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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김유신 장군이 만든 경산의 마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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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김유신 장군이 만든 경산의 마위지

 

1. 화랑도 가족의 애환이 서린 마위지

마위지(馬爲池) 주소는 경북 경산시 압량읍 부적리 264-2번지에 있다. 마위지는 영남대에서 진량 쪽으로 난 산업도로를 따라가면 좌측 도로변에 기마상과 저수지가 어우러진 마위지 근린공원이 나온다. 연못가로 산책로, 정자, 체육시설, 어린이 놀이터, 고분도 보인다. 저수지 안으로 데크 로드도 조성되어 있어 연못을 자세히 구경할 수 있다. 지난 6월 28일에 답사했을 때 연못에는 노랑어리연꽃이 활짝 피어 있어 아름다웠다.

마위지는 김유신 장군이 인근 군사 훈련장의 기마 훈련을 하는 병사와 말을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했던 연못이다. 고된 군사훈련에 지친 말에게 물을 먹이고, 목욕시키기 위하여 만들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규모가 더 컸으나 경산~하양 간 산업도로가 확장되면서 많은 면적이 도로에 편입되면서 축소되었다.

마위지가 있는 이 마을의 지명은 부적리(夫迪里)다. 남편 부(夫)자와 나아갈적 (迪)자를 쓴다. 신라 시대 압량지역의 화랑훈련장에 차출되었던 병사들의 가족이 이곳에 이주하여 살았는데 집은 모두 북향으로 지었다고 한다. 북쪽의 고구려로 출전하였으므로 북쪽을 바라보기 위해서 북향으로 지었다.

백제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다시 고구려 전투에 참전한 남편, 아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며 가족들은 고구려 땅이 있는 북쪽을 향해 상시 기도를 올리기 위해 북향집을 지었다고 한다.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에 100년이 넘는 흙담의 북향 초가가 20여 채 있었다고 한다.

화랑도, 병사의 부인들은 저녁때가 되면 온종일 훈련에 지친 말을 못으로 몰고 나와 먼지 쌓인 귀를 씻어주었다. 말이 전쟁터에서 적의 화살과 창칼을 민첩하게 피해 남편과 아들이 다치지 않고 무사귀환하기를 기원하였다. 이런 연유로 마위지(馬爲池)는 귀 이(耳) 자를 써서 ‘마이지(馬耳池)’로도 표기하였다.

김유신 장군이 마위지와 인연을 맺은 것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선덕왕 11년 조에 “유신을 압량주(押梁州, 경북 경산) 군주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마위지가 있는 경산의 군주로 백성을 다스렸다.

역사의 기록에는 큰 공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 왕, 장군 중심으로 이름이 나온다. 일반 백성, 전쟁터의 최일선에서 싸우는 병사들에 관한 기록, 병사 이름 등은 거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화랑도 역시 마찬가지로 화랑도의 우두머리, 풍월주 등은 기록에 나오지만 구성원인 일반 화랑도(낭도)의 이름은 기록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김유신 장군은 용화향도를 이끄는 지도자였지만 소속된 화랑도의 이름은 역사기록에 없다.

경산시의 마위지와 병영유적을 답사하면서 일반 화랑도와 그 가족들의 애타는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어 가슴이 뭉클해졌다.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위해 활약한 기간에는 계속 전쟁이 이어졌다. 일반 화랑도나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국가의 명령에 따라 전쟁터에 나가는 화랑도(낭도), 병사, 그리고 그 가족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매우 컸을 것이다. 말의 귀를 씻어주면서 가족의 무운장구를 비는 가족들의 간절한 염원을 마위지에서 느낄 수 있다. 말 못하는 말도 가족처럼 사랑하고 돌보는 화랑도와 일반 병사 가족들의 생과 사에 대한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는 유적지가 바로 마위지다. 북쪽의 전쟁터로 떠난 남편, 아들의 생환을 기도하기 위해 집도 북향으로 지었다는 일화도 감동적이다.

2. 마위지 근린공원

 

마위지는 사다리꼴로 반듯하게 축조된 저수지이며 가장자리의 중간 지점을 기준으로 가로, 세로 약 100m에 달하는 운동장 하나 크기의 규모이다. 마위지 주변에 조성된 공원시설 중 도로 및 광장은 부지면적 3,134㎡로 진입광장, 상징광장, 연결마당, 수변광장 및 소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경시설은 건천, 수변 데크, 조형 언덕, 벽천 분수 등 899㎡에 달한다. 그 외 공원시설로는 휴양시설인 휴게 쉼터 149㎡, 유희시설인 어린이 놀이터 189㎡, 운동시설인 체력 단련장 69㎡, 교양 시설인 마위정 149㎡, 편익시설인 주차장 및 관리사무소 414㎡이다.

 

마위지 일대는 김유신 장군이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로 있을 때 군사 훈련을 하기 위해 만든 연병장 중의 하나로, 훈련을 마치면 마위지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던 곳이라 전해져 온다. 또한 마을 아낙들이 마위지에서 말귀를 씻어 주며 말이 전쟁터에서 적의 화살과 창칼을 민첩하게 피해 남편과 아들이 무사귀환하기를 기원하였던 곳이다.

 

공원에는 김유신 장군 관련 조형물과 일대기가 부조로 설치되어 있다. 마위지 주변은 아파트 단지와 단독주택이 혼재한 주거지역이며, 현재 공사 중인 대규모 아파트도 보였다. 남동쪽으로 인접한 압량읍 신대리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집적해 있어 지역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 가치가 높다.

 

마위지근린공원의 동쪽은 지방도 제919호인 대학로가 지나며, 서쪽은 부적길이 통과한다. 대학로에는 803번 시내버스만 정차하지만, 부적길에는 399번, 449번, 649번, 809번, 840번, 909번, 911번, 918번 시내버스가 정차한다. 마위지근린공원은 대구도시철도 2호선 종점인 영남대역에서 약 1.3㎞ 떨어져 있으며, 영남대역에서 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에 위치하여 대중교통 접근성이 양호하다.

 

마위지 근린공원은 신화랑풍류체험벨트 조성 계획 가운데 경산지구에서 이뤄지는 사업이었다. 경북도는 3대 문화권사업의 선도사업 가운데 하나로 신라 화랑정신을 계승, 전통과 현대가 교감하는 전통문화관광클러스터를 조성하는 신화랑 풍류체험벨트 사업을 하였다. 사업비 32억 원(국비 70%)을 투입하는 마위지 주변 근린공원 조성사업이 지역주민 간에 논란이 된 바 있었다.

 

마위지 근린공원 조성을 찬성하는 말못(마위지) 주변 주민들은 “그동안 못 주변이 준설되지도 않아 악취도 나고 정비가 제대로 안 됐다. 이번에 못에다 호안블록을 쌓고, 김유신 동상, 인공 폭포, 정자, 체육시설, 산책로 등의 휴식공간을 조성하는 것은 환영한다.”고 찬성하였다.

 

하지만 경산문화지킴이 회원은 “경산병영유적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져 오는 마위지 주변을 최대한 원형대로 보존해 화랑과 연계한 스토리텔링 및 문화유적으로 활용해야 하는데 많은 사업비를 투입해 근린공원으로 개발하는 것은 오히려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필자가 답사한 날은 6월 28일 오후였는데, 어른신들이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젊은이들은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깨끗하게 정비되어 보기 좋았다.

 

3. 마위지 근린공원의 김유신 장군의 일대기

 

마위지근린공원의 김유신 장군 기마상을 둘러싸고 있는 부조 형태로 만든 김유신 장군의 일대기로 탄생에서부터 삼국통일을 이룩하기까지의 과정 주요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1) 김유신(金庾信)의 탄생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서기 595년, 아버지 만노군(萬弩郡 : 忠北 鎮川) 태수(太守) 김서현(金舒玄) 장군과 어머니 만명부인 사이에 하늘에 별이 품 안으로 안기는 태몽과 함께 태어났다.

 

그는 가야 왕손으로,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이며, 조부는 신주도 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을 지낸 명장 김무력(金武力). 어머니는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아우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2) 김유신(金庾信) 결심

 

김유신은 한때 천관녀(天官女)와 풍류(風流)에 빠져 잠시 수련을 게을리 함에, 이에 어머니가 엄히 꾸짖자 스스로 천관과 절연(絶緣)을 다짐하고 수련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훈련에 지친 몸을 말에 의존한 채 집으로 돌아오던 중 문득 말이 도착한 곳이 천관의 집이라. 그 자리에서 자신이 아끼던 애마(愛馬)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의 이 같은 결심은 훗날 신라 삼국통일의 성업(聖業)을 달성하는 원동력(原動力)이 되었다.

 

3) 용화향도(龍華香徒) 김유신

 

김유신 장군은 열다섯 살 되던 해, 서기 609년(진평왕 31) 신라의 화랑(花郞)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린 낭도(郎徒)를 이끌고 화랑정신을 길렀고, 이듬해 중악(中嶽)과 열박산(咽薄山)에서 삼국통일을 기원(祈願)하고 무술을 닦은 뒤, 서기 611년에 국선(國仙)이 되었다.

 

4) 마위지(馬爲池) 축조

 

서기 642년, 김유신 장군이 압량주 군주로 부임한 후 당시 압독 소재를 중심으로 3곳에 연무 훈련장(사적 제 218호)을 축조(築造)하였다. 현존(現存)하는 마위지(馬爲池)는 기마 연무장에서 훈련한 기마(騎馬)를 위하여 인위적으로 말을 위한 저수지를 축조하였던 것을, 일대의 아낙들이 저녁에 말을 이끌고 와 귀를 씻어주며 남편과 아들의 무사귀환(無事歸還)을 빌었다 하여 이를 마이지(馬耳池)라 불리기도 한다.

 

5) 황산벌 전투

 

의자왕 초, 백제는 중국과 신라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하고 있던 고구려와 연결해 신라에 압박을 가하였다. 특히 642년(의자왕 2)에 대야성(大耶城: 현 경남 합천지역)을 비롯한 신라 남부의 40여 성을 함락한 사건은 신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신라는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에 파견해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660년에 나당 연합군이 드디어 백제 공격을 단행하였다. 이에 신라군과 당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백제의 계백장군이 전사하자 연합군의 승리로 기원전 18년, 서기 660년간 700여 년의 백제 사적(史蹟)은 막을 내리게 된다.

 

6)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다.

 

백제를 정벌한 이후 신라군과 당나라 연합군은 북쪽의 고구려로 진격하여 곧 고구려를 멸망에 이르게 한다. 마침내 문무왕 668년 9월 드디어 삼국통일이 이루어진다. 문무왕은 김유신 장군의 공로를 인정하여 태대각간 (太大角干)의 벼슬을 내렸다. 사후인 서기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追尊)되었다.

 

4. 마위지 근린공원의 김유신 장군 스토리텔링

 

마위지근린공원의 산책로에 김유신 장군의 화랑도 수련, 부하들을 이끄는 리더십에 관한 주요 일화를 스토리텔링하여 조형물로 만들었다.

 

1) 중악산 석굴과 난승의 보검

 

김유신은 삼한(三韓)의 국경을 침범해 온 고구려·백제·말갈(靺鞨)을 보고 분노하여 그들을 평정할 뜻을 품고 중악(中嶽 : 팔공산)에 올라 나흘간 기도하였다. 그러자 난승(難勝)이라는 이름의 노인이 나타나 방술(方術 :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이 행하는 갖가지 기술)의 비법과 보검(寶劍)을 건넨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612년(진평왕 29) 적군이 침입하자, 김유신은 다시 열박산(咽薄山)에 올라가 ‘중악에서 난승을 뵈었던 것과 같이 보검에도 신령함을 주소서!’라고 간청하였다. 그러자 3일째 되는 날 밤, 허성(虛星 : 북쪽의 넷째 별자리)과 각성(角星 : 동쪽의 첫째 별자리) 두 별에서 빛이 내려와 마치 칼을 뒤흔드는 듯한 영험함을 보였다고 한다.

 

이렇듯 신라 오악(五嶽 : 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 남악 지리산, 북악 태백산, 중악 팔공산) 중 으뜸으로 여겨지는 팔공산은 김유신의 주요 행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권41, <열전>제1, 김유신.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2.

 

2) 김유신의 명예와 의무

 

신라 644년(선덕여왕 13) 9월 김유신은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ᆞ성열성(省熱城)을 포함한 7개 성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이듬해 3월 왕궁에 돌아왔다. 그러나 미처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백제의 대군이 몰려와 신라의 매리포성(買利浦城)을 공격한다는 봉인(封人 : 국경 수비병의 소식)이 전해지자, 왕은 다시 김유신에게 진격을 명하였다.

 

자신의 집 앞에 다다랐던 그는 상봉을 기다리는 가족들을 뒤로한 채 50보쯤 후에 이르러서야 말을 세우고 사람을 시켜 “집에 가서 장물(漿水 : 미음과 같은 마실 것)을 가져오너라!” 라고 하였다. 물을 마신 뒤 그는 “우리 집 물은 옛 맛 그대로구나!” 라고 말한 뒤 다시 진군을 서둘렀다고 한다.

 

이를 지켜본 많은 군사들은 그의 충심에 사기가 충만해져 국경의 수비에 만전을 기하게 되었고, 백제군은 이러한 신라군의 방비를 살피고는 진격해오지 못하고 물러갔다고 하니, 이는 그의 명예와 의무를 함께 드러내 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 권41. <열전>제1, 김유신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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