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맑음속초17.4℃
  • 구름조금9.2℃
  • 맑음철원8.8℃
  • 구름많음동두천9.3℃
  • 구름많음파주8.8℃
  • 구름조금대관령8.0℃
  • 구름조금춘천9.9℃
  • 박무백령도10.0℃
  • 구름조금북강릉17.7℃
  • 맑음강릉18.9℃
  • 구름많음동해17.4℃
  • 박무서울11.7℃
  • 박무인천12.1℃
  • 구름많음원주11.6℃
  • 구름많음울릉도16.5℃
  • 박무수원10.6℃
  • 구름많음영월9.0℃
  • 구름조금충주10.3℃
  • 구름많음서산9.3℃
  • 구름많음울진14.0℃
  • 박무청주12.3℃
  • 박무대전11.3℃
  • 구름많음추풍령9.6℃
  • 박무안동9.6℃
  • 구름많음상주10.1℃
  • 흐림포항16.3℃
  • 구름많음군산10.3℃
  • 흐림대구13.0℃
  • 구름많음전주12.4℃
  • 흐림울산13.8℃
  • 흐림창원13.4℃
  • 흐림광주13.4℃
  • 흐림부산14.9℃
  • 흐림통영13.1℃
  • 흐림목포12.4℃
  • 흐림여수14.4℃
  • 구름많음흑산도11.8℃
  • 흐림완도13.0℃
  • 흐림고창8.8℃
  • 구름많음순천10.8℃
  • 안개홍성(예)9.0℃
  • 구름조금9.7℃
  • 흐림제주15.3℃
  • 흐림고산13.7℃
  • 흐림성산13.5℃
  • 흐림서귀포15.5℃
  • 흐림진주11.8℃
  • 구름많음강화10.0℃
  • 구름조금양평10.2℃
  • 구름조금이천10.1℃
  • 구름많음인제9.3℃
  • 구름많음홍천9.2℃
  • 구름많음태백8.1℃
  • 구름많음정선군7.4℃
  • 구름조금제천8.6℃
  • 구름많음보은8.8℃
  • 구름조금천안9.0℃
  • 구름조금보령11.1℃
  • 구름많음부여10.3℃
  • 구름많음금산9.4℃
  • 구름조금11.2℃
  • 구름많음부안10.5℃
  • 흐림임실10.4℃
  • 흐림정읍9.8℃
  • 흐림남원11.7℃
  • 흐림장수9.5℃
  • 흐림고창군10.5℃
  • 흐림영광군9.8℃
  • 흐림김해시13.9℃
  • 흐림순창군11.3℃
  • 흐림북창원14.5℃
  • 흐림양산시14.1℃
  • 흐림보성군12.3℃
  • 흐림강진군12.3℃
  • 흐림장흥11.4℃
  • 흐림해남11.3℃
  • 흐림고흥12.3℃
  • 흐림의령군11.3℃
  • 흐림함양군11.0℃
  • 흐림광양시13.9℃
  • 흐림진도군11.1℃
  • 구름많음봉화7.6℃
  • 구름많음영주9.0℃
  • 구름많음문경9.8℃
  • 흐림청송군7.7℃
  • 흐림영덕14.3℃
  • 흐림의성8.7℃
  • 구름많음구미12.2℃
  • 흐림영천10.3℃
  • 흐림경주시12.0℃
  • 흐림거창10.6℃
  • 흐림합천11.6℃
  • 흐림밀양13.1℃
  • 흐림산청11.7℃
  • 흐림거제12.7℃
  • 흐림남해13.9℃
  • 흐림13.1℃
심상도 문화박사의 현충일 특집/백범일지 속에 기록된 양산출신 독립투사 이규홍 선생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산뉴스

심상도 문화박사의 현충일 특집/백범일지 속에 기록된 양산출신 독립투사 이규홍 선생

6월 6일 현충일을 맞이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목숨바쳐 투쟁한 선열들을 생각하며 백범 김구 선생과 백농 이규홍 선생의 독립투쟁과 두 분의 인연을 알아보기로 한다.
우리 민족이 잘 되는 길은 교육을 통해 문화강국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임시정부 활동 전에는 교육에 매진했다.

이규홍선생.jpg

백범일지 속에 기록된 양산출신 독립투사 이규홍 선생

● 백범 김구

백범 김구 선생은 전 국민이 다 아는 열혈 애국 투사다. 김구 선생의 호인 백범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백범의 ‘흰 백(白)’은 당시 가장 미천한 계층을 상징하는 백정을 뜻하고, ‘무릇 범(凡)’은 평범한 사람을 의미한다. 김구 선생은 신분이 낮고 배움이 적은 평범한 사람들도 배우기만 하면 나라를 바로 세울 인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김구 선생 유묵, 자료는 양산시립박물관 '1919 양산으로부터 울림' 전시회에서 촬영
 
노당익장, 늙어서도 기운이 더욱 좋아지다.
 
조선 후기, 뇌홍식 권총
 
우리 민족이 잘 되는 길은 교육을 통해 문화강국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임시정부 활동 전에는 교육에 매진했다.

6월 6일 현충일을 맞이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목숨바쳐 투쟁한 선열들을 생각하며 백범 김구 선생과 백농 이규홍 선생의 독립투쟁과 두 분의 인연을 알아보기로 한다.

맨 왼쪽 백범 김구 선생, 친동생, 이동녕, 엄항섭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
 
김구 선생 서명 태극기
 
김구 선생 유묵, 지행합일, 아는 것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
 
필자 심상도는 이규홍 선생의 상해 임시정부 독립운동 행적을 연구하던 중 김구 선생이 쓴 백범일지가 생각났다. 상권, 하권을 단숨에 독파하였다.

독립투사 김구 선생의 일생은 위기의 연속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독립을 위한 김구 선생의 열망을 느낄 수 있었고, 청년시절 동학 지도자인 접주가 되어 관군과 싸운 일,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토전양량(土田讓亮:쓰치다 조스케)이란 자를 국모 민비 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 때려 죽인 일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치열한 독립투쟁 과정, 투옥, 탈옥, 사형당할 위기, 고문,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중국 내륙 깊숙한 곳으로 피신하여 임시정부의 명맥을 유지했던 일을 읽으며 스릴을 느끼는 동시에 굴하지 않는 애국심에 감복하였다.

그토록 원하던 해방을 맞이하여 대한민국에 환국하여 자신을 도와준 분들을 만나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머리깎고 출가하였던 마곡사를 찾는 장면은 그야말로 금의환향의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다.

● 백범일지

백범일지의 첫 시작은 ’인, 신 두 아들에게’라는 글로 시작된다.

너희들이 아직 어리고 반 만리 먼 곳에 있어 수시로 나의 이야기를 말해 줄 수 없구나. 그래서 내가 겪어온 바를 간략히 적어 몇몇 동지에게 맡겨 너희들이 아비의 경력을 알고 싶어 할 정도로 성장하거든 보여주라고 부탁하였거니와, 너희가 아직 나이 어리기 때문에 직접 말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지만 어디 세상사가 뜻과 같이 되느냐.

내 나이는 벌써 쉰셋이건마는 너희는 이제 열 살과 일곱 살밖에 안되었으니 너희의 나이와 지식이 자라질 때에는 내 정신과 기력은 벌써 쇠할 뿐 아니라, 이 몸은 이미 원수 왜에게 선전포고를 내리고 지금 사선에 서 있으니 내 목숨을 어찌 믿어 너희가 자라서 면대하여 말할 수 있을 날을 기다리겠느냐?

● 백범일지에 나오는 교훈

김구 선생이 젊은 시절에 만난 유학자 고능선 선생은 이런 말로 교훈을 주셨다.

"예로부터 천하에 흥하여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고, 망해보지 아니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도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어느 나라 국민이 의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며, 그와는 반대로 백성이 여러 패로 갈라져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외국에는 아첨하고 제 동포와는 싸워서 망하는 것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다.

마치 요즘의 정치세태를 백범이 질타하는 것 같다. 대한민국 번영을 이끌어주고 지원해준 미국을 배신하고, 6.25전쟁 때 백만대군을 보내 침략하여 동포를 죽인 중국에 아부하는 정치인들은 정신차려야 한다.

● 백농(白農) 이규홍 독립투사 약력

- 1893.9.27 경남 양산군 상북면 대석리 397 출생(조선 고종 30년)
- 1916. 일본 도쿄 명치대학 법학부 졸업
- 1917. 부산에서 일광상회 개업, 상업(백산 안희제 선생의 백산상회 건너편)

백농 이규홍 독립투사
 
이규홍 선생의 글, 동아일보, 1925년 2월 11일 상해에서
 
이규홍 선생 글 내용 해석
 
- 1919.4.23 서울에서 국민대회(3.1독립운동) 참석 후 양산 동향인 윤현진 씨와 함께 중국 상해로 망명
- 1919.4 상해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수립(산하 청년단 출판부장)

- 1919.9.11 상해 임시정부 내무차장
- 1919.11.14 상해 임시정부 학무차장
- 1920.1.15 상해 임시정부 내무차장

- 1921.3 의정원(오늘날 국회) 의원 선출
- 상해 국민대표회 기성회 조직의원
- 상해 대한적십자 상의원

- 1924. 상해 임시정부 재무총장(제4차 대통령제)
- 1925. 외무총장, 재무총장(제5차 대통령제)
- 1926.12.8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국회 부의장)

- 1926.12.14 임(任). 국무원(장관, 제8차 국무령제, 국무령 : 김구)
- 1926.12.15 면(免).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 1926.12~1930.11 임. 국무원(제9차 국무령제, 국무령 : 김구)

- 1927.1.15 상해 임시정부 약헌 기초위원(2.15 의정원 통과, 3.5 공포, 4.10 발표), 개정된 헌법 명칭 : 임시 약헌

- 1932.4.29 윤봉길 의사 상해 홍코우공원 폭탄 투척 의거 성공, 윤의사 채포되자 자전거로 프랑스 조계(租界)에 거주하는 한국인 애국지사들에게 피난할 것을 알림(국가보훈처 발행, 독립운동사 제7권 의열투쟁사, 1979, p.761)

- 1935. 독립운동하느라 과로와 영양부족으로 법정 전염병인 폐결핵 감염되어 상태가 위중함, 그 당시 결핵에는 치료약이 없었음, 회복 가망이 없어 고향 양산으로 모셔가라는 연락을 받고 가족이 모셔옴.

- 고향집인 경남 양산군 상북면 대석리 397번지로 귀국, 일본 경찰 감시하에 가택 연금당함, 양산읍내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왕진하며 치료, 일본 경찰은 별채에 거주하며 외부인 차단시키고 감시하며 우편 검열.

- 1939.5.20 폐결핵 악화로 46세 젊은 나이에 타계
- 묘소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 월평리 산1-3(현재 7번국도 월평5거리 근처)

● 상해임시정부 활동 현대식으로 해석

1919년 3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청년단 출판부장, 경상도 대표 국회의원 선출, 내무부 차관, 교육부 차관, 재무부장관, 외무부장관, 김구 주석 밑에서 장관, 국회 부의장, 임시 헌법 제정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규홍 독립투사는 요즘 말로 스펙이 매우 화려하다. 중요한 요직을 다 거치고 백범 김구 선생과 의기투합하여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분투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처럼 이규홍(李圭洪) 독립투사도 호에 백이 들어가 백농(白農)이다. 그 당시 독립투사 중 호에 백(白)이 들어간 백봉 나용균 등 6명을 6백(六白)이라 불렀다.

● 백범일지 상권에 나오는 윤현진 독립투사

필자 심상도는 최초로 백범일지를 분석하여 양산 출신의 독립투사 윤현진 선생, 이규홍 선생 이름을 발견하였다. 윤현진 선생 이름이 먼저 나온다.

윤현진 선생 훈장증
 
사용한 도장
 
영정 사진
 
묘소
 
묘비
 
상해임시정부에서 양산을 대표하는 독립투사는 우산 윤현진 선생(1892~1921)과 백농 이규홍 선생(1893~1939)이 있다. 두 분은 양산출신의 위대한 인물인 동시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독립투사들이다. 윤현진 독립투사는 상해 망명 후 임시정부 재무차장을 맡아 2년 정도 활동하다가 전염병애 걸려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백농 이규홍 선생은 윤현진 선생보다 한 살 어린데, 상해 임시정부에서 무려 16년간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차관, 장관, 국회 부의장, 헌법 제정 위원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다음은 백범일지의 내용이다.

임시정부의 조직에 관하여서는 후일 국사에 자세히 오를 것이니 약하거니와, 나는 위원의 한 사람으로 뽑혔었다. 얼마 후에 안창호 동지가 미주로부터 와서 내무총장으로서 국무총리를 대리하게 되고, 총장들이 아직 모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차장제를 채용하였다.

나는 안 내무총장에게 임시정부 문 파수를 보게 하여달라고 청원하였다. 도산은 처음에는 내 뜻을 의아하게 여기는 모양이었으나 내가 이 청원을 한 동기를 말하자 쾌락(快諾)하였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에 순사 시험 과목을 어디서 보고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혼자 답안을 보았으나 합격이 못 된 일이 있었다.

나는 실력이 없는 허명을 탐하기를 두려워할뿐더러, 감옥에서 소제를 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 번 우리 정부의 청사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줍소서 하였단 말을 도산 동지에게 한 것이었다.

안 내무총장은 내 청원을 국무회의에 제출한 결과 돌연 내게 경무국장의 사령을 주었다. 다른 총장들은 아직 취임하기 전이라 윤현진, 이춘숙, 신익희 등 새파란 젊은 차장들이 총장의 직무를 대행할 때라 나이 많은 선배로 문 파수를 보게 하면 드나들기에 거북하니 경무국장으로 하자고 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순사 될 자격도 못 되는 사람이 경무국장이 당(當)하냐고 반대하였으나 도산은,

"만일 백범이 사퇴하면 젊은 사람들 밑에 있기를 싫어하는 것 같이 오해될 염려가 있으니 그대로 행공하라." 고 강권하기로 나는 부득이 취임하여 사무하였다.

위에서 새파란 차장으로 언급된 윤천진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보다 16새 연하이다.

● 백범일지 상권에 나오는 이규홍 독립투사

민국 8년 12월에 나는 국무령으로 선거되었다. 국무령은 임시정부의 최고 수령이다. 나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을 보고, 아무리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국가라 하더라도 나같이 미미한 사람이 한 나라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의 위신에 관계된다 하여 고사하였으나 강권에 못 이기어 부득이 취임하였다.

나는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으로 내각을 조직한 후에 헌법 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독재적인 국무령제를 고쳐서 평등인 위원제로 고치고, 지금은 나 자신도 국무위원의 하나로 일하고 있다.

내 육십 평생을 돌아보니 상리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면 귀함이 없을 것이건마는, 나는 귀역궁 불귀역궁(貴亦窮 不貴亦窮:귀한 신분이 되어도 가난하게 지내고 귀한 신분이 아니어도 역시 가난하게 지냄)으로 평생을 궁하게 지내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날에는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거니와 지금의 나는 넓고 넓은 지구상에 한 치 땅, 한 칸 집도 가진 것이 없다.

위의 내용과 같이 민국 8년(1926년) 백범 김구 선생은 국무령이 되었다. 국무령은 임시정부의 최고 지도자, 수반(首班)을 의미한다. 국무령은 김구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임시정부의 수령이다.

이규홍 선생은 김구 선생이 조직한 내각 5인 중의 한 명이다. 김구 선생은 독재적인 국무령제를 고쳐 평등인 위원제로 개정했다고 밝혔다.

● 백범일지 하권에 나오는 이규홍 독립투사

임시정부에는 사람도 돈도 들어오지 아니하여 대통령 이승만이 물러나고 박은식이 대신 대통령이 되었으나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쳐 놓았을 뿐으로 나가고, 제 1대 국무령으로 뽑힌 이상룡은 서간도로부터 상해로 취임하러 왔으나, 각원을 고르다가 지원자가 없어 도로 서간도로 물러가고, 다음에 홍면희(나중에 홍진)가 선거되어 진강으로부터 상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조직에 실패하였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한참 동안 무정부 상태에 빠져서 의정원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하루는 의정원 의장 이동녕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내가 국무령이 되기를 권하였으나 나는 두 가지 이유로 사양하였다. 첫째 이유는 나는 해주 서촌의 일개 김 존위(경기도 지방의 영좌에 상당한 것)의 아들이니 우리 정부가 아무리 아직 초창 시대의 추형(雛形:축소판 형태)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나같이 미천한 사람이 일국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에 큰 관계가 있다는 것이요,

둘째로 말하면 이상룡, 홍면희 두 사람도 사람을 못 얻어서 내각 조직에 실패하였거늘 나 같은 사람에게 더욱 응할 인물이 없을 것이란 것이었다. 그런즉 이씨 말이 첫째는 이유가 안 되는 것이니 말할 것도 없고, 둘째로 말하면 나만 나서면 따라 나설 사람이 있다고 강권하므로 나는 승낙하였다. 이에 의정원의 정식 절차를 밟아서 내가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나는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심상도 보충 설명 : 윤기섭 내무장, 오영선 군무장, 김갑 재무장, 김철 법무장, 이규홍 외무장-외무부장관) 등으로 내각을 조직하고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번번이 곤란할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우는 국무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얻었다.

그래서 나는 국무위원의 주석이 될 뿐이요, 모든 국무위원은 권리에나 책임에나 평등이었다. 그리고 주석은 위원들이 번차례로 할 수 있으므로 매우 편리하여 종래의 모든 분리를 일소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정부는 자리가 잡혔으나 경제 곤란으로 정부의 이름을 유지할 길이 망연하였다. 정부의 집세가 30원, 심부름꾼 월급이 20원 미만이었으나, 이것도 낼 힘이 없어서 집주인에게 여러 번 송사를 겪었다.

김구 선생이 임명한 5명의 국무위원에 이규홍 선생이 있다. 국무위원은 동등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최고 책임자인 주석은 국무위원이 돌아가며 맡기로 하였다.

● 백범일지에 나타난 독립운동가 감소 이유

한창 적에는 1000여 명이나 되던 독립운동자가 이제는 수십 명도 못 되는 형편이었다.

왜 이렇게 독립운동자가 줄었는가. 첫째로는 임시정부의 군무차장 김희선, 독립신문 사장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같은 무리는 왜에게 항복하고 본국으로 들어가고, 둘째로는 국내 각 도, 군, 면에 조직하였던 연통제가 발각되어 많은 동지가 왜에게 잡혀갔고, 셋째로는 생활난으로 하여 각각 흩어져 밥벌이를 하게 된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 임시정부의 할 일이 무엇인가?

첫째로 돈이 있어야 할 터인데 돈이 어디서 나오나?

본국과 만주와는 이미 연락이 끊겼으니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에게 임시정부의 곤란한 사정을 말하여 그 지지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내 편지 정책이었다. 나는 미주와 하와이 동포들의 열렬한 애국심을 믿었다. 그것은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의 훈도를 받은 까닭이었다.

위의 내용을 통해 짐작해보면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운동가 대폭 감소하였고 독립자금도 끊겨 매우 곤궁하게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규홍 독립투사는 어려운 와중에도 김구 선생을 도와서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어가고 있음을 수 있다.

● 이규홍 독립투사의 손자 이경우 씨의 고군분투

이경우 씨는 할아버지의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다. 필자에게 연락하여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사연을 들어보니 너무도 안타깝고 딱하여 발벗고 나서서 도와드리고 있다.

연구자로서 최선을 다하여 각종 자료를 찾아내고 양산의 정치인들에게 찾아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하였다. 서형수 국회의원, 표병호 경남도의원이 협조를 하고 있다.

이경우 씨는 할아버지가 독립 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해 아주 어려운 생활을 해왔다. 옛날부터 독립운동을 하면 집안 3대가 망한다고 하였는데, 이경우 씨 집안도 마찬가지다. 이경우 씨는 월남전 참전용사로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국가에 충성을 하였다. 파병 때 고엽제를 만진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다.

양산시립박물관 전시회 때 양산 방문한 이경우 씨
 
 
통도사 구하스님이 독립자금 제공한 영수증 사본을 들고
 
 
이경우 씨 형님은 할아버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분서주하다가 결혼도 못하고 병고에 시달리다가 일찍 돌아가셨다. 집안 재산도 친척들이 몰래 빼돌리거나 사정을 아는 지인들이 명의를 변경하여 차지하는 바람에 후손들은 더욱 곤궁한 삶을 살아왔다.

이경우 씨의 부친도 사재를 털어 마을주민을 위하여 상북면 대석리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현재는 한국농어촌공사 소유로 넘어갔다.

이규홍 독립투사 집안은 만석꾼 부자는 아니었지만 몇 천석지기 부자였다. 이경우 씨 외갓집도 양산의 알아주는 부자였다. 이런 재산을 팔아서 상해 임시정부에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제공하였다.
 
 
이규홍 독립투사는 상해임시정부에서 16년 동안 헌신하며 재산 대부분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다가 치명적인 법정 전염병인 퍠결핵에 감염되어 귀국하였다. 일본경찰의 감시하에 자택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요양하다가 병이 악화되어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5년 후 타계하였다.

●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는 이유

상해에서 폐결핵 감염 후 귀국하여 가택연금 당했다. 귀국 후 가촌토지주식회사 사장, 환영자동차합자회사 무한책임사원 근무 기록이 남아 있어 친일활동으로 의심받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규홍 선생의 아들 이종문 씨가 처남 지영대 씨와 사업을 하면서 부친 명의의 재산으로 출자하여 형식상 이름만 올라간 것이다. 사업하여 번 돈, 집안의 논밭을 판 돈 등이 지속적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 보내졌다.
 
 
 
 
● 친일 행적 여부

이규홍 선생은 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명단에 올라가지 않았다. 손자 이경우 씨가 동아일보 도쿄 지사장에게 의뢰하여 일본 외무성 자료를 조사하였다. 요시찰 인물로만 기재되어 있었고 변절 기록은 없었다고 한다.

● 통도사 주지 현문 스님 증언서

현문 스님이 손자 이경우 씨에게 써준 증언서를 보면 이규홍 선생이 돌아가신 후 장례식에서 제문을 지어 조문한 지인들이 일본 경찰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시달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만약 이규홍 선생이 친일행적이 있었다면 일본경찰이 이런 탄압을 할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규홍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16년 동안 요직을 맡아 독립운동을 하며 재산 대부분읊 바치고 끝내 목숨까지 바쳤다.

위대한 독립투사를 뚜렷한 증거도 없이 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미루고 후손들에게 증거자료를 제출하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 표병호 교육위원장의 노력

표병호 경남도의원이자 교육위원회 위원장은 필자의 설명을 듣고 적극 도와줄 것을 약속하였다. 양산의 중요 행사에서 만날 때 마다 필자는 표병호 위원장에게 부탁을 거듭하였다.

표병호 경남도의회 교육위원장
 
표병호 위원장과 필자
 
김판석 전문위원, 표병호 위원장
 
표병호 교육위원회 위원장은 경남도의회 김판석 전문위원을 소개해주어 여러차례 전화로 소통을 하며 도와줄 것을 부탁하였다.

마침 현충일을 하루 앞둔 6월 5일 오후에 아직까지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이규홍 선생이 떠올라 표병호 위원장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경남도의회가 개회 중이라 창원에 있다고 하여 즉각 창원으로 달려갔다.

마침 표병호 교육위원장실에 같은 교육위원회 소속인 장규석 도의원, 원성일 도의원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표병호 위원장은 동료 의원들에게 필자를 소개해주었다. 이규홍 선생의 억울한 사연을 간략히 소개하고 도와줄 것을 부탁드렸다.

두 분은 진주시에도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한 분이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독립투사를 연구하는 분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표병호 위원장은 경남도 교육위원회 차원에서 보훈처에 조속한 조취를 취할 것을 요청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김판석 전문위원을 위원장실로 불러서 소개해주었다. 그동안 전화로만 얘기를 나누다가 처음 대면하니 반가웠다. 표병호 위원장은 여러가지 해결방안을 설명해주어 그동안 막막하고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졌다. 표병호 위원장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옆에서 돕는 필자의 심정이 이럴진대 손자 이경우 씨는 수십년간 관료적으로 대하는 보훈처 직원들과 증언서를 주고받으며 희망없는 핑퐁게임을 할 때 느꼈을 절망감이 다소나마 이해되었다.

이경우 선생이 이제는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고 꽃길만 걸었으면 좋겠다.
 
 
 
 
현충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경제강국으로 발전하는데 밑거름이 된 독립투사들의 헌신과 희생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심상…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