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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경주 안강읍 금곡사의 원광법사 부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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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경주 안강읍 금곡사의 원광법사 부도탑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금곡사 원광법사 부도탑 발견

화랑도의 세속오계를 전수해준 원광법사의 부도탑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삼국통일의 주인공인 김유신 장군의 유적지를 탐방하면서 청도군을 방문하였다. 신라의 고승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전수해준 세속오계의 역사적 현장인 경북 청도군 운문면의 운문사, 가슬갑사 유적지 등을 답사하면서 자료를 조사해보니 원광법사 부도탑이 경주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도탑을 최초로 발견하여 널리 알린 주인공은 최남주 선생이었다.

1970년 8월 24일자 주요 일간지 사회면에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금곡산(해발 500m)에서 ‘원광법사부도 발견’이란 제목으로 관련 기사가 일제히 보도됐다. 신라 화랑도 세속오계 계율을 지은 원광법사(圓光法師) 부도탑(浮圖塔) 발견은 최정대 칼럼리스트 (대광상사대표) 선친인 최남주 선생이 오랜 세월 동안 추구해 왔던 노력의 결실이었다(2022년 11월 1일, 코리아타임스).

석당 최남주(1905-1980, 문화재 발굴·보존, 고고학 선구자) 선생은 화랑들이 하늘에 맹세한 내용의 글귀가 적힌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 발견된 이후 신라 화랑들의 유적지 답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그는 원광법사의 부도와 관련된 유적지 발견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최남주 선생은 신라불교문화 최고의 사료인 『삼국유사』 권제4(卷第四)조의 기록을 주목했다. 삼국유사에 “원광의 나이 80여세로 입적하였고 부도는 삼기산(三岐山) 금곡사(金谷寺)에 있다, 지금 경주 안강(安康)의 서남쪽 골짜기다. 또한 명활산 서쪽이다”라는 기록이었다.

최남주 선생은 위 기록을 추적하여 삼기산 금곡사를 찾는 데 주력했다. 그는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지』 산천조에 삼기산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발견을 하였으니 ‘비장산(臂長山) 재부 서삼십리 금곡사 주산야(在府西 三十里 金谷寺 主山也)’라는 기록을 보고 삼기산의 다른 이름이 비장산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신라 수이전(新羅 殊異傳)』에 의하면 원광법사가 금곡사에서 입산 수행 중일 때 여우 귀신이 자주 나타나 자신에게 팔뚝을 보여주었다고 해서 팔뚝 ‘비(臂)’자를 사용해 이 산은 ‘비장산’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삼기산은 오늘날 비장산 또는 금곡산으로 호칭되고 있다.

최남주 선생은 경주 안강 지역의 고노(古老)들에게 금곡사의 위치를 탐문한 끝에 답사 계획을 세웠다. 1970년 8월 초순 최남주 선생은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를 찾아 당시 대학생이었던 넷째 아들 최정표와 동해선 기차를 타고 구(舊) 사방역(경주시 안강읍 소재)에 내렸다. 그곳에서부터 다시 산길로 30여리 길을 걸었다.

심산유곡 험준한 산골을 장시간 걸어서 금곡산 산골짜기 중턱에 도달하여 유서 깊은 금곡사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금곡사지에는 국보급인 원광법사 부도가 어느 정도 파손되었지만, 천 사백 년의 세월을 견디며 있었다. 최남주 선생은 경주지역 신문 기자들과 함께 금곡사를 다시 답사해 국보급인 원광법사 부도의 예술성을 재확인했다고 한다.

 

2. 금곡사 답사

 

필자는 지난 8월 23일 오후에 원광법사 부도탑을 보기 위해 경북 경주시 안강읍 두류길 758에 위치한 금곡사를 답사했다. 경주시 안강읍을 거쳐 두류공단을 지나서 화산곡저수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갔다. 화산곡저수지는 2004년에 조성되었으며, 유역면적 740ha, 만수면적 17.9ha, 수혜면적 267ha, 유효저수량 2,234,000㎥로 상당히 컸다.

 

비포장 길과 시멘트 포장길이 번갈아 나왔다. 길은 협소하여 일방통행로였는데, 이따금 차량이 교행할 공간이 있었지만 반대편에서 차가 갑자기 나타나면 피할 곳이 마땅치 않은 위험한 길이었다. 절 가까운 곳에 농막도 있었으나 차량 통행은 거의 없어 다행이었다.

 

금곡사 입구에 도착하니 주차공간이 있었고, 절로 올라가는 길 왼쪽의 계곡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 절 안으로 차량 운행을 금지한다는 안내판이 있어 주차한 후 약간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갔다. 절 입구에는 제법 큰 나무가 있어 역사가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진을 찍는데, 날파리가 엄청나게 달려들어 곤란하였다. 절이나 시골지역을 답사하다 보면 날파리가 많은데, 금곡사는 유난히 많아 사진 찍는 데 애를 먹었다.

 

원광법사 사리탑을 무사히 답사할 수 있게 되어 안도감이 들었다. 다양한 각도로 부도탑 사진을 많이 찍었다. 절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고, 주지 스님도 출타한 것 같았다. 나중에 삼성각을 참배할 때 젊은 남성 답사객 한 명을 만났다.

 

금곡사 전각은 아담한 규모였는데, 대웅전 격은 약사전이었다. 원광법사 부도탑 바로 뒤에 있다. 오른쪽에는 요사채가 있고, 그 위 언덕에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 부처님 옆에 모신 산신령은 여신으로 오른 손에 지팡이, 왼손에 산삼을 들고 호랑이 위에 걸터앉아 있다. 여산신령 뒤에도 커다란 호랑이가 있었다.

 

금곡사 원광법사 부도탑은 국가유산자료 제97호로 1985년 8월 5일에 지정되었다. 원광법사의 사리를 모신 부도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부도탑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금곡사는 불타고, 부도탑도 파손되었다고 한다. 6.25 한국전쟁 때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금곡사 가는 길 입구에 있는 화산곡저수지에서 근처부터 금곡사 계곡에는 봄에 복수초, 변산바람꽃, 노루귀 등 야생화가 아름답게 피어 사진작가들이 많이 온다고 한다. 금곡산 정상은 521m로 금곡사 뒤로 30~40분 정도 등산하면 올라갈 수 있다.

 

3. 금곡사 부도탑

 

원광법사 부도탑 안내문은 전국의 다른 문화재 안내판과 마찬가지로 한글과 영문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한글과 영문 안내문이 내용이 약간 다른 것이 있었다.

 

부도는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놓은 일종의 무덤이다.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은 금곡사 터에 있는 원광법사(555~638년)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동근 모양의 다른 부도와 달리 일반적인 석탑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부도탑은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인데, 1층 몸돌과 3층 지붕돌만 원래의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1997년에 새로 만들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큰 모양을 만들고 안쪽을 살짝 파내어 불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지붕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윗면은 완만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받침들만 남아 있다.

 

원광법사는 박씨(朴氏) 또는 설씨(薛氏)로 80세 혹은 99세를 살았다고 한다. 화랑도의 생활신조가 된 세속오계, 수나라에 보낸 걸사표(乞師表)를 지을 정도로 문장에도 능하였다. 삼국유사에 진평왕 52년(630년) 황룡사에서 돌아가시자 명활산(明活山)에 장사지내고 삼기산(三岐山) 아래 금곡사에 부도를 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신라의 고승 원광이 화랑에게 일러 준 다섯 가지 계율이다.

사군이충(事君以忠) :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긴다

사친이효(事親以孝) :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긴다

교우이신(交友以信) : 믿음으로써 벗을 사귄다

임전무퇴(臨戰無退) :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다

살생유택(殺生有擇) :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다

 

4. 걸사표(乞師表)

 

걸사표는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에 나온다. 신라 진평왕(579년~632년), 608년(진평왕 30) 신라의 승려 원광법사가 수나라의 군사를 청하기 위해 쓴 글로 ‘걸병표(乞兵表)’라고도 한다. 608년 진평왕은 수나라의 군사를 청해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원광에게 걸사표를 짓도록 청하였다.

 

진평왕 30년(서기 608), 임금이 고구려가 자주 영토를 침범하는 것을 염려하여 수나라에 병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려 하였다. 원광에게 명하여 군사를 청하는 글을 짓게 하니, 원광이 말하였다.

 

“자기가 살기 위하여 다른 이를 멸하는 것은 승려에 걸맞는 행동이 아닙니다만, 저는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물과 곡식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곧 글을 지어서 올렸다.

 

원문은 전하지 않지만 『삼국사기』에 의하면, 611년에 신라에서는 수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 걸사표로써 군사를 청했고, 이에 수나라 양제(煬帝)는 100여 만의 대군을 이끌고 612년에 고구려를 침략하였다고 한다.

 

33년(서기 611), 임금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병사를 청하는 글을 올리니, 수 양제(煬帝)가 그것을 허락하였다. 병사를 움직인 일에 관해서는 ‘고구려본기’에 실려 있다.

 

삼국사기 제20권 고구려본기 제8(三國史記 卷第二十 高句麗本紀 第八), 영양왕 22년(서기 611), 22년(서기 611) 봄 2월, 수 양제(煬帝)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양제의 행차가 탁군(涿郡)의 임삭궁(臨朔宮)에 도착했을 때,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에 모였다.

 

영양왕 23년(서기 612), 군사의 총수는 1백 13만 3천 8백 명이었는데, 외형적으로는 2백만 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군량 수송을 맡은 자의 수는 배가 되었다. 수나라에서는 남쪽 상건수(桑乾水)에서 토지 신령께 제사 지내고, 임삭궁(臨朔宮)의 남쪽에서 상제께 제사 지내고, 계성(薊城)의 북쪽에서 마조(馬祖)에게 제사 지냈다.

 

양제는 직접 지휘관을 임명하여, 각 군에 상장(上將), 아장(亞將) 각 1명과 기병 40대를 두었다. 1대는 1백 명이며, 10대가 1단이다. 보병은 80대였는데, 4단으로 나누어 단마다 각각 편장(偏將) 1명을 두었으며, 단의 갑옷과 투구의 끈과 깃발의 빛깔을 다르게 하였다.

 

매일 1군씩 군사를 보내되, 서로간의 거리가 각각 40리 정도 되게 하였다. 각 군영이 연속적으로 출발하였다. 40일 만에 출발이 모두 끝났다. 한 대열의 뒤와 다음 대열의 앞이 서로 연결되고, 북과 나팔 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깃발은 9백 60리에 뻗쳤다.

 

양제의 진영에는 12위(衛), 3대(臺), 5성(省), 9시(寺)가 있는데, 내외, 전후, 좌우의 6군을 나누어 배속시켜 뒤따라 출발하게 하였다. 이 대열이 또한 80리에 다다랐다. 근래에 군사의 출동이 이와 같이 어마어마한 적이 없었다.

 

5. 삼국유사의 원광법사 수도와 중국 유학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 원광서학(圓光西學)에는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금곡사가 위치한 삼기산의 이야기가 나온다.

 

또 경주의 안일 호장(戶長) 정효(貞孝)의 집에 있는 고본 『수이전(殊異傳)』의 「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법사의 세속의 성은 설씨(薛氏)로 경주 사람이다. 처음 승려가 되어 불법을 배웠는데, 나이 30세에 한가로이 지내면서 수도하려고 삼기산(三岐山)에 홀로 머물렀다. 그 후 4년이 지나 어떤 승려가 와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절을 짓고 2년을 살았다. 그 승려는 사람됨이 강하고 사나웠으며 주술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어느 날 밤 법사가 혼자 앉아 불경을 외는데, 홀연히 신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하였다.

 

“좋고 좋도다! 그대의 수행이여! 무릇 수행하는 자는 비록 많지만 법대로 하는 이는 드물지. 지금 이웃의 중을 보니, 주술을 곧잘 하지만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시끄러운 소리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고요한 생각을 괴롭히지. 그가 머무는 곳은 내가 다니는 길에 방해가 되어서, 매번 지날 때마다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야. 나를 위해 법사가 그 사람에게 말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도록 해주게나. 만일 오래 머무른다면 내가 갑자기 죄를 저지를지도 모르거든.”

 

그래서 이튿날 법사가 찾아가 말하였다.

“어젯밤 내가 신의 말을 들었는데, 스님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 좋겠소. 그렇지 않으면 응당 재앙이 있을 것이오.”

그러자 중이 대답하였다.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마귀에게 현혹됩니까? 법사는 어찌 여우 귀신의 말 때문에 근심하시오?” 그날 밤 또 신이 와서 말하였다.

 

“지난번에 내가 한 말에 대해 중이 뭐라고 대답합디까?”

법사는 신이 노여워할까봐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결국 아직 말을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굳이 말을 하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신이 말하였다.

“내 이미 다 들었소. 법사는 어찌하여 말을 덧붙이는 것이오? 단지 잠자코 내가 하는 것만 보시오!”

 

마침내 작별하고 가버렸다. 밤중에 벼락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는데, 다음 날 보니 산이 무너져 중이 있던 절을 묻어버렸다. 신이 또 와서 말하였다.

“법사가 보기에는 어떻소?”

법사가 대답하였다. “보기에 너무나 놀랍고 두려웠습니다.”

 

“내 나이가 3천 세에 가깝고 신술(神術)도 가장 뛰어나니, 이런 건 작은 일인데 어찌 놀랄 것이 있겠소? 단지 미래의 일도 모르는 게 없을 뿐더러 천하의 일도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소. 이제 생각해 보니, 법사가 이곳에만 있으면 비록 자신을 이롭게는 하는 행위는 되겠지만 남을 이롭게 하는 공은 없을 것이오. 지금 높은 명성을 날리지 못하면 미래에도 뛰어난 성과를 이루지 못할 것이오. 어찌하여 중국에서 불법을 배워 이 나라의 중생들을 인도하지 않는 것이오?”

 

법사가 대답하였다.

“중국에서 도를 배우는 것은 본래 저의 소원입니다. 하지만 바다와 육지가 멀리 막혀 있어서 가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자 신이 중국으로 갈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법사는 그 말대로 중국에 가서 11년을 머무르며, 삼장(三藏)을 널리 통달하고 아울러 유학도 배웠다.

 

진평왕 22년 경신(서기 600)에[『삼국사(三國史)』에서는 그 다음 해인 신유년에 왔다고 하였다.] 행장을 정리하여 중국에 왔던 사신을 따라 귀국하였다. 그리고 법사는 신에게 감사를 드리려고 예전에 머물던 삼기산의 절로 갔다. 밤이 되자 신도 역시 와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말하였다.

 

“바다와 육지의 길을 다녀온 것이 어떠한가?”

법사가 대답하였다.

“신의 크나큰 은혜를 입어 편안히 다녀왔습니다.”

신이 말하였다.

“나 또한 법사에게 계(戒)를 드리겠소.”

 

이렇게 말하고는 곧 윤회하는 모든 세상에서 서로 구제하기로 약속을 맺었다. 법사는 또 청하여 말하였다.

“신의 실제 모습을 뵐 수 있겠습니까?”

신이 말하였다.

“법사가 만일 내 모습을 보고 싶거든, 내일 아침에 동쪽 하늘 끝을 바라보시게.”

 

법사가 다음날 아침 동쪽 하늘을 바라보니 커다란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 신이 또 와서 말하였다.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는가?”

법사가 대답하였다.

“보았습니다만, 너무도 신기하고 기이했습니다.”

 

이러한 일 때문에 세간에서는 삼기산을 비장산(臂長山)이라고도 한다. 신은 말하였다.

“비록 이 몸이 있다 해도 덧없는 죽음은 면할 수 없다네. 그래서 나는 얼마 후에 그 고개에 내 몸을 버릴 것이니, 법사는 그곳으로 와서 영원히 떠나는 내 영혼을 전송해 주시게나.”

 

약속한 날이 되어 법사가 그곳으로 가보니, 옻칠을 한 것처럼 새까만 늙은 여우 한 마리가 단지 헐떡거리기만 할 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더니 잠시 뒤에 죽어버렸다.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신라의 왕과 신하들이 매우 존경하여서 법사를 스승으로 삼았다. 법사는 늘 대승경전을 강의하였다. 그 당시는 고구려와 백제가 늘 국경을 침략했기 때문에 왕은 이를 몹시 걱정하였다.

 

그래서 수나라[당연히 당나라가 되어야 한다.]에 군사를 청하려고 법사에게 구원병을 청하는 글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수나라 황제는 그 글을 보고 30만 군사로 직접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법사가 유술(儒術)까지 두루 통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이 84세로 세상을 떠나니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장사 지냈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교학승의 자료만을 따로 모아 놓은 ‘의해(義解)’편에서 원광전을 가장 먼저 싣고, ‘속고승전’과 고본 ‘수이전’의 원광전의 전문을 그대로 전재하였다. 그밖에 일연 스님은 ‘삼국사기’의 관련 자료, 운문사 등에 전하는 고문서, ‘해동고승전’ 원광전 등의 원광법사에 관한 자료들까지 총망라하여 검토하고 종합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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