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30 (화)

  • 흐림속초12.4℃
  • 흐림17.5℃
  • 흐림철원19.8℃
  • 구름많음동두천18.2℃
  • 구름많음파주17.3℃
  • 흐림대관령6.6℃
  • 흐림춘천16.8℃
  • 구름많음백령도11.7℃
  • 비북강릉11.2℃
  • 흐림강릉12.3℃
  • 흐림동해12.5℃
  • 흐림서울18.5℃
  • 구름많음인천13.8℃
  • 흐림원주19.9℃
  • 흐림울릉도10.9℃
  • 흐림수원16.4℃
  • 흐림영월15.2℃
  • 흐림충주19.5℃
  • 흐림서산15.2℃
  • 흐림울진11.9℃
  • 흐림청주18.6℃
  • 흐림대전16.3℃
  • 흐림추풍령17.0℃
  • 흐림안동14.8℃
  • 흐림상주19.1℃
  • 비포항14.3℃
  • 흐림군산12.3℃
  • 흐림대구16.2℃
  • 흐림전주13.6℃
  • 비울산14.6℃
  • 흐림창원17.1℃
  • 흐림광주16.0℃
  • 흐림부산16.4℃
  • 흐림통영16.2℃
  • 흐림목포12.8℃
  • 흐림여수18.0℃
  • 흐림흑산도11.6℃
  • 흐림완도15.0℃
  • 흐림고창12.1℃
  • 흐림순천17.6℃
  • 흐림홍성(예)14.8℃
  • 흐림16.9℃
  • 흐림제주15.6℃
  • 흐림고산13.8℃
  • 흐림성산17.0℃
  • 흐림서귀포18.4℃
  • 흐림진주19.2℃
  • 구름많음강화17.5℃
  • 흐림양평19.5℃
  • 흐림이천18.7℃
  • 흐림인제12.7℃
  • 흐림홍천17.3℃
  • 흐림태백8.0℃
  • 흐림정선군11.5℃
  • 흐림제천18.7℃
  • 흐림보은18.0℃
  • 흐림천안17.6℃
  • 흐림보령12.1℃
  • 흐림부여14.6℃
  • 흐림금산16.1℃
  • 흐림16.0℃
  • 흐림부안12.8℃
  • 흐림임실15.2℃
  • 흐림정읍13.2℃
  • 흐림남원17.6℃
  • 흐림장수16.5℃
  • 흐림고창군12.5℃
  • 흐림영광군12.6℃
  • 흐림김해시16.8℃
  • 흐림순창군17.3℃
  • 흐림북창원19.0℃
  • 흐림양산시17.5℃
  • 흐림보성군17.9℃
  • 흐림강진군15.7℃
  • 흐림장흥16.1℃
  • 흐림해남13.9℃
  • 흐림고흥18.6℃
  • 흐림의령군20.8℃
  • 흐림함양군19.9℃
  • 흐림광양시19.3℃
  • 흐림진도군12.8℃
  • 흐림봉화13.7℃
  • 흐림영주16.1℃
  • 흐림문경18.1℃
  • 흐림청송군13.8℃
  • 흐림영덕12.6℃
  • 흐림의성18.0℃
  • 흐림구미18.6℃
  • 흐림영천14.6℃
  • 흐림경주시14.1℃
  • 흐림거창18.4℃
  • 흐림합천19.7℃
  • 흐림밀양18.7℃
  • 흐림산청19.6℃
  • 흐림거제18.1℃
  • 흐림남해17.7℃
  • 흐림17.5℃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문경시 당교사적비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문경시 당교사적비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당나라 군사와 관련된 다리인 당교

경북 문경시의 시청 건물 민원실 앞에 당교사적비가 있다. 정면에서 시청 건물을 바라볼 때 오른쪽이다. 행정구역이 현재는 문경시이지만 건립 당시는 점촌시였기 때문에 점촌시장 이름이 나와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 전쟁 당시 김유신 장군이 당나라 소정방의 흉계를 물리친 역사의 현장을 기록한 기념비이다.

역사적 기록은 삼국유사 권제일 기이 제일(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태종 춘추공(太宗 春秋公) 편에 나와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은 자료를 소개하면서 자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문경시와 상주시의 지명에 당나라 소정방 군사와 관련된 당교, 뙤다리, 도로명 주소에 당교로, 때대로 등이 남아 있어 소정방과 그 부하 군사들이 몰살을 당한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당교 부근에는 전투에 관한 지명이 많다고 한다. ‘머리뫼(頭山)는 당병의 머리를 잘라 묻었다는 곳이며, 다방터(唐兵터), 뙤밭, 뙤비탈, 또 반쟁이, 반전이(反轉), 이진, 위진(衛鎭) 등 당병의 주둔지로 추정되는 지명이 있다.

점촌5동(茅田洞)의 띠밭, 섶밭, 모전(茅田)은 옛날 이곳에 띠가 무성하여 사람이 살 수 없다고 하며, 경주이씨가 이주하여 개척한 후 동리가 형성되어 모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옛 신라시대 당군의 주둔지라 하여 띠밭(뙤밭)으로 추정된다. 불바다는 당교와 현 시청사 주변 일대의 넓은 들을 말한다.

2. 당교사적비

 

민족 통일의 성업은 국조(國祖) 단조의 개국 이래 우리 민족의 최대 염원이었으니 이러한 숙원을 풀어준 나라가 신라(新羅)였다.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청소년들의 건전한 거품과 자기 문화를 키운 강력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강한 고구려(高句麗)와 날쌘 백제(百濟)를 아우르기 위하여 일시 당(唐)의 세력을 빌렸지만 통일을 이룩하고는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당나라와도 의연히 맞서 싸워 당군의 말 발굽을 우리 땅에서 말끔히 지워버렸다.

 

이 어찌 장한 자주 정신의 발로가 아니랴!

 

당이 신라의 통일성업을 도운 것은 신라마저 속국으로 삼기 위한 욕심에서였다. 신라는 이름 재빨리 간파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맞이하며, 당나라의 침략 야욕을 여지없이 분쇄했다.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장군이 침략자로 돌변한 당의 소정방(蘇定方)을 물리친 역사적 다리가 바로 되다리 당교이다. 우리 고장에 있는 찬란한 호국의 명소이건만 지금은 잊혀진 다리가 당교(唐橋)이다.

 

통일의 비원을 싣고 달리는 3번 국도 옆에 당교사적비를 세움은 통일의 의지를 오늘에 다시 확고히 하려는 것이다. 통일 신라의 자주정신과 통일 위업을 이 시대의 점촌시민도 마땅히 본받아 조국 통일의 과업을 앞당겨 실현시키는 횃불이 되자.

 

1990년 4월

국사편찬위원 문화재위원

한국 교원 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鄭永鎬 짓고 심경 黃圭郁 쓰다.

 

시민의 뜻을 받들어

점촌시 교육장 송지홍

점촌문화원장 이창교

당교사적비건립추진위원의 자문을 받아

점촌시장 신의웅 세우다.

 

3.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태종 춘추공(太宗 春秋公)

 

또 『신라고전(新羅古傳)』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토벌하고 나서 또 신라를 공격하려고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김유신이 그 음모를 알고 당나라 군사에게 독약을 먹여 모두 죽여 묻어버렸다.”

 

지금도 상주 경계에 당교(唐橋)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당나라 군사를 묻은 땅이다. [『당사』에 보면 그들이 죽은 이유를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하였으니 어째서일까? 그 일을 감추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신라고전』이 근거가 없는 것일까?

 

만약 임술년 고구려 싸움에서 신라군이 정방의 군대를 죽였다면 훗날 총장 무진년에 어떻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일이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신라고전』이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진년에 고구려를 멸한 뒤에 당나라에 신하라고 일컫지 않고 그 땅을 차지하였을 뿐, 소정방과 이적 두 사람을 죽이는 데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又新羅古傳云 定方旣討麗濟二國 又謀伐新羅而留連 於是庾信知其謀 饗唐兵鴆之 皆死 坑之 今尙州界有唐橋 是其坑地[按唐史 不言其所以死 但書云卒何耶 爲復諱之耶 鄕諺之無據耶 若壬戌年高麗之役 羅人殺定方之師 則後總章戊辰 何有請兵滅高麗之事 以此知鄕傳無據 但戊辰滅麗之後 有不臣之事 擅有其地而已 非至殺蘇李二公也]

 

4.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경상도(慶尙道) 함창현(咸昌縣) 교량(橋梁)조

“당교(唐橋). 현의 북쪽 6리에 있다. 신라고기(新羅古記)에, “소정방(蘇定方)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여기에 머물렀을 때, 김유신(金庾信)이 그 계획을 알고, 당의 군사에게 잔치를 베풀어 취하게 하고 모두 여기에 묻어 죽였다. 뒷날 사람들이 그것으로 당교라고 이름 지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慶尙道 咸昌縣 橋梁

唐橋 在縣北六里 新羅古記 蘇定方旣討麗濟 又謀伐新羅留屯于此 金庾信知其謀 粲唐兵醉而皆抗之 後人因名唐橋

 

5. 문경시, 『聞慶誌 上』, 당교전투(唐橋戰鬪)

 

삼국유사 기이편 제1권(三國遺事 紀異編 第一卷)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또 신라 옛 전기에 소정방(蘇定方)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를 치고서 또 신라를 치려는 속셈으로 머무르고 있으므로, 유신공이 그 꾀를 알고 당병(唐兵)을 대접하면서 짐주()를 먹여 죽여 쓸어 묻었으니 지금 상주경내(尙州境內)에 있는 당교(唐橋)라는 곳이 바로 그 곳이라 한다”라 하였다.

 

당군(唐軍)은 백제와 고구려를 친 다음에 신라마저 저 없애고 자기들의 군현을 만들어 한반도 전체를 당나라의 영토로 하려고 획책하니 신라에서는 그와 같은 그 들의 속셈을 간파하고 당교(唐橋 : 오늘의 모진동과 함창읍 윤직리 부근)에서 소정방의 대군을 쓸어 묻고 실질적인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는 결정적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문경은 기쁘고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로 문희경서(聞喜慶瑞)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과거 시험 보러 가는 양반들은 문경새재를 통과하여 한양으로 올라갔다. 추풍령으로 가면 과거시험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통과하면 쭉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문경 새재를 즐겨 이용하였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김유신 장군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집어삼키려 한다는 야욕을 미리 간파하고, 그 당시 문경과 상주 일원에 주둔하던 당군에게 독이 든 술을 권하여 군사를 몰살시켜 파묻었던 다리가 바로 당교이다. 김유신 장군의 지혜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경사스럽고 기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지명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YNEWS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