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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 김유신과 천관의 러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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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화요칼럼 김유신과 천관의 러브 스토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신라시대 절터 천관사지 발굴조사와 복원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243 번지에 천관사 절터가 있다. 도당산 서쪽 기슭 논 가운데에 있는 절터이다. 면적은 20,970㎡, 사적 제340호로 지정(등록)일은 1991년 1월 9일이다. 발굴조사를 하기 전에는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석탑의 일부분과 기와 조각들이 논두렁의 잡석 틈에 끼여 남아 있었다. 이 가운데에는 돋을새김된 2단의 굄대가 8각을 이루고 있는 2장의 판석이 주목을 받았다.

천관사는 천관(天官)의 집터에 세운 절로, 김유신(金庾信)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김유신은 천관을 사랑하였으나 어머니의 질책을 듣고 관계를 끊었다. 뒷날 김유신은 사랑하였던 옛 여인 천관을 위하여 그녀의 집터에 절을 세워 천관사라 불렀다고 한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서 2012년 6월 25일부터 2013년 6월 24일까지 3차 발굴조사를 수행하였다. 조사 결과, 이 지역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 시대까지 이르는 세 개의 문화층과 해당 유구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건물지 40동. 배수로 7기, 답장 23기, 우물 15기, 석조시설 7기, 수혈(竪穴) 68기 등의 유구에서 기대편(器臺片 : 밑이 둥근 항아리 따위의 그릇을 올려놓는 데 쓰던 받침. 삼국 시대 특히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많이 나오며 굽구멍이 뚫려 있다.), 고배, 인화문토기, 주름무늬병, 관병, 연화문수막새, 귀면와, 토우, 청동 및 철제품, 납석제, 청자 편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G구역에서는 수혈유구 중소형의 노 시설과 폐기장으로 추정되는 수혈에서 다량의 목탄 및 도가니 편 등이 출토되었다.

경주시는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간에 걸쳐 천관사지 정비사업을 진행했다. 15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건물지를 정비하고 석탑 복원, 탐방로 정비, 조경과 관람 편의시설, 야간조명등 설치 등의 내용으로 복원 정비사업을 하였다.

 

천관사지의 금당지와 강당지, 추정 승방지, 문지 등의 건물지에 대한 주춧돌과 지대석들을 제 위치를 찾아 자리에 두고 잔디를 심어 천관사의 범위를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 주요 사업 골자였다.

천관사 탑도 2020년 복원 완공이 계획이었지만 복원 과정을 둘러싸고 학계와 경주시간 이견을 보여 준공이 늦어져 2022년 2월 마무리됐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3층 옥개석의 진위 여부 때문에 한때 공사가 중단되었던 적도 있었다. 결국, 남아 있던 탑의 몸돌과 바닥돌 부재를 참고해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팔각형의 몸돌을 얹은 삼층석탑 1기를 복원했다. 이 탑은 지붕돌 밑면의 받침이 연꽃 모양으로 된 점이 독특하다.

천관사지 석탑지는 8매의 지대석 위에 갑석(甲石)이 얹힌 상태로 탑의 하층 기단이 완전하게 확인되었다. 갑석 상면에는 각형의 2단 탑신받침이 평면 팔각으로 각출되어 있는데 받침의 형태로 보아 1층 탑신은 팔각이다. 따라서 탑의 전체 형태는 사각기단에 팔각탑이 올라가 있는 이형탑(異形塔)임을 알 수 있다.

옥개석(지붕돌)은 1매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상륜부의 보륜으로 추정되는 석물 1매가 건물지 1 북쪽의 배수로에서 출토되었다. 천관사지 삼층석탑은 2층 방형 기단 위에 8각 3층 구조의 이형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최초로 나타난 형식이어서 주목받았으며 옥개석 또한 연화문이 새겨진 아름다운 형식의 팔각지붕으로 눈길을 끈다.

 

2. 이인로와 이공승의 글에 나오는 김유신과 천관

 

고려 무신정권 때 문사 이인로(李仁老, 1152~1220년) 시화집인 『파한집(破閑集)』 상·중·하 전 3권 중 중권(中卷)에 김유신과 천관의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이공승의 시는 파한집에 수록되어 있다.

 

김유신(金庾信)은 계림인(鷄林人)이다. 사업(事業) 혁혁(赫赫)하니, 그런 사업 내용은 국사(國史)에 펼쳐져 있다. 아이 때 모부인(母夫人)이 매일 엄훈(嚴訓 : 엄한 훈계)하면서 망령되게 교유(交遊 : 서로 사귀어 놀거나 왕래)하지 못하게 했다. 예

 

하루는 우연히 여예(女隸) 집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그 어미가 그를 면수(面數, 面責 : 마주 대하여 책망함)하여 이르기를 ‘나는 이미 늙었으니 주야로 네가 성장하여 공명(功名)을 세워 임금과 부모에게 영화가 있기를 바랐더니, 지금 너는 술파는[도고(屠沽 : 개나 양을 잡고 또 술과 밥을 파는 사람. 전의되어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르킨다.)] 애들과 음방(淫房)과 주사(酒肆 : 술집)에서 유희(遊戱)하느냐?’ 라고 하고는 호읍(號泣 : 목 놓아 큰 소리로 울다)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즉시 어미 앞에서 스스로 맹서하기를 다시는 그 집 문을 지나지 않겠다고 했다.

 

하루는 술에 취하여(피주, 被酒) 집에 돌아오는데 말이 옛길(舊路)을 따라 잘못하여 창가(倡家)에 이르니, (창기가)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원망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맞아들이는지라, 공(公)이 그제야 깨닫고 타고온 말을 참(斬 : 목을 베다)하고 안장을 버리고는 돌아오니 그 여자가 원사(怨詞 : 원망하는 노래) 한 곡조를 지어 그에게 전했다. 동도(東都 : 경주)에 천관사(天官寺)가 있으니 바로 그 집이다.

 

이상국(李相國) 공승(公升)이 일찍이 동도(東都 : 경주)의 관기[(管記 : 서기(書記), 7품관)]로 부임하여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절 이름 천관이라 옛 인연이 있었던 걸(寺號天官昔有緣)

문득 경시(經始)한 연유를 듣고 한번 처연(悽然)하였네(忽聞經始一悽然)

다정한 공자님은 꽃 아래서 놀았고(多情公子遊花下)

원한 품은 가인(佳人)은 말 앞에서 울었네(含怨佳人泣馬前)

붉은 말은 정이 있어 옛길 알았으니(紅鬣有情還識路)

종(蒼頭)은 무슨 죄로 부질없이 채찍만 휘둘렀던가(蒼頭何罪謾加鞭)

오직 한 곡조 미묘한 가사만 남아(惟餘一曲歌詞妙)

두꺼비와 토끼가 함께 잤다는 말 만고에 전하네(蟾兎同眠萬古傳)

천관은 바로 그 여자 이름이다(天官卽其女號)

 

조선시대의 기록으로는 성종 때의 사료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조(古蹟條)에 ‘재오릉동(在五陵東)’이라고 하여 천관사의 위치를 비정하고 있는데, 현재의 위치와 부합된다. 고적조에 기록이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이전에 폐사되었던 것으로 사료되며, 1669년 경주에서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에서도 일부 관련 내용이 확인되고 있다.

 

3. 원성대왕과 천관사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 원성대왕(元聖大王)에 천관사가 나온다.

 

이찬 김주원(金周元)이 처음 재상이 되었을 때 원성왕은 각간이 되어 재상 다음 자리에 있었다. 꿈에 머리에 쓴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썼는데,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깨어 점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복두를 벗은 것은 벼슬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들었다는 것은 칼을 쓸 조짐이며 우물에 들어갔다는 것은 감옥에 들어갈 조짐입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너무나 근심하여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당시에 아찬(阿飡) 여삼(餘三)[여산(餘山)이라고도 한다.]이 찾아와서 뵙기를 청하였다. 왕은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나오지 않자, 다시 뵙기를 청하며 말하였다.

 

“꼭 한 번 뵙기를 원하옵니다.”

왕이 허락하자 아찬이 말하였다.

“공께서 꺼리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왕이 꿈을 점친 일을 말하였다. 그러자 아찬이 일어나 절을 하고 말하였다.

“이것은 정말 상서로운 꿈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오르시어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 풀이해 드리겠습니다.”

 

왕은 곧 주변 사람들을 물리치고 해몽을 청하였다.

“복두를 벗은 것은 더 높은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입니다.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 후손까지 왕위가 전해질 조짐입니다. 천관궁의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조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이 말하였다.

“내 위에는 김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윗자리에 오르겠소?”

아찬이 말하였다.

“북천신(北川神)에게 몰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왕은 이 말에 따라 제사를 드렸다. 얼마 뒤 선덕왕(宣德王)이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은 주원을 왕으로 삼으려고 그를 궁궐로 맞이하려고 하였다. 집이 북천에 있었는데 갑자기 물이 불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이 먼저 궁으로 들어가 왕위에 올랐다. 주원을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와서 따르며 새 왕에게 절을 하고 축하하였다. 이가 원성대왕으로 이름이 경신(敬信)이고 성은 김씨이다. 좋은 꿈이 들어맞은 것이다.

 

주원은 명주(溟州)로 물러나 살았다. 왕이 등극하였으나 당시에 여산은 이미 죽었다. 그래서 그 자손을 불러서 벼슬을 내렸다. 왕은 다섯 명의 자손이 있었으니, 혜충태자(惠忠太子), 헌평태자(憲平太子), 예영잡간(禮英匝干), 대룡부인(大龍夫人), 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대왕은 인생의 곤궁하고 영달하는 변화를 잘 알았다. 그래서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었다. 노래가 없어져서 내용은 알 수 없다.

 

4. 천관은 도당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신녀라는 설

 

김유신과 사랑을 나눈 천관녀는 기생이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녀라는 설이 있다. 천관녀의 출신에 대해 기녀설이건 신녀설이건 그 출신을 해석하는 근거는 고려시대에 쓰인 이인로의 ‘파한집’이다.

 

천관녀의 이름은 그녀의 이름이 ‘천관’이라서가 아니라 천관사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신궁의 여사제라서 천관녀라 불린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천관녀는 그녀의 이름이 아니라 직업을 나타내는 명칭이라는 말이다. 사실 천관이라는 이름은 하늘의 관리라는 뜻이다.

 

천관사 바로 뒤편에는 도당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신라의 귀족들이 모여서 정사를 논한 곳으로 추정된다, 현재 화백정이라는 정자를 복원해놓았다. 신라의 귀족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아무 데서나 하는 게 아니라 사령지(四靈地)라는 신령스럽게 여겨지는 곳에서 하므로 천관사 자리가 신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서라벌을 중심으로 동쪽의 청송산(靑松山), 남쪽의 오지산(亐知山), 서쪽의 피전(皮田),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었다.

 

도당산은 신라시대 여사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박혁거세의 누이인 아노가 제사장이었다는 점, 화랑의 기원인 여성이었던 원화가 처음 담당했던 것도 제사라는 점에서 분명하다.

 

경주 남산을 자라가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보아 금오산이라 부르는데, 도당산은 자라의 머리에 해당되는 중요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지난 1976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경주IC와 7번 국도를 잇는 서라벌대로가 건설되면서 단절됐다. 이로 인해 남산과 분리되어 도당산의 문화유적 훼손이 가속화되고, 옛 모습을 잃어가는 등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경주시는 월성에서 월정교를 거쳐 도당산, 남산으로 통하는 남산 옛길을 복원하기 위하여 2013년부터 5년에 걸쳐서 도당산 터널공사를 진행하여 남산과 도당산을 연결하였다. 총사업비 약 100억 원을 투입하여 5년간의 공사기간 동안 총연장 580m의 선형개량과 터널 111m(6차선)를 설치하였다. 남산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 동시에 선형을 개량하여 교통사고의 위험을 줄였다.

 

도당산의 역사적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2 신라본기 제2 첨해(沾解)이사금(尼師今) 궁의 남쪽에 남당(南堂)을 지었다. 양부(夫)를 이찬(伊湌)으로 삼았다.

 

한국사로 15권 한국의 고고학III-3. 신라도성(新羅都城)·성지(城址)-11. 都城-2. 월성주변(月城周邊)의 성지(城址) 도당토성(都堂土城)의 도당은 남당(南堂)을 말하는데, 남당(南堂)은 군장[君長(王)]과 각부출신(各部出身)의 관리(官吏)들이 모여 정사(政事)를 논의(論)하고 처리(處理), 집행(執行)하는 회의기관(會機關)이자 정무집행기관 (政務執行機關)이다.

 

도당산(山) 동(東)쪽 옆의 작은 골짜기를 왕정골이라 하여 왕정곡(王井谷), 왕정곡(王政谷)으로 표기(表記)하고 있다. 후자(後者)는 왕(王)을 모시고 국정을 논(論)한 곳이란 데에서 생긴 것으로 보여진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진덕왕 조에 다음 이야기가 나온다. 왕의 시대에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公), 무림공[(武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이다.],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 등이 남산의 우지암(亐知巖)에 모여 나라 일을 의논하였다.

 

이때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이 자리로 뛰어들었다.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섰지만 알천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이야기하면서 호랑이 꼬리를 잡고 땅에 매쳐서 죽였다. 알천공의 힘이 이처럼 세어서 맨 윗자리에 앉았지만, 그래도 모두들 유신공의 위엄에 마음으로 복종하고 있었다.

 

현재 천관사지 바로 뒤인 도당산 화백정이 있는 곳이 국정을 논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신성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천관녀가 만약 신녀였다면 이곳 도당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을 수도 있다.

 

김유신이 천관녀에게 반한 이유로 그녀가 김유신과 같은 금관가야 출신이라 가능했다는 말도 있다. 아무래도 신라에서 이방인과 같은 가야 출신이라 홀대를 받던 김유신을 유일하게 보듬어 주었던 인물이기에 사랑이 싹텄다는 것이다.

 

이는 김유신과의 사랑을 깨는 족쇄로도 작용하는데, 만명부인 입장에서는 김유신이 가야 출신이라 출세가 힘든 상황에서 애인까지 같은 가야국 출신일 경우 김유신에게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다.

 

천관녀가 기생으로 알려진 것은 불교가 융성한 고려시대에 토속 신앙인 여사제를 비하하기 위해 기녀라 낮추어 보았을 가능성, 또는 여자가 제사장이라는 것이 고려나 조선의 사회에서 불경하게 비추어져 기녀로 비하했을 가능성이 있다.

 

천관녀는 김유신과의 사이에서 생긴 아들을 낳아 군승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혼자 키운다. 661년 2월 김유신이 김인문, 김양도 등을 이끌고 태백산맥을 우회하여 평양에 고립된 소정방에게 군량을 공급할 때, 서자 김군승(金軍勝)이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김군승을 김유신과 천관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

 

김유신이 늦은 나이에 김춘추의 딸과 재혼하기 전에, 이미 장성한 자식을 두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김유신이 지소부인 이전에 교제한 여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천관녀 뿐이고 결국 정식 혼인은 하지 못해 아들을 낳았다면 서자가 되었을 테니, 현재로선 추정 가능한 후보는 천관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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