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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김유신 장군 생가터와 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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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김유신 장군 생가터와 태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김유신 장군 삼국통일 스토리 연재

필자는 와이뉴스 화요칼럼을 통해 김무력 장군의 관산성 전투와 관련된 스토리를 게재한 바 있다. 금관가야 구형왕은 국력이 약해져 도저히 나라를 지탱할 수 없어 평화적으로 신라에 항복하여 백성을 살리는 길을 택하였다. 구형왕과 왕자, 귀족들은 신분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김무력 장군은 금관가야의 왕자로서 신라 진흥왕의 신임을 받아 신주의 군주로 임명되어 고구려와의 최전선인 오늘날의 한강유역을 지키고 있었다.

백제 성왕의 아들인 태자 부여창(후일 위덕왕)이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 일대를 공략하였다. 신라는 관산성이 함락되고 위험해졌다. 진흥왕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신주 군주인 김무력 장군에게 구원을 명하였다. 김무력 장군은 철기병을 이끌고 신속히 남하하여 관산성(충북 옥천) 인근인 금강 유역으로 진군하였다.

백제 성왕은 태자인 부여창이 최전선에서 싸우다가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차 최전선인 관산성 근처로 출동하였다. 호위병을 겨우 50여 명을 거느리고 전선 시찰에 나선 백제 성왕의 동태는 김무력 장군의 첩보활동에 포착되었다. 야간에 병사를 매복시켜 성왕이 지나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기습 공격하여 성왕을 사로잡았다. 김무력 장군은 부하 고간 도도를 시켜 성왕을 참수하였다.

승세를 몰아 김무력 장군은 부여창을 공격하여 거의 괴멸시켰다.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을 물리친 신라는 이때부터 승승장구하여 국력이 신장되었다. 반면 백제는 국력이 약화되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김무력 장군은 관산성 전투의 승리로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닦았다. 이후 백여 년 뒤에 김무력 장군의 손자인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완수하였다.

필자는 김무력 장군의 군사 이동로인 주요 산성 수십 곳을 답사하며 스토리텔링을 한 바 있다. 이번에는 김무력 장군의 아들인 김서현 장군, 손자인 김유신 장군의 삼국통일과 관련된 스토리를 연재하고자 한다. 필자는 2021년~2022년에 김유신 장군 탄생지, 주요 격전지를 이미 답사하였다.

김유신 장군은 당시 세계 대제국인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수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한민족으로서 정체성과 문화를 확립하게 되었다. 일부 사학계에서는 외세를 끌어들였고, 고구려의 영토를 다 회복하지 못한 반쪽짜리 통일로 폄하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평가다. 혹자는 고구려가 통일했으면 만주까지 다 차지했을 거라는 부질없는 주장을 한다.

역사는 엄연한 현실이고 가정을 한다는 것은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백제는 의자왕의 사치,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귀양보내는 어리석은 정치 끝에 몰락하였다. 신라가 공격해왔을 때 웅진성주 예식진 장군이 의자왕을 체포하여 항복하는 바람에 백제는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대막리지인 연개소문의 아들 삼형제의 내분으로 자멸하고 말았다.

 

그리고 신라만 외세를 끌어들인 건 아니다. 이미 관산성 전투는 신라, 그리고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의 국제전이었다.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략 때 백제는 왜국에 구원을 요청하여 왜군 4만여 명이 참전하였다가 백강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신라를 도와준 당나라가 신라까지 지배하려고 하였을 때 김유신 장군은 결연히 항쟁하여 세계 제국인 막강한 당나라를 물리쳤다.

 

2. 충북 진천군 김유신 장군 탄생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김유신길 170-4 일원인 계양마을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흥무대왕 김유신(595~673)이 탄생하고 성장한 곳이다. 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었다. 장군은 이 지역에서 태어나 화랑이 되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막아냈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으며,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 자주성을 지키는데 공헌하였다.

 

김서현(金舒玄) 장군의 아들로 진평왕 17년(595년)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15세 되던 609년(진평왕 31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 때 상장군(上將軍), 무열왕 7년(660년)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군(唐軍)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668년)하고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되었다.

 

신라 역사상 가장 높은 관등인 태대각간[太大角干 :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라고도 함]을 지냈고, 흥덕왕 10년에는 홍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되었으며 고려시대까지는 국가에서 주관하여 봄과 가을로 제사를 올렸다.

 

탄생지 일대에는 당시 식수로 사용하였다는 연보정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태실은 태어날 때 나온 태를 따로 보관한 시설을 말한다. 김유신 태실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기단을 쌓고 봉토를 마련하였으며 태령산 꼭대기를 따라 돌담을 산성처럼 쌓아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였다.

 

이 태실은 「삼국사기」와 역대의 지리지에 김유신의 태를 묻은 곳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 남아있는 태실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 축조의 형식을 가진 것으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태실은 생가터에서 연보정, 화랑정을 거쳐 가파른 등산로를 올라가야 한다.

 

이곳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흥무대왕 김유신이 태어난 곳(탄생지)이다. 김유신은 만노군(萬弩郡 : 현재 진천군)의 태수로 있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집무를 보던 곳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에 큰 담을 쳤다 하여 ‘담안밭’이라 불리었다. 주위에는 당시 식수로 사용했다는 연보정과 김유신의 태를 묻은 태실이 있다.

 

3. 진천군의 지명 변천

 

군은 고구려(高句麗)시대에 금물노군(今勿奴郡) 일명 만노군(萬弩郡) 혹(或) 이르기를 수지(首知), 신지(新知)라 하였으며 신라(新羅) 때에는 흑양군(黑壤郡)이라 고치고 통일 신라 시대에는 황양군(黃壤郡)이라 하였다.

 

고려(高麗)초에 이르러 청주현에 속해 강주(降州)라 한 후 다시 진주(鎭州)라 개칭하고, 성종(成宗)때 자사(刺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에 이르러 이를 파(罷)하였으며 현종(顯宗) 때까지는 청주(淸州)에 속하였다.

 

고종(高宗) 때에 와서 창의현(彰義縣)이라 바꾸고 현령을 두었다가 원종 (元宗) 때에 의령(義寧)이라 하고 군사(軍事)를 두었으며 조선(朝鮮) 때 와서 상산(常山)이라 고치고 그 후 진천 감무(監務)로 바꾸었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13년(1413) 계사년(癸巳年)에 진천으로 개명, 현감을 두었다가 그 후 연산군(燕山君) 11년(1505)을 축년(乙丑年)에 일시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중종(中宗) 초에 다시 충청도에 환원, 고종(高宗) 32년(1895) 5월 26일 칙령98호로 현감을 두었던 것을 군수를 두게하였다.

 

4. 충북 진천군 김유신 장군의 탄생 비화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이면에는 극적인 러브 스토리가 있다. 김유신이라는 역사적 위인의 탄생에 얽힌 비화는 삼국사기에 잘 나타나 있다. 김유신 장군의 잉태 기간은 일반인의 10개월이 아니라 무려 두 배인 20개월 만에 태어났다.

 

신라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로 왕족은 성골과 진골로 구분되고, 성골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나중에 성골이 없어 문제가 생기자 비로소 진골도 왕위에 올랐다. 김무력 장군, 아들 김서현 장군은 금관가야에서 신라로 귀순하여 진골 귀족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같은 진골이라도 신라계 진골 귀족에 비해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았다. 만명공주의 아버지는 진흥왕의 동생으로 성골 집안이므로 가야계 진골인 김서현 장군을 사위로 맞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사랑은 국경도 없고 신분도 초월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 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김서현 장군과 만명공주의 사랑은 세기의 로맨스라 할만 하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성골, 진골, 6두품, 일반 백성으로 나눈 계급이 모든 사회활동을 구속하였다. 부친은 딸과 김서현 장군을 떼어놓기 위해 집안에 가두었지만 탈출하여 만노군 태수로 부임하는 김서현을 따라갔다. 숙흘종은 딸의 사랑을 나중에 결국 인정하였다.

 

김서현은 결혼을 인정받고, 이후 지금의 합천군인 대량주의 도독, 지금의 양산시인 양주 총관직 등 지방직을 몇 차례 역임했다. 장군이 되어, 백제와 여러 차례 싸워 예봉을 꺾는 전공을 세웠고 진평왕 대인 629년, 김용춘 및 김유신 등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한 낭비성 전투에서, 5,000여 명을 참살하고 성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김서현과 만명부인이 야합하다. 삼국사기 열전 제1 김유신 상(上).

 

일찍이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 눈짓으로 〔그녀를〕 꾀어 중매를 거치지 않고 야합(野合)하였다. 서현이 만노군태수(萬弩郡太守)가 되어, 〔만명과〕 함께 〔임지로〕 가려 하니, 숙흘종이 비로소 딸이 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았다.

 

〔그녀를〕 미워하여 별채[別第]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별채의 문[屋門]에 벼락이 쳐서 지키는 사람들이 놀라 어지러워했다. 만명은 뚫린 구멍으로 빠져나와,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

 

갈문왕(葛文王)은 왕의 친부(親父)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사람, 왕비(王妃)나 왕모(王母)의 부(父), 왕의 친동생이나 친척이 갈문왕에 책봉되었다고 전한다. 야합(野合)은 야합은 정식 혼례를 치르지 않고 부부가 되는 것을 말한다.

 

만명부인(萬明夫人, 574년 ~ ?) 혹은 만명공주(萬明公主)는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어머니이다. 신라 진흥왕의 아우 숙흘종과 만호태후 김씨 사이의 딸이며, 김서현의 아내이다. 진평왕의 포매(씨 다른 누이)이기도 하다.

 

김유신이 태어나다(595년). 삼국사기 열전 제1 김유신 상(上).

 

서현이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만명 역시 신축일(辛丑日) 밤에 꿈속에서 황금 갑옷을 입은 어린 아이가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얼마 안 있어 임신하고, 20개월 만에 유신을 낳았다. 이때가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이요, 수(隋)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 을묘(乙卯; 595년, 진평왕 17)였다.

 

〔서현이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 할 때에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경진일 밤에 길몽(吉夢)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이〔경진〕로써 이름 짓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날이나 달 간지(干支)로서 이름 짓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지금 경(庚)자는 유(庾)자와 〔글자 모양이〕 비슷하고, 진(辰)자는 신(信)자와 음성(音聲)이 근사하다.

 

더구나 옛 현인(賢人)으로 유신(庾信)이라 이름 지은 이가 있었으니, 어찌 그것으로 이름 짓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이름을 유신이라 지었다 만노군(萬弩郡)은 지금〔고려〕의 진주(鎭州)이다. 처음에 유신의 태(胎)를 고산(高山)에 묻었는데, 지금〔고려〕까지도 그것을 태령산(胎靈山)이라 부르고 있다.

 

5. 양산 북정동 부부총의 김서현 장군과 만명 부인

 

양산시 북정리 고분군의 부부총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강제 발굴한 결과 금동관을 비롯한 격이 높은 부장품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경주에서나 볼 수 있는 고위 귀족급 신라식 무덤인데다 이 고분군이 가야 양식도 약간 섞여 있어서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묘가 아니냐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연대가 맞지 않아 부부총의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부부총 주인공으로 떠오르는 다른 인물도 없는 실정이다. 출토품은 도쿄박물관에 있다.

 

양산의 주민들 사이에서는 부부총이 김서현 장군과 만명 부인의 무덤으로 전해져 왔다. 김해 김씨 양산 문중에서는 오래전부터 부부총을 벌초해 왔다. 무속인들이 김서현 장군과 만명 부인을 신으로 모시고, 초상화를 그려서 사당에 보존하였다.

 

민간의 신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부부총의 주인공으로 인정해도 좋을 듯하다. 김서현 장군은 가야계 왕족 출신이고 만명 공주 역시 신라 성골이므로 화려한 부장품이 나온 부부총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 사이에서 장남 김유신, 차남 김흠순, 딸 보희, 문희가 태어났다. 문희는 태종무열왕의 왕비가 되었다. 차남 김흠순도 형인 김유신 장군 휘하에서 삼국통일에 기여하였다. 만명부인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어 삼국통일의 주인공인 김유신 장군이 태어났다. 태종무열왕과 문명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태자 법민은 문무왕이 되어 삼국통일을 완성하였다.

 

양주 총관을 역임했다는 인연으로 양산에서는 조선시대부터 김서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었고 지금도 양산시 하북면 평산마을 취산재에서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지내고 있다. 양산의 춘추공원에는 김서현 장군의 기적비가 있다. 양산시립박물관에는 김해 김씨 양산 문중에서 기증한 김서현 장군 만명 부인 초상화가 있다.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 장군의 묘소도 통도사 경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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