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0 (금)

  • 구름많음속초23.1℃
  • 구름많음15.1℃
  • 구름많음철원12.9℃
  • 구름조금동두천13.9℃
  • 구름조금파주10.9℃
  • 구름많음대관령15.3℃
  • 구름많음춘천18.1℃
  • 흐림백령도12.6℃
  • 맑음북강릉22.5℃
  • 구름조금강릉21.9℃
  • 구름조금동해21.0℃
  • 구름조금서울17.2℃
  • 구름조금인천15.8℃
  • 구름많음원주17.8℃
  • 구름많음울릉도18.5℃
  • 구름많음수원14.5℃
  • 흐림영월16.9℃
  • 구름많음충주15.0℃
  • 구름조금서산14.3℃
  • 맑음울진19.3℃
  • 구름많음청주19.3℃
  • 구름많음대전17.3℃
  • 구름조금추풍령14.7℃
  • 구름많음안동20.7℃
  • 구름많음상주19.3℃
  • 맑음포항21.8℃
  • 맑음군산14.2℃
  • 구름많음대구20.1℃
  • 맑음전주17.0℃
  • 맑음울산19.0℃
  • 구름많음창원16.1℃
  • 구름조금광주17.7℃
  • 구름조금부산17.2℃
  • 구름조금통영15.8℃
  • 맑음목포16.7℃
  • 구름조금여수16.6℃
  • 맑음흑산도13.7℃
  • 맑음완도13.9℃
  • 맑음고창16.1℃
  • 맑음순천13.1℃
  • 구름조금홍성(예)15.0℃
  • 구름많음14.8℃
  • 맑음제주16.6℃
  • 맑음고산16.6℃
  • 맑음성산16.6℃
  • 맑음서귀포17.6℃
  • 구름많음진주16.6℃
  • 구름조금강화13.5℃
  • 구름조금양평16.1℃
  • 구름조금이천15.7℃
  • 흐림인제19.3℃
  • 구름많음홍천15.4℃
  • 구름많음태백17.2℃
  • 흐림정선군19.0℃
  • 구름많음제천14.5℃
  • 구름조금보은14.9℃
  • 구름많음천안13.9℃
  • 구름조금보령14.2℃
  • 구름조금부여13.4℃
  • 구름조금금산15.3℃
  • 구름많음15.3℃
  • 맑음부안17.1℃
  • 맑음임실17.0℃
  • 맑음정읍16.4℃
  • 구름조금남원18.9℃
  • 구름조금장수15.3℃
  • 맑음고창군16.2℃
  • 맑음영광군16.8℃
  • 구름조금김해시16.7℃
  • 구름조금순창군17.6℃
  • 구름많음북창원17.2℃
  • 구름많음양산시17.6℃
  • 맑음보성군13.1℃
  • 맑음강진군14.5℃
  • 맑음장흥16.2℃
  • 맑음해남14.8℃
  • 구름조금고흥13.3℃
  • 구름많음의령군17.5℃
  • 구름많음함양군13.8℃
  • 구름많음광양시15.5℃
  • 맑음진도군15.6℃
  • 흐림봉화14.1℃
  • 흐림영주18.9℃
  • 구름많음문경17.4℃
  • 구름많음청송군14.1℃
  • 구름조금영덕19.6℃
  • 구름많음의성15.5℃
  • 구름많음구미19.3℃
  • 구름많음영천20.5℃
  • 구름조금경주시17.0℃
  • 구름많음거창15.1℃
  • 구름많음합천18.1℃
  • 구름조금밀양18.6℃
  • 구름조금산청16.5℃
  • 구름조금거제15.7℃
  • 구름조금남해15.9℃
  • 구름조금17.1℃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경주통일전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경주통일전

경주 통일전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통일전 건립 및 현황

 

통일전은 태종무열왕과 문무대왕, 김유신 장군 등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세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호국의 성지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신라 삼국통일의 위엄을 기리고 조국의 평화통일 염원을 담아 1977년 9월 7일 건립되었다. 통일전은 1976년부터 1977년까지 사업비 7억 3천 9백만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완성하였다.

통일전은 82,645㎡ 면적에 본전 1동, 영정 3기, 기념비 1기, 사적비 3기, 기록화 17점, 무명용사비 1기, 수련이 있는 연못가에 지어진 화랑정 정자가 있다.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인 태종 무열왕, 문무대왕, 추존 흥무대왕인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셨다.

남산 자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통일전은 소나무와 연못이 주위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통일전 바로 옆에는 청소년 정신 교육과 심신 수련장인 화랑교육원이 있어 상호 보완하여 현대의 신화랑을 배출하는 요람 역할을 하고 있다.

2016년 야간 개방한 화랑정과 주변 연지의 야경은 경주시민과 관광객의 힐링 코스로 각광받고 있으며, 통일전 앞 직선으로 뻗은 은행나무 단풍길은 대한민국의 100대 아름다운 길로 선정될 만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신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어받아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제44회 통일서원제’가 2022년 10월 13일 경주 통일전에서 열렸다. 통일서원제는 신라가 매초성 전투에서 당나라를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수한 날인 10월 7일에 즈음하여 매년 개최하고 있다. 한반도 최초 신라가 이룩한 삼국통일의 위업을 토대로 평화번영의 염원을 기원하며 1979년 첫 서원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주낙영 경주시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 경북도의원과 경주시의원, 각 기관단체장 및 사회단체, 학생과 시민 등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라고취대의 식전공연, 헌화와 분향, 통일 서원문 및 통일결의문 낭독, 도립무용단의 ‘화랑’ 갈라 공연, 초등학생들의 통일결의문 낭독,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제창, ‘통일염원 한마음 퍼포먼스’ 순으로 진행됐다.

 

2. 통일전 운영

경상북도가 신라 삼국통일 정신을 기리고자 건립한 경주 통일전을 직접 운영하기로 2022년 10월 3일 결정했다. 통일전 은행나무길, 경북산림환경연구소 등 주변 관광자원과 연계한 명소로 만들고 지역의 주요 호국시설로 재단장하기로 하였다.

경북도는 일반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데다 활용도가 떨어진 통일전 운영과 이용을 활성화하기 위해 2023년부터 경주시로부터 관리권을 넘겨받았다. 경북도는 통일전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2022년 9월 30일 경주시-경북독립운동기념관과 상호협력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2023년부터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이 통일전을 맡아 운영하도록 했다.

통일전은 1977년 박정희 대통령 때 신라 삼국통일 유적지 조성계획에 따라 한반도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뜻으로 짓고서 1987년부터 경주시가 도에서 관리권을 받아 36년간 운영해왔다. 초기에는 국가 차원의 관람 유도로 학생과 일반인 관람, 참배가 많았으나 현재는 예전만큼 관심이 이어지지 않고 활용도도 떨어진 상태다.

경북도는 그간 운용하던 관람 콘텐츠만으로는 통일전 활성화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장기적 발전계획 마련에 나서기로 하였다. 학술 연구,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지속 가능한 활성화 계획을 세워 국가적 차원에서 통일 정신을 계승하는 주요 호국 시설로 혁신할 계획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3. 통일전 기록화 17점

 

사천왕사 호국불사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작품 규격 100호 230cm×150cm, 1977년), 황룡사 9층 탑 조영도(작가 오원배, 인천, 작품 규격 100호, 1987), 남산 신성 축성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작품 규격 100호, 1979),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100호, 작품 규격 100호, 1977), 김유신 장군 단석산 수련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작품 규격 100호, 1977), 김유신 장군 출전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작품 규격 100호, 1977).

 

무열왕 남천정 출전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작품 규격 100호, 1977), 황산벌 혈전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100호, 1977). 화랑 관창 용전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100호, 1977). 평양성 함락도(작가 오원배, 인천, 100호, 1987), 원효 군사 자문도(작가 박비오, 대구, 100호, 1987), 원광법사 세속오계 교화도(작가 정창섭, 충북 청주, 200호, 330cm×190cm, 1979), 강수 외교문서 작성도(작가 박비오, 대구, 작품 규격 100호, 1987).

 

매초성 당군 격멸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작품 규격 100호 230cm×150cm, 1977), 기벌포 대첩도(작가 오승우, 전남 화순, 작품 규격 100호 230cm×150cm, 1979), 삼국통일 영광도(작가 김태, 경기 파주, 작품 규격 500호 630cm×200cm, 1979년). 문무왕 호국 해룡도(작가 정창섭, 충북 청주, 작품 규격 200호 330cm×190cm, 1979) 등 17점의 기록화가 전시돼 있다.

17점의 삼국통일 기록화 중 오승우 화백의 작품이 10점으로 가장 많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과 직접 관련된 작품은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 김유신 장군 단석산 수련도, 김유신 장군 출전도, 황산벌 혈전도, 화랑 관창 용전도 등이다.

 

4. 김유신 장군 출전도와 원효 군사 자문도

 

기록화 중 김유신 장군 출전도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3년(644년)에 김유신은 소판(蘇判)이 되었고, 그 해 9월에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 고령), 성열성(省熱城 : 의령), 동화성(同火城 : 구미)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그다음 해 정월에 돌아왔으나, 아직 왕을 배알하기도 전에 백제의 대군이 신라의 매리포성(買利浦城)을 침공한다는 급보를 받고, 왕은 또 김유신을 상장군으로 삼아 이를 막으라고 명령하였다. 김유신은 왕명을 받고 처자도 만나보지 못한 채 출정하여 백제군을 쳐 이를 패주시키고 2,000명을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그해 3월에 왕의 귀환하라는 명령이 내렸으나, 김유신이 집으로 가기도 전에 또다시 백제의 군사들이 그 국경에 나와 주둔하고, 장차 군사를 일으켜 신라로 쳐들어오려 한다고 급히 알리자, 왕은 다시 김유신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공은 수고롭겠으나 빨리 나가서 적들이 전비를 갖추기 전에 이를 방비하라.” 하므로, 김유신은 또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곧 군사를 훈련하고 병기구를 수선한 다음, 서쪽으로 백제를 막으러 나갔다.

 

이때 집사람들은 모두 문밖으로 나와서 장군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그런데 김유신은 문 앞을 지나면서 돌아보지도 않고 가다가 50걸음쯤 되는 곳에 이르러서 말을 멈추고, 종자에게 집에 가서 물을 떠오라 명령하여 물을 마셔 보고 말하기를 “우리 집 물맛이 아직도 옛날 그대로구나!” 하고 그냥 길을 떠나니, 이를 보는 모든 군사들이 말하기를 “대장군도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야 어찌 골육의 가족들과 이별함을 한탄하리요.” 하며 싸움터로 나갔다고 한다.

 

기록화 중 ‘원효(元曉) 군사(軍事) 자문도(諮問圖)’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무왕 2년(662년) 2월에 신라의 장군 김유신 등이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평양을 포위하고 당군에게 군량을 수송하고 돌아왔다. 그 후 신라에서는 당군과 합세하기 위해 김유신은 연기(然起), 병천(兵川) 등을 보내어 화합할 기일을 물었다.

 

이때 당의 소정방(蘇定方)은 난새(鸞 : 난새 란)와 송아지(犢 : 송아지 독)를 그려 보냈으나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원효법사(元曉法師)에게 물었다. 원효는 “군사를 급히 돌이키라는 뜻” 이라고 그 암호를 해독했다. 이에 김유신은 모든 군사를 패강(浿江)을 건너게 한 결과 고구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처럼 원효대사가 군사 자문에 응하는 등 신라의 삼국통일에 미친 사상적 영향은 지대했다.

 

5. 통일전 기록화 10점을 그린 오승우 화백 이력

 

- 1930 6월19일 전남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서 부친 화가 오지호와 모친 지양진의 차남으로 출생

- 1950(20세) 조선대학교 국문과 입학

- 1952-54 군복무

- 1955(25세) 제4회 국전<풍경30호> 입선, 경복궁미술관

- 1957(27세) 제6회 국전<법당 내부 120호> 특선 및 <미륵불120호> 입선,

- 조선대학교 예술과 졸업, 광주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로 부임

- 1958년(28세) 제7회 국전<고찰80호>특선 및 <시장 풍경100호>무감사

- 1959(29세) 제8회 국전<팔상전100호> 특선 및 <마곡사 풍경> 무감사

- 1960(30세) 제9회 국전<금강계단100호> 특선 및 <마곡사 풍경> 무감사

= 1961(31세) 제1회 개인전, <박쥐란> 외 60점 전시, 광주 Y.M.C.A화랑

- 제10회 국전 추천작가로 <신관> 출품, 경복궁미술관

- 1962(32세) 제2회 개인전, <명태>외 30점 전시, 광주 양지다방

- 서울배화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하여 서울로 이사

- 1965(35세) 제7회 개인전, <미륵불>외49점 전시, 서울 신문회관 화랑

- 1965-74 경희대, 서라벌예술대, 홍익대, 중앙대 미술과 출강

- 1967(37세) 민족기록화전시회 <용문산의 혈전1000호> 출품, 경복궁미술관

- 월남전기록화전시회에 <구출>외2점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 1974(44세) 제23회 국전 심사위원 역임, 민족기록화전시회(경제편), <포항종합제철 500호> 출품,

- 1975 민족기록화전시회(전승편), <신라의 당군 격퇴와 삼국통일 500호>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 1976(46세) 제25회 국전 심사위원 역임, <계백장군의 황산싸움 500호> 출품

- 1977년(47세) 제26회국전 심사위원 역임, 경주 통일전 벽화 제작, <매초성 당군 격퇴 100호>외 7점

- 1979(49세) 제28회 국전 심사위원 역임

- 1985(55세) 제21회 경기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역임

- 1987(57세) 제6회 미술대전 운영위원 역임

- 1988(58세) 한국미술협회 고문으로 추대

- 1990(60세) 서울시문화상<미술부문> 수상

- 6회 무등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역임

- 1993(63세)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

- 1994(64세) 제13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 1995(65세)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 1997(67세) 성옥문화대상 수상

- 1998(68세)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 서울시 미술장식심의위원 역임

- 국립현대미술관 운영 자문위원

- 2000(70세)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역임

- 명예철학박사학위 수여(원광대학교)

- 2001(71세) 대한민국예술원 분과위원장

- 2002(72세)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

- 2003(73세) 단원미술대전 심사위원장

- 2011 오승우 화백이 기증한 178점을 바탕으로 ‘무안군 오승우미술관’ 개관

-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사단법인 목우회 고문, 한국미술협회 고문, 환경운동연합중앙회 지도위원, 한중문화협회 상임 고문

- 2023.4.3. 93세로 별세

 

6. 통일전 주변 명소

 

통일전 주변에는 경북산림환경연구소와 조성이 끝나가는 지방 정원, 화랑교육원. 은행나무길, 남산, 정강왕릉, 헌강왕릉, 서출지 등 관광 명소가 가까이 있다.

 

통일전 바로 옆에 신라 정강왕릉이 있으며, 약간 떨어진 곳에 헌강왕릉이 있다. 정강왕은 통일신라의 제50대(재위 886~887년) 왕이다. 성은 김(金), 이름은 황(晃)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서 의공대왕(懿恭大王)으로 추봉된 계명(啓明)이고, 할머니는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로 추봉된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맏딸로 문의왕후(文懿王后)에 봉하여진 영화부인(寧花夫人)이다. 정(晸 : 헌강왕)·만(曼 : 진성여왕)·윤(胤)과 형제간이다. 재위기간이 짧았지만, 재위 동안에 887년(정강왕 2) 정월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였고, 이찬(伊飡) 김요(金蕘)가 한주(漢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5월에 병이 들어 시중 준흥(俊興)에게 병이 위급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아들이 없으므로 누이 만(曼)으로 왕위를 잇게 하라고 부탁하고, 7월 5일에 죽었다. 보리사(菩提寺) 동남에 묻혔다.

 

헌강왕은 통일신라 제49대(재위 875∼886) 왕이다. 헌강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 왕이 황금을 바칠 정도였다고 한다. 『삼국사기』권 11, 「신라본기」 11 헌강왕 6년 9월 9일(880년) 조에 의하면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서울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侍中)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신(臣)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한) 아뢰기를,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음양(陰陽)이 조화롭고 비와 바람이 순조로워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변경(邊境)은 평온하여 민간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덕(聖德)의 소치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경(卿)들이 도와준 결과이지 짐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헌강왕릉은 높이 4.2m, 지름 15.3m의 둥근형태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무덤 밑둘레에 돌을 4단으로 쌓았다. 일찍이 도굴되었으며 비에 의한 피해로 긴급조사를 하였다. 관이 놓여 있는 방은 네모 형태로 천장은 둥글게 모아져 있는 활천장(궁륭상천장)이고, 이 방과 연결된 통로인 널길(연도)은 동쪽에 있어 전체적으로 ‘ㄱ’자형이다. 여기서 꽃무늬 토기도 나왔다.

 

경주 남산 기슭에 위치한 통일전 가까운 곳에 서출지라는 신라시대 연못이 있다. 남산 마을 한가운데에 삼층석탑 두 기가 있고 동쪽에 아담한 연못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궁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못가에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이 건물은 연못 서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YNEWS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