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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의병장 최흥식 선생과 두연대

기사입력 2023.02.01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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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진왜란 의병장 최흥식 선생

 

두연대지는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과 함께 화왕성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의병장 최흥식 선생이 자신이 거처하는 집터 곁에 지은 정자터이다. 현재 두연대는 터만 남아 있으며, 1997년 어곡리 4차선 도로 확장공사에 의해 옮겨진 두연대 유허비가 유산천 개울가 동편에 자리하고 있다.

두연대 유허비는 경주 최씨 양산종친회에서 190년 4월에 완공하였다. 두연대 유허비는 2002년 5월 10일 조성된 어곡주민공원에 있다. 어곡주민공원 옆으로 유산천이 흐르고 있으며, 유산천 위에는 보행자 전용 교량이 설치되어 있다. 공원에는 야외무대, 체육시설, 화장실, 실내 게이트볼장, 산책로, 어실교 등이 설치되어 있다.

최흥국은 자가 강후(康侯)고 호는 남계(南溪)로 1550년(명종 5) 4월 6일, 양산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경주로 고운 최치원 선생의 후손이다. 1588년(선조 21) 33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주, 화왕산, 팔공산 등지에서 대구의 손처약(孫處約). 손린(孫遴), 밀양의 손기양(孫起陽), 박수춘(朴壽春) 등과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최흥식 선생에 대한 자세한 일생은 이미 와이뉴스 화요칼럼에서 쓴 바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최흥국 선생은 공신 책봉을 사양하고 현재의 양산시 어곡동 지역으로 와 자신이 거처하는 집 곁에 두연대라는 정자를 짓고, 양산의 사호(四豪)라 일컫는 안근(安瑾), 이수생(李秀生), 이몽란(李夢鸞) 등과 함께 후학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나라가 왜적의 침입으로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홀연히 나서서 목숨 걸고 싸워 나라를 구하고, 전쟁이 끝난 다음 논공행상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대쪽 같은 선비였다.

 

두연대 유허비는 1997년 어곡동 도로 확장 공사할 때 위치를 어곡주민공원 안으로 이전하였다. 경주 최씨 재실인 두연재는 도로변에 있으며 주소는 어실로 215이다. 두연대 터를 확인하기 위하여 필자는 지난 1월 24일, 25일, 28일에 걸쳐 두연대 유허비, 두연대, 두연교를 답사하였다.

 

두연대 터가 유산천에 있어 두연재 뒤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옆에 있는 한국카센터의 이상곤 대표가 나와서 무엇을 조사하는지 물어보았다. 두연대 답사를 왔다고 하니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두연대는 1997년 도로확장과 두연교 건설로 옛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알려주었다. 두연대 터는 두연교 근처라고 알려주었다.

그 당시 하천 교량 공사와 옹벽 설치 때문에 바위들이 많이 파손되었다고 하였다. 문화유적인 두연대 터를 잘 보존하면서 공사를 할 수 있었는데 파괴되어 안타까웠다. 친절하게 설명해준 이상곤 대표에게 감사드리는 바이다. 현재 두연교와 주유소 사이 어곡공단 쪽으로 새로운 도로 개설 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두연교 건설은 1997년 12월 31일부터 2000년 2월 29일까지 2년 2개월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다. 공사에서 시행청은 양산시, 시공자는 대원종합건설(주), 설계자는 ㈜원방종합기술공사, 감독자는 박윤근, 준공검사관은 이상호였다. 두연대 터 훼손과 관련있는 건설사와 책임자들이다.

 

시행청인 양산시의 책임이 제일 무겁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한 역사적 위인에 대한 대접이 너무 소홀하였다. 유산천에 있는 두연대와 관련된 기암괴석 바위가 훼손된 것은 심각한 문제다.

 

2. 두연대유허비(斗淵臺遺虛碑) 내용

 

대저 산수의 볼만한 곳, 전배(前輩)님의 소거지所居地)로 비록 세월이 많이 흘렀으나 뒤에 사람이 추모하는 전해오는 유풍 여운을 보존하니 그 땅이 어디였나. 우리 족친 대대로 살아온 양산 고을 어곡동 두연대가 그곳이 분명할사. 우리 조상 선조 조에 남계 진사 경주 최공 휘함(諱)은 흥국(興國)이요, 자함(字啣)은 강후(康侯) 일사.

 

그곳을 사랑하여 처음에 점지하니 고운 선생 후예로서 조부님은 현감이요, 아버지는 참봉이라. 대대로 미(美)에 젖어 영상(英爽)한 자질이며 고결한 의지로서 정한강(鄭寒岡) 문인으로 도의 교육에 힘을 쓰고 성정(性情)을 함양하여 성현학(聖賢學)에 전심하여 능히 덕기(德器) 이루시어 장차 반궁 출입하여 국유추중(國儒推 重) 받자드니 그때가 불행하여 벼슬을 포기하고 시골에 숨으셨네.

 

임진왜란 때에 동지인 안공근(安公瑾)과 이공 수필(李公 秀弼), 이공 몽연(李公 夢鷰) 등이 결사보국 동맹하여 곽망우당(곽재우)과 더불어서 화왕진(火旺陳)전투에 출전하여 우수한 전략으로 적을 무찔러 큰 공을 이루었으니 혁혁한 그 사실이 『동고록(同苦錄)』에 실렸도다.

 

평난(平亂) 뒤에 대를 쌓아 두연이라 하니 그로 인한 형세 (形勢)로다. 그 가운데 거처하며 서사(書史)를 즐기셨고 한강께 시를 올려 이르기를, “하늘에는 솔개가 날고 깊은 못에 고기 뛰니 한 줄기의 참된 근원 나에게 잘 붙였네. 흰머리 슬프구나. 위수강 막혔으니 청춘을 상대하고 인연 맺기 어렵더라." 선생이 답한 시에 이르기를, "남계가 용의 못에 또 한 번 누웠으니 양산 선비 와서 읊어 옛 어진 이 추모하네.”

 

상자 속에 감춘 옥이 참으로 애석하구나. 일생의 영과 욕이 무슨 상관있을 것인가. 이 글을 해석하면 사제간의 깊은 의리 가히 알 수 있으리라. 서락재(徐樂齋), 사원(思遠)씨와 손모당(孫慕堂) 처눌(處訥) 제현(諸賢)과 함께 하여 도의를 갈고 닦아서 더욱 빛을 내고 또한 서당을 설치하여 열심히 가르치니 원근의 제자들이 날로 문(門)에 몰려와서 성심성의껏 강의하니 많은 사람 성공했네.

 

어가초적(魚歌樵笛) 그 자리가 시를 읊고 독서하는 장소로 변했으니 오로지 공(公)의 힘일레라. 이러한 것들을 참작하면 능히 갖춘 경륜 포부 완전함을 알 것이라.

 

아! 공(公)이시여. 빛나고 순박한 글 수량(修樑)의 그 재주로 사회의 필수 인물이 건마는 비록 일상사에 그쳤으나 그 어진 덕, 착한 행실 족히 후세의 사표가 되어 임 자년에 사림에서 시축(尸祝자리 마련코자 관부(官府)에서 몸을 부르니 방금(禁) 이 준엄하여 이루지 못했으니 그 한이 문득하구나.

 

공(公)의 세(世)가 언제이던가. 삼백 여년 지났구나. 지난 세월 아득하니 대도 또한 허물어졌네. 조근휘비(鳥葟絮飛 웅장(雄壯)하더니 면채연맥(免蔡燕麥)이 웬 말인가. 자손들의 깊은 감회 누구 아니 돌아보랴.

 

이로써 고향이란 반드시 공경커늘 하물며 평생 동안 기거한 곳이 아니든가. 이에 차마 그 터전 못 비워 놓아서 자손들이 의논하여 대의 흥폐는 운수이나 조상의 유복지가 이와 같이 황폐함은 자손들의 책임이라. 어찌 이일을 늦출손가?.

 

그에 복원하는 데는 물력(物)의 어려움이라. 우선 바삐 비를 세워 이곳을 자랑하고 한편으로는 자손들의 정성으로 추모지로 삼아 놓고 한편으로 열심히 후인들에게 전하고자 만약 이 대 불행하나 우리 소유 분명하며 길이길이 이 주인은 우리 집뿐일진대 거룩하고 착하구나.

 

이같이 결론지어 공의 후손 찬택, 진택, 세붕이 나에게 비문을 청 하거늘 나는 다만 문족(門)으로 참관은 못했으나 진심으로 소감이 남과 달라 참월을 무릅쓰고 이같이 기록하고 이어서 명하기를, 천추와 더불어 불행 없는 이 돌이어라.

 

무진 납월 상한(戊辰 臘月 上澣)

방예(傍裔) 호영(鎬泳) 근찬(謹撰)

 

3. 일야당(一也堂) 안효필(安孝弼)의 시

 

작자인 일야당(一也堂) 안효필(安孝弼)[1855~?]은 1882년(고종 19)에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 인물이다. 진사 안효필은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에서 출생하였다. 선조 중 고려시대 상장군을 지낸 안방걸(安邦傑) 장군이 있다.

 

臺下寒流流入淵 晴宵近得月明先 대 아래 흐르는 찬물, 못에 흘러드니

晴宵近得月明先 맑은 밤, 밝은 달이 떠 있네.

臨鏡西來懐隱類 임경대가 서쪽에 있어 옛 선인 추억하고

蓬萊東望夢遊仙 봉래산이 동쪽에 보이니 노니는 신선을 꿈꾼다.

春暖沙鷗啼上下 봄이 따뜻하여 갈매기 울음 오르내리고

雲深園鶴舞翩遷 구름 깊어 학은 넘실넘실 춤을 추네.

南溪鈞叟歸何處 남녘 시내 낚시하는 늙은이는 어디로 갔나

惟有松間碧水連 솔숲 사이로 푸른 물만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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