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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 원광법사와 백고좌 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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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화요칼럼 원광법사와 백고좌 법회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신라 최초의 백고좌 법회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데 있어서 화랑도의 역할이 매우 컸다. 화랑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세속오계를 귀산과 추항에게 전수해준 원광법사는 중국에 유학한 훌륭한 고승으로서 왕실의 국사 대우를 받았다. 중국 수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 황룡사에서 백고좌 법회가 열렸는데 주인공은 원광법사였다.

혜량(惠亮)은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신라로 귀화해 신라 불교 최초의 승통(僧統)을 역임한 승려이다. 고구려에 있을 때 국력을 정탐하러 온 신라 장수 거칠부(居柒夫)를 만난 적이 있다. 그 때 혜량은 강당에서 불경을 설하였는데, 참석한 거칠부를 만났다. 거칠부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체포되지 않게 은밀히 불러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신라로 귀환(歸還)시켰다.

그 뒤 신라는 백제의 연합군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여 국경의 열 군데 군(郡)을 함락시켰다. 거칠부가 죽령(竹嶺)을 넘어 고구려로 진군할 때 혜량을 보고, 전날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고자, 그를 진흥왕에게 천거하였다. 551년(진흥왕 12)에 망명한 그는 승통이 되어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와 팔관회(八關會)를 최초로 개최하였고, 불교의 여러 사무를 통괄하였다.

신라 초기 교단의 형성과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새로운 불교 의식의 정착을 도모하였다. 고구려에서 귀화한 그가 신라의 승통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위대성을 말함과 동시에 신라불교의 연륜이 일천하였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이때 신라는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고 불과 몇십 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신라는 혜량을 중용, 진흥왕 시대부터 불교색이 굉장히 강해진 것은 시기상 승통 혜량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 기존에 들어와 있었던 불교는 백제를 매개로 한 중국 남조 불교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고구려 승 혜량을 통해 북조 불교까지 신라에 유입되었다. 혜량 스님 덕분에 백제나 고구려와 달리 신라는 초기부터 남북조 두 계통의 불교가 융합할 수 있었다. 신라 불교의 역사가 짧으면서도 급속히 발전한 것은 혜량 스님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2. 거칠부와 혜량 스님 인연

 

삼국사기 제44권 열전 제4(三國史記 卷第四十四 列傳 第四) 거칠부(居柒夫) 조에 혜량 스님과 맺은 인연이 나온다.

거칠부(居柒夫)[혹은 황종(荒宗)이라고도 한다.]의 성은 김(金)씨이고, 내물왕(奈勿王)의 5세손이다. 조부는 각간 잉숙(仍宿)이요, 아버지는 이찬 물력(勿力)이다.

 

거칠부는 젊었을 때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원대한 뜻이 있어 삭발하고 중이 되어 사방을 유람하였다. 문득 고구려를 엿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그 나라 경내로 들어갔다. 법사(法師) 혜량(惠亮)이 강당을 열고 불경을 설명한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는 불경 강론을 들었다.

 

하루는 혜량이 물었다.

“사미(沙彌, 수행승)는 어디서 왔는가?”

 

거칠부가 대답하였다.

“저는 신라인입니다.”

그날 저녁에 법사가 그를 불러 놓고 손을 잡으며 은밀히 말했다.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는데 너의 용모를 보니 분명코 범상치가 않다. 아마도 다른 마음을 품고 있지 않느냐?”

 

거칠부가 대답하였다.

“제가 변방에서 태어나 참된 도리를 듣지 못하였는데, 스님의 높으신 덕망을 듣고 와서 말석에 참여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거절하지 마시고 끝까지 저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여 주십시오.”

 

법사가 말했다.

“노승이 둔하고 재빠르지 못하지만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이 나라가 비록 작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자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대가 잡힐까 염려되어 은밀히 일러 주는 것이니, 그대는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거칠부가 돌아가려 하니 법사가 또 말했다.

“너의 상을 보니 제비 턱에 매 눈이라, 앞으로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다. 만약 병사를 거느리고 오게 되거든 나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거칠부가 말했다.

“만일 스님의 말씀과 같은 일이 생긴다면, 이는 스님과 제가 모두 좋아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그는 마침내 귀국하여 본심대로 벼슬길에 나아가 직위가 대아찬에 이르렀다.

 

진흥대왕(眞興大王) 6년(서기 554) 을축에 그는 왕명을 받들어 여러 문사(文士)들을 소집하여 신라의 국사를 편찬하였고, 벼슬이 파진찬으로 올라갔다.

 

진흥왕 12년(서기 551)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여덟 장군을 시켜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이때 혜량법사가 무리를 이끌고 길가에 나와 있었다.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로써 인사하고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옛날 유학할 때 법사님의 은혜를 입어 목숨을 보전하였는데, 지금 뜻밖에 만나게 되니 어떻게 보답하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머지않았으니, 귀국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라오.”

 

이에 거칠부가 같이 수레에 타고 돌아와서 왕에게 배알시켰다. 왕이 그를 승통(僧統, 승려의 가장 높은 지위)으로 삼고 처음으로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법회(八關法會)를 열었다.

 

3. 백고좌 법회

 

백고좌회는 『인왕경(仁王經)』에 근거한 불교행사로서, 사자좌(獅子座) 100개를 만들고 고승(高僧)을 초빙하여 설법을 듣는 큰 법회이다. 인왕도량(仁王道場) 또는 인왕백고좌회(仁王百高座會)라고도 부른다.

 

일찍부터 『인왕경(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은 『금광명경(金光明經)』, 『법화경(法華經)』과 함께 호국삼부경(護國三部經)으로 알려졌다. 인왕경이 호국의 경전으로 존중된 이유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호국공덕(護國功德)에서 기인하였다. 더 직접적으로는 이 경전 호국품(護國品)의 구체적인 내용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부처님께서 호국의 법은 “일체국토(一切國土)가 문란(紊亂)해지려 하여 갖가지 재난(災難)이 있고 외적(外賊)이 와서 파괴하려 할 때” 시행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한다. 이러하였기 때문에 인왕도량은 주로 외적이 쳐들어올 때와 더불어 나라에 큰 재난이 닥쳤을 때에 널리 시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4. 원광법사의 황룡사 백고좌 법회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진평왕(眞平王, 579~632년) 조에 원광법사의 백고좌 법회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진평왕 35년(서기 613년) 봄, 가뭄이 들었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가을 7월,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황룡사에 와서 백고좌(百高座)를 열고, 원광 등의 법사(法師)를 맞아들여 불경을 설법하게 하였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 원광서학 조에 원광법사의 백고좌 법회 내용은 삼국사기보다 약간 구체적으로 나온다. 즉, 원광법사가 백좌도량에서 주인공으로 소개되고 있다.

 

건복(建福) 30년 계유(서기 613년)[즉 진평왕(眞平王)이 왕위에 오른 지 35년이다.] 가을에 수나라 사신으로 왕세의(王世儀)가 왔다. 그래서 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열고 여러 고승을 청해 불경을 강의했는데, 원광이 가장 윗자리에 앉았다.

 

혜량이 처음으로 백고좌회를 주관하여 개최한 것은 황룡사가 준공된 진흥왕 27년(566)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평왕 35년(613) 4월에 황룡사에서 두 번째로 백고좌회를 개최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원광법사의 입적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원광의 천성은 텅 비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말할 때에는 늘 웃음을 머금었고 얼굴에는 화가 난 기색이 없었다. 나이가 이미 많았으므로 수레를 타고 대궐로 들어갔는데, 당시에 덕망과 인의를 갖춘 뛰어난 선비들이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그리고 뛰어난 문장 실력은 한 나라를 기울일 만큼 훌륭하였다. 나이 80여 세가 되어 정관(貞觀) 연간(서기 627~649)에 세상을 떠났는데, 부도가 삼기산(三岐山) 금곡사(金谷寺)에 있다. 『당전(唐傳)』에서는 황륭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했지만, 그 장소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황룡사를 잘못 전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분황사(芬皇寺)를 왕분사(王芬寺)라고 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삼국유사를 편찬 일연 스님의 원광법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찬미하였다.

 

바다 건너 처음으로 중국 땅의 구름을 뚫으니

몇 사람이나 오가며 맑은 향기(불법) 배웠을까.

옛날의 자취는 푸른 산에 남았으니

금곡(金谷)과 가서(嘉西)의 일 들을 수 있다네.

 

필자는 지난 8월 23일 경주 황룡사지를 답사하면서 원광법사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원광법사는 중국 유학을 통해 불교의 교리에 대해서도 정통하였고, 인품이 뛰어나 수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신라 왕실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국사 대접을 받았다. 608년 진평왕은 수나라의 군사를 청해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원광에게 걸사표를 짓도록 청하였다. 학문에도 뛰어난 자질을 타고나 한문에도 능하였다. 원광법사가 후일의 삼국통일에도 일조하였다.

 

진흥왕 당시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원광법사가 황룡사에서 백고좌 법회를 주도하였다. 고승으로서 불교의 교리도 잘 알고, 한문에도 박학다식(博學多識)하며, 인품이 훌륭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오랜 중국 유학으로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중국 사신과 바로 대화할 수 있어 외교관의 역할도 할 수 있었다. 황룡사지는 규모가 엄청났고 여전히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앞으로 황룡사를 복원한다면 한국 불교 역사상 최대의 업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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