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5 (수)

  • 흐림속초11.5℃
  • 흐림11.1℃
  • 흐림철원8.6℃
  • 흐림동두천8.0℃
  • 흐림파주8.7℃
  • 흐림대관령6.8℃
  • 흐림춘천11.0℃
  • 맑음백령도13.9℃
  • 비북강릉10.9℃
  • 흐림강릉11.6℃
  • 흐림동해11.9℃
  • 비서울11.1℃
  • 비인천10.7℃
  • 흐림원주12.6℃
  • 구름많음울릉도13.6℃
  • 비수원11.1℃
  • 흐림영월12.4℃
  • 흐림충주11.8℃
  • 구름많음서산11.4℃
  • 흐림울진14.3℃
  • 비청주11.9℃
  • 비대전11.1℃
  • 흐림추풍령11.6℃
  • 흐림안동20.6℃
  • 흐림상주15.2℃
  • 구름조금포항15.8℃
  • 흐림군산11.2℃
  • 흐림대구22.9℃
  • 비전주11.3℃
  • 맑음울산19.8℃
  • 구름많음창원21.2℃
  • 흐림광주11.6℃
  • 맑음부산20.7℃
  • 구름조금통영19.3℃
  • 구름많음목포12.5℃
  • 흐림여수17.2℃
  • 구름많음흑산도13.1℃
  • 구름많음완도13.8℃
  • 구름많음고창11.5℃
  • 흐림순천12.7℃
  • 비홍성(예)11.2℃
  • 흐림10.6℃
  • 비제주14.8℃
  • 구름많음고산14.5℃
  • 흐림성산15.9℃
  • 구름많음서귀포19.4℃
  • 구름많음진주21.9℃
  • 흐림강화10.1℃
  • 흐림양평11.9℃
  • 흐림이천11.9℃
  • 흐림인제10.0℃
  • 흐림홍천11.2℃
  • 흐림태백8.8℃
  • 흐림정선군10.8℃
  • 흐림제천13.3℃
  • 흐림보은11.5℃
  • 흐림천안11.1℃
  • 흐림보령11.6℃
  • 흐림부여11.5℃
  • 흐림금산10.6℃
  • 흐림10.8℃
  • 흐림부안12.1℃
  • 흐림임실10.8℃
  • 흐림정읍10.9℃
  • 흐림남원11.6℃
  • 흐림장수11.4℃
  • 흐림고창군11.6℃
  • 구름많음영광군12.0℃
  • 맑음김해시21.9℃
  • 흐림순창군11.5℃
  • 구름조금북창원21.8℃
  • 맑음양산시22.4℃
  • 흐림보성군14.1℃
  • 흐림강진군12.7℃
  • 흐림장흥12.7℃
  • 구름조금해남13.3℃
  • 흐림고흥14.9℃
  • 구름많음의령군23.5℃
  • 흐림함양군14.2℃
  • 흐림광양시16.9℃
  • 구름많음진도군12.9℃
  • 흐림봉화15.0℃
  • 흐림영주15.5℃
  • 흐림문경14.0℃
  • 구름많음청송군18.5℃
  • 구름조금영덕14.9℃
  • 흐림의성22.5℃
  • 흐림구미20.3℃
  • 구름많음영천18.2℃
  • 구름조금경주시17.5℃
  • 흐림거창15.2℃
  • 흐림합천22.0℃
  • 구름조금밀양23.3℃
  • 흐림산청16.0℃
  • 맑음거제19.9℃
  • 흐림남해19.1℃
  • 맑음21.2℃
심상도 박사,화요칼럼,삼장수와 양산의 위인 선양사업의 문제점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고/칼럼

심상도 박사,화요칼럼,삼장수와 양산의 위인 선양사업의 문제점


 

1. 양산시의 소극적인 위인 선양사업 

양산 지역의 위인 성역화 사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문제가 많다.

양산을 대표하는 위인들은 역사적으로 만고충신 박제상, 삼국통일에 기여한 김무력 장군과 그의 아들인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 그리고 손자인 김유신 장군, 조선시대 장군인 양산 이씨 삼형제 장수인 이징석·이징옥·이징규 장군, 근세의 인물로는 고향의 봄 작사가 이원수 선생이다.

박제상 공과 그의 아들 백결 선생과 관련한 성역화 사업은 진행 속도가 매우 지지부진하다가 이웃 지역인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적극적으로 박제상 공 기념관도 건립하고, 축제도 하면서 선양사업의 속도를 높이는데 자극받아 효충사를 정비한 바 있다. 양산시에서 선양사업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울주군에서는 박제상 공이 울주군 출신이라는 주장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북면 소토리 박제상 공 생가를 성역화 하면서 징심헌을 한옥으로 건립하고 유물도 전시한다고 했지만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효충사 주차장 역시 관광 버스가 주차할 수 없는 승용차 위주의 소규모로 조성했다가 나중에 부지를 추가 매입하여 확장하는 시행착오를 겪었다. 추가 개발을 하게 되면 부지 인근의 땅값이 올라 소중한 시민의 혈세를 낭비하게 된다.

애초에 부지를 넓게 확보하여 장래의 시설 확충이나 축제 개최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은 계획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효충사는 영해 박씨 문중에서 박제상 공 탄생지로 인정하고 있어 별문제는 없다. 하지만 성역화 과정에서 효충사 인근 주민들이 효충사가 문화재 구역으로 지정되면 땅을 마음대로 개발하거나 매각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효충사가 생가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며 극도의 이기심을 보여준 바 있어 문제가 되었다.

 

이원수 선생은 일제 식민지 시절 양산에서 출생하여 양산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다가 마산으로 전학을 가는 바람에 출생을 입증하는 호적 등본, 학적부가 없어 마산시에 선수를 빼앗겨버렸다. 마산시는 나중에 창원시에 통합되었다. 창원시는 이원수 선생 가족의 호적을 새로 만들어 고향의 봄 도서관에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원수 선생 가족은 양산이 고향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으며, 유품도 양산시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창원시는 고향의 봄 가사를 스토리텔링하여 천주산 진달래꽃을 내세우고 있다. 노래의 가사에 나오는 봄 정경은 이원수 선생이 어릴 때 양산에서 본 추억임이 분명하다. 양산시에서 이원수 선생 추모사업을 하지 못하고 생가도 성역화하지 못한 것은 친일파 논란 때문이었다. 일부 대학교수가 친일 시나 글을 내세우며 선양사업을 반대하였다. 그래도 창원시는 굴하지 않고 잘하고 있다.
가야의 왕자로서 나라가 망한 후 신라에 귀순하여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하고 한강 유역의 땅을 확보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김무력 장군의 묘소가 통도사 경내에 있다. 김무력 장군이 전투에서 사망 후 그동안의 공을 인정하여 신라 조정에서 영축산 일원의 땅을 사패지로 하사하였다. 통도사가 건립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김무력 장군의 아들인 김서현 장군은 양주 도독을 지냈고, 그의 부인인 신라의 공주 출신인 만명공주와 함께 북정동에 있는 부부총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양산의 주민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져 왔으며, 양산의 무속인들이 김서현 장군과 만명공주를 신으로 모셔왔다.

김해 김씨 후손들도 부부총을 조상의 묘소로 인정하고 매년 벌초를 해왔다. 춘추공원 입구에 김서현 장군 기적비가 있다. 통도사 뒷마을인 하북면 지산리에는 김무력 장군, 김서현 장군과 만명공주를 모시는 사당인 취서사가 있다.

양산시는 양산의 가장 큰 축제인 삽량문화축전을 개최하면서 양산의 대표 인물을 박제상 공, 삼장수인 이징석·이징옥·이징규 장군, 김무력 장군과 아들인 김서현 장군이 상징하는 화랑도를 번갈아 내세우기도 하였다. 양산의 대표 인물에 대한 역사적 정립이 안 되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2. 삼장수 선양사업의 장벽

하북면 삼수리 출신의 삼장수는 조선시대 초기 인물로 무과에 장원 급제하고 외적의 침범을 막고 국방을 튼튼히 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양산시에서 여러 차례 삼장수 생가 성역화와 추모사업을 시도했지만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삼장수 선양사업은 2019년 4월, 2020년 9월 경남도 지방재정투자심사에서 연달아 통과되지 못하였다. 2021년 7월 세 번째 도전 심사에서 문제점에 대해 향후 실시설계를 통해 계획을 구체화한 후 다시 심사하는 내용으로 조건부 통과되었다.

심사위원들의 거부 이유는 삼형제 장군 중 둘째인 이징옥 장군의 반란 사건이다. 계유정난을 통해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세종과 문종의 고명 대신이었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잡았다. 세종과 문종의 고명 대신으로서 단종을 보호하는 입장에 있던 신하들을 죽이고 단종도 귀양보냈다가 끝내 죽였기 때문에 세조의 계유정난은 정당한 명분이 없었다.

이징옥 장군을 반란자로 보는 역사적 시각은 잘못되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이징옥 장군은 뚜렷한 명분을 갖고 세조에게 반발한 것이다. 이징옥 장군은 정조 때 복권되었다가 다시 서인 집권 때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고종 때 복권되었다. 이징옥 장군을 반란자로 보는 역사적 평가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선양사업은 예정대로 추진해야 한다.

3. 이징옥 장군의 세조에 대한 반발

단종 1년 계유정난이 일어나 김종서가 살해되고,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 정분, 안평대군 등 고명대신과 반대파 왕족 및 측근 인물들을 숙청하면서, 이징옥도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측근인 이징옥이 역모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서 파면하고, 함경도 도절제사에 박호문(朴浩文)을 임명했다.

삼장수 3형제는 모두 무예가 뛰어나고 담력이 대단했는데, 그중에서 둘째인 이징옥이 무예와 용맹, 재주가 형제 중 가장 우수했다고 한다. 그는 유년 시절에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1414년 갑사(甲士)로 출사하여 1416년(태종 16년) 부사직이 되었다.

1416년(태종 16년) 부사직 재직 중 무과(武科)에 급제, 그 해 부거책장에 보임되었다. 1418년(태종 18년) 태종이 주관하는 친시 무과에 1등으로 급제하였다. 바로 사복시소윤(司僕侍少尹)으로 임명되고, 이후 약관의 나이에 영북진 첨절제사가 되어 ‘소년 절제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징옥 장군은 뛰어난 무장으로 관직 생활의 반 이상을 경원첨절제사, 경원절제사, 영북진절제사, 판경흥도호부사, 함길도 도절제사 등 함경도에서 보내면서 4군과 6진의 개척에 공을 남겼다. 이징옥은 후임 함경도 도절제사로 온 박호문에게 직위를 인계하고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에 수양대군의 정변 소식, 김종서의 죽음을 듣자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돌아가 박호문을 살해하였다. 이징옥 장군은 반발하면서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난(亂)을 일으킨다.

군사를 일으켜 북방으로 가서 여진족을 끌어들여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옛 금나라 수도 오국성에다가 대금(大金)을 세웠다. 이징옥은 일찍이 여진족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여진족 사회에서의 명성을 의식하고, 일이 여의치 못할 때는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을 배경으로 저항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성부사 정종, 호군 이행검 등에게 살해되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연좌제로 이징옥 장군의 장남 이자원, 차남 이윤원은 처형되었다. 딸은 노비로 분배되었다. 당시 8세였던 셋째 아들 이연원은 유모가 구출하여 은신, 경상북도 경주 토함산 서편 아래 상신곡에 숨어들어, 은거하여 본관을 초계라 칭하고 세계를 이어갔다(경주시 외동읍 신계리). 그의 후손들은 순조(純祖) 때 다시 세상에 나왔다.

이 난은 조선왕조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반란이란 점과 중앙정부로부터 지역 주민에 대한 차별을 가져와 민심을 자극해 후일 이시애(李施愛)난의 선구가 된 점, 황제를 칭하고 여진과의 연합을 도모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건이었다. 이징옥 장군은 매우 청렴하고 성실한 인물이었는데, 세종부터 문종, 단종을 거치며 일생 동안 북방에 수십 년간 근무했는데도 불만 하나 없었으며, 사생활이 매우 깨끗한 청백리였다.

조선 후기의 명재상 채제공은 『번암집(樊巖集)』에서 이징옥은 세조의 불법성을 명나라에 직소해 단종의 복위를 꾀하기 위한 것이지, 『단종실록』에 전하는 것처럼 대금황제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반역이 아니라 충신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4. 이징옥 장군의 복권

세조(世祖)는 자신에 반발하여 군사를 일으킨 이징옥 장군을 애도하고, 또 기개(氣槪)를 칭송하였다. 이징옥은 ‘나에겐 난신(亂臣)이지만 후세에서는 둘도 없는 충신’이라고 하였다. 이징옥 장군은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영월군 장릉 단종 배식단 사우에 배향되었다. 그는 조선 건국 이후 최초로 황제를 칭한(稱帝建元 :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사용) 인물이었다.

1791년(정조 15년) 관작이 회복되고 충강(忠剛)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정조 사후 서인(西人) 집권 후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 1908년(융희 2년) 4월 30일에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다.

5. 삼장수 가문 재조명을 위한 학술대회

이징석·이징옥·이징규 장군 삼형제에 대한 재조명을 위한 학술대회가 7월 15일 오후 1시 30분부터 양산시와 경남연구원 주최로 양산문화예술회관 소강당에서 열렸다. 윤영석 국회의원, 나동연 양산시장, 이종희 양산시 의회의장, 김태영 경남연구원 직무대행, 박인주 양산문화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학술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경남연구원의 김미영 연구원은 “이징석 묘 석물의 특징과 유산적 가치”에 대해 발표하였다. 이징석 장군 묘 석물은 제작시기와 내력이 분명하여 지방의 조선 전기 묘 편년에 있어 신뢰성 있는 표본을 제공하는 중요한 분묘 자료이다. 중앙에서 직접 석물을 하사하거나 지원한 사례로 조선 전기 지방 사대부 묘의 석물 배설 배경 파악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변광석 발표자(전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는 “조선 초기 삼장수 가문의 활동과 평가 – 이징석·이징규를 중심으로 -”를 발표하였다. 이징석 장군은 두 번 무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세조조에 좌익공신이 되었고, 양산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장강이다. 이징규 장군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화가 전승되고 있지만 『양산이씨세보』 이외에는 조선왕조실록에는 단편적인 자료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최종훈(평화엔지니어링)은 삼장수 마을 문화공원 조성사업에 대해 발표하였다. 공원의 면적은 9,346㎡로 삼장수를 콘텐츠로 삼아 역사와 전설, 관련 유적을 스토리텔링하여 휴식 및 체험공원으로 조성한다고 하였다. 우려되는 점은 부지가 너무 협소하다는 점이다.

양산시에서 미래를 내다보고 충분한 부지, 주차장을 확보하여 삼장수 축제도 할 수 있도록 공원을 조성해야 하는데 채 3천 평이 안 되는 부지는 좁은 것으로 보인다. 주변은 양산의 최고 인기 전원주택지로 땅값이 매우 비싼 곳이므로 문화공원 조성에 필요한 부지를 추가로 매입할 필요가 있다. 박제상 공 선양사업 당시 주차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아 추가로 부지를 매입하는 예산 낭비가 있었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토론자로는 백진재(양산시청), 우정임(부산대학교), 유영옥(부산대학교), 송지환(경남문화재연구원)이 참여하여 발표자의 주장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표명하였다. 결론적으로 이징옥 장군에 대한 조명이 없었는데 필자가 앞에서 언급하였다. 이징옥 장군은 이미 복권되었으므로 선양사업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충분한 공원 부지를 확보하여 사업을 해야 하겠다.

YNEWS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