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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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 통도사 구하 스님의 금강산 관상록 세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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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화요칼럼, 통도사 구하 스님의 금강산 관상록 세 번째 이야기

 

1. 표훈사

 

표훈사로 들어가니 이전 주지인 최원허(崔圓虛) 화상과 추산 선객(秋山 禪客)이 즐겁게 맞이해 주 었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표훈사 전당(殿堂)을 참배하였다。이 절은 신라 문무왕 1년(670)에 표훈 조사(表訓 祖師)가 창건하였으며、전각과 보물 등은 다음과 같다.

전각 – 능파루(凌波樓), 관풍영빈관(關楓迎賓舘), 어향각(御香閣), 설선당(説禪堂), 극락료(極樂寮), 극락전(極樂殿), 종각(鐘閣), 반야보전(般若寶殿), 영산전(靈山殿), 칠성각(七星閣), 명부전(冥府殿).

보물 – 대증(大甑, 큰 시루솥, 27말을 찔 수 있음, 세조대왕 하사품), 향합[香盒, 원(元) 지정(至正) 12년 : 1352년], 향합(香盒, 원 지정 28년 : 1368년), 고경[古鏡, 3개(사명대사가 일본에서 가져온 것], 고경 1개(원 지정 연간), 화첩[畫帖, 정운붕(丁雲鵬) 그림], 어필(御筆 : 세조대왕).

부속암자 - 정양사(正陽寺), 돈도암(頓道庵), 신림암(神林庵), 청련암(靑蓮庵), 내원통(內圓通), 마하연(摩訶衍), 불지암(佛地庵), 만회암(萬灰庵) 수미암(須彌庵) 선암(船庵).

표훈사의 전각과 보물들을 모두 둘러본 다음 금강산을 탐승한 기념으로 월봉 화상(月峰 和尙)과 능파루(凌波樓)에 올라 함께 시를 읊었다.

월아산(月牙山) 월봉의 시(詩)

곧바로 금강산의 제일봉을 오르니/ 육대주 어느 산도 비할 바가 아닐세/ 봉래산 신선을 여러 번 만난 듯한데/ 새벽녘 남은 꿈속으로 종소리 들려 오네.

 

영축산(靈鷲山) 구하(九河)의 詩

비로소 금강산 만이천봉에 오르니/ 峰들과 돌들이 모두 참된 모습이네/ 담무갈(曇無竭) 보살님이 중생교화 원(願)을 발해/ 동방에서 높이 솟아 큰 종을 울리네.

 

2. 만폭동(萬瀑洞)

 

오월 칠일、원허(圓虛)와 월봉(月峰) 두 선사와 더불어 금강문(金剛門)을 지나 만폭동으로 들어가니 왼쪽에는 청학봉(靑鶴峰)、오른쪽에는 오선봉(五仙峰)이 있었다. 서로 마주한 두 봉우리에는 쭉쭉 뻗은 바위들이 서 있어, 그야말로 푸른 절벽 속에 숨겨져 있는 하늘 같았다. 또한 가히 수백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의 크고 넓은 바위가 있었고, 홍의영이 쓴 여덟 자의 글이 있었다.

 

「동구 트여 더없이 시원하고 부는 바람은 맑고 맑도다(洞冷冷風琊淸淸). 또 양봉래는 여덟 자의 큰 글씨를 써 놓았다. 「봉래산 풍악산이 으뜸가는 洞天으로 화하였네(蓬萊楓嶽 元化洞天)」 이 여덟 글자는 마치 용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한데, 속전(俗傳)에 의하면 이 글을 쓴 뒤 삼일 동안 산이 울었다고 한다.

 

길옆 반석에「가락국의 운직겸이 놀았다(游洛國 雲稷廉).」는 여섯 자를 새겨 놓은 곳에서 몇 걸음 정도 가면「금강(金剛)」두 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옆에 「영남 군위 소란정 김씨 동자가 구세에 씀. 임오.」라는 글씨가 있다. 근년에는 해강 김규진 씨의 아들이 구세에 「산(山)」자를 이어서 새겼다.

 

반석 밑에서는 두 물줄기가 합류하는데、한 줄기는 북천(北川)으로 내원통암(內圓通庵) 골짜기요, 다른 줄기는 동천(東川)으로 보덕굴(普德窟)골짜기이다. 우리는 북쪽으로 올라가 찻집에서 맑은 차를 한 잔씩 마셨다.

 

다시 조금 더 나아가자 길 옆 바위에 「천하제일명산(天下第一名山)」여섯 자가 있는데、이는 나옹 화상이 직접 쓰고 새긴 것이라고 한다. 또 시에 가로되 노승은 바랑을 베고 누워/ 꿈속에서 금강산을 오르는구나/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 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가을 산에 해 저무네/.

 

또 수백 보를 더 나아가니 계곡 속에 가운데가 움푹 파인 바위가 있다. 이는 보덕 관음(普德 觀音)이 머리를 감던 세숫대야라고 한다.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고 조금 나아가니 영아지(影娥池)가 나타났다. 이는 회정(懷正) 선사가 보덕 각시를 뒤쫓아가다가 이 못가에서 잠시 쉬었는데, 보덕 각시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못의 물에 비친 곳이다. 이에 회정 선사는 보덕 각시가 관세음보살의 화신임을 깨닫고 보덕암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조금 나아가니 백룡담 다리 건너편에 있는 옛길 옆에 반쯤 누운 듯한 석벽이 보였고, 그 석벽에는 매월당(梅月堂)의 시가 있었다.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함은 인지상정이거늘/ 나는 산에 올라서도 울고 물에 임해서도 우니/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는 흥취가 없도다/ 울고 또 울어도 무궁한 슬픔은 다하지 않으니/.

 

「기축년(1469년) 중추절, 44세에 금강산에 들어와서 짓다」라고 적어 놓았다. 읽다 보니 의분이 복받쳐 슬픔을 금할 수가 없었다.

 

3. 여덟 개의 담(潭)

 

1리가량 지나니 한줄기 물이 층층을 이루며 흘러내려 여덟 개의 潭을 이루고 있다. 첫째 흑룡담(黑龍潭). 둘째 비파담(琵琶潭), 셋째 벽파담(碧波潭), 넷째 분설담(噴雪潭)、다섯째 진주담(眞珠潭), 여섯 째 구담(龜潭), 일곱째 선담(船潭), 여덟째가 화룡담(火龍潭)이다.

 

이 중 흑룡담에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중국의 사신 정동(鄭同)이 금강산에 와서 보고 서원하였다. 「이곳이 진정 불계(佛界)로구나。원컨대, 여기서 죽어 영원히 조선 사람이 되어 불제자가 되리라.」 그리고는 흑룡담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또, 반석에 시 한 수가 새겨져 있다. 굽이굽이 기이한 담(潭) 누가 이름 지었는가?

 

동천의 기세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졌고/ 만폭동의 원류까지는 멀고도 멀건마는/ 구룡담은 대등하고 조화가 공평하도다/ 교묘한 선담과 구담은 장대함을 띠었고/ 분설담과 진주담은 그 정취가 그윽하며/ 푸르른 벽파담은 바람이 사랑스럽고/ 비파담에 들어가면 폭포 소리 다함 없네/

 

이 시는 이암(異庵) 거사가 지은 것이다. 그림 같은 산악들이 다투어 일만 폭포를 뿜어내니 가슴이 확 트여 상쾌하기 그지없다. 송용재는 두 번째로 금강산에 들어와서 용담(龍潭) 위에다 여덟 글자를 새겨 놓았다. 「일천 바위가 거울처럼 빼어나고 일만 봉우리가 흐름을 다투는구나(千岩鏡秀 萬壑 爭流).」

 

이 여덟 개의 담은 그야말로 용이 서로 싸우는 듯하고 거북이 엎드린 듯하며, 분설담은 눈을 뿜어내듯、진주담은 구슬을 흩어 놓는 듯한 기세를 드러내고 있고, 비파담도 또한 그 모양을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 이들 중 분설담이 가장 기이하고 고우며, 화룡담이 제일 웅대하다. 분설담의 폭포 아래에는 만상암(萬像岩)이 있는데, 그 위에 「네 신선이 비를 쉬게 하다(四仙憩雨).」라는 네 자가 새겨져 있고, 옆에 茶店이 있다.

 

4. 양봉래

 

위 글 내용은 통도사에서 발간한 『금강산관상록』에 있다. 『금강산관상록』은 통도사 구하 스님이 쓴 금강산 유람기이다.

 

구하 스님이 양봉래라고 한 사람은 양사언(楊士彦)을 말한다. 양사언[1517년(중종 12) ~ 1584년(선조 17)])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완구(完邱), 창해(滄海), 해객(海客)이다. 주부인 양희수(楊希洙)의 아들이다. 형 양사준(楊士俊), 아우 양사기(楊士奇)와 함께 글에 뛰어나 중국의 삼소(三蘇: 소식, 소순, 소철)에 견주어졌다. 아들 양만고(楊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양사언은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명필 중 하나로 해서체, 초서체에 뛰어났다. 회양 군수로 있을 때 금강산에 자주 들어가 대자연을 즐겼고 금강산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는 지금도 그가 새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글귀가 남아 있다.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三登: 평안남도 강동 지역), 함흥(咸興), 평창(平昌), 강릉(江陵), 회양(淮陽), 안변(安邊), 철원(鐵原)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안변 군수로 있으면서 큰 못을 파고 마초(馬草)를 저장하였다. 이듬해에 북쪽에서 변란이 일어나서 많은 군대가 북송될 때 다른 고을에서는 마초와 물이 없어서 관리나 백성들이 책임을 추궁당하여 사형을 받는 자까지 있었으나 안변만은 아무 걱정 없었다. 그의 앞을 내다보는 지혜에 누구나 탄복하였다. 그러나 지릉(智陵: 이성계 증조부의 묘)에 화재가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해서로 귀양을 갔다. 2년 뒤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가사(歌辭)로는 「미인별곡(美人別曲)」과 을묘왜란(乙卯倭亂) 때 군(軍)을 따라 전쟁에 나갔다가 지은 「남정가(南征歌)」가 전한다.

 

5. 매월당

 

구하 스님이 위의 글에서 매월당의 시를 읽다 보니 의분이 복받쳐 슬픔을 금할 수가 없었다고 한 매월당은 생육신 김시습을 말한다. 김시습(金時習, 1435년 ~ 1493년)은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이자 불교 승려이다.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등극한 세조에 반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한성부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경상도 김해를 거쳐 강원도 강릉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의 본관은 강릉, 자(字)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 불교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21세 때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성삼문, 박팽년 등의 학자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불사르며 통탄했고 끝내 방랑의 길을 떠났다.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경기도 노량진(현재의 서울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1493년 조선 충청도 홍산군 무량사에서 병사하였다.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았다 하며, 3세에 유모가 맷돌로써 곡식을 빻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한다. 5세 때 이미 『중용』. 『대학』에 통하여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어린 시절 세종대왕이 그의 천재성을 듣고 5세의 김시습을 불러다가 글을 짓게 하자 바로 글을 지었다. 그 내용에 감동한 세종대왕이 문학에 재능이 있는 그에게 칭찬하며 비단을 선물하자, 그 비단들을 끝을 묶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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