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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낙동강 정비사업에서 발굴된 황산언과 조선시대 홍수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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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낙동강 정비사업에서 발굴된 황산언과 조선시대 홍수피해

낙동강 정비사업에서 발굴된 황산언과 조선시대 홍수피해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낙동강 살리기 하천환경정비사업에서 발굴된 황산언

물금읍 서부마을에서 경부선 철도 하부 통로를 빠져나가 양산시 물금취수장 근처에 가면 황산언(黃山堰) 유적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지난 7월 21

일 조국영 도예가겸 향토사학자와 함께 유적공원을 답사하였다. 조국영 향토사학자는 황산역, 황산언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안내판에 나와 있는 돌로 쌓은 제방을 가리키며 옛날의 성이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향후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현재 황산공원에 있는 황산언 유적공원은 두 군데 있다. 하나는 물금취수장 옆의 물금리 유적이고, 또 다른 유적은 월당나루터 앞의 핑크뮬리 공원 안쪽에 있다. 이곳 증산리 유적공원 안내판도 물금리 유적공원과 동일하다. 두 곳 모두 발굴 후 황산언을 땅속에 다시 묻었다. 표면은 잔디공원을 만들고 옆으로는 자전거도로와 산책로가 있다.

황산언은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정비사업에서 낙동강 살리기 하천환경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실시된 양산 증산리 유물 산포지(散布地)의 발굴조사를 통해 토석혼축제언(土石混築堤堰)으로 밝혀졌다. 토석혼축제언의 최하단의 기저부(基底部)에 점질토를 깔아 다졌으며, 그 위에 너비 290cm, 높이 180cm로 석축(石築)하여 골격을 구성한 후 이를 중심으로 내외면에 모래와 점토가 혼합된 흙을 겹겹이 다져 쌓은 석심토축(石芯土築) 형태의 토목 구조물이다.

낙동강변을 따라 축조한 제방은 본 조사구간 외에 나머지 구간을 포함한다면 2,800m가 넘는 대규모 인공제방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의 문헌사료에는 삼국시대 황산진(黃山津)을 비롯하여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황산역(黃山驛)이 설치 및 운영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남읍지(嶺南邑誌)』 황산역도(黃山驛道) 등의 고지도에서도 그 위치와 명칭이 표현되어 있어 황산역의 축조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즉 고대로부터 낙동강을 이용한 물류교역의 중심지였다. 고려시대 이후에는 황산역 중심의 물류센터와 통신망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곳에 조성된 물류기지를 낙동강의 상습적인 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황산언(黃山堰)을 조성하였다. 금번 발굴조사에서 그 위용의 일부가 드러난 것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지하에는 황산언의 실체가 유존(遺存)하고 있으므로 그 역사적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역사공원으로 조성하여 보존하고 있다.

2. 황산언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

황산언의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말부터 조선시대 전기까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토석혼축제언에서 청자해무리굽 완편, 청자종지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늦어도 12세기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제방의 안쪽의 생활공간에서 고려시대 건물지 및 수혈(竪穴) 등의 유구(遺構)에서 청자류와 도기류, 기와류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북송 진종 상부연간(北宋 眞宗 祥符年間, 1008~1016)에 주조된 상부원보(祥符元寶)와 북송 영종 치평년간(北宋 英宗 治平年間, 1064~1067)에 주조된 치평원보(治平元寶) 등의 동전과 중국 월주요(越州窯)에서 제작된 청자가 출토되어 당시 이곳에서 국제적인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문화재청의 증산리 유물산포지 발굴 현장설명회

문화재청에서 주관한 2011년 12월 9일 양산 증산리 유물 산포지 발굴 현장설명회 내용을 소개하기로 한다. 안내판에 나온 내용보다는 상세한 내용이 있어 현재 황산공원에 있는 안내판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4대강살리기 사업으로 발굴조사 중인 낙동강권역 양산 증산리 일원에서 고려시대의 건물지와 조선시대 제방 등이 발굴되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발굴조사 지역은 경남 양산 물금리와 증산리 일원으로 하천 둔치에 생태공원과 산책로 등의 주민 편의시설을 조성할 예정이며, 전체 조사면적이 2,025,864㎡에 달하여 우리문화재연구원, 동서문물연구원,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한국문물연구원 등 4개 문화재조사 전문기관이 구역을 나누어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그 중 (재)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2009년 9월 28일부터 발굴 중인 증산리 유물산포지 1구간에서는 제Ⅰ기(나말려초), 제Ⅱ기(고려시대), 제Ⅲ기(조선전기)에 해당하는 문화층이 조사되었다. 제Ⅰ기 문화층에서는 건물지, 경작유구가 발견되었으며 주름무늬 토기편, 도기편, 해무리굽 청자편 등이 출토되었다. 

제Ⅱ기 문화층에서는 건물지, 수혈 등이 발견되었으며 도기편, 청자편, 기와편 등이 출토되었다. 제Ⅲ기 문화층에서는 경작유구, 건물지, 토석혼축(土石混築) 제방 등이 확인되었으며 인화문분청사기편, '長'자명 및 '長'자 묵서명 분청사기발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유구는 토석혼축 제방으로, 사질토를 조성한 후 외부 및 상부를 할석으로 쌓아 기초 골격을 축조하였으며 그 상부는 사질점토를 피복한 것으로 추정되나 잦은 홍수피해와 개·보수로 잔존상태는 조사구역 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제방은 낙동강이 흐르는 방향과 동일한 방향으로 현재까지 총 725m가 확인되었으며 제방 안쪽에는 조선시대의 경작유구 등이 분포하고 있다.

이 제방은 조선시대 양산군과 관련된 문헌사료 및 고지도에 기록된 ‘黃山堰’(황산언)으로 추정된다. 『正祖實錄』(정조실록)권35 16년(1792) 9월 15일 조에 “양산군수 성종인이 상소하기를……양산지역에 분포하는 제언은 邑堰(읍언), 黃山堰(황산언), 도언(島堰) 3개소가 있으며, 수해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는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1792년 이전에 이미 황산언이 축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황산언은 특히 낙동강의 범람으로부터 당시 교통·통신의 중심지인 황산역의 마위답(馬位沓 : 역마를 사육하기 위해 지급한 토지)와 역참시설(驛站施設)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산언의 위치와 관련하여 『여지도서 경상도 보유(與地圖書 慶尙道 補遺)』에는 ‘관아의 서쪽 20여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고지도인 『양산군읍지도(梁山郡邑地圖)』와 『양산읍지(梁山邑誌)』에도 현재의 조사지역에 황산언이 표시되어 있어 위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물금지역은 이 밖에도 황산진지, 증산리왜성(문화재자료 제276호), 화제리 도요지(도기념물 제195호), 화제리 제철유적, 가산리 도요지(도기념물 제196호)등 군사ㆍ교통 및 통신ㆍ생산과 관련된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어 고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낙동강 하류지역의 물류중심지로서 기능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이번 발굴을 통해 물금지역의 핵심인 황산역의 역내 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황산언의 일면이 드러남으로 해서 그동안 문헌 사료 및 고지도에 의존해 왔던 이 지역 역사 복원에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를 제공하는 단초를 마련하였다는 데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4. 조선시대 양산군수 성종인의 상소문을 통해 본 홍수피해

정조실록 35권, 정조 16년 9월 15일 신해 6번째 기사 1792년 ‘양산 군수 성종인이 홍수에 의해 붕괴된 제방의 복구 문제로 상소하다’의 내용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홍수 피해의 참혹함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이다.

양산 군수(梁山郡守) 성종인(成種仁)이 상소하기를, “5월 16일의 비와 6월 16일의 비, 25일의 비바람으로 말미암아 강해(江海)가 분탕되고 온 고을이 침몰되어 어디를 봐도 남은 곡식이 없이 붉은 땅만 있었는데, 7월 23일 밤중의 비바람은 임술년과 을해년에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익사한 사람과 떠내려간 가축이 매우 많았으니, 산과 들이 뒤바뀌고 가옥이 허물어진 것은 또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 

본군에 3개의 큰 제방이 있는데, 그 하나는 읍평(邑坪)의 20리 되는 제방이고 그 하나는 본군 남쪽 거도(巨島)의 30리 되는 동서(東西)로 이어진 제방이고 그 하나는 황산역(黃山驛)의 좌우로 이어진 긴 제방입니다. 이른바 읍언(邑堰)은 본군의 앞 큰 평지에 있고 강어귀와 다소 떨어져 있으므로, 양산 백성의 농장(農場)과 생업(生業)이 대부분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다만 산골짜기에서 나오는 여러 물줄기가 모두 그곳으로 모여 군기(郡基)를 침범하고 농토를 파손시키므로 임술년의 홍수 이후 그 당시 도신이 20리에 이르는 긴 제방을 쌓았던 것인데 을축년에 또 붕괴되었을 때 조정에서 쌀을 내어 증축하였습니다. 그 이후 수재(水災)가 있으면 백성을 동원하여 손질해오고 있었는데 이번에 전에 없던 큰 홍수를 만나서 붕괴되어 터진 곳의 길이가 1천 1백여 장(丈)이나 되며 그 밖의 세 발짝이나 다섯 발짝 씩 파손 된 곳은 곳곳이 모두 그러합니다. 

이른바 도언(島堰)은 길이가 도합 3만여 장이 되는데 흙을 채취하고 잔디를 입히는 일을 모두 제방 아래에서 할 수 있으므로 힘이 매우 적게 드는데, 금년 여름의 비로 인하여 온 섬이 침몰되었으며 평지가 드러난 후 파손된 곳을 측량해 보니 터져서 시내가 되고 파여서 구덩이가 된 곳이 3천여 장이나 되었습니다. 

대개 본군에는 2천 1백 80여 호가 있는데, 떠내려가고 묻힌 가옥이 6백 65호이며 그중에 도민(島民)의 가옥이 3백 62호이니 수재를 당한 참혹함이 또한 본군에서 제일 심합니다. 이른바 황산언(黃山堰)은 우관(郵館)이 있는 곳으로서 제방 안의 농토가 모두 마위(馬位 : 황산역의 역마를 사육하기 위해 지급한 토지) 이며 그곳에서 생산되는 곡식의 힘을 많이 받고 있는데, 금년 여름의 큰 홍수에 떠내려간 가옥이 얼마인지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제방 아래 수전(水田)과 한전(旱田)이 물에 잠겨 늪지로 변해 버렸으니 역민(驛民)인들 어떻게 보존될 수 있겠습니까. 이상 3개의 제방은 실로 백성의 목숨과 관계된 것이어서 개축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황산언은 보수하는 것이 편리한지 폐지하는 것이 편리한지 본군에서 억측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만, 삼가 생각건대, 도언은 쌓지 않을 수 없으며 읍언은 아주 파손된 곳은 다시 쌓을 수 없으나 마구 흐르는 물줄기를 또 막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읍언에 제방을 쌓는 일은 가령 다시 재력(財力)을 소비하여 종전보다 증축한다 해도 내년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불행한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구 흐르는 물을 그대로 방치하고 막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생업이 크게 곤궁해 질 뿐만 아니라 읍리(邑里)의 성부(城府)도 지탱하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지세(地勢)를 살펴보니 자연적인 물줄기를 따라 사람의 힘을 약간만 써서 뚫어서 소통시키고 비스듬히 새로 제방을 쌓으면 8백 장 정도면 옛 물줄기로 모여 통할 수 있어서 급류를 진정시킬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공역(功役)이 크게 줄고 후일의 재앙도 피할 수 있어서 농토는 경작할 수 있고 읍리는 붕괴될 염려가 없게 될 것입니다. 

도언의 경우는 낙강(洛江)이 진흙이 차서 막힌 뒤로 제방에 물이 새어 파손되는 근심이 해마다 있었던 듯한데 금년 여름과 같은 홍수가 또 있기라도 한다면 한 제방으로서는 능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이 도언 또한 다시 쌓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본도(本島)는 동서 10리, 남북 25리에 토질이 비옥하여 1말의 씨를 부리면 3섬의 곡식을 수확하는데 수전과 한전의 결수(結數)가 모두 1천 50결이며, 적내(籍內) 적외(籍外)의 가옥이 대략 적어도 7백 구(口)가 되는데 그들은 또 고기잡이와 갈대 채취로 모두 생활이 충분합니다. 

이제 그곳의 백성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 땅을 버리고자 한다면 제방을 쌓을 필요가 없겠으나, 백성을 갑자기 옮길 수 없고 그 땅을 모두 버릴 수 없다고 한다면 도언 또한 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읍언에 새로 쌓을 곳이 8백 장이고 도언에 다시 쌓을 곳이 3천 장이 되는데 여기에 투입될 역정(役丁)의 수를 헤아려 보면, 읍언은 넓이가 6장이고 높이가 2장이어서 각 장마다 10명의 역정이 필요하니 8백 장의 역정에는 8천 명이 필요합니다. 

도언은 넓이가 3장이고 높이가 1장 조금 넘어서 각 장마다 4명의 역정이 필요하니 3천 장의 역정은 1만 2천 명이 되므로, 합하여 계산하면 적어도 2만 명이 못되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곡물을 얻어 매 역정에 하루의 고가(雇價)로 피곡(皮穀) 1말 5되를 준다면 1천 5백 석(石)만 소비하면 1만 5천 명의 역정을 구할 수 있고 부족한 5천 명은 관민(官民)이 상의하여 형편에 따라 뽑아서 맡긴다면 자연히 역사(役事)를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더구나 역사를 시행하면서 주기(賙飢)의 정치를 겸할 수 있어서 각종 폐단이 자연 없어지고 여러 가지 이익이 자연 수반될 것입니다. 신의 말에 채택할 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안으로 묘당(廟堂)에서부터 밖으로 방백(方伯)에 이르기까지 후일에 안정할 수 있는 계획을 널리 자문을 구하여 별도로 무휼해 주는 일을 속히 강구하소서. 

그러면 끝내 잔폐된 국면을 유지하여 70주(州)의 하나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이 아침 저녁으로 바라는 바이며, 양산 군민도 이 조치를 보고 흩어진 자를 모으고 죽어가는 자를 살려주는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양산 백성이 수재를 가장 심하게 당했다는 것은 연신(筵臣)의 말을 통해 들었었고 도백(道伯)의 장계를 보고 대략 짐작은 했었으나 그렇게 심한 줄은 몰랐었다. 백성의 마음을 생각하면 마치 눈앞에 보는 듯하다. 이제 알았으니 속히 구제하지 않을 수 없고, 구제해 주려면 또 보충해 주고 도와 주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상소 안의 소청을 윤허하여 족식(足食)의 공(功)을 완성할 수 있게 하겠다. 

도백으로 하여금 시행할 수 있는 방법을 힘써 강구하여 속히 한 가지 방법을 장계로 보고하게 할 것이니, 너는 부로(父老)와 민서(民庶)를 소집하여 조정에서 염려하고 있는 사유를 다방면으로 효유하여 모두 안심하고 생업을 정할 수 있도록 하여 차견(差遣)된 본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정조실록 36권, 정조 16년 11월 29일 갑자 1번째기사 1792년 ‘양산 군수 성종인을 치하하는 유고를 하다’를 통해 정조는 성종인 군수를 치하하였다.

정조실록 37권, 정조 17년 6월 13일 갑술 2번째 기사 1793년 도신 정대용의 보고로 선산 부사 박유원, 양산 군수 성종인, 창원 부사 이여절을 승진 발탁하고, 울산 부사 이민영을 파출하다.

선산 부사 박유원(朴綏源)에게 표리를 하사하고, 양산 군수 성종인(成種仁)은 통정 대부에 발탁하고, 창원 부사 이여절(李汝節)은 승진시키고, 울산 부사 이민형(李敏亨)은 파출하였다. 이에 앞서 어사의 서계에 따라 도신으로 하여금 진휼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수령들의 치적을 하나 하나 열거해 아뢰도록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도신 정대용(鄭大容)이 치적을 열거해 치계하였다. 

성종인 양산군수의 진휼 정사가 한 도의 으뜸이었다는 보고를 받은 정조 임금은 통정대부에 발탁하였다. 옛날부터 치산치수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왕이나 지방관인 군수도 홍수 피해를 입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정비사업, 양산시 구간에서의 낙동강 정비사업과 국비로 추진한 양산천 정비사업은 현대판 치산치수 사업이라 할 수 있다. 2016년 10월 5일 엄청난 비와 바람을 동반한 태풍 ‘차바’의 영향으로 양산지역에 오전 9시에서 11시까지 약 두 시간 동안 277.5mm라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려 양산천 중심으로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 물금읍의 낙동강은 낙동강 정비사업 덕분에 황산공원은 침수되었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태풍 차바의 피해를 호되게 당한 양산시는 홍수 피해 방지를 위한 종합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였다. 양산천은 호계천 합류부에서 하북면사무소 인근까지 13㎞ 지방하천 구간을 종전 50년에서 100년 빈도로 상향한 하천 기본계획을 수립해 완공하였다. 물금읍의 낙동강변 황산공원은 차바 이후에도 여러 번 내린 폭우를 잘 견디고 있다. 낙동강 모래를 준설하여 물  그릇을 키운 덕분에 홍수 피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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