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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박제상 공 효충사를 정비한 황래성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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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박제상 공 효충사를 정비한 황래성 회장

1. 국가무형문화재 제124호 황수로 궁중채화장

황수로 회장은 2013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24호 궁중채화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동국대 종신 석좌교수이며 경남도 문화재위원이다.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를 꾸준히 개최하였으며, 국외 전시 및 국내 전시를 통해 궁중채화 문화를 널리 알리고 보급하고 있다.

한국궁중꽃박물관 설립자이자 초대 관장의 본명은 황을순(黃乙順), 아호는 수로(水路)이다. 남편 최위경 박사의 은사인 향파 이주홍(이주홍, 1908~1996년) 선생이 지어주었다. 최위경 박사는 일본 도쿄대학에서 “한국 근해 어패류의 미생물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수로부인은 순정공(純貞公)의 부인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향가(鄕歌)인 「해가(海歌)」와 「헌화가(獻花歌)」의 주인공이다. 

한국궁중꽃박물관 야외에 「헌화가」 노래비가 있다. 수로부인과 황수로 화장(花匠)은 꽃을 지극히 사랑한 여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할 때 동행하다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 곁에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 바위 위에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수로부인이 그것을 보고 사람들에게 “누가 저 꽃을 꺾어다 주겠소?” 하고 물었으나 모두 안 되겠다고 하였다. 한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 가지고 와서는 「헌화가」를 지어 바쳤다.

황수로 화장(花匠)의 “한국 차의 유래와 그 예속에 관한 소고”는 근대 한국 차 문화의 발화점 중 하나가 되었다. 제4대 한국 차인(茶人) 연합회 이사장을 맡으며 차 문화 생활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2. 만고충신 박제상 공이 황수로 회장의 꿈에 현몽

 

황수로 화장(花匠)은 남편 최위경과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68년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귀국 후 부산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 일맥 황래성 회장(1914~1997년)이 함께 갈 곳이 있다고 하며 자동차에 태워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양산천 앞에 차를 세웠다고 한다. 물은 깊고 돌다리는 낮아 양산천을 건널 수 없었다. 마을 청년과 아저씨들이 일행을 한 사람씩 업어서 양산천 둑에 건네주었다.

그 당시 소토리 마을은 짙푸른 밤나무 숲과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는 버려진 벌판이었다. 수로는 아버지에게 “저 여기 와봤는데요.”하고 말했다. “니가 언제 와봤단 말이고?” “며칠 전 꿈에 이 밤밭에 와봤어요. 마을 산 기슭에 장군의 사당이 있고요.” “이 아이가 참 희한한 소리를 하네. 이장 어른! 저 산기슭에 정말 사당이 있소?”

이장의 안내로 도착한 소토리 효충마을의 언덕 산기슭에 퇴락한 작은 사당이 잡초 속에 묻혀 있었다. 이장을 시켜 잡초를 쳐내고 사당의 녹슨 자물쇠를 열게 했다. 효충사(孝忠祠)라는 낡은 현판이 붙어있었다. “아버지! 여기는 장군님의 집이라예, 장군님이 꿈에 나타나 저에게......” 아버지는 급히 수로의 입을 막았다. 집에 돌아와 비로소 자세한 꿈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아버지! 며칠 전 꿈에 무서운 장군 옷을 입은 장군들이 저를 찾아와 아까 본 그 사당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사당 안에는 당당한 큰 장군이 칼을 차고 앉아 있었고요. ’내가 부인을 부른 것은 청이 있어서요. 내 집이 비좁고 초라하여 부하들과 기거하기가 매우 불편하오. 집을 좀 고치고 길을 넓혀주시오. 그러면 부인께 보답하겠소,‘ 하면서 제게 흰 두루마리를 하나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참 신기한 일이다, 이 꿈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말아라.” 하며 엄중히 당부하였다.

아버지는 따로 사비를 털어 효충사 인근 땅을 사들이고 3년여에 걸쳐 효충사 진입로를 넓히고 사당을 아늑하게 단장하는 공사를 했다고 한다. 증축 공사가 완료될 무렵 어머니의 꿈에 “부인의 수고로 우리 부하 장군들이 편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선몽하였다.

 

3. 황래성 회장이 사재로 정비한 효충사

 

효충사는 황수로 회장의 부친인 일맥 황래성 회장의 열정으로 정비를 하게 되었다. 효충사는 1960년대에 지역의 향토사 연구가 안종석이 사비를 들여 건립하고, 이후 해마다 유림에서 제를 올렸다고 한다. 1975년에 태창기업 황래성 회장의 협조로 담장을 정비하고, 1988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다.

황수로 화장(花匠)은 경상남도 문화재위원이었던 은사 정중환 박사에게 박제상 장군의 사당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안종석은 1845년 양산군수로 재임했던 한긍인이 건립한 비문에 따라 이 지역이 박제상의 주거지라고 확정했다.

상북면 소토리는 과거에 소태, 소토, 소로, 수두라 부르던 것을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지금의 이름으로 정했다. 효충마을은 박제상 공의 출생지라고 추정하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2000년대 들어 양산시에서 이 지역을 역사 문화 공원으로 조성하려고 하자 일부 주민들이 문화재 지정에 따른 재산권 침해를 우려하면서 박제상이 효충마을 출신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이에 양산시는 경북대학에 의뢰하여 박제상 공이 삽량주(歃梁州) 간(干)으로 있을 당시 고향에 건립했다고 하는 징심헌(澄心軒)이 현재의 효충사 자리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박제상은 징심헌에서 『부도지(符都志)』 등이 수록된 『징심록(澄心錄)』을 썼다.

박제상 공은 신라시대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효충사 사당 안에는 박제상과 그의 아들 백결 선생 문량(文良)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박제상은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가 있던 눌지왕의 두 아우를 구출하기 위해 왕명을 받들어 고구려에 들어가 복호를 구출하였다. 이에 왕은 왜에 볼모로 가 있는 미해를 부탁하자 집에 들어가지 않고 곧장 왜로 향했다.

왜국에 들어 간 박제상은 계략을 세워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자신이 불모로 남게 된다. 왜왕은 박제상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 줄 것을 회유하였으나 박제상은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거절하였다. 왜왕은 고문을 가하여 발바닥의 껍질을 벗기고 불태워 죽였다.

신라시대 만고충신 박제상 공의 사당이 옛날 퇴락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황수로 회장의 꿈에 박제상 공이 나타나 사당과 주변 길을 정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황수로 회장은 부친인 일맥 황래성 회장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다. 황래성 회장은 기꺼이 사재를 들여 효충사를 정비하였다. 현재의 ’박제상 효충공원‘이 있기까지의 초창기 공로자들인 황수로 회장과 그의 부친인 황래성 회장의 공적을 양산시민들은 잊지 말아야 하겠다.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있는 박제상기념관은 잘 운영되고 있으나 양산시의 효충사는 운영이 원활하지 못하다. 문화관광해설사도 배치되지 않고, 당초 징심헌 내부에 전시관 설치를 계획했으나 실행되지 않고 있다. 전시관은 향후 별도 건물로 신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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