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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오늘의뉴스 제19회 부산국제 茶 어울림문화제 세미나 부산에서 차와 다완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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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뉴스

심상도박사 오늘의뉴스 제19회 부산국제 茶 어울림문화제 세미나 부산에서 차와 다완을 생각한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11월 3일부터 5일까지 부산문화회관 대전시실에서 ‘제19회 부산국제 茶 어울림 문화제’가 열렸다. 

주최는 부산광역시, (사)부산茶문화진흥원, 주관은 제19회 부산국제차어울림문화제 조직위원회(대회장 이미자, 집행위원장 조정미), 후원은 KNN, 부산KBS, 부산MBC, 부산일보사, 국제신문, BBS 부산불교방송, 부산관광공사가 하였다.

행사 프로그램으로는 제2전시실에서 대렴차문화원 김애숙 원장의 “한국의 차 도구 자연과 철학이 조우하다” 전시회가 열려 다양한 국내외 차 도구를 전시하여 참가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은천 김성태 수집가의 고려와 송의 다구 유물전도 볼만했다. 10~14세기 고려와 송나라에서 사용한 다구 유물울 통해 점다법을 중심으로 전개된 연고차 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1전시실에서는 대한민국 다기 명인전이 열려 김대철(도문요, 한국다기명인 20호), 이효림(상명요, 한국다기명인 22호), 김태훈(경주요, 한국다기명인 13호), 장기덕(청봉요, 한국다기명인 6호), 송춘호(청학도방, 한국다기명인 9호), 천경희(문경요, 한국다기명인 7호)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동양향문화연구소의 민기식 대표가 “향유당 침향(沈香) 우리의 향 : 내일을 열다”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남영교 대표의 만병도 전시, 명천 스님의 선화의 세계 전시회, 김윤권 작가의 꿈처럼 빛나는 유리의 세계 전시회가 열려 유리공예 예술품을 선보였다.

 

특강 및 포럼 행사도 열렸는데, 개막식전 특강으로 11월 3일 금요일 오후 1시에 원광대학교 차문화경영학과 명예교수의 특강이 있었다. 11월 5일에는 (사)한국향도문화협회 이사장인 김덕기 박사의 천목(天目)과 한반도의 茶 그릇 특강이 있었다. 필자는 ‘송혜경 교수의 알기 쉬운 동다송(東茶頌)’ 책을 구입하여 저자의 사인을 받았다.

포럼은 11월 4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부산에서 차와 다완을 생각한다” 주제로 열렸다. 발표 1 : 조국영 도예작가(부산요포럼 고문)의 부산요와 어본다완, 발표 2 : 김동기 이사(부산요포럼 학술이사, 철학아카데미 상임이사)의 “부산요의 인문학적 궤적”, 발표 3 : 장기덕 교수(부산과학기술대학, 도예가)의 “부산요에서 생산된 주문사발” 주제 발표가 있었다. 포럼은 안태호 부산요 포럼 대표가 맡아 진행하였다.

조국영 와이뉴스(YNEWS) 이사의 포럼 주제 발표 내용이 방대해서 줄여서 소개하기로 한다. 조국영 도예작가는 부산요 포럼을 통해 수차의 논문 발표를 함으로써 한일 도자 교류사의 실상을 알리는 많은 연구 자료를 제시하며 독보적인 연구 역량을 선보였다.

 

포럼에서 발표된 논문 내용은 한국에서 최초로 발표되는 획기적인 자료(대마도 종가 문서, 일본 문헌자료, 국내 학술 자료 등)로 인정받고 있다. 조국영 도예작가는 부산요의 위치와 실체를 규명하고 도자기 파편, 차 제작 도구도 발견하여 공개한 바 있다.

 

 

“어본다완(御本茶碗)과 부산다완(釜山茶碗)”

 

발표 조국영 : 도예가, 부산요포럼 상임고문

 

Ⅰ. 머리글

 

우리는 어본다완(御本茶碗)이 생겨나기 전에 전래되어 내려 온 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다도 계에서 고려다완(高麗茶碗)이라 불리게 된 것과 이 고려다완을 보고 다인들에 의해 주문되어 제작된 주문다완이 어본다완 이전에 조선의 고유 특성을 지닌 사발이 존재함을 전제로 하고 부산요의 가마 에서 생산된 어본다완에 대해 고찰하면서, 이 어본다완에 부여된 명칭들에 관해 다각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예컨대 전래 고려다완이 있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후 김해(金海)의 어본다완이 먼저 생겨나고 이것이 부산요가 개설되면서 어본(御本)에 의해 제작되었지만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지고, 지명(地名)이 등장하는 공예사(工藝史)의 전환점을 알려주는 특징들을 다완의 분류에 반영하여 새롭게 구분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미술사든 공예의 역사든 기본적으로는 연대기적 역사, 문양으로서의 양식사, 형태로서의 양식사, 인물로서의 제작자의 역사.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재료의 전환으로의 역사 지리적 특성의 역사 등의 해석들이 있다. 그러면 이 다완은 이러한 공예사의 관점(觀點)에서 벗어나 장소와 우연적 상황과 감상자의 명칭 부여로 탄생된 다완명으로 분류되어 있기에 부산요와 부산 근교에서 생산된 다완들에 관하여 지리적 명칭을 모색하여 보고자 한다.

 

예를 들어 양산 법기리에서 주로 발견되는 오기다완 등은 대덕사(大德寺) 오기와 다른 형태의 특성을 지니면서도 조선 사발의 모태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점을 감상하는 관점이 필요하고 그 특성은 존재한다. 전래고려다완의 분청기법들 역시 조삼도 다완을 통해 새롭게 변모된 분청기법을 감상하게 만드는 것도 주목할 감상 관점이라 본다.

 

이러한 독특한 혼재된 특성을 지리적인 부산, 양산, 김해다완으로 분류하긴 했지만 양식적인 특성의 변화 과정도 주문 과정을 거치면서 전래된 고려다완의 특성이 남아 전해오는 특성을 신고려다완 양식이라 칭한 다완들에서 찾아볼 수 있기를 바라며, 이들을 새롭게 지역성과 환경, 관리자 등의 차이점을 고려하여 부산고려다완과 양산 신고려다완으로 나누어 보았다.

 

본고의 연구 과정은 부산요의 지정적 위치의 이전 과정과 용어의 등장, 다양한 다완의 명칭이 일본 사료에 출현한 것, 그리고 부산요 다완의 분류 양상과 부산요에 파견된 일본 도공두(陶工頭) 이름 다완들이 20세기 현대에 이르러 어떻게 분류되고 있는지를 고찰하고, 부산요와 양산, 김해 다완을 통틀어 조선 사기장이 다완을 대하는 관점에 의한 다완들과 일본에서 주문한 다완들을 범주에 두고, 이 새로운 지리적 명칭 구분을 통해 부산다완의 특성을 고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본 논고에서는 부산에서 생산하였던 어본다완의 개념과 성격을 새롭게 정의하고 그 분류가 기존의 일본 도공두(陶工)에 의한 분류, 양식에 의한 분류, 표현 기법에 의한 분류 등 혼재되어있는 난맥상을 짚어 보면서 정리되어야 할 과제와 평가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로 삼을 것이다.

 

Ⅱ. 부산요의 명칭과 시기의 분류

 

부산요의 가마 명칭에 관련한 자료로는 조선측 기록에는 사기소(沙器所)라고 하였으며 당시의 일본인들의 기록에는 다완조(茶碗竈)라고 하였으며 관리자를 다완조청부(茶碗竈請負 : 청소책임자) 다완조가수역(茶碗竈家守役 : 가마를 지키는 사람)으로 하였고、 화관요(和館窯) 또는 왜관요(倭館窯)라고 부르지 않았다.

 

왜관의 명칭에 대하여는 일본인들은 두모포왜관 시절에는 모든 기록에 왜관이라고 하였고 화관이라는 명칭은 초량으로 옮겨온 후 새로운 각오로 모든 문서에 화관으로 사용하게 된다. 요(窯)라는 낱말은 요업을 뜻하는 근대부터 쓰였던 언어로 일본내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하면서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의 저서 『부산요와 대주요(釜山窯の 對州窯)』에서 부산요의 명칭 이 1930년에 최초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의 학계에서는 그대로 인용하여 사용하였고 특히 1980년에 출판된 이즈미 쵸이치(泉澄一)의 『부산요의 사적연구(釜山窯の史的研究)에서는 종가문서(宗家文書)를 통한 부산요 연구에 많은 발전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이즈미의 부산요 번조시기의 구분은 일본의 황력 연호(年號)로 나누어져 있어 본래의 부산요 시기적 분류 내용과 관련이 없으며 부산요는 가마의 지정적 위치와 환경에 따라 시기를 구분하여야 한다.

 

가마의 위치와 방향과 지형. 구조, 풍향 등 매우 예민한 사항들이 시간과 맞물려 다완번조에 많은 영향을 미치므로 장소의 이전이 시기적인 구분에 중요하다. 따라서 부산요의 시기적인 구분을 합리적으로 하였던 사례를 예시하며 그 범주에 적용할까 한다.

 

부산요는 1639년~1643년까지 두모포왜관 바깥에 가마를 만들어 번조(燔造)하였으므로 두모포외요(豆毛浦外窯)로 볼 수 있고, 1644년~1677년까지 두모포왜관내에 가마를 만들어 운영하였으므로 두모포요(豆毛浦窯)로 보았다. 왜관이 초량으로 옮겨가면서 1678년~1717년까지 초량왜관 내에 가마를 만들고 운영하였으므로 초량요(窯)라고 해야 한다.

 

1718년~1743년까지 초량왜관 내에서 대마도 사람들이 운영하였으므로 초량왜관요(草梁倭館窯)라 하겠으며 전체를 통칭 부산요(釜山窯)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부산요의 도자사적 의미와 가마 운영에 관하여”, 졸고 부산포럼 논고, 2022“ 참조 바람>

 

III. 문헌(文獻)으로 본 명칭의 출현

 

1. 다회기(茶會記) 명물기(名物記)

 

어본(御本)다완의 일본 최초 출현은 다회기(茶會記)에 1668년 10월 28일 다회로 『선수종실금택다회기(仙叟宗室金澤茶會記)』에 기록되어 있으며 판사(判事)다완은 1681년 7월 8일의 다회로 『후서원다지탕기(後西院茶之湯記)』에 최초의 기록이 있다.

 

이후 다회기에 어본다완은 46회, 판사다완은 63회에 걸쳐 출현한 기록이 있다. 〈谷晃, 『高麗茶碗槪說』, 高麗茶碗 河原書店 2002 p.81~82>. 17세기 다회기에 어본다완에 이어 현열다완(玄悅茶碗)의 기록이 보이고 18세기 다회기에 입학다완(立鶴茶碗)이 새롭게 기록이 된다.

 

부산요 다완의 주문과 사용에 가장 적극적인 인물은 센다이(仙臺)지방의 4대 영주였던 다테 츠나무라(伊達網村, 1659~1719년)로 수차례에 걸쳐 다완과 도자기를 주문하였다. 1676년에 다완 4~50 점을 주문한 바 있으며 1707년에도 다량의 향대(香臺)를 부산요에 주문한 기록이 주문서인 『어조물공(御誂物控)』에 수록되어 있고, 1713년 부산요 주문서인 『제방 어호지어소물(諸方 御好之御燒物)』 에도 다완과 다입(茶入)을 주문하였다.

 

당시의 다회를 기록한 『다테츠나무라다회기(伊達網村多會記)의 기록에는 어본수회고려(御本手繪高麗), 고려염부계입(高麗染付継入), 신도사수전절(新渡砂手前切), 판사오기할고태(判事吳器割高台), 장견수しみ(藏堅手しみ), 신도석첩(新渡石疊), 어본광언고(御本狂言袴) 등 많은 종류의 부산요 다완으로 추정되는 자료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부산요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다인으로 앞으로의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어본다완의 관련 문헌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으로 다탕도구에 관한 명물기(名物記)로 1660년의 『완화명물기(玩貨名物記)에는 어본다완과 판사다완에 관련한 기록이 아직 등장하지 않으나 8년 뒤인 1668년의 『선수종실금택다회(仙叟宗室金澤茶會) 이후부터는 등장함을 알 수 있다. <『玩貨名物記』 1660, 茶道古典全集12 所板本>

 

2. 서책

 

다완 종류와 도상을 그려서 설명한 서적류로는 1694년의 고금화한제도구견지초(古今和漢諸道具見知鈔 : 万宝全書)」에는 어본수(御本手)와 함께 현열어본수(玄悅御本手), 무삼어본수(茂三御本手), 무삼소(茂三燒), 희재어본수(喜齋御本手), 단반어장(端反御藏), 학다완(鶴茶碗), 어장견수(御藏堅手), 어본 소어장수(御本燒御藏手), 백수(白手) 등과 니오기(尼吳器)항에 후도(後渡)라고 기록하며 니오기와 동일하다고 하였다. 『만보전서(万宝全書)』 所板本.

 

어본다완의 명칭과 분류는 17세기가 끝날 무렵에 비로소 여러 명칭으로 분류한 기록이 보인다. 1789년의 『고금명물류취(古今名物類聚)』에는 기록이 없으나 1847년의 기록으로 『다도전제(茶道筌蹄)』에는 어본(御本), 어본판사(御本判事, 무산(茂山) 등의 등재 기록이 보인다. <茶道全集』, 茶道筌蹄 所板本>.

 

3. 배견기(拝見記)

 

차도구와 다완의 명품을 감상하고 기록한 배견기(拝見記)의 기록으로는 『과안록(過眼錄)』이 있으며 1810~1867년까지의 배견한 기록에 입학다완(入鶴茶碗)이 여러 번 기록되어 있고, 입학통다완(入鶴筒茶碗), 반사다완(半使茶碗)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입학통다완은 입학다완의 변형으로 통형에 가까운 형태가 아닌가 추측되며 반사다완은 판사(判事)다완의 다른 말이다. <『過眼錄』, 日本國會圖書館 所藏本

 

4. 차도구장류(茶道具帳類)

 

차도구류를 기록한 도구장류(道具帳類) 문서로는 1770년의 어수기도구장(御數寄道具帳)』의 기록에는 무산소다완(茂山燒茶碗), 신고려지다완(新高麗之茶碗), 신삼도고려지다완(新三鳥高麗之茶碗)이 수록되어 있으며 무산다완 외에 신고려다완이나 신삼도고려다완은 시기적으로 부산요에서 제작하였던 시기와 일치하나 부산요 주변의 외요(外窯)인 법기리요의 소성물인지 알 수 없다. <『御數奇道具帳』, 1770, 閏六月, 松井文庫 所藏本.

 

1803년의 기록으로는 『어수기도구장(御數寄道具帳)』의 기록에 의하면 신삼도고려(新三島高麗), 조선역수(朝鮮曆手), 신도어본수(新渡御本手), 신고려(高麗) 등의 기록으로 보아 1770년과 같은 성격의 기록을 하였으며 역수(曆手)는 분청사기(粉靑沙器)의 승렴문(繩簾紋)으로 책력(冊曆)의 무늬와 같다 하여 역수다완이라 부른다. <『御數寄道具帳』, 1803. 九月, 松井文庫 所藏本〉

 

천명(天明, 1781~1789), 관정(寬政, 1789~1801) 시대의 『어수기도구장(御數寄道具)』의 기록에는 입학어다완(入鶴御茶碗), 어본어다완통근산형(御本御茶碗筒筋山形), 어본히투미어다완(御本ひつみ御茶碗), 어본삼각어다완(御本三角御茶碗)의 기록이 보이며 입학다완은 시각의 회화적 양식과 통근산형이나 히투미다완, 삼각다완은 다완의 외형적 형태에 따라 분류한 것으로 보인다. 〈『御數寄道具帳』, 寬政期, 松井文庫 所藏本>.

 

5. 일기(日記)

 

일기(日記)류의 고려다완(高麗茶碗) 기록은 『실육공기(実陸公記)』의 1506년 윤11월 13일에 최초의 기록이 보이며 이후 많은 종류의 고려다완이 일본다도 세계에 등장한다. <『実陸公記』,統群書類從完成會本〉.

 

고려다완의 관련자료로 『격명기(隔蓂記)』가 많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며 부산요 다완에 관련한 자료도 일부 기록이 있다. 『격명기(隔蓂記)』는 당대 고승으로 금각사(金閣寺) 주지(住持)로 있었던 임제종(臨濟宗) 스님인 봉림승장(鳳林承章)이 1635년부터 1668년까지 쓴 일기로 봉림승장은 천황(天皇)을 비롯한 막부의 권신과 당대 유명한 다인(茶人), 학자, 예술인, 유력 상인들과 교류가 빈번하였던 승려 다인이다.

 

일기 내용 중 1639년 3월 28일자 내용에 차도구류의 열거에 오기다완금소(五器茶碗今燒)라는 기록이 보인다. 1639년은 부산요가 최초로 개요(開窯)하던 해이며 8월이 되어서야 번조(燔造)작업이 들어갈 수 있었으나 부산요가 열리기 전인 3월의 기록에 오기다완이 구워져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양산을 비롯한 주변의 가마에서 오기다완 등이 번조되어 비공식적으로 일본으로 공급되면서 다완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隔蓂記』, 鹿苑寺 刊行本〉.

 

이후 1646년, 1647년, 1650년 5월과 7월, 1654년에 고려금도지다완(高麗今渡之茶碗) 등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1650년 7월에는 12점 대량의 고려금도지다완의 기록으로 보아 부산요에서 공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659년과 1660년의 기록에는

 

万治二年 七月 二十五日

五時前 慈照覺雲吉東堂來訪 自對(馬)島 上洛之土産高麗茶碗1개, 高麗燒之大皿10개, 高麗胡桃一斤被惠之也

 

万治 三年 一月 九日

對馬燒之茶碗(似高麗茶碗) 慈照翁給予也

 

1659년 7월 25일 다섯시 전에 자조각운照) 길(吉) 스님이 왔으며 대마도에서 상락의 흙으 로 만든 고려다완 한 개와 조선에서 구운 큰 그릇 10점과 호두 1근을 고맙게 받았다는 내용으로 부산요에서 생산한 다완과 그릇을 선물 받은 듯하며 당시 일본에서 귀하게 여겼던 호두를 가지고 왔고 호두는 조선에서 왜관을 통한 주요 무역품이었다.

 

1658년 정월에 호도(胡桃) 10섬. 잣柏) 10섬 을, 9월에는 호도 50섬. 잣 50섬을 구무(求貿)하여 달라고 요구하였던 호도로 생각한다. 〈『倭人求請謄錄』 0002권, 奎12955- v.1-8, 074b-076b면>

 

기록 내용에 자조각운(慈照覺雲) 길(吉) 스님은 교토(京都) 상국사(相國寺) 소속의 자조원(慈照院)의 각운(覺雲) 길(吉) 장로(長老)로 대마도에 파견하였던 윤번승(輪番僧)으로 도쿠카와막부는 국서개작(國書改作) 사건 후 교토(京都)의 오산인 천용사(天龍寺), 상국사(相國寺), 건인사(建仁寺), 동복사(東福寺)에서 윤번제로 석학승을 윤임(輪任)하면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오가는 국가간의 문서를 감수하였다.

 

 

IV. 종가문서(宗家) 사료에 부산에 파견된 도공두(陶頭)에 의한 분류

 

1. 신도소물어인판장(新渡燒物御印判帳)

 

어본다완 가운데 도공두의 이름으로 분류한 다완으로는 1681년에 기록된 대마도 종가문고소장 庫所藏)의 『원화원년 신도소물어인판장元和元年 新渡燒印判帳』에 기록된 두모포왜관(豆毛浦倭館) 시대의 종가에서 수장한 도자기와 다완을 비롯한 차도구류들의 재고량을 기록한 장부(帳簿)의 기록이 있는데 다완을 보관하면서 다완함(茶碗函)에 부산에 종사하였던 도공두의 이름을 적은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대표적인 다완은 무삼다완, 현열다완 미평태 다완, 의삼다완, 의춘다완, 임재다완, 도이다완 등이 있다.

 

2. 어인판장(御印判帳)

 

『신도소물어인판장(新渡燒物御印判帳)』의 재고 조사 100년 후에 종가에서 1781년에서 다시 재고 조사를 하면서 기록으로 『어인판장(禦印判帳)을 만들었다. 따라서 부산요 전기 다완의 유통과 소비량을 분석할 수 있으며 초량요의 원료공급에 따른 생산량을 비교하여 추정할 수 있겠다.

(表紙) 天明元年 辛丑年

御印判帳下書

九月日 新渡方

 

전체 기록은 생략하고 내용에 다완의 수장 기록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古道二 다완 397개

意春燒 다완 122개

小十郎燒 다완 75개

外燒館燒 다완 126개

新道二燒 다완 54개

弥平太燒 다완 1,035개

茂三燒 다완 3075개

伝次郞燒 다완 37개

弥三右衛門所 다완 83개

林齋燒 다완 50개

意三燒 다완 600개

道庵燒 다완 273개

高原燒 다완 21개

判太夫燒 다완 22개

古御手本用 다완 8개

忠助燒 다완 7개

判使燒 다완 1,217개

玄悅燒 다완 645개

其他志賀窯朝鮮燒 소복다완 4개

총괄 다완수

7851개

 

V. 주문서로 본 어본다완

 

1. 어조물공(御誂物控)

 

(表紙) 自元祿十四年至宝永弐年 (朱)諸記録九番

控謎物御

此賬宝永二年之所” 冊弐之内 (26x21cm)

 

대마번에서 부산요로 보내온 다완을 비롯한 도자기 제작 의뢰에 관련한 문서로는 1701년의 주문서로는 『어조물공(控誂物御)이 있으며 주문 당시에는 조선과 일본간의 도자기 번조서계(燔造書契) 문제로 양국 간의 갈등이 불거져 다완을 제작하지 못하다가 1704년에 들어 비로소 번조작업을 할 수 있었으며 당시 도공두였던 미평태에 의하여 진행되었으며 1709년에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어조물공은 그 당시의 도자기 형태, 유약의 색깔, 소지의 선택 등과 주문자와 주문을 받은 사람과 배달의 상황 등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본고에서는 다완의 주문 관계만 발취하여 다루고자 한다.

 

一, 茶碗壱 青湖/文字

金地院役者玉隠和尚望元祿十六年杉村三郎左衛門方 弥平太方へ申遣ス

(朱) 右茶碗五ツ丙戌二月廿四日御迎賄船便"江戸江差越内三ツ先様江者遣 之筈也

 

一, 금지원의 옥은화상이 1703년에 주문한 문자다완으로 주문받은 내용과 5점에 대한 배송 날짜와 경위를 적었다.

 

一, 茶碗形三 但余計共ニッ宛

狩野養朴望同年杉村三郎左衛門方 弥平太方申遣ス

 

다완의 모형 3개를 보내왔으며 모형에 따라 2점씩 6점의 주문으로 주문자는 당시 狩野派의 유명한 화가였던 狩野養朴이다.

 

一, 松竹梅筒茶碗

一, 熊川作こまり成くわんにう入 各余計壱ッ、相添

一, いらほ作内ニ白きはけめ 候様と申遺

一, すたれ筒茶碗ニッ

安藤筑後守様御望宝永元年平田直右衛門方 松村弥平太方ヘ申遣ス

 

주문 내용은 송, 죽, 매가 시문된 통다완과 웅천다완과 쇄모목이라보다완, 2개를 붉은색과 흰색으로 주문하였으며 의뢰자는 安藤後守가 주문하였다.

 

一. 浅黄かた手茶碗壱ッ

一. 薄柿茶碗

一. 金海茶碗

土屋相模守様御望宝永弐年六月杉村頼母便=松村弥平太方ヘ中遣ス

(朱)右之茶碗十弐山来参侯付宝永三年戌正月以酊庵迎高勢宅兵衛乗)船住吉丸便江戸表江差越之

 

잔황빛 모양의 다완과 엷은 감색 다완과 김해다완 등의 주문으로 주문자는 土屋相模守로 1705년 6월에 주문을 받아 만들어서 익년 3월에 배송하였던 경위를 기록하였다.

 

覚 右御燔御注文紙形左記之 樋口佐左衛門

一. 御茶碗紙形五枚

御燔紙形都合弐十枚相渡侯来年御参動前出来可被差渡侯江戸表ヘ御持越被遊候御用侯間可被得其意候以上

丙戌七月三日 樋口佐左衛門

松村弥太殿

右者九月九日朝鮮御横目鈴木少左衛門ヘ相渡遺也

 

다완의 지형(紙型)이 온 사례로 1706년에 대마도번에서 20매의 많은 양의 지형을 보내왔으나 다완의 주문 수량이 기록되지 않았으며 익년 도주의 참근할 때 사용하려 한 것으로 생각한다.

一. 独眼茶碗拾五 (朱) 宝永四丁亥五月出来参五月廿八日 樋口佐 左衛門方 手紙相添為持遣之 右者以酊庵関仲和尚御誂御注文

右之模樣等之義ハ彼方へ弥太被召寄委細被仰合候 故此度ハ右之書付計差越ス右同便ニ朝鮮

弥平太方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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