 높이가 다르게 나오고 있는데 직접 답사해보니 해발 816m였다. 구불사 소개구불사는 조계종 통도사 말사다. 양산시 생활체육회 종합무술연합회 간판이 붙어 있어 주지스님이 회장인 것으로 보인다. 공양주 보살께 물어보니 주지스님이 무술을 한다고 하였다. 구불사는 황계포란형의 명당이라고 한다. 황금색의 누런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명당이라고 한다. 상북면 내석마을 회관을 지나 구불사로 가는 막바지 길은 구불구불하다. 전봇대에 붙은 구불사 안내 표지판은 "구불구불 구불사" 로 적혀있어 웃음이 나온다 . 구불사는 조계종 사찰이다. 공(空)은 텅빈 것이 아니고 생명으로 꽉차 있으니 마음과 허공은 둘이 아닌 하나이다. 공문(公門)에 들어가니 모든 업이 스스로 융해되어 악도의 괴로움과 고통의 원결에서 벗어나니 궁극의 열반해탈로 들어가느니라월불교의 상징이 공(空)이다. 1916년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이 창시한 한국의 신 불교로 일원상의 진리와 함께 불교의 생활화, 대중화, 시대화를 추구한다. 우주의 근본원리인 일원상(一圓相, 즉 O의 모양)의 진리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는 종교로, 진리적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통하여 낙원세계를 실현시키려는 이상을 내세우고 있다. 구불사 입구에 우리절 구불사라는 친근한 구절이 들어 있다. 대중 불자들애게 한 발 더 다가서려는 주지스님의 노력과 정성이 돋보인다. 구불사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고 한다. 한옥문 도의원에게 1022번 지방도 관련 노선 개량 건의를 하고 있다. 바로 머리 위 나무에는 매실이 달려 있다. 김희숙 사무국장 박태규 회원 김상근 부회장 구현진 보안계장, 한옥문 도의원, 심상도 회장 이기천 회원 이순연 회원, 한옥문 도의원, 김희숙 사무국장, 이현아 재무 북을 조용히 세 번 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구불사 낮달맞이꽃 구불사의 예불시각을 알리는 종 구현진 보안계장, 한옥문 도의원 대웅전에 참배하는 양산숲길보전회 회원들 구불사 장터길 답사는 북한이탈주민 12명이 참가하여 뜻깊은 행사가 되었다. 이분들에게 답사 후 점심식사를 대접해드리고 주방용품 냄비를 선물로 드렸다. 양산경찰서 구현진 보안계장께서 북한이탈주민 초청, 인솔, 차량 제공하느라 수고를 하였다. 자신이 맡은 업무에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경찰관으로 매우 친절하였다. 감사드린다.구현진 계장은 양산의 역사,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각 지역으로 전근을 갈 때마다 그 지방의 문화, 역사를 배우고 답사도 한다고 하였다. 필자가 스토리탤링한 임경대도 동료 경찰관들과 함께 최근 둘러보았다고 얘기했다. 숲길을 걷고 있는데 뱀이 보여 여성회원이 소리를 질렀다. 귀여운 딸을 목말 태워가는 아버지 등산로에 있는 쓰레기를 모두 수거하였다. 산짐승들이 물 마시는 웅덩이에 올챙이가 있었다. 숱한 멧돼지 발자국과 진흙 목욕탕 멧돼지 발자국 이시일 시인의 열정은 놀라운데, 땅바닥에 한지를 펼쳐놓고 팬 사비스 중 시를 쓰는 한지, 먹물 구입비용도 만만찮울텐데 독실한 불자답게 시 선물을 계속하며 보시를 하고 있다. 현금 5만 원을 양산숲길보전회에 협찬해주시고, 회고록도 참가자들에게 나눠주셨다. 갚은 감사를 드린다. 김희숙 사무국장은 울금두부, 김치, 떡을 협찬하였다. 감사드린다. 답사 때마다 참석자들이 준비해온 간식을 나눠먹는 즐거운 시간이다. 얼씨구 공경숙 조직위원장이 만들어온 부침개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의 시를 서로 받겠다고 난리가 났다. 마침 붓글씨 쓰기좋은 돌 책상 발견 작품 완성 후 내려다 보는 이시일 시인 구현진 보안계장 부부가 시를 받고 인증샷 김희숙 사무국장, 김미향 회원 송재선 회원 박태규 회원 다정한 부부 김미향 정진헌 부부 등산로 쓰레기도 많이 수거하였다. 답사를 끝내고 11시 40분경 석계 한성아파트 앞에 있는 식당 임진강에 도착했다. 임진강은 유명한 맛집으로 주소는 상북면 삼계2길 51, 전화번호 055-374-8389 한옥으로 멋있게 새로 지어 식당 분위기가 우아하고 깔끔하다. 메뉴는 민물매운탕 중심으로 다양하다. 양산숲길보전회애서 선택한 메뉴는 매기매운탕 4만 원, 공기밥 1천 원이었다. 답사에 참가한 북한이탈주민 12명에게 3만 원 상당의 냄비를 선물하였다. 구현진 보안계장 인사말씀 북한이탈주민 자녀 장학금은 구현진 보안계장을 통해 해당 학부형에게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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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문화박사의 맛집탐방/제6대 시의원 김정희씨의 민초식당 멍게 해초비빔밥동원과기대 직원인 허수 과장, 최기수 과장과 함께 모처럼 점심식사를 위해 민초(대표 : 김정희, 주소 : 상북면 소석리 551, 전화 055-374-1400)를 방문하였다. 해초에서는 여름을 맞이하여 특별식으로 멍게 해초 비빔밥을 선보였다. 멍게 해초 비빔밥-날이 차츰 더워지는 요즘 시원한 방갈로에 앉아서 고추장을 넣어서 비벼먹으니 맛이 아주 좋았다. 멍게 해초비빔밥, 전복 해초비빔밥은 각 1만 원이었으며, 해초 비빔밥은 7천 원, 코다리 갈비찜을 추가하였는데 가격은 대(大)가 4만 원이었다. 농촌다운 분위기가 풍기는 해초 식당의 쾌적한 공기와 신선한 바람은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단체 손님에게는 차량을 직접 운행하여 모셔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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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연화라이온스클럽(회장 김희숙)에서는 지난 20일, 양산시 종합사회복지관에서 배식 봉사활동 펼쳐연화라이온스클럽 회원들은어르신들 에게 배식을 전달 하면서 맛있게 드시고 건강하세요! 를 꼭 말씀해 드린다. 급식 봉사는 오전 11시30분 ~오후 13시까지 이루어 진다. 양산 연화라이온스 클럽 회원들이 배식준비를 하고 있다. 봉사팀은 주방팀과 홀서빙팀 두팀으로 나누어 봉사활동을 한다. 오늘 하루도 양산시 종합사회복지관 에서 약200명 정도의 어르신들이 오셔서 점심 식사를 하고 가셨다. 급식을 마치고 양산시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연화라이온스클럽 김희숙 회장 외 11명 회원들은 250,000원의 후원금을 양산시 종합사회복지관(관장 성지혜)에 전달 했다. 한편, 양산 연화라이온스클럽은 초대, 2대 (회장 최순희), 2대( 회장 주경숙), 현 3대( 회장 김희숙)에 이어 양산시종합복지관에서 4년째 매월 세째주 월요일 급식봉사활동 하고1년에 한번씩 김장나눔행사도 한다. 뿐만 아니라. 양산연화라이온스클럽은 바자회를 열어 발달장애인 아동과 신년 떡국판매사업 및 독거노인 전기장판 전달사업봉사, 장애인 파크 골프대회 도우미, 삽량문화축전 무료차 전달, 환경정화활동봉사 등 지역사회를 위해 무수히 많은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외에도 클럽은 매월1회 원정노인전문요양원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재능기부도 하고 있다. 김희숙 회장은 삼성동 방범대원으로도 활동을 하고 있다. 범죄 없는 마을만들기. 삼성동 방범대원들과 같이 월 1회 행사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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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의 "양산 젊음의 거리-제2회 버스킹 대회" 현장 storytelling 2019.05.185월 18일 오후 4시부터 양산 신도시 이마트, 중부119 안전센터 사이에 있는 양산 젊음의 거리 상권 활성화를 위해 샵(#)광장에서 젊음의 거리 버스킹 경연대회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비가 예보되어 행사를 위해 미리 천막을 설치하였다. 양산 젊음의 거리 운영위원회 김승권 위원장, 김일권 양산시장, 서진부 양산시의회의장, 표병호 도의원, 김태우 시의원, 박미혜 시의원, 정석자 시의원 등이 내빈으로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이 행사 주관은 젊음의 거리 운영위원회, 주최는 양산시 문화관광과, 후원은 양산시, 양산시의회에서 하였다. 심사위원은 김승권 위원장, 정석자 양산시의회 기획행정위원장, 가수 진달래, 황수현 대한가수협회 양산지회장, 이윤지 운영위윈회 재무 등이 맡았으며, 심사위원장은 황수현 지회장이 수고를 하였다. 현장 실시간 투표도 하여 합산하였다.비가 약간 내렸지만 김승권 위원장이 참석한 내빈을 소개하고 인사말을 하였다. 그리고 경연대회 개막을 선언하면서 경연대회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초청가수 진달래 씨가 나와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띄웠다. 천막이 설치된 무대에서 걸어나와 비룰 맞으며 열창하는 진달래 가수에게 청중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예선을 거쳐 13개 팀이 출전하여 열띤 경연을 펼쳤다. 1번 출연자 민경희, 류원우(17세) 보컬, 기타 2번 출연자 박준승(18세) 발라드 3번 출연자 김한별(26세), 김진환(19세) 랩, 문제아 +눈 우진기획의 전우진 단장이 음향을 담당하여 수고를 하였다. 전우진 단장은 (사)한국전통가요진흥협회 양산지부장을 맡고 있다. 4번 출연팀 기권, 5번 출연자 남보령(19세), 벚꽃이 지면 특별 초청가수로 필리핀 출신 가수 데니스가 출연하면서 청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로 열띤 공연을 펼쳤다. 청중들도 같이 호응하며 무대에 나와 함께 춤을 추며 어울렸다. 청중들의 성원에 힘입어 앵콜송도 불렀다. 7번 출연자 장병철,제정희(50대)발라드,양산나무소리 통기타 김건훈(19세) 랲 9번 출연자 손채희, 이인아, 노가연(16세), 힙합 10번 출연자 김상표, 이교옥(50대), 양상 통사랑 통기타 11번 출연자 최혜원, 송연경(16세), Rolling in the deep 12번 출연자 이하나, 전선정(26세) 13번 출연자 최문규(25세) 특별 공연 SMJ 시상식 인기상 최문규 상금 10만 원 우수상 9번 손채희, 이인아, 노가연 상금 20만 원, 표병호 도의원 시상 최우수상 시상 김승권 위원장/최우수상 김한별, 김진환, 상금 30만 원 대상 시상 김일권 양산시장 대상 11번 최혜원, 송연경, 상금 40만 원 수상자 기념촬영 젊음의 거리 주변 상가에서 행사에 협찬을 많이 하여 관람객들에게 경품을 재공하였다. 행사에 끝까지 남아서 성원을 보내준 표병호 도의원께 감사드리는 바이다. 행사에 열렬히 박수를 보내고 응원해준 뿌리회 회원들, 그리고 나창식 사무국장에게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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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문화박사의 세계문화 유산인 통도사 부처님 오신 날! / 그 어느것과 비교 할 수 없는 생생한 2019 봉축행사 현장 스토리텔링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처음 양산에 와서 거주하며 기도하던 곳은 자장암이었다. 통도사 터는 큰 저수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 저수지를 메우고 사찰을 건립하였다. 통도사 불연, 부처님을 모시는 가마 646년 자장율사가 당(唐)에서 신라에 돌아와 문수보살에게 사리를 모실 절을 세우기에 적당한 곳을 묻자, 꿈에 동자(童子)가 나타나 동국(東國)에 부처님으로 모시라고 일러주었다. 자장은 동국이 신라를 가리키는 것은 알았지만 신라의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어서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동쪽으로 날려 보냈다.얼마 후 오리는 한 송이 칡꽃을 물고 돌아왔다. 자장은 칡꽃이 피어 있는 곳에 절을 세우라는 뜻임을 알고 한겨울에 칡꽃을 며칠 동안 찾아 나서던 중 양산에서 좀 떨어진 영축산에 이르러 칡꽃이 피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곳에 절을 세운 것이 통도사였다.통도사 창건 설화나 전설은 지어낸 이야기나 황당무계한 스토리로 평가절하 하면 안 된다.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 역사의 숨은 그림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분석하고 규명하는 것은 학자의 몫이다.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한겨울에 칡꽃이 핀 곳이 양산의 영축산 자락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보자. 양산은 따뜻한 남쪽나라에 있어 겨울에도 눈이 거의 오지 않고 기온도 온화하여 사람살기 좋은 고장이다.통도사의 350년 넘은 자장매는 한겨울에 꽃망울을 일찍 터뜨린다. 거의 1월초부터 한 두 송이 꽃이 피기 시작하여 2월말 3월 초순에 만개하며, 중순까지 꽃을 볼 수 있다. 영각 앞의 자장매 외에도 극락보전 옆의 진분홍, 연분홍 홍매화 두 그루가 연이어 꽃을 피운다.우리가 생각하는 한겨울은 1,2월이다. 통도사의 자장매와 홍매화는 추위가 심한 한겨울에 꽃을 피운다. 통도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한겨울에 핀 칡꽃'은 이제 이해가 될 것이다. 창건설화는 이와같이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니라 과학적인 사실과 연결된다. 필자는 양산에 온지 27년째 되었는데, 통도사와 부속암자의 매력에 푹 빠져 한창 때는 사나흘에 한번쯤은 통도사를 방문하여 사진을 찍곤 하였다. 통도사나 양산의 명소를 사진찍어 페이스북에 올려 전세계에 홍보를 하였다. 필자의 글과 사진을 보고 양산을 방문한 외지인들이 많다. 사전에 약속을 하고 방문하면 안내도 하고 점심을 사준 경우도 많다. 양산을 방문한 관광객들에게 통도사와 부속암자를 안내하고 해설해주면 감탄사를 연발한다.● 구룡의 전설대웅전 옆의 연못은 구룡지(九龍池)로 불리며, 통도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가 서려 있다. 자장이 당나라에서 수행할 때 문수보살이 진신사리와 가사를 주면서 신라 영축산의 독룡 아홉 마리가 살고 있는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세우고 봉안하라고 알려주었다. 구룡지에 살고 있는 금붕어 자장율사가 여덟 마리의 용은 쫓아 보냈으나 마지막 남은 용은 연못에 남아 터를 지키고 싶어하여 연못 일부를 메우지 않고 남겨둔 것이 지금의 구룡지라는 전설이다.용과 관련된 전설을 해부해보면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원래 저수지였던 통도사 터를 어느 날 자장율사가 나타나 선덕여왕의 명령이라며 절을 세우겠다고 하니 기존에 여기에 살던 양산의 토착민들은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현재 통도사에는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경내에 한들못이 있다. 통도사 인접한 곳에 갈밭들못도 있다. 통도사 대웅전 있는 곳이 옛날에 저수지였다는 전설은 합리적이다. 통도사 앞은 양산천 상류의 하천이 흐르고 있다. 저수지가 있었으면 물대기 좋은 위치다.또한 통도사 앞을 가로자르는 양산천 상류 계곡은 영축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린다. 계곡 때문에 통도사는 하천과 나란히 전각을 지어서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으로 구분한다. 구룡지 수호신인 용 저수지로부터 물을 공급받아 편안하게 농사를 짓고 있는 농민들 입장에서는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청천벽력의 뉴스였을 것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땅을 차지하기 위한 자장율사와 9마리 독룡의 싸움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토착민이 소유한 저수지와 통도사 터를 놓고 여왕의 명령이니 내놓으라는 자장율사의 요청에 농민들은 거부감을 갖고 생존을 위한 투쟁에 나섰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봉축 법요식 요즘도 국책사업으로 신도시, 공단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농민이나 토지 소유주들은 법에 따른 강제수용과 낮은 보상가에 불만을 품고 극렬하게 저항하거나 분신자살하는 경우도 있다.용산재개발 참사는 지난 2009년 1월 20일 새벽에 발생하였다. 재개발 보상 대책에 반발하며 농성을 벌인 철거민 5명과 이를 진압하던 경찰 특공대원 1명이 목숨을 잃은 용산 참사는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불교라는 생소한 외래종교가 처음으로 양산에 들어와 토착종교를 무시하니 극렬한 반발이 생긴 것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통도사를 짓기 위해 선덕여왕의 왕명을 받든 자장율사와 이에 반대하는 양산 백성들의 반발은 아마 그 당시 신라 뉴스 톱 10 중에서 1위를 차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은 매우 비극적이다. 남종삼과 홍봉주가 모반부도죄로 서소문 밖에서 처형됐고, 베르뇌를 비롯한 프랑스 신부 4명은 불법 입국, 전도죄로 노량 백사장에서 처형되어 효수됐다. 푸르티에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노량 백사장에서 처형됐고, 다블뤼 주교, 신부 오매트르와 위앵이 처형됐다. 1866년에 대략 8천 명이 처형되었다. 유교와 천주교의 충돌로 죄없는 백성들이 순교하였다. 요즘도 이슬람교, 기독교, 불교, 유대교 사이의 분쟁과 충돌이 발생하여 안타깝다. 통도사 창건 당시 양산 백성들이 믿었던 신앙은 자연신, 칠성신, 용신, 선교(仙敎) 등 다양하였을 것이다. 선교(仙敎)는 환인을 신으로 모신 것에서 시작되어, 환웅(桓雄)의 신시배달국의 제천(祭天), 단군조선(檀君朝鮮)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계승되었다.자장율사는 용에게 '절을 지을려고 하니 떠나달라'고 요청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장율사가 종이에 글을 써서 연못에 던지니 물이 펄펄 끓어서 용들이 달아났다. 아홉 마리의 용 중 다섯 마리는 오룡산으로 도망을 갔고, 세 마리는 동쪽으로 달아나다 한 마리가 무풍한송로 근처 용피바위라는 바위에 떨어져 죽었다. 현재도 하얀 바텅의 바위가 마치 용의 피로 물든 것처럼 얼룩져 있다.자장율사는 도술대결에서 이긴 후 눈 먼 용 한마리만 구룡지에 남아서 불법을 수호하라고 하였다. 통도사 입구 땅바우공원은 바위가 많은데, 구전에 의하면 용과 자장율사가 협상을 한 곳이라 전해진다. 통도사에서도 구룡지 전설을 스토리텔링하여 성보박물관 앞 하천에 8마리, 구룡지에 한 마리를 용등을 배치하여 인기를 끌었다. ● 통도사 창건과 민속 신앙의 타협불교가 수용한 민간신앙의 유형은 산신신앙, 칠성신앙, 용왕신앙, 조왕신앙, 장승신앙 등이 있다. 불교가 포용한 민간신앙의 대표적인 경우는 산신신앙이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7할이 산악이므로 산간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상고시대부터 산을 중심으로 수렵채취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 단군신화를 비롯한 신라의 6촌장과 김수로왕 등 거의 모든 신들은 산을 통해서 하강한다.불자들이 연등을 달고 있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태백산(묘향산, 구월산)에 하강하여 신단수를 중심으로 신시(神市)를 베풀었다고 했는데 이때 산은 우주의 중심이고 신단수는 우주목이 된다. 그리고 단군은 아사달 산에 들어가 산신이 됨으로써 후손을 보살피는 신격을 획득한다.씨족이 분화하면서 산신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좌정하게 되는데 비록 산간을 떠나 평야지방에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모시는 신은 산신이며 산신제를 지낸다. 산신은 조상신의 성격과 수호신의 성격을 가진다. 마을마다 있는 서낭신도 수호신으로서 근본은 산신에서 유래하였다.산신은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나 호랑이로 표상화된다. 우리나라 산신의 성별은 남성 신이 많으며 여성 신인 경우도 있다. 남성 산신은 천신의 성격이 있고 여성 산신은 지모신의 성격이 있다. 통도사에는 산령각이 있다.산신각과 함께 사찰 경내에 있는 칠성각이 있다. 칠성신앙은 본래 중국 도교의 성숙숭배(星宿崇拜) 신앙이 민간신앙으로 정착하였던 것인데 다시 불교에 수용된 경우다. 칠성은 남두칠성과 북두칠성이 있으며 우리나라는 북두칠성 신앙이 강하다. 칠성신은 인간의 수명과 복록을 관장한다고 믿는다. 가람각은 통도사를 수호하는 가람신을 모신 전각으로 가람신은 사찰의 토지를 관장하는 신이라 할 수 있다. 가람각은 사찰의 토지를 관장하는 토지대신을 모신 곳으로사찰의 주인은 부처님이지만 부처님이 계신 사찰의 본래 주인은 땅을 관장하는 신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불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타협의 결과로 토착화한 것으로 추정된다.용왕과 조왕단도 불교에 수용된 민간신앙이다. 용은 우리말로 ‘미르’라 하는데 물(水)의 고어 ‘믈’, 은하수의 우리말 ‘미리내’와 관련이 있는 물의 신이다. 용신 신앙은 민간에서 비를 내려주는 신으로 숭앙되며 6월 보름에 용신제를 지낸다. 용왕굿을 하여 농사의 풍년과 바다의 풍어를 기원하는 대상 신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용은 호법신중에서 천룡팔부의 하나다. 불법을 옹호하는 신중이지만 사람들은 ‘용왕할머니’ ‘용궁마님’ ‘용신할머니’처럼 부르며 가뭄에 비를 내려 풍작을 돕고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는 풍어의 신으로 숭앙한다.● 보궁 헌다례와 육법 공양부처님 오신 날이나 특별한 날에는 육법 공양(六法供養)을 올린다. 육법 공양은 등, 향, 차, 꽃, 과일, 쌀 여섯 가지다. 첫 째, 향은 '해탈향(解脫香: 희생, 화합, 공덕)', 인격의 향을 의미한다.모든 향이 한 줄기의 연기가 되듯이 아집을 버리고 자신을 태워 주위를 맑게 하므로 해탈향이라고 한다.둘째, 등은 '반야등(般若燈 : 지혜, 희생, 광명, 찬탄)'을 의미한다. 반야는 깨달음의 지혜 광명으로 미혹한 어둠 속에서 지혜와 광명을 비추어 중생들을 정법으로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 차는 '감로다(甘露茶-부처님의 법문이 만족스럽고 청량)'를 의미한다. 청정한 감로수는 삼독심에 의해서 생긴 중생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준다고 하여 감로다라고 한다.삼독은 탐욕(貪慾), 진에(瞋恚), 우치(愚癡)를 의미한다. 줄여서 탐·진·치라고도 하며, 이 세 가지 번뇌가 중생을 해롭게 하는 것이 마치 독약과 같다고 하여 삼독이라고 한다.넷째, 과일은 '보리과(菩提果 : 깨달음)'라고 한다. 화엄경에서 보면 이 과일이 칠보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과나 배와 같은 과일이 아니고 보리과를 말한다. 이 과일을 먹는 것은 칠보를 먹는 것과 같다.부처님께서 정등정각을 이룬 것을 보리라 하고, 우리도 그 깨달음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 수행하듯 과일을 올리면서 정등정각, 위없는 결과를 얻어 중생들을 자비심으로 제도하겠다는 의미다.다섯째, 쌀은 '선열미(禪悅米 : 기쁨,환희)'라고 한다. 법으로 가득한 기쁨을 이야기하고, 안과 밖이 맑고 깨끗하여 아주 기쁜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여섯 째, 꽃은 '만행화(萬行花 : 수행, 장엄, 찬탄)'라고 한다. 만행은 지혜와 자비를 기반으로 한 만 가지의 행동을 의미한다. 꽃이 핀다는 것은 지혜가 밝아졌다는 뜻이다.금강계단에서 9시부터 보궁 헌다례가 진행하였다. 일단 입장하면 10시 행사 끝날 때까지 이동하거나 사진 촬영을 제한하였다. 절차에 따라 행사를 진행하고 육법공양을 하였다. 통도사 헌다회 회원들이 헌다 행사를 맡아서 봉사하였다. 헌다회 종료 후 마음씨 착한 회원에게 부처님께 올린 차를 한 잔 얻어마셨다. 감사드리는 바이다. 왼쪽에 있는 분이 필자에게 차를 마시라고 한 고마운 분, 목마른 필자에게 감로수와 같은 차를 보시했으니 나중에 복을 받을 것이다. 통도사에서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모든 불자와 관광객에게 공양을 제공하였다. 공양을 위해 늘어선 줄이 하루종일 끝없이 이어졌다. 설거지도 신도들이 담당하여 봉사하였다. 필자는 점심 공양을 하고 고마운 마음에 공양미 4개(2만 원)를 사서 극락보전 부처님 전에 바치고 참배를 하였다. ● 초파일 연등 초파일 연등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 연등회에 대한 기록은 신라 경문왕 6년(866)에 황룡사에서 연등회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처음이다. 그리고 진성여왕 4년(890) 정월 15일에 왕이 황룡사로 행차하여 간등(看燈)한 내용이 보인다. 진주 유등축제에서 빌려온 해학적인 연등, 속담을 중심으로 하였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감나무 밑에 누워 입애 홍시가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개천에서 용난다. 과거급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 연등 시기가 정월이라는 점과 간등(看燈) 후에 잔치를 베풀었다는 점에 주목하면 종교적 의례라기보다 왕실 번영의 기원 또는 연희의 성격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연등회가 정월과 2월에서 사월초파일에 행해진 것은 고려 중기 의종(1146 ~1170) 때부터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사월 초파일의 연등회는 궁중에서 행한 것이라기보다 특정 신분의 계층이나 민간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궁중과 관계없이 민간에서 초파일 연등행사를 했다는 것은 부처님 탄생과 관련된 불교적 의미가 강한 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공민왕 때에는 4월 8일에 집집마다 연등을 다는 국가적인 축제로 발전하였다. 연등회는 고려사회가 만들어낸 불교 문화적 행사로서 고려문화를 대표하는 핵심이었다. 고려의 초파일 연등은 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조선이 유교주의를 표방했으므로 국가적 명절은 아니었으나 이미 민간에 깊이 뿌리박은 초파일 풍속을 금지시키는 데까지 통제하지는 못했다. 통도사 연등 점화식은 오후 7시에 진행되었다. 주지 스님, 이종희 양산시의원이 참석하였다. 사회 진행자는 점등식 스위치 누르는 이벤트에 중학생과 초등생을 대표로 뽑아 참여시켰다. 불자는 연세 든 보살들이 주류를 이루는데, 젊은 계층에게도 포교가 되어야 하겠다.● 전통낙화 시연회일주문, 성보박물관 앞 삼성반월교가 있는 하천 아래와 위쪽에서 전통낙화 시연회가 저녁 7시 30분에 열렸다. 주지스님, 이종희 양산시의원 등이 참석하여 행사가 진행되었다. 줄을 매달고 불꽃이 타오르는 심지를 매달았다.낮에 일주문 앞 도로에서 전선으로 연결하는 용역을 맡은 회사의 책임자급 직원에게 자동 점화를 하느냐고 질문을 했더니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였다. 지나가는 사람 800명 마다 질문을 하면 자신은 똑같은 답변을 800번 해야 한다며 불친절한 태도로 답변을 회피하였다. 괘씸하여 한참 지켜서서 살펴보았지만 질문을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사람은 필자가 양산의 유명한 스토리텔러라는 걸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필자는 매년 전통낙화놀이 시연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어왔다. 그래서 그 불친절한 직원이 만든 낙화가 자동으로 점화되는지 남아서 확인하기로 결심하였다.오래 기다려 7시 연등 점등식 후 7시 30분이 되었다. 자동 점화를 기대하였으나 전통낙화는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아 일부만 성공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불발이어서 실패작이었다. 가스 불은 든 직원 여러 명이 하천에 내려가 일일이 불을 붙이는 수고를 했다. 그 순간 잘난체 하던 낮의 그 불친절한 직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에 전통낙화 시연은 수동으로 직원들이 횃불을 들고 하천에서 힘들게 불을 붙였다. 올해는 자동 점화라고 프로그램에 나와 있었으나 수동이나 마찬가지였다. 낙화놀이를 구경할 때 유의할 점은 오래 타기 때문에 처음부터 구경하지 말고 좀 기다렸다가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에 조용히 사진을 찍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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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의 양산시목 이팝나무꽃 화려한 눈꽃(Snow Flower) storytelling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여 양산시 전역에는 양산시목인 이팝나무꽃이 활짝 피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양산시목은 이팝나무, 양산시화는 목련으로 1981년 6월 15일에 각각 지정되었다. 흰꽃은 만인의 사랑을 받으며 순박하고 티 없는 양산시민을 상징한다고 한다. 아울러 시조는 까치다. ● 양산시목, 시화, 시조 홍보 방안양산의 상징인 시의 로고, 시목, 시화, 시조를 시민들이 친근하게 알 수 있도록 상징탑을 세운다거나 공원을 조성한다면 확실하게 홍보가 될 것이다. 양산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어 외지에서 유입된 인구가 90%를 넘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시민들에게 양산이 살기 좋은 곳이고 정을 붙일만한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애향심을 길러줄 수 있는 방안의 하나가 바로 양산의 상징을 제대로 알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길러주는 것이다. 양산의 전체 공원에 시목, 시화, 시조를 알리는 상징조형물 또는 안내판을 세우면 좋을 것이다. 드넓은 황산공원에 별도의 공원을 조성하여 시민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안내하는 곳도 좋을 것이다.양산시목을 우리 양산시민들이 사랑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상북면 신전리 95번지에는 천연기념물 제234호인 수령 300년이 넘은 이팝나무가 신전리 마을의 당산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팝나무 특성이팝나무는 특성이 물을 좋아하고, 따뜻한 남부지방에 잘 자라기 때문에 양산시목으로 정한 것은 매우 잘 했다고 할 수 있다. 양산의 기후 풍토에 알맞은 나무가 바로 이팝나무다.이팝나무는 새하얀 순백의 꽃이 향기가 좋고 진하여 멀리까지 퍼지며, 꽃이 피는 양도 나무 전체를 덮을 정도로 많기 때문에 관상가치가 높은 나무다. 전국에서 최근 가로수로 많이 심고 있다. 청계천 복원할 때도 가로수로 이팝나무를 식재하였다. 광주광역시에서도 5월을 상징하는 나무와 꽃을 조사한 후 이팝나무의 하얀 꽃이 광주와 잘 부합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많이 심었다. 전국의 지자체에서 이팝나무를 가로수로 선호하기 때문에 수요가 넘쳐 농장에서 미처 다 키우기도 전에 사간다고 한다.● 이팝나무 개화 상태로 농사의 풍흉을 가늠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이팝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목으로 많이 심었는데,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 나무의 꽃피는 모양을 보고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쳤다고 한다.이팝나무꽃이 활짝 피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들 것으로 예상하였다. 반대로 개화가 시원찮으면 농사가 흉년이 들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팝나무는 유난히 물을 좋아하는 수종이어서 비가 충분히 오면 꽃이 활짝 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5월 초순의 이팝나무 개화시기는 벼농사의 못자리와 모내기와도 연관된다. 논에 물을 충분히 댈 수 있을 정도로 비가 흡족하게 내리면 이팝나무도 꽃을 충실하게 피우고 모심기도 수월해진다● 5월의 크리스마스5월에 피는 향기 높은 백색 꽃은 파란 잎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전 수관을 덮어서 여름철에 눈이 온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속명 Chionanthus의 Chion은 눈(雪)을 뜻하고 anthus는 꽃을 말하며 꽃이 만발해야 농사가 풍년이 든다는 얘기가 있다.이팝나무 영어이름은 여름에 눈이 온 것처럼 하얀 꽃으로 수관을 뒤덮는다 해서 ‘스노 플라워(snow flower)’다. 가로수, 정원수, 공원수로서 대단히 훌륭한 나무이다. 수명이 길어 나무가 수령이 오래 되면 더욱 모양새가 좋다.● 상북면 신전리 이팝나무 천연기념물필자가 양산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일부 소개하기로 한다. 양산시 상북면 신전리 95번지에 있는 천연기념물 234호인 이팝나무는 신전리 마을의 당산나무로서 마을의 수호신이자 주민들의 숭배의 대상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 매년 음력 1월 15일마다 제사를 올리며 한 해 동안 마을의 평안을 빌고 있다. 이팝나무에 제사를 모시는 제관으로 선정되면 새벽에 마을 앞의 양산천에서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올린다. 몇 년 전 문화재청에서 제의의 전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하여 기록을 보존하고 있다.천연기념물 이팝나무가 노쇠하여 근래 상부의 죽은 가지는 계속 잘라내었으며, 나무 밑동의 썩은 부분은 틈새를 충전재로 메워서 보호 조치를 하고 있다. 충전재로 틈새를 메우는 게 좋은지 그대로 두는 게 좋은 지에 대해 학자들간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5월 3일에 신전리 천연기념물 이팝나무를 방문하여 보니 이제 꽃이 조금씩 피기 시작하였다. 문화재청과 양산시에서 기력이 쇠한 이팝나무를 살리기 위하여 물을 공급하기 위한 호스를설치하여 놓았다. 비가 오지 않고 가뭄이 심할 때는 뿌리가 수분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도록 물을 줘야 한다.5월 7일에 신전리 천연기념물 이팝나무꽃을 구경하기 위해 방문하였다. 마침 울산에 있는 ‘우리나무병원’의 장진삼 대표가 직원과 함께 나와서 이팝나무 병해충 방제작업을 하고 있었다. 땅을 조금씩 파서 뿌리썩음병 방제약을 넣고 있었다. 이팝나무 옆의 팽나무는 마치 이팝나무와 함께 부부처럼 사이좋게 나란히 서있다. 장진삼 대표는 팽나무의 상태도 우려스럽다고 했다. 나무를 관리할 때 녹병도 주의해야 한다고 설명해줬다.● 이팝나무 전도사필자는 양산시목인 이팝나무를 매우 사랑하여 양산시에 많이 심어야 한다고 10년 전 부터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일찍부터 신문 칼럼을 통해 아팝나무의 장점을 널리 알려왔다.60만 평이 넘는 황산공원에도 양산시목인 이팝나무를 진입도로에 심고, 꽃동산도 만들어야 한다고 누차 주장을 한 바 있다. 다행히 양산시에서는 작년에 황산공원에 많은 이팝나무를 심어서 양산시목으로서 대접을 잘 해주고 있다.올해 잘 활착이 되어 꽃이 피었는데, 앞으로 더 자라면 좋은 볼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화초든 나무 꽃이든 무리지어 피는 것이 장관을 이룬다. 즉, 꽃동산을 만들기 위해서는 군식이 필요하다. 양산의 신도시, 구도심, 어곡공단, 상북면 석계리 등에 이팝나무 가로수가 많이 심어져 이제는 제법 자리를 잡아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가로수로는 양주로에 있는 것이 볼만하다. 충렬로에도 가로수가 심어져 있는데 많이 자라서 아름답다. 어곡동 로열파크빌아파트 진입로의 아펍나무 가로수도 멋지다. 서운암에도 많은 이팝나무가 있어 순백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황산공원의 이팝나무 가로수는 진입도로변에 작년에 많이 심었는데, 잘 활착이 되어 꽃을 활짝 피워서 보기 좋았다. 황산공원에 전부터 식재된 이팝나무 중에서 큰 나무도 많았다. 앞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이팝나무는 무럭무럭 자라나 하얀 꽃동산을 이뤄 5월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연출할 것이다. ● 이팝나무꽃 축제양산의 아팝나무꽃 축제는 황산공원을 중심으로 하면 좋을 것이다. 앞으로도 매년 더 많이 식재하여 축제를 할 환경을 조성해야 하겠다. 주차공간도 넉넉하여 축제를 열기에 좋다. 양산에서 가까운 밀양시 단장면 평리마을에서 이팝나무꽃 축제가 5월 초에 열린다. 평리마을은 양산 배내골과 가까운 밀양댐 하류지역 마을이다. 또한 밀양시 부북면 위양지 둑 위에 버드나무, 소나무 등이 울팡한 숲을 이뤄 산책하기 좋다. 이곳은 5월이면 이팝나무꽃이 활짝 피어 매우 아름다워 밀양팔경 중의 하나다. 위양지 저수지 안에 완재정이 있는데, 이팝나무꽃이 피면 엄청난 관광객이 몰려든다. 5월 5일에 방문해 보니 주차할 곳이 없을 정도로 차량이 많았다. 완재정은 안동 권씨 재실로 100여년 전에 지어졌다고 한다. 완재정의 이팝나무꽃이 위양지에 비치면 한폭의 동양화가 연출된다. 저수지에 비친 이팝나무꽃, 산 그림자, 거목 등의 반영은 환상적이어서 사진가들이 즐겨 찾는다.대전시 유성구청에서는 이팝나무꽃이 활짝 피면 온천문화축제를 개최한다. 이팝나무는 양산시목이고 천연기념물도 있어 이팝나무 축제를 개최하기에 알맞다. 양산의 근린공원, 학교, 관청, 아파트 등에서도 계속 이팝나무를 심어야 하겠다.● 양산시청 이팝나무 관리시청에는 시청사 앞 화단에 커다란 아팝나무가 한 그루 있고, 시의회 건물 앞에도 이팝나무가 있다. 그리고 정문 오른쪽 입구에도 이팝나무가 있다.시청사 앞에 있는 큰 이팝나무는 꽃이 피면 아주 보기 좋다. 양산시목으로서 당당하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팝나무는 크게 자라기 때문에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 주변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둘러싸고 있어 이식을 해야만 한다. 이팝나무도 거목으로 자라고 느티나무는 더욱 크게 자라므로 서로가 생존경쟁을 벌이지 않도록 적정 공간을 미리 확보해줘야만 한다. 이팝나무는 양산시목이므로 당연히 현재의 위치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 느티나무를 옮겨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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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회 어린이 날이다. 잊어서는 안될 어린이 날의 창시자 방정환이 있었다.방정환(方定煥, 1899년 11월 9일 ~ 1931년 7월 23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아동문화운동가, 어린이 교육인, 사회운동가이며 어린이날의 창시자이다. 사진=위키백과 오늘 황산공원 미니기차를 타고 우리어린이들이 즐거워 하고 있다. 본관은 온양(溫陽), 호는 소파(小波)로 일본 아동 문학가인 이와야 사자나미(巌谷小波)를 존경해서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으나, 수운 최제우의 저서인 《동경대전》의 "용담수류사해원 구악춘회일세화(용담의 물이 흘러 온 세상 바다를 이루는 근원이 되고 구미산에 봄이 다시 돌아오니 온 세상이 꽃이구나)"라는 절구에서 가져온 것으로 용담의 작은 물결이 되어 온 세상에 퍼지고 이 땅 위에 지상천국인 봄동산을 이룩하자는 천도교 사상을 담은 것으로 천도교 신자 소춘(小春) 김기전과 함께 ‘소춘’ ‘소파’라는 호를 지었다는 설도 있다.(각주: 이상금, 《사랑의 선물-소파 방정환의 생애》, 한림출판사, 2005년 12월) 이외에도 잔물, 잔물결, 물망초, 몽견초, 몽중인, 삼산인, 북극성, 쌍S,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雲庭), 파영(波影), 깔깔박사, SP생이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일본의 언론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소수의 필자들이 잡지의 지면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1931년 7월 23일, 오랜 지병과 과로로 인한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향년 3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방정환은 온양 방씨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후손이며, 순조 때 구례현감(求禮縣監)을 지내고 병조참판에 추증된 방우정(方禹鼎) 장군의 동생인 방우준(方禹準)의 5대손이다. 1899년 한성부 서부 적선방(積善坊) 야주현계(夜珠峴契)(지금의 서울 종로구 당주동과 신문로1가 경계)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한용(方漢龍)의 아들인 방경주(아명 방경수)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할아버지 방한용에게 한문을 배웠다. 야주개의 큰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개구쟁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으로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어린 시절 병약한 어머니에게 자랐고, 집안이 망한 후 일찍 출가한 누이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다. 7살 때인 1905년 삼촌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입학하는 학생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하였는데, 이를 본 할아버지는 전통을 단절해야 할 구습으로 보는 진보 지식인들의 급진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매우 화를 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손주의 뜻을 존중하여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묵인하였다고 한다. 1908년에는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하였다. 방정환의 집안은 작은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마음씨 좋은 고모에게 식량을 꾸러 갈 정도로 가난하였다. 1913년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방정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이 맞지 않아 상업학교 공부보다는 신문화 흡수를 위한 독서에 주력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로 최남선이 발간한 《소년》《붉은 저고리》를 탐독했다고 한다. 1917년 최남선이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현상문예 선외가작에 뽑혔다. 그러던 중 졸업을 1년 앞두고 당시 담임교사와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중퇴하고, 모처(향리 인근 도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독학의 뜻을 품었다고 한다. 1915년 생활비 조달을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에서 취직하여 서류 필사 업무를 하였는데,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은 토지조사사업 즉, 조선인의 토지수탈작업을 담당하여 지탄을 받는 기관이었던지라 곧 사직하고 마는데, 이때 함께 일했던 유광렬과 뜻이 맞아 이후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해 활동한다. 1917년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던 천도교인 권병덕의 천거로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인 손용화 여사와 중매 결혼하였다. 그 뒤 손병희가 교주로 있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천도교청년회의 핵심 활동가로 부각되면서 삶의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다. 그 무렵 청년 단체인 경성청년구락부(여기서 구락부는 Club의 일본식 음역이다.)를 조직하여 활동하면서 문예지 신청년(1919~1920)을 편집 발행하는데 관여했으며 청년운동가이자 문학가로서 열성을 보였다. 1920년 9월 중순, 개벽사 도쿄 특파원이자 천도교청년회 도쿄 지회장의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했고 1921년 4월 도요 대학에 신설된 문화학과에 보통청강생으로 정식 입학하여 철학과 신문화, 아동 문학, 아동 심리학 등을 공부하였다. 방정환이 쓴 수필 「미행당하던 이야기」를 보면 당시 일본 경찰은 독립 운동 경력이 있는 유학생 방정환에게 형사를 보내 감시하였다. 1920년~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수필, 번역동화, 민족적·계급적 색채가 강한 풍자기 등을 발표하였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으며, 사회주의자가 쓴 글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일본 유학 기간인 1921년에 외국 동화를 번역하여 1922년 7월 개벽사에서 번역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였다.《사랑의 선물》은 방정환이 살아있을 때 출판한 유일한 단행본이며, 다음과 같은 번안 동화 10편이 실렸다. 1921년 서울에서 어린이의 윤리적, 경제적, 민족적 독립(해방)을 주창하며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한편 방정환은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는데, 강연 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고, 민족의 미래, 희망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린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1923년 3월 20일 창간- 1934년 3월 통권 122호를 마지막으로 발간 중지)를 창간하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엽서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보내 주면 돈을 받지 않고 보내 준다고 선전해도 불과 18명이 신청할 만큼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대다수의 민중들이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던, 그래서 민중들에게는 독서가 사치로 여겨지던 조선의 현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정환은 자신의 특기인 재미있는 구연 동화로 현실의 장벽을 극복하였다.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잡지를 선전했다. 《어린이》는 색동회의 동인이었던 마해송, 고한승, 정순철, 윤극영뿐 아니라 독자였던 이원수, 윤석중, 윤복진, 최순애 등이 작품을 투고하면서 이후 아동 문학가로 이름을 알리는 기회가 되어, 한국 아동문학계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923년 5월 1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하였는데, 색동회라는 이름은 후에 동요작가로 활약하게 되는 윤극영 선생이 예쁜 색동저고리를 떠올리며 제안한 이름이다. 1927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형제별〉등의 동요·동화·모험 탐정소설인《칠칠단의 비밀》 등의 소년 소설·동극 창작과 외국 동화 번역에 힘썼으며,1928년에는 세계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열기도 하였다. 당시 그가 기획한 전시회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올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잡지와 신문 등에 기고 활동을 하면서 소설가 염상섭(廉想涉), 소설가 현진건(玄鎭健), 소설가 심훈(沈熏), 문학평론가 백기만(白基萬), 시인 이상화(李相和) 등과 문우(文友)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김성수(金性洙), 허경호(許永鎬), 이범석(李範奭) 등의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강영석(姜永錫), 박헌영(朴憲永), 박태원(朴泰遠) 등 당시의 사회주의자나 계급주의 문인들, 문단과 언론계, 교육계의 인사들과도 폭넓게 교류하며 다양한 인맥을 쌓았다. 1931년 7월 23일 잡지의 발행·편집, 동화 구연과 소년문제 강연회, 집필, 일제의가중되는 탄압과 개벽사의 재정난, 소년운동 진영의 분열 등 과로와 스트레스, 비만으로 건강이 나빠진 방정환은 누적된 피로로 쓰러져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 (현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겼으나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간호사들에게 동화를 들려줄 만큼 성격이 밝았던 그는 '문간에 검은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1957년 방정환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파상'이 제정되었다. 1958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이 추서되었으며 이후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971년에는 색동회가 주관하고 전국 어린이들의 성금을 기금으로 하여 2년간 제작한 동상이 남산 어린이회관 옆에 세워졌다.[7] 1983년 어린이날 망우리 묘소에 「소파방정환 선생의 비(碑)」가 세워졌으며,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그 후 1998년에는 한국방정환재단이 설립되었고 한국방정환재단은 소파 방정환 정신의 구현을 위해 올바른 어린이 문화지평을 넓히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방정환의 정신과 가치를 연구하고(방정환연구총서), 사료를 수집 정리하는 사료편찬사업(정본 방정환전집), 그리고 한국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조사연구와 함께 다양한 작은물결 프로젝트(책 지원사업인 작은물결문고, 미디어 격차해소 지원사업인 작은물결미디어꿈나무, 작은물결 장학금, 작은물결책나눔터, 작은물결 어린이 인문도서출판사업 등)를 통해 창의적인 어린이 청소년 공익활동 전개하고 있다. 이는 오로지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10년을 투자 하라"고 했던 소파 방정환 선생의 유훈을 계승하는 것이다. 《신동아》1967년 5월호에 실린 윤극영의 글에 따르면 일본 고등계 경찰관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는 방정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고한다. 방정환이라는 놈, 흉측한 놈이지만 밉지 않은 데가 있어… 그놈이 일본 사람이었더라면 나 같은 경부 나부랭이한테 불려다닐 위인은 아냐… 일본 사회라면 든든히 한 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 ” 방정환이 쓴 작품=만년, 샤쓰형제별(동화), 귀뚜라미(동요), 어린이 찬미(수필, )칠칠단의 비밀(어린이탐정소설) 등 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