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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화랑 죽지랑을 사모하여 지은 노래 모죽지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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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화랑 죽지랑을 사모하여 지은 노래 모죽지랑가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삼국유사』에 나오는 죽지랑

김유신 장군과 동시대 인물로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죽지랑이라는 화랑도가 있었다. 김유신 장군 밑에서 부수[副帥 : 주장(主將)을 보좌하는 장수]로 활약한 장군이었다. 진덕왕(眞德王)ㆍ태종(太宗)ㆍ문무왕(文武王)ㆍ신문왕(神文王)의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다.

화랑도인 죽지랑의 낭도로서 활동한 득오곡이 죽지랑을 사모하여 지은 노래가 모죽지랑가이다. 모죽지랑가는 향가로서 팔구체로 구성되어 있다. 득오곡이 모죽지랑가라는 향가를 지었을 때 죽지는 상당히 나이가 든 노화랑이었다.

화랑도 죽지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그 후 여러 대에 걸쳐 대신으로서 존경과 찬미를 한 몸에 받았던 노화랑(老花郎)의 쇠잔한 모습을 안쓰러워하는 득오의 심정과 죽지랑을 향한 변하지 않는 존경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향가의 다른 작품들에서 보이는 주술적·종교적인 색채가 보이지 않는 순수한 개인의 감정을 노래한 서정시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죽령 자락인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에는 「모죽지랑가」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디지털영주문화전자대전).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 효소왕대(孝昭王代) 죽지랑(竹旨郞), [죽만(竹曼) 또는 지관(智官)이라고도 한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 때, 죽만랑(竹曼郞) 무리에 급간 득오실(得烏失)[득오곡(得烏谷)이라고도 한다.]이 있었다. 

그는 화랑도의 명부인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이 있어서 날마다 출근했는데, 10여 일 동안 보이지 않았다. 죽만랑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당전(幢典) 모량부(牟梁部)의 익선(益宣) 아간(阿干)이 제 아들을 부산성(富山城)의 창고지기로 임명했습니다. 말을 달려 급히 가느라고 미처 죽만랑께 인사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죽만랑이 말하였다.

“그대의 아들이 만약 사적인 일로 그곳에 갔다면 찾아가 볼 일이 없겠지만, 지금 공적인 일로 갔으니 내 찾아가 대접을 해야겠소.”

그리고는 떡 한 합과 술 한 항아리를 가지고 하인[우리말로는 개질지(皆叱知)라고 하니, 종을 말한다.]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낭도 137명도 의장을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得烏失)이 어디에 있는지 묻자, 문지기가 말하였다.

“지금 익선의 밭에 있습니다. 관례에 따라 부역을 하고 있습니다.”

 

죽만랑이 밭으로 가서 가지고 온 술과 떡으로 득오실을 먹였다. 그리고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익선이 굳이 이를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관원인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의 능절조(能節租) 30섬을 징수하여 관리하면서 성 안으로 운반하고 있었는데, 죽만랑이 부하를 중시하는 풍모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이 꽉 막혀 융통성이 없는 것을 야비하게 여겼다.

 

그래서 거두어 가던 30섬을 익선에게 주고 죽만랑을 도와서 휴가를 요청하였지만,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절(珍節) 사지(舍知)가 타던 말의 안장을 함께 주자 그제야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花主)가 이 말을 듣고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러움과 추악함을 씻어주려 하였는데, 익선이 도망가 숨었으므로 그 맏아들을 잡아왔다. 그때는 한겨울의 매우 추운 날이었다. 성내의 연못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곧 얼어 죽고 말았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명을 내려, 모량리(牟梁里) 사람으로 벼슬에 있는 자들을 모조리 내쫓아 다시는 관공서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고 중도 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미 중이 된 자는 종과 북이 있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명령을 내려 간진의 자손을 평정호손(枰定戶孫)으로 삼아 그를 표창하였다. 당시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의 고승이었지만 모량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승직을 주지 않았다.

 

2. 『삼국유사』에 나오는 죽지랑의 탄생 설화

 

처음에 술종공(述宗公)이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가 되어서 근무지로 가려고 하였는데, 마침 삼한에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기병 3천 명으로 그를 호위하였다. 죽지령(竹旨嶺)에 이르렀는데 어떤 한 거사가 그 고갯길을 평평하게 닦고 있었다. 공이 이를 보고 매우 좋게 생각했으며, 거사도 공의 위세가 매우 뛰어난 것을 좋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서로 마음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공이 근무지에 도착해서 한 달이 되었을 때, 꿈에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공의 아내도 같은 꿈을 꾸어서 매우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그래서 다음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어보게 하였더니, 그곳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거사께서 돌아가신 지 며칠 되었습니다.”

심부름꾼이 돌아와서 보고했는데, 그가 죽은 날이 꿈을 꾼 날과 같았다. 공이 말하였다.

“아마도 거사가 우리 집에서 태어나려나 보오.”

 

그리고는 다시 군졸을 보내 죽지령 위의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내고 돌미륵 하나를 만들어 무덤 앞에 두었다. 아내가 꿈을 꾼 날부터 태기가 있었는데, 아이를 낳은 뒤에 고개 이름을 따서 죽지(竹旨)라고 하였다. 그 죽지가 장성하여 벼슬을 하였는데, 부수(副帥)가 되어 유신 공과 함께 삼한을 통일하였고, 진덕왕(眞德王)ㆍ태종(太宗)ㆍ문무왕(文武王)ㆍ신문왕(神文王)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3. 모죽지랑가 해석

 

① 원문

 

거은춘개리미(去隱春皆理米)

모동거질사곡옥시이우음(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아동음내질호지사오은(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모사년수취음타지행제(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

 

목연회어시칠사이의(目煙廻於尸七史伊衣)

봉오지악지작호하시(逢烏支惡知作乎下是)

랑야 모리시심미 행호시도시(郞也 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

봉차질항중숙시야음유질하시(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② 양주동 박사 해독

 

“간봄 그리매(간 봄 그리매)

모든 것ᅀᅡ 우리 시름(모든것사 설이 시름하는데)

아ᄅᆞᆷ 나토샤온 즈ᅀᅵ(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이)

살쯈디니져(주름살을 지니려 하옵내다)

 

눈 돌칠 ᄉᆞ이예(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맞보ᄋᆞᆸ디지ᅀᅩ리[만나뵙도록(기회를)지으리이다.]

郎이야 그릴 ᄆᆞᅀᆞᄆᆡ녀올 길(郎이여, 그릴 마음의 녀올 길이)

다봊ᄆᆞᅀᆞᆯᄒᆡ 잘 밤 이시리(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이까.)

 

③ 최철 현대어 풀이

 

간 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서러워 시름하는데

아름다움을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으려 하옵내다.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만나뵙도록 하리이다.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는 길이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이까.

 

노래를 보면 지나간 봄을 그리며 시름에 젖고, 또 죽지랑의 아름답던 모습이 쇠함을 바라보는 득오곡의 낭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작품의 주된 정조를 형성하고 있다. 한때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그 후 여러 대에 걸쳐 대신으로서 존경과 찬미를 한몸에 받았던 노화랑(老花郎)의 쇠잔한 모습을 안쓰러워하는 득오곡의 심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변하지 않는 존경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작품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죽지랑의 생존시에 지어진 작품이라는 설과, 그의 사후에 그를 추모하여 지은 노래라는 설이 학계에 제기되어 있다. 전자에 따를 때 이 노래는 득오가 앞서 익선에게 끌려 가서이거나 그 일이 있은 뒤 낭을 사모하여 지은 노래가 되고, 후자의 경우 죽지랑이 죽은 뒤 그의 덕을 사모하여 추모 찬송한 추모가의 성격을 지닌다.

 

이 작품은 지난 날 위대하였던 노화랑 죽지랑이 일개 아간 벼슬의 익선에게 수모를 당할 정도로 그 위엄과 위의를 상실해 간 화랑도의 세력을 잃은 모습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모죽지랑가의 무대 부산성

 

부산성은 경북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195-2 일대에 있는 신라의 포곡식 석축 산성이며, 사적이다. 성의 높이는 2m이며, 둘레는 9,470m에 달한다. 경주 부산성(慶州 富山城)은 신라 진평왕 대에 초축되었다는 설과 문무왕 대에 축성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성 내부에서는 경주 남산신성(南山新城)의 서창지와 비슷한 규모의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신라시대에 초축된 경주 부산성은 왕경의 외곽을 방어하는 기능을 하였으며, 조선시대까지 경주와 영천, 포항 지역을 관할하는 군창의 역할을 담당한 중요한 관방시설이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주사산·오봉산·오로봉산·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부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이다(경주시청).

 

경주 부산성(慶州 富山城)은 건천읍 서쪽에 있는 부산주1 정상부를 중심으로 3개의 곡부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경주 부산성의 외곽은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를 하기 유리하며, 성 내부에는 평탄한 지형이 많아 관련 시설을 설치하기에 유리하다.

 

경주 부산성이 초축된 시기와 관련하여서는 서로 충돌하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에서는 문무왕 3년 1월에 경주 부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문호왕 법민조에도 문무왕 대에 경주 부산성을 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축조를 마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2 기이2 효소왕대 죽지랑조에서는 진평왕 때에 화랑 죽지랑의 낭도가 부산성(富山城) 창직(倉直)으로 근무하였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이에 따라 경주 부산성은 진평왕 대에 처음 축조되었고, 문무왕 3년(663)에 개축되었을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성곽조에는 ‘부산성은 석축이고 둘레가 3,600척, 높이가 7척인데, 절반 정도가 붕괴된 상태이며, 성 내부에 개천 3개소, 연못 1개소, 우물 9개소와 군창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대동지지』 경주부 성지조에는 ‘문무왕 3년에 성을 석축하였고, 둘레가 3,600척이며, 연못 1개소, 우물 9개소가 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반면에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건복 신해년(진평왕 13년, 591)에 부산성을 쌓았고 둘레가 16,593척이다’라고 전한다. 이와 같이 경주 부산성의 축성 시기와 규모에 대한 기록은 사료마다 다른데, 이것은 경주 부산성이 조선 숙종 대의 대대적인 산성 정비 사업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편 단순한 기록상의 오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초축 시기와 관련하여, ‘591년에 부산성이 초축되었다’라는 『경상도속찬지리지』의 기록은 『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조와 연관된 설명으로 보인다. 이 기록을 근거로 진평왕 대에 부산성이 초축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나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삼국유사』 권1 기이1 선덕여왕 지기삼사조에 ‘부산 아래 여근곡에 백제의 병사가 침입했다’라는 내용을 근거로 진평왕 대에는 부산성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 있어 진평왕 대에 부산성이 초축되었다는 설을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 부산성은 아직 발굴 조사(發掘調査)가 진행되지 않았다. 다만 지표조사와 실측 조사를 통하여 부산성의 둘레가 9,470m이며, 지형에 따라 축조 방식이 다르나 대체로 협축식으로 축조된 산성임을 확인하였다.

 

경주 부산성 남동쪽 지점에는 치성(雉城)처럼 돌출된 성벽이 존재하고, 성 내부에는 복두암이 있다. 이로 인해 부산성이 내외성 2중 구조로 된 산성인지, 아니면 고려시대에 방어를 위해 이 시설을 부가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필자가 2024년 1월 11일 부산성 답사 중 복두암을 가보니 스님들은 떠나고 암자는 텅 비어 있었다. 스님들이 1천일 동안 결사 정진하는 무문관 수행도장으로 일절 외부인(신도, 일반인 모두)의 출입을 엄금한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암자로 통하는 등산로는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암자 건물은 나무로 지은 어설픈 전각이 몇 채 있었고, 불상도 남아 있었다. 암자에 스님이 없어 등산객들이 철조망 옆으로 길을 내 등산로로 이용하고 있었다.

 

경주 부산성의 대부분 구간은 붕괴된 상태이다. 그렇지만 상태가 양호한 20m 정도의 구간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최대 높이 약 2m의 성벽이 확인된다. 체성(体城)부는 가공하지 않은 안산암 계통의 할석(割石)으로 면석(面石)을 쌓고 중간에 잡석을 채우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해당 구간의 성벽은 고려시대 이후에 축조되었거나 수리된 것으로 보인다.

 

경주 부산성에는 동 · 서 · 남 · 북 총 4개소의 문지가 확인되었지만, 남문지를 제외하면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동문지와 남문지는 주 출입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남문지에는 반원형의 옹성(甕城)이 설치된 것으로 파악된다. 남문지 주변에서는 다량의 와편이 수습되고 있어 남문은 문루를 갖추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타 암문지 1개소, 치(雉) 2개소도 파악되었다.

 

지표 조사를 통해서 6개소의 건물군이 확인되었는데, 이 건물지들은 장대지(將臺地) 혹은 창고와 관련된 유구인 것으로 파악된다. 건물지 주변에서는 토기편이 수습되고 있다. 이 중에서 창터골이라고 불리는 산성마을 동편에서 초석주7을 갖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지는 상하단으로 구분되는 구간에 초석이 있어 창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단부의 건물지는 정면 11칸, 측면 5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경주 남산신성(南山新城) 서창지와 유사한 규모이다. 경주 부산성에 창고가 있었다는 것은 『삼국유사』 권2 기이2 효소왕대 죽지랑조에서 언급된 부산성 창직의 존재와 연결된다. 한편 성 내부의 수량은 풍부하며, 4개소의 우물이 확인되었다.

 

산성 내에서는 신라시대뿐 아니라 고려~조선시대의 유적도 확인된다. 또한 9㎞가 넘는 대형 산성이라는 점, 성벽에서 후대에 개축된 구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고대 산성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옹성을 갖춘 남문지 등은 경주 부산성이 고려 이후에 만들어진 중세 산성의 성격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필자는 경주 부산성을 세 번 답사하였다. 2024년 1월 5일 주사암, 김유신 장군 수련장인 마당바위를 보기 위해 유학사, 여근곡을 통해 1차로 답사하였다. 2차 답사는 1월 11일 부산성 서문 쪽을 둘러보기 위해 성암사로 등산하였다. 3차 답사는 1월 16일 성암사를 거쳐 천지연못, 여근곡 갈림길, 주사암, 마당바위를 보고 성암사로 원점 회귀하였다. 성벽은 많이 파괴되었으나 일부 구간은 원형대로 남아 있는 구간도 있었다. 산세가 험하여 답사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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