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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리 차문화 연구소장의 특별칼럼, 양산의 차문화

기사입력 2023.03.07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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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차 문화의 역사

                            양산차문화연구소 소장

지 미리

 

약력소개

양산차문화연구소 소장

통도사차문화대학원 연구소 연구원

부산대학교 박사과정

 

 

  우리 민족은 7세기에 음다 풍속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여러 가지 사료에서 확인된다.

『삼국사기』에 “차는 선덕여왕(632~647) 때부터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에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 공양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과 효명태자가 오대산 진여원에서 문수보살에게 날마다 차 공양을 올려 성불을 기원한 것이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흥덕왕3년(828년)에 “견당사로 갔던 대렴이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차 씨를 가지고 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고, 차는 이때부터 성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산은 낙동강하류 동편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신라초기에는 가야권의 문물이 교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가야유적이 북정동 고분과 다방리 패총 등에서 보이고 있고, 이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진한과 변한은 서로 섞여 살았으며 의복과 언어, 법속이 비슷하였다.”고 기록하였고, 양산의 고호(古號)는 탈해 이사금 시기 중엽부터 3세기까지 황산으로 불리다가 이후 문무왕 5년(665년)까지 삽라군 삽량주 삽량성으로 문무왕 665년 이후 정비된 지방 행정기관의 이름이 삽량주가 되었다. 경덕왕 16년(757년)에 한화정책(漢化政策)의 일환으로 향음표기 방식을 한자식으로 두자를 취하여 표기하여 삽량주가 양주(良州)로, 고려 태조 23년에 양주(梁州)로 개칭,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양산(梁山)이 되었다.  

   

  낙동강 하류에 자리 잡은 가야(현재 김해)는 일찍부터 음다 풍속이 있었다고 『삼국유사』 제2권 가락국기에 기록되어 있다. 양산 또한 가야(현재 김해 여다리) 차 시배지와 황산강(현재 낙동강)을 경계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증산리 야생차 군락지가 있다. 양산지역의 기온은 따뜻하고 낙동강의 맑은 공기와 함께 차나무가 잘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차를 마시는 것이 일반화되어 지배층에서는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고려시대 양주에는 차(茶)를 생산하는 다소(茶所)가 유명하였던 것으로서 차가 토산에 기록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또한 『통도사사적기』에 보면, 통도사에는 차를 생산하여 사원에 공납하는 다소촌(茶所村)이 있었다고 한다. 다소촌은 현재 행정구역으로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양산시와 울주군의 경계지점을 추정하고 있다  

 양산지역은 통도사 외에도 야생차 고차수 군락지인 증산리 일원과 다방리 일원이 있고, 법기리 창기마을에는 도요지와 양산 도공들이 있었다. 다방리 마을의 옛 주민들은 다방을 차밭골로 불리어져 왔을 만큼 차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이와 같이 양산의 차 문화는 어느 고장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고장으로서 우리나라 차 문화의 역사와 전통을 살려가야 할 지역이이라고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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