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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화랑도 세속오계와 가슬갑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슬갑사의 위치

 

삼국사기 제45권 열전 제5(三國史記 卷第四十五 列傳 第五) 귀산(貴山) 전에 귀산은 602년전투 중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 정신으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 열전에 원광법사로부터 세속오계를 전수받는 과정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원광법사가 수나라 유학을 다녀와서 가실사(加悉寺)에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귀산(貴山)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서 아버지는 아간 무은(武殷)이다. 귀산은 어려서부터 같은 부의 사람 추항(箒項)과 벗이 되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가 선비나 군자와 함께 교유하기를 기대하면서도,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는다면 욕됨을 면치 못할까 두려우니, 어찌 어진 사람 곁에서 도를 배우지 않겠는가?”

 

당시에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수나라에 유학을 다녀와서 가실사(加悉寺)에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에게 높은 예우를 받고 있었다.

 

귀산 등이 그 문하에 이르러 옷자락을 여미고 나아가 말하였다.

“속세의 선비가 어리석고 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사오니, 한 말씀 해주시어 종신토록 계율로 삼게 해주소서.”

 

법사가 말했다.

“불가의 계율에 보살계(菩薩戒)가 있어 그것이 열 가지로 구별되어 있으나, 그대들이 남의 신하로서는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으니, 첫째 임금을 섬기는 데는 충성으로 하고, 둘째 부모를 모시는 데는 효성으로써 하고, 셋째 벗과 사귀는데 신의로써 하고, 넷째 전쟁에 임하여서는 물러서지 않으며, 다섯째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 그대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함이 없게 하라!”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 원광서학(圓光西學)에 가슬갑사의 위치에 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일연 스님은 운문사 동쪽 9천 보쯤 되는 곳에 가슬현에 있는데,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다고 하였다.

 

그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가슬갑(嘉瑟岬)[가서(加西)라고도 하고 또 가서(嘉栖)라고도 하니 모두 우리말이다. 갑(岬)을 세속에서는 곳(古尸)이라 하기 때문에, 곳절(古尸寺)이라 하니, 갑사(岬寺)라는 말과 같다. 지금 운문사(雲門寺) 동쪽으로 9천 보쯤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가슬현(嘉瑟峴)이라고도 한다.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는데 바로 이곳이다.]

 

원광법사가 가슬갑사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찾아가서 이렇게 아뢰었다.

“세속의 선비라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부디 한 말씀 내려주시면 평생 명심하여 실천하겠습니다.”

 

2. 점찰법회와 운문사 사적에 나오는 가슬갑사의 위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운문사 동쪽 9천보 되는 곳에 가서현(加西峴)이 있으며, 현의 북쪽에 가슬갑사가 있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원광은 가슬갑사에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고 점찰보(占察寶)를 두었으며,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 점찰법회(占察法會)는 무교의 점복 행위와 유사한 방법으로 점을 쳐서 과보의 차별을 살피고 그에 따라 참회 수행하게 하는 법회였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무교에서는 신의 뜻에 좌우된다고 보고 그것을 점쳐서 살피고자 하였다면, 불교에서는 그것을 숙세의 과보로 보고 참회하고 선업을 지어 내세를 밝힐 것을 가르친 것이다. 점찰법은 업설에 입각하여 숙업에 대한 참회를 강조하였다.

 

점찰법회는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 근거하는데, 이 경은 중국에서 지어진 위경(僞經)으로 여겨지고 있다. 『점찰경』 상권에서는 불멸 후 악세에서 출가·재가 중생이 세간과 출세간의 인과법에 대하여 확고한 신심을 내지 못하고 여러 가지 장애를 만나 의혹이 일어나거든 ‘목륜상법(木輪相法)’을 써서 선악의 숙세(宿世)의 업과 그 과보를 점찰하여 참회 수행할 것을 설하였다.

 

처음 점찰법으로 교화한 승려는 원광이었다. 그는 600년(진평왕 22) 수나라에서 귀국한 뒤 ‘귀계멸참(歸戒滅懺)’의 법으로 가서갑(嘉栖岬)에 점찰보(占察寶)를 두고 항규로 삼아 점찰법회를 설행하였다. 원광은 삼기산에서 수행하던 중 신술(神術)을 행하는 신을 접하고 그의 권유로 중국에 구법하였으며 그의 부도도 삼기산에 있다고 전한다.

 

원광은 무교 신앙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점찰법에 관심을 두고 교화 방법으로 삼았을 것이다. 또한, 왕의 질병에 밤마다 심오한 법을 말하고 계를 받게 하여 참회하게 했더니 왕이 크게 신봉하였고 드디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것 역시 귀계멸참의 법을 설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점찰보는 현전하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우리나라 보 가운데 최초의 것으로, 진평왕 때의 고승이었던 원광(圓光)이 가서사(嘉栖寺)에다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설치시기는 알 수 없다.

 

설치목적 또한 분명하지 않지만, 점찰법회를 운영하기 위한 재원으로서의 기금을 마련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원광이 설치한 점찰보에 어느 정도의 기금이 모였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한 청신녀(淸信女 : 女信徒)가 이 곳에 전답 100결(結)을 시납하였으며 그것이 고려 후기까지도 보존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원광의 점찰보는 이 100결의 전답을 기금의 일부로 하고, 이를 경작하여 얻어지는 생산물을 법회의 운영자금으로 활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호거산(虎踞山)의 흉맥을 진압하기 위하여 대작갑사를 세웠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나머지 네 개의 갑사는 동서남북 갑지에 흉맥을 진압하기 위해 세웠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오갑사는 신라 수도인 경주의 서쪽 방어를 위한 군사, 교통의 요충지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가슬갑사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하천과 관련이 있는 갑(岬)이 될 수 있는 지형적 조건, 점찰법회를 열었던 만큼 교통의 요지이며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넓은 장소가 요구되며, 산릉의 흉맥을 진압하기 위해 세운 사찰인 만큼 지맥의 끝이 되는 갑지라는 비보적 조건을 갖춘 곳이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요건을 갖춘 곳은 현재 바깥 삼계리 일원을 비롯한 몇 군데로 추정되고 있으나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3. 오갑사의 폐사

 

신라시대 이래 이 군의 사원으로서 작갑사 이하 크고 작은 사원은 삼국이 난리로 인하여 망해갈 즈음 대작갑, 소작갑, 소보갑, 천문갑, 가서갑 등 5갑의 절이 모두 파괴되고, 5갑의 기둥을 합쳐서 대작갑사에 두었다.

 

조사 지식(知識: 위의 글에서는 보양이라고 하였음)이 대국에서 불법을 전수받고 돌아오다 서해 가운데 이르렀을 때 용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고 금실로 수놓은 비단가사 한 벌을 주었다.

 

겸하여 한 아들 이목을 주어 받들어 모시고 뒤따라가게 하면서 부탁하기를, “지금 삼국이 소란하여 불법에 귀의한 군주가 없지만, 만약 내 아들과 더불어 본국의 작갑으로 가서 절을 짓고 거처하면 적병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몇 년 안에 반드시 불교를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 삼국을 안정시킬 것이요.”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서로 이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스스로 원광이라고 일컫는 노승이 인궤(印櫃)를 안고 나타나서 전해주고 사라졌다. [살피건대 원광은 진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개황 연간에 동쪽으로 돌아와서 가서갑에 머무르다가 황룡사에서 죽었으니, 계산해 보면 청태 초에 이르기까지 무려 300년에 달함. 이제 여러 갑사가 모두 황폐한 것을 비탄하다가 보양이 와서 장차 일으키려고 한 것을 기뻐하여 고한 것이리라].

 

이에 보양이 황폐해진 절을 일으키려고 북령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5층 황탑이 있었으므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자취가 없었다. 다시 올라가서 바라보자 여러 마리의 까마귀가 땅을 쪼고 있었다. 이에 바다의 용이 작갑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찾아 파보니 과연 무수한 벽돌이 남아 있었으므로 모아서 높이 쌓아 탑을 완성하자 남은 벽돌이 없었다.

 

이에 이곳이 전대의 절터였음을 깨닫고 절을 세워서 건주하며 인하여 작갑사라고 이름하였다. 얼마 후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법사가 이곳에 절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듣고 5갑의 전답 500결을 합하여 이 절에 주고, 청태 4년 정유에 운문선사란 액호를 내렸으며 가사의 영음을 받들었다.

 

이목이 항상 절 옆에 작은 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도왔는데, 어느 해 갑자기 가뭄으로 밭의 채소가 타게 되자 보양이 이목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다. 그러자 한 경내에 흡족하게 비가 내렸는데, 천제가 자신도 모르게 하였다며 장차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목이 법사에게 급히 고하였다. 법사가 이목을 상 아래에 숨겼는데, 얼마 후 하늘의 사자가 뜰에 이르러서 이목을 내놓으라고 청하였다.

 

법사가 뜰 앞에 있는 배나무를 가르키자 벼락을 내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벼락을 맞은 배나무는 부려졌는데, 용이 어루만져주자 즉시 소생하였다(또는 보양이 주술로써 살렸다고 함). 그 나무가 근년에 쓰러지자 어떤 사람이 방망이를 만들어서 법당과 식당에 두었는데, 그 방망이 자루에 명(銘)이 있었다.

 

신라말의 혼란기에 오갑사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후삼국 시기에 견훤과 왕건이 패권을 다투면서 전란이 격화되었고, 후백제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인 청도 지역이 전투의 피해를 보게 되면서 오갑사가 대부분 파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가슬갑사의 위치 학술조사

 

경북대 박물관(관장 윤용진)은 청도군으로부터 용역을 받아 1993년 한 해 동안 실시한 가슬갑사지 지표조사와 문헌조사 보고서를 통해 운문산의 중앙부에 해당하고 운문령에서 발원하는 바깥 삼계리천과 문복산에서 발원하는 개살피계곡과 합치되는 산곡지인 바깥 삼계리가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폐사가 돼버린 가슬갑사의 터로 추정했다.

 

경북대 박물관은 지표조사를 통해서는 가슬갑사지의 유구 확인에는 실패했으나 운문사(옛이름 대작갑사) 동쪽으로 구천 걸음쯤 떨어진 곳에 고개가 있고 이 고개 북쪽에 가슬갑사가 있었다고 기록된 삼국유사 등 문헌자료를 종합분석해서 위치를 규명했다.

 

경북대 박물관은 조사보고서에서 가슬갑사는 산간불교의 도장으로서 존재하면서 한편으론 산중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이정표와 가야지방의 교화를 위해서 또 신라 호국불교의 도장으로서 역할을 했으나 삼국통일 이후 시대적 변화에 따라 이러한 조건이 사라지고 자연히 역할도 쇠퇴한 것으로 분석하였다.

 

청도군의 용역을 받아 2004년 이 일대에서 토기 요지(窯址)를 발굴한 중앙승가대 불교사학연구소가 펴낸 발굴조사 보고서를 통해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50번지와 42번지 일대가 원광 스님이 세속오계를 설한 가슬갑사지로 추정된다고 발표하였다.

 

불교사학연구소는 보고서를 통해 신원리 42번지 일부 지역에서 통일신라시대 토기를 생산하던 요지 1기와 재 폐기장 2곳, 요지와 관련된 석축 기단 1개소 등 생산·공방 유적을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사지(寺址)와 관련된 유구나 문화층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이 일대가 사원 또는 사하촌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불교사학연구소는 폐사된 지 1,000여 년이 지났고, 자연적·인위적으로 지형이 삭토·교란된 점 등을 들어 폐사지가 완전히 유실된 것으로 보고, 사지의 원 위치를 42번지 남쪽 산구릉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러한 조사들은 확실하게 검증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5. 가슬갑사 표지석이 있는 곳 답사

 

운문터널을 나와 국지도 69호선을 따라 운문사 방향으로 가다가 청도군 운문면 삼계리에서 ‘청도가는길 커피 펜션’ 건너편의 ‘삼계리 경로당’ 표지석이 있는 골목으로 접어들면 등산로 안내판이 나온다. 문복산 등산로를 따라서 약초농원 방향으로 가면 된다. 약초농원 입구 안내 표지판에 나온 대로 약초농원에 들어가지 않고 계곡 옆으로 난 등산로로 가면 된다.

 

문복산 등산로 표지판을 따라 계곡을 건너가면 커다란 돌로 다져진 등산로가 나온다. 등산로 왼쪽 아래는 계살피계곡으로 작은 폭포와 소가 있다. 돌 너덜길이 반복되는 등산로로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가슬갑사 표지석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 표지석을 지나서 계속 올라가면 문복산 등산로와 연결된다. 오른쪽 등산로는 산 중턱으로 나 있는데 문복산으로 갈 수 있다. 계곡 상류에서 이 두 등산로는 결국 만나게 된다.

 

필자는 무더위가 절정인 지난 8월 14일 오른쪽 등산로로 올라갔다. 이곳은 등산객이 거의 다니지 않아 조용하다. 힘든 오르막도 없고 평탄한 등산로다. 길에는 산악회 등산 리본이 이따금씩 보여 길을 알려주고 있다. 처음 가는 길인데, 가슬갑사 표지석이 나오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올라가니 예상한 대로 계곡이 나오고 멋진 폭포가 있었다.

청년들 일행 여러 명이 폭포에서 물놀이하고 있어 물어보니 필자와 반대로 문복산 방향에서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하였다. 신라시대 화랑도의 세속오계와 관련 있는 가슬갑사 표지석 있는 곳을 물어보니 모른다고 하였다. 계곡을 건너 반대편으로 가니 등산로와 이정표가 있었다. 가슬갑사 표지석이 있는 곳은 문복산 방향과는 반대로 하산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좌측의 계살피계곡에는 아름다운 폭포와 소가 계속 나타나 사진을 찍었다.

 

등산객이 이따금 나타났는데, 계곡에서 혼자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도 있고, 계곡의 물을 거슬러 올라 문복산 방향으로 가는 일행도 있었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예상대로 가슬갑사 표지석이 나왔다. 등산로에서 우측으로 올라가니 옛날 가슬갑사가 있었던 유적지가 나왔다. 입구에는 무너진 돌탑이 보이고, 우측으로 커다란 돌탑이 있었다. 돌탑 뒤로 올라가니 수도자가 기도하던 제단이 나왔다.

 

이병길 씨의 2017년 8월 16일 답사기에 보니 김유신 장군의 후손이 이곳에서 돌탑을 쌓으며 기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손은 평소에 충청도에서 명리학을 공부하다가 꿈에서 김유신 장군을 만나 현몽을 받고 조상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하였다. 이번 답사에서 이 수도자를 만나기를 기대하였는데,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는 ‘남부지방산림청 구미국유림관리소’에서 경작, 분묘 설치 등 불법 행위를 금지한다는 안내 팻말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기도자가 사용하던 낡은 돗자리, 녹슨 가스통, 폐비닐 등도 방치되어 있었고, 물통, 냄비, 망가진 휴대용 가스레인지 등이 바위 틈에 숨겨져 있었다. 바위 절벽 앞의 제단에는 향로가 쓰러져 있어 필자가 뚜껑을 찾아 덮어서 바로 세워놓았다. 수도자가 더이상 이곳에서 생활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병길 씨가 6년 전 답사했을 때 김유신 장군 후손인 수도자가 절터를 반듯하게 정리하면서 발견한 도자기 파편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번에 둘러보니 보이지 않았다. 필자는 작은 도자기 파편 하나만 발견하였다. 절터에서 도자기 파편이 보이고, 주변에 신우대가 자라는 것을 보니 이곳에 옛날 절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가슬갑사 절터는 등산로에서 약간 산 위로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된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은 가슬갑사 유적지를 잘 모르고 관심도 갖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계단 위로 올라가면 큰 돌탑이 나오고, 평지에 올라서면 왼쪽에 약간 무너진 작은 돌탑이 있다. 더 올라가서 축대로 만든 큰 건물지에 오르면 입구에 작은 돌탑이 있고, 앞에 정교하게 쌓은 커다란 돌탑이 있다. 기도처로 오르는 돌계단도 있다.

 

다만 1400여 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원광법사가 점찰법회를 열고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한 가슬갑사가 있었던 곳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절터는 남향으로 햇빛이 잘 들었다. 사지(寺址)가 아주 넓지는 않았지만 바로 앞의 계곡에 물도 풍부하고, 삼계리와도 그리 멀지 않아 조용한 환경에서 수행하기에는 알맞은 곳이었다.

 

이번 가슬갑사 사지 답사 과정 중 삼계마을에서 마을주민 문상덕 씨를 만나서 주요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오전에 올라갈 때도 만나고 답사 후 오후에 내려올 때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편에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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