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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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양산팔경 임경대 무장애 관광지 개통'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임경대는 휠체어, 유모차 접근이 제한되어 불편 양산팔경 중 제7경인 임경대는 한반도 지도처럼 보이는 낙동강의 시원한 모습, 아름다운 낙조를 볼 수 있어 수많은 관광객, 사진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양산의 명소가 즐비한 원동면 배내골, 화제리, 신흥사, 매화꽃 명소인 순매원, 영포리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있어 임경대는 항상 관광객으로 붐빈다. 일반인들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조금 걸어가면 임경대 정자로 쉽게 갈 수 있지만 장애인의 휠체어, 유모차는 접근이 어려웠다. 산책로는 경사가 심하고 데크 계단이 있어 휠체어는 아예 접근이 불가능했다. 유모차는 산책로가 박석으로 포장되어 돌과 돌 사이가 틈새가 있어 유모차 밀기가 힘들었고, 잠자는 아기도 이동 중 요동이 심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어 문제였다. 천년고찰 통도사는 일찌감치 장애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무장애 접근로를 개설하여 대웅전까지 누구나 쉽게 관람할 수 있었다. 무풍한송로도 황토로 포장하여 휠체어가 이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필자가 오래전에 가본 유명한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도 무장애 관광지로 조성되어 있었다. 양산시민과 외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양산8경 임경대는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하여 많은 민원이 제기되었다. 임경대는 2012년 역사문화공원으로 지정돼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의 편의 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편의시설이 의무적으로 설치되어야 하는 곳이었지만 양산시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임경대 주차장에는 대형차량 주차 5면, 일반차량 주차 30면이 설치되어 있었다. 장애인 주차구역은 페인트가 벗겨져 잘 보이지 않았고 산책로는 장애인들의 휠체어 이동이 불가능하여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빗발쳤다. 양산시 문화관광과에서 2022년 7월부터 임경대의 접근성을 개선함으로써 장애인과 유모차를 이용하는 가족단위 관광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전면적인 공사에 착수하였다. 12월 18일 개통을 목표로 무려 6개월간 임경대 접근을 완전 차단한 채 공사를 하였는데, 예상치 못한 난관으로 공사는 해를 넘겨 2023년에도 계속되었다. 1월 말에 개통한다고 예고하였다가 또 연장하여 2월 중순, 그리고 최종적으로 3월 1일에 개통한다고 하였다가 결국 3월 4일에야 정식 개통하였다. 필자는 임경대, 용화사 둘레길,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만든 임경대 폭포와 황산베랑길 자전거도로를 연결하는 둘레길, 임경사지, 이연상 군수 묘소, 양산숲길보전회에서 심은 꽃무릇 등을 보기 위해 수시로 임경대를 방문하곤 하였다. 공사가 벌어지고 난 후에는 입장을 차단하였기에 자유롭게 가볼 수도 없어 몹시 궁금하였다. 공사가 쉬는 날에 잠깐 들어가 보니 엄청난 규모의 대공사가 벌어지고 있어 깜짝 놀랐다. 2. 임경대 접근로 개설 공사와 꽃무릇 훼손 걱정 양산팔경 임경대를 사랑하는 양산숲길보전화에서는 임경대를 아름답게 단장하기 위하여 꽃무릇을 대량 식재하였다. 꽃무릇은 군락을 이루어야 아름답기 때문에 심상도 회장,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조상현 사무국장, 일반 회원들이 합심하여 꽃무릇을 곳곳에 많이 심었다. 임경대 입구 담장 밑, 시비 주변, 화장실 옆과 데크 로드 사이 공터 등에 심었다. 또한 임경대 내부, 산책로 주변 담장 내외부 등에도 많이 심었다. 심상도 회장은 용화사 가는 방향과 임경대폭포로 가는 개울 주변에도 꽃무릇을 심었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은 임경폭포 주변, 황산베랑길로 내려가는 둘레길에도 곳곳에 꽃무릇을 심었다. 영남삿갓은 금낭화, 매화나무, 나리꽃도 심었다. 또한 황산잔도 옛길 주변, 동래부사 정현덕 공 송덕비 주변, 경파대 주위에도 꽃무릇과 나리꽃을 심었다.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식재하였기에 2023년에는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임경대 무장애 통로 개설 공사로 차단한다는 플래카드를 봤을 때 꽃무릇이 걱정되었다. 처음 추측으로는 양쪽 진입 산책로를 휠체어가 갈 수 있도록 공사하는 줄로만 알았다. 공사 상황이 몹시 궁금하여 공사 쉬는 날에 들어가 보니 공사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꽃무릇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공사는 양쪽 진입로는 물론이고 임경대 직전의 대나무 숲도 다 벌채하고 옆으로 길게 땅을 파놓았다. 왜 중간을 파헤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공사 완료 후에 보니 휠체어가 안전하게 경사 없이 지그재그로 임경대 전망대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공사였다. 3월 1일에 완료한다는 공사 안내문을 보고 3월 2일에 임경대를 방문하니 역시 폐쇄되어 있었다. 김태정 문화관광해설사로부터 임경대를 개방했다는 반가운 연락이 왔다. 3월 7일에 임경대를 방문하여 입구 화장실 옆 공터, 담장 밑부터 심어놓은 꽃무릇을 살펴보니 잘 살아있어서 다행이었다. 사진을 찍은 다음 안내소에 가니 이형분 문화관광해설사가 근무하고 있어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공사가 완료되어 입구로 들어가면서 살펴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데크 로드가 완성되어 있었다. 일반인이 갈 수 있는 통행로와 장애인 휠체어, 유모차가 갈 수 있는 길로 구분되어 있었다. 필자는 꽃무릇의 안부가 궁금하여 최치원 선생의 시비부터 소나무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시비 주변은 공사 흔적이 없고 꽃무릇도 잘 살아 있었다. 산책로 주변 빈 공간에 양산시 문화관광과에서 심은 꽃무릇이 많이 보여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데크 로드 개설로 양산숲길보전회에서 심은 꽃무릇이 없어진 곳도 많았지만 문화관광과에서 곳곳의 빈 땅에 꽃무릇과 다른 화초를 심어놓았다. 문화관광과 담당 직원의 센스가 덧보여 감탄사가 나왔다. 임경대 무장애 관광지 공사를 진행한 양산시 이창헌 문화관광과장, 담당 직원에게 감사드리는 바이다. 앞으로 데크 로드 사이 빈 땅이 있으므로 문화관광과에서 계속 심었으면 좋겠다. 임경대를 꽃무릇 명소로 만들면 꽃무릇 축제도 가능하다. 3. 양산숲길보전회에서 임경대에 꽃무릇 식재 임경대에 꽃무릇을 식재한 주요 활동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20년 10월 25일, 양산숲길보전회 임경대 정기답사 때 심상도 회장, 조상현 사무국장과 회원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곽종포 시의원이 함께 하여 꽃무릇을 심었다. 2021년 2월 9일 심상도 회장과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임경대에 꽃무릇을 심었다. 2021년 4월 15일~16일 심상도 회장과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임경대에 꽃무릇을 심었다. 2021년 4월 21일 심상도 회장,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곽종포 시의원, 이기주 원동면장, 물금읍 거주 김미지 회원, 정덕유 회원, 원동면 주민들이 함께 꽃무릇을 심었다. 2021년 8월 30일 심상도 회장,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김태정 문화관광해설사가 함께 곷무릇을 심었다. 2021년 9월 3일에는 심상도 회장과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꽃무릇과 금낭화를 식재하였다. 2021년 11월 13일에 심상도 회장,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정덕유 회원은 임경대 입구 담장 사이에 키가 큰 억새를 심었다. 정덕유 회원이 낙동강 억새를 싣고 오는데 트럭을 제공하였다. 2021년 11월 28일 양산숲길보전회 심상도 회장과 회원,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임경대에 꽃무릇을 심었다. 4. 임경대 무장애 관광지 공사 후 과제 임경대 무장애 관광지 조성 공사가 완료되어 지난 3월 4일부터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해졌다. 2022년 7월부터 거의 8개월간 임경대를 폐쇄하고 출입을 금지하였다. 공사가 잘 마무리 되어 장애인과 유모차를 끌고 오는 가족단위 관광객도 편하게 임경대 정자까지 가서 한반도 지형처럼 생긴 낙동강의 시원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공사 전에는 전망대에서 낙동강을 조망하며 사진을 찍을 때 키가 큰 소나무 몇 그루가 전방 시야를 가렸는데, 이번에 보니 제거되어 전망이 확 트여서 좋았다. 그러나 아직 키가 큰 소나무가 두 그루가 시야를 가리는데, 이 소나무는 그대로 두고 윗부분만 약간 잘라내면 시야가 완전히 확보될 것으로 보였다. 전망대 밑에 명품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공사 중 전지를 너무 심하게 하여 솔가지를 대폭 잘라내 미관상 좋지 않게 보였다. 앞으로는 이런 식의 전지를 하면 절대 안 된다. 필자는 통도사 자장매, 홍매화, 수양매의 전지에 대해 누차 지적한 바 있다. 현재 소나무 모습은 앙상한 뼈대만 드러내고 있어 미관상 좋지 않다. 데크 로드 상단에 붙어 있는 주의 슬로프/ 계단 갈래길, 슬로프와 계단구간 이용시 주의 바랍니다. 이 표지판이 너무 작아서 정상인이 판별하기도 쉽지 않다. 크기를 대폭 확대하여 다시 제작하여 부착해야 하겠다. 휠체어에 앉은 장애인이나 유모차 이용자, 일반인 모두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제작하여 슬로프 갈림길마다 붙여야 하겠다. 그동안 양산숲길보전회 심상도 회장과 회원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곽종포 시의원, 이기주 원동면장, 정덕유 회원, 김미지 회원 등이 정성 들여 심은 꽃무릇이 이번 무장애 공사로 일부 훼손되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공사 기간 내내 마음 졸이며 꽃무릇의 안위를 걱정했는데, 3월 7일에 방문해보니 훼손되었지만 양산시 문화관광과에서 새로 꽃무릇을 심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데크 로드 사이에 아직 빈 공간이 있으므로 꽃무릇, 금낭화 등을 심어주었으면 좋겠다. 양산숲길보전회에서는 임경대 꽃무릇 축제도 계획하고 있다. 금낭화도 개화 기간이 길기 때문에 식재하면 관광객들의 포토존으로 활용될 것이다. 이미 심상도 회장과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일부에 심어놓았다. 이번 무장애 관광지 공사에 수고한 양산시 이창헌 문화관광과장, 담당 직원에게 감사드리며, 향후에도 꽃무릇, 금낭화 등을 추가로 심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임경대 공원의 주인공인 최치원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전국을 유람할 때 임경대에 들러 아름다운 경치에 반하여 시 한 수를 읊은 것이 계기가 되어 양산팔경 임경대가 탄생한 것이다. 시비 공원의 주인공 최치원 선생 시비는 크기가 작고 볼품이 없다. 후세의 시인 시비가 더 큰 돌로 우람하게 만들어졌다. 주객이 완전 전도된 모습이다. 제일 큰 멋진 돌로 다시 제작하여 세워야 한다. 그리고 최치원 선생의 동상도 건립하여 세웠으면 좋겠다. 사천시는 최치원 선생 유적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최치원 선생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둘레길 이름도 ‘최치원 선생 둘레길’이라는 명칭을 붙였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오봉산 둘레길 중 임경대 쪽인 서쪽의 둘레길을 ‘최치원 선생 둘레길’이라고 하면 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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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리 차문화 연구소장의 특별칼럼, 양산의 차문화양산 차 문화의 역사 양산차문화연구소 소장 지 미리 약력소개 양산차문화연구소 소장 통도사차문화대학원 연구소 연구원 부산대학교 박사과정 우리 민족은 7세기에 음다 풍속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여러 가지 사료에서 확인된다. 『삼국사기』에 “차는 선덕여왕(632~647) 때부터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에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 공양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과 효명태자가 오대산 진여원에서 문수보살에게 날마다 차 공양을 올려 성불을 기원한 것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흥덕왕3년(828년)에 “견당사로 갔던 대렴이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차 씨를 가지고 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고, 차는 이때부터 성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산은 낙동강하류 동편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신라초기에는 가야권의 문물이 교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가야유적이 북정동 고분과 다방리 패총 등에서 보이고 있고, 이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진한과 변한은 서로 섞여 살았으며 의복과 언어, 법속이 비슷하였다.”고 기록하였고, 양산의 고호(古號)는 탈해 이사금 시기 중엽부터 3세기까지 황산으로 불리다가 이후 문무왕 5년(665년)까지 삽라군 삽량주 삽량성으로 문무왕 665년 이후 정비된 지방 행정기관의 이름이 삽량주가 되었다. 경덕왕 16년(757년)에 한화정책(漢化政策)의 일환으로 향음표기 방식을 한자식으로 두자를 취하여 표기하여 삽량주가 양주(良州)로, 고려 태조 23년에 양주(梁州)로 개칭,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양산(梁山)이 되었다. 낙동강 하류에 자리 잡은 가야(현재 김해)는 일찍부터 음다 풍속이 있었다고 『삼국유사』 제2권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다. 양산 또한 가야(현재 김해 여다리) 차 시배지와 황산강(현재 낙동강)을 경계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증산리 야생차 군락지가 있다. 양산지역의 기온은 따뜻하고 낙동강의 맑은 공기와 함께 차나무가 잘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차를 마시는 것이 일반화되어 지배층에서는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고려시대 양주에는 차(茶)를 생산하는 다소(茶所)가 유명하였던 것으로서 차가 토산에 기록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또한 『통도사사적기』에 보면, 통도사에는 차를 생산하여 사원에 공납하는 다소촌(茶所村)이 있었다고 한다. 다소촌은 현재 행정구역으로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양산시와 울주군의 경계지점을 추정하고 있다 양산지역은 통도사 외에도 야생차 고차수 군락지인 증산리 일원과 다방리 일원이 있고, 법기리 창기마을에는 도요지와 양산 도공들이 있었다. 다방리 마을의 옛 주민들은 다방을 차밭골로 불리어져 왔을 만큼 차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이와 같이 양산의 차 문화는 어느 고장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고장으로서 우리나라 차 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살려가야 할 지역이이라고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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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화요칼럼,원동면 순매원 매화꽃과 원동매화축제원동면 순매원 매화꽃과 원동매화축제 1. 순매원 매화꽃과 통도사 홍매화 개화 상태 양산시 원동면 원리의 순매원은 매화꽃, 경부선 철도를 달리는 기차, 시원하게 흘러가는 낙동강 세 가지를 동시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전국적인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원동매화축제 역시 동남권 최대의 매화축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최근 몇 년간 열리지 못했던 축제가 열리게 되어 기대가 크다. 원동면의 매화축제가 유명세를 치르는 것은 순매원, 영포리와 신흥사 일원의 매화꽃 개화 시기가 달라서 그만큼 매화꽃을 오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천년고찰 통도사의 350년이 훨씬 넘은 자장매는 납매로서 한국에서 가장 빨리 꽃이 피는 매화나무로 정평이 나 있다. 납매(臘梅)는 음력 섣달에 피는 매화를 말한다. 자장매는 양력 새해 1월초부터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하여 1월 중순이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필자가 매년 관찰해보면 개화 시기가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 올해 통도사 홍매화는 전지를 잘 하여 매화꽃이 풍성하여 아름답다. 통도사 홍매화도 영각 앞의 자장매, 극락보전 옆의 연분홍 매화꽃, 진분홍 매화꽃의 개화 시기가 달라 홍매화를 오랜 기간 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자장매는 영각이 남향으로 양지바른 곳이어서 하루 종일 햇볕이 들어 꽃이 빨리 핀다. 극락보전 옆의 연분홍 매화꽃, 진분홍 매화꽃은 극락보전 전각에 가려져 그늘이 지는 시간이 있어 개화에 영향을 받고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자장매는 겹꽃으로 꽃도 아름답고 품종도 특이하여 빨리 피는 것으로 보인다. 통도사 홍매화는 요즘이 개화의 절정으로 매우 아름답다. 매화축제가 열리는 원동면 순매원의 매화꽃은 아직 만개 상태는 아니지만 볼만하다. 외지 관광객 입장에서 통도사 홍매화와 원동면 순매원의 매화꽃을 한꺼번에 감상하기 위해서는 3월 5일~12일 사이에 방문하면 좋다. 축제 기간의 혼잡을 피하려면 5일~10일에 방문하면 좋을 것이다. 순매원 전망대를 3월 2일 방문했을 때 매화꽃은 반 정도 개화하였다.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전망대에서 순매원의 매화꽃과 기차를 찍기 위해 기다렸는데, 쌀쌀한 바람이 불어서 추웠다. 전망대 근처에 천막을 친 임시 가게도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곳이 있었다. 매화꽃이 만개하면 전망대 위를 가득 채우는 관광객도 아직은 드문드문 보였다. 잡상인들이 천막을 칠 때 기둥을 고정하려고 전망대 나무 데크와 도로 경계석 사이를 드릴로 구멍을 뚫어 파손된 곳이 있어 문제다. 전망대 위에도 잡상인이 전을 벌이기 위해 미리 자리를 잡고 검은 비닐로 덮어둔 것이 관광객에게 불편을 초래할 수 있어 단속이 필요하다. 전망대 위에서 잡상인들이 장사를 하지 못하도록 계도, 단속해야 한다. 원동면의 매화꽃은 순매원이 가장 빨리 피고, 신흥사가 있는 영포리는 산이 높은 골짜기 사이에 있어 원리보다 기온이 낮아 매화꽃이 늦게 핀다. 지난 2일 순매원 입구 언덕에는 MBN 방송의 카메라 기자 두 명이 와 지나가는 기차와 매화꽃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순매원 안에 들어가니 홍매화가 활짝 피어서 눈길을 끌고 있었다. 홍매화 옆의 백매화도 만개하였다. 푸른 빛이 감도는 청매화는 일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순매원의 매화꽃은 아직 만개 상태가 아니어서 관광객은 많지 않았다. 순매원은 개인농원으로 3월 1일부터 25일까지 개방하는데,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이며, 야간 개방은 하지 않는다. 필자는 오래전 야간에도 개방할 때 보름달이 떠오른 달밤에 매화꽃을 찍은 적이 있었는데, 운치가 있었다. 순매원은 옛날부터 국수, 파전, 막걸리 등을 저렴하게 판매하여 관광객의 인기를 끌었는데, 올해의 음식가격도 저렴한 편이었다. 국수 5천 원, 파전 5천 원, 떡볶이 1인분 5천 원, 탁주 4천 원, 어묵 한 개 2천 원, 음료수 2천 원이었다. 다른 관광지는 파전도 1만 원이 훨씬 넘는 데 비하면 싼 편이다. 2. 순매원 주변과 전망대의 관광객 수용태세 전망대에 새로운 포토존이 설치되었는데, 한국원자력수력(주) 삼랑진 양수발전소에서 2022년 12월에 설치하였다. ‘함께 가꾸는 아름다운 세상’을 추구하기 위해 포토존은 한국수력원자력 회사가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지역주민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지원하였다고 적혀 있었다. 기업의 사회적 기부 차원에서 제공한 것이다. 주민을 위한다기보다는 실제로는 관광객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 원동면 원리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고령 인구가 대부분이다. 전망대 주변에는 쓰레기가 많이 눈에 띄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데크 아래 매화나무 밑에는 쓰레기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쓰레기 무단 투기시 과태료 부과(CCTV 감시카메라 작동중)한다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지만 효과가 없는 것 같다. 매화나무에 걸린 검은색 비닐봉지, 흰색 비닐봉지도 있었다. 전망대 아래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는 양산시나 원동면에서 책임지고 수거해야 하겠다. 몇 년 전에 필자가 원동면장에게 부탁하여 매화나무를 뒤덮은 칡덩굴 제거 작업, 쓰레기 수거를 한 적이 있었다. 순매원 근처의 매화나무에는 온통 칡덩굴, 잡덩굴이 휘감고 있어 꽃이 피어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1022번 도로변의 데크 로드 아래에는 순매원의 개인 땅이 아니어서 방치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것도 양산시에서 공공 근로를 통해 덩굴을 제거해줬으면 좋겠다. 또한 빈 땅에는 매화나무를 추가로 심어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원동매화축제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는 이런 세부적인 면에도 신경을 써야 하겠다. 올해의 원동매화축제는 3월 11일(토)~12일(일) 이틀간에 걸쳐 열린다고 한다. 지구온난화로 매화꽃 개화시기가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 축제를 예년보다 2주 정도 앞당겼다. 전에는 매화꽃 개화시기를 잘못 예측해서 축제를 망친 적도 있었다. 축제장은 원동주말장터를 주 무대로 열리고 주차장은 에전과 같이 원동천 옆의 공터를 이용하고 셔틀버스를 운영한다. 원동매화축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교통 체증, 굴곡이 많은 위험도로, 주차장 부족, 너무 멀리 떨어진 주차장 등이 해결되지 않고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나동연 양산시장 때 수립된 화제리에서 원리까지 직선 도로 개설은 김일권 시장 재임시 추진이 보류되었다. 필자가 전에도 칼럼에서 주장했지만 축제장이나 순매원에 가까운 곳에 주차장을 개설하는 손쉬운 방법이 있다. 커브가 심한 굴곡도로를 직선화시키고 산을 절개하여 여러 곳에 주차장을 만들면 된다. 현재 순매원 전망대 옆의 주차장은 너무 협소하여 매화꽃이 만개했을 때는 주차하기가 너무 힘들다. 원동매화축제가 성공적으로 열리는 것은 미나리와 삼겹살이라는 먹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원동 청정 미나리는 논미나리가 아니고 청정지하수로 재배하기에 거머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농민들이 축제 기간 중에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비닐하우스 임시 식당을 허용하고 있지만 위생 상태, 가격 등에 대한 단속은 필요한 실정이다. 원동매화축제 기간 중에 출하되는 원동 딸기도 인기를 끌고 있다. 관광객을 위해 코레일에서는 3월 4일~19일 사이 주말에만 원동역에 정차하는 임시 열차도 운행한다. 교통 접근성, 주차장 문제 등이 해결된다면 원동매화축제는 전국적인 축제로 부상할 수 있는 잠재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도로 개설 등은 많은 예산이 소요되기 때문에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접근해야만 한다. 도로 굴곡이 심한 구간을 직선화시키면서 주차장을 확보하는 것은 경남도비만 확보하면 가능하다고 한다. 양산지역의 국회의원, 양산시장, 경남도의원, 양산시의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원동매화축제가 코로나19 전에 인기 축제로 떠올라 교통 문제가 심각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별로 개선된 것이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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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태작곡가 ' 와이뉴스 음반이사의' 꽃과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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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칼럼'통도사 자장매와 홍매화의 매력1. 통도사 자장매 통도사 자장매는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매화꽃으로 해마다 봄이면 꽃을 일찍 피워 많은 관광객, 불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유모차를 끄는 가족 관광객, 지팡이에 의존하는 고령의 노인, 수녀, 스님, 남녀노소 모두 매화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휴대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멋지게 담을 욕심이 있는 사진가들은 자장매 앞에 사람이 없을 때 사진을 찍고자 하는 욕구가 강렬한데, 한시도 조용한 순간이 없다. 오직 기다리는 인내심만 요구된다. 양산의 매화꽃 중에서 개화시기가 가장 빨라서 날씨가 온화한 해에는 1월 초순부터 하나둘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아마 전국적으로 따져도 가장 빨리 피는 매화꽃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른바 납매라 할 수 있다. 부산의 유엔공원 홍매화도 빨리 피지만 연륜과 아름다움에 있어서 자장매와 견줄 바 못 된다. 통도사의 연분홍 매화와 진분홍 매화는 자장매 보다는 늦게 피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통도사의 매화꽃 감상 기간이 길어져 관광객과 불자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통도사에는 백매화, 청매화도 있는데, 비교적 늦게 피는 편이다. 거기에 지리산에서 옮겨온 오향매는 매우 늦게 핀다. 통도사는 기품있는 매화꽃 천국으로 봄이면 매화꽃 감상객으로 몸살을 앓게 된다. 자장매는 오래전부터 350년이 넘었다고 소개해왔는데, 정확한 수령은 알 수 없지만 고매화로서 천연기념물 급이다.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온 경남 창원시 의창군 대산면 북부리 팽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에서는 평소에 무관심하다가 재빨리 드라마의 인기에 편승하여 팽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양산시에는 상북면 신전리 이팝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나무의 생육 상태가 좋지 않다. 이팝나무 천연기념물이 한 그루 더 있었는데, 관리 소홀로 말라 죽었다. 양산시에서 작년에 천연기념물로 신청한 나무가 있어 관심을 모았는데 아직까지 지정 소식이 없어 안타깝다. 미타암 주지 동진 스님이 2020년 5월 발견한 산뽕나무는 희귀한 연리목이다. 수령이 300년 이상으로, 둘레가 3.1m에 높이가 20m에 달하며, 밑동에서 두 개의 나무가 하나로 합쳐진 연리목이라 더욱 소중한 나무이다. 동진 스님과 조계암이 주관하는 산뽕나무 당산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문화재청의 공정하고 엄밀한 심사와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자장매는 매우 우수한 품종의 고매화로 겹꽃이 매우 아름답다. 요즘 흔히 나오는 개량종 홍매화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품과 향기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3대 사찰 중 으뜸인 불지종찰 통도사의 창건주 자장율사의 이름을 따서 지은 자장매는 볼수록 매력적이다. 필자는 매년 자장매가 피어날 때 일주일에 서너 번씩 방문하여 자장매화 홍매화 사진을 찍는다. 통도사는 산지 승원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기 때문에 자장매 관리는 더욱더 중요하다. 2. 자장매 관리와 전지 통도사에는 자장매, 진분홍 홍매화, 연분홍 홍매화, 수양매화, 개량종 홍매화. 오행매, 청매화, 백매화 등이 서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자장매와 홍매화는 통도사 입장객 수입에 다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필자차럼 사진에 관심있는 전국의 사진가들이 매년 봄이면 엄청나게 통도사를 방문하고 있다. 극락보전 옆에 있는 진분홍 매화꽃, 연분홍꽃을 피우는 매화나무는 수령이 오래되었다. 진분홍 매화꽃을 피우는 나무가 수령이 더 오래 되어 100년은 훨씬 넘은 것으로 보인다. 연분홍 매화나무는 나무가 약간 작은 편이다. 통도사 홍매화를 매해 구경하며 사진을 찍을 때마다 유심히 관찰해보면 홍매화 나무 관리에 문제점이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나무를 전지할 때 너무 심하게 전지하여 꽃이 볼품없는 해가 번갈아 나와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지난해 11월 4일 양산차문화연구소 지미리 원장을 통해 조계종 큰 어른인 종정 성파 스님을 친견할 귀중한 기회가 있어 반가움이 앞섰다. 서운암 차문화대학원에서 조국영 도예작가와 함께 성파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조국영 도예작가는 도자기에 관한 자신의 지론을 설명하였다. 필자는 통도사 자장매와 홍매화의 관리와 전지에 관해 어떤 해는 매화나무 전지를 너무 심하게 하여 꽃이 볼품이 없어 문제가 많다고 설명하였다. 성파 스님은 필자의 설명을 진지하게 경청하였다. 성파 스님은 즉답을 하는 대신 관계자에게 상황을 물어보고 나중에 지미리 원장을 통해 상황을 알려주었다. 홍매화 나무를 관리하고 전지할 때 개미 같은 해충이 나무를 침범할 때 독한 약을 쓰면서 나무가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영양분 공급을 조절하는 차원에서 가지를 많이 친 경우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동안 홍매화 전지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는데, 어느 정도 의구심이 해소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 지미리 양산차문화연구소 원장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또 하나의 통도사 명물 매화나무로 성보박물관 옆의 한송정 식당 앞에 있는 가지가 땅으로 축 처지는 백매화 수양매는 수령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모양이 특이하여 방문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통도사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수양매화는 일반 매화나무와 달리 가지가 밑으로 내려오는 게 특생이다. 수양벚꽃도 마찬가지로 가지가 밑으로 축 처지는 게 매력 포인트로 조경업계에서 인기 있는 나무이다. 올해의 매화나무 전지는 전반적으로 양호한 편으로 칭찬할 수 있다. 다만 수양매화는 땅으로 내려오는 가지를 너무 심하게 잘라서 마치 단발머리 소녀 같은 인상을 주고 있어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자장매와, 연분홍 홍매화, 진분홍 홍매화는 전지를 무난하게 해서 꽃이 풍성하여 보기좋다. 매화나무 가지를 전지할 때 위로 뻗는 가지를 너무 심하게 자르면 개화 기간이 아주 짧아지게 된다. 하늘로 치솟은 풍성한 가지에서 순차적으로 꽃을 피우면 그만큼 아름다운 매화꽃을 오래 볼 수 있게 되는 장점이 있다. 매화나무 굵은 가지 사이의 잔가지 역시 잘 살려둘 필요가 있다. 매화나무 전지는 전적으로 전문 조경업체에 맡기고, 일반 잡부가 아닌 전문가가 조심스럽게 전지를 해야만 한다. 조경회사의 일당 받고 일하는 직원이 함부로 자르면 그해 통도사 입장 수입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병충해 예방도 일년내내 관심을 갖고 해야만 한다. 영양제도 공급하고, 비료도 적절히 주고, 병충해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자장매와 홍매화를 애지중지 잘 보살피면 반드시 풍성한 꽃으로 보답하게 된다. 통도사도 재정 수입이 악화되어 양산시민들에게 무료 입장 혜택을 줄여 입장료는 면제하고, 대신 주차료는 받고 있다. 통도사의 보물인 자장매와 홍매화는 세심한 관리가 요구되는 귀중한 나무이다. 요즘 자장매, 홍매화는 꽃이 만개하여 보기가 매우 좋다. 수양매화는 아직 만개 상태는 아니다. 통도사는 주차장은 불자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몰려드는 사진가들 덕분에 요즘 항상 거의 만차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2. 통도사 자장매를 그리는 김창한 화백 매년 이름 봄부터 자장매를 그리기 위하여 통도사를 매일 방문하여 캔버스를 펼치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김창한 화백은 통도사 자장매 만큼 유명한 화가이다. 자장매와 홍매화를 번갈아 그리고, 자장매 전시회도 여러 번 열었다. 봄의 차가운 바람, 따가운 햇볕 속에서 하루종일 매화꽃을 그리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는 자장매를 찍기 위해 해마다 통도사를 방문하면서 김창한 화백을 알게 되었고, 전시회도 가보고 하면서 친분을 두텁게 쌓았다. 전에 울산예술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화업에 전념하기 위하여 정년 훨씬 전에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오로지 화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신념과 용기 있는 화가이며, 실력 있는 화가로서 국내외 전시회도 자주 개최하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외국도 자주 방문하고 있다. 김창한 화백이 자장매와 홍매화를 그리기 위해 통도사를 방문한지도 어언 21년째라고 하여 놀랐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강산이 두 번 변할 때까지 끈기 있게 자장매를 그리는 집념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며칠 전 김창한 화백에게 페이스북을 통해 나온 답변이 재미있었다. 앞으로 계속 30년, 40년이 되어도 필자와 함께 하고 싶다고 얘기하였다. 김창한 화백은 통도사 자장매 그리기가 끝나면 대운산 내원암에 가서 고매화를 그린다. 전에 필자의 소개로 양산시 원동면의 야생 고매화를 그린 적도 있다. 매화꽃이 늦게 피는 경북지역의 농원을 방문하여 매화꽃을 진지하게 그려나간다. 또한 간절곶, 바다 일출 그림 그리기도 꾸준하게 실천하고 있다. 계절따라 다양한 꽃 그림도 많이 그리고 있다. 김창한 화백의 특징은 실내 화실에서 상상 속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자연 속에서 얼굴이 햇볕에 검게 그을리면서도 현장에서 그리는 데 있다. 통도사 자장매를 21년째 그리는 집념은 기네스북 등재감이다. 어떤 한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의 법칙이 있다고 했는데, 김창한 화백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그림 한 분야에 일생을 투자하며 그림을 그려나가는 김창한 화백은 우리나라 미술계의 최고봉이자 명문인 홍익대 미대 출신이다. 앞으로도 김창한 화백이 건강하게 통도사 자장매와 홍매화를 그리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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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자장암과 금와보살자장암과 금와보살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자장율사 자장암은 통도사 창건주 자장율사(慈藏律師)의 수도처로 회봉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하며 이후 1963년 용복화상이 중수하였다. 자장암 석면에 새겨진 4m에 달하는 마애불은 1896년에 조성되었다. 마애불 옆으로는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한 수세전과 창건주와 독성, 산신을 모신 자장전이 있다. 1987년부터 현재 통도사 주지를 맡고 있는 현문 스님에 의해 중창불사가 진행되어 암자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관음전은 명당인 거북바위의 등에 건립하였다. 관음전 문 앞에 바위가 노출되어 있고, 전각 안에도 바위가 보인다. 바위를 깨뜨리지 않고 그대로 살려서 지은 것을 보면 우리 조상들의 자연을 사랑하는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관음전 뒤로 돌아가 금와공이 있는 곳으로 가면 거북의 머리에 해당하는 바위를 볼 수 있다. 금와공 아래는 석간수가 있다. 자장암은 통도사 암자의 대표적인 암자라고 할 수 있다.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통도사 창건(646)에 앞서 바위 아래 움집을 짓고 수행하던 곳이 자장암이다. 옛 이름은 자장방이라 하여 통도사 칠방의 하나로서 자장율사의 제자들이 수행하던 곳이다. 『통도사사적약록』에는 통도사 안에 있었던 일곱 개의 사찰인 칠방 중 향 문화와 관련 깊은 곡성방에서 ‘자장율사의 제자인 곡성스님이 좌선할 때 오색구름이 절 위를 덮고 다섯 가지 향기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장율사의 출생, 출가, 치열한 수행 정진에 관한 이야기는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잘 나타나 있다. 대덕(大德 :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승려의 존칭) 자장(慈藏)은 김씨이고 본래 진한(辰韓) 진골 소판(蘇判) 3급의 관작(官爵) 명이다.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는 청요직(淸要職)을 지냈으나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삼보(三寶)에게 귀심하여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고 자식 하나 낳기를 빌었다. 기원하여 말하기를 “만약 남자를 낳으면 내놓아서 법해진량(法海津梁 : 여래의 가르침을 이어갈 재목)으로 만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문득 별이 떨어져서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태어나니 석가세존과 같은 날이었으므로 선종랑(善宗郞)이라 이름하였다. 정신과 마음이 맑고 깊으며 문사(文思)가 날로 넉넉해졌으나 세속의 추구에 물들지 않았다.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속세의 어지러움을 꺼려서 처자(妻子)를 버리고 전원(田園)을 내놓아 원령사(元寧寺)를 만들었다. 홀로 깊고 험준한 곳에 거하여 이리와 호랑이를 피하지 않고, 고골관(枯骨觀 : 무상을 깨닫기 위해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륙을 다 드러내어 백골만 앙상하게 남게 되기까지의 수행과정)을 닦았는데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곧 작은 집을 지어 주변에 가시덤불로 막고, 알몸으로 그 안에 앉아서 움직이면 쉽게 찔리게 하고, 머리는 대들보에 매달아서 혼미함을 없앴다. 마침 태보(台輔) 자리가 비어서 문벌이 선택되기 마땅하여 누차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왕이 이에 명하여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어 버리겠다”라고 하였으나 자장은 그것을 듣고 “나는 차라리 하루 동안 계를 지키고 죽지 백 년 동안 계를 어기고 살고자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왕이 허락하여 출가하게 하였다. 이에 바위산에 깊이 은거하고 양식을 돌보지 않았는데 이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어다 와서 바치니 손을 내밀어 먹었다. 갑자기 천인(天人)이 와서 5계(戒)를 주는 꿈을 꾸고 바야흐로 처음으로 속세로 나오니 향읍의 사녀(士女)들이 다투어 와서 계를 받았다. 2. 금와공 금와공(金蛙孔)은 자장암의 관음전 뒤 금와보살이 살고 있는 바위 구멍이다. 자장율사가 석간수를 흐리는 개구리를 손가락으로 암벽에 구멍을 내 이곳에 살게 한데서 유래되었다. 몸은 청색 또는 바위색이며 눈과 입가는 금색이고 등에는 거북등 문양의 검은 점이 있으며 벌과 나비로 변신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관음성지를 보호하라는 자장율사의 원력으로 금와굴에서 1400여년을 살아온 금와보살은 신비한 존재다. 금와공 속의 개구리를 보는 사람도 있고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서 이로써 불심(佛心)을 헤아리기도 한다. 금와보살을 친견하면 행운이 따른다는 얘기가 회자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자장암에는 금와공(金蛙孔)이 있어 유명하다.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하권(下卷) ‘승유어급변화금와(僧遺魚及變化金蛙)’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축서산 통도사의 자장암 곁의 커다란 암벽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는데 그 속에 작은 개구리가 있다. 몸은 청색이고 입은 금색인데 어떤 때는 벌이 되기도 하여 그 변화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다. 여름철에 바위가 과열되면 뜨겁기가 솥과 같으나 그 위를 자유로이 뛰어다닌다. 사승(寺僧)이 이를 일러 금개구리라 하더라. 그런데 이 금개구리는 도무지 산문(山門) 밖을 나가지 아니한다고 하므로 한때 어떤 관리가 그 말을 믿지 아니하고 그 개구리를 잡아 함 속에 넣어 단단히 닫고서 손으로 움켜쥐고 돌아가다가 도중에 열어보니 없어졌다. 세간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神通)으로 자라게 한 것이라 말한다.” 3. 자장동천 자장동천(慈藏洞天)은 통도팔경 중의 하나로 제4경에 속한다. 자장동천은 깨끗한 암반 위로 흐르는 계류가 여름철 피서객을 불러 모은다. 최근 자장동천에 철망 울타리를 치는 공사를 하였다. 올여름에도 관광객들에게 개방하는지 궁금하다. 통도팔경은 다음과 같다. 1경인 무풍한송(舞風寒松) : 통도천의 풍광과 아름다운 소나무 2경은 취운모종(翠雲暮鍾) : 취운암의 저녁 종소리 3경은 안양동대(安養東臺) : 일출시 안양암에서 큰절 쪽으로 보이는 경관 4경은 자장동천(慈藏洞天) : 자장암 계곡의 소(沼)가 달빛을 받아 연출하는 광경 5경은 극락영지(極樂影池) : 영취산의 수려한 풍경이 담기는 극락암 영지 6경은 비로폭포(毘盧瀑布) : 비로암 서쪽 30m 거리에 있는 폭포 7경은 백운명고(白雲鳴鼓) : 백운암 북소리 8경은 단성낙조(丹城落照) : 단조산성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 자장동천은 예로부터 고승들이 시회(詩會) 같은 모임을 가졌던 곳이었다. 경봉스님이 ‘세상에 좋고 궂은 일들 뒤집어보면 원래 흘러가는 물같은 것’ 하고 읊조렸던 곳도 바로 여기다. 자장동천은 여름철 피서객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휴장천운상고루(携杖穿雲上古樓) 지팡이 짚고 구름 헤치며 옛 누각에 오르니 만산홍록차중부(萬山紅綠此中浮) 온 산에 단풍이 수놓은 듯 하구나. 세간호호비비사(世間好好非非事) 세상에 모든 좋고 궂은 일들 번복원래사수류(飜覆元來似水流) 뒤집어 보면 원래 흘러가는 물 같은 것 자장암에 가면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계단이 있다. 계단 주변은 수국 등을 심어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천전히 걸어 올라가면서 108계단이 어디서 끝나는지 세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108계단은 108개가 넘는데, 확인하는 순간 108번뇌는 눈 녹듯 사라진다. 자장암 산문 밖 주차장에서 영축산의 웅장한 모습을 보는 것도 관광의 포인트다. 걸어 올라가면서 자장동천의 물소리를 듣고, 계곡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도 관광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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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통도사 진신사리의 수난통도사 진신사리의 수난 1. 통도사 진신사리탑 고려시대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사리 내용이 나온다. 삼국유사 앞뒤로 가져온 사리(前後所將舍利) 제3권 탑상 제4(三國遺事 卷第三 塔像 第四)에 신라 선덕왕 때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법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부처님의 입던 가사 한 벌을 가져온 내력이 나온다. “선덕왕(善德王) 시대인 정관(貞觀) 17년 계묘(서기 643)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 부처의 사리 100개와 부처가 입던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 한 벌을 가져왔다.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皇龍寺) 탑에 두고 하나는 태화사(太和寺) 탑에 두고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通度寺)의 계단(戒壇, 승려가 계를 받는 단이다.)에 두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통도사의 계단은 두 층이 있는데, 위층 가운데에 돌 뚜껑을 모셔두었는데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모양 같았다.” 고려시대 고위 권력자들이 호기심에서 통도사 진신사리탑에 봉안된 진신사리를 직접 보고 싶어 사리탑 뚜껑을 여는 일이 있었다. 안렴사(按廉使)는 1276년(충렬왕 2)의 관제개정에 따라 안찰사(按察使)를 개칭한 것이다. 1298년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는 땅이 넓고 일이 많아 안렴부사(按廉副使)를 더 두었다. 충선왕 즉위 후에 제찰사(提察使)로 고쳐졌다가 충숙왕 때 다시 안렴사로 되었다. 삼국유사에 다음의 내용이 나온다. 세상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우리 고려 때 두 안렴사(按廉使)가 차례로 와서 계단에 예를 올리고 돌 뚜껑을 들어 돌솥을 들어보았더니,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돌 함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다음에는 큰 두꺼비가 돌 속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로부터는 감히 뚜껑을 들고 들여다보지 못하였다.” 고려시대 상장군 김이생, 시랑 유석이 통도사를 방문하여 스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을 시켜 진신사리탑 돌 뚜껑을 열어 진신사리를 구경하였다. 상장군은 고려시대 중앙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무반으로는 최고 품계인 정3품이었다. 시랑은 고려 태조 때 광평성, 내의성의 차관급이었으나 성종, 문종 때 상서6부의 정4품 벼슬로 정착되었다. 다음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최근에 상장군 김이생(金利生) 공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고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부절을 가지고 이 절에 와서는 돌 뚜껑을 들고 예를 올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절의 승려들이 지난 일을 들면서 어려워하였다. 그래서 두 공이 군사를 시켜서 돌 뚜껑을 들게 했는데, 그 안에는 작은 돌함이 있었고 그 속에는 유리통이 있었고 또 그 통 속에는 사리가 겨우 네 알만 들어 있었다. 서로 돌려보면서 경배를 올렸다. 그런데 통이 조금 상한 곳이 있어서, 유공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함 하나를 시주하여 함께 보관하도록 하고 그 일을 기록해 두었다. 이때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지 4년째인 을미년(서기 1235)이었다. 삼국유사에는 부처님 진신사리의 신묘한 모습이 나온다. 한편 몽골군의 침입으로 황룡사 9층목탑이 불탈 때 통도사와 황룡사에 나누어 봉안한 진신사리가 동일한 반응을 보인 내용이 나온다. 다음은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고기(古記)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사리 100개를 세 곳에 나누어 보관했는데, 이제 다만 네 개뿐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보이지 않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므로 수효가 많고 적은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또 세상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에 돌솥의 동쪽 면에 처음으로 커다란 얼룩이 생겼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당시가 요(遼)나라 응력(應曆) 3년 계축(서기 953)으로 고려 광종 4년이었으며, 탑이 세 번째로 불타던 때였다. 조계종의 무의자(無衣子)가 시를 남겼는데, “듣건대 황룡사 탑이 불탔던 날에, 연이어 한쪽 면이 불에 타 차이가 없었다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지원(至元) 갑자년(서기 1264) 이래로 원나라 사신과 본국 사신들이 다투어 와서 이 돌함에 예를 올렸고, 사방의 행각승들이 모여들어 예를 올렸는데, 혹은 돌 뚜껑을 들어보기도 하고 혹은 들지 않기도 하였다. 진신사리 4개 이외에도 변신사리가 모래처럼 부서져서 돌함 밖으로 나타났는데, 이상한 향이 진하게 풍기며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는 일이 가끔 있었다. 이것은 말세에 나타난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이었다. 2. 통도사 세존비각 통도사에서 가장 큰 건물은 대규모의 법회를 열기 위해 건립한 설법전이다. 1992년 당시 국내 최대 목조 건물로 건립하여 강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500평 규모에 2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반대로 가장 작은 건물은 세존비각이다. 기둥만 있고 벽이 없으며, 지붕을 덮은 아주 작은 건물로 1792년에 지었다. 비(碑)란 공적을 오래도록 전하려는 것이요, 각(閣)이란 그 비를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세존비는 1706년에 세워졌다. 계파(桂坡) 성능대사性能大師)가 금강계단을 중수하면서 비석을 세웠다. 사바교주석가여래영골부도비라고도 한다. 비문에는 부처님 진신사리와 관련된 내용이 나와 있다. 부처님 진신사리에 대한 설명과 역사에 대해 상세히 기록을 남겨 금강계단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둔 일종의 문화재 해설서이다. 통도사 세존비각(世尊碑閣)은 중로전(中爐殿) 영역에 있는데, 개산조당과 해장보각의 서쪽 편 금강계단 옆에 바짝 붙어 있다. 세존비각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서,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였고 평방은 가설하지 않았다. 공포(栱包)는 출목(出目)이 있는 주심포식으로, 살미첨차는 쇠서의 형태로 조각하였다. 세존비각은 1706년(숙종 32) 승려 계파(桂坡) 성능대사(性能大師)가 금강계단을 중수하면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소장하게 된 내력을 자세히 밝힌 비가 세워진 다음 지은 것이다. 세존비각 내부에 있는 비석의 높이는 약 2.5m, 폭 1m 정도인데, 밀양의 표충비처럼 간혹 땀을 흘린다고도 한다. 비문은 수사간(守司諫)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이 짓고 글씨는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석비 뒷면의 비음(碑陰)은 성능대사(性能大師)가 짓고 보윤대사(普允大師)가 썼는데, 이곳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행적(行蹟)과 함께 각지(各地)의 시주(施主)내용을 적었다. 비각 가운데에 귀신 문양을 조각하였고, 양쪽에는 단순한 꽃무늬를 조각한 비석 받침이 있으며, 천장에는 비석을 내려다보는 용의 형상을 만들었다. 비석은 ‘사바교주석가여래영골부도비(娑婆敎主釋迦如來靈骨浮屠碑)’라는 또 다른 비명(碑銘)이 있다. 비석은 자장국사가 중국에서 석가모니의 사리를 가져온 일과 임진왜란 때에 사명대사가 석가모니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둘로 나누어 금강산에 있는 서산대사에게 보냈더니 서산대사가 하나는 묘향산에, 다른 하나는 현재의 계단에 두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3. 진신사리의 왜구 탈취와 수난 사리의 수난과 위기 극복 사례는 월간 통도 2023년 2월호에 잘 나와 있다. 명나라 홍무 10년(1377년) 정사년에는 왜구가 양주에 들어와 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월송대사가 구덩이를 파서 숨겼다. 다시 찾아서 짊어지고 도망가는데 추격이 급해지자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내려 벗어날 수 있었다. 사리는 신성한 보물로서 왜구들이 끊임없이 수탈해가려고 하였다. 조선 선조 임금 임진년(1592년) 왜구가 침략하여 영남지방이 가장 먼저 함락되어 통도사도 위기를 겪게 되었다. 왜군은 무차별로 백성들을 죽이고 재물과 귀중한 문화재를 약탈했다. 사찰을 불태우고 귀중한 문화재도 마구잡이로 훔쳐갔다. 통도사도 위기를 면할 수 없었으며 사리도 왜군이 노렸다. 왜적들이 끊임없이 사리를 수탈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통도사 스님들은 지켜냈다. 위기가 자주 발생하여 언제 다시 빼앗길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사명대사 유정 스님은 금강산에 있는 휴정대사에게 사리를 전하며 지켜주기를 당부드렸다. 고민하던 휴정 스님은 다시 사리를 남쪽으로 내려보냈다. “영축산은 수승한 곳으로 문수보살의 명을 받은 자리이다.··· 저들의 뜻을 관찰해보면 얻고자 하는 것은 황금과 구슬이지 믿음의 보배는 아니다. 그러니 전과 같이 단에 봉안하고 수리하는 것이 좋겠다.” 사명 스님은 휴정 스님의 뜻을 이해하고 금강계단을 다시 온전히 수리하여 사리를 모셨다. 1706년 계파 성능대사가 금강계단을 중수하면서 이러한 내용을 기록하여 비석을 세운 것이다. 성능대사는 마지막 문장에서 “내가 방장산으로부터 와서 백 겁을 지나도 만나기 어려운 성골을 외람되이 봉안하고 예를 올리며 보단을 중수하고 비석에 새겼다. 일을 마치자 슬픔과 감격으로 눈물을 쏟으며 발문을 삼가 발문을 쓴다.” 고 기록을 남겼다. 통도사의 진신사리는 자장율사가 절을 세운 이후 여러 번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도난의 위험에 처하기도 했지만 스님들이 목숨 걸고 수호한 덕분에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진신사리를 지켜온 과정이 세존비에 기록되어 있다. 세존비각은 진신사리탑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대웅전과 금강계단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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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의병장 최흥식 선생과 두연대1. 임진왜란 의병장 최흥식 선생 두연대지는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과 함께 화왕성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의병장 최흥식 선생이 자신이 거처하는 집터 곁에 지은 정자터이다. 현재 두연대는 터만 남아 있으며, 1997년 어곡리 4차선 도로 확장공사에 의해 옮겨진 두연대 유허비가 유산천 개울가 동편에 자리하고 있다. 두연대 유허비는 경주 최씨 양산종친회에서 190년 4월에 완공하였다. 두연대 유허비는 2002년 5월 10일 조성된 어곡주민공원에 있다. 어곡주민공원 옆으로 유산천이 흐르고 있으며, 유산천 위에는 보행자 전용 교량이 설치되어 있다. 공원에는 야외무대, 체육시설, 화장실, 실내 게이트볼장, 산책로, 어실교 등이 설치되어 있다. 최흥국은 자가 강후(康侯)고 호는 남계(南溪)로 1550년(명종 5) 4월 6일, 양산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경주로 고운 최치원 선생의 후손이다. 1588년(선조 21) 33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주, 화왕산, 팔공산 등지에서 대구의 손처약(孫處約). 손린(孫遴), 밀양의 손기양(孫起陽), 박수춘(朴壽春) 등과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최흥식 선생에 대한 자세한 일생은 이미 와이뉴스 화요칼럼에서 쓴 바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최흥국 선생은 공신 책봉을 사양하고 현재의 양산시 어곡동 지역으로 와 자신이 거처하는 집 곁에 두연대라는 정자를 짓고, 양산의 사호(四豪)라 일컫는 안근(安瑾), 이수생(李秀生), 이몽란(李夢鸞) 등과 함께 후학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나라가 왜적의 침입으로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홀연히 나서서 목숨 걸고 싸워 나라를 구하고, 전쟁이 끝난 다음 논공행상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대쪽 같은 선비였다. 두연대 유허비는 1997년 어곡동 도로 확장 공사할 때 위치를 어곡주민공원 안으로 이전하였다. 경주 최씨 재실인 두연재는 도로변에 있으며 주소는 어실로 215이다. 두연대 터를 확인하기 위하여 필자는 지난 1월 24일, 25일, 28일에 걸쳐 두연대 유허비, 두연대, 두연교를 답사하였다. 두연대 터가 유산천에 있어 두연재 뒤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옆에 있는 한국카센터의 이상곤 대표가 나와서 무엇을 조사하는지 물어보았다. 두연대 답사를 왔다고 하니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두연대는 1997년 도로확장과 두연교 건설로 옛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알려주었다. 두연대 터는 두연교 근처라고 알려주었다. 그 당시 하천 교량 공사와 옹벽 설치 때문에 바위들이 많이 파손되었다고 하였다. 문화유적인 두연대 터를 잘 보존하면서 공사를 할 수 있었는데 파괴되어 안타까웠다. 친절하게 설명해준 이상곤 대표에게 감사드리는 바이다. 현재 두연교와 주유소 사이 어곡공단 쪽으로 새로운 도로 개설 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두연교 건설은 1997년 12월 31일부터 2000년 2월 29일까지 2년 2개월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다. 공사에서 시행청은 양산시, 시공자는 대원종합건설(주), 설계자는 ㈜원방종합기술공사, 감독자는 박윤근, 준공검사관은 이상호였다. 두연대 터 훼손과 관련있는 건설사와 책임자들이다. 시행청인 양산시의 책임이 제일 무겁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역사적 위인에 대한 대접이 너무 소홀하였다. 유산천에 있는 두연대와 관련된 기암괴석 바위가 훼손된 것은 심각한 문제다. 2. 두연대유허비(斗淵臺遺虛碑) 내용 대저 산수의 볼만한 곳, 전배(前輩)님의 소거지所居地)로 비록 세월이 많이 흘렀으나 뒤에 사람이 추모하는 전해오는 유풍 여운을 보존하니 그 땅이 어디였나. 우리 족친 대대로 살아온 양산 고을 어곡동 두연대가 그곳이 분명할사. 우리 조상 선조 조에 남계 진사 경주 최공 휘함(諱)은 흥국(興國)이요, 자함(字啣)은 강후(康侯) 일사. 그곳을 사랑하여 처음에 점지하니 고운 선생 후예로서 조부님은 현감이요, 아버지는 참봉이라. 대대로 미(美)에 젖어 영상(英爽)한 자질이며 고결한 의지로서 정한강(鄭寒岡) 문인으로 도의 교육에 힘을 쓰고 성정(性情)을 함양하여 성현학(聖賢學)에 전심하여 능히 덕기(德器) 이루시어 장차 반궁 출입하여 국유추중(國儒推 重) 받자드니 그때가 불행하여 벼슬을 포기하고 시골에 숨으셨네. 임진왜란 때에 동지인 안공근(安公瑾)과 이공 수필(李公 秀弼), 이공 몽연(李公 夢鷰) 등이 결사보국 동맹하여 곽망우당(곽재우)과 더불어서 화왕진(火旺陳)전투에 출전하여 우수한 전략으로 적을 무찔러 큰 공을 이루었으니 혁혁한 그 사실이 『동고록(同苦錄)』에 실렸도다. 평난(平亂) 뒤에 대를 쌓아 두연이라 하니 그로 인한 형세 (形勢)로다. 그 가운데 거처하며 서사(書史)를 즐기셨고 한강께 시를 올려 이르기를, “하늘에는 솔개가 날고 깊은 못에 고기 뛰니 한 줄기의 참된 근원 나에게 잘 붙였네. 흰머리 슬프구나. 위수강 막혔으니 청춘을 상대하고 인연 맺기 어렵더라." 선생이 답한 시에 이르기를, "남계가 용의 못에 또 한 번 누웠으니 양산 선비 와서 읊어 옛 어진 이 추모하네.” 상자 속에 감춘 옥이 참으로 애석하구나. 일생의 영과 욕이 무슨 상관있을 것인가. 이 글을 해석하면 사제간의 깊은 의리 가히 알 수 있으리라. 서락재(徐樂齋), 사원(思遠)씨와 손모당(孫慕堂) 처눌(處訥) 제현(諸賢)과 함께 하여 도의를 갈고 닦아서 더욱 빛을 내고 또한 서당을 설치하여 열심히 가르치니 원근의 제자들이 날로 문(門)에 몰려와서 성심성의껏 강의하니 많은 사람 성공했네. 어가초적(魚歌樵笛) 그 자리가 시를 읊고 독서하는 장소로 변했으니 오로지 공(公)의 힘일레라. 이러한 것들을 참작하면 능히 갖춘 경륜 포부 완전함을 알 것이라. 아! 공(公)이시여. 빛나고 순박한 글 수량(修樑)의 그 재주로 사회의 필수 인물이 건마는 비록 일상사에 그쳤으나 그 어진 덕, 착한 행실 족히 후세의 사표가 되어 임 자년에 사림에서 시축(尸祝자리 마련코자 관부(官府)에서 몸을 부르니 방금(禁) 이 준엄하여 이루지 못했으니 그 한이 문득하구나. 공(公)의 세(世)가 언제이던가. 삼백 여년 지났구나. 지난 세월 아득하니 대도 또한 허물어졌네. 조근휘비(鳥葟絮飛 웅장(雄壯)하더니 면채연맥(免蔡燕麥)이 웬 말인가. 자손들의 깊은 감회 누구 아니 돌아보랴. 이로써 고향이란 반드시 공경커늘 하물며 평생 동안 기거한 곳이 아니든가. 이에 차마 그 터전 못 비워 놓아서 자손들이 의논하여 대의 흥폐는 운수이나 조상의 유복지가 이와 같이 황폐함은 자손들의 책임이라. 어찌 이일을 늦출손가?. 그에 복원하는 데는 물력(物)의 어려움이라. 우선 바삐 비를 세워 이곳을 자랑하고 한편으로는 자손들의 정성으로 추모지로 삼아 놓고 한편으로 열심히 후인들에게 전하고자 만약 이 대 불행하나 우리 소유 분명하며 길이길이 이 주인은 우리 집뿐일진대 거룩하고 착하구나. 이같이 결론지어 공의 후손 찬택, 진택, 세붕이 나에게 비문을 청 하거늘 나는 다만 문족(門)으로 참관은 못했으나 진심으로 소감이 남과 달라 참월을 무릅쓰고 이같이 기록하고 이어서 명하기를, 천추와 더불어 불행 없는 이 돌이어라. 무진 납월 상한(戊辰 臘月 上澣) 방예(傍裔) 호영(鎬泳) 근찬(謹撰) 3. 일야당(一也堂) 안효필(安孝弼)의 시 작자인 일야당(一也堂) 안효필(安孝弼)[1855~?]은 1882년(고종 19)에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 인물이다. 진사 안효필은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서 출생하였다. 선조 중 고려시대 상장군을 지낸 안방걸(安邦傑) 장군이 있다. 臺下寒流流入淵 晴宵近得月明先 대 아래 흐르는 찬물, 못에 흘러드니 晴宵近得月明先 맑은 밤, 밝은 달이 떠 있네. 臨鏡西來懐隱類 임경대가 서쪽에 있어 옛 선인 추억하고 蓬萊東望夢遊仙 봉래산이 동쪽에 보이니 노니는 신선을 꿈꾼다. 春暖沙鷗啼上下 봄이 따뜻하여 갈매기 울음 오르내리고 雲深園鶴舞翩遷 구름 깊어 학은 넘실넘실 춤을 추네. 南溪鈞叟歸何處 남녘 시내 낚시하는 늙은이는 어디로 갔나 惟有松間碧水連 솔숲 사이로 푸른 물만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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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칼럼, 물금지역의 갑술년 대홍수와 남평마을 이주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남평마을 남평마을은 남쪽의 대평원을 이루고 있는 위치를 상징하는 뜻에서 ‘남평(南平)’으로 불렀다. 현재의 남평마을은 1934년 갑술년 대홍수로 유실된 사지리(沙旨里 : 모래등) 사람들이 옮겨와서 이룬 마을이다. 사지리는 지금의 남평마을 서쪽 낙동강변 모래밭에 있던 마을로 조선 전기 경주김씨, 경주이씨 등이 들어와 형성된 마을이다. 1910년경에는 약 50여 호의 큰 촌락이었으나, 1934년 대홍수로 마을의 전체가 유실되었다. 낙동강 변에 위치한 마을로서 증산들판에 있다. 남평마을 서쪽으로는 낙동강을 따라 경부철도가 지나고, 그 길을 따라 호포와 물금으로 연결된 도로가 나 있다. 이 도로는 벚꽃나무 가로수가 있어 매년 봄 황산공원에서 벚꽃축제가 열린다. 동쪽으로는 남해고속국도와 경부고속국도를 잇는 중앙고속도로지선이 나 있고, 양산천이 양산시 동쪽과 경계를 이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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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특집, 이수태 작곡가, 와이뉴스 음반이사의 사랑과 용서작곡가 이수태 Y뉴스 음반이사의 신곡발표 ''사랑과 용서''를 설날 특집으로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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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엽기적인 그녀 촬영지 안내판의 문제점1. 히트 영화 엽기적인 그녀 촬영지인 오봉산 전망대 양산시 오봉산과 강원도 정선군에서 촬영한 히트 영화인 ‘엽기적인 그녀’ 촬영지는 오봉산 자락이 낙동강의 황산공원으로 뻗어내린 마지막 능선의 봉우리인 현재의 전망대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중요 장면이 나오면서 유명해졌다. 영화의 여주인공인 그녀(전지현)가 견우(차태현)에게 미안하다며 울면서 말한 내용은 영화의 명대사로 팬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견우야! 미안해! 나 정말 어쩔 수가 없나 봐. 견우야! 미안해! 미안해! 나두 어쩔 수 없나 봐. 나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나두 어쩔 수 없는 여잔가봐. 견우야! 미안해!” 엽기적인 그녀를 촬영한 양산시와 정선군의 관광 홍보 측면에서 차이점이 있다. 엽기적인 그녀 촬영지인 양산시에서는 제대로 활용을 못하고 있다. 양산시는 영화 촬영지 안내판을 제대로 설치하지 않아 지나가는 관광객이 찾아가기 힘들다. 반면 강원도 정선군은 타임캡슐공원을 설치하고 이곳의 도로명 주소를 ‘엽기소나무길’로 하여 능동적으로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물금읍 삼전무지개 아파트에서 원동면 화제리로 넘어가는 1022번 지방도에서 영화 ‘엽기적인 그녀’ 촬영지인 오봉산 전망대로 올라가는 등산로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 이정표는 700m로 표기되어 있고, 영화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가면 임경대가 나온다. 1022번 도로에서 좌회전하면 임경대 주차장이 나온다. 우측에 있는 작은 도로변 쉼터로 들어가면 주차할 수 있다. 커피파는 노점상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임경대 반대편으로 오봉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의 입구이다. 도로변에 영화 엽기적인 그녀 촬영지라는 안내 표지판이 있으면 지나가는 외지 관광객들은 전망대로 올라가 볼 욕구가 생길 것이다.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오봉산 능선의 송전 철탑이 나온다. 좌측으로 가면 절인 임경사, 오봉산 정상, 물금읍 시가지 방향 둘레길로 연결된다. 능선 길에서 우측으로 가면 영화 엽기적인 그녀 촬영지가 나온다. 안내 표지판은 전망대로 표기되어 있다. 초행자들은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오른쪽 능선으로 난 등산로는 가파르지 않고 완만하여 등산하기에 어렵지 않다. 조금 올라가면 산불감시 초소가 있고, 더 가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는 뷰 포인트도 있다. 산악 사고를 당한 산악인 추모비도 있다. 다시 능선 등산로 나와서 계속 내려가면 전망대라는 영화 엽기적인 그녀 촬영지가 나온다.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을 지나 앞으로 가면 영화 엽기적인 그녀 촬영지 안내판이 나온다. 오봉산에서 내려다 보면 황산공원과 낙동강이 잘 보인다. 영화 촬영 당시는 그냥 배추, 무, 딸기, 감자 등을 재배하는 밭으로 자연에 가까웠으며, 밭 주인이 아닌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 없었다. 현재는 황산공원, 황산베랑길 자전거 도로로 잘 정비되어 수많은 관광객이 드나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한 낙동강 정비사업 덕분에 현재의 187만 3천㎡(56만 8천 평) 규모의 거대한 황산공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낙동강 정비사업 당시 오근섭 시장은 양산천 정비사업도 국토부에 건의하여 국비로 정비하는 순발력을 보여줬다. 황산공원은 양산의 블루오션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경남도 제2호 지방정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앞으로 계속 개발하면 전국적인 명소로 탄생할 수 있다. 양산시는 황산공원 복합레저 사업비 총 76억 원을 투입해 수상 레저파크를 조성하고, 오토캠핑장 50면을 증설하는 한편, 어린이 놀이시설을 갖춘 가족공원을 조성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황산공원을 전국 최대 규모의 복합 레저사업과 휴식 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사업비 45억 원을 들여 길이 75m, 폭 8m의 수상레저 계류장을 설치해 황산공원을 수상레저의 메카로 육성한다. 부산 을숙도와 황산공원을 오가는 낙동강 생태탐방선을 관광선으로 확대하고 김해시, 부산 북구, 부산 강서구 등 인근 지자체와 협력하는 낙동강 협의체를 구성해 낙동강 생태탐방선 운행 등 수상레저 활성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한다. 2. 엽기적인 그녀 촬영지인 조국영 도예가 집 물금읍 동부마을의 조국영 도예가겸 향토사학자 집에서 ‘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촬영한 사실은 필자가 이번에 처음 밝히는 것이다. 조국영 도예가 겸 향토사학자는 부산요 포럼에서 중요한 논문을 연달아 발표하는 열정을 보이고 있다. 조선시대 부산 왜관에서 도자기를 만들고, 대마도에서 온 기술자들이 한국 도공보다 실력이 뒤떨어져 양산의 법기요, 김해 지역에서 활동하는 도공들이 차출되어 일본의 주문 도자기를 대신 만들었다. 부산 왜관에 설치되어 있던 부산요는 부산의 도예가나 관련 학자들은 위치도 잘 모르고, 요에서 나오는 도자기 파편을 발견한 사람도 없었다. 조국영 도예가는 일본에서 작품 전시회도 열고, 법기 도자기나 부산요 도자기를 심층적으로 연구를 해왔다. 문헌 연구를 통해 법기요나 부산요에 관한 독자적인 학술 논문을 발표해 왔으며, 현장 답사를 통해 부산요 도자기 파편을 최초로 발굴하는 성과를 올렸다. 도자기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도구도 발견하였다. 조국영 향토사학자는 양산의 고려청자 도요지, 조선시대 백자 도요지 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고 있다. 양산지역에서 발견된 유적지를 문화재로 등록하는 데도 주된 역할을 하였다. 양산의 역사 유적지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방대한 지식을 축적하였으며 다방면에 업적을 남기고 있다. 조국영 도예가겸 향토사학자는 필자에게 영화 ‘엽기적인 그녀’ 촬영에 대해서도 생생한 경험담을 얘기해줬다. 일반인들은 오봉산의 전망대에서 엽기적인 그녀를 촬영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조국영 향토사학자는 자신의 집, 집 앞의 1022번 도로변에서도 촬영했다고 증언했다. 자신의 집 옥상에서 오봉산 전망대를 올려보며 촬영했다고 알려줬다. 또한 황산공원 물금나루터 근처에서 원두막 장면을 촬영하였으며, 비오는 장면은 살수차를 동원하여 연출했다고 그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조국영 도예가의 집은 물금읍 동부마을로 물금 삼전무지개아파트 바로 앞에 있으며, 원동면 화제리로 가는 1022번 도로 왼쪽 밑에 있다. 집 앞의 1022번 도로에서 물금읍행정복지센터로 내려가는 작은 소로가 있다. 3. ‘엽기적인 그녀’의 인기 남자 주인공 차태현은 KBS 2TV 1박 2일 프로그램 출연으로 양산시를 2014년 3월, 2018년 10월 두 번에 걸쳐 방문하였으며, 원동면 순매원, 영포리의 자연스런 돌담장이 있는 집에서 촬영하면서 숙박하였다. 주된 촬영 장소는 원동면 영포리였으며, 출연자들의 숙소는 강윤학 물금농협조합장 자택이었다. 게임을 한 장소는 숙소 앞 논바닥에서 하였다. 필자는 1박 2일 촬영할 때 KBS PD의 특별 허락을 받아 숙소와 촬영장을 구경하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차태현이 영화 출연을 결정했을 때 매니저와 소속사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곽재용 감독이 딱히 히트작도 없고, 1993년 이후로 8년 가까운 휴식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차태현은 이 영화 출연료를 런닝 개런티로 계약을 하지 않아 엄청난 손해를 봤다. 여주인공 전지현은 요즘도 인기 스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영화 주제가로 신승훈이 부른 ‘I Believe’도 히트하였다. 인터넷 소설 『엽기적인 그녀』는 1998년 8월 PC통신 나우누리에 평범한 대학생이 ‘견우74’라는 필명(본명 : 김호식)으로 자신의 연애담 연재를 시작하면서 알려졌다. 연재를 마친 후에는 책으로 나와 판매 부수가 10만 부에 달했다. 인터넷 소설이 영화화되어 관객수 약 488만 명을 동원하였는데, 그 당시로는 대단한 히트였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외국에서의 인기도 대단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2002년 즈음에 ‘나의 야만적인 여자친구(我的野蠻女友)’라는 제목으로 수입되어 중국내에서 영화 한류 열풍의 클라이막스를 열었다. 본격적으로 한국 야만 시리즈가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다른 한국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은 전부 야만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게 된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이런저런 한국 영화들에 제목을 갖다 붙인 나의 야만적인 여자친구는 DVD로 총 6편 정도 출시되었다. 불법이라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수천만 장에서 1억 장까지 팔린 것으로 추산되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2006년도 중화권 설문조사에서 한국의 10대 상징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일본에서도 평이 좋아 일본 아카데미상 외국 영화 부문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이는 현재까지 한국 영화로는 유일하다고 한다. 4. 서리단길의 ‘엽기적인 그녀’ 안내판 물금읍 서부마을의 서리단길은 메인 도로인 황산로(물금읍행정복지센터 반대편쪽)에서 물금역방향으로 가다가 물금농협(물금중앙길) 직전의 오른쪽 작은 골목길인 화산길로 길이는 1km 정도 된다. 옛날 중심 도로였으나 지금은 작은 골목길로 변했다. 캠핑고래, 물금농협경제사업소, 농협창고, 농기계수리센터, 물금지구 우수저류시설과 주차장, 진리식당, 황산나루어탕 등이 있다. 서리단길 주변의 서부마을은 물금신도시 조성으로 낙후된 옛날마을로 남았다. 물금 신도시는 초고층 아파트와 넓은 도로망 건설로 현대 도시로 변모하였다. 반면 서부마을은 물금 신도시와 대조되는 발전이 정체된 마을로 남아 주민들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서리단길 주변의 가게, 식당 등은 상권 침체를 겪었고, 주차 공간이 없어 고객들이 불편을 겪었다. 현재는 주차 공간이 새로 생기고 상권도 활력을 찾고 있다. 화산길에 있는 상가, 식당들은 각자도생의 길에 들어섰다. 각 식당들의 자구노력으로 화산길 주변의 식당은 부활하고 있다. 화산길 주변의 가게, 식당 등의 활성화 신호탄을 쏘아 올린 곳은 진리식당이었다. 젊은 계층이 좋아하는 메뉴 개발로 고객의 관심이 증가하고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인터넷 SNS 홍보로 성공하였다. 작은 식당이지만 점심 시간에 고객들이 몰려 대기표를 받고 기다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서울에서 성공한 경리단길을 모방하여 서리단길이 탄생하였다. 젊은이 취향의 식당, 소품점, 사진관, 공방, 양조장 운영 등을 확대하고 있다. 2021년 양산시에서 ‘양산시장주민 참여예산’ 2억 5천만 원 지원하여 서리단길 트렌디 거리를 조성하고, 17면의 임시 공영주차장을 조성하였다. 서리단길이 포함된 서부마을은 2021년말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 뉴딜사업 예비사업지로 선정되었다. 양산시는 도시재생 뉴딜사업 예비사업지인 서부마을에 2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여 물금 전통막걸리 양조장 등의 마을기업 육성 사업, 마을 브렌딩 계획 사업을 진행하였다. 서리단길이 경남도 소상공인 활력사업에 선정되었다. 경남도가 주최하고, (재)경상남도경제진흥원이 주관하는 사업에 경남도비 6천만 원 지원을 받았으며, 전문 컨설턴트 진단 후 환경개선 및 마케팅 비용을 지원받았다. 서리단길에 영화 ‘엽기적인 그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실제 촬영지이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조국영 도예가의 집은 언급이 없다. 안내판을 수정해야 하며, 조국영 도예가의 집 앞에도 안내판을 새로 설치해야 한다. 1022번 도로변 안내판도 전망대로만 표기하지 말고 영화 ‘엽기적인 그녀’ 촬영지를 반드시 넣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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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태작곡가 ,와이뉴스 음반이사의 양산아리랑''추억을 푼다'' 양산 대종 건립기념 음악회 양산 아리랑/이수태.작사.작곡/노래.김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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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다방동과 차를 다루는 관청인 다방1. 다방동 지명의 역사적 유래 조선총독부가 1914년 3월 1일 시행한 부군면 통폐합(府郡面 統廢合)은 조선총독부령 제111호 ‘도의 위치·관할 구역 변경 및 부·군의 명칭·위치·관할 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1913년 12월 29일 공포)에 의하여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13도 12부 329군 -> 13도 12부 220군)하고, 이어서 4월 1일 각 도의 영에 의하여 각 군의 면을 개편하였다. 동·리의 정리도 1914년 3월~4월의 부군면 통폐합과 동시에 행해졌으나, 실제로는 부군면 통폐합 전후 1912년부터 1917년 사이 광범위한 기간에 걸쳐 시행되었다. 다방동은 본래 양산군 읍내면에 속해 다방리(茶房里)라고 불렸으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동으로 승격되어 다방동(多芳洞)이라고 하였다. 1918년 읍내면이 개칭된 양산면에 속하였다. 다방동은 차나무가 많은 곳으로 마을 이름을 다방(茶房)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총독부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마을 이름이 바뀌어 다방(茶房) 대신, 많을 다(多) 꽃다울 방(芳)으로 다방(多芳)이라 하였다. 향기가 많은 마을이라는 의미인데 차 향기와 연관 지을 수 있으나 본래의 차(茶)라는 의미는 소멸되었다. 총독부가 우리의 고유 문화를 말살하고 파괴하는 차원에서 마을 이름을 바꾼 것으로 유추된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법정리(동)에 행정 마을을 만들어 분동시킴으로써 다방동에 두 개의 마을이 생기게 되었다. 1979년 5월 1일 양산면이 양산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96년 3월 1일 양산군이 양산시로 승격되어 양산읍이 3개 동으로 분할되었는데, 그때 다방동은 중앙동에 속하게 되었다. 자연 마을로는 다방마을과 금촌마을이 있으며, 주요 지명으로는 다방삼거리, 당절, 승방골, 주막거리, 칠산, 황산, 차밭골, 패총터, 신강만리 등이 있다. 지명 중 다방삼거리, 차밭골 등은 차와 관련 있는 지명이다. 지명은 쉽게 바뀌지 않고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는 경향이 있어 지명을 통해 그 지역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 다방동은 조선총독부가 마을 이름을 강제로 변경했지만 지명에 다방삼거리, 차밭골 같은 이름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도 야생 차나무 군락지가 있는 마을이므로 원래의 고유 지명인 다방(茶房)으로 변경하는 게 필요하다. 민족 고유의 문화와 민족 정기 회복 차원에서 지명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명을 바꾸는 게 행정 공무원 입장에서는 번거로울지 몰라도 양산시민들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다. 2. 고려시대 차를 조달하는 관청인 다방(茶房) 양산의 다방동과 똑같은 명칭인 다방(茶房)이라는 차를 다루는 관청이 있었다. 다방은 고려시대 주요한 관청의 하나로 국가 행사를 치를 때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므로 차와 연관된 역사도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태조 17년부터 다방(茶房)이라는 관청이 등장한다. 왕실을 중심한 사례(四禮)와 각종 행사, 상원 연등회의(上元 燃燈會儀), 중동 팔관회의(仲冬 八關會儀) 등을 할 때 반드시 다방(茶房)이 집례(集禮)를 주관하여 다례(茶禮)를 행하거나 쌀(米), 면(麵), 차(茶), 차향(茶香), 차약(茶藥) 등을 부의(賻儀 : 상가에 부조로 보내는 돈이나 물품) 또는 하사(下賜 : 임금이 신하에게, 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물건을 줌)했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후손들에게 연등회와 팔관회를 성실하게 거행할 것을 당부하였다. 고려시대(936-1392)는 불교가 국교로서 팔관회와 연등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불교 행사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차 공양은 육법공양 중의 하나로 중시되었다. 국가의 중요 행사에 차가 많이 사용되고, 차를 마시는 다문화(茶文化)는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대중화되었다. 고려 때 예부(禮府)의 98종 의식 중에서 차(茶)를 내는 의식이 11번 나온다고 한다. 차 행사를 주관하는 다방(茶房)이 곳곳에 있었고 여기에서는 차뿐만 아니라 주과(酒菓 : 술과 과일)가 함께 나왔다. 왕이나 귀족, 승려, 고위 관리들만 차를 독점하지 않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차를 마시는 풍습이 전파되었다. 왕실 행사에서 사용되는 차를 조달하기 위하여 다방(茶房)이란 관청이 생겼다. 차를 파는 다점(茶店), 차를 재배하는 지역인 다소(茶所), 다촌(茶村)도 생겼다. 통도사의 차 공양에 쓰이는 차는 언양쪽의 다소촌(茶所村)에서 재배했다. 다소촌은 양산과 울주군의 경계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 차를 다루는 관청인 다방(茶房), 양산시 다방동의 조선시대 지명인 다방(茶房)은 한자어가 동일하다. 다방동에 현재도 야생 차나무 군락지가 있고, 지명에도 다방동 삼거리, 차밭골이 남아 있으므로 차와 연고가 깊은 동네이다. 조선총독부에서 강제로 개명한 다방동 한자 이름의 회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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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태작곡가, 와이뉴스음반이사의 하얀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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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태작곡가 , 와이뉴스음반이사의 몰래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