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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와이뉴스 총괄이사,조선시대 역참제도 운영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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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와이뉴스 총괄이사,조선시대 역참제도 운영의 문제점

 

 

 

1. 역참 운영을 위한 토지 지급

역참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경비 조달을 위해 역전(驛田)을 운영하였는데, 역토(驛土)라고도 한다. 역전은 사신 왕래 및 역사의 수리, 사무용품 등을 구입하는 역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지급되었는데, 그 지급형태에 따라 공수전(公須田)·마위전(馬位田)·유역인전(有役人田: 長田·副長田·急走田)·아록전(衙綠田)·복호결 등으로 구분되었다.

조선시대 역전은 다음과 같다. 공수전(公須田)은 대로(大路) 20결(황해도 45결, 평안·함경도 40결), 중로(中路) 15결(평안·함경도 22결), 소로(小路) 5결(평안·함경도 8결)이었다. 마위전(馬位田)은 대마(大馬) 7결(緊路 8결), 중마(中馬) 5결 50부(緊路 6결), 소마(小馬) 4결(緊路 4결 50부)이었다.

유역인전(有役人田)은 마전(馬田) 2결, 부장전(副長田) 1결 50부, 급주전(急走田) 50부(緊路 1결), 아록전(衙祿田)은 5결이었다. 아록전은 각 주현의 수령과 서울 부근 각 도진(渡津)의 도승 및 좌·우 수참(水站)의 수운판관 등의 녹봉에 상응하도록 절급한 수조지이다. 이상의 각 아록전은 모두가 민전(民田) 위에 설정된 각자수세(各自收稅)의 수조지였으니, 당해 토지의 조세는 국가로 납입되는 대신 해당 관원이 거두어 쓰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유역인(有役人)의 하나인 역리에게는 역역의 반대 급부로서 인위전(人位田), 즉 장전(長田)의 형태로 2결씩을 지급하였다. 그것은 과전법에 입각한 토지분급제에 의하여 절급된 분급수조지(分給收祖地)로서, 수조권을 바탕으로 민전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토지의 성격을 띠었다.

반면에 역리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로서 사전(私田)의 성격을 띤 소경전(所耕田), 즉 소유권에 입각한 사전을 보유하고 있었다.이러한 역리전의 경영은 원칙적으로 직접 경작하는 것이었으나 점차 전주(田主)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수조권적 토지 경영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역리 소경전의 경우는 역리와 동거하는 자의 가족 노동이나 경작에 의해서 경영되었다.

그리고 역노비에게도 역역의 대가로서 토지를 지급하였는데, 전운·급주 노비에게 지급된 구분전(口分田)이 그것이다. 이 구분전은 1425년(세종 7)에 전운노비에게 50부, 급주노비에게 1결씩 지급되었으나 1445년(세종 27) 국용전(國用田) 설치와 함께 구분전이 폐지되자 『경국대전』 반포 시기에는 급주전 50부(긴요한 길에는 1결)를 지급하는 것으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이 구분전은 대체로 한전(閑田)과 진황전(陳荒田) 및 목장전이나 군자전(軍資田)으로써 나누어 주었다. 이 구분전 경영 역시 직접 경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경작전을 지급하였으나 직접 경작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거나 맡겨서 세금을 받기도 하였다. 『경국대전』 시기에는 전답을 타인에게 맡겨 경영하고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토지 경영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다.

 

2. 역참 토지 제도의 문란

 

역전(驛田)은 운영은 법에 명시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공수전은 비옥한 토지가 지급되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측량이 오래된 하천 부지나 홍수로 무너지기 쉬운 척박한 토지를 지급하는 형편이었다.

 

조상 대대로 경작해 온 평민전의 일부를 지급함으로써 평민과 역리간의 토지경작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면 하천으로 변해 버린 토지가 대량 발생하였으며 좋은 땅은 토호들의 점탈대상이 되어 역의 재정 확보에 상당한 차질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공수전의 경영은 초기에는 역리나 관군 등이 직접 경작하는 자경(自耕)이 원칙이었으나, 역노비나 일반 농민의 소작제(小作制)에 의해서 경작되어 세금을 받는 민전수세지(民田收稅地)의 성격을 띠었다.

 

마위전은 역마를 사육하여 각 역에 세우고자 하는 입마 대상자(초기에는 역호, 후기에는 마호)에게 지급된 토지로서 대마는 7결, 중마는 5결 50부, 소마는 4결씩 지급하였다. 마위전 역시 평민전이나 군자전 또는 공전(公田)을 지급하였다. 또 역 근처의 양전(良田), 즉 비옥한 토지를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마위전 역시 본역과 멀리 떨어진 곳의 토지를 지급받거나 돌이 많고 메마른 땅을 지급하여 하천이 터져 물이 논밭으로 흘러 모래땅이 된 토지가 된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민전에 혼입(混入)되거나 토호 및 양반에 의해 탈취되는 실정이었다.

 

마위전의 경영은 자경무세지(自耕無稅地)로서 입마자의 자경에 의해서 경작되었다. 그러나 본역에서 먼 곳에 있거나 역역이 무거워 직접 경작할 수 없을 때는 타인에게 차경(借耕)하게 하여 세금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이와 같은 역전의 경영에서 차경화(借耕化), 즉 소작제적 경영은 관군(館軍)에게 주어진 마위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마위전의 경영형태가 소작제적 경영방식에 의거 도조(賭租)를 수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마위전의 사사로운 전매, 그리고 토호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역제의 붕괴를 자초하는 요인이 되었다.

 

3. 황산찰방(黃山察訪) 조석목(趙錫穆)의 폐정(弊政) 개혁 상소문

 

양산시 물금읍 서부마을에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중요한 역인 황산역이 있었다. 찰방은 역의 최고 책임자로서 조선 정조 4년(1780)에서 5년(1781)까지 황산찰방을 지낸 조공의 휘(諱)는 석목(錫穆), 자(字)는 원중(遠仲), 관향은 풍양(豊壤)이다. 공은 정조대 정언(正言), 이랑(吏郞), 지평(持 平), 장령(掌令), 헌납(獻納), 집의(義), 사간(司諫), 승지(承旨) 등의 요직을 거쳤다. 조석목은 황산역에 부임하여 역참 운영의 실태를 파악하여 문제점응 시정하고자 상소문을 올렸다.

 

조가(朝家)에서 역로(驛路)를 설치하는 것은 명령전달을 중하게 여김이다. 내가 이 우역 (驛)에 도임(到任)한 초기에 각 역의 민막(民瘼)을 채탐(採探)하여 보니 폐단이 불일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보전될 수 없었다. 만약 그럭저럭 시일만 보내고 개정하지 않는다면 중국 의 병수(洴水)나 위수(渭水)와 같은 중요한 지역이 장차 공허하게 되는 환난을 불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가(朝家)에서 역을 설치한 본의가 아니므로 그 고폐(痼弊)중의 3,4개 조항을 추려서 참작 개혁, 영구한 정식으로 삼아 만일의 도움으로 삼으려 한다. 그리하여 하기(下記)와 같이 열거하여 절목으로 삼는 것이니 나중에 도임하는 군자는 혹 불긴(不緊)한 것으로 보지만 말고 영구히 폐기하지 않는다면 다행이다.

 

一. 춘추(春秋) 양등(兩等)으로 납부하는 소조(燒租)는 관청[공해(公廨) : 관아]에서 일년간에 쓰게 되는 시탄대(柴炭代)로 납부하는 물자인데 근래에는 금전으로 조(租)를 대납(代)하므로 받아들이는 대전(代錢)이 해마다 증가하여 매석(每石)의 값이 혹 삼량에 이르기도 하며 비록 풍년(豐年)이 든 해라도 또한 이냥 오·육전이란 다액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이는 실로 가격 외로 지나치게 받아 들이는 것으로서 그 폐단이 적지 않다. 금춘(今春) 으로부터 연사(年事)의 풍흉을 막론하고 소조 일석(一石)의 대전(代錢)을 일냥 사전씩 받아 들이기로 영구한 정식으로 삼을 것.

 

一• 각 역에서 수납하는 부연 세조(赴燕 貰租)는 북경으로 가는 마부들에게 지급하여 주는 물자이다. 그런데 이른바 세조가 모조리 하인배들의 개인 호주머니에 돌아가기 때문에 마부 등의 여비(資裝)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게 되었다. 금년부터 이를 영구히 혁파 할 것이며 그 대신 매역에서 일냥 팔전 이분씩을 받아 부연 마부에게 주어 여비에 보태도록 할 것.

 

一. 각 역에서 매년 삭지(朔紙 : 관리, 성균관 유생에게 매달 주는 한지)를 납부하는 것은 이미 정수(數)가 있으므로 갑자기 가감할 수 없는 것인데 근래에 들어 갑자기 대전(代錢)으로 봉납(捧納)하며 더하여 매역(每驛)에서 내는 삭지의 대전(代錢)이 해마다 배증하여 8·9량(兩)이란 다액에 이르고 있다.

 

이것 또한 강제로 무리하게 억지로 받아 이는 하나의 폐단이다. 금년부터 매역 에서 내는 삭지의 대전을 가감없는 4냥씩으로 봉납하되 그 중에서 휴산역(休山驛 :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과 소산역(蘇山驛 :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은 매우 영세하므로 삼냥씩으로 봉납하는 것을 정식을 삼을 것.

 

一. 무흘(無屹驛 : 밀양시 삼랑진읍 대천마을)은 직도에 위치하여 있고 역에 거주하는 인물이 4,5戶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역역(役)이 배중(重)하고 공행(公行)의 왕래가 날마다 끊이지 않으므로 사람은 집에 있을 날이 없고 말은 우리에서 쉴 때가 없어 간신히 참(站)을 지켜가기 때문에 절참지경(絶站之境)에 이르러 각별히 생각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다. 금년의 춘등(春等)으로부터 소조(燒租)를 모두 혁파하며 유로전(錢) 이십냥내에서 오냥은 영구 히 감하여 줄 것.

 

一. 휴산역(休山驛)과 소산역(蘇山驛)은 변방의 관문에 위치하여 있고 역에 거주하는 인물이 다만 몇 집만이 남아 있으므로 책응(責應)에 난감함이 무흘(無屹)보다 십배나 된다. 양역(兩驛)의 형세는 자못 강노(强弩)의 끝과도 같으니 또한 돌 보아야 할 방도가 없을 수 없다.

 

휴산역은 그 소납所) 중에서 신연(新延)할 때의 마부 자장과 유로전을 아울러 영구히 혁파할 것이며, 소산역은 소납(所納)중에서 유로전 이십 오냥 내의 십냥을 영구히 감하여 주고 신연(新延)할 때의 마부자장 또한 영구히 혁파할 것.

 

一. 각 역에서 구피(狗皮) 이령(二齡)을 봉납하는 일이 있다 하나 이것은 용도의 명색이 없는 것이다. 비록 미세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퇴각시키거나 개납(改納)시키거나 할 즈음에 그 폐단이 적지 않으니 이 또한 영구히 혁파할 것.

 

一. 유로전(留路錢) 4백냥은 곧 매년 각역에서 납부하는 물자인데 이는 관가에서 출행(出行)할 때의 용도와 공사(公事)로 심부름을 나가는 하인들에게 계정(計程)하여 지급하는 자량(資糧 : 자재와 양식)의 비목(備目)이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범용(犯用)이 많아 관아에 머무는 객들이 원근간에 왕래할 때나 무상 출입할 즈음에 이 돈을 비용으로 쓰므로 일년에 쓰 는 것을 계상한 수가 부족하게 되는 폐단을 면하지 못하여 다음 해에 받을 것을 미리 당겨 쓰고 있다.

 

이는 예사로운 고막(痼瘼)이 아니다. 또 4백량 내에 3개역의 소감이 35량이란 다액에 이르고 있으니 준절히 쓰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되겠다. 이 후로는 책방(冊房)의 원근(遠近) 행자(行)와 과외(課外)의 공비를 결코 이 돈에서 범용(犯用)하지 말 것을 정식으로 삼을 것.

 

一. 유산역(由山驛 : 양산시 화승R&A공장 앞 도로변)의 영세함은 다른 역과 다름이 없으나 본군(本郡)의 지척에 있기 때문에 대소 별성(大小 別星 : 奉命 使臣)이 입군(入郡)하여 유숙할 때에 허다한 인마(人馬)의 공궤(供饋 : 음식 접대)를 여기서 독당(獨當 : 혼자 담당)하고 있으니 그 돌보아 주어야 할 방도야말로 어찌 여타 역과 다르겠는가. 그 수납 중에서 부마 자장을 영구히 혁파할 것.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 역참 제도의 운영은 역전(驛田)의 확보와 지급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각 역에 부과되는 다양한 세금도 많아 이를 견디지 못한 역리의 이탈과 도망으로 역참 운영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황산찰방을 지낸 조석목은 황산역 운영을 하면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러한 폐정을 고치기 위하여 상소문을 올렸다. 황산역의 문제점은 전국의 다른 역도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폐단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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