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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 럼,대관령 산신이 된 김유신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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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 럼,대관령 산신이 된 김유신 장군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허균의 기록에 나타난 단오제 주신 김유신 장군

허균은 조선 선조 36년(1603) 여름 단오 무렵, 그의 나이 34세 때에 당시 수안군수를 역임하고 잠시 모친과 함께 외가인 강릉 사천의 애일당에 내려와 약 4개월 간 머물렀을 때 강릉단오제를 직접 보았다. 당시 이 행사를 주관한 책임자에게 산신제를 지내는 모습을 보고 신격이 김유신임을 알았다. 또한 지역에서 그를 신봉하여 산신제를 지내고 강릉으로 모셔 축제를 베푸는 것에 감동하여 두 편을 병서(竝書)로 썼다.

이 글은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실려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인 성소(惺所) 허균이 편찬한 시문집이다. 총 26권 8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허균이 칩거 생활, 유배 생활을 하던 동안에 저술했던 시와 산문들을 모은 책으로서 시부(詩部), 부부(賦部), 문부(文部), 설부(說部) 4부로 나누어 정리했다.

강릉단오제는 대관령산신제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자료이고, 직접 산신제를 보고 기록한 자료로서 신빙성이 높다. 400년 전에는 산신인 김유신 장군을 강릉으로 모시고 5월 단오날에 축제를 베풀었다는 점에서 강릉단오제 원형을 되찾는다면 김유신 산신을 봉안하는 행사로 바뀌어야 하겠다.

기록 가운데 고을 사람들이 괫대받이(괫대는 강릉 단오제에 쓰는 깃대. 장나무에 쇠붙이를 둥글게 달고 오색 천으로 꾸민다.)를 하면서 잘 들리면 풍년이 든다고 하는 모습은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진다.

허균이 쓴 글은 구성상 두 편으로 나뉘는데 전편은 산문으로 대관령 산신제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고, 후편은 김유신의 공을 기리는 찬시(贊詩)이다. 산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묘년(선조 36년, 1603) 여름이었다. 나는 명주[지금의 강릉]에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룻날에 대령신(大嶺神)을 맞이한다 하기에 그 연유를 수리(首吏 : ‘이방아전’을 달리 이르던 말. 각 지방 관아의 여섯 아전 가운데 으뜸이라는 뜻이다.)에게 물으니, 수리가 이렇게 말하였다.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명주에서 공부하였는데, 산신이 검술을 가르쳐주었고, 명주 남쪽 선지사(禪智寺)에서 칼을 주조하였는데, 90일 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은 햇빛을 무색하게 할 만큼 번쩍 거렸답니다. 공이 이것을 차고 성내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오곤 하였는데,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하였답니다.

그러다가 죽어서는 대령(대관령)의 산신이 되어 지금도 신령스런 이적이 있기에, 고을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번개(旛蓋 : 깃발과 우산 모양의 장식물)와 향화(香花 : 향과 꽃)를 갖추어 대령에서 맞아다가 명주부사에 모신답니다. 그리하여 닷새 되는 날, 갖은 놀이로 신을 기쁘게 해드린답니다. 신이 기뻐하면 하루 종일 괫대가 쓰러지지 않아 그 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괫대가 쓰러져, 그 해는 반드시 풍재(風災)나 한재(旱災)가 있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상하게 여겨, 그 날 가서 보았다. 과연 괫대가 쓰러지지 않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경사롭게 여겨 서로 손뼉 치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건대, 김유신 장군이 살아서는 왕실에 공을 세워 삼국 통일의 성업을 완성하였고, 죽어서는 수천 년이 되도록 오히려 이 백성에게 화복을 내려서 그 신령스러움을 나타내니, 이는 진정 기록할 만한 것이기에 드디어 다음과 같이 찬한다.”

후편은 4언 64구의 찬시로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글은 교산 허균이 대관령 산신인 김유신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한 글로 산신제의 역사를 밝히고, 그의 공적을 시로 읊은 명작이다.

“갸륵하다. 귀족의 후손이여, 씩씩하고도 우람스럽도다. 나라의 용장되어, 북채 들고 단에 오르도다. 무장하고 군문에 나서니, 기상이 고구려·백제를 삼킬 듯하다. 비호같은 장수들을 채찍질하며, 용감한 정예부대 몰고 가네.

오구를 차고 가니, 곤오산의 쇠로세. 시뻘겋고도 아름다워, 붉은 불꽃 뿜어낼 듯, 웅진에서 말을 베고, 당나라 배 만 척이 와서 도왔네. 백마강에서 기약에 뒤지자, 백제 삼군은 겁에 질렸건만, 공의 수염이 분노에 뻗쳐, 칼을 어루만지며 고함지르니, 붉은 용이 번득이는 듯, 놀라운 번개가 칼집을 에워싸니, 왕사 드디어 힘을 어울러, 능히 백제를 멸망시켰네.

꿈틀대는 고구려족, 서녘 모퉁이서 날뛰네. 군졸을 풀어 가서 치니, 황제의 위엄 우뢰인 양 떨치네. 동쪽 군사 일만을 거느리고, 북을 치며 앞장서서, 긴 창 모아 굳세게 무찌르니, 멧부리 쪼개지고 연못은 치솟을 듯, 갑옷 쌓아 두고 창 던지니, 소라바다에 썩은 시체 답쌓여라.

 

이적이 웃음 지으니, 칠부 군종 땅에 무릎 꿇고, 이웃 발악 제거함에, 나라의 걱정거리 없어졌네. 해와 달도 툭 트여 해맑고, 천지도 다시 빛나네. 삼한의 우리를 에워, 모조리 판도 안에 넣으니, 큰 공훈 정의와 기상에 새기고, 사책에 실어 영원히 빛나도록, 동해의 동녘에서, 그 공 미칠 이 없네.

 

웅장한 풍도에 영특한 기개, 이제 수천 년이 되었건만, 대령산 꼭대기에서, 아직도 제사 받아, 해마다 드리는 분향, 누구라서 감히 소홀히 하랴, 공의 넋은 어둡지 않거니, 복 내림도 크기도 커라. 구름타고 바람결에, 살포시 내려오네.”

 

2. 허균의 성소부부고

 

부부고(覆瓿藁)는 ‘장독 뚜껑을 덮을 만한 보잘것없는 원고’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이는 허균이 자신의 시문을 겸손하게 표현한 용어이다. 권수에 중국 명나라의 문인인 이정기(李廷機)가 만력제 계축년(癸丑年)에 쓴 시문(詩文)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613년(명나라 만력(萬曆) 41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위키백과).

 

권미에는 이항복이 지은 〈성소잡고서〉(惺所雜稿序)가 수록되어 있다. 국립도서관본, 규장각본, 홍문관본, 연세대학본, 박종화본 등의 필사본이 전한다. 『성소부부고』는 허균이 스스로 편집하였고, 체재에 있어서의 참신성으로 후대 문집에 좋은 모범이 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8권 1책. 필사본. 작성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만력(萬曆) 계축에 쓴 이정기(李廷機)의 서문으로 미루어 보면 1613년(광해군 5) 봄이나 그 전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허균의 일생 중에서 가장 불우했던 시기이다. 그가 칩거하면서 그동안 저술한 시와 산문들을 모아 시부(詩部)·부부(賦部)·문부(文部)·설부(說部) 등 4부로 나누어 정리한 초고이다.

 

외손인 이필진(李必進)의 발문에 “부부고라는 것은 외조부 교산의 유고이다. 부부·문부의 6권 외에 또 시부가 있어 모두 8권인데 전질을 손수 썼다. 「갑진명주고(甲辰溟州藁)」·「서관행록(西關行錄)」·「계축남유초(癸丑南遊草)」·「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 제2권은 옥사가 일어나자 마침내 모면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이것을 정리하여 우리 집에 보내게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발문에 적힌 「갑진명주고」 이하 몇 권의 저술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년의 저술들이 이 책에 수록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허균은 역적의 괴수로 극형을 받고 죽었기 때문에 그의 문집은 공간될 수 없었다.

 

그래서 몰래 필사하여 전해졌으므로 오자낙서가 적지 않다. 저본은 1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사본이다. 책마다 첫 장에 정조대왕이 세손 때에 사용한 장서인인 ‘관물헌(觀物軒)’과 ‘이극지장(貳極之章)’이라는 어인이 찍힌 귀중본이다.

 

규장각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1961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처음으로 영인하여 소개되었고, 그 뒤에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하여 출간되었다.

 

3. 허균의 생애

 

허균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아버지 허엽은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이자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동인의 영수였고,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등을 지냈다. 이복형 허성은 이조판서를 지내는 등 순탄한 관료생활을 하였고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둘째 형 허봉 역시 서장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온 후 최초의 연행일기인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남겼다. 두 형과 누이 허난설헌까지 모두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허균은 1569년(선조 2) 11월 3일 초당 허엽과 강릉김씨 김광철(金光轍)의 딸 사이에서 3남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열 살 즈음 『논어』와 『통감』을 읽었고 아버지로부터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웠다. 1580년(선조 13) 열두 살에 아버지를 잃은 허균은 아버지 같은 형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둘째 형은 자신의 친구인 유성룡(柳成龍)과 이달(李達)을 스승으로 소개시켜주었다. 이달은 삼당시인(三唐詩人)중의 하나인데 서얼출신으로 허균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후에 허균은 스승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짓기도 하였다. 과거공부에만 매달리던 허균을 진정한 문학의 세계로 이끌어준 인물이다.

 

둘째 형은 좋은 스승을 소개시켜줬을 뿐만 아니라 스승의 역할도 했다. 1586년(선조 19, 18세) 허균은 둘째형을 따라 본격적인 글공부를 시작했다. 둘째형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 중에 허균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한 사람이 더 있는데 유정[사명대사](惟正(四溟大師))이다. 허균은 사명당과 형제같이 사귀면서 그에게서 불교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임진왜란은 그의 생애에 굴곡을 남긴 사건이었다.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만삭 아내와 함께 피난생활을 하다가 아내와 아들을 잃는 아픔을 겼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국방의 문제점에 대하여 고민도 하고 그의 첫 저서 『학산초담(鶴山樵談)』을 펴내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허균은 1594년(선조 27, 26세)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7년(선조 30, 29세)에 예문관검열이 되고 세자시강원설서를 겸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예문관검열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직책으로 엄격히 선발되는 자리였던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그의 문장과 실력을 인정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즈음 문과 중시에 장원을 하였고 그 덕분에 예조좌랑으로 승진한 후 중국길에 올랐다. 중국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병조좌랑으로 임명되었고 중국 장수들을 접대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1599년(선조 32, 31세)에는 다시 황해도도사로 승진하였다.

 

그는 지방 관리의 부정과 불법을 사찰하여 규탄하고 과시를 맡아보는 임무를 띠고 임지인 해주로 내려갔다. 그러나 6개월 만에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후 허균은 약 18 여년의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 파직을 당하였다.

 

1614년(광해군 6, 46세) 호조참의에 임명되어 다시 관직으로 돌아왔다. 이해 여름에 천추사가 되어 중국을 다녀왔고 이듬해에도 동지겸진주부사가 되어 중국을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귀국할 때에 많은 책을 가지고 오고 변무사에 대해서도 다방면으로 견문하여 보고하였다. 이와 같은 사행의 공로로 그는 가자되었고 형조판서(정2품)에까지 올랐다.

 

이렇게 해서 그는 광해군의 신임을 받으며 권력의 핵심에 깊숙이 들어갈 수 있었다. 1617년(광해군 9, 49세) 폐모론 정국에서 폐모를 주장한 허균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졌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허균은 폐모론을 성사시킨 공으로 좌참찬에 임명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奇俊格)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역적은 오히려 허균이라고 하면서 그의 혁명계획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에 허균이 다시 반박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고발과 탄핵 정국으로 돌변하였다.

 

대질심문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허균과 손을 잡았던 이이첨(李爾瞻)이 등을 돌리면서 허균은 역모를 꾸민 죄인으로 몰렸다. 결국 그는 1618년(광해군 10, 50세) 8월 형신도 받지 않고 결안도 없이 사형을 당했다.

 

이후 허균은 조선시대 내내 역적이라는 이름을 벗을 수 없었다. 허균의 거사 계획은 확실치 않아서 실제로 그가 어떤 식으로 혁명을 이루려 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남긴 기록과 행적으로 보아 혁명의 주역은 조선왕조의 사회체제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이었을 거라는 추정을 할 뿐이다.

 

4. 허균의 문학 사상과 홍길동전

 

허균은 시인이었다. 그의 형과 누이도, 그의 스승도 모두 시인이었다. 그는 일찍 죽은 형과 누이를 위해 그들이 남긴 시를 모아 『하곡집』과 『난설헌집(蘭雪軒集)』을 냈다. 또 스승을 위해 그의 시집 『손곡집』을 간행하였고 최고의 학당파 시인으로 평가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임진왜란 피난 시절인 1593년(선조 26, 25세)에 『학산초담』을 지었다. 동시대 시인들에 대한 시화와 시평이 주요 내용이다. 전라도 함열현 유배시절에는 『성수시화(惺叟詩話)』를 지어 최치원(崔致遠)부터 동시대 시인들까지 약 800여 년에 걸친 시화들을 모아 품평하며 우리나라 시의 흐름을 보여주었다.

 

1607년(선조 40, 39세) 『국조시산(國朝詩刪)』을 펴냈다. 책 뒤에 덧붙인 제시산후(題詩刪後)에서 그는 시산(詩刪)과 시선(詩選)의 차이점을 설명하며 시산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큰 바다에 구슬이 하나 빠졌다고 비난할 사람은 있을 테지만 물고기 눈깔과 진주가 섞여 있다고 꾸짖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넣을 것은 있을지 몰라도 뺄 것은 없다는 뜻으로 자신의 시산 작업에 의의를 부여했다. 이 책은 조선 초 정도전(鄭道傳)부터 당대의 권필에 이르기까지 35명의 시를 분류하고 비와 평을 붙였는데 홍만종(洪萬宗)의 『시화총림(詩話叢林)』에서 조선조 최고의 시산으로 평가받았다.

 

5편의 전을 지었는데 모두 유교적 신분사회에서 소외당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현실고발소설의 성격을 띤다. 「손곡산인전」의 이달이 천첩소생의 서얼이고, 「남궁선생전」의 남궁두는 아전이며, 「장생전」의 장생은 비렁뱅이 천민이다. 또 「엄처사전」의 엄처사는 몰락한 양반이고 「장산인전」의 장산인은 중인이다.

 

허균은 이 5편의 전 이외에도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저자로 인정되고 있다. 허균이 『수호전』을 모방하여 『홍길동전』을 지었다고 그의 제자 이식(李植)이 밝힌 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는 스승 이달과 자신을 따르던 서양갑(徐羊甲)이나 심우영(沈友英) 같은 이들이 모두 서얼로서 소외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신분제도의 불평등과 사회체제의 부조리를 비판하기 위해 『홍길동전』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은유하여 현실을 비판하는 소설 말고 논설을 통해서도 직접적인 사회비판을 시도하였다. 「호민론(豪民論)」, 「유재론(遺才論)」, 「관론(官論)」, 「정론(政論)」, 「병론(兵論)」, 「학론(學論)」이 그것이다.

 

「병론」에서 그는 양반 사대부들이 군대에 가지 않기 때문에 군사가 적다고 하면서 조선에 군사가 없는 책임을 왕에게 돌렸다. 학론에서 참다운 학자를 등용하여 경륜을 펼치게 할 책임도 왕에게 돌렸다. 정론에서 당파싸움에 성행한 것에 대한 책임도 왕에게 돌렸다.

 

천하에 두려워할만한 자는 오직 백성뿐인데 그 중에서도 호민이 가장 두려운 존재라는 「호민론」에서 그는 사회가 어지러울 때 호민을 중심으로 응집하여 봉기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가 소설에서 구현한 홍길동과 같은 자가 바로 호민이다. 그의 문학과 사상은 다양한 문화를 포용한 위에 핍박받고 소외된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와 사회에 대한 입장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이자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가였다.

 

5. 대관령 국사성황사와 산신당은 무속인의 성지

 

대관령 국사성황사에 있는 산신각은 10월 27일, 28일 이틀간에 걸쳐 답사하였다. 27일에는 강릉지역과 대관령에는 비가 약간 내렸다. 대관령은 원래 변화무쌍한 날씨를 보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27일 오후에 산신각을 둘러보는 도중에 비가 그쳤다. 28일에는 일기예보와 달리 강릉의 날씨는 맑았다. 오후에는 구름이 몰려와 하늘은 흐렸다가 약간 햇빛이 비치기도 하였다.

 

대관령 국사성황사와 산신각을 연달아 방문하면서 놀란 점은 무속인들이 많이 찾아와 기도를 올린다는 것이었다. 27일 범일국사를 모신 국사성황사에서 기도하는 무속인이 돌아간 이후 틈을 내어 사진을 찍었다.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산신각에도 기도하는 3명의 무속인이 있어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이들이 떠난 후에 사진을 찍었다.

 

28일 토요일 오후에 방문했을 때 주말 인기 관광지처럼 무속인들이 모여 굿을 하거나 기도를 올렸다. 국사성황사와 산신당 뒤쪽에는 칠성단과 용왕단이 있었는데, 무속인들이 와서 무당으로 입문하는 신출내기 여러 명에게 신내림을 지도하고 있었다.

 

기도를 올릴 때 촛불과 향을 피우는 것이 필수이므로 우발적인 산불을 방지하기 위하여 소화기도 비치되어 있었다. 용왕단에는 샘물이 있어 바가지로 떠먹어보니 물맛이 좋았다. 기도에는 제물을 정성껏 준비하여 신에게 올리는 것이 필수이다. 신의 응답을 받기 위하여 제주도 준비해야 한다. 술은 막걸리가 많았고, 소주도 일부 있었다. 국사성황사와 산신당 주변에는 막걸리 냄새가 진동하였다. 기도 후 부산물로 나오는 쓰레기를 담는 자루도 있었다.

 

제물로 올린 과일을 가져가지 않고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담아두었다. 이곳의 행정구역은 평창군이지만 관리는 강릉시에서 하고 있다. 관리인이 주변을 청소하고 제물도 정리하였다. 천년 넘게 이어져 오는 강릉단오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는 경사가 있었다. 단순한 무속인의 성지가 아니고 한국의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대관령 국사성황사의 주신인 범일국사와 산신당의 산신령인 김유신 장군을 떠받들고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고, 사후에도 신으로 모시고, 끊임없이 무수한 무속인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리니 역사적 위인이 틀림없었다. 일반인들도 찾아와 제물을 갖추어 기도하였고, 대관령 옛길, 선자령, 양떼목장을 답사하는 등산객들도 수시로 찾아와 기도하거나 구경을 하였다.

 

범일국사는 신라의 왕들이 서라벌로 초빙하여 국사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거절하고 강원도 지역 여러 곳에 굴산사, 신복사, 삼화사 등 사찰을 건립하고 불사를 하면서 백성과 불자들의 스승으로 중생을 구제하였다.

 

김유신 장군은 삼국을 통일하고, 외적의 침략을 방비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백성들의 수호자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강릉지역에 주둔하면서 말갈족의 침략을 격퇴하고 민생을 보살핀 공으로 강릉 주민들이 받드는 대관령의 산신령이 되어 여전히 존경받고 있으며, 무속인들의 신앙 대상이 되어 여전히 국민들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영웅이다.

 

6. ‘대관령옛길’ 걷기

 

국사성황사와 산신당을 답사하면서 이틀 동안 ‘대관령옛길’을 답사하였다. 27일에는 저녁 5시 무렵부터 반정에서 출발하여 1km 정도 걸었는데, 단풍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다시 주차한 반정으로 돌아올 때는 깜깜해졌다. 밤중이라 도중에 등산객은 한 명도 없었다.

 

28일 아침 8시경 대관령 아래 마을인 어흘리를 거쳐 우주선펜션·카페, 우주선 화장실이 있는 곳에 주차하고 대관령옛길을 걸어서 주막까지 올라갔다. 왼쪽으로 흐르는 계곡의 바위와 물, 단풍이 매우 아름다웠다. 28일에는 어흘리에서 9시부터 출발하는 ‘대관령옛길 걷기대회’가 있었다.

 

주차한 곳으로 돌아와 차를 타고 반정으로 올라가 어제 저녁에 걸었던 대관령옛길을 다시 걸으며 아름다운 단풍 사진을 찍었다. 27일 저녁에 눈으로는 황홀한 단풍을 많이 보았지만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여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다. 똑같은 코스로 쉼터까지 1km를 걸으며 환상적인 단풍 사진을 많이 찍었다. 반정으로 원점 회귀하여 대관령 국사성황사,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산신당을 다시 답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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