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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의 화요칼럼 김유신 장군이 세운 사찰 경주 원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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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의 화요칼럼 김유신 장군이 세운 사찰 경주 원원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경주 원원사(慶州 遠願寺)를 세운 인물

 

사적 제46호, 경주 원원사지는 봉서산 기슭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절터이다. 원원사는 안혜(安惠), 낭융(朗融) 등 명랑법사(明朗法師)를 따르던 신인종 승려들과 김유신(金庾信), 김의원(金義元), 김술종(金述宗) 등이 뜻을 모아 국가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명랑법사가 세운 금광사와 더불어 통일 신라 시대 문두루비법의 중심 도량이었다.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은 신라와 고려 시대에 행했던 밀교 의식의 하나이다. 불단을 설치하고 다라니 등을 독송하면 국가의 재난을 물리칠 수 있다는 비법의 신인종이다. 신라의 명랑(明朗)이 중국에서 밀교를 배운 뒤 635년(선덕여왕 4)에 귀국할 때 처음으로 전하였다.

 

 

 

원원사는 호국사찰로 건립되었다. 부처의 공덕으로 나라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고자 건립한 사찰이다. 원원사는 왜적들이 울산의 바다를 통해 침입하여 경주로 향할 때 길목에 해당된다. 원원사는 서라벌의 동남쪽 모화촌(毛火村)에 있는데 근처에 왜병을 막기 위해 쌓은 군사적 요충인 관문(關門)이 있어 사천왕사, 감은사 등과 같이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유신은 삼국시대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장수이다. 595년(진평왕 17)에 태어나 673년(문무왕 13)에 사망했다. 신라에 투항한 가야왕족의 후손으로, 진골 귀족 출신이다. 15세에 화랑이 되어 낭도를 이끌고 고구려·백제와의 전투와 귀족층의 반란 진압에서 공을 세워 중요 인물로 성장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누이와 결혼한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에 즉위하면서 정치적 위상이 더 높아졌다. 660년 정월에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었고,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구실을 했다. 사후에 흥덕왕이 흥무대왕으로 추봉했다.

 

김술종(金述宗)은 진골 출신이며 화랑 죽지랑(竹旨郎)의 아버지이다. 『삼국유사』에 술종공은 알천공(閼川公)을 비롯하여 임종공(林宗公)·호림공(虎林公)·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과 함께 신라의 4영지(四靈地)의 하나인 남산 우지암(亏知巖)에서 열린 화백회의에 참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회합을 가졌던 대신들의 사회적 신분은 진골이었으며, 상대등(上大等)인 알천공을 의장으로 하는 화백회의의 구성원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그의 정치적 지위는 대등이었다. 김술종은 진덕여왕 때 지금의 춘천 방면을 포함한 영서지방 장관인 우수주군주(牛首州軍主: 후에 삭주도독(朔州都督)이라고 부름)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뒤에 신라의 삼국통일에 지대한 공을 세운 아들 죽지랑을 낳았다. 태종 무열왕 때 안혜(安惠) 등 승려 4명 및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원원사(遠源寺)를 창건하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귀족이었던 김의원의 정확한 신상은 알려져 있지 않다.

 

2. 명랑법사와 문두루비법

 

삼국유사 제5권 신주 제6(三國遺事 卷第五 神呪 第六)에 명랑법사의 신인종(明朗神印)이 나온다. 「금광사본기(金光寺本記)」를 살펴보면 이러한 기록이 있다.

 

“법사가 신라에서 태어나서 당나라로 들어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 길에, 바다 용의 청에 따라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고 황금 1,000냥[1,000근이라고도 한다.]을 시주 받아 땅 밑으로 몰래 와서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자기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고 용왕이 시주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장식하자 광채가 유달리 특이하였다. 그래서 절을 금광사(金光寺)라 하였다.”[『승전(僧傳)』에서는 금우사(金羽寺)라 했지만 잘못된 것이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明朗)이고 자는 국육(國育)이며, 신라의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인데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며 소판(蘇判) 무림(茂林)의 딸 김씨이니, 즉 자장(慈藏)의 누이동생이다. 재량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국교대덕(國敎大德)이고 다음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아들이다. 처음에 어머니가 꿈에 푸른색 구슬을 삼키고 임신을 하였다.

 

선덕왕(善德王) 원년(서기 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貞觀) 9년 을미(서기 635)에 돌아왔다. 총장(總章) 원년 무진(서기 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 후 남은 군사가 백제에 머물면서 신라를 습격해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신라 사람들이 이를 알아채고 군사를 내어 막았다. 당나라 고종이 이 말을 듣고는 크게 화를 내며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문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걱정하며 법사를 청해 비법으로 이들을 물리치게 하였다. [이 일은 「문무왕전(文武王傳)」에 실려 있다.] 이 일로 인해 명랑은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또 신라 서울 동남쪽 20여 리에 원원사(遠源寺)가 있는데, 세상에서는 이렇게 전하였다.

“안혜(安惠) 등 네 대덕이 김유신(金庾信)ㆍ김의원(金義元)ㆍ김술종(金述宗) 등과 함께 발원하여 창건한 것이다. 네 대덕의 유골은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었다. 그래서 사령산(四靈山) 조사암(祖師嵓)이라고 한다.” 그러한즉 네 대덕은 모두 신라 시대의 고승이었다.

 

문무왕 때 당나라 군사가 신라를 침략하게 되자 왕은 명랑에게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비방을 물었다. 이에 명랑은 낭산(狼山)의 남쪽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을 열 것을 제의하였는데, 시간이 급박하였으므로 채백(彩帛)으로 가건물을 짓고 5방(方)에 신상(神像)을 세운 뒤 유가명승(瑜伽明僧) 12인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때 당군과 신라군이 아직 접전하기도 전에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침몰하였다고 한다. 문두루는 범어 무드라(mudra)의 음사(音寫)로 신인(神印)으로 번역된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절터에는 금당 터와 2기의 삼층석탑, 석등, 그리고 부도가 남아 있다. 2기의 삼층석탑은 1931년에 복원한 것으로 규모와 형태가 동일하다. 석탑 사이에 석등이 있고, 4기의 부도가 절터의 동쪽과 서쪽 계곡에 나뉘어져 있는데, 부도는 모두 고려 시대 이후의 것으로 보인다.

 

3. 경주 원원사지(慶州 遠願寺址) 동서 삼층석탑(東西 三層石塔)

 

문하재청은 경북 경주시 와동읍 모화리 산8-2번지에 위치한 사적 제46호 경주 원원사지(慶州 遠願寺址)내의 높이 7m의 삼층석탑을 2005년 4월 7일 보물 제1429호로 지정하였다. 경주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금당 터 앞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31년 가을 경주고적보존회가 복원한 것이다.

 

두 탑 모두 2층 바닥돌 네 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1층 몸돌 네 면에 사천왕상을 새겼다. 십이지신상은 북쪽 중앙에 있는 쥐를 시작으로 한 면에 3구씩 새겨져 있는데, 연꽃 위에 앉아 평복을 입고 손을 모은 자세이다. 사천왕상은 동탑 남방의 증장천왕이 하체 일부만 남았고, 서탑 남방의 증장천왕은 없어졌다.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일반적인 양식의 신라 석탑 가운데 부조상을 새긴 가장 이른 시기의 탑으로 알려져 있다.

 

동ㆍ서 삼층석탑(높이 약 7m)은 도괴되어 있던 것을 1931년 가을(조선건축사론 중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시대 일반형 삼층석탑론(건축잡지 1933.11월호. 藤島亥治郞)에 경주고적보존회에서 복원하였다. 두 탑은 같은 구조와 양식으로 조성된 2중 기단의 삼층석탑이며, 하층기단 면석과 갑석 및 상층기단 면석은 각각 8매, 상층기단 갑석은 4매로 구성되어 있다.

 

상·하층기단의 면석에는 2개의 탱주와 우주가 있고, 하층갑석의 상면에는 2단의 상층 기단 괴임이 있으며, 상층갑석 4면의 각 기둥 사이에는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십이지상을 조각하였는데 이들의 머리는 짐승이나, 몸체는 평복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며 옷자락이 하늘로 날리고 있는 형상이다.

 

1층 탑신석 이상 3층 옥개석까지는 모두 1매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1층 탑신에는 우주가 있고, 4면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각 층 옥개석의 하면에는 5단의 옥개받침이 있고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 괴임이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석과 앙화석이 남아 있다.

 

경주 원원사지 동ㆍ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일반적 표현형식, 옥개석의 돌다듬기 수법, 기단부와 탑신부에 구현된 양식, 석재의 조립방법 등으로 보아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되며, 하층기단에서 십이지상을 최초로 배치한 점 등 석탑의 조각기술, 구조적 특징, 표현양식 등을 고려할 때 학술적, 미술사적 중요한 가치를 지닌 석탑으로 평가되고 있다(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경주 원원사지를 지난 3월 23일, 4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답사하였다. 3월 23일 오후 늦게 답사하여 원원사지는 둘러보았으나 부도는 원원사지 서쪽 계곡을 다니며 찾아보았으나 안내 표지판이 없어 답사에 실패하였다. 여러 곳을 다니다 보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포기하였다.

 

4월 2일에는 오후 이른 시간에 도착하여 원원사지를 천천히 둘러보고 동서 삼층석탑의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을 사지 찍었다. 동서 두 곳의 부도를 찾기 위하여 먼저 서쪽의 부도 쪽으로 계곡을 답사하면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간신히 발견하였다. 멋진 부도가 있었으나 안내판은 없었다.

 

그후 동 부도를 찾기 위하여 절의 동쪽으로 갔지만 역시 안내 표지판은 없었다. 나무를 심은 수목원을 지나 낮은 곳으로 내려가 석조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계곡을 건너 임도로 올라가 드디어 동 부도를 답사하였다. 작은 암자에 태극기가 걸려 있었고, 커다란 동 부도가 있어 반가웠지만 안내판은 없었다. 날이 더워 땀을 흘리며 돌아다녔다. 원원사지 가는 7번 국도의 교통 체증은 매우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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