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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삼계리의 천문사와 가슬갑사, 성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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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삼계리의 천문사와 가슬갑사, 성황당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가슬갑사가 있던 신원리의 자연마을 유래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도의 세속오계를 전해준 가슬갑사가 있는 곳으로 알려진 신원리는 경북 청도군 운문면에 속하는 있는 법정리이다. 신원(新院)은 새로 만들어진 원(院)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도군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도 20호선 ‘청려로’를 따라가다 운문면에서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으로 가는 길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고려 시대에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집필한 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김사미 농민 운동의 본거지이자 일제 강점기 최초 항일 운동의 청도군 거점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현재는 운문사와 운문산 군립 공원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한 상업 지구로 변모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원리의 자연 마을로는 속계 마을, 염창, 황정리, 사기점, 장군평, 천문동, 통점이, 삼계리 등이 있다. 신원리 입구 마을은 내포라고 하며, 큰 각단 또는 속계 마을이라고 부른다. 속계 솥을 만들던 곳이다.

염창은 소금 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정리는 신라 진평왕이 가슬갑사에 수도하고 있는 원광 국사와 나랏일을 의논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을 때 머물렀다 하여 황정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기록은 없다. 또 황정리는 고려 말 장연 노씨들의 세거지로, 공양왕의 비가 장연 노씨 집안이었기에 황정리라고 한다는 설도 있다.

사기점은 솔밭과 황정리 부근이고 신라 때 대작갑사가 있던 곳이라 해서 절터[사기(寺基)]라고 한다고 전해오고 있다. 장군평은 운문사 서쪽, 지금의 목우정 아래에 있는 들로 사하촌(寺下村) 사람들이 살았다.

신라 말 고려 초에 김식희 장군과 손긍훈 장군이 고려를 건국하는 데 도움을 주어서 벽상공신으로 녹훈을 받은 땅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기록은 없다. 운문사 조사당에 보면 두 사람의 초상이 남아 있다.

천문동은 천문갑사가 있었던 자리 부근에 인가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숯을 굽던 사람들이 많이 있을 때 자연적으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알려져 있다. 통점이(통지미)는 신원동 본동과 삼계리와의 중간 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서 지룡산성으로 가는 길이 가장 완만하게 오를 수 있는 곳이긴 하나 마을의 이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전하는 말이 없다.

삼계리는 글자 그대로 계곡 세 개가 모인 곳을 말한다. 언양 고개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배넘이 고개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안 삼계리는 삼계리에서 경주시 산내면 신원리 신원사로 넘어가는 길목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18세기까지 도자기를 구웠던 요지가 있었지만, 최근에 가축을 기르고, 식당이 들어서면서 그 흔적이 없어졌다.

지금은 이곳에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어 69호선 국지도 주변으로 펜션, 카페, 오토 캠핑장이 들어서 있다. 신원천, 운문천 개울 양안(兩岸)에는 펜션들로 인해 여름, 가을에는 피서객,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 길을 따라 운문사, 언양으로 오가는 여행자들은 심한 교통 체증을 겪고 있다.

생금비리는 비리라는 말은 아주 비탈에 만들어진 길을 비리라고 한다. 경상도 사투리로 벽을 비릉빡이라고 하듯이 비리는 벽같은 곳을 지나는 비탈길인데 마치 문경의 토끼비리와 같은 말이다. 옛날 이 부근에는 아직도 쇠를 캐던 터가 남아 있고 쇠를 제련했던 터는 삼계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외에도 많은 계곡에는 쇠를 제련한 곳이 있다. 1967년도에는 무장공비가 침입하여 정두표 씨가 전사하였던 일이 생금비리에서 있었다.

 

2. 신원리의 역사적 변천과 자연 및 인문 환경

 

조선 시대에 동이위면(東二位面)에 속해 있었다가, 1832년 이위면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미면(古彌面)의 6개 동[봉산(奉山), 정하(亭下), 정상(亭上), 마상(馬上), 마하(馬下), 지촌(芝村)]을 병합하여 신원동이라 하였고, 운문면에 편입하였다. 1988년 신원동에서 신원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찍이 운문사가 있어 산골 중에 산골이면서도 신라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탐방지가 되었던 곳이다. 신라 때 원광 국사를 시작으로 보양 국사를 위시하여 원응 국사가 주석(駐錫)한 곳이기도 하다. 일연 왕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이다.

 

김사미가 주동이 된 농민 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던 곳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했으며 빠른 시기에 개화가 시작되었고, 따라서 사립 문명 학교가 청도군에서 가장 먼저 개교를 하였던 곳이다. 사립 문명 학교 출신들은 일제 강점기에 신원리를 중심으로 항일 운동을 벌였으며, 인근 지역에서 가장 먼저, 가장 강력하게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원리의 자연환경은 운문산과 문복산, 가지산 등의 높은 산을 끼고 있다. 산이 높아 해방 후 좌·우익이 대립하면서 빨치산의 은거지로 활용되었다. 동족상잔의 전쟁이 있기 전에 빨치산과 군경 토벌대의 전투로 수많은 양민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던 곳이 운문산 일대이다.

 

깊은 골짜기의 철광산에서 철이 생산되었고 지금도 계곡 곳곳에는 철을 다루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운문산, 문복산, 가지산 등에는 갖가지 바위들과 함께 여러 가지 전설들이 전해진다.

 

계살피 계곡(또는 개살피 계곡)에는 주상절리가 있고 철을 다루었던 흔적인 슬러지(sludge)가 남아 있다. 그리고 운문산과 문복산, 가지산, 계곡 군데군데에는 숯을 만들었던 곳이 있어서 용선 수공업[(溶銑 手工業 : 선철(銑鐵)을 녹는 점 이상으로 가열하여 녹이는 일]인 쇠를 다루는 데 꼭 필요한 것을 자급자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지산에서 뻗어 나온 한 줄기의 지맥이 지룡산성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두 개의 봉우리가 쌍으로 불쑥 내밀은 곳은 쌍두봉이라 부른다. 운문사 서쪽으로는 약야계라 불리는 개울이 흐른다. 보양 국사가 중국 운문산에서 불교를 배운 후 운문 선사라는 사액을 받고 운문사라 이름을 바꾼 것에서 기인하여, 중국 운문산에 흐르는 계곡 약야계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것이다.

 

신원리의 2012년 6월 현재 면적은 61.50㎢으로 청도군에서는 가장 넓은 지역을 지니고 있으며, 인구는 2023년 1분기 현재 다음과 같다. 청도군은 전체 세대수 23,584, 총인구 42,628명으로 남자 21,023명, 여자 21,605명이다. 운문면은 세대수 1,299, 총인구 2,006명으로 남자 1,023명, 여자 983명이다. 신원리는 세대수 320, 총인구 527명으로 남자 251명, 여자 276명이다.

 

3. 오갑사 중의 하나인 천문갑사

 

천문갑사지에 대한 존재와 위치를 기록한 고문헌은 『삼국유사(三國遺事)』 보양(寶壤) 이목(梨木)조와 청도동 호거산 운문사 사적(淸道東 虎踞山 雲門寺 事蹟)이 있다. 고문헌에 의하면 557년(신라 진흥왕 18)에 한 신승(神僧)이 운문산에 들어와 지금의 금수동(金水洞) 북대암(北臺庵) 터에 초암을 짓고 3년 동안 수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과 골이 진동하여 새와 짐승이 놀라 우는 소리를 듣고 그곳이 오령(五靈)이 숨어 사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중심부에 대작갑사(大鵲岬寺)[지금의 雲門寺], 동쪽에 가슬갑사(嘉瑟岬寺), 남쪽에 천문갑사(天門岬寺), 서쪽에 소작갑사(所鵲岬寺), 북쪽에 소보갑사(所寶岬寺)를 각각 지었는데, 역사가 다 끝난 시기가 567년이었다고 한다. 그 후 후삼국에 들어와서 오갑사가 없어질 때 천문갑사도 같이 없어졌다.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에서 남쪽으로 운문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2.5㎞ 지점에 사리암(邪璃庵)으로 올라가는 골짜기가 있고, 여기서 다시 상류 쪽으로 1㎞쯤 올라가면 4개의 계곡이 합류하는 지점에 닿는다. 이곳을 천문동(天門洞)이라 부른다. 두 계천(溪川)이 만나는 곳에 배 모양의 북쪽으로 튀어나온 구릉(岬)이 있으며, 이 구릉 위에 절터가 있다.

 

청도군은 1992년도의 문화 사업으로 가슬갑사지를 찾아 신라 화랑정신을 재조명하고 사적으로 가꾸어 민족과 조국의 번영을 도모하는 훈련 도장으로 만들기로 하였다. 이러한 문화 사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경북대학교 박물관과 청도군은 1992년 12월 3일 학술 용역을 체결하고 가슬갑사지 위치 조사에 착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오갑사의 하나인 천문갑사지를 조사하게 되었다. 천문갑사지로 추정되는 배 모양으로 튀어나온 구릉의 능선 위에는 강돌로 쌓은 석축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 동서 축 30m, 남북 축 13m 정도 되는 오각형에 가까운 형태의 평지가 있다. 평지 위에는 잘 다듬어진 동서 길이 23m, 남북 길이 10m 되는 건물터가 남아 있으며, 건물터의 기단으로 추측되는 돌들이 길이 9m, 폭 6m 가량 남아 있다.

 

이곳에서는 통일 신라의 유물로 추정되는 수막새, 암막새, 평기와 등이 채집되었다. 와편은 태선문이 대부분이며, 토시형 수키와와 함께 봉황문·연화문의 수막새와 당초문 암막새가 출토되었다. 이곳에서 채집된 기와 조각을 통해서 통일 신라의 절터로 추정되며, 현재 노출되어 있는 기단은 그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4. 신원리의 현대적 사찰인 천문사와 가슬갑사

 

운문면 삼계리에 위치한 천문사와 가슬갑사는 최근 새로 만든 사찰로 신라시대 원광법사의 화랑도 세속오계와 관련된 천문갑사, 가슬갑사와 관련이 없는 절이다. 천문사 주소는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50-3이다. 가슬갑사는 천문사와 가까운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데, 290m 정도 떨어져 있다.

 

가슬갑사와 천문사 옆의 하천을 따라 1.88km 올라가면 배넘이 고개가 나온다. 이 하천이 삼계리에서 신원천과 합류한다. 삼계리는 세 개의 하천이 모여 이루어진 계곡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재의 천문사(天門寺)는 신라시대 오갑사 중의 하나인 천문갑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천문사는 최근 새로 지은 사찰로 규모가 크며, 야외에 와불, 지장보살, 거대한 야외 불상들이 늘어서 있다. 삼계리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주로 불자들의 재를 올려 주 수입원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천문사 주지가 마을 주민들이 다니는 길에 큰 돌을 방치하여 항의를 받고 치운 적도 있다고 해 주민들과 사이는 원만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천문사 대웅전 내부 오른쪽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함께 찍은 영정 사진이 있었다. 동네 주민들에 의하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도 운문사를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 천문사를 방문한 적은 없다고 하였다.

 

가슬갑사는 비구니 사찰로 동네 주민의 일반 주택을 매입하여 절을 만들었다고 주민들이 얘기하였다. 현재 사찰의 모습도 한옥의 대웅전과 같은 전각은 없고, 평범한 일반 주택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지는 벽송 스님이다.

 

절에는 화랑오계 탄생지라는 커다란 비석이 있어 처음 방문하는 관광객은 가슬갑사 유적지로 오인할 수 있다. 가슬갑사 연혁비에 보니 1973년 박정희 대통령 때 화랑도의 세속오계를 전수해준 가슬갑사를 발굴 조사 후 성역화하고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운문산사적개발위원회’를 설치하였다고 나와 있었다. 청소년들의 정신적, 육체적 수련장으로 활용하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였으나 박대통령의 서거로 무산되었다고 하였다.

 

천문사와 가슬갑사가 있는 근처 마을 일대가 신라시대 가슬갑사 유적지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학계로부터 공인받은 것을 아니지만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가슬갑사 위치를 찾기 위한 학계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5. 삼계리 마을의 성황당과 문상덕 삼계리 반장

 

문복산 등산로 중간에 있는 가슬갑사 유적지를 답사하기 위해 삼계리 마을의 도로변에 주차하였다. 도로변에 삼계리 성황당이 있어 사진을 찍으며 자세히 둘러보았다. 성황당을 사진 찍으면서 이 마을의 반장을 맡고 있는 문상덕 씨를 만나게 되었다. 가슬갑사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가슬갑사 유적지로 올라가는 등산로를 상수원 보호를 위해 마을에서 통제하는지 물어보니 이제는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삼계리경로당 표지석 앞에 마을 공원이 있는데, 화랑도 세속오계 조형물,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문상덕 반장에 의하면 청도군민 체육대회가 있을 때 이곳에서 성화를 채화한다고 하였다. 전에는 마을의 구름아래 오토캠핑장에서 채화를 했는데, 화랑도 세속오계비 조형물을 설치한 이후에는 여기서 채화한다고 알려주었다.

 

문상덕 씨는 삼계리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이 37년 되었으며, 반장을 맡은 지도 18년째 되었다고 얘기하였다. 삼계리를 위해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 마을 유지다. 요즘 운문터널이 개통되어 꼬불꼬불하고 위험한 운문령 고개로 다니지 않아 안전하게 되었는데, 문상덕 씨는 전에 운문령 고개에서 휴게소를 운영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운문령 고개는 겨울철 눈이 내리면 도로가 얼어붙어 통행이 힘들었다고 하였다.

 

문상덕 씨는 휴게소를 운영하면서 눈이 내리면 도로의 눈도 치우고 모래를 뿌려 차량이 통행할 수 있도록 봉사활동을 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런 봉사활동으로 청도경찰서장, 청도군수 등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고 하였다.

 

‘청도신화랑풍류마을’에 대해 필자가 언급하니 삼계마을에 설치되어야 할 시설을 그곳에 빼앗겼다고 아쉬워하였다. 운문면 소재지 풍류마을을 설치하게 된 것은 면 소재지에 거주하는 유지들의 끝발에 밀렸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신화랑풍류마을’은 운문댐 바로 밑에 있는데, 거기에는 운문댐 하류보유원지와 상가단지가 있는 곳으로 이미 상업시설이 많고, 화랑도 세속오계 유적지도 없는 실정이다.

 

필자가 볼 때도 삼계리는 가슬갑사 유적지이고, 계살피 계곡, 오토캠핑장, 펜션, 문복산 등이 있어 항상 피서객, 등산객이 많이 방문하기 때문에 청도신화랑풍류마을은 이곳이 적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국책사업이 역사성, 관광자원성, 접근성 등 평가 지표를 무시하고 지역토호세력의 주장에 휩쓸려 선정한 것이 안타까웠다.

 

삼계리의 성황당은 바로 69호선 도로변에 있었다. 성황당 앞에 거대한 석장승이 두 개 있고, 훨씬 작은 석장승 두 개가 또 있어 총 4개였다. 건물 앞에는 한자로 성황당(城隍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건물 안의 위패도 성황지신위(城隍之神位)인데, 안내판은 서낭당으로 되어 있었다.

 

삼계리 부락은 해발 천미터를 넘는 문복산 가지산 운문산에 둘러싸여 천재 및 맹수들의 재앙을 방지하기 위해 성황당을 건립하였다. 삼계리는 신라 세속오계의 발상지요 후백제 견훤이 신라 침공을 위한 축성지며 임진왜란시 운문사 석남사 표충사의 승병 의거지이자 기미년 독립만세 운동의 발생지이다.

 

해방후 과도기 때 좌우 이념 대립으로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었고, 6.25 전쟁 동족상잔의 격전지로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바친 순국선열을 기리고, 역사적 변란의 재앙을 막기 위해 서낭신을 모신 서낭당을 세워 오랜 세월 동안 부락의 안녕을 기원해 왔다.

 

1970년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향인 홍영기 지도자는 초라한 서낭당의 모습을 일신시켜 이 자리에 옮겨 세웠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풍우상로(風雨霜露)의 침해로 서낭당이 도괴 상태에 이르러 삼계리 부락민들은 서낭당 재건 위원회를 구성, 동참자의 헌성금을 모아 2007년 4월 6일 이 자리에 정초 입주 상량하고 삼계리 서낭당을 재건하였다.

 

성황신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전래 신앙이다. 서낭당은 마을 주민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중요 시설로 성황제를 올리고 있다. 대부분의 성황신은 여성이다. 그러나 일부는 한 쌍의 여신과 남신이다. 강원도 성황당인 골매기성황당에서는 하나의 성황당 안에 두 성황신이 한 가족으로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삼계리의 성황신은 호랑이를 거느린 남신이다. 마치 사찰의 산신각에 있는 산신령과 유사하다. 성황당 앞에 석장승이 있는 것은 이정표 역할도 하고, 여행자들은 성황당 앞에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세 개의 돌을 놓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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