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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신라시대 원광법사가 중창한 청도 대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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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신라시대 원광법사가 중창한 청도 대비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대비사는 화랑도 새속오계를 전수한 원광법사와 인연

대비사는 경북 청도군 금천면 박곡길 590에 있는 전통사찰로 신라시대 원광법사가 중창한 인연을 맺고 있다. 유난히 더운 올해 여름을 맞이하여 김유신 장군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아 답사를 하고 있다. 신라의 화랑도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었으며, 화랑도가 지켜야 할 계율인 세속오계를 전수해준 원광법사는 신라 화랑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폭염을 무릅쓰고 지난 7월 30일, 8월 14일 두 번에 걸쳐 청도군의 화랑 유적지, 대비사를 다녀왔다.

양산시에서 대비사로 가기 위해서는 35번 국도, 또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를 나와 언양을 거쳐 석남사 가는 방향으로 올라가서 운문터널을 빠져나가 운문면의 운문댐, 청도 화랑풍류마을 거쳐 금천면으로 가면 된다. 대비사에 가까워질 때 박곡리 마을을 지나가는데, 보물 박곡리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그리고 조금 올라가면 한국농어촌공사에서 관리하는 대비저수지가 나온다. 저수지 옆을 지나 올라가면 대비사가 나온다.

대비사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이곳 사찰은 신라 진흥왕 18년(557년)에 한 신승이 호거산(虎踞山)에 들어와 3년 동안 수도 후 560년(신라 진흥왕 21년)부터 절을 짓기 시작하여 7년 동안 5갑사[대작갑사(大鵲岬寺), 가슬갑사(嘉瑟岬寺), 소작갑사(小鵲岬寺), 천문갑사(天門岬寺), 소보사(所寶岬寺)]를 완성하였는데, 중앙의 대작갑사(大鵲岬寺 현 운문사)를 중심으로 서쪽의 소작감사(小鵲岬寺) 또는 대비감사(大悲岬寺)라고 한 5갑사 중의 하나로 600년(진평왕 22년) 원광국사(圓光國師542~640)가 중창하였다.

이 사찰의 이름을 대비사(大悲寺)라고 한 것은 불교의 대자대비(大慈大悲)라는 뜻으로 지어진 것이라고도 하며, 일설에는 당시 신라 왕실의 대비가 수양차 이 절에 와서 오랫동안 지냈기 때문에 소작갑사를 대비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도 한다.

당초에는 박곡리 마을에 있었으나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고, 11기의 고승대덕(高僧大德)의 부도가 이곳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1685년(숙종 11년)에 중건한 대웅전은 보물 제83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또한 박곡리에 보물 제20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 석가여래좌상(石迦如來坐像)은 석굴암 불상과 같이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불상 중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주요 전각은 대웅전(大雄殿), 삼성각(三聖), 향로각 등이다.

오갑사는 공통된 표기인 ‘갑사(岬寺)’라는 명칭을 통해 계곡 사이에 위치한 사찰 또는 풍수상의 요지에 위치한 사찰로서 오갑사가 있는 입지 조건은 매우 유사하다. 특히 오갑사는 사찰로서의 역할 이외에도 신라의 서쪽 변방 요충지인 비보지(裨補地)나 또는 교통상 요충지로서의 기능을 함께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삼한이 어지러울 때 대작갑사, 소작갑사, 소보갑사, 천문갑사, 가슬갑사 등 다섯 갑사가 모두 파괴되어 다섯 갑사의 기둥을 대작갑사에 모아 두었다고 하는데, 현재 오갑사 중 유일한 현존 사찰은 운문사와 대비사뿐이다. 대비사에는 17세기에 중창된 법당인 보물 대웅전과 영산회상도, 그리고, 삼성각 등이 있다.

 

2. 대비사 부도

 

대비사 부도들은 현재 대비사 동쪽 부근에 있다. 대비사에 도착하면 절에 들어가기 전에 왼쪽으로 계곡을 따라 조금 가면 천진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가면 대비사 부도전이 있다. 부도전에 대한 안내 표지판이 없어 방문자들이 그냥 지나치기 쉽다.

여기에 있는 부도탑들은 대비저수지를 축조하면서 수몰을 피해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대부분 석종형(石鐘形)으로 6기에 승탑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명문이 남아 있다. 복발형과 석종형 등 다양한 형식을 보이고 있어 장기간에 걸쳐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요 선사[逍遙], 취운 대사[翠雲], 수월 대사[水月] 등의 부도명이 남아 있다. 부도들은 총 16기가 2열로 배치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2기는 연화대좌 등의 석조물을 모아 조립한 것이다. 원래 부도들은 대비지 부근에 있었으나, 댐 건설로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현재의 부도전은 2004년 조성된 것으로 부도전과 부도가 있는 곳을 경계로 다리 천진교(天眞橋)가 놓여 있어 표지판을 대신하고 있다. 2010년 부도전 뒤 자연 암벽에 천진보탑 불사가 이루어졌다.

 

부도에 남아 있는 소요 선사, 취운 대사, 수월 대사 등의 부도명을 통해 조선 시대 고승들이 현재의 대비사에 머물려 수행하고 자주 왕래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3. 대비사 성보문화재 학술대회와 출토 유물

 

청도 대비사[(주지 지연(智然) 스님)]는 2018년 11월 23일 오후 1시 30분부터 청도군 청소년수련관 다목적홀에서 ‘청도 대비사의 역사와 문화’라는 주제로 대비사의 성보문화재에 대한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학술대회는 강대선 한국문화유산연구소 팀장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지연 스님의 환영사와 김경호((재)한국문화재연구소) 원장의 축사를 시작으로 주제 발표가 이어졌다.

 

주제 발표는 김복순(동국대학교 국사학과) 교수의 ‘대비사의 역사와 오작갑사’, 오세덕(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의 ‘대비사의 건축’, 송은석(동국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의 ‘대비사의 건축’, 김미경(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의 ‘대비사의 회화’, 강상진(한국문화재) 연구원의 ‘대비사의 발굴성과와 현황’으로 이어졌으며 주제 발표에 이어 종합토론도 진행되었다.

 

‘청도 대비사(大悲寺)의 연원과 역사적 배경’을 주제로 발표한 김복순 교수는 소작갑사의 연원을 신라시대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고려시대까지 살피고, 조선시대 대비사에 대해 고찰하였다. 오세덕 교수는 ‘대비사의 가람배치 변화와 대웅전의 건축적 특징’을 주제로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전모가 확인된 사역을 중심으로 대비사의 가람배치 변화를 창건기 가람과 조선시대 가람으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대비사 대웅전이 주로 사례가 적은 고대 건물의 탑지에서 확인되는 형식임을 밝히며, 건축적 특징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송은석 교수는 ‘청도 대비사(大悲寺) 석조석가불좌상 연구’라는 주제로 조선 후기 경상도 지역의 불상을 특징짓는 불석(佛石)이라는 재료와 승호(勝湖)라는 조각승을 통해 대비사 석가상의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하였다.

 

김미경 문화재 감정위원은 ‘청도 대비사의 회화’라는 주제로 17∽18세기 대비사의 불사 현황을 통해 성보문화재를 살피고 그 중 대비사 영산회상도의 제작과 제작자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대비사 영산회상도의 제작자 중 의균을 통해 팔공산화파의 양식적 특징도 분석하였다.

 

강상진 연구원은 ‘청도 대비사(4차) 발굴조사’를 주제로 지금까지 이루어진 대비사의 발굴과 조사현황을 살피고 최근 대비사 4차 발굴조사 시 출토된 유물을 통해 유구들의 조성시기를 판단하였다.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대 사역을 통해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중심으로 한 오갑사 중 소작갑사(대비갑사)의 위치 규명에 대한 실마리와 대비사의 창건 시기도 재조명하였다.

 

학술대회는 대한불교조계종 대비사가 추최하였으며 한국문화유산연구소와 경주대학교박물관이 주관하였다. (재)한국문화재 연구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동화사, 청도사찰연합회가 후원하였다.

 

대비사 경내에는 사천주금당지 출토 유물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2013년 8월 13일부터 10월 7일까지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박물관에서 조사한 결과 명문 막새외 15점이 발굴되었다. 2018년 7월 27일부터 2018년 10월 5일까지 (재)한국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하였을 때 암키와편 외 50점이 발굴되었다.

 

4. 보물인 박곡리 석조여래좌상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295번지에 보물인 박곡리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금천면에 있는 대비사를 답사하기 위해서 운문사가 있는 운문면을 거쳐 올라가면 대비사 가까운 곳에 박곡리라는 마을이 있고, 바로 길옆 오른쪽에 박곡리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청도 박곡리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때의 석불로 박곡리 미륵당 마을 중앙에 보호각을 세워 봉안하고 있다. 1928년 화재로 불상의 머리와 손, 광배, 대좌 등의 박락이 심하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0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불상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석조 여래 좌상이 위치한 박곡리 마을 안의 미륵당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소작갑사지(小鵲岬寺地) 혹은 대비갑사지(大悲岬寺地)로 추정되고 있으나 주변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없어 단정하기 어렵다. 보호각 앞에는 고려 시대 석탑 1기가 서 있다. 또한 연꽃무늬와 넝쿨무늬가 새겨진 석조 광배(光背)가 훼손된 상태로 마당에 남아 있지만, 석조 여래 좌상과의 연관성 여부는 알 수 없다.

 

전체 높이는 2.76m이고, 불상 높이는 1.54m이다. 얼굴이 심하게 훼손되어 눈, 코, 입의 일부만이 관찰된다. 목에는 생사를 윤회하는 인과(因果)를 나타내는 3줄의 삼도가 표현되었다. 넓고 당당한 어깨와 살이 오른 가슴, 잘록한 허리 등 전체적으로 강건함과 안정감을 준다. 왼쪽 어깨를 감싸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의 법의는 신체의 굴곡에 따라 밀착하여 흘러내려 다리까지 이어진다.

 

손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악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깨달음에 이른 순간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결가부좌한 두 다리에는 돋을새김으로 옷 주름을 표현하였으며, 양 다리 사이에는 부채꼴의 옷자락이 표현되어 있다. 대좌 또한 박락이 심하나 전형적인 통일 신라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중대석에는 탱주가 새겨져 있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다.

 

청도 박곡리 석조여래좌상은 양식적으로는 균형 잡힌 신체 비례, 공간 분리를 통한 유기적인 신체 표현, 풍부한 살붙임 등 통일 신라 석굴암 불상을 잇고 있는 전성기 조각으로 볼 수 있다. 도상학적으로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에 이르는 장면을 표현한 우견편단의 항마촉지인 여래 좌상으로, 이것은 인도와 중국을 거쳐 통일 신라 시기 전반에 걸쳐 유행한 도상이다.

 

필자가 8월 14일 답사하였는데, 마당에 잡초가 많아 풀을 직접 뽑고 사진을 찍었다. 옥잠화도 피어 있어 아름다웠다. 옆의 농가 건물 담벼락의 돌담장이 일부 무너지고 있어 위태롭게 보였다. 보호각 안에는 초와 향이 구비되어 있어 촛불을 밝히고 향도 피운 후 합장 배례하였다.

 

과거 불상이 이웃 건물의 화재로 인해 불타서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불상을 보면 부처님의 가피가 한없이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에 있는 절터에 통일신라 때 조성되었다고 여겨지는 불상과 대좌, 그리고 광배까지 남아 있어서 운문사 사적에는 대비갑사라고 되어있지만 ‘삼국유사’의 내용대로 하면 원래 ‘소작갑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 아닐까 주목되고 있다.

 

지금까지 ‘소작갑사’의 위치 또한 박곡리의 이 절터를 비롯해 총 세 곳이 가능성 있는 곳으로 언급되어왔다. 1993년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펴낸 ‘가슬갑사지 지표조사 보고서’에서는 ‘운문사사적’에 언급된 ‘대비갑사’의 위치를 토대로 이 절터, 이 절터에서 1㎞ 떨어진 ‘베틀바위 부근 사지’, 이 절터에서 1.5㎞ 떨어진 ‘오봉리사지’를 ‘소작갑사지’일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추정하였다.

 

‘베틀바위 부근 사지’는 박곡리 산81번지 일원인데,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2012년 펴낸 ‘한국의 사지’에 ‘소작갑사지’로 보고된 바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불상대좌의 지대석과 하대석, 석불좌상의 하반신이 남아 있고 선문 와편 등이 산재되어 있다. ‘오봉리사지’는 오봉리 1114-1번지 일원이다. ‘한국의 사지’ 보고서에 의하면 과수원 내에 석탑재 1매가 있고 당초문, 연화문 와편 및 선문 와편 등의 유물이 산재되어 있다고 한다.

 

5. 꽝철이 전설

 

‘꽝철이’는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대비사(大悲寺)에 전해지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꽝철이에 대한 전설이다. 유증선이 전병만[65세, 남,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면 안인동]에게 채록하여 1971년 발간한 『영남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또한 청도군에서 1981년에 발간한 『내 고장 전통문화』와 1991년에 발간한 『청도 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꽝철이’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말하는데, 지역에 따라 ‘강처리’, ‘깡처리’, ‘깡철이’라고도 부른다.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에 자리한 대비사에도 ‘꽝철이’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호거산 북편 대비사골에 위치한 대비사에는 상좌(上佐)가 한 사람 살았다. 어느 해 가뭄으로 온 마을 주민들이 고충을 겪고 있을 때 대비사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에 처하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상좌가 가꾸는 채소밭만은 가뭄이 들지 않았다. 주지는 상좌의 밭에 있는 채소들만 시들지 않은 것이 이상하여 상좌를 의심하였다. 그런데다 매일 밤 상좌 중에 슬며시 절을 나가는 것도 이상하였다. 상좌가 밤마다 향하는 곳은 운문사 계곡 깊은 곳이었다.

 

상좌는 용이 되어 승천할 날만을 기다리며 계곡 안쪽에 큰 못을 만들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상좌가 절을 빠져나가자 주지가 몰래 뒤를 밟았다. 한참을 따라가다 보니, 상좌가 막 용으로 변하고 있었다. 주지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였다. 그 순간 승천하려던 용은 사람의 인기척에 그만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꽝철이가 되고 말았다.

 

꽝철이가 된 상좌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일이 무산이 되자 원통하고 화가 치밀어 꼬리로 바위들을 세게 내리쳐서 깨버렸다. 이것이 대비사 뒤쪽 호거산 봉우리 사이에 깨져 있는 듯한 형상의 ‘깨진 바위’이다. 심통을 실컷 부리고 난 뒤 꽝철이는 운문산 능선을 넘어 경상북도 밀양시 산내면으로 달아났다.

 

이때 꽝철이가 새로 터를 잡은 곳이 ‘시례 호박소[실이 호박소]’라고 전한다. 이후 사람들은 가뭄이 들면 시례 호박소에서 꽝철이를 쫓기 위한 기우제를 올렸다. 꽝철이가 대대로 불을 일으켜서 가뭄을 관장하는 도깨비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화가 난 꽝철이가 불을 내뿜고 다녀 가뭄이 든다고 믿었다.

 

그래서 ‘꽝철이의 가을’이라고 하면 ‘흉년’을 뜻하였고, ‘꽝철이가 가는데 가을도 봄 같다.’라고 하면 그해 농사가 모내기 전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로 흉년이 된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상좌가 승천하기 위해 만든 못 근처에 있는 마을은 ‘못골’이라 하였다. 지금의 대비사골에서 호거산 능선을 너머에 위치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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