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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화랑 서기석 최초 발견자 최남주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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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화랑 서기석 최초 발견자 최남주 선생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임신서기석 발견

1959년 9월 21일 중앙대학보에 당시 문리과대학 사학과에 재학 중인 허웅(許熊)이란 사학도가 ‘화랑도 유물 임신서기석에 대하여’란 기고문을 통해 임신서기석의 최초 발견자는 최남주라고 발견 경위를 기고하였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경주 사학자 석당 최남주 댁에 머무르면서 여러 가지 화랑도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중 특히 ‘화랑서기석(임신서기석)’ 이야기를 감명 깊게 새겼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대한경제, 2023, 9.25).

“이 돌(임신서기석)은 지금부터 24년 전 단기 4268년(1935년) 경주 금장리 석장사 한 부근에서 공사 중 출토되어 바로 최남주(崔南柱)씨의 손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1935년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는 최남주의 증언이다.

 

이 부분이 오사카의 석장사 답사 중 발견하였다는 증언과는 틀리는 부분이다. 또한 석당 최남주는 분명히 1년 전에(1934년) 발견한 ‘남산신성비’의 자체(字體)와 ‘임신서기석’이 같다고 밝히고 있어 발견 시기도 오사카 긴타로의 발견인 1934년과는 차이가 난다.”

 

석당 최남주의 자제인 현암 최정간(매월다암 원장, 차문화연구가) 씨의 증언에 의하면 선친의 화랑 서기석(임신서기석) 발견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35년 봄 경주군 현곡면 석장사지부근에서 농수로공사로 인해 신라시대 와당들이 출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천수답 경사 언덕 맨 아래쪽에서 ‘남산신성비’처럼 생긴 작은 강돌(川石)이 최남주의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앞면이 치석되어 첫머리에 임신년(壬申年)이란 글자체가 음각되어 있었다.

 

또한 중간에 3년이란 맹세문장이 쓰여있어 직감적으로 작년에 발견한 ‘남산신성비’ 문장체제와 같다고 확신했다. 이튿날 이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경주박물관으로 옮겨가니 관장인 오사카가 첫눈에 가짜라고 단정하고 유물 수장고에 방치해버렸다. 망국의 한이었다.” 일제 총독부는 조선인을 중요 유물 발견자나 논문 발표에서 철저히 배제시켰다.

 

1935년 12월 18일 스에마츠 야스카츠가 경주박물관 방문 시 이 비석의 가치를 어느 학자보다 먼저 알아보고 1936년 『경성제대 사학지 제10』에 ‘경주 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해서’란 논문을 통해 발견자가 오사카 긴타로라고 소개하였다. 그 후 오사카는 ‘임신서기석’을 자기 개인 소장품으로 둔갑시켜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박물관장실에 보물처럼 보관하였다.

 

1960년대 이후 오사카는 석당에게 편지로 ‘임신서기석’의 안부를 물어왔다. 석당은 정부 수립 후 오사카의 이러한 파렴치한 만행을 밝힐 수 있었으나 신라 화랑의 보물인 임신서기석이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고 경주박물관에 소장 전시되어있는 것만으로도 큰 보람을 느꼈다.

 

2. 석당 최남주 선생을 추모하는 석당공원

 

(1) 석당 최남주 선생

 

石堂 崔南柱 先生(1905-1980)

IN MEMORY OF MR. CHOE NAM-JU(1905-1980)

 

평생을 문화재 발굴과 보존을 위해 헌신한 최남주 선생은 민간문화재 보호단체의 효시인 경주 고적보존회 활동을 시작으로 현 국립경주박물관 창설에 참여하였고, 고고학자인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와 서봉총 발굴에 동참했다.

 

그가 발견한 주요 유물은 경주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경주 남산 철와곡 석불두(鐵瓦谷 石佛頭), 흥덕왕릉 비편 등이 있다. 또한, 사재(私財)를 들여 무열왕릉 비각을 건립하기도 했다. 선생은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스웨덴 왕실로부터 동양인 최초로 바자훈장 기사장을 수훈受勳했다. 이후, 칼 구스타프 현 국왕의 초청으로 스웨덴 왕실을 방문하여 국위를 선양하였다.

 

경주시민들은 문화유산 보전에 대한 그의 공로를 기념하여 2001년 추송비를 세웠다.

 

(2) 추송비(追頌妃)

 

영리와 이재를 모르고 가정을

돌보지 않은 채

신라인들이 걸어온 아득히 먼길을

이름 없는 돌처럼 따라갔고

무너진 신라탑(新羅塔) 다시 일으키며 흙밑 뒤져

청태(靑苔) 낀 기왓장과 토기편(土器片),

비편(碑片)들을 수없이 발굴하여,

이 민족 역사를 증언했고

신라의 얼을 찾아 평생(平生)을

경주(慶州)의 산야(山野)를 헤맨 나그네

어느 왕조(王朝)의 상신(相臣)이 이처럼

천년왕조(千年王朝)를 섬기고 사랑하였던가.

귀천(歸天)하시어 신라문화(新羅文化)를 쌓아 올렸던

자랑스런 선인(先人)들을 만나

후예(後裔)로서 부끄럽지 않게 그들에게

아름다운 신라(新羅)의 향기(香氣)를

온누리에 풍긴 진정한 역사(歷史)의 장부(丈夫)였네.

 

2001년 5월 19일

 

서울대학교(大學校) 고고미술사학과(考古美術史學科) 교수(敎授) 임효재(任孝宰)가 비문(碑文)을 짓고

 

대한민국 학술원 위원 무의자(無衣子) 권옥연(權玉淵)이 제자(題字)를 쓰고

석장(石匠) 윤만걸(尹晩杰)이 새기다.

 

(3) 석당(石堂) 최남주(崔南柱) 선생 약력

 

- 1905년 4월 1일 경주시 성건동에서 출생

- 1924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 1926년 경주박물관 창설에 참여

- 1926년 스웨덴 구스타프 6세 아돌프 황태자와 함께 서봉총(瑞鳳塚) 금관 발굴에 참여

- 1926년-1939년 한국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南山) 불적(佛蹟) 조사에 한국인 최초로 참여하여 수많은 불교 문화재를 발굴, 경주박물관에 전시

- 1934년 신라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인 남산(南山) 신성비(新城碑) 발견

- 1938년 한국 미술사학계 개척자이신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선생과 문무대왕의 해중릉(海中陵)이 있는 동해구(東海口) 유적 학술답사

- 1945년 광복 후 경주문화재 보존 연구에 전념, 수많은 문화재를 찾아서 신라사 연구 및 고고학계에 공헌

- 1970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 서훈

- 1971년 스웨덴 왕실 최고훈장 바자 훈장 기사작(騎士爵) 서훈

- 1975년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의 초청으로 스웨덴 왕실 방문, 스웨덴 고고학계 시찰

- 1980년 2월 향년 75세로 성건동 자택에서 환원(還元 : 천도교에서 사망을 의미)

 

(4) 한국박물관협회에서 건립한 석당공원 추모비

 

경주 문화재 발굴 보존의 선구자

 

석당 최남주(石堂 崔南柱)

 

우리나라 고고학계와 박물관학계의 여명기였던 1926년 한국인으로선 유일하게 경주박물관 창설에 참여하여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박물관 문화의 개척과 신라문화재 보존을 위해 평생을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셨던 석당 최남주선생 탄생 101주년을 맞이하여 한국박물관인들의 이름으로 석당 선생님의 박물관과 신라문화 사랑의 아름다운 정신을 이 패에 새겨 드립니다.

 

2006년 9월 24일

 

한국박물관협회 회장

 

김종규

 

(5) 한국일보 추송비 건립 경위

 

평생을 신라문화재 발굴 및 보존에 헌신 한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선구자인 고(故) 석당(石堂) 최남주(崔南柱·1905~1980·사진) 선생의 추송비가 후학 및 스웨덴 왕실에 의해 세워진다.

 

김태중(金泰中) 경주문화원장은 19일 오후 3시 경북 경주시 충효동 김유신 장군 묘 앞에서 석당 최남주 선생 추송비(사진)에 대한 제막식을 갖는다고 18일 밝혔다.

 

일제 강점기에 경주박물관 창설 및 신라 문화재 발굴 등에 참여했던 최선생은 특히 1925년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6세 왕세자와 함께 경주시 노서동 서봉총(瑞鳳塚)을 발굴한 것으로 유명하다.

 

서봉총이라는 명칭은 스웨덴의 한자명 서전(瑞전)에서 '서'를, 이곳에서 발굴된 금관의 봉황 장식에서 '봉'자를 각각 따서 붙인 것. 당시 왕세자는 “이제 국왕이 되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을 정도로 발굴에 흥분했고 이 과정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최선생과 깊은 교류를 나눴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우정을 지켰고 왕이 된 구스타프 6세는 73년 왕실 최고훈장을 서훈키도 했다.

 

이날 제막식엔 스웨덴 왕실 특사인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스웨덴 대표 페테 하마스드럼 소장을 비롯, 임효재(任孝宰) 서울대 교수, 한국박물관협회 김종규(金宗圭) 회장, 최무장 건국대 교수, 한나라당 손학규 의원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박일근 기자 ikpark@hk.co.kr

 

3.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최남주

 

무너진 신라의 탑 다시 일으켜 세우고 흙 밑 뒤져 청태 낀 기왓장과 비석조각을 주워 신라의 향기를 온누리에 배달한 역사 배달부 최남주옹의 추송비가 작고한 지 20년 만인 엊그제 경주 김유신 장군묘 입구에서 제막되었다(조선일보, 2001년 5월 21일).

 

이 제막식에서 눈길을 끄는 손님이 있었으니 바로 스웨덴 왕실이 보낸 벽안의 특사다. 웬 인연으로 이 자리에 왕실 특사가 왔을까. 후에 스웨덴 구스타프 6세가 되는 44세의 황태자가 고고학자로 1926년 경주 서봉총에서 최남주옹과 더불어 금관을 발굴해 낸 묵은 인연 때문이다.

 

서봉총을 발굴할 때 연이틀 흙비가 내려 왕릉을 파헤친 빌미라는 원성이 있었음이며 발굴책임자인 고이즈미라는 일본사람이 출토한 금관을 차능파라는 기생에게 씌워준 것이 탄로나 견책을 당하기도 했다는 등의 금관발굴 전후의 이야기들을 최옹으로부터 들은 기억이 난다.

 

최옹의 공적으로 남산 신성비의 발견을 들 수 있다. 어느 날 헌강왕릉의 묘지기가 자기 집 앞 돌다리에 글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고 한 말을 듣고 추적하여 20자씩 9행으로 된 이두비문이 새겨진 자연석을 발견,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합치함을 고증해낸 것이다. 그 비문에는 완공한 후 자기가 맡은 공구가「3년 내로 무너지면 죄를 달게 받겠다」고 맹서하고 있어 이 비를 세웠던 신라인들의 아름다운 책임감이 표출되어 감명을 주었던 신성비다.

 

석굴암의 감실 앞에 놓였던 유마거사상과 11면 관음보살상 앞에 놓였던 아담한 5층 석탑을 당시 조선 총독이던 데라우치가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확인 추적하기도 했던 최옹이다. 그 밖의 흥덕왕릉비 조각을 발굴하는 등 경주 유적으로 최옹의 손을 거쳐가지 않음이 드물다 할 정도로 신라의 역사배달부 노릇으로 75년 인생을 쇠진시켰다.

 

깨끗하지만 어려웠던 만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앞으로 또 얼마나 먼 여로를 가야할지 모르며 꿈만 먹고 사는 맥처럼 살 수 없는 노릇일지라도 이미 정해진 이 길을 가야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고 「그러다가 저승에 가서 신라문화를 쌓아올렸던 선인을 만나면 부끄럽지 않음을 자부하고 신라의 향기를 온누리에 배달한 역사의 배달부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대답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던 최옹이다.

 

석당공원을 지난 2월 15일에 답사하였다. 김유신 장군 묘소에서 가까운 곳이라고 하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책하는 동네 주민들에게 석당공원 위치를 물어보았다. 대부분 모르고 있어 흥무공원 앞에 쉬고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하니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다. 김유신 장군 묘소를 들어가고 나오는 길은 일방통행로인데, 나오는 길 끝 부분에 석당공원이 있었다. 대로변에서 차로는 역주행이라 들어갈 수 없고, 주차하고 조금 걸어서 들어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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