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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통도사 진신사리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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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화요칼럼통도사 진신사리의 수난

통도사 진신사리의 수난

1. 통도사 진신사리탑

고려시대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사리 내용이 나온다. 삼국유사 앞뒤로 가져온 사리(前後所將舍利) 제3권 탑상 제4(三國遺事 卷第三 塔像 第四)에 신라 선덕왕 때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법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부처님의 입던 가사 한 벌을 가져온 내력이 나온다.

“선덕왕(善德王) 시대인 정관(貞觀) 17년 계묘(서기 643)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부처의 머리뼈와 어금니, 부처의 사리 100개와 부처가 입던 붉은 비단에 금색 점이 있는 가사 한 벌을 가져왔다.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皇龍寺) 탑에 두고 하나는 태화사(太和寺) 탑에 두고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通度寺)의 계단(戒壇, 승려가 계를 받는 단이다.)에 두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통도사의 계단은 두 층이 있는데, 위층 가운데에 돌 뚜껑을 모셔두었는데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모양 같았다.”

 

고려시대 고위 권력자들이 호기심에서 통도사 진신사리탑에 봉안된 진신사리를 직접 보고 싶어 사리탑 뚜껑을 여는 일이 있었다. 안렴사(按廉使)는 1276년(충렬왕 2)의 관제개정에 따라 안찰사(按察使)를 개칭한 것이다. 1298년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는 땅이 넓고 일이 많아 안렴부사(按廉副使)를 더 두었다. 충선왕 즉위 후에 제찰사(提察使)로 고쳐졌다가 충숙왕 때 다시 안렴사로 되었다. 삼국유사에 다음의 내용이 나온다.

 

세상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우리 고려 때 두 안렴사(按廉使)가 차례로 와서 계단에 예를 올리고 돌 뚜껑을 들어 돌솥을 들어보았더니,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돌 함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다음에는 큰 두꺼비가 돌 속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로부터는 감히 뚜껑을 들고 들여다보지 못하였다.”

 

고려시대 상장군 김이생, 시랑 유석이 통도사를 방문하여 스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을 시켜 진신사리탑 돌 뚜껑을 열어 진신사리를 구경하였다. 상장군은 고려시대 중앙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무반으로는 최고 품계인 정3품이었다. 시랑은 고려 태조 때 광평성, 내의성의 차관급이었으나 성종, 문종 때 상서6부의 정4품 벼슬로 정착되었다. 다음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최근에 상장군 김이생(金利生) 공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고 강동(江東)을 지휘할 때, 부절을 가지고 이 절에 와서는 돌 뚜껑을 들고 예를 올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절의 승려들이 지난 일을 들면서 어려워하였다. 그래서 두 공이 군사를 시켜서 돌 뚜껑을 들게 했는데, 그 안에는 작은 돌함이 있었고 그 속에는 유리통이 있었고 또 그 통 속에는 사리가 겨우 네 알만 들어 있었다.

 

서로 돌려보면서 경배를 올렸다. 그런데 통이 조금 상한 곳이 있어서, 유공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함 하나를 시주하여 함께 보관하도록 하고 그 일을 기록해 두었다. 이때는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지 4년째인 을미년(서기 1235)이었다.

 

삼국유사에는 부처님 진신사리의 신묘한 모습이 나온다. 한편 몽골군의 침입으로 황룡사 9층목탑이 불탈 때 통도사와 황룡사에 나누어 봉안한 진신사리가 동일한 반응을 보인 내용이 나온다. 다음은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고기(古記)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 “사리 100개를 세 곳에 나누어 보관했는데, 이제 다만 네 개뿐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보이지 않기도 하고 보이기도 하므로 수효가 많고 적은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또 세상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에 돌솥의 동쪽 면에 처음으로 커다란 얼룩이 생겼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당시가 요(遼)나라 응력(應曆) 3년 계축(서기 953)으로 고려 광종 4년이었으며, 탑이 세 번째로 불타던 때였다. 조계종의 무의자(無衣子)가 시를 남겼는데, “듣건대 황룡사 탑이 불탔던 날에, 연이어 한쪽 면이 불에 타 차이가 없었다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지원(至元) 갑자년(서기 1264) 이래로 원나라 사신과 본국 사신들이 다투어 와서 이 돌함에 예를 올렸고, 사방의 행각승들이 모여들어 예를 올렸는데, 혹은 돌 뚜껑을 들어보기도 하고 혹은 들지 않기도 하였다. 진신사리 4개 이외에도 변신사리가 모래처럼 부서져서 돌함 밖으로 나타났는데, 이상한 향이 진하게 풍기며 여러 날 동안 없어지지 않는 일이 가끔 있었다. 이것은 말세에 나타난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이었다.

 

2. 통도사 세존비각

통도사에서 가장 큰 건물은 대규모의 법회를 열기 위해 건립한 설법전이다. 1992년 당시 국내 최대 목조 건물로 건립하여 강당의 역할을 하고 있다. 500평 규모에 2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 반대로 가장 작은 건물은 세존비각이다. 기둥만 있고 벽이 없으며, 지붕을 덮은 아주 작은 건물로 1792년에 지었다.

비(碑)란 공적을 오래도록 전하려는 것이요, 각(閣)이란 그 비를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세존비는 1706년에 세워졌다. 계파(桂坡) 성능대사性能大師)가 금강계단을 중수하면서 비석을 세웠다. 사바교주석가여래영골부도비라고도 한다. 비문에는 부처님 진신사리와 관련된 내용이 나와 있다. 부처님 진신사리에 대한 설명과 역사에 대해 상세히 기록을 남겨 금강계단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둔 일종의 문화재 해설서이다.

통도사 세존비각(世尊碑閣)은 중로전(中爐殿) 영역에 있는데, 개산조당과 해장보각의 서쪽 편 금강계단 옆에 바짝 붙어 있다. 세존비각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서,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였고 평방은 가설하지 않았다. 공포(栱包)는 출목(出目)이 있는 주심포식으로, 살미첨차는 쇠서의 형태로 조각하였다.

 

세존비각은 1706년(숙종 32) 승려 계파(桂坡) 성능대사(性能大師)가 금강계단을 중수하면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소장하게 된 내력을 자세히 밝힌 비가 세워진 다음 지은 것이다. 세존비각 내부에 있는 비석의 높이는 약 2.5m, 폭 1m 정도인데, 밀양의 표충비처럼 간혹 땀을 흘린다고도 한다.

 

비문은 수사간(守司諫)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이 짓고 글씨는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석비 뒷면의 비음(碑陰)은 성능대사(性能大師)가 짓고 보윤대사(普允大師)가 썼는데, 이곳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행적(行蹟)과 함께 각지(各地)의 시주(施主)내용을 적었다.

 

비각 가운데에 귀신 문양을 조각하였고, 양쪽에는 단순한 꽃무늬를 조각한 비석 받침이 있으며, 천장에는 비석을 내려다보는 용의 형상을 만들었다. 비석은 ‘사바교주석가여래영골부도비(娑婆敎主釋迦如來靈骨浮屠碑)’라는 또 다른 비명(碑銘)이 있다.

 

비석은 자장국사가 중국에서 석가모니의 사리를 가져온 일과 임진왜란 때에 사명대사가 석가모니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둘로 나누어 금강산에 있는 서산대사에게 보냈더니 서산대사가 하나는 묘향산에, 다른 하나는 현재의 계단에 두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3. 진신사리의 왜구 탈취와 수난

 

사리의 수난과 위기 극복 사례는 월간 통도 2023년 2월호에 잘 나와 있다. 명나라 홍무 10년(1377년) 정사년에는 왜구가 양주에 들어와 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월송대사가 구덩이를 파서 숨겼다. 다시 찾아서 짊어지고 도망가는데 추격이 급해지자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내려 벗어날 수 있었다. 사리는 신성한 보물로서 왜구들이 끊임없이 수탈해가려고 하였다.

 

조선 선조 임금 임진년(1592년) 왜구가 침략하여 영남지방이 가장 먼저 함락되어 통도사도 위기를 겪게 되었다. 왜군은 무차별로 백성들을 죽이고 재물과 귀중한 문화재를 약탈했다. 사찰을 불태우고 귀중한 문화재도 마구잡이로 훔쳐갔다. 통도사도 위기를 면할 수 없었으며 사리도 왜군이 노렸다.

 

왜적들이 끊임없이 사리를 수탈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통도사 스님들은 지켜냈다. 위기가 자주 발생하여 언제 다시 빼앗길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사명대사 유정 스님은 금강산에 있는 휴정대사에게 사리를 전하며 지켜주기를 당부드렸다. 고민하던 휴정 스님은 다시 사리를 남쪽으로 내려보냈다.

 

“영축산은 수승한 곳으로 문수보살의 명을 받은 자리이다.··· 저들의 뜻을 관찰해보면 얻고자 하는 것은 황금과 구슬이지 믿음의 보배는 아니다. 그러니 전과 같이 단에 봉안하고 수리하는 것이 좋겠다.”

 

사명 스님은 휴정 스님의 뜻을 이해하고 금강계단을 다시 온전히 수리하여 사리를 모셨다. 1706년 계파 성능대사가 금강계단을 중수하면서 이러한 내용을 기록하여 비석을 세운 것이다. 성능대사는 마지막 문장에서 “내가 방장산으로부터 와서 백 겁을 지나도 만나기 어려운 성골을 외람되이 봉안하고 예를 올리며 보단을 중수하고 비석에 새겼다. 일을 마치자 슬픔과 감격으로 눈물을 쏟으며 발문을 삼가 발문을 쓴다.” 고 기록을 남겼다.

 

통도사의 진신사리는 자장율사가 절을 세운 이후 여러 번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도난의 위험에 처하기도 했지만 스님들이 목숨 걸고 수호한 덕분에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진신사리를 지켜온 과정이 세존비에 기록되어 있다. 세존비각은 진신사리탑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대웅전과 금강계단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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