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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군위군 김유신·소정방·이무 장군을 모신 효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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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군위군 김유신·소정방·이무 장군을 모신 효령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효령사

김유신이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이끌고 오는 군사를 마중 나가 기다린 장소가 지금의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라고 한다. 장군리에 진을 친 장수들인 김유신, 이무, 소정방은 모여 앉아 어떻게 하면 백제를 쳐 신라의 승리로 이끌 것인가를 의논했다고 한다. 장군리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장군들이 머리를 맞대었던 의미 있는 장소였다.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 효령사(孝靈祠)는 신라 명장 개국공 태대각간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 신구도대총관 소정방(神丘道大摠管 蘇定方), 대사마 좌위 중랑장 신라연안후 이무(大司馬左衛中郞將 新羅延安侯 李茂) 삼공(三公)을 모신 사당이다. 효령사 제단에는 김유신·소열(정방)·이무 장군 세 사람의 신장(神將)을 적은 위패가 있다. 신라장수 김유신, 당나라장수 소열(정방), 그리고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화한 이무 장군이다.

효령사는 장군당(將軍堂)이라고도 한다. 현지에서는 ‘장군댕’이라고도 불린다. 고려 말엽 이곳 주민들이 옛일을 추모하기 위하여 효령사에 매년 3월 3일에 향사를 지내다가 요즘은 김해 김씨와 연안 이씨 양 문중에서 단오에 향사를 지낸다고 한다. 1881년 이곳 군위현감이 쓴 효령사 중수상량문에는 ‘백제통합 삼한일광(百濟統合 三韓一匡)’이라는 글이 들어 있다. ‘백제를 통합하는 것이 삼한을 바로잡는 시작이 된다.’는 뜻이다.

군위는 지리적으로 삼국시대 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전초기지이자 그 길목에 위치했다. 김유신 장군이 경주에서 출발하여 영천, 신령을 거쳐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 마을에 주둔했다. 김유신 장군이 당나라 소정방과 합세하여 백제를 치기 위한 작전 계획을 숙의하였다. 금강으로 해서 광주 공주로 진군하는 나당 연합 작전 계획을 장군리에서 하룻밤 유숙하면서 수립하였다. 장군리라는 마을 지명이 여기에서 유래 되었다.

제동서원 왼쪽에 효령사로 올라가는 시멘트로 만든 계단이 있다. 계단이 무려 309 계단으로 한참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기 쉽게 일직선이 아니라 방향을 꺾어 구불구불하게 만들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구릉의 정상인 장군봉에 이른다. 일명 장군당 (將軍堂)이라고도 하는 효령사(孝靈祠)의 편액이 걸려 있다. 사당 옆 오른쪽에 효령사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효령사 사당의 정문은 잠겨있으며, 현판은 일통문(一統門)이라고 적혀 있다. 일통문은 삼국통일의 주인공인 김유신 장군, 신라를 도와서 삼국통일에 기여한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과 이무 장군을 모신 효령사의 출입문에 어울리는 문구이다. 정문에서 왼쪽 담장으로 돌아가 보니 출입문 나무 사이의 흙벽이 떨어져 있어 수리가 시급하다.

효령사에서 아래 들판을 내려다보니 나뭇가지가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을, 논밭, 농협 하나로마트 등이 보였다. 1363년 전 신라시대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 정벌을 위해 장군리 들판에 진을 친 모습을 상상하며 들판을 내려다보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백제처럼 지도층이 사치와 향락을 일삼고 부패하면 나라가 망하고, 신라처럼 왕과 신하, 백성들이 일치단결하면 나라가 부흥한다는 사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실이다.

2. 장군당의 단오 행사

지난 6월 22일 단오에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에서 ‘제5회 군위 삼장군 단오축제’를 개최하였다. 군위삼장군단오축제는 군위문화원이 주관하여 열렸다. 효령면 장군리에 위치한 효령사에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하는 데 협력한 김유신, 소정방, 이무 세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음력 5월 5일에 관민이 모여서 단오제를 올리고 단오놀이를 한 것에 유래한 전통 행사이다. 고려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오랜 기간 중단되었다가 근래 다시 부활하였다.

군위군이 대구직할시로 편입되지만 군위 삼장군 단오축제는 전통문화를 살리는 의미에서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강릉 단오제에서 김유신 장군이 대관령 산신으로 모셔지는 행사는 수백 년간 이어져 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김유신 장군과 인연이 되어 단오제 행사가 열리는 군위군과 강릉시는 상호 자매결연을 맺어 교류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단오제는 삼장군 통일로드 행렬을 시작으로 투호 던지기, 제기차기, 창포비누만들기, 목판체험, 장군단오 놀음, 단오 팔씨름대회, 단오가요제 등 다양한 단오놀이와 지역 예술동아리·전문공연팀 공연, 각종 전시행사를 비롯해 단오날 마을에서 신에게 올렸던 공동체 제의를 재현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당나라에 청병(請兵)하고, 당은 원군(援軍)을 파견하였는데, 원군의 대장은 소정방, 부장은 이무였다. 이들이 신라로 오고 있을 무렵, 신라에서는 김유신 장군과 많은 군사를 보내어 마중하게 했다. 김유신 장군은 장군리 넓은 들에서 당군(唐軍)과 만나게 되었다.

 

나당연합군은 잠시 효령에 군사를 머물게 했으며, 삼장군은 장군봉에 지휘소를 마련하고 백제를 공략할 작전을 수립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후 삼장군은 다시 효령에 들러 장군봉에 올라 큰 소리로 “삼국통일이 되었으니, 안심하고 살아라.”라고 말한 뒤에 떠났다(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이런 일이 있은 후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삼장군을 잊고 지냈다. 그런데 고려 후기 어느 때부터인지 장군봉 인근에서는 말을 타고 그냥 지나가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장군봉 밑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우고, 말을 탄 사람은 반드시 내리게 하였다.

 

또 장군봉 정상 부근에 접근하는 사람이나 가축이 변을 당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그 까닭을 캐어 보니 삼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해주었는데도 백성들이 고마움을 모르고 제사도 올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살던 사공씨(司空氏)가 나라에 상소하여 마침내 나라의 명으로 삼장군당을 짓고, 매년 오월 단오에 관민이 합심하여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삼장군제는 19세기 후반까지 전승되어 왔다.

 

단옷날이 되면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영신(迎神) 행진을 한다. 현의 우두머리 아전이 말을 탄 채 앞장서고, 울긋불긋한 여러 깃발을 들고 말에 실은 큰 북을 둥둥 치면서 거리거리를 누빈다. 이렇게 영신 행진이 끝나면 장군당에 다같이 올라가서 삼장군께 경건한 제사를 올린다. 제사가 끝나면 꽹과리, 징, 북, 소고를 울리며 뒤풀이를 한다. 이때는 삼신(三神)을 모시고 신유(神遊) 행진을 계속한다.

 

19세기 후반에 들어 음력 정월 보름 제사가 추가되어 일반 동제와 같은 성격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당제에 대한 관의 지원이 끊어지고, 18세기 후반에 불로리에 입촌한 김해 김씨들이 제사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제례는 김유신 장군의 후손으로서 제사권을 주장하는 김해 김씨가 맡고 풍물, 영신 등 오신행위(娛神行爲)는 인근 마을의 사공씨를 중심으로 한 주민들이 맡았다.

 

이 무렵 제례에 향사적 성격의 홀기(笏記)가 등장하여 민속신앙적 의례행사가 점차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 들어 일제의 간섭이 심해져 제의 규모가 극도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제의 주체가 주민에서 김해 김씨에게로 넘어가면서, 마침내 제례가 향사(享祠)로 변하게 된다. 1953년 김해 김씨들이 장군봉 아래에 세운 제동서원(濟東書院)이 자리를 잡자, 삼장군의 신좌를 서원의 숭무전으로 옮기게 된다.

 

제일(祭日)도 단오에서 삼월 초정일(初丁日)로 바뀌었다가 1981년부터 삼월 삼짇날에 지낸다.

1995년 원래의 장군당 초석 위에 효령사(孝靈祠)라는 삼칸 와가(瓦家)로 복원하고, 세 장군의 위패 또한 바꾸었다.

 

현재 삼장군제는 단옷날 오전 10시를 기하여 행해진다. 제관들은 미리 선정하는데, 군수가 초헌관을 담당한다. 제물은 조, 쌀, 돼지머리, 녹포, 대구포, 육포, 어포, 미나리, 무, 대추, 잣, 밤, 은행, 호도 같이 날 것을 사용하고 제상(祭床)에는 수저가 없다. 옛날 장군들은 날짐승을 칼로 베어 먹었기 때문이다.

 

3. 신라로 귀화한 이무 장군

 

장군당의 삼장군 중의 한 분인 이무 장군(李茂)은 당나라 장수로 참전하였다. 총사령관 소정방 장군의 부장으로 신라에 왔는데, 후일 신라 여인(백제 출신)과 결혼하였으며 당나라로 귀국하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여 연안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소정방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도와주러 왔으나 내심으로는 신라까지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품고 있었다. 부장인 이무 장군은 소정방의 오만한 의도를 말리며 신라의 입장을 존중해준 장군이었다.

 

이무 장군과 비슷한 사례는 주한 미군에도 있었다. 미국의 장군으로 한국에 근무하면서 진정으로 한국을 사랑하고 도와준 고마운 장군의 사례를 소개한다. 주한미군의 장성 중에도 1977년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에 반대하였다가 예편당한 존 싱글러브 육군 소장은 진정한 군인이었다. 주한미군 덕분에 북한의 남침을 억제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는 경제발전을 하여 빈곤 국가에서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도약하였다.

 

1977년 5월 29일 자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 때문에 군복을 벗게 되었다. 이 인터뷰에서 존 사르 기자는 싱글러브 장군에게 “귀하는 카터 대통령의 철군 계획이 전쟁을 부를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싱글러브 장군은 “만약 (카터의) 철군 계획대로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면, 그다음에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일개 육군 소장이 대통령의 정책에 정면으로 반기(反旗)를 든 것이다(월간조선, 2022년 3월호).

 

이무 장군은 백제를 평정(平定)하는 데 공을 세워 연안백 (延安伯)과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고, 그 후 신라에 귀화하여 살게 되었다. 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황해도 연안(延安) 땅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조선조 연안 이씨는 총 250여 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이 되었다.

 

연안 이씨 시조 이무 장군은 당나라 장군이었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이 대총관이 되고 이무는 부총관겸 독군(군사 감독관)이 되어 13만 당나라 대군을 인솔해 지금의 덕적도와 기벌포로 들어와 신라의 김유신 장군,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같이 백제의 수도 부소성(부여)를 공격하였다.

 

이무 장군은 소정방과 김유신 장군과의 주도권 분쟁이 있을 때 조정, 화해시켰다. 당군이 백제를 점령한 후 독단으로 백제를 식민통치하면서 동맹국인 신라마저 공격할 때는 소정방을 사전 저지시키고 나당 관계를 원만이 이끌어 준 공로로 660년 8월 25일 신라국에서 연안백 작위와 귀빈 대우를 받았다.

 

668년 9월 15일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 평양성 함락시키고 삼국통일 때는 신라국 대장군 김유신 장군의 추천으로 연안백(延安伯)에서 한 등급 올려서 직위가 높은 연안후(延安侯) 작위와 연안 지방 1000호 식읍을 받았다. 당시 당나라는 측천무후의 섭정으로 국정이 어수선했던 때라 이무 장군은 본국인 당나라로 귀국하지 않았다.

 

1300여 년 전 신라가 세계적인 대제국인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승만 대통령의 현명한 판단 덕분에 세계 최강국이자 민주국가인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급속하게 경제가 발전하였다.

 

반대로 북한은 공산주의로서 공산국가인 소련, 중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세계 최빈곤국이 되고 말았다. 국가는 생존을 위해 동맹이 필요하며, 자유 민주 체제가 우월함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이무 장군은 신라를 돕기 위해 당나라 장군으로 왔지만 신라 정복의 야욕을 품은 소정방을 설득하여 신라에 큰 도움을 주었다. 삼국통일 후 귀국하지 않고 연안 이씨의 시조가 되어 명문가를 이루었다. 개인에게는 친구가 중요하고 국가는 동맹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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