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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경산시 김유신 장군의 병영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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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경산시 김유신 장군의 병영유적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경산시 고대 국가 압독국(압량국)

경산 임당동을 거점으로 강력한 읍락국가인 압독국(押督國), 또는 압량국(押梁國)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 압독국이 102년(파사이사금 23) 신라에 항복했다는 기록,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 106년 1월부터 3월까지 압독에 행차해 진휼했다는 기록, 지미왕[재위 112~134년] 때 신라가 정벌하여 군(郡)을 설치하였다는 기록 등이 병존하고 있다.

지금의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임당토성 유적 등이 압독국은 물론 신라에 편입된 이후 경산 지역의 중심지로 추정된다. 또한 218년 백제군이 장산성(獐山城)[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의 용산산성(龍山山城)으로 비정]을 포위 공격하자 나해이사금(奈解尼師今)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와서 반격하였던 사실이 전한다.

그러나 실제 압독국이 완전히 신라의 지배권 하에 들어간 것은 신라의 중앙집권화 이후로 보인다. 신라가 중앙집권화하기 이전 시기 압독국은 신라와의 종속적 관계 속에 토착 세력에 의해 독자적으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2. 김유신 장군 압량주 군주(軍主)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경산 향토문화전자대전’에 보면 김유신 장군이 압량주 군주로 임명된 내용이 나온다.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로 성장하던 신라는 505년(지증왕 6) 주군(州郡)을 설치하였다. 이때 지금의 경산 지역의 경우 옛 압독국의 중심지에 압량군(押梁郡)이 설치되었다. 또한 압량군은 치성화현(雉省火縣), 마진량현(麻珍良縣), 노사화현(奴斯火縣) 세 개의 고을을 영현으로 두었다.

이 가운데 지금의 경산 지역에 있는 고을은 지금의 경산시 진량읍 일대로 비정되는 마진량현과 경산시 자인면·용성면·남산면 일대로 비정되는 노사화현이다. 삼국이 정립되면서 신라는 백제와 치열하게 경쟁하였고, 그 과정에서 경산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군이 대야성(大耶城)[경상남도 합천 지역]까지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을 구축하자, 신라는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 군주(押粱州軍主)로 삼았다. 656년(무열왕 3)에는 김인문(金仁問)이 압독주 총관(押督州摠管)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당시 경산의 군사적 중요성은 현재 남아 있는 경산 병영유적(兵營遺蹟)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제34권 잡지 제3(三國史記 卷第三十四 雜志 第三) 신라 양주(新羅 良州) 조에 압량이 나온다.

장산군(獐山郡)은 지미왕(祇味王) 때 압량(押梁)[압독(押督)이라고도 한다.]이란 작은 나라를 탈취하여 군을 설치하였는데 경덕왕이 이를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장산군(章山郡)이다. 이 군에 속한 현은 셋이다. 해안현(解顔縣)은 원래 치성화현(雉省火縣)[미리(美里)라고도 한다.]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여량현(餘粮縣)은 원래 마진[마미(麻彌)라고도 한다.]량현(麻珍良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구사부곡(仇史部曲)이다. 자인현(慈仁縣)은 원래 노사화현(奴斯火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3. 경산 병영유적(慶山 兵營遺蹟) 제1 연병장~제3 연병장

 

경산 병영유적은 사적 제218호로 경북 경산시 압량읍과 진량읍 일원에 있는 삼국 시대 군사 훈련장이다. 경산 병영유적은 김유신(金庾信, 595~673년)이 압량주 군주(押梁州 軍主)로 있을 때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하는 유적이다.

 

김유신이 압량주군주로 임명될 무렵 신라는 백제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의자왕이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 특히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군)을 백제군이 차지한 것은 신라 입장에서 커다란 타격이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외교로 극복하기 위해 김춘추(金春秋, 603~661년)가 고구려로 가 연개소문(淵蓋蘇文, ?~665년)을 만났으나 성과가 없었다. 한반도에서 고립되어 가던 신라는 수도 경주를 지키기 위해 김유신을 압량주군주로 삼았다. 압량주는 현재 경북 경산시 압량읍 일대로, 경주를 방어하는 마지노선이었다. 김유신은 이곳에서 군사를 훈련하며 백제군으로부터 수도를 보호하고자 하였다.

 

경산 병영유적은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과 진량읍 일대에 있는데 총 3개의 연병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목천 주변의 구릉 위에 총 3개의 연병장이 자리하고 있다. 연병장 간의 거리는 약 1.2km~3.2㎞이다. 제1 연병장은 압량읍 압량리 179번지에 있다.

 

압량벌을 조망할 수 있는 야트막한 구릉 선단부에 자리한다. 제1 연병장은 얕은 구릉 위에 7m 높이로 흙을 쌓고, 윗면을 평평하게 하여 원형 광장을 조성하였다. 둘레는 약 300m이다. 광장의 동남쪽에 높이 10m의 토루가 있다. 가까운 곳에 말에게 물을 먹였던 마위지 연못이 있다. 나중에 세 곳을 모두 둘러보니 제1 연병장이 제일 잘 보존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은 큰 공장과 일부 마을 주택이 보였다. 산책로와 벤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제2 연병장은 압량읍 내리 389번지에 있다. 제2연 병장은 구릉 자연 면에 약간의 토축을 하고, 지름 80m, 둘레 270m의 광장을 마련하였다. 동남쪽에 높이 15m가량의 토루를 쌓았으나 현재는 크게 훼손되었다. 장군의 지휘소인 토루가 일부 파괴되어 안타까웠다. 주변은 마을과 공장이 혼재된 지역이었다. 연병장 산책로 주변에 배나무, 살구나무 등 과일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고, 벤치도 설치되어 있었다.

 

제3 연병장은 진량읍 선화리 948번지에 있다. 제1 연병장과 마찬가지로 압량벌을 조망할 수 있는 야트막한 구릉 선단부에 자리하고 있다. 구릉 말단부에 10m 높이의 토축 원형 광장(지름 80m)을 구축하고, 원형 광장 북쪽에 치우쳐 높이 2m, 윗면 지름 13m의 토루를 쌓았다. 연병장은 소나무가 들어서 있으며, 근처에는 과수원, 공장, 대단지 아파트인 윤성아파트가 내려다 보인다.

 

제3 연병장 앞 약간 떨어진 곳에 거대한 윤성아파트가 있었다. 아파트 주민들이 제3 연병장을 산책로로 활용하고 있었다. 제3 연병장에서 제1 연병장 쪽을 바라보니 경부고속철도 KTX 열차가 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3 연병장 근거리에 경부고속도로 경산IC가 있어 고대 이래 현재까지도 교통과 군사 요충지임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제3 연병장에는 예비군 참호도 있어 현대에도 여전히 방어하기에 좋은 거점이다.

 

경산 병영유적은 경산 지역이 신라 시대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점을 실증해 주는 유적으로 가치가 있다. 이 유적은 자연 구릉상에 얼마간 토축이 이루어져 외견상 토성처럼 보이지만 토성으로 보기에는 소규모이고, 윗면이 평탄하여 광장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광장 한쪽에 치우쳐 토루가 있다는 점에서 장대(將臺)가 있는 군사훈련장으로 추정된다.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하며 외적의 침입을 대비한 군사 요충지이다. 김유신 장군이 나당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에는 북쪽의 고구려를 정복하여 삼국통일을 완수하기 위한 후방 군사기지 역할을 하였다. 경산 병영유적은 김유신 장군이 삼국 통일의 초석을 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군사 훈련을 위한 연병장이 1,6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스란히 보존되어 왔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필자도 마위지와 경산 병영유적을 답사하면서 역사 유적의 보존에 대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4. 경산 병영유적(慶山 兵營遺蹟) 보존 노력

 

경북 경산시 지역에서 2022년 9월 유윤선 경산시 재향군인회 회장이 ‘김유신 장군 유적지 보존 및 호국선양회’(가칭)를 발족해 김유신 장군의 정신을 기리고 유적지의 관광 활성화에 나섰다(영남일보, 2022, 7.22).

 

유윤선 회장은 “경산시를 김유신 장군의 성지로 조성하기 위해 교육관을 만들고,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와 연계하여 경산의 관광 문화 트렌드를 변화시킬 대표적인 역사 문화 축제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또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적극적인 호응을 이끌어 새로운 역사체험학습의 장으로 만들겠다고 하였다. 학술토론회, 심포지엄도 열고, 10월에는 유적지인 연무장과 마위지에서 봉사활동에 참여할 회원을 모집한다고 언급하였다.

 

경북도는 3대 문화권사업의 선도사업 가운데 하나로 신라 화랑정신을 계승, 전통과 현대가 교감하는 전통문화관광클러스터를 조성하는 신화랑 풍류체험벨트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 사업은 2010~2016년 기간에 모두 2,295억 원이 들어가는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경주, 청도, 영천, 경산 지구 사업을 실시하였다.

 

신화랑 풍류체험벨트 경산지구 사업은 김유신 장군이 군사훈련을 시켰다고 전해오는 경산병영유적(사적 제218호) 제1 연병장, 제2 연병장 정비 복원과 마위지를 근린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경산시는 2011년부터 1년 동안 6억 원을 투입해 제1 연병장, 제2 연병장에 잔디를 심고 진입로를 마사토로 포장하는 등 정비 복원 사업을 완료했다. 이 사업에 마위지 주변 주민들은 찬성하였고, 경산문화지킴이 회원은 반대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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