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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김유신 장군 수도처인 중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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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화요칼럼김유신 장군 수도처인 중암암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팔공산 중암암

 

중암암은 은해사에서 4.8km 거리에 있으며, 해발 780m의 매우 높은 곳에 있는 암자이다. 중암암은 작은 돌 틈을 통과해야 벼랑 위에 앉은 암자를 만날 수 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돌 틈이 일주문인 셈이다. ‘가운데 중(中)’에 ‘바위 암(巖)’ 자를 쓰는데, 사람들은 한자 이름보다는 흔히 ‘바위구멍 절’, 돌구멍 절이라고 부른다.

은해사에서 일주문을 통과해 이정표 따라 중암암 가는 길은 찻길이 험하고 좁기 때문에 주말이나 휴일에는 차를 두고 걸어가는 편이 낫다. 운전이 미숙한 초보 운전자는 걸어가는 것이 좋다. 비구니 사찰인 백흠암 주차장에 주차하고 중암암까지 임도나 등산로로 걸어가는 편이 안전하다. 은해사에서 중암까지는 4.8km이다.

필자는 6월 24일 토요일에 은해사를 거쳐 중암암을 답사하였다. 은해사 입구에서 차량 진입을 통제하기에 명함을 보여주며 연구차 답사하러 왔다고 하니 통과시켜주었다. 가는 도중 개를 데리고 중암암으로 걸어가는 부부를 차에 태워 함께 갔다. 길이 좁고 구불구불하며 오르막이 심하여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교행하기가 힘들었다.

삼국통일 전후의 두 명의 걸출한 인물 김유신과 원효도 중암암에서 수행하고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김유신 장군이 화랑도가 되어 삼국통일의 큰 뜻을 품고 명산대천을 순례하며 기도를 하고 무술을 연마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중악(中嶽)의 석굴에서 기도하였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의 수련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아 여러 곳이 있어 경주의 단석산,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에 있는 불굴사 홍주암을 소개하였고, 이번에는 팔공산 중암암을 소개하기로 한다.

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 김유신 상(上)에 기도 관련 다음 내용이 나온다.

김유신 공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따르며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진평왕 건복 28년(서기 611) 신미, 공의 나이 17세였을 때, 고구려(高句麗)ㆍ백제(百濟)ㆍ말갈(靺鞨)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외적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혼자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중략)

4일이 지나자, 홀연히 거친 베옷을 입은 한 노인이 와서 물었다. “여기는 독충과 맹수가 많아서 무서운 곳인데 귀한 소년이 여기에 와서 혼자 거처하다니,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어르신께서는 어디서 오셨으며, 존함을 들을 수 있을런지요?”

“나는 일정한 거처가 없이 인연 따라 가고 머무나니, 이름은 ‘난승(難勝)’이라 하노라.”(중략)

그리고는 곧바로 비법을 주면서 말하였다. “조심해서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약 이를 불의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

중암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의 산내암자(山內庵子)이다. 834년(흥덕왕 9)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하였다. 그 뒤 꾸준히 수도승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어 오다가, 1834년(순조 34) 우일(宇一)과 유엽(有曄)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 요사채, 객사(客舍)가 있으며, 문화재로는 2001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은해사 중암암 삼층석탑과 석등(石燈)이 있다. 이 밖에도 도괴된 부도 1기가 있다. 절 주변에는 삼인암(三印巖), 건들바위, 장군수(將軍水) 등이 있다.

2. 중악(中嶽)은 어디인가?

 

은해사 중암암(中巖庵)에는 김유신 장군이 수도한 곳으로 거론되고 있는 ‘중악석굴’이 있다. 팔공산은 바로 신라 5악(五嶽)의 하나인 중악이다. 신라의 5악은 가야의 명산이던 지리산이 남악, 백제의 명산 계룡산이 서악, 고구려의 명산 태백산이 북악, 신라의 명산 토함산이 동악이며 이들의 중앙부에 위치한 팔공산을 중악으로 삼은 것이다.

신라 오악은 삼국통일 이전에는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경주 주변의 산악이었으며, 통일 이후에는 신라의 중앙과 사방의 산악으로 확대되었다. 신라 사람들은 이러한 산악에 신적인 존재가 거주하는 것으로 믿는 산악숭배사상을 가지고 산신에 대해서 제사를 지냈다.

 

삼국통일 이전 신라 오악은 신라 중심부인 경주평야를 둘러싸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21, 경주부 산천조에는 토함산(吐含山)을 동악, 금강산(金剛山)을 북악, 함월산(含月山)을 남악, 선도산仙桃山)을 서악이라고 하였고 『삼국사기』 41, 열전 1, 김유신(상)의 단석산(斷石山)이 중악이었다.

 

그 뒤 신라 영토가 확대되고 통일을 성취한 뒤인 문무왕 말년 혹은 신문왕대에 국토의 사방과 중앙에 있는 산악으로 변화하였다. 동악은 토함산, 서악은 계룡산(鷄龍山), 남악은 지리산(地理山), 북악은 태백산(太伯山), 중악은 부악[父嶽: 팔공산(八公山)]]이다.

 

신라 오악은 서악인 계룡산 하나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가 소백산맥 일대와 그 동남쪽에 있는 산악들로, 대사(大祀) · 중사(中祀) · 소사(小祀)로 구분되어 있는 신라 통일기의 국가 제사에서 중사에 편입되었다. 오악에 대한 제사는 각 산에 거주한다고 생각한 산신에 대한 제사였다.

 

중악의 석굴을 팔공산에 있는 중암암 석굴로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중암암 석굴이 있는 팔공산 전체의 수려한 산세나 위치로 보거나,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대소 40여 개의 사찰로 보아 화랑도의 중요한 수련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심지왕사가 동화사를 창건한 후 산내 곳곳에 수행처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묘봉암과 함께 이곳 중암암이 들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중암암은 가파른 산세와 험한 지형이며, 거대한 바위가 있어 기도발을 잘 받는 곳이며, 또한 바위 속에서 나오는 석간수가 풍부하여 수행자에게는 기도하며 생활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중악은 학자들간에 논란이 많아 여러 가지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경주 단석산,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에 있는 불굴사 홍주암, 은해사 중암암 등이 중악으로 거론되고 있다. 필자는 이런 곳을 차례로 답사하고 있다.

 

3. 3층 석탑

 

중암암 3층 석탑은 경북 유형문화재 제332호이다.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산 25-1에 있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의 삼층석탑으로 탑의 높이는 3m이고, 하층기단(下層基壇) 갑석 (甲石)의 폭은 1.46m이다. 다듬질한 긴돌 4개를 결합하여, 지대석(地臺石)으로 깔고, 그 위에 이층기단(二層基壇)과 3층의 탑신부(塔身部)를 올렸다.

 

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삼층석탑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부(基壇部)가 강화되었고, 옥개석(屋蓋石) 낙수면의 경사가 심해지는 등의 특징을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암벽 아래 터를 조성하고 남북선상으로 나직한 축대를 쌓아 마당을 2단으로 구성하고 서쪽에는 법당(法堂), 동쪽은 석탑을 배치하였으며, 법당지에서는 법당 창건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어골문(魚骨文) 기와조각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 중 3층 석탑은 창건 당시에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석등은 높이 1.2m의 장방형으로 장식이나 기교를 가하지 않은 특이한 석등이다. 이 석등은 다른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등과는 다른 개성 있는 모양으로 눈길이 머물렀다.

 

3층석탑에서 거대한 바위 사이로 난 돌계단으로 된 등산로를 20여 미터쯤 올라가면 극락굴, 삼인암(三即巖), 건들바위, 만년송(萬年松), 장군수(將軍) 등이 있다. 삼인암에서 등산로를 이용하면 백흠암까지는 1.65km, 은해사까지는 4.14km이다.

 

4. 장군수, 건들바위, 만년송

 

김유신 장군이 수렴할 때 마신 물이 장군수이다. 천년을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삼국통일의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이 17세쯤 되는 화랑 시절 이곳 돌구멍절(중암암)에서 심신을 단련할 때 즐겨 마신 물이라는 연유로 약수터 또는 장군수라고 전해지고 있다. 중암암 근처는 온통 거대한 바위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물은 풍부하였다.

 

건들바위는 옛날 어느 날 밤부터 바위에서 울력소리가 요란하게 나서 크게 놀란 주지 스님이 밖으로 나가보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바위가 그 암자를 덮칠 듯이 움직이고 있기에 부처님께 기원하였더니 그 바위가 제 자리에서 훨씬 뒤쪽으로 옮겨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이곳의 가을 단풍이 가히 절경이다

 

거대한 바위에 뿌리박고 사는 만년송이 있다. 중암암에서 서쪽으로 약 200m쯤 가면 뿌리는 하늘 향해 바위틈에 붙어있고 가지는 땅을 향해 자라서 수평으로 길게 굽어져 있는 만년송이란 소나무가 있는데 이 산천의 경관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그 모습은 가히 일품이다.

 

5. 극락굴, 삼인암

 

신라시대 원효 스님이 화엄경론을 집행할 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어 극락글에서 화엄경 약찬게를 외우다 화강삼매에 들어 불빛을 발산하였는데, 그 힘으로 바위가 갈라지고 그 소리에 의문이 풀리어 화엄론을 완성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 후 조선 말기 영파 스님(은해사 비석에 약력이 있음)이 화엄 강백으로 유명했는데, 극락굴에서 어느 여름날 정진하다가 삼매에 들어가는 바람에 학인들 강의시간도 놓치고 밤이 늦도록 스님이 오지 않아 큰 절 대중들이 모두 찾으려고 나와 보니 스님이 이 굴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도인 큰스님이라는 것을 알고 여러 스님들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근세에 와서도 이 도량에서 공부를 하거나 어떤 소원을 이루기 위해 청정히 지키고 기도하면 잘 이루어진다고 하여 전국 각지에서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알기만 한다면 이 극락굴은 몸이 아무리 뚱뚱하다고 해서 통과를 못하는 사람이 없다 하며 세 번을 돌아야 소원을 이루어진다고 한다.’

 

필자는 극락굴을 통과하기 위하여 배낭을 벗어놓고 입구로 들어가 보았다. 암벽 틈이 매우 좁고 굴속이 어두워 발 아래가 잘 보이지 않았다. 바위도 약간 습기를 머금고 있어 미끄러웠다. 무리해서 들어가다가 다칠 우려가 있어 포기하였다.

 

중암암 법당 바로 뒤 봉우리에 큰 바위 3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데, 이것이 삼인암이다. 삼인암은 옛날 어느 처녀가 자식이 귀한 집에 시집을 갔으나 아이를 낳을 수가 없어 효험이 있는 약과 정성을 다하였지만 대를 잇지 못하여 안타까워하고 있던 어느 날 스님이 그 소식을 듣고 정성을 드릴 장소로 현재 삼인암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부인은 이곳에서 정성을 드려 삼형제를 낳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여기에서 아들 삼형제 혹은 친구 세 사람이 뜻하는 바가 있어 이곳에 와서 정성을 드리고 힘써 정진하여 모두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곳은 중암암 법당 바로 뒷부분이므로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행동을 하여야 한다. 필자가 방문하였을 때 삼인암 바위 아래에서 여성 등산객들이 쉬면서 윷놀이를 하고 있었다.

 

6. 해우소

 

중암암을 방문하기 전 EBS에서 제작한 중암암 소개 유트뷰에 보니 중암암 감원인 선인 스님이 출연하여 삼인암 위에서 참선하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이번에 방문하여 선인 스님을 만나서 그 당시 장면을 물어보았다. 당시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주지실에는 드론으로 촬영한 중암암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녹음이 우거진 장면, 가을의 화려한 단풍 장면이 찍혀 있었다.

 

스님에게 해우소도 물어보았는데 옛날 해우소는 폐쇄하였다고 알려주었다. 현재 해우소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는 곳을 살펴보니 현대식으로 변기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푸세식이었다. 옛날 통도사, 해인사, 중암암에서 온 스님 셋이 모여 서로 절 자랑을 했다.

 

“우리 절은 법당 문이 어찌나 큰지 한 번 열고 닫으면 그 문지도리에서 쇳가루가 한 말 석 되나 떨어진다”며 통도사 스님이 절의 규모를 뽐냈다. 해인사 스님도 질 수 없다는 듯이 “우리 해인사는 스님이 얼마나 많은지 가마솥이 하도 커서 동짓날 팥죽을 쑬 때는 배를 띄워야만 저을 수 있다”고 했다.

 

두 스님의 자랑을 가만히 듣고 있던 중암암 스님은 “우리 절 뒷간은 그 깊이가 어찌나 깊은지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 날이라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옛날 중암암에서 함께 수행했다는 스님들에게 전해지는 일화다. 중암암은 찾아가기는 힘들어도 경치가 아름답고, 거대한 돌 틈에 자리 잡은 암자도 볼 수 있어 가볼 만한 암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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