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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삼국통일 위해 태종과 김유신 장군 남천정 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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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삼국통일 위해 태종과 김유신 장군 남천정 출정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백제 정벌하기 위해 신라 태종대왕과 김유신 장군 출정

 

필자는 남천정이 있었던 경기도 이천시의 설봉산성을 2020년 12월 28에 답사하였다. 3년 전부터 현재까지 삼국통일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혁혁한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의 역사 유적지를 틈틈이 둘러보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양산, 김해, 산청, 경주, 청도, 경산, 영천, 상주, 충북 진천, 강원도 강릉, 북쪽의 경기도 파주, 연천 등의 지역을 계속 답사하고 있다.

김유신 장군(595~673년)이 태종대왕을 수행하여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경기도 이천에 있는 남천정으로 출정했을 때는 나이가 65세였다. 그 당시에는 현재보다 평균 수명이 훨씬 짧았으므로 60대는 노인으로 전쟁터 일선에 나서기보다는 안전한 서라벌에서 벼슬을 하거나 은퇴를 하여 노후를 보낼 시기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유신 장군은 노익장으로서 전쟁의 최일선에 서서 야전 사령관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애국심도 강했지만 건강 관리도 잘했던 것으로 보인다. 660년 신라의 백제 원정시 신라 태종대왕이 직접 출전하였다. 태자 법민과 김유신 등이 이끄는 정예병은 5만 명이었으며, 국왕을 호위하고 전투지원을 하던 병력도 상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확인 가능한 병력이 최소 5만 명 이상이므로 군수 지원부대를 포함하면 약 6만~7만 명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第五) 태종 무열왕(太宗 武烈王) 태종무열왕이 남천정에 이르다. 〔7년(660)〕 6월 18일에 〔왕이〕 남천정(南川停)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권제5 태종무열왕 7년 5월조에는 태종무열왕이 5월 26일에 경주를 출발하였다고 전한다. 또 본서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7년 6월조에는 태종무열왕이 남천정에 도착한 시기는 6월 18일이라 전한다. 경주에서 경기도 이천까지 대부대가 행군하는데 23일 정도가 걸렸다.

남천정(南川停)은 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지역에 있던 군단이다. 『삼국사기』 권제40 잡지(雜志) 제9 직관 하(下) 무관(武官)조에 남천정의 군관직(軍官職)으로 기병(騎兵)을 거느린 대대감(隊大監) 1명, 소감(少監) 2명, 대척(大尺) 2명과 삼천당주(三千幢主) 6명, 삼천감(三千監) 6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 권제40 잡지 제9 직관하(下) 무관조에 따르면, 진흥왕(眞興王) 29년(568)에 신주정(新州停)을 파하고 남천정을 설치했으며, 다시 진평왕(眞平王) 26년(604)에 남천정을 없애고 한산정(漢山停)을 두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제47 열전제7 해론(奚論)조에 건복(建福) 28년(진평왕 33 ; 611년)에 신주(정)가 존재하였다고 전하고, 본 기록에는 남천정이 기록이 되어 있어 무관조의 연혁에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李文基, 1997, 『新羅兵制史硏究』, 一潮閣, 80쪽).

2. 백제 정벌하기 위해 당나라 군사 출정

 

태종대왕 7년 경신(660) 여름 6월에 대왕과 태자 법민(法民)이 장차 백제를 정벌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남천(南川)에 이르러 진영을 설치하였다. 그때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를 요청하였던 파진찬 김인문(金仁問)이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蘇定方), 유백영(劉伯英)과 함께 군사 130,000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군사 130,000명은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7년(660) 3월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金仁問)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13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고 전한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의 세주(細注)에는 향기(鄕記)를 인용하여 “군사가 122,711명, 선박이 1,900척”이라고 전한다. 『삼국사기』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상)조에 당나라 태종이 소정방에게 2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고 전하나, 실제 백제 정벌에 동원된 군사는 122,711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수행하던 부하[從者] 문천(文泉)을 보내와 〔그 사실을〕 고하였다. 문천(文泉)은 신라 태종무열왕대의 인물로 대감의 벼슬에 있었다. 당에 가 있다가 소정방을 따라 고구려 원정에 참여하여 소정방의 서신을 왕에게 전하고, 문무왕의 서신도 다시 소정방에게 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은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많은 배들이 꼬리를 물고 1,000리를 이어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내주(萊州)는 지금의 중국 산둥성(山東省) 라이저우시(莱州市)에 치소를 두고 있었는데, 본래는 동래군(東萊郡)이었던 것을 당나라 초기에 내주(萊州)로 고치고 하남도(河南道)에 소속시켰다.

 

많은 배들이 … 동쪽으로 내려왔다. 우리나라의 삼국과 중국의 대표적인 해상 교통로는 연안항로이다. 당시 소정방(蘇定方)은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등주(登州)를 잇는 도서(島嶼) 지역을 통과한 후 연안을 따라 내려와 덕물도(德物島)에 도착하였다.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7년 6월조에 따르면, 소정방이 내주에서부터 덕물도에 이르기까지 3일의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덕물도(德物島)는 지금의 인천시 옹진군 덕적면의 덕적도(德積島)이다. 덕물도만으로는 1,900척에 달하는 당나라 선박이 모두 머물기는 어렵기 때문에 덕물도를 비롯하여 소야도, 문갑도, 굴업도 등으로 이루어진 덕적군도에 분산하여 기항한 것으로 추정된다. 식수나 땔감 등을 고려하면, 덕적군도뿐만 아니라 태안반도를 비롯한 서해안 연안지대에도 일부 정박하거나 상륙했을 가능성이 크다.

 

3. 경기도 이천 설봉산성에 있는 남천정

 

남천정(南川停)은 통일신라시대의 지방 주둔 군부대이다. 각 주(州)에 설치된 십정(十停) 군단의 하나이다. 십정은 통일신라의 9주를 기준으로 하여 각 주에 하나씩의 정(停)을 배치하였으나, 한주(漢州)만은 그 지역이 넓을 뿐만 아니라 국방상의 요지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두 개의 정이 설치되었다.

 

즉, 지금의 경기도 이천시에는 남천정이 설치되고, 여주시 일대에는 골내근정(骨內斤停)이 설치되었다. 소속군관으로는 대대감(隊大監) 1인, 소감(少監) 2인, 대척(大尺) 2인, 삼천당주(三千幢主) 6인, 삼천감(三千監) 6인이 있었으며, 금색(衿色)은 황색이었다.

 

설봉산의 최고봉인 희망봉은 해발 394m이다. 설봉산 정상 부근에서 팔각제단지(八角祭壇址)가 발굴 조사되었다. 제단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것은 이 성의 중요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제단은 설봉산성 칼바위의 서쪽 20m 지점에 복원되어 있다. 설봉산 정상에는 봉화대도 설치되었다. 팔각제단은 사직단(社稷壇)으로 보인다.

 

사직(社稷)은 원래 主神인 사신(社神)과 오곡(五穀)의 어른이 되는 직(稷)을 말하는 것으로서 제사를 모시는 법을 만들어 사직단(祉稷壇)이라 하였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이후로 천지인(天地人)의 삼위일체 사상이 점점 발달되면서 사(社)와 직(稷)을 하나로 합하여 토지와 곡물을 관리하는 神으로 받들어 이때부터 천자(天子)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사직(社稷)에 제사를 올리는 중요한 국가행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때에 전국의 명산에서 국가적으로 제(祭)를 받드는 관습이 있었으며 이러한 제사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서 시행되었고 주로 국가 또는 지방에서 주관하였다. 이곳 팔각제단은 그간의 발굴 출토된 각종 유물로 보아 4세기 백제를 비롯하여 삼국이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천시는 통일신라가 남천정[南川停 : 삼국 통일 후 서기 568년인 진흥왕 29년에 설치되었던 군관(軍管)]을 설치한 군사적 요충지인 것으로 보아 이곳 설봉산성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적(事蹟)임을 나타내는 시설이다. 이천시에서는 매년 가을에 개최되는 설봉문화제 행사 기간 중 이곳에서 사직제(社稷祭)를 거행함으로써 이천시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고 있다.

 

4. 설봉산성

 

『동국여지승람』에 ‘설봉산(雪峯山)은 부(府)의 서쪽 5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라는 기록이 있으며, 일명 부아악산(負兒岳山)이라 부르기도 하는 영산(靈山)이다. 산중에는 영월암과 삼국시대에 백제, 고구려,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던 축성(築城) 등 문화유적이 많다. 앞으로도 이곳은 우리나라 한복판 노른자위로 통일과 번영의 심장부가 될 것으로 이천시는 내다보고 있다.

 

설봉산성은 사적 제423호이며, 소재지는 경기도 이천시 사음동 산24 일원이다. 설봉산성은 관고리성지(官庫里城地) 또는 무안산성이라고도 불리며, 설봉산의 정상부에 쌓은 테뫼식의 돌로 쌓은 산성이다. 설봉산성은 관고동의 일명 기치미 고개에서 증일리에 이르는 산줄기의 연봉에 위치하고 있어 북쪽과 남쪽은 물론 주변지역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산성의 전체 둘레는 1,079m 이고 삼국 시대의 성중에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는 산성으로 전면을 다듬은 화강암 성돌을 이용하여 바른층 쌓기를 하였으며, 쐐기돌은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성문은 어긋문 형태로 된 서문과 북문, 동문이 있으며,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돌출시킨 치성은 4개가 확인되고 있다.

 

장대는 성내의 가장 높고 지휘 관측이 용이한 칼바위 부근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노출된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2칸 정도이다. 우물은 동문지 뒤편 평탄한 곳에 1개소가 있으며, 물 통로는 북쪽과 동쪽에 각각 1개씩 설치하였다. 단국대학교에 의한 발굴조사결과 칼바위 부근의 토광과 서문지 하부에서 백제 토기가 다수 출토되어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백제 석성일 가능성 에 대한 견해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반면 동문지 상단 및 성내 전역에서는 단각고배류와 인화문토기 등 이 출토되었으며, 함통(咸通)6년(865)명의 벼루가 출토되어 이 산성이 삼국시대에 축성되어 9세기 중엽까지도 사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부성은 규모가 각각 532m와 362m인 석축성으로서 성내에 건물지와 치성, 문 지 등의 유규가 확인되었으며, 삼국∼통일신라기의 기와, 토기,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설봉산 정상 부근에 있는 남장대지(南將臺址)의 장대는 장수의 지휘소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장대는 전투시 군사 지휘가 편리하고 산성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장소를 골라서 세웠다. 남장대지는 설봉산성에서 가장 높고 산성 전체가 내려다보여서 전투시 군사의 지휘가 편리한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초석 15기가 노출되어 있다. 초석의 형태는 일정하지 않으며 윗면과 옆면만 약간 다듬었다.

 

초석의 아래쪽에는 다듬지 않고 고인돌을 놓아서 수평을 맞추었으며, 초석의 배치 상태로 보아 남장대의 규모는 정면 5간, 측면 2간으로 동서 14.3m, 남북 5.7m로 추정된다. 발굴 조사시 기간, 담장, 온돌 등의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건물은 누각 형태로 사방이 트여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축조 연대는 통일신라 말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5. 영월암(映月庵)

 

영월암은 향토유적 제14호이며, 소재지는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438이다. 설봉산(雪山) 주봉 기슭에 자리 잡은 영월암(月庵)은 이 고장의 대표적인 유서 깊은 고찰이다. 문헌상으로는 조선 영조(英祖) 36년(1760) 이후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 이천지(利川誌)와 광무(光武) 3년(1899)에 나온 『이천군읍지(利川鄭邑誌)』에는 모두 북악사(北岳寺)란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그 이후로 영월암이라 불러오고 있으며, 현재는 조계종(溪宗)에 소속되어 있다.

 

영월암 중건기(重建記)에 의하면, 지금부터 1천 300여 년 전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 때 해동(海東)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인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문헌이나 금석문(金石文) 등 신빙(信憑) 자료가 없어서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경내에는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보물 제882호)과 통일신라 말~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광배(石造光背) 및 연화좌대(蓮花座臺), 그리고 석조 3층석탑(石造 三層石塔) 등의 유물, 유적이 남아 있어서 이 절이 유서 깊은 고찰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러한 유적 유물 등의 조성연대로 미루어 영월암의 창건연대는 대략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조선 후기인 영조(英祖) 50년(1774)에 이르러서야 영월(映月) 낭규 대사(郞奎 大師)가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여 큰 불사를 일으켜 중창하였다.

 

그 뒤 1911년 보은(普恩) 스님이 다시 중건하고, 1920년에는 당시 주지인 유신암(劉信庵) 스님이 산신각(山神)과 극락전을 옮겨 세웠으며, 1937년에는 조언우(曺彦佑) 스님이 누각인 단하라(丹霞閣)을 중건하였다.

 

지금의 대웅전(大雄殿)건물을 1949년 청암(淸庵) 김명칠(金明七) 스님이 이천 향교(利川 鄕校) 명륜당(明倫堂) 앞에 있었든 퇴락된 풍영루(風詠樓) 체목(體木 : 집을 지을 때 기둥, 도리 따위에 쓰는 재목)으로 옮겨 짓다가 6.25동란의 발발로 중단된 것을 1953년 11월 당시의 주지인 김해옹(金海翁) 스님이 준공하였다.

 

현재의 영월암은 대웅전과 부속건물(附屬建物) 3동(棟)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 석탑, 석조광배 및 팔각연화좌대 등의 유물들은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오다가, 1981년 주지 송정해(宋正海) 스님이 사계(斯界)의 고증을 받아 수습 복원해 놓은 것이다.

 

1989년 8월 14일 소실된 서편 요사채를 1991년 여름에 법정(法淨) 강종래(姜鐘萊) 스님이 전통한옥으로 복원하여 명실공히 전통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절 앞에 일근(一根) 이주(二株)의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640여 년, 수고 37m, 나무 둘레 5m이다. 이는 고려말의 고승 나옹 대사(懶翁 大師))가 이 절에 머물 때 꽂아놓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는 신비한 전설(傳說)을 가지고 있다.

 

6. 설봉산 삼형제바위 전설

 

아주 오랜 옛날 가난한 집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나무를 해다가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삼형제는 우애와 어머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인근 지방에 효자 아들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어느 날 설봉산으로 나무하러 갔던 삼형제가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아 속태우던 어머니는 아들을 찾아 산으로 가게 되었고 그런 줄도 모르는 아들은 나무를 한 짐씩 잔뜩하여 집으로 돌 아와 보니 어머니가 안 계셨다. 어머니를 찾아 온산을 헤매고 있을 때 어디선가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삼형제가 쏜살같이 달려가 보니 수십 길이 넘는 낭떠러지 밑에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삼형제 아들이 똑같이 뛰어내렸는데 그 순간 세 덩어리의 바위가 되었다고 하는 傳說이 있다.

 

또한 오랜 옛날 홀어머니 밑에 삼형제가 있었는데 3년 기한인 병졸(兵卒)로 모두 뽑혀가게 되었다. 아들 셋을 의지하며 살던 어머니는 아들의 무사함을 빌었으나 약속한 3년이 지나도 이들이 돌아오지를 않았다.

 

혼자서 생계를 이어 가던 홀어머니는 그리던 아들을 보지못한 채 홀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병졸의 의무를 다한 삼형제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여 어머니의 무덤에 엎드려 명복(冥福)을 빌며 일어날 줄 몰랐고 그대로 세 덩어리의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천구경(利川九景)은 제1경은 도드람산봉. 이천시 마장면 목리, 제2경은 설봉호(雪峰湖). 이천시 관고동 설봉산내, 제3경은 설봉산 삼형제바위. 설봉산내, 제4경은 설봉산성(雪峰山城). 설봉산내, 제5경=산수유마을, 제6경은 반룡성(蟠龍松) 천연기념물 제381호.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201-1, 제7경은 애련정(愛蓮亭). 이천시 안흥동, 제8경은 노성산 말머리바위. 이천시 설성면 수산리, 제9경은 이천도예촌. 이천시 사음동 신둔면 수광리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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