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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 신라 태종무열왕의 전투 지휘소 상주 금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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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 신라 태종무열왕의 전투 지휘소 상주 금돌성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백제 정벌시 태종무열왕의 전방 지휘소 상주 금돌산성

금돌성(今突城)은 신라 태종무열왕(660년) 이전에 축성되었다고 전해 내려오는데,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성벽 80m를 복원하였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이곳 백화산 금돌성 안 행궁에 660년 6월 21일부터 7월 29일까지 거처하였다.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며 만반의 준비를 한 후 삼국통일 전쟁의 실행을 위해 659년(태종무열왕 6) 4월 태종무열왕은 드디어 당에 사신을 보내 백제 정벌 전쟁을 위한 군사의 파견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우리역사넷).

이에 당 고종이 660년 3월 소정방을 사령관으로 하는 13만의 대군을 파견한다. 태종무열왕도 그해 5월에 태자와 김유신 등과 더불어 친히 5만의 정예병을 이끌고 백제 공격에 나선다. 태자, 곧 문무왕을 보내 덕물도(德物島,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에서 소정방을 맞이하고, 당군이 해로로, 신라가 육로로 백제 도성으로 진격할 것을 정한 후, 자신은 후방에 남고 김유신과 태자 등에게 군의 지휘를 맡겨 진격하게 하였다.

금돌성은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산98번지에 있다. 면적은 3,227,107㎡,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1호로 1985년 8월 5일에 지정되었다. 백화산 정상부의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쌓은 성으로, 신라 김유신 장군이 백제군과 격전한 곳이라고 전한다. 역사적·지리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력이 서로 맞부딪친 곳에 있으며, 삼국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성이라 할 수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전략적 요충지에 산성을 구축하고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하였던 데 있다. 백두대간 서쪽의 삼년산성(충북 보은)과 이곳의 금돌성(경북 상주)은 왕이 머물며 전쟁 지휘를 하는 후방기지와 전방기지의 역할을 동시에 한 것이다. 삼년산성은 고구려와 백제를, 금돌성은 백제를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었던 신라의 교두보였다.

금돌성 거의 무너진 것을 1978년에 국방유적 보수사업으로 80m의 성벽을 복원하였다. 무너진 성벽은 약 4m 폭으로 쌓여 있었으며, 총연장 둘레는 2~3㎞이다. 골짜기를 내려오는 성벽의 일부는 약 30㎝ 정도의 아랫부분만 남아있다. 복원된 성벽은 밑부분의 폭이 360㎝이며, 150㎝ 정도의 높이에 군사들이 서서 활동할 수 있는 단을 설치하고, 거기서 다시 아랫폭 125㎝, 윗폭 85㎝의 성벽을 150㎝ 높이로 쌓아 올렸다(문화재청).

삼국시대에 축성한 포곡식 (但谷) 석성(石城)이다. 성안 쪽으로는 군사들의 활동을 위해 돌로 회곽도를 만들고 회곽도에서 약 1.5m 높이로 성벽을 쌓았다. 성은 보문곡을 가운데로 하여 산 정상인 한성봉(漢, 933m)을 한 변으로 하는 내성(內)을, 그 동쪽으로 외성(外城)을 쌓았는데 총 길이는 7km 가량 된다. 보문곡으로 들어서기 전 계곡의 폭이 가장 좁은 곳에는 차단성(城)을 쌓았는데 길이 약 600m 정도가 확인된다.

이성에는 660년 7월 김유신이 이끄는 백제 정벌군을 떠나보낸 신라의 무열왕 김춘추가 지휘소로 사용하면서 백제가 항복한 소식을 듣고 소부리성으로 떠날 때까지 머물렀던 대궐터가 있다. 또 1254년 10월 자랄타이(大)가 이끄는 몽고 침략군을 맞은 상주의 백성들이 황령사 승려 홍지(之)의 지휘로 한 달여의 싸움 끝에 물리친 유서 깊은 성이다.

백화산의 금돌성은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태종무열왕이 이곳에서 한 달여 간 머물며 삼국통일을 위한 경륜장(經綸場)으로 삼아 후방에서 전진기지로 군사·식량 물자를 감당하며 승리로 이끌었던 성이라 전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상주산성으로, 조선시대에서는 백화산성, 고석성, 금돌성 등으로 불렸다.

이 산성은 백화산 정상부의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쌓은 석성(石城)으로, 정상부로부터 좌우로 에워싼 능선을 따라 축성하였는데 석성의 길이가 무려 5,600여m가 된다. 이 성은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백제군과 격전을 벌였던 장소이며, 고려시대에는 몽골군의 차라대가 침공했을 때 황령사 승려 홍지(洪之)가 관민병을 이끌고 대파하였던 곳이다. 성곽은 내성과 외성, 차단성, 토루로 구분되며 개화산 어구에 차단성을 쌓고 성문을 설치하였다.

 

 

2. 태종무열왕의 거처인 대궐터

 

대궐터는 660년 7월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 명의 백제 정벌군을 보낸 후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이 주둔하여 전황 보고에 따른 지침을 내렸다. 추가적인 병력 동원, 군수 물자를 총괄 지원하며 정치, 외교, 군사, 행정 등의 긴밀한 협의를 위해 전쟁 지도부를 설치하였던 곳이다.

 

금돌성은 차단성, 내성, 외성을 거처야 올라오도록 하였고 이곳 대궐터 약 200m 아래인 내성과 외성 사이에는 여기와 똑같은 형태의 석축과 여러 곳의 건축지가 남아 있다. 금돌성 주변의 봉우리마다 망루가 있어 경비가 삼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쟁 중에 왕이 경주에 머물면 안전이 완벽하게 보장된다. 그러나 당나라에 군사 파견을 요청하여 백제를 공격하는 전시에 태종무열왕이 후방에 머문다면 긴박한 전쟁 상황에서 당나라 장수와의 소통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당나라 장수와 좀 더 긴밀한 연락과 소통을 하고, 신라 군사를 총지휘하기 위해서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상주 백화산 금돌성에 전진기지를 마련한 것이다.

 

내성으로부터 약 300m 위를 보문이라 하는데 대궐의 입구라는 뜻이라고 한다. 여러 건물 석축이 혼재하고 있어 대궐터를 중심으로 한 전체 규모는 장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여기로부터 약 1km 떨어진 골짜기에는 내원지가 있다.

 

여러 개의 건물지 등을 둘러싸고 있는 큰 성이 또다시 발견됨으로써 대궐터의 후원으로의 가능성이 있다. 정확한 판단은 발굴조사를 하여야 당시의 대궐터 전체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모습으로 1500년 전의 규모를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대궐터를 둘러보면 왕의 거처인 행궁과 부속건물이 자리 잡았던 건물지가 있다. 평지가 아닌 경사진 사면에 건물을 짓기 위하여 축대를 쌓은 흔적이 잘 남아있다. 행궁으로 보이는 곳의 축대에는 배수 시설도 남아있다. 건물지 주변에 우물터도 있으며, 현재도 물이 나와 플라스틱 바가지도 보인다. 대궐터 아래 쪽에는 보문암 암자 터가 있었다. 보문암의 승려들은 금돌성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금돌성은 상주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 문화 유적지로서 가치가 충분한 곳이다. 시려(是廬) 황난성(黃蘭善)이 지은 금돌성(今突城)이라는 시를 소개한다. 1825년(순조 25)∼1908년(융희 2). 조선 말기 학자로 자는 동보(同輔)이고, 호는 시려(是廬)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출신지는 경북 상주(尙州)이다.

 

부친 황인로(黃麟老)와 모친 감찰(監察) 손회경(孫會慶)의 딸 경주손씨(慶州孫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용모가 빼어났으며 온후한 덕에 영특함까지 겸비하였다. 초시에는 수 차례 합격하였으나 회시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과거에 뜻을 접고 아침저녁으로 형과 함께 공부에 전념하며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면서 선비의 본분을 지키며 살았다.

 

금돌성(今突城), 시려 황난선(1825~1908)

新羅保障這中間(신라보장저중간) 신라가 저 가운데 성(城)을 쌓았는데

五萬精兵勇氣山(오만정병용기산) 5만 정병의 용기가 산같이 솟았네.

天爲將軍留勝蹟(천위장군유승적) 하늘이 장수를 위해 승적지를 남겼으니

金城千古鐵門關(금성천고철문관) 금돌성(金突城)은 천고의 철문관 일세.

 

필자는 대궐터 주변을 답사하면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하여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를 짚고 돌 위로 뛰었다. 그러나 나뭇가지가 약하여 뚝 부러지면서 뒤로 굴러떨어졌다. 여러 바퀴 구르면서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혀 피가 났다. 배낭을 지고 등산모를 쓰고 있어 그나마 부상을 완화시킬 수가 있었다. 김유신 장군의 삼국통일 유적지를 답사하다가 입은 영광의 상처로 생각하고 있다. 저녁 늦게 양산에 돌아와 약국에서 약을 사서 발랐다.

 

3. 상주산성 항몽 전투 (尙州山城 抗蒙 戰鬪)

 

항몽전투는 고려 후기 제6차 몽고침입(1254, 고종 41) 때 상주산성(尙州山城)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1254년(고종 41) 고려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였던 자랄타이[차라대(車羅大)]는 9월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충주인의 맹렬한 반격으로 이를 포기하고 상주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몽고군이 충주로부터 대원령을 넘어 남하하자 황령사(黃嶺寺) 스님 홍지(洪之)와 상주 인근 지역민들은 산성에 입보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같은 해 10월 19일 상주민의 수성전과 기습 출격으로 몽고군은 제4관인이라는 고급 지휘관이 사살당하였다. 아울러 “몽고군 사졸의 죽은 자가 과반”이라 하여, 상주민이 적을 크게 물리쳤음을 전하고 있다.

 

상주산성은 상주 서쪽 50여 리 지점에 위치한 백화산성(白華山城)이다. 백화산성은 비교적 물이 풍부하고 지리적 측면에서 방어 요건이 좋기 때문에 입보한 주민들이 홍지의 지휘하에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상주산성 전투에서 사기가 꺾인 자랄타이는 이후 경상남도 지역까지 남하했으나 큰 성과를 보지 못한 채 퇴각하였다.

 

상주산성 전투는 몽고군 고급 지휘관을 사살하는 등 몽고군을 크게 격파하였다는 점, 상주 지역민들의 순수한 자위적 항전이었다는 점, 그리고 지휘자가 관리가 아닌 현지의 승려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미가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몽골군은 고려에 1254년 7월부터 1254년 12월까지 제6차 침입을 하였다. 차라대(車羅大, 자랄타이)가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침략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몽케 칸은 왕자의 입조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최항을 대동한 국왕의 출륙과 입조를 요구했다. 결국 1254년(고종 41년) 음력 7월 잘라이르 자랄타이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삼고 대군을 지휘하여 고려를 침략하도록 했다.

 

이번 침략에는 몽골이 수군을 동원하기 시작했다(1254년 2월, 하동군의 갈도 약탈). 이런 상황에서 고려가 몽골의 앞잡이가 된 고려인 이현(추밀원 부사)을 바다에 던져 죽여버리니 휴전은 깨질 수밖에 없었다.

 

자랄타이는 전국 각처를 휩쓸고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것이 이른바 다인철소 전투로 이 전투 역시 중앙군 없이 주민들이 향리인 지씨와 어씨의 지휘 아래 몽골군을 막아냈다. 이 일로 다인철소는 익안현으로 승격했고 다인철소의 천민들도 모두 면천되었다.

 

이에 자랄타이는 다시 우회해 상주산성(尙州山城)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계속 남하하여 지리산까지 내려가 진주를 눈앞에 두었다. 이때 자랄타이는 돌연 몽케 칸의 명령으로 군을 개경으로 돌이켰다. 그러나 이 짧은 5개월 사이 고려가 입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여 『고려사』에서 포로가 206,800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했다(나무위키).

 

고종 41년(1254) 고려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였던 차라대는 9월 충주에 당도하여 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충주인의 맹렬한 반격으로 이를 포기하고 남하를 계속하였다. 이후 여·몽간의 대대적 공방전은 상주(尙州)에서 벌어지는데, 동 10월의 기록에“차라대가 상주산성을 공격하자 황령사(黃嶺寺)의 승려 홍지(洪之)가 제4관인을 사살하였다. 사졸로 죽은 자도 과반수나 되니 적이 드디어 포위를 풀고 퇴거하였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홍지가 속해 있었던 황령사는 경상도의 초입에 해당하는 상주군의 북쪽, 은척면(銀尺面) 황령리(黃嶺里)에 위치하는 데 몽고군이 충주로부터 대원령을 넘어 남하하자 이들 인근 지역민들은 보다 남쪽의 험한 곳에 위치한 상주산성에 들어가 적을 맞아 싸웠던 것이다.

 

당시 홍지는 휘하의 승도들을 중심으로 입보한 상주민을 규합, 자체적인 방어체계를 갖추어 차라대의 공격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적은 차라대의 지휘에도 불구하고「제4관인」이라는 고급 지휘관이 사살당하였다. 그리고 몽고군은 사졸의 죽은 자가 과반이라 하였듯이 전투는 고려의 승첩으로 종결되었다.

 

홍지의 지휘로 차라대의 몽고군에게 타격을 주었던 전투지였던 상주산성은 상주 서쪽 50여 리 지점의 백화산성(白華山城)이었다. 백화산성은 비교적 물이 풍부하고 지리적 측면에서 방어요건이 좋기 때문에 입보한 주민들이 흥지의 지휘하에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던 것이다.

 

1254년 침입한 몽고군이 고려 승려 홍지대사의 대사와 의병들에게 쫓겨 떼죽음을 당한 곳을 현재 저승골이라 부르고 있다. 방성재는 패퇴한 몽고군이 방성통곡하며 퇴각했다는 곳으로 전해진다.

 

이는 고종 19년 2차 여·몽전쟁 당시 처인성에서 백현원(白峴院)의 승려 김윤후가 입보민들을 지휘하여 몽고 원수 살례탑을 사살하였던 사건과 상통한다. 백화산성이 대몽항전 당시 상주민들의 입보처로서 사용되었던 대표적 성곽이었다.

 

항몽전쟁기, 아마도 고종 41년경 상주의 주리(州吏 : 상주의 관리) 김조(金祚)의 가족이 바로 이 백화산성으로 피난하였던 사실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백화산 지역은 S자형의 깊은 골짜기가 특히 발달하여 당시 성안에 입보하여 있던 상주민들이 이러한 지형적 특성을 이용, 일종의 유격전에 의하여 적을 패퇴시켰을 것이다.

 

상주산성의 승첩은 몽고군의 고급지휘관을 포함한 다수의 적군을 궤멸시킨 큰 전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 기록은 겨우 승전의 사실 정도만을 간략히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상주산성에서의 항전이 중앙정부와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은 채 순수한 지역민들의 자위적 항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사실적 내용이 간과되고 묻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려 고종 41년 10월 상주 백화산성에서 홍지와 상주민에 의해 패퇴한 차라대의 몽고군은 이후 대구지방을 경유, 남하하여 12월 경남의 산청지방까지 내려갔다가 이듬해 초 북쪽으로 퇴거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초 국경지대로 물러났던 몽고군은 동년 8월 다시 침략을 자행하였다.

 

상주 항몽대첩탑건립추진위원회에서 ‘상주 항몽대첩탑 기념비(尙州 抗蒙大捷塔 記念碑)를 세운 내역은 다음과 같다. 백화산 이곳은 1254년 몽고 차라대군이 상주산성에서 절반의 군사를 잃고 패하였다는 고려사의 기록과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곳으로서 외세침략에 대항한 순수 민중에 의한 항몽 대첩지이다.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민중의 자위적 항쟁으로 구하고자 하였던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는 비를 세우자는 ’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에서 뜻을 세워서 2008년 5월 3일 「항몽 대첩비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243명이 동참하여 추진하였다. 백화산의 항몽 승첩의 규모나 전과로 미루어 반드시 탑으로 세워야 할 대첩지였다는 주장에 찬동하는 많은 사람들의 요구와 노력으로 백화산 항몽대첩탑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참여자 모두가 우리 후손들이 숭고한 선현들의 호국의 얼을 기리고 이보다 앞서서는 여기에서 삼국통일의 꿈이 실현되었듯이 남북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성지가 되는 기념비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2013년 5월 20일에 이 비를 세운다.

 

4. 임진왜란 천하촌(川下村)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불과 13일째인 4월 25일 상주 북천 전투에서 1,000여 명의 농민군과 한양에서 내려 온 60여 명의 군관(官)이 첫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처참하게 패하고 말았다.

 

5월 13일 상주의 향민 1,000여명이 백화산 고모담에서 상의군(尙義軍) 의병을 창의하여 활동하던 중에 1593년 2월 21일 의병들로 하여금 명나라군의 지원에 주력하라는 순찰사의 전령에 따라 백화산의 상의군 본진이 비워진 상태에서 왜병의 급습으로 발생한 처참한 당시의 이야기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천하촌은 반간(槃澗) 황뉴(黃紐) 선생의 문집 등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넓고 큰집 천 칸이 참혹하다 라고 기록되어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하고 '계사년 병화(兵)에 남김없이 쓸어 허물어졌다 하여 임진왜란 때 불타 사라졌음을 알게 한다.

 

당시 천하촌(下村) 마을에는 횡당, 신덕정사, 백옥영당, 애일헌. 풍우정, 산택정사 등이 사기에 전하며 짐작되는 건물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그 시기에 천하촌(村)이란 마을도 불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천하촌은 고려에서는 상산 김씨의 세거지에서 조선 초에는 장수 황씨로 이어져 오던 마을이었다. 주민들은 지금도 이 지역을 천하(下) 즉, “물 아래"라고 하여 옛 천하촌(川下村) 마을의 안타까움을 간직한 채 현재는 신덕마을로 부르고 있다.

 

백화산은 옛날 경상도에서 속리산, 구병산과 함께 ‘상산 3명산(尙山三名山)’으로 불렸던 산이다. 높고 험한 산세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위해 백제와 대치했던 곳으로 이용됐다. 김유신 장군과 태종무열왕은 금돌성에서 백 정벌을 위한 출정을 하였으며, 태종무열왕은 금돌성에서 한달 가량 머물며 전쟁 지휘, 당나라 장수와 소통을 잘 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고려 때는 상주 백성들이 황령사 홍지대사의 지휘를 받아 몽고군을 격퇴한 승첩지(勝捷地)로 유명하며, 몽골군이 몰살된 곳은 오늘날 저승골로 부르고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나라를 지키려는 상주지역 의병들이 은신처로 삼아 왜구들과 대치했던 곳이다. 그러나 순찰사의 지휘 미숙으로 농민들이 대거 희생된 곳이다. 정치 지도자, 군사 지휘자의 능력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국가의 존망, 백성의 안위를 좌우한다.

 

필자는 금돌성을 겨울인 12월 26일에 답사하였다. 겨울철이었지만 날씨는 춥지 않아 등산히 좋았다. 산성이 거대하고 백화산 한성봉은 멀어서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한성봉 등산은 포기하였다. 정상 쪽으로 올라갈수록 산성의 성벽 위에 하얀 눈이 많아졌다. 답사는

 

잘했는데 이제 산성과 산을 내려가 주차장으로 가는 일이 난감하였다. 어두운 밤길을 조심조심 걸어서 원점 회귀하였다. 대궐터에서 굴러떨어져 얼굴에 약간의 상처가 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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