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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통도사 구하 스님의 금강산 관상록 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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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통도사 구하 스님의 금강산 관상록 두 번째 이야기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명경대 주변 풍경

가장 먼저 명경대(明鏡臺)를 찾아가다가 지장암(地藏庵)이 있어 들어가 보니, 수원에 사는 신도가 기도하는 중이었다. 명경대 계곡 속으로 들어서니 지장봉(地藏峰), 관음봉(觀音峰) 등이 무리지어 우뚝 솟아 있고, 석가봉(釋迦峰)이 그 앞에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여기서부터 여러 봉우리들은 칼과 창이 서로 마주하고 있듯이 연이어 서 있었다. 한 봉우리를 지나자 또 하나의 골짜기가 나타났으니, 모든 계곡물들이 서로 세차게 부딪쳐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위를 보니 물오리 형상을 띤 마고석(麻姑石)이 있고、8, 9리 남짓 더 들어가니 다점(茶店)이 하나 있었으며、거대한 바위가 공중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높이는 수백 척이요 정면은 갈아놓은 듯한데, 흑색 또는 황색을 띤 천연석이 바로 앞에 높이 솟아 있으니, 이것이 바로 명경대(明鏡臺)이다. 명경대 앞에는 숭정(崇禎) 7년 갑술년(634)에 조철구(趙徹求)가 쓴 「주송벽립(朱宋壁立)」 네 자가 새겨져 있었다.

또 십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있으니 이름하여 업경대(業鏡臺)라 하고, 업경대 아래에 있는 황류담(黃流潭)은 달리 황천강이라 부른다. 업경대 서쪽에는 천진봉(天眞峰)과 지옥문과 죄인봉이 있고, 죄인봉 남쪽 멀리에는 시왕봉(十王峰)과 사자봉(使者峰)이 보인다.

또한 황류담 남쪽에는 무너진 석성(石城)이 있으니,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몸을 숨긴 곳이라 한다. 예전에는 문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길조차 보이지 않는다. 명경대 뒤쪽으로 돌아가면 황사굴(黃蛇窟), 흑사굴(黑蛇窟)이 있고, 조금 더 나아가니 입을 벌린 듯한 문이 있다. 몸을 구부려야 겨우 지나갈 수 있으니, 곧 금강문(金剛門)이다. 금강문 오른쪽에는 허리를 굽힌 채 머리를 들고 계곡 쪽을 향해 엎드린 구암(龜巖)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여기서부터 경치는 더욱 그윽하고 절경을 이룬다. 해탈봉(解脫峰)을 바라보며 동쪽으로 가니, 숲은 울창하고 돌에는 이끼가 끼어 황량한 옛터가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마의태자의 궁궐이 있던 곳이라 한다. 그 앞의 계곡 암석에 새겨진 「서라벌의 의열(義烈)과 북방의 뛰어난 경치(東京義烈 北地英風)」는 마의태자가 직접 쓴 글씨이다.

2. 영원암

 

또 원각문(圓覺門)을 지나 계곡 하나를 건너면 왼쪽에 태자가 말을 묶었다는 바위가 있다. 이곳은 태자의 윗궁전 자리라고 한다. 그곳에서 3리 가량 가면 두 갈래로 길이 나누어지는데, 동쪽으로는 망군대(望君臺)와 백탑동(百塔洞)이 있고、남쪽으로는 영원암(靈源庵)이 있다. 계곡 을 벗어나자 초목이 울창하여 길이 희미해졌으므로 심히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먼저 간 사람들이 길가 바위 위에 주먹만한 돌을 쌓아 놓았으므로 이를 보고 길을 찾아 나아갔다.

 

암자에 올라 보니 주위 경관이 그야말로 절묘하고 빼어났다。주지인 상월(霜月) 선사는 매일 오후불식(午後不食)하고, 서울의 비구니인 홍상근(洪祥根) 씨는 백일기도 중이었다. 기흔(琪昕) 사미가 안내를 맡아 설명을 해주었다.

암자의 동쪽에는 영원 조사(靈源 祖師)의 배석대(拜石臺)가 있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니 공중에 우뚝 솟아 있는 지장봉(地藏峰), 관음봉(觀音峰), 석가봉(釋迦峰)이 한눈에 들어왔다. 영원 조사께서 예배드렸던 반석이 예전에는 갈라져 있었는데 지금은 합쳐진 자국이 완연하였다. 그 옆에는 동자석(童子石)이 서 있고 삼인봉(三人峰)이 있다.

 

서쪽으로는 옥초대(沃焦臺)가 있는데、그곳에서 바라보니 남쪽으로 염라봉(閻羅峰). 시왕봉(十王峰). 판관봉(判官峰). 죄인봉(罪人峰). 사자봉(使者峰). 우두봉(牛頭峰). 마면봉(馬面峰)이 줄지어 서 있있다. 명경대 계곡과 이곳은 그야말로 명부세계(冥府世界) 그대로였다. 영원암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그 역사를 들으니, 고려 충혜왕 4년 계미년(1343)에 굉변(宏卞) 대사가 창건한 이래 580여 년이 되었다고 한다.

 

3. 망군대와 백탑동

 

5월 6일, 돌아가는 길에 망군대(望軍臺)로 향하였다.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매일 궁궐 뒤쪽의 봉우리에 올라 군왕(君王)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금치 못했다고 하여 망군대라 하였다는 것이다. 몇 리를 더 나아가 상하 수렴동(水簾洞)에 이르렀는데, 경치가 참으로 장관이었다. 차츰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올라가니 길은 더욱 험준하였고, 오른쪽으로 경사진 곳 왼쪽에 폐허가 된 도솔암 터가 있다. 그곳에서 마신 물은 맑기가 그지없었다.

 

조금 더 위쪽의 수십 길이나 되는 곳에 나무로 짜서 만든 184 층계를 올라, 우뚝 솟은 망군대 정상에 도달했다. 사방을 돌아보니 금강산이 한눈에 보였고, 비로봉 또한 마주 서 있었다. 망원경으로 주위를 두루 감상하고 몇 시간 후 되돌아 내려왔다.

 

길이 매우 위험하였으므로 근근이 평지에 이르러 백탑동(百塔洞)으로 나아가니, 몇 개의 천진탑(天眞塔)과 두 개의 문탑(門塔)이 나란히 서 있었다. 자연 암석이 겹쳐져 봉우리를 형성한 것들이 대부분 탑의 모양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백탑동이라 한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백성욱(白性郁) 박사가 안양암(安養庵)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 보았더니, 청년 십여 명을 데리고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며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암송하고 참선도 한다.

 

4. 장안사에서 표훈사로 가는 길

 

5월 6일、다시 만폭동(萬瀑洞)으로 향하였다. 장안사에서 3, 4리 정도 나아가니 명연담(鳴淵潭)이 있었다. 명연담 아래에는 하나의 큰 돌이 누워 있고, 그 옆으로 세 개의 돌이 마치 사람이 꿇어앉거나 엎드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나란히 있었다. 누운 돌은 금동 거사(金洞 居士)요, 나란히 있는 세 돌은 금동 거사의 아들이라고 한다.

 

명연담 왼쪽의 일직선으로 된 돌길 옆은 절벽으로, 양쪽 절벽에는 나무다리가 가로놓여 있다. 이 다리를 건너 수리를 가자 몇 채의 승촌(僧村)이 보이고, 승촌을 지나자 영선정(迎仙井) 위로 경성의 민영휘(閔泳徽) 씨 별장인 청학관(靑鶴觀)이 나타났다. 가서 보니 집 모양이 매우 묘하고, 마시는 물이 맑고도 시원하였으며, 좌우로는 기이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성당(惺堂)의 서폭과 용구(用求)의 필법과 관재(貫齋)의 살아 있는 듯한 그림이 벽들을 황홀하게 수놓고 있었다.

 

다시 영선교(迎仙橋)를 건너 표훈사 동천(表訓寺 洞天)으로 들어갔다. 길가에 우뚝 선 바위 앞면에 새겨 진 세 분 부처님은 나옹 조사(懶翁 祖師)의 조각이요, 뒷면의 육십불(六十佛)은 금동(金洞) 거사의 조각이며,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도 같은 때에 조각하였다고 한다. 또한 「삼불암(三佛岩)」 글씨는 윤사국(尹師國)의 필적이다.

 

백화암(白華庵) 옛터에는 청허(淸虛) 선사 등 고승의 진영(眞影)을 모신 수충영각(酬忠影閣)과 승려들의 초막집 몇 채가 있었다. 조금 더 나아가니 청허 선사와 평양 풍담(楓潭) 선사의 비석이 있고、옛 조사의 부도 몇 기가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니 함영교(含影橋)가 보이고、다리를 건너자 표훈사가 나타났다.

 

5. 마의태자에 대한 필자의 해설

 

마의태자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56대 경순왕의 태자인 왕자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935년(경순왕 9)에 경순왕이 더이상 국가를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고려에 나라를 넘기고자 했다.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 왕건(王建)의 세력에 눌려 더이상 국가를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935년(경순왕 9)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부(歸附)하고자 하였다. 이에 마의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으니 힘을 다하지 않고 1000년 사직을 가벼이 남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을 더이상 죽일 수 없다 하여 시랑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국서를 보내어 고려에 항복하였다.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왕을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 : 금강산의 겨울 이름)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초식으로 연명하며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마의태자’라는 명칭은 그가 베옷을 입고 일생을 보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의 미륵사지는 도로 옆에 자리한다. 절이 산에 있지 않고 길가에 자리한 셈이다. 그 까닭은 길에 있다.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 기록된 길은 신라 아달라왕이 156년에 연 계립령(525m), 지금의 하늘재다. 하늘재는 미륵사지에서 곧바로 연결된다. 미륵사지 바로 위에는 고려 시대 원 터가 자리한다. 미륵대원은 당시 사람들이 왕래하던 길가에 세운 숙소이다.

 

미륵사지에는 보물 95호인 미륵리 오층석탑과 보물 96호인 미륵리 석불입상 등이 그 터에 있으며,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전설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현재 법주사의 말사인 미륵세계사가 위치하고 있다.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딸 덕주공주는 나라가 망하자 금강산으로 떠났다. 도중에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제천시 한수면 송계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게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미륵대원지에 석굴을 지어 북쪽 덕주사를 바라보게 했다는 전설이다. 실제로 석불은 남쪽을 등지고 북쪽으로 덕주사를 품은 월악산을 바라본다.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는 양병을 위한 장소를 오대산으로 정하고 길을 떠났다. 계속 북상하다가 산간협곡에 숙박 야영지를 마련하고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그날 밤 태자는 꿈에 관음보살을 만난다. 보살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큰 터가 있으니 그곳에 절을 짓고 석불을 건조하고, 그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니 포덕함을 잊지 말라”고 했다.

 

잠에서 깨어난 태자는 덕주공주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같은 시간에 공주도 그와 같은 현몽을 받았다고 하였다. 다음날 새벽 서쪽을 향해 고개를 넘어가던 중 고개마루턱에 한 권의 포경문을 담은 책이 있었다. 고개를 넘어 현몽한 대로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최고봉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 석불입상을 세우고, 마주 보이는 영봉 밑에 마애불상을 조각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경순왕조의 마의태자 기록은 다음과 같다. “왕자가 말하였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합하여 스스로 굳건히 힘을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 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 왕자는 통곡하면서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그 길로 개골산(皆骨山 : 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금강산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담긴 장소가 많은데 태자성(太子城), 용마석(龍馬石), 삼억동(三億洞) 등이 있다. 비로봉 정상에서 외금강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비탈길에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을 마의태자릉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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