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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흥무왕 김유신 장군 길상사와 도당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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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흥무왕 김유신 장군 길상사와 도당산성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흥무왕 김유신 사당 길상사

길상사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문진로 1411-38에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1호이다. 이곳은 흥무대왕 김유신(595~673)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신라 때부터 사당을 세워 나라에서 봄, 가을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지냈으나, 조선 초부터는 소재관 (所在官. 진천 현감)이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철종 2년(1851)에 죽계사를 지어 제사를 지내다가 고종 원년(1864)에 없어졌다. 길상사는 도당산성 안에 있다.

고종 3년(1866)에 후손들이 계양묘(桂陽廟)를 지어 제사를 지내다가, 1922년 홍수로 무너지고, 1926년에는 후손 김만희의 주선으로 지금의 자리에 길상사를 다시 세웠다. 1959년에 개축하고, 1975년에 사적지 정화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김유신은 만노군(지금의 진천)에서 태수 서현(舒玄)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화랑이 되고, 35세에 낭비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압량주 도독이 되었다. 53세에는 비담 등의 반란군을 물리치고, 60세에 김춘추를 태종무열왕이 되도록 도왔다.

왕과 함께 삼국 통일의 대업을 추진하여, 66세에 백제를, 74세에 고구려를 멸하여 통일을 완수하고 태대각간에 올랐다. 세상을 떠난 뒤에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김유신이 이곳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군 내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이 있다. 그의 탄생지와 태실은 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어 있다.

2. 길상사 사우 건립 내력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이르더니 삼국통일의 원훈(元勳)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하늘의 영기(靈氣)와 이 고장 산천 정기(精氣)를 받아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 을묘(乙卯)에 만뢰산(萬賴山) 아래에서 나시어 진평왕으로 문무왕에 이르는 5대를 섬기는 동안 백제, 고구려를 통합하고 나라를 반석 위에 놓았더니 문무왕 계유(癸酉) 7월 1일 79세로 훙거하시매 나라의 예(禮)로 경주 금산원(金山原)에 장례모시고 흥덕왕대에 흥무대왕이라 추봉하였다.

이렇듯 거룩하시매 일찍이 태생지에 김서발사우(金發翰祠宇)를 세워 나라에서는 춘추향사에 향축(香祝)을 내리었고 고려조 또한 이에 따르더니 조선조 태조 8년에 그 고을의 관아에 맡기어 향화 받들게 고치었으되 전후 천년에 길상사(吉祥祠)의 제향은 매양 이어오며 임진 병자(壬辰 丙子)의 병화로 한때 멈추어졌다.

그 뒤 철종(哲宗) 신해(辛亥)에 정재취(鄭在聚), 박명순(朴命淳) 등이 재건을 꾀함에 전날의 빈터는 땅이 낮고 좁아서 백곡면(栢谷面) 가죽동에 옮겨 세워 죽계사(竹溪祠)라 이르고 때에 백파(栢坡) 조성(趙珹) 선생을 같이 모시게 되었다. 고종 갑자(高宗 甲子)의 쇄신에 죽계사 또한 헐렸다.

흥무왕(興武王) 사당(祠堂)의 재건운동은 잇달아 일던 중 어느 해인지 현감(縣監)의 현몽으로 벽암리(碧岩里) 소흘산(所訖山) 아래에 서발한사당(舒發翰祠堂)을 중건하여 관복(官服)하신 공과 지소(智炤) 부인과 장자 삼광 이식(三光 伊食) 부부의 목각영상(木刻靈像)을 모신 바 있는데, 서기 1922년 임술 7월의 큰 장마에 사우가 무너졌다.

이로 인하여 4년 후 병인(丙寅)에 사림파 후손의 모금 외에 김원근(金元根)의 성금으로 도당산성(都唐山城) 안에 사우를 세워 홍무왕 만을 모시던 차 서기 1949년 기축(己丑)에 사론(士論)이 다시 일어 김만희(金萬熙) 수창(首唱 : 제일 먼저 주창)으로 백파(栢坡) 공(公)을 같이 봉안하게 되었다.

다음 해 경인(庚寅) 6.25 공산군 남침으로 사우가 상하고 재실이 불타매 서기 1954년 갑오(甲午) 정태관(鄭泰觀) 군수의 주선과 고장의 성금으로 사우를 단청하고 재실을 다시 세우며, 이어 서기 1957년 정유(丁酉) 10월 도민의 뜻을 모아 신라개국공태대각간순충장열흥무왕(新羅開國公太大角干純忠壯烈興武王) 신성비(神聖碑)를 세워 면모를 갖추었다.

이윽고 1961년 신축(辛丑)에 백파(栢坡) 공(公) 위패를 옮겨오신 일로 사림이 갈월만뢰사(葛月萬賴祠)를 창건하여 임인년(壬寅年) 봄 백파 선생을 따로 모시고 같은 해 김상사 서재(西齋)에 유집의(柳執義) 공(公)을 모신 바 있었다.

서기 1974년 갑인(甲寅) 여름 오용운(吳龍雲) 지사는 선열 사적지 정화 보존 관리의 국가방침에 따라 흥무왕 출생지 정화계획을 세워 지성으로 재원의 확보와 역사(役事)를 추진하며 도문화재위원회의 사적 지정을 기다려 2만 8천여 평의 부지를 마련하니 정경모(鄭經模)·한성동(韓成東) 군수 전후하여 협력하고 새한건축문화연구소의 본전 설계와 기타 분야는 수도종합설계공사의 설계로 전일기업주식회사에 의하여 서기 1975년 을묘(乙卯) 본전 건조로부터 기공되었다.

 

이에 유집의 공은 본손이 모시기로 하고 다음 해 3월에는 흥무전(興武殿)이 준공되매 1976년 병진(丙辰) 10월 삼가 장우성(張遇聖) 휘호(揮毫)로 전복(戰服) 갖추신 장군의 영정을 봉안함에 이르렀다. 이제 공이 가신지 1300여 년이로되 오히려 그 높은 정신을 본받고자 길상사를 중건함에 그 사적(事蹟)을 적어 이를 길이 뒷날에 전한다.

 

3. 김만희(金萬熙) 존성 모선(尊聖 慕先) 비(碑)

 

공(公)의 휘(諱)는 만희(萬熙)요 호(號)는 유당(柳塘), 김해인(金海人)이라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전대리에서 출생하여 진천군에 이주한지 60여 년을 존성(尊聖)한 공적과 모선(慕先)한 사업으로 마지막 생애까지 종사하였다.

 

존성사업(尊聖事業)

공은 진천군 향교 장의(掌議), 명륜회교화사(明倫會教化士), 진천군 향교 직원, 진천군 유도회장(儒道含長) 등으로 봉직한 바 있고, 단기 4283년 토지개혁으로 공부자(孔夫子) 제향위토(祭享位土)가 1평도 없게 되어 공은 존성하는 성의에 항시 불안하게 생각하여 본군 군수 정태관(鄭泰觀)과 민의원 정운갑(鄭雲甲) 의원에게 건의, 위토(位土) 20여 평을 매수하여 공부자(孔夫子) 제향을 거행하였다. 대성전(大成殿)과 동서무(東西廡)가 파괴되어 비바람을 막을 수 없어 본군 군수 한태석(韓泰錫)에게 진정하여 고적 수리비를 얻고, 일반 유림의 성금을 합하여 수선하였다.

 

모선사업(慕先事業)

공(公)은 흥무왕김유신장군(輿武王金庾信將軍)의 후예로서 김해 숭선전 참봉을 역임한 바 있다. 단기 4260년 병인(丙寅) 본군 도당산성 내에 사우(祠宇)를 건축하여 길상사(吉祥寺)라 칭하며 수차에 걸쳐 관비(官費)를 얻어 사우, 동서묘, 기타를 증축하며 흥무왕 김유신 장군 신성비(神聖碑)를 건립하였음은 공(公)이 민의원, 도지사, 군수, 교육감, 일반 유림에게 길상사우 실태를 세밀하게 건의한 열의의 결정(結晶)이며, 또 일반 유림과 김해 김씨 문중의 협조로 위토 20여 평을 매수하여 매년 2월 8일 중정(中丁)에 제향을 거행하고 있다.

 

이상 공(公)의 존성모선(尊聖慕先)하신 공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삼가 돌을 세우고 행적을 쓰노라.

 

단기 4296년 癸卯 2월 20일 추진위원회 건립

 

4. 도당산성

 

신라는 고구려에 이어 6세기 중엽 경에 진천 지역에 진출하였으며, 신주(新州)의 군주 김무력의 아들 서현을 진천의 만노군 태수로 임명할 정도로 신라 북진(北進)의 군사적 거점지역으로서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진천 지역의 지배와 북진의 군사적 거점으로서 신라가 축조하고 경영한 도당산성과 두타산성, 그리고 진천 지역에 분포하는 원덕리(교성리) 고분군을 포함한 다수의 신라 고분들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진천 지역에서 신라가 축조한 것으로 알려진 산성은 도당산성(都堂山城)과 두타산성이 있다. 진천 도당산성은 진천읍 벽암리 산 36번지 일대에 위치한 신라의 석축산성으로 잣고개를 통하여 진천에서 오창, 청주로 통하는 교통로의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성벽은 남북방향으로 위치한 해발 201.6m와 195.8m의 두 개의 봉우리와 여기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가지능선을 따라 축조하였으며, 동쪽의 계곡은 계곡 상단을 가로질러 축조하였다.

이러한 산성은 정약용의 우리나라 산성 분류안에 따르면 ‘사모봉형(紗帽峰形)’ 산성에 속하며, 청주 부모산성, 북이면 낭비성, 북일면 구라산성, 충주 남산성 등 신라의 북진 과정에서 축조된 산성들은 모두 이러한 유형의 산성들이라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성벽의 축조기법 역시 성 안팎의 벽을 모두 축조한 내외협축(內外夾築) 기법으로 축조하여 전형적인 신라 석축성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성벽의 둘레는 성 외벽의 추정 통과선을 기준으로 하면 850m 정도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1,836척을 포백척(布帛尺)으로 환산한 둘레와 거의 일치한다. 대체로 신라는 5세기 후반 이후 북진 과정에서 새롭게 편입된 지역의 거점에 거점성을 축조하여 지배와 북진의 기지로 삼았다.

 

이때 축조된 거점성들은 대부분 사모봉형의 유형에 둘레가 1㎞ 내외의 규모를 가지는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보면 도당산성은 만노군의 치소성이자 진천 지역의 군사적 거점인 거점성의 면모를 보이고있다고 할 수 있다.

 

성 안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선조문(線條文)이나 승문(繩文)이 타날된 신라 기와류, 동이·호·옹·완 등의 신라 토기편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유물의 양상은 이 석축산성의 축조 및 경영주체가 신라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략적인 축조 시점은 반원점문(半圓點文)이 시문된 토기 뚜껑편 유물이나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 원점문(圓點文)이 시문된 토기편을 통해 볼 때, 신라가 진천 지역에 진출한 6세기 중엽 이후의 어느 시점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주목되는 부분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신라 기와 및 토기편들 외에 1~2점에 불과하지만 한성 백제의 것으로 볼 수 있는 횡선부가평행선문이 타날된 토기편과 기와편, 그리고 고구려토기 뚜껑편으로 볼 수 있는 보주형꼭지가 달린 뚜껑편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물은 신라의 석축산성 축조 이전에 백제나 고구려가 산성과 같은 방어시설을 축조하여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어 향후의 조사가 기대되는 바이다.

 

두타산성은 진천군 초평면과 증평군 도안면 경계의 해발 598.3m의 봉우리와 그 동남쪽의 해발 596.4m의 봉우리, 그리고 북쪽의 계곡 상단을 두른 석축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1,200m로 삼국시대 성으로는 큰 규모에 속하며, 성 내에는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산 위가 평탄하고 오목한 곳이 있어 1,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고 우물과 샘이 있다”라고 하였다.

성내에서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기와와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삼국시대 유물에 대한 구체적인 양상을 확인할 수 없으나, 보은 삼년산성-미원 낭성산성-미원과 북일 경계의 구라산성-북이 낭비성·노고성-증평과 진천 경계의 두타산성-진천 도당산성으로 이어지는 신라 북진 루트 상의 일렬로 연결되는 산성 가운데 하나임을 통해 볼 때 고구려와의 대치 국면에서 신라 북진의 군사적 거점성으로 판단된다.

 

진천군 지역에는 삼국~통일신라시대와 관련하여 각종 유물, 유적을 비롯한 다양한 사료들이 산재하거나 전해지고 있다. 덕산면 산수리에는 백제요지 유적(사적 제325호)이 있으며 이월면 삼용리에는 백제토기 유적(사적 344호)이 있다.

 

또한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진천읍의 신정리 걸미산성, 행정리와 사석리 및 문봉리 등에 걸쳐 있는 문안산성, 진천읍 성석리와 덕산면 경계의 대모산성, 초평면 영구리의 두타산성, 문백면 옥성리의 파재산성(일명 옥성산성), 백곡면 갈월리의 갈월산성 등이 있고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연곡리 만뢰산의 만뢰산성, 진천읍 벽암리의 도당산성, 진천읍 상계리의 태령산성 등이 있는데 이들 산성들은 대부분이 비지정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진천읍 상계리와 백곡면 사송리 간에 위치하고 있는 태령산(胎靈山, 421m)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흥무왕 김유신 장군 태생지의 뒷산으로 산 정상에 장군의 태를 묻었다고 하여 명명되었다고 하며 산 아래에 길상사가 있어 길상산(吉祥山)이라고도 한다. 태령산의 길상사에는 김유신사(金庾信祠)가 있는데 신라 때에는 사우를 세우고 봄, 가을로 향촉을 내렸으며 925년(태조 8)에는 고을 관현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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