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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 운문사와 화랑도의 세속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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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화요칼럼 운문사와 화랑도의 세속오계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운문사와 화랑도 유적

운문사는 호거산 아래 넓은 장군평의 평지 자락에 있는 고찰이다. 산지 가람에 속하는 운문사는 형태면에서는 평지 가람으로 배치되어 있다. 남쪽은 운문사, 북동쪽은 호거산, 서쪽은 억산과 장군봉이 돌아가며 절을 감싸고 있다. 이 모양이 연꽃 같다고 해서 흔히 운문사를 연꽃의 화심(花心)에 비유하기도 한다.

운문사 매표소에서 운문사까지 1.2km 정도 거리의 산책로에는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늘어서 솔바람길이라 하는 데 매우 아름답다. 가을에는 소나무 아래에 상사화인 꽃무릇이 붉은 꽃을 피워 장관을 이룬다. 노송들이 시원스레 뻗어 올라 소나무 터널을 이룬 솔밭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며 힐링을 할 수 있다. 소나무 아래에는 껍질을 벗긴 깊은 상처가 드러나 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다.

소나무 숲을 걷다 보면 솔바람길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잠시 명상을 할 수도 있다. 호흡을 가다듬고 귀를 기울이면 운문천으로 흘러가는 물소리도 들린다. 운문천 건너편은 신라시대 화랑도들이 무예를 연마하던 연병장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세상을 초탈한 청정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하는 곳이어서 평화롭기만 하다.

운문사로 들어가는 입구인 범종루에는 호거산운문사라는 편액이 붙어있고, 오른쪽 기둥에는 운문사승가대학, 왼쪽 기둥에는 한문불전대학원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대웅전 뒤의 암봉이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라 호거산이라고 한다. 지룡산을 호거산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수령이 500년 넘은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처진 소나무‘가 반갑게 맞이한다. 사방으로 나뭇가지가 뻗었고 곳곳에 가지를 지탱하기 위한 지지대가 세워져 있다. 매년 봄이면 뿌리가 땅에 잘 밀착될 수 있도록 열두 말 가까운 막걸리를 부어준다고 한다. 둥글고 낮게 가지를 드리웠으나 여전히 푸르른 것이 500여 년의 세월을 무색하게 하며 운문사를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다.

560년(진흥왕 21) 한 신승(神僧)이 대작갑사(大鵲岬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591년(진평왕 13) 원광(圓光)이 크게 중건하였다. 원광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이곳에서 아주 가까운 가슬갑사(嘉瑟岬寺)에서 귀산(貴山) 등에게 주었다고 전한다.

운문사 경내에는 화랑도와 관련된 유적이 있다. 대웅전 벽화에는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의 요청에 따라 화랑도가 지켜야 할 계율인 세속오계를 전수하는 벽화가 있다. 대웅전 뒤에는 화랑오계비가 있다. 원래는 이 비석이 산문 밖에 있었으나 경내로 이전했다고 한다. 화랑오계비가 있는 화단은 화랑동산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운문사에는 원광화랑연구소가 있다. 천년고찰 청도 호거산운문사부설 <원광화랑연구소>의 설립 목적은 다음과 같다. 원광법사의 불교사상과 세속오계정신에 대한 연구와 신라 화랑정신문화의 전반을 연구한다. 인류가 나아가야 할 정신문화를 탐구한다. 21세기 불교문화의 신청년 정신의 패러다임을 창출하여 사회에 실천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신라 원광(542~640)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준 세속오계가 초기불교 영향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세속오계가 유교, 불교, 유불선, 고유전래사상 영향이라는 주장은 있었지만 이같이 초기불교에서 연원한다는 주장은 처음이어서 눈길을 끈다. 임승택 경북대 철학과 교수는 운문사 원광화랑연구소가 2014년 5월 25일 운문사 선열당에서 개최한 제1회 학술세미나에서 세속오계와 초기불교의 연관성에 대해 고찰했다.

이날 ‘초기불교에 비추어본 세속오계의 배경과 근거’란 논문을 발표한 임 교수는 먼저 신라의 국가적 번영과 불교의 융성이 서로 맞물려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세속오계는 ‘삼국유사’에 언급됐듯 당시 젊은이들에게 ‘남의 신하된 자(爲人臣子)’가 지켜야할 계율을 줌으로써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하는 정신적 토대가 됐다.

 

이후 통일신라는 화려한 불교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였으며, 이같은 거시적인 맥락에서 세속오계의 연원을 규명해 들어간다면 당연히 불교 쪽에 무게중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원광법사가 중국에서 수학했다고 전해지는 ‘대반열반경’과 초기불교의 아함경에 세속오계의 연원이 됐을 수 있는 구체적인 내용들을 소개했다.

 

특히 ‘세기경(世紀經)’의 ‘어질고(仁), 조화롭고(和), 자애롭고(慈), 효순하고(孝), 충성스럽고(忠), 순종적(順)’이라는 구절을 꼽았다. 이 내용은 전륜성왕 치세와 관련해 등장했을 뿐 아니라 세속오계 조목들과도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 따라서 원광법사가 ‘아함경’을 수학했다는 역사 기록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이 구절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세속오계를 제정할 당시 이 내용을 떠올려 참고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임 교수 주장이다.

 

2. 화랑도의 세속오계를 만든 원광법사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에 보면 원광법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원광서학(圓光西學) : 원광이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

 

당나라 『속고승전(續高僧傳)』 제13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신라 황륭사(皇隆寺, 황룡사(皇龍寺)를 말한다.)의 승려 원광(圓光)의 속세의 성은 박씨이다. 본래 삼한(三韓, 변한·진한·마한을 말한다.)에 살았는데, 원광은 바로 진한 사람이다. 대대로 해동(海東)에 살면서 조상의 풍습이 오랜 세월 동안 계승되어 왔다.

 

원광의 기량은 넓고 컸으며 글을 매우 좋아하여 노장학과 유학을 두루 섭렵하였고 제자서와 역사서를 연구하였다. 그는 문명을 삼한에 크게 떨쳤지만, 해박하고 풍부한 것은 오히려 중국에 비해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드디어 친구들과 작별하고 분발하여 해외로 나가기로 하였다. 나이 25세에 배를 타고 금릉(金陵)으로 건너갔다. 그 당시는 진(陳)나라 시대로 문명국이라 일컬어졌다. 그러므로 그 전에 의심스러웠던 점들을 묻고 도를 물어서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장엄사(莊嚴寺) 민공(旻公)의 제자로 강의를 들었다. 본래 속세의 서적을 읽었기 때문에 신비로운 일을 연구하는 것만을 이치라고 여겼지만, 불교의 진리를 듣고는 도리어 이전의 배움을 한낱 지푸라기와 같다고 여겼으니, 헛되이 성현의 교훈만 찾은 것은 실제로는 생애를 근심거리로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나라 왕에게 글을 올려 불교에 귀의하겠다고 청하자 칙명으로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불법을 강의하는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좋은 도리를 다하고 미묘한 말을 깨달아 세월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실(成實)의 열반을 얻어 마음 속에 쌓아 간직하고, 삼장(三藏)과 석론(釋論)을 두루 탐구하였다. 나중에는 오(吳)나라의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 정념(定念)과 정정(正定)을 서로 따르고, 총체적이고 분석적인 사고의 폐해를 잊은 적이 없었으니, 승려의 무리가 구름같이 임천(林泉)에 모여들었다.

 

아울러 『사아함경(四阿含經)』을 종합해 섭렵하여 그 공덕이 팔정(八定)에 들어갔으며, 선을 밝히고 의심스러운 것을 쉽게 풀이하였으니 그 질박하고 정직한 것은 결점이 없었다. 본래 먹었던 마음과 잘 맞았기에 드디어 이곳에서 평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 세상의 일을 모두 끊어버리고 성인의 자취를 두루 유람하며 세상 밖에 뜻을 두고 영원히 속세를 버리려고 하였다.

 

이때 어떤 신도가 산 밑에 살고 있었는데, 원광에게 나와서 강의해 주기를 청하였다.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으나 너무나 간절하게 청하므로 드디어 그의 뜻에 따라 처음에는 『성실론(成實論)』을 강의하고 마지막에는 『반야경(般若經)』을 강의하였다. 모든 생각과 풀이가 뛰어나서 좋은 질문에는 나는 듯이 답을 해주고 아울러 아름다운 말로 글의 뜻을 풀어내니, 듣는 사람들도 기뻐하여 그들의 마음에 꼭 들어 하였다.

 

이로부터 옛 규정에 따라 중생을 이끌어주는 것으로 임무를 삼았으니, 매번 설법을 한 번 할 때마다 문득 강물을 기울여 쏟아붓듯이 하였다. 비록 다른 나라에서 도를 전하였지만, 중생들이 도를 깊이 이해하여 문득 의심스러운 것이 싹 사라졌다. 그래서 명망이 널리 알려져 중국 남방 일대까지 퍼졌으니, 가시덤불을 헤치며 바랑을 메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마치 고기비늘처럼 이어졌다.

 

때마침 수(隋)나라 왕이 천하를 통치하니, 위력이 남쪽 나라에까지 미치어서 진나라의 운명도 다해가고 있었다. 수나라 군사들이 진나라의 서울인 양도(楊都)까지 침입하자 드디어 전쟁통에 원광도 살해될 위험에 처하였다.

 

때마침 어떤 대장이 절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 구하려 하였다. 그런데 불이 난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단지 원광이 탑 앞에 결박된 채 곧 죽게 될 처지에 있었다. 대장은 이 일을 괴이하게 여기고 즉시 원광을 놓아주었다. 위기에 직면하여 영험을 나타낸 것이 이와 같았다.

 

원광은 오나라와 월나라에서 학문을 통달하였지만, 문득 주(周)나라와 진(秦)나라의 문화도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개황(開皇) 9년(서기 589)에 수나라의 서울로 유학을 갔다. 때는 마침 불법의 초회(初會)를 맞아 섭론종(攝論宗)이 비로소 일어나니 경전의 문구를 마음 속에 간직하여 경전의 미묘한 실마리를 일으켜 세웠으며 또 지혜로운 해석을 신속하게 하니, 그 명성이 수나라 서울에 떨쳐졌다.

 

이제 공업이 이루어지자 신라로 돌아가서 불도를 잇고 싶었다. 신라에서도 멀리서 이 소식을 듣고 수나라 황제에게 원광을 돌려보내 주기를 자주 청하였다. 그래서 수나라 황제는 칙령을 내려 후하게 위로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원광이 수십 년 만에 돌아오자 늙은이도 젋은이도 서로 기뻐하였다. 신라왕 김씨는 원광을 만난 후 그를 공경하여 성인처럼 우러러보았다. 원광은 성품이 겸허하고 여유롭고 정이 많아서 널리 사랑을 베풀었으며, 말할 때에도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아서 노여움을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중국과의 외교문서나 오고 가는 국서가 모두 그에 의하여 쓰여졌다. 온 나라가 받들어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원광에게 맡기고 도(道)로 교화하는 방법을 물었다. 원광은 벼슬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나라의 정치를 돌보는 것과 같았으니, 시기적절하게 교훈을 펼쳐서 오늘날까지도 모범이 되고 있다.

 

원광은 나이가 이미 많아 수레를 타고 대궐에 들어갔으며, 왕이 손수 의복과 약과 음식을 마련하였고 다른 사람이 돕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듯 왕이 혼자서만 복을 받으려 했을 정도로 원광에게 감복하고 그를 존경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세상을 떠나려 하자 왕이 친히 그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법을 남기어서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하였다. 원광이 상서로운 조짐을 설법하여 공덕이 나라 곳곳에 미쳤다.

 

신라 건복(建福) 58년에 원광은 몸이 조금 불편한 것을 느끼다가, 7일이 지나서 간절한 계(誡)를 남기고 머물러 있던 황륭사(皇隆寺)에서 단정히 앉은 채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99세로 당나라 정관(貞觀) 4년이었다[마땅히 14년(서기 630)이라 해야 한다.].

 

임종할 때 절의 동북쪽 허공에 음악 소리가 가득했고 이상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 찼으니 모든 승려와 속인들이 슬퍼하면서도 한편으론 경사로 여겼는데, 그의 영험임을 익히 알았기 때문이다. 교외에 장사 지내었는데 나라에서 우의(羽儀)와 장례 도구를 내려주었으니 임금의 장례와 똑같이 하였다.

 

그 후 어떤 세속 사람이 죽은 태아를 낳았는데, 세속에 퍼진 말이 복 있는 사람의 묘에 묻으면 후손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몰래 원광의 무덤 옆에 묻었다. 그러나 그 당일로 벼락이 태아의 시체에 떨어져서 무덤 밖으로 내던져졌다. 이 일로 인해 평소에 원광을 공경하지 않던 사람들도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3. 귀산과 추항의 화랑도 세속오계 실천

 

삼국사기 제45권 열전 제5(三國史記 卷第四十五 列傳 第五)에 귀산의 활동 상황이 나온다. 602년 전쟁터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귀산(貴山)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서 아버지는 아간 무은(武殷)이다. 귀산은 어려서부터 같은 부의 사람 추항(箒項)과 벗이 되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가 선비나 군자와 함께 교유하기를 기대하면서도,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는다면 욕됨을 면치 못할까 두려우니, 어찌 어진 사람 곁에서 도를 배우지 않겠는가?”

 

당시에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수나라에 유학을 다녀와서 가실사(加悉寺)에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에게 높은 예우를 받고 있었다.

 

귀산 등이 그 문하에 이르러 옷자락을 여미고 나아가 말하였다.

“속세의 선비가 어리석고 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사오니, 한 말씀 해주시어 종신토록 계율로 삼게 해 주소서.”

 

법사가 말했다.

“불가의 계율에 보살계(菩薩戒)가 있어 그것이 열 가지로 구별되어 있으나, 그대들이 남의 신하로서는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으니, 첫째 임금을 섬기는 데는 충성으로 하고, 둘째 부모를 모시는 데는 효성으로써 하고, 셋째 벗과 사귀는데 신의로써 하고, 넷째 전쟁에 임하여서는 물러서지 않으며, 다섯째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 그대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함이 없게 하라!”

 

귀산 등이 말했다.

“다른 것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만, 이른바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만은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법사가 대답했다.

“육재일(六齋日)과 봄, 여름에는 살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는 시기를 택함이다. 부리는 가축은 죽이지 않는 것이니 말, 소, 닭, 개를 이르는 것이며, 작은 생물은 죽이지 않는 것이니 고기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이르는 것으로, 이는 대상을 택함이다. 이와 같이 오직 필요한 경우에만 하고 그 이상으로 많이 죽이지 말 것이니, 이는 세속의 좋은 계율이라고 할 만하다.”

 

귀산 등이 말했다.

“지금 이후로는 이 가르침을 받들어 두루 실행하고, 감히 어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9년 임술(서기 602) 가을 8월에 백제가 크게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와서 아막성(阿莫城)[막(莫)을 모(暮)로도 쓴다.]을 포위하였다. 왕은 장군 파진간 건품(乾品), 무리굴(武梨屈), 이리벌(伊梨伐)과 급간 무은(武殷), 비리야(比梨耶)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였다. 귀산과 추항은 함께 소감(少監) 직으로 전선에 나갔다.

 

백제가 패하여 천산(泉山)의 못으로 물러나 병사를 숨겨두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리 군대가 진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이때 무은이 후군이 되어 대오의 맨 뒤에 있었는데, 복병이 갑자기 튀어나와 갈고리로 그를 잡아당겨 떨어뜨렸다. 귀산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일찍이 스승에게 듣기를 ‘무사는 적군을 만나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달아나겠는가?”

 

그는 적군 수십 명을 쳐 죽이고 자기 말에 아버지를 태워 탈출하게 한 다음,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웠다. 모든 군사들이 이를 보고 떨쳐나가 공격하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말 한 필, 수레 한 대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귀산 등은 온 몸에 창칼의 상처를 입고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왕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아나(阿那)의 들에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왕은 그들의 시체 앞으로 나아가 통곡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으며, 귀산에게는 나마를, 추항에게는 대사를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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