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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이예 선생을 모신 석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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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화요칼럼,이예 선생을 모신 석계서원

이예 선생을 모신 석계서원

1. 석계서원(石溪書院)

울산시는 옥동∼농소(남부순환도로∼중구 성안동∼북구 오토밸리로) 구간은 ‘이예로’로 정했다. ‘이예로’는 조선 전기 대일외교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충숙공 이예(李藝, 1373∼1445년) 선생의 이름에서 따왔다. 양산시 7번 국도 우회로가 울산시의 ‘이예로’와 연계하여 ‘통신사로’로 명명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예 선생의 7세손인 이겸수 장군이 웅상지역에서 출생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왜군을 물리치고, 사명대사를 수행하여 외교적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 협상을 한 이겸수 선생은 위험을 무릅쓰고 서생포 왜성의 적정을 탐지하였다. 

 

적장인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간의 이간을 기획하여 왜군의 분열을 조장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양산시 소주동에 있는 남강서원은 죽재 이겸수 선생을 제향하고 있다. 이겸수 장군이 임진왜란 때 사용하였던 칼은 후손들이 양산시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조선초 외교관 이예 선생과 그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과 외교관으로 활약한 이겸수 선생을 기리는 울산시의 ‘이예로’, 양산시의 7번국도 우회로인 ‘통신사로’는 역사적인 의미가 매우 크다.

석계서원은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대복동천로 160-12에 있다. 이 서원은 충숙공(忠肅公) 이예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세웠다. 그 전신은 은월봉 아래에 있었던 용연사(龍淵祠, 1737년 창건)인데, 울산도호부사 권상일이 남구 신정동 은월봉 아래에 사당인 용연사를 짓고 이예 선생을 향사하였다.

1782년(조선 정조 6년)에 현재의 위치에 옮겨 짓고, 이름을 석계사(石溪祠)라 하였다. 1737년(영조 13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예(李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경내의 건물로는 상충사(尙忠祠), 경수당(敬守堂), 신문(神門), 적실재(蹟實齋), 치지재(致知齋), 주소 등이 있었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되었다. 1900년에 후손들이 서원 터에 단을 설치하여 향사를 지내오다가 1975년에 경수당과 필동문(必東門)을 중건하였다.

이후 1860년(조선 철종 11년)에 석계서원(石溪書院)으로 승격되었으나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이후 1915년에 강당인 경수당(敬守堂)과 출입문인 필동문(必東門)을 복원하였다. 2002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4년에 준공하였다. 매년 음력 9월 9일에는 학성 이씨 후손들이 시조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학성이씨 대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울산지역에서 보기 드문 조선시대에 건축된 서원이다. 서원내에 현존하는 건물로는 강당에 해당하는 경수당과 출입문에 해당하는 필동문이 있고, 서원에 딸린 정자로서 재천정(在川亭)이 있다. 경수당 뒤쪽에 사당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체적인 배치 형태는 강당 뒤쪽에 사당이 위치하는 전학후묘형이었을 것이다. 건축적 특징을 보면 경수당은 툇마루에 덧붙인 쪽마루 형태의 진입부가 특이하고 장초석 등의 세부 수법이 주목할 만하다. 

재천정은 정면 3칸, 측면 1.5칸의 규모로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 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다. 후면부에서 진입하는 방식으로,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 곁에 있는 독락당의 계정과 유사하다. 이 서원의 경수당과 재천정은 부재 수법 및 평면형식에서 볼 때 후기 양식으로, 건축사적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재천정은 죽오(竹塢) 이근오(李覲吾, 1760~1834년)가 건립하였다.

석계서원은 웅상지역의 서창동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석계서원 앞으로 웅상지역에서 흘러온 회야강이 지나가고 있어 경치가 좋다. 재천정의 이름은 천변에 있다는 의미인데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재천정은 현재 노후화 되어 목재가 썩은 부분이 있어 수리 중에 있다.

석계서원 안에는 백년 넘은 무궁화나무 보호수가 있다. 수령 100년, 수고는 5m, 나무 둘레 0.65m이다. 보라색 꽃이 피는 무궁화나무는 노쇠하여 철 받침대에 의지하고 있는 가지가 썩었으며, 나무도 많이 썩었다. 옆에 있는 하얀 꽃이 피는 무궁화나무는 아직 상태가 좋은 편이다. 화단 주변에 어린 무궁화나무도 몇 그루 있었다. 배롱나무가 꽃을 활짝 피워서 보기 좋았다.

석계서원 재천정 앞에 모과가 주렁주렁 달린 모과나무가 있다. 재천정 옆에는 큰 소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그중에서 제일 큰 곰솔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수령 250년~300년, 수고 24m, 나무 둘레 3.2m이다.

2. 이예의 외교 활동

이예는 1373년(공민왕 22) 울주군에서 태어나 1445년(세종 27) 73세로 생을 마감한 인물로 호는 학파(鶴坡)이며, 1910년 순종에게서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의 선대는 본래 사족(士族)이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대에 이르러 새 왕조에 협력하기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향리 신분인 울주의 기관(記官)으로 강등되었다. 

그 후 조선조에 들어와 현달(顯達)함에 따라 이예는 중시조(中始祖)가 되었고 울주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부친의 직을 계승하여 울주군의 기관으로 지내던 중 25세 되던 1397년(태조 6년) 생애의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였다. 1396년(태조 5) 12월 지울주사(知蔚州使) 이은(李殷)이 쓰시마 섬 왜구에게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이 생겼다. 이때 이예는 이은을 따라가 수개월 동안 포로 생활을 함께하면서 정성껏 시종하였고, 기지를 발휘해 이듬해 2월 이은을 구출하여 돌아왔다. 

이 공로로 그는 관직을 제수(除授)받았고, 이후부터 대일 교섭의 일선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그 후 3년 만인 1400년(태종 즉위년) 회례사 윤명(尹銘)을 따라 쓰시마 섬, 이키 섬, 혼슈(本州) 등을 필두로 일본과 류큐를 오가면서 이후 40여 년간 사행원으로서 피로인을 쇄환하고 조일 간의 외교 현안을 해결하는 데 직접 관여하였다.

이예는 쓰시마 섬 문제에 정통하였다. 1426년(세종 8) 사물 관압사(賜物管押使)로 쓰시마 섬으로 사행을 떠나기 전 임금이 그에게 쓰시마 섬을 왕래한 횟수를 묻자 모두 16번이었다고 대답하였다. 

1438년(세종 20) 이예가 경차관으로 쓰시마 섬에 파견되었을 때 조정에서 상경 왜인(上京倭人)의 유관(留館) 기간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세종이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자 모두 “이예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다시 숙의하게 하옵소서.”라고 건의하였고, 이를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이예는 대일 관계의 실무 사항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이예는 외교 실무적 경험을 바탕으로 태종대와 세종대의 대일 교섭에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실무자로서 핵심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세종실록』의 ‘동지중추원사 이예의 졸기(卒記)’에 따르면, “왜국에 사명을 받들어 가기가 무릇 40여 차례였다.”고 하였다. 태조대에서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파견한 사행은 모두 48회이다. 그 가운데 이예가 사행원으로 40여 회 참여하였다면 조선 초기 대일 사행에 대부분 참가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그의 경력은 조선시대 전 시기를 걸쳐서도 가장 많다. 

사행 시에 맡은 직책을 보면 보빙사, 회례관, 회례사, 통신사, 체찰사, 경차관 등으로 여러 가지여서 다양한 목적의 사행에 참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대일 교섭 활동 내용을 볼 때  직업적인 외교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태종의 재위 18년 동안 이예는 13회에 걸쳐 일본, 류큐 등지를 왕래하면서 모두 600여 명의 피로인을 쇄환하였다. 세종 때인 1419년(세종 1년) 쓰시마 섬 토벌(己亥東征) 때 중군병마부수(中軍兵馬副帥)의 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 전투에서 그는 큰 공을 세워 1421년(세종 3년)에는 공패(功牌)를 하사받은 동시에 행좌군사직(行左軍司直)으로 승진하였다. 

1438년(세종 20년)에는 대마도 경차관으로 파견되어 쓰시마 섬과의 교역에 근간이 된 문인 제도를 쓰시마 섬 도주와 정약하였다. 이어 1443년(세종 25)에는 71세의 고령에도 대마도 체찰사를 자청하여 서해안에 침입한 왜적을 추쇄(推刷)해 오는 한편, 쓰시마 섬 도주와 계해약조를 체결하였다. 이 공로로 이예는 종2품에 해당하는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까지 올랐다. 

3. 이예의 학파선생실기

이예가 고위 관직까지 오르고 후에 충숙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는 공로는 모두 대일 교섭에서의 활약 때문이었다. 『학파선생실기(鶴坡先生實紀)』는 3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보통 문집과 성격이 조금 다르다.

이예가 직접 쓴 글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의 13대손 이장찬(李璋燦)이 행장(行狀)과 관계 기록을 모아 1872년(고종 9년)에 간행하였기 때문이다. 『학파선생실기』는 이예 자신의 저술이 아니라 주위의 인물이 쓴 행장과 『조선 왕조 실록』 등에 나오는 관계 기사를 편집한 책이다.

1권에는 「공패(功牌)」, 「해외일기(海外日記)」, 「조야기재합록(朝野記載合錄)」 등의 사적과 행장, 시장(諡狀)이 수록되어 있다. 2권에는 이예를 모신 용연사(龍淵祠)의 기문(記文)과 비문(碑文) 19편, 3권에는 ‘석계사봉안시제영(石溪祠奉安時題詠)’ 등 시 13편과 이가환(李家煥)의 ‘지(識)’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학파선생실기』의 내용 가운데 조선 초기 조일 관계와 이예의 활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는 「공패」와 「해외일기」이다.

이예는 쓰시마 섬 토벌 후인 1421년(세종 3)에 공패를 하사받았는데, 「공패」에는 쓰시마 섬 토벌 당시 그의 활동이 기술되어 있다. 『해외일기(海外日記)』는 제목과 달리 일본에 대한 견문이나 사행 일기가 아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종사관(從事官)이 기술하였다고 하는데, 태조대에서 태종대에 이르기까지 이예가 일본, 류큐 등지에 사행한 사실과 쓰시마 섬 토벌 시의 활동이 간략히 정리되어 있다.

『해외일기(海外日記)』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예(李藝)가 일본과 유구(琉球) 등에 사행(使行)한 사실과 대마도(對馬島) 토벌 때의 활동을 기록한 글. 1책. 가철(假綴). 필사본(筆寫本). 표지 2장. 내지 7장. 말미에 학성 이씨의 세계가 간략히 서술되어 있다. 

표지에 임진년(壬辰) 2월 초2일 양정댁(楊亭宅)에 있는 것을 보고 등서(謄書)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壬辰二月初二日 始謄書于楊亭宅本草]과 신사년(辛巳) 겨울 서울에 있는 종인(宗人)이 베껴 보냈다는 기록[辛巳冬間 居京宗人 謄送耳]이 묵서되어 있다.

『학파선생실기』는 이예가 죽은 지 400여 년 뒤에 후손이 편집하였으며, 이예가 주로 활동하였던 세종대의 기록이 간략하다는 점 등이 특징이다. 『학파선생실기』는 조선 초기 대일 교섭 활동에 관한 소중한 자료다.

이예는 신분이 비교적 낮았기 때문에 대일 교섭에 고급 관료로서 정책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실무를 맡았던 전문가였다. 『학파선생실기』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이예의 일본에 대한 주요 인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예는 일본의 화포와 병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였으며, 우수한 면이 있으면 적극 수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직접 왜선이나 무기를 연구하여 실험해 보기도 하였다. 화폐 사용의 편리성 보고, 사탕수수의 재배와 보급에 대한 보고, 왜수차(倭水車)의 우수성과 단점을 관찰해 수용하도록 건의하였다. 민간에 의한 광물 채취의 자유화와 이에 대한 과세, 화통 및 완구의 재료를 동, 철에서 무쇠로 변경하고, 외국 조선기술의 도입을 건의하였다.

좋은 점이 있으면 수용하자는 실용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일본의 농산물 종자를 도입할 것도 건의하였다. 일본의 경제와 기술에 대해 세밀하게 관찰하고, 장단점을 파악한 후 좋은 점은 도입할 것을 건의하였다. 대장경 및 불경의 사급(賜給)을 통한 불교문화와 인쇄문화의 일본 전파, 수많은 사행에서 예물의 교환과 물자의 교역을 통해 체득한 음식문화와 일상 생활문화의 교류 등에도 기여하였다.

쓰시마 섬 사람이나 일본의 혼슈에 대해 어떤 민족적인 특성을 강조하거나 둘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쓰시마 섬 도주의 위약(違約)을 지적하며 쓰시마 섬 사람들이 이익을 탐하고, 그들의 요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변란을 일으킬 요인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왜구의 현황, 통제 방법, 대일 교섭의 방책을 자세하게 제시하였다. 이예의 정확한 관찰에 따른 건의는 대부분 채택되었다. 천황(天皇)의 존재나 막부의 쇼군과의 관계, 일본의 사회와 문화 등에 대해서는 평가한 자료가 없다.

4. 이예의 13세손 반계 이양오 선생 문학비

석계사원 입구에는 반계 이양오 선생 문학비가 있다. 2003년 9월 20일에 건립되었다. 문학비는 가로 1.22m 세로 0.87m의 크기의 오석 전면에 반계 선생의 ‘강촌만조가’ 일부를 담고 있다. 뒷면에는 반계 선생의 약력과 업적 등을 국한문 혼용으로 간략하면서도 상세히 적어 놓았다. 문학비가 세워진 곳은 그의 시(詩) ‘강촌만조가(江村晩釣歌)’의 조대(釣臺), 즉 낚시터가 있었던 곳이다. 그의 시 '강촌만조가'는 다음과 같다.

“차신(此身) 무용(無用)하야 세상(世上)이 버리시니/ 부귀(富貴)를 하직하고 빈천(貧賤)을 낙(樂)을 삼아/ 일간모옥(一間茅屋)을 산수간(山水間)에 지어두고/ 십년(十年) 일관(一冠)을 쓰거나 못 쓰거나/ 삼순구식(三旬九食)을 먹거나 못 먹거나/ 시름이 없으시니 분별(分別)인들 있을소냐/ 만사(萬事)를 다 잊으니 일신(一身)이 한가(閑暇)하다.”

이양오(李養吾)는 조선 영조 13년(1737년)에 태어나 순조 11년(1811년)에 죽었다. 울산의 토성(土姓) 학성이씨 시조 이예(李藝)의 13세손으로 자는 용호(用浩). 호는 반계(磻溪)이다. 울산의 유명한 사림으로 평생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한 학자였다. 이예를 배향한 석계서원에서 후진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제구운몽후(題九雲夢後)와 사씨남정기후(謝氏南征記後) 등의 평론과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를 썼다. 배수집(排愁集)과 시학지남(詩學指南), 파수집(罷睡集) 등의 책을 지었다. 세태를 고발한 세평시(世評詩)를 남겼다. 사회를 직시하는 투철한 세계관으로 다방면에 걸쳐 저술을 남겼으므로 울산읍지(蔚山邑誌)에서는 ‘강좌시객(江左詩客) 중에서 제일자야(第一者也)’, 즉 제일인자라고 기록했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선비의 도리를 다하며 후학을 기르던 이양오(李養吾)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사회고발시에 비견되는 ‘감회(感懷)’란 제목의 시를 지었다. 정의가 무너진 부조리한 세상을 비판한 시라고 하여 세평시(世評詩)라고 한다. 감회는 문집 ‘반계집(磻溪集)’에 실려 있다. 

전체 20수 중에 문집에 실린 17수는 차례로 다음과 같은 소제목으로 돼 있다. 거짓된 학문의 배척(斥僞學), 문장 숭상의 말폐(尙文末弊), 조세 이외의 징수에 대한 탄식(歎租外徵), 환향의 폐단(還餉爲弊), 되와 말과 저울의 불일치(斗升權衡不一), 형법의 해이(刑法解弛), 전쟁 대비의 소홀(武備不修). 

‘연기신편’의 불이행(不行演機新篇), 좌병영의 지세로 인한 폐단(左營地勢 營還爲弊), 뇌물 풍조의 성행(貪贓成風), 등짐장수 금지(負賈宜禁), 과거의 불공정(科擧不公), 초야에 버려진 인재(草野遺賢), 문체의 고문 숭상(文體尙古), 향교와 서원의 말폐(校院末弊), 소학과 대학의 도(小學大學之道), 스스로의 진술(自敍).

석계서원이 있는 석천리는 학성 이씨 서면파의 터전인 곳으로 울산의 고택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마을은 마치 소쿠리처럼 북쪽, 서쪽, 동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 남쪽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회야강이 감싸고 있어 배산임수의 명당자리다. 
학성 이씨 서면파를 중심으로 씨족마을이 형성된 울산의 대표적인 반촌이다. 울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3호인 ‘울산 학성 이씨 근재공 고택’이 있다. 고택에는 200여 년 된 모과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속은 거의 썩었지만 아직도 모과가 많이 달리고 있어 생명의 신비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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