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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명활성과 비담의 난을 진압한 김유신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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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경주 명활성과 비담의 난을 진압한 김유신 장군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경주 명활성

경주 명활성(明活城)은 경북 경주시 보문동에 있으며, 면적은 895,706㎡, 사적 지정일은 1963년 1월 21일이다. 명활산성에서 경주 명활성으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2011년 7월 28일이다.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이다. 토성과 석성이 함께 있다. 경주 명활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경주 역사유적지구 중 하나이다.

 

명활산은 보문동과 천군동에 이르는 높이 245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신라인들에게는 신령스런 산이었다. ‘삼국유사’의 ‘신라시조 혁거세왕’이다. 육부촌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 지금의 금강산 백률사의 북쪽 산)인데 촌장은 지타(祗沱)이다.

처음에 명활산으로 내려오니 한기부(漢岐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됐다. (중략)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高耶村)인데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는 금강산으로 내려오니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진한 사로국 6부 시절에 6촌장 가운데 두 사람이 명활산에서 탄강했거나 살았다. 배씨의 시조 지타는 하늘에서 명활산으로 탄강해 왔다가 금산 가리촌으로 가서 그곳의 촌장이 됐다. 호진은 설씨의 시조인데 금강산으로 탄강했다가 명활산 고야촌에 자리를 잡았다.

명활산성은 신라 왕경(王京)의 동쪽에 있었으며 나성(羅城)의 구실을 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05년(실성왕 4) 이전에 이미 축성되어 있어 나성의 기능을 가진 산성으로는 최초로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나성은 성밖에 겹으로 둘러쌓은 성을 말한다. 명활산성은 북쪽 봉우리 해발 268.7m의 힌등산과 남쪽 봉우리 해발 269m의 장군봉 등 2개의 산정을 감싸고 있는 석축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알 수 있다. 역사서인 『삼국사기』 곳곳에 ‘명활성’이 등장한다. 첫 기록은 권 제3 신라본기(新羅本紀) 제3, 18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사년(405)’조에 나온다.

‘사월에 왜병이 명활성으로 쳐들어오다가 패해 패주하므로 왕은 친히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獨山, 현 영일) 남쪽으로 나가 요충(要衝)지에 복병하고 있다가 다시 싸워 적을 격파하고 삼백여 명을 참획하였다.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명활산은 왜구가 동해로 상륙했을 때 대왕암이 있는 동해안 일대에서 수도인 서라벌을 연결하는 최단 거리에 있는 산이다. 따라서 신라 도성의 동쪽에서 왜구를 방어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십오년(431년)’조에는 ‘사월에 왜병이 동변으로 쳐들어와서 명활성을 포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패주하였다. 이는 이 성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지키는데 중요한 곳임을 말해준다. 자비왕 10년(475년)부터 소지왕 10년(488년)까지 이곳을 궁성으로 사용할 정도로 중요한 성이었다.

진흥왕 15년(544)에 다시 쌓았고, 진평왕 15년(593)에는 성을 확장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져 겨우 몇 군데에서만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진흥왕 12년(551년) 때의 ‘명활산성 작성비’가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공사 총책임자, 실무자, 공사기간 등 당시의 축성에 관한 내용을 전해준다. 처음에 토성이었다가 이때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명활산성비’로 보이는 비석 조각이 안압지에서 발견되었다.

북쪽 성 외벽 아랫부분에서는 성 바깥 북쪽으로 약 13m 떨어진 지점에서 호안석축(호수나 하천 등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돌벽)으로 추정되는 석축 일부가 확인되었다. 북쪽 성벽 일부 구간에 한정하여 축조한 것으로 월성해자와 같이 물을 쓰기 위한 연못으로 보고 있다.

성내에는 문지 7개소, 수구문지 4개소, 건물터로 추정되는 대지 6개소가 확인되었는데 문지와 수구문지는 성벽이 붕괴되면서 덮이거나 파손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건물터에도 초석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1개소뿐이며 나머지는 기와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다. 그 밖에 연못이 2개소 남아 있으나 현재는 매몰된 상태이다.

 

선덕여왕 때는 비담(毗曇)이 이 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이 평정하기도 했으며, 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과 함께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에 대항하여 경주를 지키는 데 큰 몫을 한 곳이다.

 

2. 명활성 작성비

성벽은 길이가 약 5㎞인 토성과 약 4.5㎞인 석성(石城)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석성의 북서쪽 성벽에서 축조 당시의 기록이 적힌 명활성 작성비가 발견되었다. 비의 크기는 높이가 66.8㎝, 최대 너비 31.0㎝, 두께 16.5㎝이며 직사각형이다. 비문은 9행 148자로 앞면이 거의 꽉 차도록 각자(刻字)되었으며, 명문의 필획이 깊은 것으로 볼 때 글자를 새긴 것이 분명하다. 서체는 육조풍(六朝風)의 예의(隷意)가 있는 해서체이며, 자경(字徑)은 1.5∼2.5㎝이다.

 

1988년 8월 26일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전 56번지의 명활산성 성벽 터에서 농부 김규식(金奎植) 씨가 발견했으며,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김규식 씨(당시 59세, 경주시 보문동 432)가 1988년 8월 26일 명활산성 내 포도밭에서 발견하였다.

 

비문은 ① 작성 간지가 있는 서두, ② 축조 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③ 축성 공사 실무자의 인명 및 담당 거리, ④ 공사 담당 위치, ⑤ 작성 참가자의 수, ⑥ 공사 기간, ⑦ 글쓴이의 이름 등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비문을 쓴 사람은 □□□아척이다.

 

축성시 비석을 세우는 것은 책임 한계를 명백히 하고 축성에 참가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신라 영역에서 이러한 작성비는 591년의 「남산신성비」가 여러 개 발견되었으나 명활산성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비가 발견됨으로써 신라 중고기의 역역(力役) 동원 체제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즉, 이 비석과 성격이 같은「남산신성비」에는 1개 비석에 1개 집단만 기록되어 있는데, 「명활산성작성비」에는 1개 집단이 3개의 소분단(小分團)으로 편제되어 있다.

 

비석에는 축성에 소요된 공사 기간이 35일로 기록되어 있어, 1개의 성곽을 축조하는 데 종래의 견해처럼 수개월이 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공사는 11월 15일에 시작하여 12월 20일에 완료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축성의 난이도를 감안해 볼 때, 이 기간을 명활산성 전체를 완성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높이 10보(步), 길이 14보 3척(尺) 3촌(寸)의 거리를 35일 만에 완성했다는 한정된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비에는 그때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상인나두(上人邏頭)’, ‘장인(匠人)’, ‘서사인(書寫人)’ 등의 직명이 보이며, 특히 ‘군중상인(君中上人)’이라는 글자가 있어, 「남산신성비」 제2석에서 지금까지 판독하지 못했던 ‘군중□□(郡中□□)’을 완독할 수 있게 되었다.

 

상인나두에서 나두는 성·촌을 단위로 파견된 지방관으로, 상인은 ‘윗사람’이라는 의미로 여겨진다. 또, 장인은 지방민으로 축성을 담당하는 기술자, 서사인은 문자 해독능력을 바탕으로 문서를 담당하는 기술자, 군중상인은 다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의 윗사람 즉 촌주(村主)로 추정된다.

 

「명활산성작성비」와 「남산신성비」의 비교를 통해 551년에서 591년에 걸치는 40년 동안 신라의 촌락지배가 강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라가 촌락지배를 실현해 가는 수단으로 창출해 낸 것이 외위(外位)라는 지방민만을 대상으로 하는 관등체계였다.

 

외위는 복속세력의 질서를 신라적으로 전화하여 일원적인 촌락지배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6세기를 통하여 적절히 이용되었다. 「명활산성작성비」와 「남산신성비」는 외위 11등 체계가 거의 완성된 이후의 것인 점에서는 같지만 둘을 비교하면 재지세력의 외위 소지 양상은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명활산성작성비」에 보이는 군중상인은 촌주이면서도 관등은 7등인 하간지(下干支)에 머물러 있다. 반면 591년의「남산신성비」에서 촌주는 5등인 찬간(撰干)이다. 또「명활산성작성비」에서는 2명의 하간지가 보이는 반면 「남산신성비」에서는 적어도 4명의 간군(干群) 소지자가 보인다.

 

이렇게 「명활산성작성비」에서는 간군이 소수인 점, 그 등급이 낮은 점, 그리고 관등 소지자의 수가 비교적 적은 점 등에서 보아 6세기 전반의 성격을 많이 지닌 반면, 「남산신성비」에서는 그와는 양상이 상당히 다르다. 「명활산성작성비」에서 외위체계가 지방 촌락지배에 이용된 초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남산신성비」는 신라의 촌락지배가 급속히 강화되어 그 절정에 달한 시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3. 비담의 반란 진압한 김유신 장군

 

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三國史記 卷第四十一 列傳 第一) 김유신 상(上)에 보면 ‘선덕왕 16년, 진덕왕 원년(서기 647년) 비담과 염종이 병사를 일으키다.’에서 비담의 반란을 심리전을 통해 진압한 내용이 나온다. 비담은 645년(선덕여왕 14)에 귀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에 올라 귀족 세력을 대표하던 인물이다.

 

16년 정미(서기 647)는 선덕왕 말년이요, 진덕왕(眞德王) 원년이다. 대신(大臣)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여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하여 병사를 일으켜 폐위하려 하였다. 선덕왕은 안에서 이를 막아내었다.

 

비담 등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하고 왕의 군대는 월성(月城)에 군영을 두어 공방을 열흘간 하였으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한밤중에 월성에 별이 떨어지자 비담 등은 사졸들에게 말하였다.

 

“별이 떨어진 곳에는 꼭 피를 흘리는 일이 있다고 들었다. 이것은 반드시 여왕이 패전할 징조이다.” 병졸들의 함성이 땅을 뒤흔들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두려워 어쩔 줄을 몰랐다. 유신이 왕을 뵙고 말했다.

 

“길하고 흉한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붉은 새가 모여 들었지만 주(紂)가 망하였고, 기린을 얻었어도 노(魯)나라가 쇠퇴했으며, 꿩의 울음으로 인해 고종(高宗)이 흥기했고, 용의 싸움으로 인하여 정공(鄭公)이 창성해졌습니다. 이로써 덕은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별의 변괴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그리고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씨를 넣어 연에 실어 날렸다. 이는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사람을 시켜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길거리에 말을 퍼뜨려 적군들이 의심하게 하였다. 또 백마를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 제사를 지내며 다음과 같이 기원하였다.

 

“천도(天道)에는 양(陽)이 굳세고 음(陰)이 부드러우며, 인도(人道)에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바뀌는 경우에는 큰 난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임금을 도모하고, 아래에서 위를 범하려 합니다.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과 신령이 모두 미워하는 바요,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일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 일에 무심하시어 도리어 왕성에 별의 변괴를 보인 것이라면, 신은 의혹됨이 있어 깨우치지 못하겠습니다. 오직 하늘의 위엄으로 백성들의 바람을 좇아 선(善)을 선하게 여기고 악(惡)을 미워하시어 신령의 부끄러움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모든 장졸들을 독려하여 그들을 들이쳤다.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나므로, 쫓아가 목을 베고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이에 연좌되어 살해된 자가 30명이었다.

 

명활성의 초축연대는 알려진 바 없으나, 405년의 기록을 통해 그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지막 기록은 647년 비담(毗曇), 염종 등이 반란의 근거지로 삼았다는 내용으로, 이후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로 인해 비담 난을 진압한 직후에 폐기시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시는 지난 2007년 종합정비 기본계획을 수립한 이후 2013년에서 2014년 토지매입과 북문지 주변 성벽 정밀발굴조사를 마쳤다.

 

명활성의 북문지와 일부 성벽 구간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존속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북문지에서는 철기류와 기와편,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는데, 철기류 가운데 확쇠는 경주 지역에서는 처음 확인된 것으로 6세기 중반~후반으로 편년된다. 기와편은 단판선문타날(單板線紋打捺) 또는 무문(無紋) 등으로 7세기 전반으로 편년된다. 공반된 단각고배와 반원문 인화문토기 등은 7세기 전반으로 파악되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탁월한 전략 전술을 통해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별이 떨어진 장소에서 연에 불을 붙여 하늘로 다시 올려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킨 것은 치밀한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 장군은 패색이 짙은 관산성 전투에서 구원병으로 출동하여 백제 성왕이 전선 사령관인 아들인 왕자 부여창을 위로하기 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였다. 길목에 군사를 매복시켜 밤에 기습공격을 하여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백제는 이때부터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신라는 국력이 강대해졌다. 백년 후 손자인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였다. 할아버지는 정보전에서 개가를 올렸고, 손자인 김유신 장군은 심리전을 펼쳐 반란군을 진압하여 신라 왕실을 보호하였다. 김무력 장군, 손자인 김유신 장군은 지략이 출중한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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