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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미추왕릉 죽엽군과 김유신 장군 혼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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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미추왕릉 죽엽군과 김유신 장군 혼령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미추이사금(미추왕) 즉위

 

미추이사금(262년~284년)이 즉위하다(262년 01월).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또는 미조(味照)라고도 하였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이다.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조분왕(助賁王)의 딸이다.

 

그의 선조 알지(閼智)는 계림에서 태어났는데 탈해왕(脫解王)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길러 후에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그리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가 곧 미추왕의 아버지이다. 첨해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임금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초가 된다.

 

23년(서기 284) 봄 2월, 나라 서쪽의 여러 성을 두루 돌며 위로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대릉(大陵)[또는 죽장릉(竹長陵)이라고도 한다.]에 장사 지냈다.

 

2. 미추왕릉과 죽엽군(竹葉軍)

 

유리왕대 이서국 사람들이 침략하자 미추왕릉에서 죽엽군이 나와 물리치다. 제14대 유리왕(儒理王) 대에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와서 금성(金城)을 공격하였다. 현재의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에 있던 소국으로, 『삼국유사』 권1 기이1 노례왕조의 기록에 따르면, 유리왕 19년(서기 42)에 신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한다. 금성은 신라 초기의 궁으로서, 혁거세거서간 21년(서기전 37)에 축조되었으며, 그에 관한 기록이 소지마립간 22년(500)까지 나온다.

 

우리가 크게 막으려 했으나 오랫동안 견딜 수 없었다. 홀연히 이상한 병사가 있어 와서 도와주었는데 모두 댓잎[竹葉]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병사와 힘을 합쳐 적병을 공격해 격파했다. 적군이 물러간 후에 [이상한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나무의 잎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있음을 보고 그때서야 선왕에 의한 음덕의 공이 있었음을 알았는데, 이로 인하여 죽현릉(竹現陵)이라 하였다.

 

3. 김유신 장군과 미추왕 혼령의 대화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第一) 혜공왕대 유신공이 원통함을 미추왕에게 호소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오래 지나 제36대 혜공왕(惠恭王) 대인 대력(大曆) 14년 기미(己未) 4월에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유신공(庾信公)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모습이 장군과 같았다. 또한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40여 명의 군사가 뒤를 따라와서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능 속에서 우는 소리 혹은 호소하는 듯한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호소하는 말에,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혼백이 되어 나라를 진호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을 잠시도 가벼이 하거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770)에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군신들이 저의 공훈을 생각지 않습니다.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힘쓰지 않으려니 왕께서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오직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공은 전과 같이 노력해 주시오.” 하였다. [유신공이] 세 번 청하였으나 [미추왕은] 세 번 모두 허락하지 않았고, 회오리바람은 이내 돌아갔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바로 상신 김경신(金敬信)을 보내어 김공의 능에 가서 사죄하고 공을 위하여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리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을 토벌한 후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곳이기 때문이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 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인즉, 왕이 국가를 보호하려는 노력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라의 사람들이 그 덕을 기리며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서열을 오릉(五陵)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고 불렀다.

 

필자는 경주에 있는 미추왕릉을 2월 7일에 방문하였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져 쌀쌀하여 사진 찍을 때 손이 시렸다. 경주 대릉원 내에 있는 미추왕릉을 답사하며 삼국유사에 나오는 죽엽군(竹葉軍)을 연상하면서 왕릉 옆의 대나무도 사진 찍었다. 넓은 대릉원을 구경하고 천마총 앞에까지 갔지만 오후 늦은 시간이라 관람은 하지 않았다. 대신 대릉원 영상관을 둘러보았다.

 

미추왕릉의 남쪽에 숭혜전이 있어 해마다 제향을 받들고 있다. 외형은 둥근 봉토분이며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다른 무덤과 마찬가지로 돌무지덧널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청도의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해오자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병사들이 홀연히 나타나 나라를 구하고 왕릉 속으로 사라졌다고 하여 죽장릉(竹長陵) 혹은 죽현릉(竹現陵)으로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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