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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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칼럼,태풍 힌남노와 홍룡폭포태풍 힌남노와 홍룡폭포 1. 태풍이 휩쓸고 간 홍룡폭포 태풍 힌남노가 9월 6일 오전 4시 50분 거제에 상륙하여 7시 10분 울산을 거쳐 동해로 빠져나갔는데, 5일에 비가 꾸준히 내렸다. 바람은 심하지 않아 나뭇잎이 많이 떨어졌으나 큰 나무가 넘어지는 건 거의 없었다. 힌남노는 6일 0시경 제주에서 40km 떨어진 해상을 지나 북상했다. 이때 중심기압은 945hPa(헥토파스칼)로 태풍 강도로 치면 ‘매우 강’ 수준이었다. 한반도로 가까이 다가오며 기압이 떨어져 거제 인근에 상륙할 때 중심기압은 955.9hPa을 기록했다. 기상청과 각 언론에서 태풍에 관한 정보를 계속 제공하며 국민들에게 피해가 없도록 당부하였다. 역대 최고라고 예고되었으나 막상 거제에 상륙했을 때는 위력이 다소 약화되었다. 1959년 태풍 ‘사라’(951.5hPa), 2003년 ‘매미’(954.0hPa)에 이어 세 번째로 강한 태풍이었다. 태풍은 열대성 저기압이라 중심기압이 낮을수록 주변 공기를 더욱 강하게 빨아들인다고 한다. 양산지역에서는 사전 대비 차원에서 지하차도, 상습 침수지 등 위험 지역의 교통을 통제하고 도시철도 운행, 시내버스 운행을 중단하였다. 홍룡폭포는 양산팔경 중 제4경으로 접근성이 좋아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인기 관광지라 할 수 있다. 홍룡폭포는 양산시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잘 알려져 천성산 등산객도 필수적으로 방문하는 코스다. 홍룡사에는 주차장이 크지 않지만 홍룡사 계곡 입구에 큰 주차장이 있어 대형 버스도 주차 가능하다. 종 모양의 화장실도 있고, 쉼터 정자, 운동기구 등이 잘 갖춰져 있다. 홍룡폭포는 사계절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폭포로 겨울철에는 폭포가 얼어붙어 빙벽을 형성하여 볼거리를 제공한다. 홍룡폭포가 특히 장관을 이룰 때는 장마철, 비가 많이 온 후, 힌남노처럼 태풍이 내습할 때이다. 태풍이 양산을 지나가고 비도 거의 내리지 않는 오전 7시 40분쯤 출발하여 홍룡사에 도착하여 폭포가 있는 다리로 올라갔다. 무지개 다리 위에서 보이는 2단 폭포, 3단폭포는 엄청난 수량의 물이 굉음을 내며 계곡으로 흘러갔다. 이어서 상단 폭포로 올라가니 마치 비가 흩날리는 것처럼 물이 쏟아져 내렸다. 밤새 천성산에 내린 물이 흘러 내려왔기 때문에 폭포의 물 색깔은 약간 황토색이었다. 홍룡폭포의 특성을 잘 알기에 우비를 입고 갔다. 우산을 쓰고 가면 폭포에서 이리저리 흩날리는 물과 바람 때문에 옷이 전부 젖게 된다. 그리고 우산 때문에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도 없다. 우비를 입어 물벼락을 맞지는 않았으나 우비가 커버하지 못하는 정강이 아래 발목 부분은 바지가 젖었다. 사진 찍기 좋은 아치교 위에 서면 정통으로 물벼락을 맞는다. 왼쪽 바위에 폭포수가 부딪혀 날리는 물도 많다. 폭포 옆 관음전으로 올라가려면 물세례를 통과해야 한다. 오른쪽 불상 앞으로 가면 물벼락을 피할 수는 있으나 폭포를 제대로 찍을 수 없다. 장소를 옮겨가며 폭포를 다각도로 찍었다. 우비에 붙은 모자를 쓰지 않았더니 머리카락이 다 젖었다. 이렇게 많은 물이 떨어지는 폭포를 감상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절에서 위험하다고 폭포 출입을 차단하였다. 아침에 홍룡폭포를 구경하고 저녁 6시에 다시 폭포로 갔다. 아침과 저녁의 폭포 수량을 비교하기 위해서 하루에 두 번 방문했는데, 저녁에는 수량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웅장한 폭포의 자태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2. 홍룡사와 홍룡폭포 안내문 절 입구에 홍룡사와 홍룡폭포 안내판이 있다. 홍룡사 창건 유래, 관음성지 홍룡사, 홍룡폭포에 관해 해설하고 있다. 맞춤법, 띄어쓰기가 틀린 곳이 있지만 원문 그대로 옮겼다. 내용에 관해서도 논란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 있지만 그대로 인용하기로 한다. 다음은 필자의 주장이 아니라 홍룡사 측의 주장이다. 안내판의 한자는 한글로 쓰고 한자는 괄호 속에 넣었다. 요즘은 한자를 모르는 한글세대도 많으므로 안내판을 다시 만들어야 하겠다. 홍룡사 창건 유래는 다음과 같다. 천성산 홍룡사(虹龍寺)는 신라 제30대 문무왕 13년(673)에 원효 스님께서 낙수사(낙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송고승전』에 의하면 원효 스님께서 중구 당나라 태화사 승려들이 장마로 인한 산사태로 매몰될 것을 예견하고 “해동원효 척판구중(海東元曉 擲板救衆)”이라고 쓴 현판을 날려 보내 그들을 구해준 인연으로 천 명의 중국 승려가 신라로 와서 원효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이에 원효 스님께서는 천성산에 89암자를 지어 대중을 수용하였고, 천 명의 대중은 천성산 상봉(화엄벌)에서 원효 스님의 『화엄경』 강설을 듣고 모두 득도했다. 당시 89암자에서 정진하고 있는 대중을 운집하기 위해 큰 북을 사용했는데 그 북을 매달아 두었던 집북재와 화엄경을 설법하던 화엄벌이 지금도 남아 있다. 조선 제14대 선조대왕 때까지 영남제일선원으로 납자의 선불장이 되어왔던 홍룡사는 천불전(千佛殿), 천불선전(千佛禪殿), 관음전(觀音殿), 나한전(羅漢殿), 시왕전(十王殿), 천성루(千聖樓), 향로전(香爐殿), 삼성각(三聖閣), 범종루(梵鐘樓), 수월당(水月堂), 강송당(講頌堂), 불이문(不二門), 천왕문(天王門), 일주문(一柱門), 노고당(老姑堂) 등 천성산 제일 대가람이었으나 임란병화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현재는 대웅전, 무설전, 종각, 선원, 요사채, 관음전 등 전각과 당우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홍룡사에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관음보살 친견 설화가 전해지고 있어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는 관음성지라고 한다. 관음성지란 관세음보살님의 상주처로서 중생들의 기도에 응답하는 곳이다. 무설전에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이 봉안되어 있고, 백의관음이 봉안된 관음전이 있다. 홍룡폭포에는 33관음보살님 중에 폭포에서 현현(顯現)하는 낭견관음 보살님이 계신다. 『보문품』 게송에 “낭견관음을 염하면 불도가니가 변하여 연못이 된다”는 말씀이 있는데, 벼랑에 앉아서 용을 바라보는 형상을 하고 계시는 보살님이 낭견관음보살님이다. 천년동안 감로수를 내려주는 폭포에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시며 기도하는 중생들의 원을 이루어 주시고 계시는 것이다. 홍룡사 경내에 있는 홍룡폭포(虹龍瀑布)는 천룡(天龍)이 폭포 아래에 살다가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폭포는 3층 비류가 흘러내리는데, 상층은 높이가 80척이요, 중층은 46척, 하층은 33척이다. 깍아 세운 듯한 바위가 위풍당당하고 흐르는 물의 기세는 하얀 눈과 같아서 그 풍광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기암괴석이 폭포수가 떨어지는 뒷면에 있어 물이 떨어지는 물이 바위에 부딪히면 물보라가 사방으로 날아 퍼지니 옥을 뿜어내는 듯한 구슬이 튀어나오는 듯하다. 암벽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은 천자형(川字形)이고 푸른 이끼는 고색창연하게 절벽에 살아 있다. 지금도 청명한 날이면 오색이 찬란한 무지개가 하늘로 솟는다. 3. 홍룡사 계곡과 편백나무 홍룡폭포를 구경하고 홍룡사 입구 계곡으로 내려와 오른쪽으로 나 있는 원효암 가는 등산로로 올라갔다. 오른쪽 계곡은 엄청난 물이 요동치며 흘러갔다. 등산로 옆에 텐트가 바람에 날아가 망가진 게 보였다. 계곡 옆을 보니 텐트가 두어 개 보였다. 평시에 이곳에 텐트를 치고 장기 거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태풍 예보로 위험한데도 철수하지 않은 사람들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오른쪽 계곡의 흘러가는 물을 사진 찍었는데, 속도도 빠르고 수량도 많았다. 홍룡사 계곡 입구에서 원효암 방향으로 100m 지점에 편백나무 군락지가 보여 사진을 찍었는데, 해가 구름에 가려 숲은 약간 어두웠다. 원효암 올라가는 등산로의 왼쪽으로 도랑을 만들어 배수가 잘 되었다. 양산시 산림과에서 등산로 관리를 잘 하는 것으로 보였다. 등산로 한 곳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계곡으로 가로지르는 도랑이 돌과 낙엽에 막혔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막힌 돌을 치우고 낙엽도 걷어내니 문제가 해결되었다. 홍룡사 계곡 입구에서 원효암 방향으로 700m 올라가니 대규모 편백나무 군락지가 나타났다. 여기에서 원효암 까지는 1.8km를 더 올라가야 한다. 마지막 원효암 구간은 가파른 코스다. 홍룡폭포 구경하고, 홍룡사 계곡 입구 주차장에서 이곳까지만 걸어와도 하루치 운동량으로 적당하다. 군락지 오른쪽으로 등산로가 있고, 숲속 한가운데로도 등산로가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편백나무 숲속에서 제대로 된 힐링을 할 수 있었다. 태풍 힌남노 덕분에 홍룡폭포도 구경하고 홍룡사 계곡, 편백나무 군락지도 볼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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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 천성산양조장 100년 역사의 내력천성산양조장 100년 역사의 내력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100년의 전통을 이어가는 천성산 쌀막걸리 양산시 상북면 석계리에서 100년의 역사를 이어 오고 있는 ‘천성산양조장’은 몸에 이롭고 맛있는 막걸리를 생산하여 인기를 끌고 있다. 한 기업에서 100년 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아니고 주인은 바뀌었지만 100년 역사의 찬란한 양조장 문화는 여전히 살아 있다. 상북면에서 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천성산양조장’은 2009년 이강식 대표가 상북양조장을 정진성 씨로부터 인수함으로써 현재까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이강식 대표가 인수한 후 제조시설을 재정비하고 2010년 4월 13일부터 막걸리 사업을 재개하였다. 천성산막걸리의 100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식민지 시절인 1920년대부터 양조장 사업이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천성산양조장’의 전신인 ‘상북양조장’을 경영한 사람은 상북농협조합장을 지낸 정진성 씨로 이미 고인이 되었다. 정진성 씨는 장인으로부터 양조장 사업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천성산양조장’의 역사 내력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필자가 최초다. 상북농협은 1972년 5월 11일 상북단위농협으로 출범하였으며, 초대조합장은 김재복 씨였다. ‘상북양조장’을 경영하였던 정진성 씨는 1987년 8월 2일 상북농협 제6대 조합장으로 재임하였다. 정진성 조합장은 1990년 3월 3일 초대 민선 조합장 선거로 당선되어 제7대 조합장으로 취임하였다. 1994년 2월 4일 제8대 조합장으로 당선되어 1998년 2월 3일까지 재직하였다. 정진성 조합장은 제6대~제8대 조합장으로 재직하였으며, 초대 민선 조합장으로서 상북농협의 초창기 발전 기반을 확고하게 한 업적을 남겼다. 한편 정진성 씨는 양산문화원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상북양조장에서 천성산양조장으로 주인이 바뀌었지만 100년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정치인들은 정권을 잡으면 전임자의 흔적 지우기에 나서고 역사도 말살하려고 한다. 기업인들의 마인드도 비슷해 기업을 새로 인수하면 기업의 이름도 바꾸고 창업자의 성과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천성산양조장을 경영하는 이강식, 김미자 부부는 100년 전통을 말로만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전 주인과 창업자를 존중하며 사업을 해나가고 있다. 양조장 간판에서 이런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창업자가 만든 ‘상북양조장’이라는 간판을 떼지 않고 그대로 남겨놓아 필자는 감동을 받았다. ‘100년 전통 천성산 주조장’ 간판 아래 세로로 쓰인 작은 ‘상북양조장’이라는 옛 간판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백년의 전통을 이어가는 또 다른 모습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 외부인들은 볼 수 없다. 막걸리를 만드는 중요한 핵심 재료는 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는 물을 우물을 통해 공급했는데, 100년 된 우물이 양조장 안에 있다. 외부에 드러나지 않고 우물은 뚜껑으로 덮여 있고, 간이 창고로 물품을 넣어두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어 방문객들은 볼 수 없다. 필자가 구경한 우물은 깊이가 꽤 깊었다. 천성산 주조장의 우물은 천성산에서 흘러 내려온 깨끗한 지하수로 술맛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강식 대표가 새로 인수한 후에도 100년 된 우물의 물을 사용하여 막걸리를 제조했는데,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지하 150m암반수를 사용하고 있다. 막걸리 생산량이 점차적으로 증가하면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강식, 김미자 부부는 새로운 상호를 구상하면서 양조장 근처에 있는 천성산을 떠올려 작명을 하였다고 한다. 천성산양조장은 지역의 큰 행사에 막걸리 협찬을 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가 가장 감명깊게 천성산막걸리를 본 것은 2016년 천성산 일출행사 때였다. 천성산 정상의 해맞이 행사장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에 일찍 올라와 추위에 떨며 한 잔 마시는 천성산막걸리는 이름 때문에 더욱 운치가 있고 기분이 좋았다. 현재는 습지 보호 때문에 일출 행사는 중단되었다. 천성산은 양산의 진산으로 양산시민들에게 친근한 산인데, 해발 922m로 아주 높아 양산의 동서남북에서 잘 보인다. 천성산의 대부분은 상북면과 하북면에 걸쳐 있는데, 천성산 주조장은 상북면 소재지인 석계리에 있다. 양조장 앞에서 동쪽으로 보면 바로 코앞에 천성산이 우뚝 솟아 있다. 상북면 원적산 봉수대에서 천성산 화엄벌로 가는 임도가 있다. 상북면 대석리 홍룡사를 거쳐 원효암, 천성산, 화엄벌로 가는 등산로가 다양하게 있다. 2. 천성산양조장의 새로운 100년 시작 ‘천성산양조장’은 경남의 막걸리 제조업체 중 유일하게 100년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소금강산이라 불리는 천성산 수맥의 청정수를 사용하여 기술과 정성으로 술을 빚어 양산시민, 막걸리 애호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강식 대표는 양조장을 인수하기 전 부산에서 막걸리 도매업, 양조장 사업을 한 경험을 살려 천성산막걸리의 품질관리를 하고 있다. 지적 재산권으로 ‘본탁’은 상표 등록이 되어 있다. 본탁은 탁주의 본가(本家)라는 의미로 작명하였다. 좋은 재료, 좋은 물을 사용하여 전통방식으로 영양분이 풍부한 막걸리를 생산하고 있다. ‘천성산양조장’은 과거 100년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미래의 새로운 100년을 내다보며 사업을 해나가고 있다. ‘천성산양조장’의 탁주 생산 품목은 ‘양산 우리쌀 천성산쌀막걸리’, ‘본탁 양산 천성산생막걸리’, ‘울금 노랑막걸리’ 세 종류이다. 울금 노랑막걸리는 울금 분말(고형분)을 0.12% 포함하고 있다. 울금은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신이 내린 식재료로 슈퍼 푸드로 각광받고 있다. 울금은 함앙작용, 항균작용이 뛰어나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웰빙식품이다. 울금은 술과 섞으면 누런 금빛으로 변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도 카레의 주원료로 알려져 있는 강황(울금)을 먹는 인도인들의 치매 발생률이 미국의 4분의 1에 불과하여 현대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울금막걸리는 모세스 이대섭 대표가 특허를 취득하여 천성산양조장과 함께 연구·개발하여 생산에 성공하였다. 울금이 들어가기 때문에 생탁보다는 가격이 약간 비싼 편이다. 쌀막걸리가 1,200원대인데, 울금막걸리는 1,500원 정도로 유통되고 있다. 울금노랑막걸리, 천성산생막걸리는 동남아에 수출한 실적을 갖고 있다. 천성산막거리 제품 용량은 750ml, 알콜도수는 6도로 생산하고 있다. 농협하나로마트에 납품하는 막걸리는 국산 쌀을 사용해야만 하는데 브랜드는 ‘천성산쌀막걸리’이다. 수입산 쌀, 밀가루로 만든 막걸리 브랜드는 ‘본탁 양산천성산생막걸리’이다. 천성산양조장의 이강식 대표에 의하면 단골 고객이 많아 양조장을 직접 방문하여 사가는 고객이 많다고 하였다. 양조장이 위치한 석계리는 상북면 소재지로 주민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다. 양조장 바로 앞은 석계전통시장이 있으며, 4일, 9일에는 전통 5일장이 열린다. 천성산양조장의 전신인 상북양조장이 상북면 소재지에 자리잡은 연유는 일제 식민지 시절 정한 주세령 때문이었다. 일제는 1916년 주세령 시행규칙을 통해 ‘부·군·도청 소재의 부·면 또는 조선총독이 지정한 시가지 이외의 장소에 주류 제조장을 설치하고자 하는 때에는 면허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일제가 양조장을 시가지에 둔 이유는 주세를 효율적으로 걷고 쉽게 단속하기 위해서였다. 석계전통시장은 농림축산식품부의 일반농산어촌개발사업인 상북면소재지 종합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장옥, 화장실, 소공원, 정자, 음수대 등이 설치되어 시골장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기존의 상설 가게들이 많으며, 5일장이 열리면 외지 상인들이 장옥 바깥에 천막을 설치하고 난전을 벌인다. 양조장 근처에는 단독주택과 상가들이 많으며, 바로 옆에 한성강변타운아파트, 동우강변타워2차아파트가 있고, 근처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있어 완공되면 석계전통시장의 이용자가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천성산양조장’ 옆집인 우정식당은 40년 역사를 자랑하는 맛집으로 된장찌개, 메기매운탕 등을 먹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가까운 곳에 있는 임진강식당은 매운탕, 두부전골이 유명하여 방문객이 많다. 3. 천성산양조장 대표 부부의 부창부수 이강식·김미자 대표 부부는 부부 일심동체(一心同體),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고사성어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양조장 사업은 대표 혼자 하기에는 벅찬 사업으로 부부가 힘을 합쳐야만 원활히 돌아갈 수 있다. 부부 포함하여 직원은 4명으로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다. 김미자 씨는 양조장 사업은 아무나 하기 힘든 3D 직종이라고 하였다. 탁주 제조업은 행정구역 단위의 지역제한이 해제되어 무한경쟁을 해야 하므로 블루 오션이 아닌 레드 오션이다. 전국 유통망을 가진 대형업체의 막걸리인 국순당, 서울탁주, 배상면주가, 포천일동막거리 등이 지역으로 들어와 유통되고, 특히 양산은 이웃 부산의 기찰생탁주·금정산성토산주막걸리, 울산의 태화루 등 규모가 큰 막걸리 업체 제품들이 진입하고 있어 생존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양산에는 천성산막걸리와 물금막걸리 두 업체가 지역 시장을 고수하고 있다. 천성산막걸리는 양산시농수산물종합유통센터, 농협하나로마트, 양산기장축협하나로마트, 양산의 각 지역 서원유통 탑마트에 납품하고 있다. 양조장 사업에 신규 진입하여 성공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한다. 요즘 막걸리를 선호하는 젊은 계층이 증가하는 추세이므로 막걸리 고유의 특성을 살린 소규모 업체로 경영하는 것은 어느 정도 생존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양조장을 고객이 직접 찾아올 수 있도록 막걸리 제품의 매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마케팅 전략에서 Push 전략이 아닌 Full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유통망을 구성하고 각 대형 마트마다 제품을 배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비용도 많이 소요된다. ‘본탁 천성산생막걸리’가 2014년 8월 경상남도 품평회에서 최우수 명품주(名品酒)로 선정돼 술 관련 국내 최고 권위의 ‘2014 대한민국 우리 술 품평회’에 출품된 바 있다. 100년 전통의 천성산생막걸리의 맛을 복원해 내기 위해 한국 전통방식 그대로 빚은 누룩으로 만든 막걸리로 경남도 최우수 명품주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부부는 바쁜 틈틈이 주류 관련 교육을 이수하였다. 안주인 김미자 씨는 2015년 7월 21일 신라대학교 ‘영남권주류안전관리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2015년 주류 위생 및 안전관리 교육’(식품의약품안전처 주류안전관리기획단장)을 이수하였다. 이강식 대표는 2015년 8월 17일 신라대학교 ‘영남권주류안전관리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주류제조업체 안전관리 분석·실습 역량강화교육(기관장 김미향)을 이수하였다. 김미자 씨는 2015년 11월 20일 신라대학교 ‘우리술전문인력양성기관’에서 ‘전통주 막걸리 전문가 양성과정’에 6월 12일부터 11월 20일까지 총 150시간 교육과정을 이수하였다. 김미자 씨는 2016년 11월 4일 ‘국세청 주류면허지원센터’에서 실시한 ‘양조기술 교육과정(2016.10.24.~11.4)’을 수료하였다. 김미자 씨는 2013년 동원과기대 여성리더 2기 과정을 이수할 때 처음 알게 되었다. 조별 과제 발표를 해야 수료를 하는데, 과제 발표를 담당한 필자의 연구소로 찾아와 주제 선정, 과제 작성 방법 등에 관해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열의를 갖고 있었다. 김미자 씨는 2018년부터 양산시 동면 새마을부녀회 회장으로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새마을부녀회는 전국 조직으로 중앙, 시도, 시군구, 읍면동, 마을까지 단위조직을 갖추고 있는 단체로서 지역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동면새마을부녀회는 기금을 마련하여 불우이웃돕기 등에 나서고 있다. 과거에 바르게살기위원회, 여성자율방범, 여성팔각회, 범죄피해자지원센터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현재는 호포새동네 개발위원, 마을지킴이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요즘 시골마을에 젊은이가 없어 일손이 부족하다. 마을경로회 회장의 요청으로 경로회 특별회원으로 가입하여 총무를 맡아 봉사하고 있다.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이강식·김미자 부부가 생산하는 100년 전통의 천성산막걸리는 품질도 좋고 맛도 뛰어나 단골 고객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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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땅을 기부한 부자 덕분에 단합이 잘 되는 백동마을1. 5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 마을과 인물 천성산 자락에 위치한 양산시 소주동에 있는 백동마을은 5백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유서깊은 마을로 유명하다. 마을에서 천성산을 올려다보면 높은 산 바위 벼랑에 마치 제비집처럼 붙어있는 미타암이 잘 보인다. 미타암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기도발 잘 받는 도량으로 양산시민 뿐만 아니라 부산시민, 전국 각지에서 불자들이 모여든다. 천성산의 깊은 계곡의 기암절벽을 타고 흐르는 물은 곳곳에 멋진 폭포를 만들고, 물줄기는 마을 한가운데를 흘러 혈수천을 이룬다. 원적암 상류에서 취수된 계곡 물은 마을주민들의 식수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백동소류지에 모인 물은 농업용수로 이용된다. 백동마을은 웅상지역에서 가장 오래 된 마을 중의 하나이며, 인물도 많이 태어난 동네로 알려져 있다. 양산의 진산인 천성산의 정기를 직접 받고,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인 미타암의 기도 원력을 받기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훌륭한 인물이 태어날만한 명당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닌 마을이지만 백동마을의 지도자들은 2세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웅상에서 서당이 제일 먼저 개설된 곳으로 정평이 나있다. 옛날부터 웅상지역이나 울주군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백동마을에 가서 글 공부했다는 자랑을 하지 말라는 말이 회자되었다고 한다. 백동마을의 울산 박씨 문중에서 사재로 정사를 건립한 후 훈장을 두고 후세 교육에 힘썼다. 글공부를 많이 한 선비들은 과거시험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오직 인재양성에만 신경을 썼다. 조선시대 숭덕전 참봉을 지낸 박상옥 초대 훈장, 초시에 급제하고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후학을 길러낸 박수묵 훈장, 여러 문집을 발간한 박한묵과 박시현이 벼슬에 한 눈 팔지 않고 정사의 훈장으로 오로지 후진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천년고찰 미타암이 가까이 있어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왔으므로 백동마을과 인연이 깊은 스님들이 많다. 성수 스님(이성수)은 해인사 주지, 조계종 총무원장, 해인총림방장을 역임하면서 팔만대장경 보존을 위해 일제 때 옥고까지 치렀다. 태흥 스님(김태호)은 미타사 주지, 통도사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불교 방송국을 설립하였고, 캐나다로 가 사찰을 건립하고 해외 포교에도 노력하여 성과를 올렸다. 서운 스님(김건욱)은 밀양 석골사 주지를 역임하고 자은사를 창건하였다. 백동마을 출신의 정치인으로는 박봉수와 성계관은 도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박일배 시의원은 양산시 최초의 5선 시의원으로 활동하으며, 과거에는 양산시의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백동마을 당산나무 바로 옆에 있는 사회복지법인 한빛어린이집은 박일배 시의원이 설립하였다. 박봉수 씨는 웅상지역 발전에 기여한 최대의 공로자라 할 수 있다. 박봉수 씨의 12대 조부 박지영 씨는 1500년대 초에 울산에서 웅상의 명곡으로 정착하였다고 한다. 백동마을에서 태어난 박봉수 씨는 동아대 법대 졸업, 개운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였다고 한다. 초대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경남도의원을 역임하였다. 1991년 웅상지역의 발전에 장애 요소인 환경보존지역 해제, 수원보호구역 지정계획 취소에 공헌, 소주공업지구 개발, 웅상지역 아파트 식수문제 해결, 명동공원 조성에 기여 등의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2. 백동마을 당집과 당산나무 백동마을에는 440년 된 느티나무인 당산나무가 있다. 당산나무 옆에는 당집이 있는데, 옆으로 혈수천이 흐르고 있다. 최장호 통장의 말에 의하면 혈수천이 과거에는 흐름이 달랐는데, 치수사업을 통해 현재처럼 정비되었다고 한다. 당산나무와 당집은 마을 주민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당산나무 일원은 ‘백동 어린이공원’으로 근처에 있는 백동초등학교 학생들의 놀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 학교를 오갈 때 등학교 길의 길목에 있어 반드시 거치는 필수 코스다. 하교할 때는 학원다니는 학생들이 학원차량이 올 때까지 잠시 쉬는 정류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물론 어린이 뿐만 아니라 인근 주민, 어르신들의 쉼터 역할도 하고 있다. 마을의 당집과 당산나무가 마을의 구심체 역할을 하고 주민과 학생들의 이용도가 이렇게 높은 곳도 드물 것이다.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쌈지공원을 만들어 주민 휴식과 화합, 공동체 활동 증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양산의 전통마을 중에서 백동마을처럼 당산나무가 무성하게 잘 자라고, 어른들의 쉼터와 운동기구를 잘 갖추고, 백동 어린이공원까지 동시에 조성하여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찾는 당산나무 공원은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들다. 마을의 당산제는 정월대보름날 아침 7시에 지낸다고 한다. 제관으로 박일배 시의원, 노인회장 등 마을 유지들이 참석하고 있다. 최장호 통장에게 당산제 사진을 달라고 하니 당산제 제물 준비하고 행사 진행하기 바빠서 사진 찍을 틈이 없었다고 한다. 앞으로는 소중한 행사에 사진 담당자를 지명하여 사진을 찍어야 하겠다.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백동제당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산시(梁山市) 웅상읍(熊上邑) 소주리(召周里) 소재(所在) 백동(栢洞)마을 줄기찬 천성산(千聖山) 아래 터를 잡아 5백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로써 선대(先代) 행적이 미상(未詳)하여 기록(記錄)치 못함이 많지만 본 마을은 원래 백씨(白氏)가 뿌리를 시작하여 해마다 마을에 수호목으로 정월대보름을 기하여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는 망월당산제를 지내 왔고 음력 6월(六月)에는 그해 풍년을 기원하는 풍년제를 정성을 다하여 모셔오다가 그후 어느 해(미상)부터 정월 망월제만 거행하여 왔다. 그러다가 병신(丙申, 1956년) 4월(四月) 15일(十五日)에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 모금으로 목조 건물로 당산신(堂山神) 제당을 건립하여 마을의 평온을 더욱 제사하였다. 세월이 흘러 제당이 붕괴 위기에 놓여서 경신(庚申, 一九八0年) 8월(八月) 10일(十日) 동민의 새로운 정신과 정성을 모아 초라하게 보르크 구조물인 제당을 개축하여 수로하여왔다. 우리마을 조상들의 얼과 체취가 살아숨쉬고 전통적인 귀중한 문화(文化)라 생각하며 이를 잘 보존하고 가꾸어 후세에 길이 물려주어야 한다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을 전마을 주민이 통감하였기에 많은 마을주민과 기업체에 의존 협찬을 하여 철근 콘크리트 구조이지만 옛날 문화적 미각을 최대한 살려 병자(丙子, 一九九六年) 양(陽) 10월(十月) 11일(十一日)(陰 八月 二十九日) 十二時(12시)에 준공을 보았습니다. 오직 이 당산신(堂山神)을 높고 적조깊은 듯으로 모신다면 영구이 썩지 아니하고 긴 세상에 남은 음덕이 두터워지리라.” 백동제단비의 비문은 박정호씨가 지었다고 한다. 박정호 씨는 백동마을 새마을 지도자로 활약하면서 마을 발전에 기여하였다. 백동마을 주민들은 회야강을 건너가야 주요한 볼일을 볼 수 있었는데, 장마가 지거나 폭우가 내리면 회야강을 건너가지 못하고 고립되어 생활의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새마을 지도자인 박정호 씨가 쌀 20가마를 양산군 불우이웃돕기에 기증하며 다리를 놓아달라는 열성적인 노력을 한 덕분에 정부 지원으로 백동다리가 놓였다고 한다. 3. 백동마을 백공제단비와 박씨 할머니 불망비 현재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주민들간에 단합이 잘 되고, 잘 사는 마을이 된 백동마을에는 역사적인 두 명의 인물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두 인물의 공로를 각각 기리는 비석이 있다. 백공제단비(白公祭壇碑)와 박씨당(朴氏堂) 할머니 불망비(不忘碑)가 바로 주인공이다. 백동(栢洞)마을은 원래 백홈마을이라고 불렀다. 500여 년 전 이 마을에 백씨(白氏)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랫들(지금의 사평마을)에 농사를 지으려고 잣나무로 만든 수로 홈통 백 개를 이어 농업용수로 사용하였기에 백홈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일제 식민지 시절 마을의 고유한 이름이 한자화 하면서 잣나무와 연관된 백명(栢椧) 또는 백동(栢洞)으로 바뀌었다. 500여 년 전에 백홈에 살던 백씨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의 논(1,500여 평)을 마을에 기부하고 죽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이 공로를 잊지 않기 위해 매년 음력 9월 9일 백씨의 묘를 벌초하고 제사를 지내왔다. 일제 때 백씨가 기부한 논의 일부가 군유지로 강제 몰수되고 지금은 500여 평만 남아 있다고 한다. 원래 백씨의 묘는 모랫들(현재의 새진흥4차아파트 자리)에 있었다.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묘는 없애고 제단 비만 세우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의 백공제단비(白公祭壇碑)다. 비석이 있는 곳을 찾지 못하여 고심하다가 박극수 문화유산회복재단 경남본부장의 친절한 안내로 함께 답사하였다. 더운 날씨에 답사와 해설을 해준 박극수 본부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바이다. 박씨당 할머니 불망비 역시 마을주민의 안녕과 건강에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박씨당 할머니는 백동마을에 살았던 분으로 후손이 할머니의 제사가 필요 없다 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았더니 각종 재난이 발생했다. 요즘의 코로나19 팬데믹 현상과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제사를 안 지내니 주민들이 병에 걸리고 농사가 흉년이 들었다고 한다. 겹치는 불행에 할머니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다시 제사를 지낸 뒤로는 역병이 없어지고 농사가 대풍이 들었다는 전설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백공(白公)과 박씨당(朴氏堂) 할머니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최장호 백동마을 통장에 의하면 마을의 재산도 다른 마을에 비하여 많은 편이라고 한다. 경로잔치를 해도 마을 주민의 자발적인 협찬금으로 행사 비용을 충당하고 남기 때문에 협찬 강요는 없다고 한다. 마을 기금이 충분하고 마을 소유 재산으로 나오는 월세가 있어 주민 단체관광도 다닌다고 하였다. 통장의 설명을 듣고보니 조상을 잘 둔 덕분에 마을 토지, 건물도 있어 마을 재정이 탄탄함을 알 수 있었다.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화합이 될 것으로 보였다. 통장 9년차의 베테랑으로 인맥도 다양하고 마을을 위한 봉사정신이 투철한 최장호 통장도 애로점은 있다고 하였다. 마을 재산이 통장 명의로 되어 있어 건강보험료와 국민연금 부담금이 높게 나온다고 하였다. 마을 재산 때문에 추가로 많이 납부하는 금액은 마을기금으로 대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주민들이 통장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기꺼이 봉사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통장의 관리하에 마을 재산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마을 회관도 3층으로 주민이 사용하지 않는 여유 공간은 세를 놓고 있었다. 마을회관 1층에는 카페 뜨락이 입주하여 손님이 많이 찾고 있었다. 3층에는 지역아동센터가 들어와 있다. 백동마을의 재산인 ‘양웅백 법인’ 건물에는 영지농산이 입주하여 양산지역에 잡곡을 납품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최장호 통장은 법인 이름을 ‘양웅백’이라고 한 것은 양산, 웅상, 백동마을의 첫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영지농산을 방문하여 방문목적을 이야기하니 대표 부부가 함께 일하다가 사진도 찍으라고 허락하며 질문에 답변해주었다. 카페 주인 김정원 씨는 미타암 가는 길목에서 청화산방을 운영하다가 이곳으로 이전하였는데, 전부터 잘 아는 분이라 반가웠다. 카페 내부를 각종 공예품으로 멋지게 꾸며놓고, 소모임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별도로 만들어 고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김정원 대표는 각종 재주가 많아 다양한 강좌의 특강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백동마을 당산나무가 멋있다고 정보를 알려준 사람은 강동환 씨로 함께 사진 찍으러 가보니 카페 뜨락의 김정원 대표도 있어 인사를 나누고 당산나무 구경을 하였다. 두 분에게 감사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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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이예 선생을 모신 석계서원이예 선생을 모신 석계서원 1. 석계서원(石溪書院) 울산시는 옥동∼농소(남부순환도로∼중구 성안동∼북구 오토밸리로) 구간은 ‘이예로’로 정했다. ‘이예로’는 조선 전기 대일외교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충숙공 이예(李藝, 1373∼1445년) 선생의 이름에서 따왔다. 양산시 7번 국도 우회로가 울산시의 ‘이예로’와 연계하여 ‘통신사로’로 명명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예 선생의 7세손인 이겸수 장군이 웅상지역에서 출생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왜군을 물리치고, 사명대사를 수행하여 외교적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 협상을 한 이겸수 선생은 위험을 무릅쓰고 서생포 왜성의 적정을 탐지하였다. 적장인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간의 이간을 기획하여 왜군의 분열을 조장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양산시 소주동에 있는 남강서원은 죽재 이겸수 선생을 제향하고 있다. 이겸수 장군이 임진왜란 때 사용하였던 칼은 후손들이 양산시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조선초 외교관 이예 선생과 그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과 외교관으로 활약한 이겸수 선생을 기리는 울산시의 ‘이예로’, 양산시의 7번국도 우회로인 ‘통신사로’는 역사적인 의미가 매우 크다. 석계서원은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대복동천로 160-12에 있다. 이 서원은 충숙공(忠肅公) 이예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세웠다. 그 전신은 은월봉 아래에 있었던 용연사(龍淵祠, 1737년 창건)인데, 울산도호부사 권상일이 남구 신정동 은월봉 아래에 사당인 용연사를 짓고 이예 선생을 향사하였다. 1782년(조선 정조 6년)에 현재의 위치에 옮겨 짓고, 이름을 석계사(石溪祠)라 하였다. 1737년(영조 13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예(李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경내의 건물로는 상충사(尙忠祠), 경수당(敬守堂), 신문(神門), 적실재(蹟實齋), 치지재(致知齋), 주소 등이 있었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되었다. 1900년에 후손들이 서원 터에 단을 설치하여 향사를 지내오다가 1975년에 경수당과 필동문(必東門)을 중건하였다. 이후 1860년(조선 철종 11년)에 석계서원(石溪書院)으로 승격되었으나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이후 1915년에 강당인 경수당(敬守堂)과 출입문인 필동문(必東門)을 복원하였다. 2002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4년에 준공하였다. 매년 음력 9월 9일에는 학성 이씨 후손들이 시조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학성이씨 대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울산지역에서 보기 드문 조선시대에 건축된 서원이다. 서원내에 현존하는 건물로는 강당에 해당하는 경수당과 출입문에 해당하는 필동문이 있고, 서원에 딸린 정자로서 재천정(在川亭)이 있다. 경수당 뒤쪽에 사당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체적인 배치 형태는 강당 뒤쪽에 사당이 위치하는 전학후묘형이었을 것이다. 건축적 특징을 보면 경수당은 툇마루에 덧붙인 쪽마루 형태의 진입부가 특이하고 장초석 등의 세부 수법이 주목할 만하다. 재천정은 정면 3칸, 측면 1.5칸의 규모로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다. 후면부에서 진입하는 방식으로,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 곁에 있는 독락당의 계정과 유사하다. 이 서원의 경수당과 재천정은 부재 수법 및 평면형식에서 볼 때 후기 양식으로, 건축사적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재천정은 죽오(竹塢) 이근오(李覲吾, 1760~1834년)가 건립하였다. 석계서원은 웅상지역의 서창동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석계서원 앞으로 웅상지역에서 흘러온 회야강이 지나가고 있어 경치가 좋다. 재천정의 이름은 천변에 있다는 의미인데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재천정은 현재 노후화 되어 목재가 썩은 부분이 있어 수리 중에 있다. 석계서원 안에는 백년 넘은 무궁화나무 보호수가 있다. 수령 100년, 수고는 5m, 나무 둘레 0.65m이다. 보라색 꽃이 피는 무궁화나무는 노쇠하여 철 받침대에 의지하고 있는 가지가 썩었으며, 나무도 많이 썩었다. 옆에 있는 하얀 꽃이 피는 무궁화나무는 아직 상태가 좋은 편이다. 화단 주변에 어린 무궁화나무도 몇 그루 있었다. 배롱나무가 꽃을 활짝 피워서 보기 좋았다. 석계서원 재천정 앞에 모과가 주렁주렁 달린 모과나무가 있다. 재천정 옆에는 큰 소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그중에서 제일 큰 곰솔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수령 250년~300년, 수고 24m, 나무 둘레 3.2m이다. 2. 이예의 외교 활동 이예는 1373년(공민왕 22) 울주군에서 태어나 1445년(세종 27) 73세로 생을 마감한 인물로 호는 학파(鶴坡)이며, 1910년 순종에게서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선대는 본래 사족(士族)이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대에 이르러 새 왕조에 협력하기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향리 신분인 울주의 기관(記官)으로 강등되었다. 그 후 조선조에 들어와 현달(顯達)함에 따라 이예는 중시조(中始祖)가 되었고 울주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부친의 직을 계승하여 울주군의 기관으로 지내던 중 25세 되던 1397년(태조 6년) 생애의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였다. 1396년(태조 5) 12월 지울주사(知蔚州使) 이은(李殷)이 쓰시마 섬 왜구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이 생겼다. 이때 이예는 이은을 따라가 수개월 동안 포로 생활을 함께하면서 정성껏 시종하였고, 기지를 발휘해 이듬해 2월 이은을 구출하여 돌아왔다. 이 공로로 그는 관직을 제수(除授)받았고, 이후부터 대일 교섭의 일선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그 후 3년 만인 1400년(태종 즉위년) 회례사 윤명(尹銘)을 따라 쓰시마 섬, 이키 섬, 혼슈(本州) 등을 필두로 일본과 류큐를 오가면서 이후 40여 년간 사행원으로서 피로인을 쇄환하고 조일 간의 외교 현안을 해결하는 데 직접 관여하였다. 이예는 쓰시마 섬 문제에 정통하였다. 1426년(세종 8) 사물 관압사(賜物管押使)로 쓰시마 섬으로 사행을 떠나기 전 임금이 그에게 쓰시마 섬을 왕래한 횟수를 묻자 모두 16번이었다고 대답하였다. 1438년(세종 20) 이예가 경차관으로 쓰시마 섬에 파견되었을 때 조정에서 상경 왜인(上京倭人)의 유관(留館) 기간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세종이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자 모두 “이예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다시 숙의하게 하옵소서.”라고 건의하였고, 이를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이예는 대일 관계의 실무 사항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이예는 외교 실무적 경험을 바탕으로 태종대와 세종대의 대일 교섭에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실무자로서 핵심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세종실록』의 ‘동지중추원사 이예의 졸기(卒記)’에 따르면, “왜국에 사명을 받들어 가기가 무릇 40여 차례였다.”고 하였다. 태조대에서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파견한 사행은 모두 48회이다. 그 가운데 이예가 사행원으로 40여 회 참여하였다면 조선 초기 대일 사행에 대부분 참가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그의 경력은 조선시대 전 시기를 걸쳐서도 가장 많다. 사행 시에 맡은 직책을 보면 보빙사, 회례관, 회례사, 통신사, 체찰사, 경차관 등으로 여러 가지여서 다양한 목적의 사행에 참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대일 교섭 활동 내용을 볼 때 직업적인 외교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태종의 재위 18년 동안 이예는 13회에 걸쳐 일본, 류큐 등지를 왕래하면서 모두 600여 명의 피로인을 쇄환하였다. 세종 때인 1419년(세종 1년) 쓰시마 섬 토벌(己亥東征) 때 중군병마부수(中軍兵馬副帥)의 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 전투에서 그는 큰 공을 세워 1421년(세종 3년)에는 공패(功牌)를 하사받은 동시에 행좌군사직(行左軍司直)으로 승진하였다. 1438년(세종 20년)에는 대마도 경차관으로 파견되어 쓰시마 섬과의 교역에 근간이 된 문인 제도를 쓰시마 섬 도주와 정약하였다. 이어 1443년(세종 25)에는 71세의 고령에도 대마도 체찰사를 자청하여 서해안에 침입한 왜적을 추쇄(推刷)해 오는 한편, 쓰시마 섬 도주와 계해약조를 체결하였다. 이 공로로 이예는 종2품에 해당하는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까지 올랐다. 3. 이예의 학파선생실기 이예가 고위 관직까지 오르고 후에 충숙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는 공로는 모두 대일 교섭에서의 활약 때문이었다. 『학파선생실기(鶴坡先生實紀)』는 3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보통 문집과 성격이 조금 다르다. 이예가 직접 쓴 글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13대손 이장찬(李璋燦)이 행장(行狀)과 관계 기록을 모아 1872년(고종 9년)에 간행하였기 때문이다. 『학파선생실기』는 이예 자신의 저술이 아니라 주위의 인물이 쓴 행장과 『조선 왕조 실록』 등에 나오는 관계 기사를 편집한 책이다. 1권에는 「공패(功牌)」, 「해외일기(海外日記)」, 「조야기재합록(朝野記載合錄)」 등의 사적과 행장, 시장(諡狀)이 수록되어 있다. 2권에는 이예를 모신 용연사(龍淵祠)의 기문(記文)과 비문(碑文) 19편, 3권에는 ‘석계사봉안시제영(石溪祠奉安時題詠)’ 등 시 13편과 이가환(李家煥)의 ‘지(識)’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학파선생실기』의 내용 가운데 조선 초기 조일 관계와 이예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는 「공패」와 「해외일기」이다. 이예는 쓰시마 섬 토벌 후인 1421년(세종 3)에 공패를 하사받았는데, 「공패」에는 쓰시마 섬 토벌 당시 그의 활동이 기술되어 있다. 『해외일기(海外日記)』는 제목과 달리 일본에 대한 견문이나 사행 일기가 아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종사관(從事官)이 기술하였다고 하는데, 태조대에서 태종대에 이르기까지 이예가 일본, 류큐 등지에 사행한 사실과 쓰시마 섬 토벌 시의 활동이 간략히 정리되어 있다. 『해외일기(海外日記)』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예(李藝)가 일본과 유구(琉球) 등에 사행(使行)한 사실과 대마도(對馬島) 토벌 때의 활동을 기록한 글. 1책. 가철(假綴). 필사본(筆寫本). 표지 2장. 내지 7장. 말미에 학성 이씨의 세계가 간략히 서술되어 있다. 표지에 임진년(壬辰) 2월 초2일 양정댁(楊亭宅)에 있는 것을 보고 등서(謄書)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壬辰二月初二日 始謄書于楊亭宅本草]과 신사년(辛巳) 겨울 서울에 있는 종인(宗人)이 베껴 보냈다는 기록[辛巳冬間 居京宗人 謄送耳]이 묵서되어 있다. 『학파선생실기』는 이예가 죽은 지 400여 년 뒤에 후손이 편집하였으며, 이예가 주로 활동하였던 세종대의 기록이 간략하다는 점 등이 특징이다. 『학파선생실기』는 조선 초기 대일 교섭 활동에 관한 소중한 자료다. 이예는 신분이 비교적 낮았기 때문에 대일 교섭에 고급 관료로서 정책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실무를 맡았던 전문가였다. 『학파선생실기』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이예의 일본에 대한 주요 인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예는 일본의 화포와 병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였으며, 우수한 면이 있으면 적극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직접 왜선이나 무기를 연구하여 실험해 보기도 하였다. 화폐 사용의 편리성 보고, 사탕수수의 재배와 보급에 대한 보고, 왜수차(倭水車)의 우수성과 단점을 관찰해 수용하도록 건의하였다. 민간에 의한 광물 채취의 자유화와 이에 대한 과세, 화통 및 완구의 재료를 동, 철에서 무쇠로 변경하고, 외국 조선기술의 도입을 건의하였다. 좋은 점이 있으면 수용하자는 실용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일본의 농산물 종자를 도입할 것도 건의하였다. 일본의 경제와 기술에 대해 세밀하게 관찰하고, 장단점을 파악한 후 좋은 점은 도입할 것을 건의하였다. 대장경 및 불경의 사급(賜給)을 통한 불교문화와 인쇄문화의 일본 전파, 수많은 사행에서 예물의 교환과 물자의 교역을 통해 체득한 음식문화와 일상 생활문화의 교류 등에도 기여하였다. 쓰시마 섬 사람이나 일본의 혼슈에 대해 어떤 민족적인 특성을 강조하거나 둘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쓰시마 섬 도주의 위약(違約)을 지적하며 쓰시마 섬 사람들이 이익을 탐하고, 그들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변란을 일으킬 요인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왜구의 현황, 통제 방법, 대일 교섭의 방책을 자세하게 제시하였다. 이예의 정확한 관찰에 따른 건의는 대부분 채택되었다. 천황(天皇)의 존재나 막부의 쇼군과의 관계, 일본의 사회와 문화 등에 대해서는 평가한 자료가 없다. 4. 이예의 13세손 반계 이양오 선생 문학비 석계사원 입구에는 반계 이양오 선생 문학비가 있다. 2003년 9월 20일에 건립되었다. 문학비는 가로 1.22m 세로 0.87m의 크기의 오석 전면에 반계 선생의 ‘강촌만조가’ 일부를 담고 있다. 뒷면에는 반계 선생의 약력과 업적 등을 국한문 혼용으로 간략하면서도 상세히 적어 놓았다. 문학비가 세워진 곳은 그의 시(詩) ‘강촌만조가(江村晩釣歌)’의 조대(釣臺), 즉 낚시터가 있었던 곳이다. 그의 시 '강촌만조가'는 다음과 같다. “차신(此身) 무용(無用)하야 세상(世上)이 버리시니/ 부귀(富貴)를 하직하고 빈천(貧賤)을 낙(樂)을 삼아/ 일간모옥(一間茅屋)을 산수간(山水間)에 지어두고/ 십년(十年) 일관(一冠)을 쓰거나 못 쓰거나/ 삼순구식(三旬九食)을 먹거나 못 먹거나/ 시름이 없으시니 분별(分別)인들 있을소냐/ 만사(萬事)를 다 잊으니 일신(一身)이 한가(閑暇)하다.” 이양오(李養吾)는 조선 영조 13년(1737년)에 태어나 순조 11년(1811년)에 죽었다. 울산의 토성(土姓) 학성이씨 시조 이예(李藝)의 13세손으로 자는 용호(用浩). 호는 반계(磻溪)이다. 울산의 유명한 사림으로 평생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한 학자였다. 이예를 배향한 석계서원에서 후진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제구운몽후(題九雲夢後)와 사씨남정기후(謝氏南征記後) 등의 평론과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를 썼다. 배수집(排愁集)과 시학지남(詩學指南), 파수집(罷睡集) 등의 책을 지었다. 세태를 고발한 세평시(世評詩)를 남겼다. 사회를 직시하는 투철한 세계관으로 다방면에 걸쳐 저술을 남겼으므로 울산읍지(蔚山邑誌)에서는 ‘강좌시객(江左詩客) 중에서 제일자야(第一者也)’, 즉 제일인자라고 기록했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선비의 도리를 다하며 후학을 기르던 이양오(李養吾)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사회고발시에 비견되는 ‘감회(感懷)’란 제목의 시를 지었다. 정의가 무너진 부조리한 세상을 비판한 시라고 하여 세평시(世評詩)라고 한다. 감회는 문집 ‘반계집(磻溪集)’에 실려 있다. 전체 20수 중에 문집에 실린 17수는 차례로 다음과 같은 소제목으로 돼 있다. 거짓된 학문의 배척(斥僞學), 문장 숭상의 말폐(尙文末弊), 조세 이외의 징수에 대한 탄식(歎租外徵), 환향의 폐단(還餉爲弊), 되와 말과 저울의 불일치(斗升權衡不一), 형법의 해이(刑法解弛), 전쟁 대비의 소홀(武備不修). ‘연기신편’의 불이행(不行演機新篇), 좌병영의 지세로 인한 폐단(左營地勢 營還爲弊), 뇌물 풍조의 성행(貪贓成風), 등짐장수 금지(負賈宜禁), 과거의 불공정(科擧不公), 초야에 버려진 인재(草野遺賢), 문체의 고문 숭상(文體尙古), 향교와 서원의 말폐(校院末弊), 소학과 대학의 도(小學大學之道), 스스로의 진술(自敍). 석계서원이 있는 석천리는 학성 이씨 서면파의 터전인 곳으로 울산의 고택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마을은 마치 소쿠리처럼 북쪽, 서쪽, 동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 남쪽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회야강이 감싸고 있어 배산임수의 명당자리다. 학성 이씨 서면파를 중심으로 씨족마을이 형성된 울산의 대표적인 반촌이다. 울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3호인 ‘울산 학성 이씨 근재공 고택’이 있다. 고택에는 200여 년 된 모과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속은 거의 썩었지만 아직도 모과가 많이 달리고 있어 생명의 신비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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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낙동강 정비사업에서 발굴된 황산언과 조선시대 홍수피해낙동강 정비사업에서 발굴된 황산언과 조선시대 홍수피해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낙동강 살리기 하천환경정비사업에서 발굴된 황산언 물금읍 서부마을에서 경부선 철도 하부 통로를 빠져나가 양산시 물금취수장 근처에 가면 황산언(黃山堰) 유적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지난 7월 21 일 조국영 도예가겸 향토사학자와 함께 유적공원을 답사하였다. 조국영 향토사학자는 황산역, 황산언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안내판에 나와 있는 돌로 쌓은 제방을 가리키며 옛날의 성이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향후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현재 황산공원에 있는 황산언 유적공원은 두 군데 있다. 하나는 물금취수장 옆의 물금리 유적이고, 또 다른 유적은 월당나루터 앞의 핑크뮬리 공원 안쪽에 있다. 이곳 증산리 유적공원 안내판도 물금리 유적공원과 동일하다. 두 곳 모두 발굴 후 황산언을 땅속에 다시 묻었다. 표면은 잔디공원을 만들고 옆으로는 자전거도로와 산책로가 있다. 황산언은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정비사업에서 낙동강 살리기 하천환경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된 양산 증산리 유물 산포지(散布地)의 발굴조사를 통해 토석혼축제언(土石混築堤堰)으로 밝혀졌다. 토석혼축제언의 최하단의 기저부(基底部)에 점질토를 깔아 다졌으며, 그 위에 너비 290cm, 높이 180cm로 석축(石築)하여 골격을 구성한 후 이를 중심으로 내외면에 모래와 점토가 혼합된 흙을 겹겹이 다져 쌓은 석심토축(石芯土築) 형태의 토목 구조물이다. 낙동강변을 따라 축조한 제방은 본 조사구간 외에 나머지 구간을 포함한다면 2,800m가 넘는 대규모 인공제방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의 문헌사료에는 삼국시대 황산진(黃山津)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황산역(黃山驛)이 설치 및 운영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남읍지(嶺南邑誌)』 황산역도(黃山驛道) 등의 고지도에서도 그 위치와 명칭이 표현되어 있어 황산역의 축조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즉 고대로부터 낙동강을 이용한 물류교역의 중심지였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황산역 중심의 물류센터와 통신망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곳에 조성된 물류기지를 낙동강의 상습적인 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황산언(黃山堰)을 조성하였다. 금번 발굴조사에서 그 위용의 일부가 드러난 것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지하에는 황산언의 실체가 유존(遺存)하고 있으므로 그 역사적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역사공원으로 조성하여 보존하고 있다. 2. 황산언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 황산언의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말부터 조선시대 전기까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토석혼축제언에서 청자해무리굽 완편, 청자종지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늦어도 12세기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제방의 안쪽의 생활공간에서 고려시대 건물지 및 수혈(竪穴) 등의 유구(遺構)에서 청자류와 도기류, 기와류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북송 진종 상부연간(北宋 眞宗 祥符年間, 1008~1016)에 주조된 상부원보(祥符元寶)와 북송 영종 치평년간(北宋 英宗 治平年間, 1064~1067)에 주조된 치평원보(治平元寶) 등의 동전과 중국 월주요(越州窯)에서 제작된 청자가 출토되어 당시 이곳에서 국제적인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문화재청의 증산리 유물산포지 발굴 현장설명회 문화재청에서 주관한 2011년 12월 9일 양산 증산리 유물 산포지 발굴 현장설명회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안내판에 나온 내용보다는 상세한 내용이 있어 현재 황산공원에 있는 안내판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4대강살리기 사업으로 발굴조사 중인 낙동강권역 양산 증산리 일원에서 고려시대의 건물지와 조선시대 제방 등이 발굴되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발굴조사 지역은 경남 양산 물금리와 증산리 일원으로 하천 둔치에 생태공원과 산책로 등의 주민 편의시설을 조성할 예정이며, 전체 조사면적이 2,025,864㎡에 달하여 우리문화재연구원, 동서문물연구원,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한국문물연구원 등 4개 문화재조사 전문기관이 구역을 나누어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그 중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2009년 9월 28일부터 발굴 중인 증산리 유물산포지 1구간에서는 제Ⅰ기(나말려초), 제Ⅱ기(고려시대), 제Ⅲ기(조선전기)에 해당하는 문화층이 조사되었다. 제Ⅰ기 문화층에서는 건물지, 경작유구가 발견되었으며 주름무늬 토기편, 도기편, 해무리굽 청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제Ⅱ기 문화층에서는 건물지, 수혈 등이 발견되었으며 도기편, 청자편,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제Ⅲ기 문화층에서는 경작유구, 건물지, 토석혼축(土石混築) 제방 등이 확인되었으며 인화문분청사기편, '長'자명 및 '長'자 묵서명 분청사기발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유구는 토석혼축 제방으로, 사질토를 조성한 후 외부 및 상부를 할석으로 쌓아 기초 골격을 축조하였으며 그 상부는 사질점토를 피복한 것으로 추정되나 잦은 홍수피해와 개·보수로 잔존상태는 조사구역 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제방은 낙동강이 흐르는 방향과 동일한 방향으로 현재까지 총 725m가 확인되었으며 제방 안쪽에는 조선시대의 경작유구 등이 분포하고 있다. 이 제방은 조선시대 양산군과 관련된 문헌사료 및 고지도에 기록된 ‘黃山堰’(황산언)으로 추정된다. 『正祖實錄』(정조실록)권35 16년(1792) 9월 15일 조에 “양산군수 성종인이 상소하기를……양산지역에 분포하는 제언은 邑堰(읍언), 黃山堰(황산언), 도언(島堰) 3개소가 있으며, 수해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는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1792년 이전에 이미 황산언이 축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황산언은 특히 낙동강의 범람으로부터 당시 교통·통신의 중심지인 황산역의 마위답(馬位沓 : 역마를 사육하기 위해 지급한 토지)와 역참시설(驛站施設)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산언의 위치와 관련하여 『여지도서 경상도 보유(與地圖書 慶尙道 補遺)』에는 ‘관아의 서쪽 20여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고지도인 『양산군읍지도(梁山郡邑地圖)』와 『양산읍지(梁山邑誌)』에도 현재의 조사지역에 황산언이 표시되어 있어 위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물금지역은 이 밖에도 황산진지, 증산리왜성(문화재자료 제276호), 화제리 도요지(도기념물 제195호), 화제리 제철유적, 가산리 도요지(도기념물 제196호)등 군사ㆍ교통 및 통신ㆍ생산과 관련된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어 고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낙동강 하류지역의 물류중심지로서 기능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이번 발굴을 통해 물금지역의 핵심인 황산역의 역내 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황산언의 일면이 드러남으로 해서 그동안 문헌 사료 및 고지도에 의존해 왔던 이 지역 역사 복원에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를 제공하는 단초를 마련하였다는 데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4. 조선시대 양산군수 성종인의 상소문을 통해 본 홍수피해 정조실록 35권, 정조 16년 9월 15일 신해 6번째 기사 1792년 ‘양산 군수 성종인이 홍수에 의해 붕괴된 제방의 복구 문제로 상소하다’의 내용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홍수 피해의 참혹함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이다. 양산 군수(梁山郡守) 성종인(成種仁)이 상소하기를, “5월 16일의 비와 6월 16일의 비, 25일의 비바람으로 말미암아 강해(江海)가 분탕되고 온 고을이 침몰되어 어디를 봐도 남은 곡식이 없이 붉은 땅만 있었는데, 7월 23일 밤중의 비바람은 임술년과 을해년에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익사한 사람과 떠내려간 가축이 매우 많았으니, 산과 들이 뒤바뀌고 가옥이 허물어진 것은 또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 본군에 3개의 큰 제방이 있는데, 그 하나는 읍평(邑坪)의 20리 되는 제방이고 그 하나는 본군 남쪽 거도(巨島)의 30리 되는 동서(東西)로 이어진 제방이고 그 하나는 황산역(黃山驛)의 좌우로 이어진 긴 제방입니다. 이른바 읍언(邑堰)은 본군의 앞 큰 평지에 있고 강어귀와 다소 떨어져 있으므로, 양산 백성의 농장(農場)과 생업(生業)이 대부분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다만 산골짜기에서 나오는 여러 물줄기가 모두 그곳으로 모여 군기(郡基)를 침범하고 농토를 파손시키므로 임술년의 홍수 이후 그 당시 도신이 20리에 이르는 긴 제방을 쌓았던 것인데 을축년에 또 붕괴되었을 때 조정에서 쌀을 내어 증축하였습니다. 그 이후 수재(水災)가 있으면 백성을 동원하여 손질해오고 있었는데 이번에 전에 없던 큰 홍수를 만나서 붕괴되어 터진 곳의 길이가 1천 1백여 장(丈)이나 되며 그 밖의 세 발짝이나 다섯 발짝 씩 파손 된 곳은 곳곳이 모두 그러합니다. 이른바 도언(島堰)은 길이가 도합 3만여 장이 되는데 흙을 채취하고 잔디를 입히는 일을 모두 제방 아래에서 할 수 있으므로 힘이 매우 적게 드는데, 금년 여름의 비로 인하여 온 섬이 침몰되었으며 평지가 드러난 후 파손된 곳을 측량해 보니 터져서 시내가 되고 파여서 구덩이가 된 곳이 3천여 장이나 되었습니다. 대개 본군에는 2천 1백 80여 호가 있는데, 떠내려가고 묻힌 가옥이 6백 65호이며 그중에 도민(島民)의 가옥이 3백 62호이니 수재를 당한 참혹함이 또한 본군에서 제일 심합니다. 이른바 황산언(黃山堰)은 우관(郵館)이 있는 곳으로서 제방 안의 농토가 모두 마위(馬位 : 황산역의 역마를 사육하기 위해 지급한 토지) 이며 그곳에서 생산되는 곡식의 힘을 많이 받고 있는데, 금년 여름의 큰 홍수에 떠내려간 가옥이 얼마인지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제방 아래 수전(水田)과 한전(旱田)이 물에 잠겨 늪지로 변해 버렸으니 역민(驛民)인들 어떻게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 이상 3개의 제방은 실로 백성의 목숨과 관계된 것이어서 개축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황산언은 보수하는 것이 편리한지 폐지하는 것이 편리한지 본군에서 억측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만, 삼가 생각건대, 도언은 쌓지 않을 수 없으며 읍언은 아주 파손된 곳은 다시 쌓을 수 없으나 마구 흐르는 물줄기를 또 막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읍언에 제방을 쌓는 일은 가령 다시 재력(財力)을 소비하여 종전보다 증축한다 해도 내년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불행한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구 흐르는 물을 그대로 방치하고 막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생업이 크게 곤궁해 질 뿐만 아니라 읍리(邑里)의 성부(城府)도 지탱하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지세(地勢)를 살펴보니 자연적인 물줄기를 따라 사람의 힘을 약간만 써서 뚫어서 소통시키고 비스듬히 새로 제방을 쌓으면 8백 장 정도면 옛 물줄기로 모여 통할 수 있어서 급류를 진정시킬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공역(功役)이 크게 줄고 후일의 재앙도 피할 수 있어서 농토는 경작할 수 있고 읍리는 붕괴될 염려가 없게 될 것입니다. 도언의 경우는 낙강(洛江)이 진흙이 차서 막힌 뒤로 제방에 물이 새어 파손되는 근심이 해마다 있었던 듯한데 금년 여름과 같은 홍수가 또 있기라도 한다면 한 제방으로서는 능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이 도언 또한 다시 쌓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본도(本島)는 동서 10리, 남북 25리에 토질이 비옥하여 1말의 씨를 부리면 3섬의 곡식을 수확하는데 수전과 한전의 결수(結數)가 모두 1천 50결이며, 적내(籍內) 적외(籍外)의 가옥이 대략 적어도 7백 구(口)가 되는데 그들은 또 고기잡이와 갈대 채취로 모두 생활이 충분합니다. 이제 그곳의 백성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땅을 버리고자 한다면 제방을 쌓을 필요가 없겠으나, 백성을 갑자기 옮길 수 없고 그 땅을 모두 버릴 수 없다고 한다면 도언 또한 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읍언에 새로 쌓을 곳이 8백 장이고 도언에 다시 쌓을 곳이 3천 장이 되는데 여기에 투입될 역정(役丁)의 수를 헤아려 보면, 읍언은 넓이가 6장이고 높이가 2장이어서 각 장마다 10명의 역정이 필요하니 8백 장의 역정에는 8천 명이 필요합니다. 도언은 넓이가 3장이고 높이가 1장 조금 넘어서 각 장마다 4명의 역정이 필요하니 3천 장의 역정은 1만 2천 명이 되므로, 합하여 계산하면 적어도 2만 명이 못되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곡물을 얻어 매 역정에 하루의 고가(雇價)로 피곡(皮穀) 1말 5되를 준다면 1천 5백 석(石)만 소비하면 1만 5천 명의 역정을 구할 수 있고 부족한 5천 명은 관민(官民)이 상의하여 형편에 따라 뽑아서 맡긴다면 자연히 역사(役事)를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더구나 역사를 시행하면서 주기(賙飢)의 정치를 겸할 수 있어서 각종 폐단이 자연 없어지고 여러 가지 이익이 자연 수반될 것입니다. 신의 말에 채택할 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안으로 묘당(廟堂)에서부터 밖으로 방백(方伯)에 이르기까지 후일에 안정할 수 있는 계획을 널리 자문을 구하여 별도로 무휼해 주는 일을 속히 강구하소서. 그러면 끝내 잔폐된 국면을 유지하여 70주(州)의 하나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이 아침 저녁으로 바라는 바이며, 양산 군민도 이 조치를 보고 흩어진 자를 모으고 죽어가는 자를 살려주는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양산 백성이 수재를 가장 심하게 당했다는 것은 연신(筵臣)의 말을 통해 들었었고 도백(道伯)의 장계를 보고 대략 짐작은 했었으나 그렇게 심한 줄은 몰랐었다. 백성의 마음을 생각하면 마치 눈앞에 보는 듯하다. 이제 알았으니 속히 구제하지 않을 수 없고, 구제해 주려면 또 보충해 주고 도와 주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상소 안의 소청을 윤허하여 족식(足食)의 공(功)을 완성할 수 있게 하겠다. 도백으로 하여금 시행할 수 있는 방법을 힘써 강구하여 속히 한 가지 방법을 장계로 보고하게 할 것이니, 너는 부로(父老)와 민서(民庶)를 소집하여 조정에서 염려하고 있는 사유를 다방면으로 효유하여 모두 안심하고 생업을 정할 수 있도록 하여 차견(差遣)된 본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정조실록 36권, 정조 16년 11월 29일 갑자 1번째기사 1792년 ‘양산 군수 성종인을 치하하는 유고를 하다’를 통해 정조는 성종인 군수를 치하하였다. 정조실록 37권, 정조 17년 6월 13일 갑술 2번째 기사 1793년 도신 정대용의 보고로 선산 부사 박유원, 양산 군수 성종인, 창원 부사 이여절을 승진 발탁하고, 울산 부사 이민영을 파출하다. 선산 부사 박유원(朴綏源)에게 표리를 하사하고, 양산 군수 성종인(成種仁)은 통정 대부에 발탁하고, 창원 부사 이여절(李汝節)은 승진시키고, 울산 부사 이민형(李敏亨)은 파출하였다. 이에 앞서 어사의 서계에 따라 도신으로 하여금 진휼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수령들의 치적을 하나 하나 열거해 아뢰도록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도신 정대용(鄭大容)이 치적을 열거해 치계하였다. 성종인 양산군수의 진휼 정사가 한 도의 으뜸이었다는 보고를 받은 정조 임금은 통정대부에 발탁하였다. 옛날부터 치산치수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왕이나 지방관인 군수도 홍수 피해를 입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정비사업, 양산시 구간에서의 낙동강 정비사업과 국비로 추진한 양산천 정비사업은 현대판 치산치수 사업이라 할 수 있다. 2016년 10월 5일 엄청난 비와 바람을 동반한 태풍 ‘차바’의 영향으로 양산지역에 오전 9시에서 11시까지 약 두 시간 동안 277.5mm라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려 양산천 중심으로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 물금읍의 낙동강은 낙동강 정비사업 덕분에 황산공원은 침수되었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태풍 차바의 피해를 호되게 당한 양산시는 홍수 피해 방지를 위한 종합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였다. 양산천은 호계천 합류부에서 하북면사무소 인근까지 13㎞ 지방하천 구간을 종전 50년에서 100년 빈도로 상향한 하천 기본계획을 수립해 완공하였다. 물금읍의 낙동강변 황산공원은 차바 이후에도 여러 번 내린 폭우를 잘 견디고 있다. 낙동강 모래를 준설하여 물 그릇을 키운 덕분에 홍수 피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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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화요칼럼,삼장수와 양산의 위인 선양사업의 문제점1. 양산시의 소극적인 위인 선양사업 양산 지역의 위인 성역화 사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문제가 많다. 양산을 대표하는 위인들은 역사적으로 만고충신 박제상, 삼국통일에 기여한 김무력 장군과 그의 아들인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 그리고 손자인 김유신 장군, 조선시대 장군인 양산 이씨 삼형제 장수인 이징석·이징옥·이징규 장군, 근세의 인물로는 고향의 봄 작사가 이원수 선생이다. 박제상 공과 그의 아들 백결 선생과 관련한 성역화 사업은 진행 속도가 매우 지지부진하다가 이웃 지역인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적극적으로 박제상 공 기념관도 건립하고, 축제도 하면서 선양사업의 속도를 높이는데 자극받아 효충사를 정비한 바 있다. 양산시에서 선양사업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울주군에서는 박제상 공이 울주군 출신이라는 주장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북면 소토리 박제상 공 생가를 성역화 하면서 징심헌을 한옥으로 건립하고 유물도 전시한다고 했지만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효충사 주차장 역시 관광 버스가 주차할 수 없는 승용차 위주의 소규모로 조성했다가 나중에 부지를 추가 매입하여 확장하는 시행착오를 겪었다. 추가 개발을 하게 되면 부지 인근의 땅값이 올라 소중한 시민의 혈세를 낭비하게 된다. 애초에 부지를 넓게 확보하여 장래의 시설 확충이나 축제 개최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은 계획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효충사는 영해 박씨 문중에서 박제상 공 탄생지로 인정하고 있어 별문제는 없다. 하지만 성역화 과정에서 효충사 인근 주민들이 효충사가 문화재 구역으로 지정되면 땅을 마음대로 개발하거나 매각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효충사가 생가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며 극도의 이기심을 보여준 바 있어 문제가 되었다. 이원수 선생은 일제 식민지 시절 양산에서 출생하여 양산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다가 마산으로 전학을 가는 바람에 출생을 입증하는 호적 등본, 학적부가 없어 마산시에 선수를 빼앗겨버렸다. 마산시는 나중에 창원시에 통합되었다. 창원시는 이원수 선생 가족의 호적을 새로 만들어 고향의 봄 도서관에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원수 선생 가족은 양산이 고향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으며, 유품도 양산시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창원시는 고향의 봄 가사를 스토리텔링하여 천주산 진달래꽃을 내세우고 있다. 노래의 가사에 나오는 봄 정경은 이원수 선생이 어릴 때 양산에서 본 추억임이 분명하다. 양산시에서 이원수 선생 추모사업을 하지 못하고 생가도 성역화하지 못한 것은 친일파 논란 때문이었다. 일부 대학교수가 친일 시나 글을 내세우며 선양사업을 반대하였다. 그래도 창원시는 굴하지 않고 잘하고 있다. 가야의 왕자로서 나라가 망한 후 신라에 귀순하여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하고 한강 유역의 땅을 확보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김무력 장군의 묘소가 통도사 경내에 있다. 김무력 장군이 전투에서 사망 후 그동안의 공을 인정하여 신라 조정에서 영축산 일원의 땅을 사패지로 하사하였다. 통도사가 건립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김무력 장군의 아들인 김서현 장군은 양주 도독을 지냈고, 그의 부인인 신라의 공주 출신인 만명공주와 함께 북정동에 있는 부부총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양산의 주민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져 왔으며, 양산의 무속인들이 김서현 장군과 만명공주를 신으로 모셔왔다. 김해 김씨 후손들도 부부총을 조상의 묘소로 인정하고 매년 벌초를 해왔다. 춘추공원 입구에 김서현 장군 기적비가 있다. 통도사 뒷마을인 하북면 지산리에는 김무력 장군, 김서현 장군과 만명공주를 모시는 사당인 취서사가 있다. 양산시는 양산의 가장 큰 축제인 삽량문화축전을 개최하면서 양산의 대표 인물을 박제상 공, 삼장수인 이징석·이징옥·이징규 장군, 김무력 장군과 아들인 김서현 장군이 상징하는 화랑도를 번갈아 내세우기도 하였다. 양산의 대표 인물에 대한 역사적 정립이 안 되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2. 삼장수 선양사업의 장벽 하북면 삼수리 출신의 삼장수는 조선시대 초기 인물로 무과에 장원 급제하고 외적의 침범을 막고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양산시에서 여러 차례 삼장수 생가 성역화와 추모사업을 시도했지만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삼장수 선양사업은 2019년 4월, 2020년 9월 경남도 지방재정투자심사에서 연달아 통과되지 못하였다. 2021년 7월 세 번째 도전 심사에서 문제점에 대해 향후 실시설계를 통해 계획을 구체화한 후 다시 심사하는 내용으로 조건부 통과되었다. 심사위원들의 거부 이유는 삼형제 장군 중 둘째인 이징옥 장군의 반란 사건이다. 계유정난을 통해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세종과 문종의 고명 대신이었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잡았다. 세종과 문종의 고명 대신으로서 단종을 보호하는 입장에 있던 신하들을 죽이고 단종도 귀양보냈다가 끝내 죽였기 때문에 세조의 계유정난은 정당한 명분이 없었다. 이징옥 장군을 반란자로 보는 역사적 시각은 잘못되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이징옥 장군은 뚜렷한 명분을 갖고 세조에게 반발한 것이다. 이징옥 장군은 정조 때 복권되었다가 다시 서인 집권 때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고종 때 복권되었다. 이징옥 장군을 반란자로 보는 역사적 평가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선양사업은 예정대로 추진해야 한다. 3. 이징옥 장군의 세조에 대한 반발 단종 1년 계유정난이 일어나 김종서가 살해되고,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 정분, 안평대군 등 고명대신과 반대파 왕족 및 측근 인물들을 숙청하면서, 이징옥도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측근인 이징옥이 역모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서 파면하고, 함경도 도절제사에 박호문(朴浩文)을 임명했다. 삼장수 3형제는 모두 무예가 뛰어나고 담력이 대단했는데, 그중에서 둘째인 이징옥이 무예와 용맹, 재주가 형제 중 가장 우수했다고 한다. 그는 유년 시절에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1414년 갑사(甲士)로 출사하여 1416년(태종 16년) 부사직이 되었다. 1416년(태종 16년) 부사직 재직 중 무과(武科)에 급제, 그 해 부거책장에 보임되었다. 1418년(태종 18년) 태종이 주관하는 친시 무과에 1등으로 급제하였다. 바로 사복시소윤(司僕侍少尹)으로 임명되고, 이후 약관의 나이에 영북진 첨절제사가 되어 ‘소년 절제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징옥 장군은 뛰어난 무장으로 관직 생활의 반 이상을 경원첨절제사, 경원절제사, 영북진절제사, 판경흥도호부사, 함길도 도절제사 등 함경도에서 보내면서 4군과 6진의 개척에 공을 남겼다. 이징옥은 후임 함경도 도절제사로 온 박호문에게 직위를 인계하고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에 수양대군의 정변 소식, 김종서의 죽음을 듣자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돌아가 박호문을 살해하였다. 이징옥 장군은 반발하면서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난(亂)을 일으킨다. 군사를 일으켜 북방으로 가서 여진족을 끌어들여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옛 금나라 수도 오국성에다가 대금(大金)을 세웠다. 이징옥은 일찍이 여진족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여진족 사회에서의 명성을 의식하고, 일이 여의치 못할 때는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을 배경으로 저항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성부사 정종, 호군 이행검 등에게 살해되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연좌제로 이징옥 장군의 장남 이자원, 차남 이윤원은 처형되었다. 딸은 노비로 분배되었다. 당시 8세였던 셋째 아들 이연원은 유모가 구출하여 은신, 경상북도 경주 토함산 서편 아래 상신곡에 숨어들어, 은거하여 본관을 초계라 칭하고 세계를 이어갔다(경주시 외동읍 신계리). 그의 후손들은 순조(純祖) 때 다시 세상에 나왔다. 이 난은 조선왕조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반란이란 점과 중앙정부로부터 지역 주민에 대한 차별을 가져와 민심을 자극해 후일 이시애(李施愛)난의 선구가 된 점, 황제를 칭하고 여진과의 연합을 도모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건이었다. 이징옥 장군은 매우 청렴하고 성실한 인물이었는데, 세종부터 문종, 단종을 거치며 일생 동안 북방에 수십 년간 근무했는데도 불만 하나 없었으며, 사생활이 매우 깨끗한 청백리였다. 조선 후기의 명재상 채제공은 『번암집(樊巖集)』에서 이징옥은 세조의 불법성을 명나라에 직소해 단종의 복위를 꾀하기 위한 것이지, 『단종실록』에 전하는 것처럼 대금황제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반역이 아니라 충신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4. 이징옥 장군의 복권 세조(世祖)는 자신에 반발하여 군사를 일으킨 이징옥 장군을 애도하고, 또 기개(氣槪)를 칭송하였다. 이징옥은 ‘나에겐 난신(亂臣)이지만 후세에서는 둘도 없는 충신’이라고 하였다. 이징옥 장군은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영월군 장릉 단종 배식단 사우에 배향되었다. 그는 조선 건국 이후 최초로 황제를 칭한(稱帝建元 :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사용) 인물이었다. 1791년(정조 15년) 관작이 회복되고 충강(忠剛)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정조 사후 서인(西人) 집권 후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 1908년(융희 2년) 4월 30일에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다. 5. 삼장수 가문 재조명을 위한 학술대회 이징석·이징옥·이징규 장군 삼형제에 대한 재조명을 위한 학술대회가 7월 15일 오후 1시 30분부터 양산시와 경남연구원 주최로 양산문화예술회관 소강당에서 열렸다. 윤영석 국회의원, 나동연 양산시장, 이종희 양산시 의회의장, 김태영 경남연구원 직무대행, 박인주 양산문화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학술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경남연구원의 김미영 연구원은 “이징석 묘 석물의 특징과 유산적 가치”에 대해 발표하였다. 이징석 장군 묘 석물은 제작시기와 내력이 분명하여 지방의 조선 전기 묘 편년에 있어 신뢰성 있는 표본을 제공하는 중요한 분묘 자료이다. 중앙에서 직접 석물을 하사하거나 지원한 사례로 조선 전기 지방 사대부 묘의 석물 배설 배경 파악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변광석 발표자(전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는 “조선 초기 삼장수 가문의 활동과 평가 – 이징석·이징규를 중심으로 -”를 발표하였다. 이징석 장군은 두 번 무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세조조에 좌익공신이 되었고, 양산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장강이다. 이징규 장군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화가 전승되고 있지만 『양산이씨세보』 이외에는 조선왕조실록에는 단편적인 자료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최종훈(평화엔지니어링)은 삼장수 마을 문화공원 조성사업에 대해 발표하였다. 공원의 면적은 9,346㎡로 삼장수를 콘텐츠로 삼아 역사와 전설, 관련 유적을 스토리텔링하여 휴식 및 체험공원으로 조성한다고 하였다. 우려되는 점은 부지가 너무 협소하다는 점이다. 양산시에서 미래를 내다보고 충분한 부지, 주차장을 확보하여 삼장수 축제도 할 수 있도록 공원을 조성해야 하는데 채 3천 평이 안 되는 부지는 좁은 것으로 보인다. 주변은 양산의 최고 인기 전원주택지로 땅값이 매우 비싼 곳이므로 문화공원 조성에 필요한 부지를 추가로 매입할 필요가 있다. 박제상 공 선양사업 당시 주차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아 추가로 부지를 매입하는 예산 낭비가 있었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토론자로는 백진재(양산시청), 우정임(부산대학교), 유영옥(부산대학교), 송지환(경남문화재연구원)이 참여하여 발표자의 주장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표명하였다. 결론적으로 이징옥 장군에 대한 조명이 없었는데 필자가 앞에서 언급하였다. 이징옥 장군은 이미 복권되었으므로 선양사업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충분한 공원 부지를 확보하여 사업을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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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산 화엄늪과 화전농업 연관성천성산 화엄늪과 화전농업 연관성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화엄늪과 화전농업 환경부는 양산의 천성산 자락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화엄늪이 생태적으로 보전 가치가 높다고 판단하여 2002년 2월 1일 자로 이 일대 12만 4천㎡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지난 1998년 정우규 박사(한국식물자원연구소장)가 발견하였다. 화엄늪의 습지보호지역 지정은 대암산용늪, 우포늪, 무제치늪 등에 이어 7번째이다. 늪이 발견된 화엄벌은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천여 명의 제자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한 장소이며, 늪의 명칭인 화엄늪은 정우규 박사가 늪이 발견된 장소가 화엄벌이라 하여 그 지명을 따서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00년 양산시가 경남발전연구원(수석연구원 윤성윤 박사)에 의뢰해 늪 일대를 정밀조사한 결과, 화엄늪은 호소나 갯벌과는 다른 산지습지의 독특한 생태계를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높은 고도의 산지임에도 앵초, 물매화, 잠자리란, 흰제비란, 꽃창포 등 습지식물이 다수 서식하고 발견된 235종의 식물종 중 16%에 해당하는 38종이 습지식물이었다. 습지의 천이과정을 알 수 있어서 일명 자연사박물관이라고도 불리는 이탄층(泥炭層)이 폭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육지에서는 식물이 죽으면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없어지나, 기온이 낮고 수분이 많은 습지에서는 식물이 죽은 뒤에도 썩거나 분해되지 않고 그대로 쌓여 짙은 갈색의 층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을 ‘이탄층’이라 한다. 손명원, 장문기 교수는 화엄늪을 인간의 화전농업 영향과 정상부에 내린 강우가 지하로 침투하여 흐르다가 절리를 따라 능선 부분에서 용출하여 형성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표토의 유기물 함량은 주 습지 주변에서 약 30~40%로 높게 나타나며, 주 습지 주변을 둘러싼 평탄지에서는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난다. 주 습지의 하류 구간에서 이탄층의 가장 깊은 부분의 유기물을 채위하여 탄소연대측정을 시도한 바, 화엄늪은 800여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화엄늪의 생성이 화전농업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옛날 화엄벌에서 화전민들이 숲을 불태우고 일시적으로 농사지은 것을 알 수 있다. 2. 화전의 역사적 유래 화전(火田)은 산이나 숲을 불태우고 농사를 짓는 원시적인 경작 방식으로 산림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화전은 산간지대, 고원에서 초지(草地)를 태우고 난 뒤 그 땅에 밭곡식을 심어 거의 비료를 주지 않는 방식이다. 나무를 베고 돌을 골라내어 밭을 만들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기에 간단하게 불을 질러 화전을 만들고 나무나 풀이 타고 남은 재를 비료 대신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화전을 개척하면 그 동안에 쌓였던 부식물과 소각에 의해서 생기는 재가 풍부하므로 몇 해 동안은 작물의 생육이 양호하다. 중국의 화경(火耕)이나 일본의 야키바타(燒畑)도 이에 속한다. 우리 나라에서의 화전농업은 작물의 재배와 더불어 시작되어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구려 등 북부 여러 종족에서는 화전식 농경이 있었다고 하며, 경작도구로는 위원에서 발굴된 쇠가래가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시대 토지 제도하의 토지이용은 수전(水田), 한전(旱田), 화전(火田) 등의 분화된 농경방식이었으며, 작물은 쌀, 보리, 밀, 콩, 기장 등의 오곡이 재배되었다. 삼, 뽕나무, 닥나무 등의 섬유작물도 재배되었다. 화전이 기록상 분명하고 제도상으로 인정된 것은 고려시대이다. 고려시대의 전제(田制)는 불역전, 일역전, 재역전으로 구분된다. 일역전과 재역전의 경작방법은 근래의 화전경작 방법과 비슷하다. 조선시대에는 화전을 제도상으로 인정했을 뿐 아니라 과세를 매기기 위해 화전이 있는 지역을 기록한 지명록(地名錄)을 작성하기도 했으나, 화전민의 실제 파악은 어려웠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만성화된 인구의 증가, 심각한 토지의 부족으로 소작지의 차경(借耕)에서 밀려나고 있던 빈농, 땅 없는 농민들이 화전 개간에 참여하게 되면서 화전민의 파악은 더욱 어려워졌다. 1918년의 화전면적은 약 15만 3952정보였으며, 1926년에는 15만 2760정보로서 당시 겸화전민(兼火田民)의 가구수는 5만 9683호이고, 순(純)화전민은 3만 4316호였다. 1936년의 화전 총면적은 43만 7730정보로, 그 중 면적이 가장 큰 도(道)는 함경남도의 12만 5183정보이고 다음이 평안북도 12만 2257정보, 강원도 7만 6108정보, 평안남도 6만 7547정보였다. 1938년에는 44만 2044정보이며, 이 중 평안남도가 13만 2187정보로서 가장 크고, 다음은 함경남도 12만 4792정보, 강원도 7만 7460정보, 경상북도 4,477정보, 충청북도 2,247정보, 전라북도 1,036정보, 경기도 904정보, 충청남도 50정보 정도였다. 광복과 더불어 화전민은 대폭 감소하였으며 1955년 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088호였는데 6·25전쟁 후의 식량난으로 다시 증가하여 1961년에는 6,427호, 1965년에 1만 8380호, 1967년에 1만 7200호가 되었으나 산림녹화를 위해 1968년 ‘화전정리법’이 공포되면서 없어졌다. 3. 북한 무장공비 침투로 화전민촌 정리 한국에서도 과거에는 자신의 토지가 없는 농민들이 일구는 화전이 전국 농가의 13%를 차지하고 있었을 정도로 많았다. 6.25 한국전쟁 중 정부의 청야작전 때문에 깊은 산골에 거주하는 화전민들을 강제로 큰 마을로 이주시켰다. 종전 후에도 지리산 뻘치산 토벌작전 때 화전민을 이주시켰다. 청야전술(淸野戰術)은 깨끗이 싹 비워버린 들판을 의미한다. 견벽청야(堅壁淸野), 청야수성(淸野守城)이라고도 불린다. 전쟁할 때 방어측에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전술이다. 방어군이 후퇴하기 전에 적군의 손에 들어간다면 유용하게 쓰일 만한 모든 물자를 없애 버려 적군에게 보급의 한계를 강요하는 전술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당시 일부 남아있던 빨치산의 잔재나 북한 간첩, 공비들의 침투 혹은 게릴라전 전장이 될 지역인 산속에 숨어있는 화전민촌을 없애는 작업에 들어갔다. 1965년부터 화전정리사업과 산림녹화사업을 통해 화전민촌이 많던 주요 산간지역을 정리하였다. 1968년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발생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로 유명한 강원도 평창의 이승복 가족도 화전민이었다. 이때의 충격으로 인해 화전정리사업은 사실상 후방의 게릴라 침투를 막기 위한 군사작전이었다. 화전민촌을 없애 북한 무장공비의 침투를 막았다. 그러나 산업화가 진전되지 않고 농업의 비중이 큰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에는 아직도 화전이 많다. 가난한 농민들 뿐만이 아니라 대규모로 농목업을 하는 농장주, 목장주들이 농장을 만들기 위해 대규모의 밀림을 불지르는 경우가 많아 열대우림은 사라지며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어 국제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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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양산의 고산습지의 가치와 중요성양산의 고산습지의 가치와 중요성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습지의 정의 습지(濕地, wetland)는 영구적 혹은 일시적으로 습윤한 상태를 유지하고 그러한 환경에 적응된 식생이 서식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하지만 습지에 대한 상세한 정의는 나라마다 또는 전문가마다 조금씩 의미가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습지라 함은 자연적이든 인공적이든 관계없이 담수, 기수 또는 염수가 영구적 또는 일시적으로 그 표면을 덮고 있는 지역으로서 내륙습지와 연안습지, 인공습지를 말한다(습지보전법 제2조 1항).’ ‘내륙습지’는 육지 또는 섬 안에 있는 호, 소, 늪 하천 또는 하구 등의 지역을 말한다. ‘연안습지’는 만조시에 수위선과 지면이 접하는 경계선으로부터 간조시에 바다 쪽으로 수심 6m까지의 지역을 말하고, ‘인공습지’는 인간의 활동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복원된 습지를 의미한다. 람사르 협약에서는 식생과 토양보다는 수문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으며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2m의 수심을 초과하는 6m의 수심까지로 습지의 범위를 확대하여 정의하고 있다. ‘습지란 자연 또는 인공이든, 영구적 또는 일시적이든, 정수 또는 유수이든, 담수, 기수 혹은 염수이든, 간조시 수심 6m를 넘지 않는 곳을 포함하는 늪, 습원, 이탄지, 물이 있는 지역’ 또한 습지보전법 제2조 1항에서는 습지에 인접한 하천변과 섬, 그리고 습지 내 있는 저수위시 6m를 초과하는 해양도 함께 고려되고 있으며, 양어장, 농경지 연못, 관수 농경지, 저수지, 운하 등과 같은 곳도 습지로 분류하고 있다. 2. 람사르협약 람사르협약은 단일 형태의 생태계(습지) 보전과 관련된 범세계적 차원의 협약이며, 자연보전 분야에서 이러한 형태의 최초 협약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람사르협약의 정식 명칭은 ‘물새 서식처로서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이다. 이는 1971년 2월 2일에 이란의 람사르(Ramsar)에서 체결되었기 때문에 람사르협약이라 부른다. 일명 습지협약이라고도 한다. 습지와 습지의 자원을 보전하기 위한 국제 환경 협약이다. 지구상의 많은 지역에서 습지는 개발로 인한 관개와 매립, 오염 등으로 훼손되었다. 1960년에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국제수금류·습지조사국(IWRB), 조류보호를 위한 국제협의회(ICBP)는 습지 훼손을 저지할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특히 물새 서식지인 습지가 파괴되고, 이로 인한 개체 감소를 심각한 상황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들 단체는 습지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일련의 국제회의와 실무자회의를 개최하였고, 1971년 2월 2일에 이란의 람사르에서 협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협약은 1975년 12월 21일에 발효되었는데, 2015년 5월 8일 기준으로 168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또한 2,000곳 이상의 습지가 람사르습지로 등록되어 있다. 람사르습지 목록에 한국의 습지가 등록된 것은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심적리 대암산의 용늪이 최초이며, 2018년 11월 현재 23곳의 습지가 람사르습지로 등록되어 있다. 23곳은 대암산 용늪(1997), 창녕 우포늪(1998), 신안 장도 산지습지(2005), 순천만·보성갯벌(2006), 제주 물영아리오름(2006), 울주 무제치늪(2007), 태안 두웅습지(2007), 전남 무안갯벌(2008), 제주 물장오리오름(2008). 오대산국립공원습지(2008), 강화 매화마름군락지(2008), 제주 한라산 1100고지 습지(2009), 충남 서천갯벌(2009), 전북 고창·부안갯벌(2010), 제주 동백동산습지(2011), 전북 고창 운곡습지(2011), 전남 신안 증도갯벌(2011), 서울 한강 밤섬(2012), 인천 송도갯벌(2014), 제주 숨은물뱅듸(2015), 한반도습지(2015), 순천 동천하구(2016), 안산 대부도 갯벌(2018)이다. 괄호 안은 등록 연도이다. 등록면적이 가장 작은 곳은 강화 매화마름 군락지이며, 그 면적은 0.003㎢이다. 등록면적이 가장 넓은 곳은 고창·부안갯벌이며, 그 면적은 45.5㎢이다. 환경부에서는 람사르협약에 가입해야 하는 이유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꼽고 있다. 첫째, 사람들로 하여금 소중한 자원인 습지와 습지 생태계를 보전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우며, 효과적인 습지보전정책을 개발하고 집행할 수 있다. 둘째, 국내 습지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을 일으키고 주변국과의 협력을 강화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철새이동경로상의 국가들과 철새보호협정을 추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주요 종을 보호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 중이다. 셋째, 환경 외교를 하는 데 있어 우리나라의 대외 위상을 높일 수 있다. 3. 습지의 가치 (1) 홍수조절의 기능 습지는 홍수조절에 있어서 절대적인 기능을 발휘한다. 습지는 토사와 물을 저장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홍수가 발생하였을 때 하천의 물이 하류로 흘러가는 속도를 늦추는데 큰 역할을 한다. 미국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0.4 ha(4,000 ㎡, 약 1,200평)의 습지는 6,000 ㎥ 이상의 수량을 머금을 수 있고, 이는 습지 1 ㎡ 당 1.5 ㎥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2) 해안선의 안정화 및 폭풍방지 기능 연안습지는 폭풍이나 다른 기상 이변으로 발생된 큰 파도로부터 육지를 보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람과 파도, 조류를 완화시키며 해상으로부터 육지로 들어오는 각종 물질을 습지 내에 퇴적시키는 역할도 수행한다. (3) 영양분과 먹이의 공급 기능 습지는 물의 이동을 지연시키며 영양분과 각종 퇴적물을 함유하게 된다. 내륙범람원(floodplain)과 하구의 삼각주는 홍수의 유속을 느리게 하면서 범람지역(침수지역)에 많은 양의 영양분을 제공하고, 이러한 영양분은 물 속에서의 미생물 활동과 습지식물의 성장을 왕성하게 하여 수서곤충이나 어패류에게 먹이를 제공한다. 이러한 수서곤충과 어패류는 또한 물새나 양서ᆞ파충류, 소형 포유동물의 먹이가 됨으로써 습지생태계의 다양한 생물상을 유지하게 된다. (4) 기후 조절의 기능 습지는 지상에 존재하는 탄소의 40% 이상을 저장할 수 있으며, 특히 이탄지(peatlands)와 산지습지는 중요한 탄소 흡수지 및 저장소가 된다. 지표면의 약 6%를 차지하는 습지는 거시적인 측면에서는 대기 중으로 탄소 유입을 차단하여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의 양을 적절히 조절해주며, 미시적 측면에서는 특정 지역의 대기온도 및 습도 등 국지적인 기후를 조절하는 기능을 지닌다. (5) 수질정화의 기능 습지의 식물 및 토양은 인, 질소 등의 과잉 영양소를 처리함에 있어서 매우 효과적이다. 미국 플로리다의 삼나무 늪지(cypress swamps)는 이용된 물이 다시 지하로 스며들기 전, 유입된 질소의 98%와 인의 97%를 제거한다고 한다(Ramsar, 2002). 대부분의 습지식물은 농경 하수, 공장 및 탄광 폐수 등에서 배출되는 유독성 물질을 제거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특정 습지식물은 그 세포조직 안에 식물주변 물 속에 있는 중금속을 100,000배 농도로 축적할 수 있다고 밝혀져, 습지의 수질정화 기능의 가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6) 생물종다양성 유지 기능 담수습지에는 전 세계 생물종의 40% 이상, 특히 포유류의 12% 이상이 서식하고 있으며, 특히 아마존 강에는 1,800여 종의 어류가 서식하고 있다. 일부 습지에서는 멸종위기에 처한 중요한 종들이 서식하고 있다. 종다양성 측면에서 열대우림과 견줄 수 있는 산호초 지대에는 해양생물의 25% 정도가 서식하고 있다. 산호초는 4,000여 종의 어류와 800여 종의 산호를 보유하고 있다. (7) 생산적 기능 습지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어패류와 같은 음식과 목재, 땔감 등 각종 생활 물품들을 제공하고 있다. 약 10억의 인구가 어류를 통해 단백질을 섭취하고 있고, 습지식물 중 하나인 벼에서 수확되는 쌀은 아시아 지역 30억 명의 인구에게 주요한 식량수단이다. - 여가활동과 관광을 위한 기능 다양한 동식물과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지닌 습지는 생태관광지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훌륭한 경관을 지닌 수많은 습지지역이 국립공원, 세계유산(World Heritage) 지역 또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고, 이러한 지역들은 관광과 여가활동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인해 상당량의 관광수입을 창출하고 있다. 또한 환경교육을 위한 장소로서의 가치도 높아 많은 청소년들에게 생태계에 대한 체험학습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습지탐사 또는 조류관찰과 같은 생태관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8) 문화적인 가치 문화적인 가치는 습지의 기능으로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으나, 여러 습지 지역이 종교적, 역사적, 고고학적 또는 문화적 관점에서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4. 양산의 고산습지인 신불산 습지 양산에서 환경부의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2021년 12월 기준)된 곳은 두 곳이다. 첫째, 천성산 화엄벌에 있는 화엄늪으로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에 있다. 규모는 0.124㎢로 산지습지이며, 2002년 2월 1일에 지정되었다. 둘째, 신불산 고산습지는 양산시 원동면 대리 산92-2 일원이다. 규모는 0.308㎢이며, 희귀 야생동식물이 서식하는 산지습지로 2004년 2월 25일에 지정되었다. 신불산 고산습지는 노란목도리담비, 삵, 하늘다람쥐, 고슴도치, 도룡뇽, 무당개구리, 두꺼비, 까치살모사, 독수리, 말똥가리, 황조롱이, 끈끈이주걱, 이삭귀개, 자주땅귀개, 진퍼리새, 억새, 사초, 꽃창포, 큰방울새란, 좀어리연 등 많은 희귀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신불산 고산습지 근처에는 거대한 바위가 줄지어 있다. 옛날 신설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있어 신선바위라고 부른다. 양산시 원동면 대리 산92-2 일원 해발 730m~750m 산 정상부 계곡을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약 0.308㎢ 규모의 산지습지이다. 총 4개의 습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식물이 썩지 않고 이루는 토층인 이탄층이 잘 형성되어 있다. 습지 인근 주민들은 달포늪 또는 신선늪이라고 불렀다. 신불산 고위평탄면에 발달한 소택지이다. 습지에는 이탄층이 발달되어 있어 정화 기능이 뛰어나고, 다양한 생물들이 살고 있다. 습지는 2002년 8월에 양산 녹색연합(공동 대표 : 양산신문 우대하 전 대표)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신불산 고산습지는 양산 뉴월드 골프장 조성사업으로 사라질뻔 하였다. 골프장이 조성되는 단계에서 형식적인 환경영향평가를 하여 환경단체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부산환경운동연합에 의하면 길평엔지니어링이 조사한 1997년 10월의 환경영향평가서, 1998년 1월의 보완조사 등이 모두 부실 조사로 드러났다. 환경단체의 노력으로 습지의 훼손을 막았다. 고산습지는 산불로 인해 위기를 맞기도 했다. 2006년 4월 8일 성묘객의 실화로 인한 산불이 발생해 신선바위 일대의 고산습지인 2늪과 3늪까지 불길이 번졌다. 관찰을 위해 설치한 임시목도를 비롯해 표지판까지 모두 불탔다. 신불산 고산습지 인근에는 양산팔경인 임경대, 천태산, 그리고 낙동강변의 원동 습지가 있다. 천태산, 오룡산, 토곡산, 능걸산 등의 등산코스와 연계가 가능하다. 또한 에덴밸리리조트에서 스키와 골프, 카트레이싱, 루지, 하늘자전거, 버기카, 승마 등을 이용할 수 있다. 양산동원로얄CC도 가까운 곳에 있다. 펜션이 많은 배내골은 여름철 최고의 휴양지로 인기를 얻고 있다. 봄철 매화꽃이 필 때는 원동매화축제가 열리는 영포리의 명품 매화산책로, 천년 고찰인 신흥사도 가까운 곳에 있다. 낙동강변의 기차와 매화꽃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순매원과 전망대인 녹색사진 촬영명소 등이 경부선 원동역 근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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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매곡마을 당산나무와 단오 굿 페스티벌매곡마을 당산나무와 단오 굿 페스티벌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박사 심상도 매곡마을 당산나무와 단오 굿 페스티벌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박사 심상도 1. 커뮤니티 도서관 다됨더 웅상지역의 매곡마을에는 ‘커뮤니티 도서관 다됨더’에서부산예술대학교 생활문화예술과 강열우 교수 주관으로 운영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2022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지역문화진흥원에서 ‘생활문화공동체 활성화’ 공모사업에 선정된 프로그램이다. 매곡마을 유일의 문화복합센터인 ‘커뮤니티 도서관 다됨더’는 우리동네 사랑방이다. 위치는 양산시 매곡1길 14-1이다. 도서관 개관식은 2022년 3월 26일에 하였다. ‘다됨더’는 ‘다되다’의 사투리로 어떤 것이 성취되거나 완전히 변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 ‘다됨더’는 매곡마을 풍물패 서영수 단장의 일상화법으로서 평소 풍물수업 중 새로운 장단을 익히거나 행사 준비로 단원들이 합주의 어려움을 겪을 때 ‘다~됨더’라고 늘 긍정의 용어로 사용하며 단원들을 격려해왔다. 커뮤니티 도서관 다됨더는 이런 긍정의 메시지를 도서관 운영의 기본 컨셉으로 삼아 ‘나’와 ‘너’가 아닌 ‘우리’라는 커뮤니티 활동 위주로 사람과 사람을 잇고, 접속하여 지역사회에 양질의 컨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주요 프로그램 첫 번째, 매곡마을 구경(九景) 구경가세이다. 매곡마을의 9가지 지형지물을 이용한 관광길을 활용한 트레킹 프로그램으로 4월~10월에 운영한다. 마을 주민 해설사의 안내로 동네를 한 바퀴 돌며 구경하는 것이다. 두 번째, 9경 구경하며 줍깅, 폐현수막을 활용하여 만든 나만의 에코백으로 매곡마을 관광길에 쓰레기를 줍는 프로그램으로 4월~9월에 운영한다. 세 번째, ‘참나를 찾아서’는 명상의 다양한 패턴을 도입하여 명상 안내자와 함께 진행하는 멸상 프로그램으로 4월~12월에 운영한다. 네 번째, 인문학 수다방으로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진행되는 인문학 강좌로 4월~12월에 운영한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매곡마을 굿축제로 단오날 ‘그래도 춘향이는 행복했다’를 5월 28일에 공연했다. 금년 단오가 6월 3일 금요일이어서 주말인 토요일로 앞당겨 단오굿을 미리 하였다. 기타 프로그램으로 통기타 클래스, 삼도설장구 클래스, 108배와 명상 동아리, 독서 모임 등을 운영한다. 매곡마을에 정착한지 6년이 된 강열우 교수가 ‘커뮤니티 도서관 다됨더’를 운영하고 있다. 마을주민 수도 적고, 대부분 연로한 어르신들이고, 어린이가 3명 정도밖에 없어 실질적인 도서관 운영은 어렵다고 한다. 정부 공모 프로그램에 도전하여 운영비를 지원받았다. 양산시에서도 관심을 갖고 지역사회 도서관 운영에 시비로 지원해야 하겠다. ‘커뮤니티 도서관 다됨더’는 건물 외관이 아름답고 마당에는 꽃을 심고 작은 수로를 조성하여 수련을 키우고 있다. 6월 3일 필자가 방문했을 때 매곡마을 구경을 온 부부가 도서관으로 들어와 책도 보고 강열우 교수가 무료 제공하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도서관은 개방된 공간이다. 매곡마을 주민전시회 ‘나도 작가다’는 1호 작가인 작은 나무 정성원 작가의 어반 스케치전이 3월 26일~4월 3일까지 열렸다. 제2의 고향인 매곡마을을 그린 그림 속에서 마을의 모습을 찾아본다. 어반 스케치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혹은 여행을 간 지역으로 현장에서 그리는 그림을 말한다. ① 그림 속 매곡마을 찾기, ② 다됨더 도서관과 어반 스케치, 다됨더 도서관의 조경과 함께 감상하기. ③ 매곡 구경하세,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작품을 선정하여 그 장소를 방문하여 인증샷 남기기. ④ 무념무상 멍~상, 다됨더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맛있는 커피&차를 뽑아들고 햇살이 잘 드는 곳에 앉아 그림을 감상하며 무념무상 멍 때리기. 2. 매곡마을 구경(九景) 매곡마을은 달성 서씨 집성촌으로 이루어져 있어 주민의 90% 정도가 달성 서씨라고 한다. 매곡의 옛 이름은 증산이며, 매일이라고도 하였다. 매화나무가 많아서 매곡이라고 하였다. 매일은 소심산을 중심으로 산의 안쪽을 내산, 바깥쪽을 외산이라고 하였다. 매곡마을 구경의 제1경은 마을 당산으로 도로변 마을 입구에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바로 옆에 버스정류장도 있고, 정자, 벤치, 주차공간 등이 있어 구경 온 외지인들이 주차하고 돌아보기에도 편하다. 당산의 제일 큰 나무는 마을에서 할배나무로 불리며, 주민들이 신성시하고 있다. 당산은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돌 축대를 원형으로 둥글게 4단으로 쌓아 맨 꼭대기에 할배나무가 있다. 할배나무는 높이 14m, 나무 둘레 4.2m이다. 할배나무 바로 밑에 당집이 있다. 마을의 당산이 돌 축대 때문에 평면이 아닌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매우 인상적이고 아름답다. 당산나무는 총 11그루가 있는데, 최고 수령의 느티나무는 양산시 지정 보호수로 2018년 기준 335년이다. 강열우 교수에 의하면 양산시 공무원이 마을에 현장 조사 나왔을 때 주민들이 400년이 넘었다고 했는데, 반영하지 않고 335년이라고 정해버렸다고 하였다. 주민들은 느티나무 수령을 정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2경은 의병대장 서몽호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활약한 분이다. 서몽호(徐夢虎)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활약한 분이다. 자는 병보(炳甫), 면(勉)의 아들이다. 서몽호는 매곡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삼종형(三從兄 : 8촌) 서인충(徐仁忠)과 창의해 많은 공을 세워 훈련주부로 특채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선무원종 1등공신 서인충과 함께 동래성을 구원하러 좌병사 이각, 울산군수 이언함과 함께 출정하였다. 그 후 기박신성(旗朴山城)에서 군비를 재정비해 병영성을 기습해 큰 전과를 세웠다. 문천회맹(文川會盟)에 참가한 후 문수산 청송사에서 군비를 정비해 경주의 의견대와 봉길전투에 참가하고 장기의 소봉대까지 진격하여 공을 세웠다. 매곡마을에 있는 증산사(甑山祠)에서 향사하고 있으며, 묘도 이곳에 있다. 제3경은 작은나무숲학교, 제4경은 매곡저수지, 제5경은 편백나무숲으로 그네, 벤치, 인디언집 등이 있다. 제6경은 뽀뽀길로 연인들이 다정하게 걸어가기 좋은 코스다. 아베크족들이 좋아할 아늑한 분위기로 저절로 키스를 부르는 코스다. 제7경은 선녀탕으로 외부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더울 때 목욕하기 좋은 곳이다. 제8경은 소망탑, 마지막으로 제9경은 이니 하우스(문재인 전 대통령 집)로 만약 대통령이 통도사가 있는 하북면 평산마을로 이사 가지 않았으면 인기 있는 관광코스가 될 뻔했다. 강열우 교수에게 9경을 어떻게 선정했는지 물어보니 주민들과 협의하여 결정했다고 하였다. 앞으로 마을 주민들이 외부 관광객 안내를 위해 해설사로 활동할 것이라고 하였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므로 9경을 가장 잘 알고 있지만 재미하게 핵심 포인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연습과 약간의 공부가 필요하다. 3. 2022 매곡마을 단오 굿 FESTIVAL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지역문화진흥원이 주관하는 사업으로 지원내용은 일상적 삶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주민주도의 다양한 생활문화활동이다. 매곡마을 ‘커뮤니티 도서관 다됨더’는 관계형성형에 선정되어 1천 5백만 원을 지원받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2022 매곡마을 단오 굿 페스티벌’은 이 사업 지원비로 진행하였다. 주관은 커뮤니티도서관 다됨더, 장소 매곡마을 당산나무 아래, 기간 2022년 5월 28일 14시부터, 연출 부산예술대학 강열우 교수, 총감독 서영수 매곡마을 풍물패 단장, 기획 운영 김혜림. 행사 순서는 14시부터 1부 속닥속닥 시골가요제, 승무북 놀음(매곡마을 풍물패 난장), 매곡마을 노래자랑. 색소폰 연주(매곡마을 주민 서경완), 15시부터 2부 ‘마당극 그래도 춘향이는 행복했다’ 단장 서영수, 단원 김병한, 김현숙, 김혜자. 박지은, 서원수, 송영숙, 송순금, 정성원, 허혜정. 뮤지컬 ‘맘마미아’ - 박지현, 김세연, 삼도설장구(밝은덕중학교), 마술쇼 홍길동전(마술사 류승호), 영남사물놀이(매곡마을 풍물패 난장), 체험행사 13시~16시, 떡메치기, 매곡마을 대박 터뜨리기. 축제를 구경해보니 외부인들은 거의 없고 마을 주민들이 한데 어울려 편하게 즐기는 동네 잔치였다. 주최측에서 제공하는 찹쌀떡도 먹고 음료수도 마시고, 나눠주는 응원도구를 흔들며 즐겁게 놀았다.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도 나와서 단오굿을 감상하고 노래자랑에 나가 상품도 받는 정겨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전통 세시풍속인 단오제 행사도 요즘 거의 사라지고 있는데, 단오 굿 페스티발을 개최하는 것은 전통문화 보존과 계승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단오의 ‘단(端)’자는 처음 곧 첫 번째를 뜻하고, ‘오(午)’자는 오(五), 곧 다섯의 뜻으로 통하므로 단오는 ‘초닷새[初五日]’라는 뜻이 된다. 일년 중에서 가장 양기(陽氣)가 왕성한 날이라 해서 큰 명절로 여겨왔고, 여러 가지 행사가 전국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단오는 더운 여름을 맞기 전의 초하(初夏)의 계절이며, 모내기를 끝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제이기도 하다. 단오의 풍속 및 행사로는 창포에 머리감기, 쑥과 익모초 뜯기, 부적 만들어 붙이기, 대추나무 시집보내기, 단오 비녀꽂기 등의 풍속과 함께 그네뛰기·씨름·석전(石戰)·활쏘기 등과 같은 민속놀이도 행해졌다. 집단적인 민간행사로는 단오제·단오굿을 하기도 하였다. 기풍으로는 가수(嫁樹)가 있다. 가수는 나뭇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놓아 많은 열매가 열리도록 비는 ‘나무 시집보내기’ 풍습으로 정월 대보름에도 한다. 특히, 단오 무렵이면 대추가 막 열기 시작하는 계절이기에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놓아 대추풍년을 기원하니 이를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라 한다. 민속놀이로는 그네뛰기와 씨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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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칼럼,양산의 관문양산의 관문 물금역 특별기획전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양산시립박물관에서는 2022년 4월 26일부터 7월 24일까지 3개월간 ‘양산의 관문 물금역’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물금역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사를 거치면서 교통의 요충지로 지금까지 양산 역사의 대표적 문화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 물금신도시의 개발로 인한 인구증가로 KTX 고속전철의 정차를 희망하는 시민들의 여망이 높아졌다. 윤영석 국회의원, 김일권 양산시장 등 관계자의 노력으로 시민 여론이 수렴되어 2022년 4월 KTX 물금역 정차가 확정되었다. 양산시립박물관에서는 이를 계기로 물금역에 관한 특별전시를 열고 있다. ① KTX 고속전철의 물금역 정차를 기원하는 의미로 양산의 관문 역할을 했던 경부선 물금역의 역사와 관련 자료를 소개하여 명품 자족도시 양산의 발전상을 알리고 및 시민들의 애향심 고취 도모. ② 코로나 감염병으로 힘들어하는 시민들에게 사라져가는 물금역 관련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에 대한 전시를 통해 기차문화의 향수와 추억을 느낄 수 있는 힐링공간 제공. ③ 시민들이 소장하고 있는 물금역 관련 옛 사진 및 기차표 등 관련 자료 등을 보도자료 및 공고를 통해 수집하여 관람객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전시로 구성하였다. 물금역의 지나온 여정을 과거, 현재, 미래지향 순으로 총 100여 점의 자료, 사진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물금역을 통해 통도사를 여행한 조선철도국의 여행가이드 자료와 경부선 개설 당해년도에 제작된 철도지도가 새롭게 소개된다. 물금역 역무원들이 쓰던 옛 기차도구들, 각종 기차표 등과 2003년 철거 전 옛 물금역 건물형태의 포토존을 설치하였다. 1917년 물금광산이 일본 광산업자에 의해 처음 개발돼 1960년대 물금역을 통해 운반되어 해외수출에까지 이르게 되는 사연 및 관련 시민들이 제공한 미공개 사진과 영상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번 특별전은 양산의 철도발달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철도를 중심으로 한 양산의 역사, 문화, 통도사 관광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볼 수 있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물금역의 변천과정을 기차표, 엽서, 역무원 복장, 기차의 통신과 운영 등의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1. 물금역 물금역은 양산시 물금읍에 있는 철도역으로서 양산 화물선의 기점이다. 1905년 1월 1일 경부선 전 구간 개통과 함께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다. 1939년에 지어진 옛 물금 역사는 녹색의 삼각 박곡지붕과 수직창을 갖춘 전형적인 간이역의 모습으로 2001년 인기리에 상영된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배경이기도 하다. 2003년 3월 양산화물컨테이너기지 인입선로 건설에 따라 물금역 구내를 확장하기 위해 지어진 역사는 본관보다 높게 설계된 아치형 창문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는 현대식 건축이다. 현재 하루 1일 편도 40편(상행 20편, 하행 20편)의 무궁화호와 ITX-새마을이 정차한다. 2. 물금역 연혁 - 1905년 1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개시 - 1939년 6월 1일 역사 신축 준공 - 1968년 12월 30일 화물창고 준공 - 1971년 3월 2일 화물인상선 부설 - 1997년 10월 1일 소화물 취급 중지(철도청 고시 1997-1호) - 1999년 1월 1일 소화물 취급 중지(철도청 고시 1998-72호) - 2003년 9월 23일 신역사 준공 - 2006년 5월 10일 양산화물선 개통(물금역~양산화물역 간) - 2009년 10월 31일 화물 취급 중지(국토해양부 고시 2009-1006호) 3. 물금의 어원 물금(勿禁)의 옛 이름은 황산(黃山)이다. 오봉산 일대는 가야시대 철광석을 캐던 곳으로 철 산지에서 항상 벌겋고 누런 녹물이 흘러내려 황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물금은 신라와 가야국이 서로 전쟁이 나더라도 자원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한 이곳에서만큼은 ‘통행이나 물품거래를 금하지 말자’라는 뜻과 물[水]과 철을 표기하는 금(金)이 합쳐져 쇠가 많이 나는 곳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4. 황산역에서 물금역으로 현재 물금역이 위치하고 있는 물금읍 서부마을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동래에서 한양을 연결해주는 영남대로의 주요 거점이었다. 그래서 낙동강과 도로가 만나 한양과 동래, 언양, 경주 지역으로 넓게 퍼지는 사통팔달의 통로를 이용한 역참(驛站)이 만들어졌다. 조선말까지 명맥을 유지한 경남 최대역 중의 하나였던 황산역(黃山驛)이 자리 잡게 되었다. 현대에 들어와 운송수단이 발달하고 기차가 물류와 교통의 중심수단으로 재편되었지만 이러한 지리적 이점은 황산역이 있었던 위치에 물금역을 개설하게 되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5. 물금역의 위치 현재 물금역은 양산시 물금읍 황산로 347에 위치하고 있다. 1905년 1월 1일 보통역으로 개설된 이래 1939년 복선철도 공사 준공으로 인해 이전 신축되었으나 원래의 위치는 현재 위치에서 크게 변동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1939년 신축된 역사 건물은 십자(十字)형 맞배지붕 형태를 기본 구조로 하고 있지만 대합실과 역무실 사이의 공간의 지붕부분을 높게 들어 올려 삼각형의 박공면을 형성하고 지붕면에서 돌출시켜 전면입구를 강조한 유형으로 물금역, 삼랑진역, 신녕 역사 등과 유사하다. 6. 경부선의 설치와 물금역 경부선(京釜線)은 서울과 부산을 잇는 복선철도로 총 길이는 444.5km이다. 1904년 12월 27일에 완공되고, 1905년 1월 1일에 전 구간을 개통하였다. 2006년 12월 8일에 전 구간이 전철화로 개통되었다. 명칭은 서울의 옛 명칭인 경성과 부산을 잇는 철도로 경성과 부산의 앞 글자를 따서 경부선이라 하였다. 일본은 경부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1901년 8월 21일에 서울 영등포와 부산 초량에서 각각 착공식을 거행하였다. 군수물자 수송 등의 이유와 병력수송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우리나라의 중추 간선으로서 기능을 하였다. 경부선의 양산구역은 원동면을 기점으로 물금역을 경과하여 동면 가산리를 종점으로 하고 있다. 7. 일제강점기의 물금역 일제는 제국주의 확장정책에 따라 철도를 중점적으로 활용하였으며, 1917년 물금광산이 개굴(開掘)되어 양산에서 이송할 화물이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전후 군 보급 및 군수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수단으로 철도가 가장 효과적인 보급선 루트임을 감안하여 기차들이 빠르게 이동할 수 있도록 경부선 철도 복선화 공사를 추진하게 되고, 그 결과 더 많은 물자의 운송을 이루게 된다. 1939년 6월 물금역 건물의 신축 이전은 복선화 공사를 통해 역의 권역과 규모가 확장되면서 이루어지게 되며, 2003년 철거되기 전 물금역 건물의 기본 형태를 지니게 된다. 일제강점기 물금역 주변에는 각종 공공시설 및 상점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물금역 바로 앞에는 물금우체국, 상서면사무소, 물금공립소학교 등의 관공서와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상점들이 다수 있었다. 8. 물금광산 원동면 화제리 산72번지에 위치한 물금광산은 1916년 후쿠오카현 와카스키 노보리(若杉昇)라는 광산업자에 의해 개발되어 허가받은 뒤 1917년부터 개굴(開掘)이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측 함유량 조사에 따르면 광산 암반 45%의 철광석을 지닌 우수한 광산으로 조사되었다. 일본의 광산업자들은 원동면 화제리에 화약창고를 두고 광산개발을 위한 발파작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여 철광석을 채취하였다. 9. 물금역에서 철광석을 운반하다. 1960년대 본격적으로 철광석을 생산하게 된 물금광산은 많은 양의 철광석을 채취하게 됨으로써 전국각지에서 인부들이 찾아와 물금지역 경기가 활성화 되었다고 한다. 당시 기록과 사진을 통해 물금광산에서 채취한 철광석을 많은 노동자들이 물금역에서 화물 기차에 운반하였다. 실제 물금광산의 철광석은 철을 60% 함유한 양질의 고품위 철로 자석에 잘 붙는 자철광, 적철광, 자류철광이 생산돼 인천제철소에 공급되었다. 10. 영화의 배경 물금역 2002년도 500만 관객을 동원하여 여배우 전지현을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양산 물금의 오봉산에서 물금역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오봉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물금역과 낙동강의 풍광은 2003년 옛 물금역 건물이 철거되기 직전에 찍은 영상으로 예전 물금역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11. 보통역에서 KTX 정차역으로 양산은 정주기업의 증가와 성장 발전에 힘입어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물금신도시의 대단위 아파트 주거단지의 조성으로 시민들의 각종 편의시설에 대한 수요는 높아지고 있으며, 고속전철 이용에 대한 욕구도 강해졌다. 현재 양산시민들이 KTX를 이용하려면 20km 떨어진 부산 구포역으로 가서 갈아타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 양산시는 이에 양산시민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관계기관과 긴밀히 협의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으며, 그 결과 올해 4월 KTX 물금역 정차가 확정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양산시는 승강장 확장 및 준비를 거쳐 2023년 초에 본격적인 KTX 이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12. 메가시티의 중심으로 – 물금역의 중추적 역할 양산시는 부산, 울산을 연결하는 메가시티 건설의 중추적인 가교 역할을 하는 곳이 될 것이다. 각종 산업단지, 부산대학교 병원을 중심으로 하는 의료 클러스터 효과, 각종 복지시설, 교육시설, 문화시설의 증가로 인한 인구급증이 예상된다. 202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명실공히 부울경 메가시티의 중추이다. 이러한 현실이 구체적으로 가시화 될수록 양산의 중심으로 거듭나는 물금, 증산지역의 역할은 매우 중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물금역은 과거와는 또다른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양산시는 KTX 고속전철의 물금역 정차야말로 부울경 메가시티의 꿈을 실현시키는 촉매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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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한국궁중꽃박물관소개한국궁중꽃박물관 소개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한국궁중꽃박물관 개관 양산시에 세계 유일의 한국궁중꽃박물관이 2019년 9월 21일 개관하였다. 한국궁중꽃박물관은 경남 양산시 매곡외산로 232 일대 4,300㎡ 부지에 궁중채화를 전시하는 ‘수로재’, 궁중채화 전수관인 ‘비해당’ 등 2개 동으로 구성돼 있다. 박물관이 있는 매곡마을은 매실나무가 많은 곳이어서 매곡(梅谷), 매실, 매일이라고도 했다. 매화꽃이 지천으로 피는 명당자리에 한국궁중꽃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지명과 박물관 이름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수로재(水路齋)는 지상 2층 연면적 920㎡ 규모에 도구 전시실, 밀랍실, 문헌자료실, 수장고, 특별전시실 등이 설치됐고, 비해당(匪懈堂)은 지하 1층 지상 1층 연면적 460㎡ 규모로 내·외진연실, 작업실, 전시실 등을 갖추고 있다. 조선 시대 궁궐에서 연회를 할 때 사용되던 궁중채화(비단, 모시, 종이, 밀랍 등으로 만든 꽃)를 복원·전시·계승하는 박물관이다. 궁중채화는 예와 악을 국시로 하는 유교 국가의 장엄하고 신비로운 황실 문화인데, 200여 년간 중단된 것을 황수로 채화장이 복원한 것이다. 궁중의 잔치를 장식하기 위해 갖가지 재료를 다듬고 염색해 만든 화려한 가화(假花)이다. 모란과 매화와 같은 꽃뿐만 아니라 벌, 나비, 새 등 상서로운 의미를 지닌 꽃과 곤충, 동물을 정교하게 재현해 왕실의 품위를 드러낸 조선시대의 주요한 장식품이기도 하다. 채화에는 행사장에 쓰는 준화(樽花), 상차림에 쓰는 상화(床花), 머리에 꽂는 잠화(簪花) 등이 있다. 조선조 왕이 등장하는 잔치에는 적어도 2만여 개의 크고 작은 형형색색의 채화가 연회장을 장식했다. 박물관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24호 황수로 채화장이 사비 150억 원 등 200억 원을 들여 건립했다. 황 채화장은 오래전 한국궁중채화연구소를 만들어 궁중채화의 기법과 형태, 크기가 수록된 ‘궁중의궤’를 바탕으로 50여 년간 채화의 연구와 보존, 복원에 힘써 왔다. 전시관인 수로재와 비해당은 조선 시대 궁궐 내 건물을 재현한 전통 한옥으로 건립되었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과 조정구 구가도시건축연구소 대표가 건물을 설계하였다. 국가무형문화재 제74호인 대목장 이수자 조재량, 제48호 단청장 동원 스님, 제120호 석장 이재순, 경북도 최고장인 석공예 김규영, 대한민국 명장 석공예 김상규 등 10여 명의 국가무형문화재 장인과 명장이 공사에 참여했다. 상량문은 통도사 방장 성파 스님이 썼다. 2. 한국궁중꽃박물관 전시 작품 박물관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면 팔작지붕으로 된 전통 한옥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이 바로 궁중채화를 전시하는 수로재 다. 수로재 2층에 있는 제1전시실에는 ‘고종 정해진찬의(高宗 丁亥進饌儀)’가 재현돼 있다. 고종 정해진찬의는 고종 24년인 1887년 신정왕후 조 씨의 팔순 잔치를 재현한 것이다. 전시실에는 대왕대비, 왕, 왕세자, 왕비, 왕세자빈에게 올린 23기의 찬안 7상이 재현돼 당시 궁중의례의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채화인 꽃은 이들 음식과 함께 곳곳에 장식돼 있다. 1층에 있는 제2전시실(납매실)에는 사군자의 하나인 매화 중 윤회매가 걸려 있다. 벽에 걸려 있는 매화 가지에 피어난 꽃은 비단과 밀랍을 이용해 제작됐다. 특히 납매실 뒷편 벽에는 홀로 지팡이를 짚고 눈길에 매화를 찾아 떠난다는 방랑시인 김시습의 영상이 윤회매의 배경이 되면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제3전시실은 서화실로, 아름다운 금강사위색보살도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서화류, 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기명들을 전시하고 있다. 제4전시실은 길쌈실로 조선 시대 여인들의 한과 삶이 담겨 있는 베를 짜는 풍경과 각종 채화 도구를 볼 수 있다. 두 번째 만나는 건물인 비해당 제1전시실에는 순정효황후 장지마을 내실 모습을, 제3전시실은 ‘순조 기축년진찬 지당판’이 각각 재현돼 있다. 지당판은 칠보 장식의 등용을 중심으로 연꽃과 연잎, 모란 꽃병이 장식된 실내 연못으로, 지붕에 연잎을 닮은 초록색 지붕과 양쪽에 두 개의 술이 달린 것이 특징이다. 이밖에 조선 후기 가마인 ‘사인교’ 실물도 전시돼 있다. 수로재 뒤편에는 600㎡에 달하는 정원과 시원한 물줄기를 느낄 수 있는 폭포가 조성돼 웬만한 연회도 가능하다. 폭포 정원, 야외에서는 기념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 3. 국가무형문화재 제124호 황수로 궁중채화장 이력 한국궁중꽃박물관 설립자이자 초대 관장의 본명은 황을순, 아호는 수로이다. 2013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24호 궁중채화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동국대 종신 석좌교수이며 경남도 문화재위원이다.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를 꾸준히 개최하였으며, 국외 전시 및 국내 전시를 통해 궁중채화 문화를 널리 알리고 보급하고 있다. 황수로 채화장이 채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외조부인 이수창(李秀彰 : 1885~1995)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태종의 21세손인 외조부는 고종 때 궁내부(宮內府) 주사로 근무하였다. 당시 궁내부에서 반화관(頒花官) 임무를 맡고 있던 종친과 교유하면서 궁중예법, 염색, 채화에 대한 견문과 밀풀 제작법 등 여러 자료를 접하게 되어 이를 부인 박달망(朴達望 ; 1883~1965)에게 전수하였다. 누에를 길러 양잠업을 하면서 명주를 직조하였던 박달망은 궁중염색법과 밀을 삭혀 만든 밀풀을 직조한 명주에 적용하여 염색을 하고 풀을 먹여 뛰어난 품질의 명주를 생산하여 가업이 번창하게 되었다. 이수창의 직조가업은 딸과 사위인 이복이와 황래성(黃來性 : 1914~1997)이 이어받았다. 이복이는 어머니 박달망과 명주를 짜면서 틈틈이 염색을 하였고 취미로 도화와 월계화를 만들었다. 어린 황을순은 명주를 짜고 꽃을 만들던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보면서 성장하였다. 부친 황래성은 1956년 섬유염색 및 가공업체인 태창기업을 창업하였다. 황을순은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일본에 잠시 거주하면서 일본의 꽃꽂이를 접하게 되었고, 우리의 채화 가치의 중요성에 눈뜨게 되었다. 1960년 귀국 즉시 수로회를 설립하여 꽃꽂이를 가르치면서 물려받은 채화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새로 수집하였다. 사찰 연꽃과 국화 기법을 1970년대 후반 사천 다솔사 주지인 효당 스님에게 배웠다. 무속에서 쓰는 지화는 1980년대 초에 동해안별신굿 지화장인 김영달, 김석출에게서 배웠다. 사찰의 가화기법은 2000년대 초 대안사 주지를 지낸 이도주 스님으로부터 전수받았다. 2006년 한국중중채화연구원을 설립하였다. 4. 국내외 전시 1) 국내 전시 - 2014년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 ‘아름다운 한국채화’, 국립고궁박물관 - 2012년 ‘의궤로 보는 한국 궁중 채화’ 국립부산국악원 - 2010년 궁중 연례악 공연 ‘왕조의 꿈 태평서곡(太平序曲)’ 참여, 국립국악원 -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조선시대 향연과 의례 초대전 - 2005년 APEC 정상회의 개최 기념 특별전 ‘조선왕조 궁중 채화전’, 부산시립박물관 - 2004년 세계박물관대회 특별기획전 ‘조선왕조 궁중 채화전’, 덕수궁 중화전 - 1993년 ‘청산별곡(청산별곡)’, 부산문화회관 - 1992년 제1회 국제 꽃예술 심포지움 신화(神華) 개최, 부산문화회관 2) 해외 전시 - 2016년 미국 클리블랜드뮤지엄 개관 100주년 초대전, ‘영원의 신수’ - 2013년 ‘세계문화유산박람회’, 프랑스 파리 카루셀 뒤 루브르(Carroussel Du Louvre) - 2013년 ‘한국공예의 법고창신전’(法古創新展), 이탈리아 밀라노 트리엔날레 디자인 전시관 - 2007년 ‘한국전통공예전’, 미국 유엔본부 - 2007년 화·예(花·藝) 문화 국제학술회 초대전, 대만 국립역사박물관 - 2000년 한국환상곡(韓國幻想曲), 일본 정원박람회, 일본 고베 - 1999년 ‘99 인도 국제산업박람회, 인도 뉴델리 - 1990년 오사카 국제정원박람회, 화무(花舞) 외 다수 5. 한국궁중꽃박물관 관람 안내 박물관을 관람할 때 안내원이 코스별로 안내해주며, 전시품 사진은 마음대로 찍을 수 없다. 기자, 연구원 등은 보도와 연구목적으로 방문할 때 사전에 공문으로 박물관 측에 연락하여 허락을 받아야만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특별기획전인 조선여인의 장신구전(3.1~6.30)이 열리는 기간에는 입장료를 1만 원을 할인하여 5천 원, 청소년은 5천 원을 3천 원으로 할인 혜택을 준다. 단체관람은 6세 이상~성인으로 2주 전에 예약해야 하며, 관람 요금은 어른 3천 원, 어린이, 청소년(6~19세)은 2천 원이다. 관람 마지막 코스인 카페&아트샵에서 커피(따뜻한 커피와 아이스 커피 선택 가능) 또는 음료를 무료로 제공한다. 아트샵은 궁중 채화 관련 기념품 코너로 2백만 원이 넘는 고가의 상품, 저렴한 기념품이 준비되어 있다. 입장료 할인 기간에 방문하면 저렴한 비용으로 귀중한 우리의 전통 문화유산을 감상할 수 있다. 어린이가 포함된 가족단위 관람객들, 학생 단체, 연인들, 관광객들이 방문하여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문화를 학습하고, 궁중행사에 쓰이던 채화를 구경하는 동시에 문화의 우수성을 체감하며 깨닫는 기회로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세계 유일의 한국궁중꽃박물관이 양산에 있다는 것은 시민들의 자부심을 드높이고, 향토애를 함양하는데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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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천성산 조계암에서 2020년 5월 24일 거대한 뽕나무를 동진 스님이 발견하였다. 이 나천성산 조계암에서 2020년 5월 24일 거대한 뽕나무를 동진 스님이 발견하였다. 이 나무는 산뽕나무로서 그동안 열매인 오디가 제대로 열리지 않아서 뽕나무인 줄 몰랐다고 한다. 현재 천성산 미타암 주지를 맡고 있는 동진 스님은 조계암 주지 소임을 마치고 통도사 서운암에서 감원을 지내는 동안 나무에 관한 공부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동진 스님은 서운암에서 조계암 인근 도량인 미타암 주지로 이동 발령을 받고 조계암의 나무를 시간 여유를 갖고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나무에 대한 지식이 쌓이고 이해도가 높아지자 비로소 이 나무가 귀중한 재래종 산뽕나무 연리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계암의 산뽕나무는 수령이 300년 이상으로, 가슴높이 둘레가 3.1m, 높이가 20m, 동서 길이 15m, 남북 길이 20m 가량이다. 두 개의 나무줄기가 맞닿아 하나의 나무가 된 연리목 형태라서 더욱 가치가 높다. 산뽕나무가 오랫동안 잘 자라길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또 나무를 발견한 동진 스님의 속가명 ‘장수’를 따서 ‘장수 뽕나무’라고 명명하였다. 천성산 조계암(주지 운암 스님)은 2020년 6월 1일 경내에서 ‘장수 뽕나무 당산제’를 봉행했다. 제2회 ‘장수뽕나무’ 당산제는 2021년 6월 6일 봉행하였다. 조계암의 뽕나무를 사진 찍기 위해 지난 5월 23일 방문하였다. 영산대학을 지나 주남고개를 거쳐 내리막 도로를 내려가 먼저 안적암을 구경하였다. 300m 정도 더 들어가니 조계암이었다. 조계암이 위치한 자리는 풍수지리학 문외한이 보아도 명당자리였다.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양지바른 곳이어서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고 안온한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뽕나무를 구경하면서 다방면으로 돌아가며 사진을 찍었다. 뽕나무 사진을 찍은 다음 대웅전, 종각 등의 사진을 찍다가 보살 한 분을 만나서 뽕나무 당산재에 대해 물어보니 5월 28일 10시에 한다고 알려주었다. 조계암은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천성산에 창건한 89 암자 중의 하나이다. 사찰이 폐사가 된 것을 동진 스님이 1994년부터 사찰을 재건하고, 대적선원을 개설하였다. 대적선원은 무문관으로 하안거, 동안거 동안 한 번 들어가면 바깥에서 문을 잠그기 때문에 나올 수 없다. 조계암 주지인 운암 스님에 의하면 올해 10명의 스님이 수행 중이라고 하였다. 무문관(無門關)이란 ‘문이 없는 관문’이라는 뜻이다. 무문관은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 잠자지 않고 참선하는 ‘용맹정진’과 함께 가장 힘든 불교 수행법 중 하나이다. 방에 들어갈 때 필기구 하나만 갖고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한다. 2평 남짓한 방에 이불 한 채, 방석이 있으며, 방에 화장실이 있다. 조계암은 영축총림 통도사가 관할하는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무문관이 있다. 수행자들은 공양구(供養口)를 통해 하루 한 끼 넣어주는 밥을 먹고 오로지 깨우침을 향한 화두를 잡고 수행 하고 있다. 2. 천연기념물 뽕나무 창덕궁 뽕나무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안에 있으며, 수령은 400여 년으로 추정된다. 2006년 4월 6일 천연기념물 제471호로 지정되었다. 창덕궁의 관람지 입구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담 주위에 위치하며 나무높이 12.0m, 가슴높이 줄기 둘레는 239.5㎝로 뽕나무로서는 보기 드문 노거수일 뿐만 아니라 창덕궁 내 뽕나무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수형이 단정하고 아름답다. 예로부터 조선은 농본사회로 ‘농상(農桑)’이라는 말에서 전하듯 농사와 함께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쳐 비단을 짜는 일은 조선시대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다. 나라에서는 궁의 후원에 뽕나무를 심어 가꾸며 일반인들에게 양잠을 권장하였다. 조선조 궁에 뽕나무를 심었다는 최초의 기록은 『태종실록』(태종 9년 3월 1일)으로 창덕궁 건립 후 태종 9년(1409) 중국 주(周)나라 성왕(成王)의 공상제도(公桑制度)를 본따 궁원(宮園)에 뽕나무를 심도록 명한 것이 공식적인 최초의 기록이다. 창덕궁 뽕나무는 친잠례 거행 등 궁궐 역사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수목이다.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 324에 있는 ‘상주 두곡리 뽕나무’는 1972년 12월 경북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2020년 2월 3일 천연기념물 제559호로 지정되었다. 상주 두곡리 뽕나무는 보기 드문 노거수로서 아름다운 수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매년 많은 양의 오디가 열릴 정도로 수세도 양호하다. 나무의 수고(樹高, 나무의 높이)는 10m, 가슴높이 둘레(지면에서 가슴 높이 즉, 1.2m가 되는 곳의 나무의 직경)는 3.93m, 수관(樹冠 : 가지나 잎이 무성한 부분) 폭은 동서 12.7m, 남북 16.2m, 수령은 300년으로 추정된다. 우리의 생활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민속적, 학술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상주지역이 양잠이 번성했음을 알려주는 지표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삼백(쌀, 곶감, 누에)의 고장으로 유명한 상주지역이 양잠이 번성했음을 알려주는 역사적인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받았다. 조계암의 추정 수령 300여 년의 산뽕나무도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다면 천연기념물 제234호인 신전리 이팝나무와 함께 양산시는 두 개의 천연기념물을 보유하게 된다. 조계암 산뽕나무는 창덕궁 뽕나무와 상주 두곡리 뽕나무에 비해 크고, 상태도 양호하며 희귀한 연리목으로서 가치가 높다. 현재 문화재청에 신청하여 절차를 밟고 있어 기대해볼 만하다. 제3회 장수뽕나무 당산재 조계암에서 5월 28일 열린 ‘제3회 장수뽕나무 당산재(堂山齋)’의 식순은 9시 신중기도, 9시 40분 삼귀의 반야심경, 내빈 소개, 법문, 축사, 사홍서원 순으로 진행되었다. 당산재 명칭은 1~2회 때는 당산제라 하였고 이번에는 당산재로 표기하였다. 행사 사회는 미타암에서 금으로 사경을 하고 있는 이성국 씨가 맡아 진행하였다. 내빈은 조계종 제25대~제26대 총무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대구 팔공총림 회주인 의현 큰스님, 울산 월봉사 보하 스님, 미타암 동진 스님, 조계암 주지 운암 스님, 대적선원 한주 문유 스님, 진공 스님, 매물 스님, 증관 스님이 참석하였다. 정유경 소주동장, 김두관 국회의원, 김일권 양산시장 후보자. 성동은 경남도의원 후보자, 시의원 출마 후보자들이 참석하였다. 행사는 헌다공양, 법문, 축사 등으로 이어졌다. 의현 큰스님은 10.27 법난 당시 군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신라의 신문왕의 국사였던 경흥법사의 병을 고친 비구니 스님 일화도 얘기하였다. 미타암 주지인 동진 스님은 인사말에서 나무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하였다. 칠레 남부 숲에 있는 거대한 나무가 5천 4백 8십 4살로 추정되어 세계 최고령 나무일 수도 있다는 최신 뉴스를 언급하였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나무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브리슬콘 소나무로, 4천 8백 5십 3살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동진 스님의 나무에 관한 깊은 관심과 해박한 지식에 놀랐다. 당산재 시작 전에 동진 스님을 만나 인사드리고 사진을 찍었다. 동진 스님은 흔쾌히 포즈를 취해주고 뽕나무의 천연기념물 지정에 관한 진행 상황도 알려주었다. 조계암의 주지 운암 스님도 양산시에서 문화재청에 신청하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였다. 시낭송은 이수정 보살이 하였는데, 산사에서 듣는 시는 더욱 운치가 있고 깊은 울림을 주었다. 당산재의 마지막 순서로 불자들이 올리는 막걸리 공양 의식이 있었다. 조계암에서는 막걸리 두 말을 준비하였다. 당산재 참석자들에게는 오디를 선물로 주었다. 행사 사회자 이성국 씨는 내년 당산재는 좀 더 규모를 크게 한다고 미리 홍보하였다. 행사 후 점심공양은 조계암에서 준비한 비빔밥, 국물김치를 먹었는데 맛이 좋았다. 조계암을 말없이 지키는 수백 년 된 산뽕나무 덕분에 많은 불자들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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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가야진용신제가야진용신제의 발전 방안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가야진용신제는 경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로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가야진사(伽倻津祠)에서 국가적인 시제와 관민의 기우제를 놀이 형식으로 재구성한 마을제사, 당제, 용신제이다. 2022년 5월 15일 가야진용신제 봉행 행사가 낙동강변 가야진사 일원에서 진행되었다. 가야진사는 『삼국사기』 권32 제사(祭祀)조에 보면, 대·중·소사(小祀) 중 중사에 속하는 사독(四瀆)의 하나이다. 사독은 네 방위를 따라 정해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네 강을 말한다. 가야진사는 나라에서 연 3회 이상 독신(瀆神 ; 강을 주관하는 귀신)께 제를 지내던 사당이다. 제일 3일 전에 도내 수령(守令) 방백(方伯)이 주변을 정화하고, 나라에서 하사하는 향과 축문을 가져오는 칙사(勅使)를 영접하고, 도백이나 수령을 초헌관(初獻官)으로 제례를 모셨다. 일제강점기에도 가야진사에는 제례비용을 마련하는데 필요한 위토답(位土畓)이 있어 이 제례를 민간에서 거행하였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탄압이 심할 때는 제사를 드러내놓고 올리지 못했다. 마을 주민들은 몰래 제물을 준비하여 비석골에서 제사를 모셨다. 제례의 초헌관은 현재 양산시장이 맡고 있지만 지방선거 기간 중이라 이번에는 양산시 이정곤 부시장이 초헌관을 맡았다. 아헌관은 정웅 양산향교 전교, 종헌관은 오동우 유도회양산지부장이 맡았다. 집례는 이재환(전승교육사), 대축 이성재(이수자), 알자 김경우(이수자), 찬인 유형곤, 봉향 김석천, 봉로 박승렬, 봉작 정덕유가 각각 맡았다. 전작 박인재, 사준 김순연(이수자), 진설 이장우(이수자)와 이희주, 제물유사 정진교(이수자), 도기 조천재와 이황재, 시고 이희명(이수자), 해설집례 김경숙, 직일 김진규(예능보유자)가 각각 담당하였다. 민속놀이는 상쇠 박홍기(예능보유자), 부쇠 김경애(전승교육사), 징 임지활(이수자), 노태숙(이수자), 북 유마자(이수자), 김정숙(이수자), 성현수(이수자), 배용수(이수자), 빈경식(이수자), 배경열, 김기영, 장구 권오남(전승교육사), 문지영(이수자), 정덕순(이수자), 박다솜, 박다영, 부정가시기 정경옥(이수자), 김윤악(이수자), 일소리 박광건(이수자), 상일꾼 김종석(이수자), 금줄잡이 이남숙(이수자), 왕가시리 이남정(이수자), 정상옥, 고필숙, 김순연, 박향남. 망깨 이선옥, 임윤례, 이승현, 강혜원, 윤은선, 조선녀, 정평자, 박창규, 김승희, 박귀악, 이말금, 이정화, 황숙자, 박남숙, 황은경, 김천자, 백복희, 정명주, 김완순, 송귀례, 가래 박경숙, 김명자, 김복숙, 김옥남, 김귀수, 안말선, 소쿠리 박영숙, 이외숙, 최인숙, 괭이 박명자, 황갑숙, 이외숙, 최경숙, 장천진, 지게 최영화, 김한곤, 사령 성현수(이수자), 물동이 김미화(이수자), 술동이 천근자. 깃발 신용규 외 21명, 찬조 출연 영남삿갓 이시일. 시제(時祭)와 별도로 한발이 심할 때에 관민이 희생돼지[犧牲豚]를 용신이 있다고 믿는 용소(龍沼)에 통째로 넣는 기우제를 지냈다. 현행 가야진용신제는 국가적인 시제와 관민의 기우제를 합하여 놀이의 형식으로 꾸민 것이다. 여태까지 양산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산상 기우제 제단 유적을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과 필자가 지난 3월 3일에 양산시 원동면 비석봉 답사를 통해 유적을 확인하였다. 산상 기우제는 제관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장작, 솔가지, 시초 등을 산 정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불을 지른다. 양기인 불로 음기인 비구름을 부르는 것이다. 8년 전에 둘이 답사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두 번째로 현장을 방문하여 규모를 파악하였다. 가야진사에서 비석봉까지 2시간 남짓 등산을 해야 한다. 가야진사에서 올려다보면 비석봉이 보인다. 반대로 비석봉 기우제 제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나뭇가지 사이로 가야진사가 잘 보인다. 가야진용신제 진행과정 및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당(祠堂)의 정화(淨化)로 제일이 정해지면, 원동면장과 관계자들이 목욕재계하고 제향의 준비에 들어가는데, 제장의 청소와 지신밟기패의 부정굿을 통하여 잡귀를 물리치고, 칙사맞이 준비를 한다. 둘째, 칙사 영접으로 제주(祭主)와 풍물패는, 가야진용신제·환룡·청룡·인룡의 깃발을 들고 50여 명이 칙사가 들어오는 길목까지 나아가서 영접하여 가야진사로 모신다. 셋째 용신제로 제례는 희생 돼지를 비롯한 4변(籩) 4두(豆)와 하사된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운 뒤 홀기(笏記)에 따라 진행된다. 헌작을 하고 독축을 할 때에는 모두 엎드려 경청한다. 제사를 마치고는 제관을 비롯하여 임원과 풍물패들은 용소에 투입할 희생 돼지를 가지고 강변에 마련해놓은 송막(松幕)으로 간다. 넷째, 용소풀이로 강가에 대기한 배에 희생 돼지를 싣고, 떠나기 전에 송막을 태워 부정을 살라 버린다. 용소에 도착한 일행은, 술 한 잔을 부어 놓고, 헌관이 재배하며 “침하돈(沈下豚)”을 3창하고 돼지를 강물에 던져 용왕께 바친다. 일행은 용소를 한 바퀴 돌고 사우(祠宇)로 돌아온다. 다섯째, 사신(辭神)풀이로 사우(사당)로 돌아온 일행은 알자(謁者)가 제단을 향하여 예필(禮畢)을 아뢴 다음, 제관을 비롯한 모든 참례자들이 어울려서 가무하고 끝맺는다. 이번 봉행 행사에 출연하여 꽹과리를 친 가양초등학교 1학년 김하연 양이 관중들의 인기를 끌었다. 전에 웅상농청장원놀이에 초등학생들 풍물패가 참여하여 관객들의 눈길을 끈 적이 있었다. 가야진용신제는 앞으로도 계속 초등학생을 출연시켜 민속놀이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유발하고 전통을 계승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면 좋겠다. 양산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방안으로 제례에 사용하는 제주를 빚을 때 쌀을 기증받아서 술을 제조하는 과정에 동참하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제주를 만든 후 참여자에게 술을 나눠주는 강릉단오제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이번 봉행 행사에 김일권 양산시장 후보자, 나동연 양산시장 후보자, 더불어민주당 갑지구 이재영 위원장, 곽종포 국민의힘 시의원 후보자, 임정섭 더불어민주당 도의원 후보자, 정숙남 국민의힘 시의원 후보자, 최순희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후보자, 이묘배 더불어민주당 양산시의원 후보자 등이 참석하였다. 지역의 정치인들이 지역의 전통 문화 계승과 발전에 적극적인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 끝으로 가야진용신제를 국가 무형문화재로 승격시키는 시도를 장기적 관점에서 준비해나가야 한다. 문화재청 심사위원들이 가야진용신제에 대해 ‘국가 제례의식에 풍물놀이 등 민속학이 추가로 담겨 국가 문화재로서의 지정 가치가 없다’고 평가하여 무산된 바 있다. 폭넓은 관점에서 본다면 제례의식과 민속놀이가 결합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전통이 이어져왔다는 점을 고유한 문화 특색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승격을 위해서는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자료를 보완하면서 문화재청의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지역의 윤영석 국회의원, 김두관 국회의원, 양산시 정치인들의 협조와 지원을 받아계속추진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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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황산공원의주인공,고라니Ynews심상도총괄이사=황산공원의 주인공 고라니 황산공원은 양산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공원으로 면적은 무려 1,873,000㎡에 달하며, 양산시민들의 안식처로 각광받고 있다. 이런 광대한 부지의 공원을 갖고 있는 양산시는 정말 복 받은 도시라 할 수 있다. 멋진 공원이 탄생한 계기는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한 4대강 정비사업 일환으로 낙동강 정비사업을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양산천도 국비 지원을 받아 정비하는 혜택을 받았으며 양산천 주변의 610,000㎡ 규모의 가산공원도 탄생했다. 황산공원과 가산공원 주변인 양산천에는 멸종위기종인 가시연도 서식하고 있다. 4대강 정비사업의 결과로 하천의 흙을 뒤집으니 묻혀있던 씨앗이 발아하여 가시연꽃이 피었다. 양산시의 관리소홀로 매년 볼 수 없고 어떤 해는 사라지곤 한다. 가시연꽃은 생명력이 끈질겨 50년 이상 물속 뻘에 잠겨있다가 하천을 뒤집는 공사를 하면 발아되는 신비한 존재다. 가ㅇ릉경포대 가시연 군락지도 호수 주변 논을 매입하여 수변공원을 조성하다가 수십년 만에 가시연 씨앗이 발아가 되어 멋진 수변공원으로 재탄생했다. 개발이 부정적 요소만 있는 게 아니라 뜻하지 않은 자연의 선물이 극적으로 나타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황산공원 위치는 물금읍 물금리, 증산리 낙동강 고수부지(양산1지구, 6공구) 낙동강변이다. 고수부지(高水敷地)는 복단면을 가진 하천의 제방 바로 안쪽에 해당하는 부지로 홍수터라고도 불린다. 홍수터에는 체육시설, 자전거 도로 등이 설치되어 평소엔 친수공간으로 활용되고, 홍수 시에는 치수목적으로 확보된 부지를 말한다. 고수부지는 순수한 우리 말로 둔치라고 한다. 굳이 이해하기 어려운 고수부지 대신 둔치를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양산시시설관리공단 홈페이지에서도 황산공원, 가산공원, 가야진사공원, 서룡공원 모두 위치 소개할 때 고수부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우리 말인 둔치라고 했으면 좋겠다. 황산공원에는 오토캠핑장(8x10m) 36면, 일반캠핑장(5x6m) 75면, 화장실 6개소(남3, 여3), 샤워실 4개소(남2, 여2), 취사실 3개소, 황산공원 파크골프장 51,000㎡ 부지에 36홀, 낙동강 생태탐방선 황산선착장, 16,000㎡ 규모의 강민호야구장, 이색적인 서비스 시설로 황산공원 나들이객의 배달음식 홍보를 통한 공원 및 경제 활성화를 기대하기 위해 황산공원 배달 전단지 게시대 등도 설치하였다. 황산공원의 시설은 자전거길 8,876m, 산책로 10,340m, 마음정원, 문주광장, 황산정, 축구장 2면, 야구장, 배구장, 농구장, 배드민턴장 각 3면, 화장실 12개소, 주차장 7개소 등을 갖추고 있다. 필자가 지난 12일 황산공원을 답사하면서 보니 중앙고속도로지선 교량 밑에 황산공원 RC카 경기장 조성공사를 하고 있었다. 교량 밑으로 걸어가 낙동강을 보니 낚시꾼이 한 명 있었고, 강변에 노란색의 꽃창포가 활짝 피어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수로를 따라 꽃창포가 연이어 피어 있었고, 백로도 보였다. 꽃창포를 구경하면서 황산공원을 산책하다가 우연히 고라니를 목격하였다. 황산공원은 도로와 경부선 철도로 막혀 있는데, 어느 틈으로 들어왔는지 고라니가 살고 있어 반가웠다. 고라니(Water deer)는 사슴과 고라니아과에 속하는 단일종으로 한국고라니(Hydropotes inermis argyropus)와 중국고라니(Hydropotes inermis inermis)의 두 아종이 있다. 중국은 동북부와 동부지역의 일부에 한정되고, 한국은 제주도와 도서지역을 제외한 전국에 분포한다. 전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인 동물 중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서식하는 종이 고라니라고 한다. 너무 흔해서 국내에서는 유해 동물로 천대받고 있는 고라니가 바로 국제적인 보호종이다. 한국에서는 고라니의 개체 수가 많아져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유해조수로 지정되어 있다. 반면에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의 적색목록(Red list)에는 멸종위기 카테고리에 ‘취약’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다. 고라니는 한국의 생태계에서 멧돼지와 함께 가장 번성하고 있는 동물이다. 국내에 서식하는 개체 수는 약 70만 마리 정도로 추산되며 전 세계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담비, 삵, 수리부엉이, 검독수리 등이 고라니를 사냥하지만, 이들의 수가 많지 않고 새끼 위주로 잡아먹기 때문에 고라니의 개체 수에 영향이 거의 없다. 고라니는 도로에서 차량에 치여 죽는 이른바 ‘로드킬(Road-Kill)’의 가장 흔한 피해 동물이다. 고라니는 몸길이 75~100㎝, 꼬리 길이 4~8㎝, 어깨높이 45~65㎝, 체중 9~15㎏으로 수컷이 암컷보다 크다. 체형이 노루와 비슷해 혼동하기도 하는데, 노루 수컷은 뿔이 나지만 고라니 수컷은 뿔이 없다. 노루는 송곳니가 없으나 고라니 수컷의 위턱에는 5~10㎝ 정도의 긴 송곳니가 있다. 입 밖으로 내밀어 번식기에 수컷끼리 싸울 때 쓰인다. 노루의 엉덩이 부분은 털이 흰색이나 고라니는 흰털이 거의 없다. 채소, 거친 풀, 갈대 등을 먹으며, 갈대밭이나 관목이 우거진 곳에서 서식한다. 고라니는 주로 야간에 활동하며 조심스럽고 경계심이 많다. 영문명과 학명에 물(water, hydropotes)이란 뜻이 있듯이 수변을 좋아하며 수영을 잘한다. 황산공원에 수로도 있고, 연못, 갈대밭도 있으므로 서식환경은 좋은 편이다. 황산공원의 주인공이자 진객인 고라니를 잘 보호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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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천성산철쭉제와동산철죽제천성산 철쭉제와 동산 철쭉제의 비교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양산의 중심에 자리 잡은 천성산은 양산의 대표적인 진산으로 양산시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천성산(해발 922m)이 너무 넓고 산이 높아 서부 양산과 동부 양산이 양분되어 과거에는 양쪽 주민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국지도 60호선의 동원과기대 터널이 뚫린 이후에는 주민간의 이동과 소통이 많이 개선되었다. 천성산에는 양산을 대표하는 철쭉 군락지가 있으며, 접근성은 미타암을 통해서 등산을 하면 쉽게 갈 수 있다. 반대로 서부 양산 주민들은 천성산 철쭉 군락지가 멀고, 천성산 정상이 지뢰 제거작업으로 폐쇄되어 등산하기가 쉽지 않다. 서부 양산에는 동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는데, 서부 양산시민들은 철쭉 군락지에 계원사, 신기마을, 다방동 등에서 등산로나 둘레길로 쉽게 등산할 수 있다. 천성산 철쭉 군락지는 자연스럽게 생겨난 관광 명소이고 동산의 철쭉 군락지는 기존 군락지에 추가로 철쭉을 식재하여 인위적으로 조성한 새로운 명소이다. 천성산 철쭉제를 여는 군락지에 2008년 5월 18일에 천성산철쭉제 추진위원회에서 천성산 철쭉제 기념비를 세웠다. 자연의 신비를 간직한 이곳에서 양산팔경 천성산 철쭉을 상징하는 ‘자연과 꽃과 사람의 향연’ 천성산 철쭉제를 자연환경문화축제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양산시 북부동 산4-2번지 일원에 10,000㎡ 규모로 조성된 철쭉 군락지는 동산의 북부산성 안에 있다. 산성의 성벽 돌과 조화를 이룬 철쭉꽃은 마치 천상의 화원처럼 화려하고 아름답다. 2009년 ‘희망으로 날다’ 일자리 창출사업으로 철쭉과 금낭화 등 야생화를 심어 새로운 명소를 만들었다. 천성산 철쭉 군락지는 해발 785m의 고산지대에 형성되었으며, 철쭉제 추진위원회에서 추가로 식재하였다. 동산의 북부산성은 해발 285m~300m 정도의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천성산 철쭉 군락지는 5월 초순에 절정을 이루는데, 날씨에 따라 개화기가 늦춰지기도 한다. 필자가 지난 5월 5일에 답사했을 때 꽃이 절정기를 지나 시들기 시작하였다. 천성산 철쭉제는 올해 열리지 않았다. 동산의 북부산성 철쭉 군락지는 4월 중순경에 절정을 이룬다. 올해 동산 철쭉제 산신제는 4월 16일에 지냈는데, 철쭉이 만개하여 아주 보기 좋았다. 천성산과 동산의 철쭉 군락지의 특색을 비교해보면 각각의 개성이 있다. 천성산에는 철쭉을 추가로 보식할 때 기존의 철쭉과 어울리지 않는 영산홍을 일부 심어 주변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천성산에는 거대한 기념비를 세워놓았는데, 동산에는 안내판만 있다. 또한 천성산에는 등산객을 배려하는 쉼터, 벤치가 거의 없는 편이다. 반면 동산에는 정자, 벤치, 운동시설, 평상과 탁자 등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어 등산객이 쉬거나 점심, 간식을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동산에는 등산객 이동통로도 다양하게 개설되어 있어 군락지를 안전하게 보호한다. 천성산 철쭉제는 민간 단체에서 주도하고 있다. 사랑·존중·봉사를 슬로건으로 하는 양산천성산철쭉회(회장 박종규)에서 산신제, 노래자랑, 어린이 사생대회 등을 주관하고 있다. 한편 동산 철쭉제 산신제는 중앙동행정복지센터와 주민자치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있어 관민 협력체제를 이루고 있다. 민간 주도와 관민협력체제는 각각의 장단점이 있지만 나름의 특색을 살려 철쭉제를 잘 운영하고 있다. 특히 박종규 회장은 철쭉제와 어르신 효잔치도 개최하며 참된 봉사를 이어나가고 있어 귀감이 되고 있다. 앞으로 양쪽의 철죽제 행사는 잘 이어지리라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