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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회 어린이 날이다. 잊어서는 안될 어린이 날의 창시자 방정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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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회 어린이 날이다. 잊어서는 안될 어린이 날의 창시자 방정환이 있었다.

방정환은 온양 방씨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후손이며, 순조 때 구례현감(求禮縣監)을 지내고 병조참판에 추증된 방우정(方禹鼎) 장군의 동생인 방우준(方禹準)의 5대손이다.[2] 1899년 한성부 서부 적선방(積善坊) 야주현계(夜珠峴契)(지금의 서울 종로구 당주동과 신문로1가 경계)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한용(方漢龍)의 아들인 방경주(아명 방경수)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할아버지 방한용에게 한문을 배웠다. (方定煥, 1899년 11월 9일 ~ 1931년 7월 23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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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方定煥, 1899년 11월 9일 ~ 1931년 7월 23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아동문화운동가, 어린이 교육인, 사회운동가이며 어린이날의 창시자이다.
사진=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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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황산공원 미니기차를 타고 우리어린이들이 즐거워 하고 있다.

본관은 온양(溫陽), 호는 소파(小波)로 일본 아동 문학가인 이와야 사자나미(巌谷小波)를 존경해서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으나, 수운 최제우의 저서인 《동경대전》의 "용담수류사해원 구악춘회일세화(용담의 물이 흘러 온 세상 바다를 이루는 근원이 되고 구미산에 봄이 다시 돌아오니 온 세상이 꽃이구나)"라는 절구에서 가져온 것으로 용담의 작은 물결이 되어 온 세상에 퍼지고 이 땅 위에 지상천국인 봄동산을 이룩하자는 천도교 사상을 담은 것으로 천도교 신자 소춘(小春) 김기전과 함께 ‘소춘’ ‘소파’라는 호를 지었다는 설도 있다.(각주: 이상금, 《사랑의 선물-소파 방정환의 생애》, 한림출판사, 2005년 12월) 이외에도 잔물, 잔물결, 물망초, 몽견초, 몽중인, 삼산인, 북극성, 쌍S, 목성, 은파리, CWP, 길동무, 운정(雲庭), 파영(波影), 깔깔박사, SP생이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일본의 언론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소수의 필자들이 잡지의 지면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1931년 7월 23일, 오랜 지병과 과로로 인한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향년 3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방정환은 온양 방씨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후손이며, 순조 때 구례현감(求禮縣監)을 지내고 병조참판에 추증된 방우정(方禹鼎) 장군의 동생인 방우준(方禹準)의 5대손이다. 1899년 한성부 서부 적선방(積善坊) 야주현계(夜珠峴契)(지금의 서울 종로구 당주동과 신문로1가 경계)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방한용(方漢龍)의 아들인 방경주(아명 방경수)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할아버지 방한용에게 한문을 배웠다.
 
야주개의 큰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개구쟁이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4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으로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어린 시절 병약한 어머니에게 자랐고, 집안이 망한 후 일찍 출가한 누이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다. 7살 때인 1905년 삼촌을 따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입학하는 학생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하였는데, 이를 본 할아버지는 전통을 단절해야 할 구습으로 보는 진보 지식인들의 급진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매우 화를 내었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손주의 뜻을 존중하여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묵인하였다고 한다. 1908년에는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구연,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을 하였다. 방정환의 집안은 작은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마음씨 좋은 고모에게 식량을 꾸러 갈 정도로 가난하였다. 1913년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방정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이 맞지 않아 상업학교 공부보다는 신문화 흡수를 위한 독서에 주력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로 최남선이 발간한 《소년》《붉은 저고리》를 탐독했다고 한다.
 
1917년 최남선이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현상문예 선외가작에 뽑혔다. 그러던 중 졸업을 1년 앞두고 당시 담임교사와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중퇴하고, 모처(향리 인근 도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독학의 뜻을 품었다고 한다.

1915년 생활비 조달을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에서 취직하여 서류 필사 업무를 하였는데,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은 토지조사사업 즉, 조선인의 토지수탈작업을 담당하여 지탄을 받는 기관이었던지라 곧 사직하고 마는데, 이때 함께 일했던 유광렬과 뜻이 맞아 이후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해 활동한다.
 
1917년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던 천도교인 권병덕의 천거로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인 손용화 여사와 중매 결혼하였다. 그 뒤 손병희가 교주로 있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천도교청년회의 핵심 활동가로 부각되면서 삶의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다. 그 무렵 청년 단체인 경성청년구락부(여기서 구락부는 Club의 일본식 음역이다.)를 조직하여 활동하면서 문예지 신청년(1919~1920)을 편집 발행하는데 관여했으며 청년운동가이자 문학가로서 열성을 보였다.

1920년 9월 중순, 개벽사 도쿄 특파원이자 천도교청년회 도쿄 지회장의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했고 1921년 4월 도요 대학에 신설된 문화학과에 보통청강생으로 정식 입학하여 철학과 신문화, 아동 문학, 아동 심리학 등을 공부하였다. 방정환이 쓴 수필 「미행당하던 이야기」를 보면 당시 일본 경찰은 독립 운동 경력이 있는 유학생 방정환에게 형사를 보내 감시하였다.
 
1920년~1923년 사이 유학 기간에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수필, 번역동화, 민족적·계급적 색채가 강한 풍자기 등을 발표하였다. 1920년 《개벽》 3호에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으며, 사회주의자가 쓴 글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일본 유학 기간인 1921년에 외국 동화를 번역하여 1922년 7월 개벽사에서 번역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출판하였다.《사랑의 선물》은 방정환이 살아있을 때 출판한 유일한 단행본이며, 다음과 같은 번안 동화 10편이 실렸다.
 
1921년 서울에서 어린이의 윤리적, 경제적, 민족적 독립(해방)을 주창하며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한편 방정환은 전국 순회강연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는데, 강연 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고, 민족의 미래, 희망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린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1923년에는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1923년 3월 20일 창간- 1934년 3월 통권 122호를 마지막으로 발간 중지)를 창간하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엽서에 이름과 주소를 적어서 보내 주면 돈을 받지 않고 보내 준다고 선전해도 불과 18명이 신청할 만큼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대다수의 민중들이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던, 그래서 민중들에게는 독서가 사치로 여겨지던 조선의 현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정환은 자신의 특기인 재미있는 구연 동화로 현실의 장벽을 극복하였다. 어린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잡지를 선전했다. 《어린이》는 색동회의 동인이었던 마해송, 고한승, 정순철, 윤극영뿐 아니라 독자였던 이원수, 윤석중, 윤복진, 최순애 등이 작품을 투고하면서 이후 아동 문학가로 이름을 알리는 기회가 되어, 한국 아동문학계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923년 5월 1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창설하였는데, 색동회라는 이름은 후에 동요작가로 활약하게 되는 윤극영 선생이 예쁜 색동저고리를 떠올리며 제안한 이름이다. 1927년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형제별〉등의 동요·동화·모험 탐정소설인《칠칠단의 비밀》 등의 소년 소설·동극 창작과 외국 동화 번역에 힘썼으며,1928년에는 세계어린이들의 작품을 전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열기도 하였다. 당시 그가 기획한 전시회는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올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잡지와 신문 등에 기고 활동을 하면서 소설가 염상섭(廉想涉), 소설가 현진건(玄鎭健), 소설가 심훈(沈熏), 문학평론가 백기만(白基萬), 시인 이상화(李相和) 등과 문우(文友)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김성수(金性洙), 허경호(許永鎬), 이범석(李範奭) 등의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강영석(姜永錫), 박헌영(朴憲永), 박태원(朴泰遠) 등 당시의 사회주의자나 계급주의 문인들, 문단과 언론계, 교육계의 인사들과도 폭넓게 교류하며 다양한 인맥을 쌓았다.

          

1931년 7월 23일 잡지의 발행·편집, 동화 구연과 소년문제 강연회, 집필, 일제의가중되는 탄압과 개벽사의 재정난, 소년운동 진영의 분열 등 과로와 스트레스, 비만으로 건강이 나빠진 방정환은 누적된 피로로 쓰러져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 (현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겼으나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간호사들에게 동화를 들려줄 만큼 성격이 밝았던 그는 '문간에 검은말이 끄는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1957년 방정환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파상'이 제정되었다. 1958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이 추서되었으며 이후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971년에는 색동회가 주관하고 전국 어린이들의 성금을 기금으로 하여 2년간 제작한 동상이 남산 어린이회관 옆에 세워졌다.[7] 1983년 어린이날 망우리 묘소에 「소파방정환 선생의 비(碑)」가 세워졌으며,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그 후 1998년에는 한국방정환재단이 설립되었고 한국방정환재단은 소파 방정환 정신의 구현을 위해 올바른 어린이 문화지평을 넓히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방정환의 정신과 가치를 연구하고(방정환연구총서), 사료를 수집 정리하는 사료편찬사업(정본 방정환전집), 그리고 한국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조사연구와 함께 다양한 작은물결 프로젝트(책 지원사업인 작은물결문고, 미디어 격차해소 지원사업인 작은물결미디어꿈나무, 작은물결 장학금, 작은물결책나눔터, 작은물결 어린이 인문도서출판사업 등)를 통해 창의적인 어린이 청소년 공익활동 전개하고 있다. 이는 오로지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10년을 투자 하라"고 했던 소파 방정환 선생의 유훈을 계승하는 것이다.

  

《신동아》1967년 5월호에 실린 윤극영의 글에 따르면 일본 고등계 경찰관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는 방정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고한다.

방정환이라는 놈, 흉측한 놈이지만 밉지 않은 데가 있어… 그놈이 일본 사람이었더라면 나 같은 경부 나부랭이한테 불려다닐 위인은 아냐… 일본 사회라면 든든히 한 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 ”  
 
방정환이 쓴 작품=만년, 샤쓰형제별(동화), 귀뚜라미(동요), 어린이 찬미(수필, )칠칠단의 비밀(어린이탐정소설) 등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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