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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영 도예가(ynews 향토사 전문이사 부산요포럼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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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뉴스

조국영 도예가(ynews 향토사 전문이사 부산요포럼발표

부산요의 도자사적 의미와 가마 운영에 관하여...조국영

 

 

 

Ⅰ. 서론

 

  대마도는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와 일본 사이 섬으로 전체가 산지로 이루어져 농지 면적이 아주 적고 외부와 무역에 의존했으므로 임진왜란 이후 조·일 관계 단절로 매우 곤란한 상태였다. 따라서 대마도는 섬 전체의 운명이 걸린 조·일 수교에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그 결과 막부로부터 조선 무역에 관한 독점권과 외교 관계 업무를 부여 받았다. 조선 조정은 대일외교의 상대로 동래부사에게 모든 업무를 지휘하게 하였고 그 절차를 역관인 훈도(訓導)와 별차(別差), 소통사(小通事)를 통하여 진행하였다.

  이에 대마도주는 막부의 유력층에 진상할 물품이 필요하였으며 그 종류로는 약재, 서적, 매, 다완이 대표적이었다. 그중에서 매는 쇼군을 비롯한 다이묘들의 권위와 유희의 대상으로 인기가 있었으며 다완은 임진왜란 전후를 통하여 다도 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져 부유한 상인층까지 고려다완에 심취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조선 다완을 얻기 위한 열망이 대마도주를 통하여 구입을 부탁하게 되고 쇼군(大君, 將軍)을 비롯한 유력층에 진상해야 했으며 각 다이묘(大名)들과 사원에도 보내주어야 했다.

  본고는 당시의 조선과 일본인이 다완을 바라보는 의식에서 실용성을 추구하는 조선과 완상을 겸한 일본의 상황을 비교하고 부산요(釜山窯)의 시말(始末)에 관한 기록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면서 그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들과 연계하겠다.

 

 

Ⅱ. 다완에 관한 조선과 일본의 인식

 

  일본의 다도는 무로마치 시대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특유의 초암차를 바탕으로 불교의 선(禪)과 결합하면서 와비차 정신과 잘 부합하는 소박하고 단아한 고려다완이 다도에 선호되었다. 그러나 그 수가 매우 적어 일본의 도기 다완 양식인 화모노(和物) 다완과 양립하면서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를 중심으로 일본 특유의 과장되고 왜곡된 미를 취한 일본 특유의 양식도 유행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그나마 공급되어온 고려다완은 끊어져 일본 다도계의 갈증을 심화시켰다.   기유약조(1609) 체결 이후 일본은 예전과 다른 다완 공급에 관하여 정식적으로 조선에 구청(求請)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동래부접왜장계등록가고사목록초책』

  (東萊府接倭狀啓謄錄可考事目錄抄冊) 002b

『변례집요』(變例集要) 003b

 

  신해년(1611) 2월 『동래부접왜장계등록가고사목록초책(東萊府接倭狀啓謄錄可考事目錄抄冊)』에는 귤지정(橘智正)이 무역을 위하여 나왔는데, 구청 물목(物目)에 다기(茶器), 보아,(甫兒), 와기(瓦器)의 무역을 청하였으므로 조선에서는 동래부사와 부산첨사가 김해부사에게 부탁하여 도자기 장인에게 만들도록 하라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변례집요(變例集要)』에는 3월과 4월에 기록되어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전록통고(典錄通考)』에 의하면 공조(工曹)의 외공장조 사기장은 동래에는 없으며 김해는 경상도에서 사기장이 가장 많은 6명이 있었고 왜관과 가장 가까운 위치의 고을이므로 김해 장인들에게 부탁한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김해 장인에게 견본(見本)을 보내주었을 것이다. 그 견본에 따라 만든 것이 흑어소환(黑御所丸)다완, 백어소환(白御所丸)다완, 묘소(貓搔)다완, 주빈(洲浜)다완, 도형(桃形)다완 등이 전해지고 있다. 흑어소환다완과 백어소환다완류는 오리베 의장의 영향으로 제작 되었고 그 외 묘소다완이나 주빈다완, 도형다완 등은 일본 다인들의 취향에 따른 제작이다. 이러한 왜곡과 과장의 미감은 조선인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졌을 것이다.

  1624년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 부사(副使)로 일본에 간 강홍중(姜弘重)은 기행문집인 『동사록(東蛇錄)』을 남겼는데 을축년(1625) 3월5일자 『문견총록(聞見叢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사기와 토기류는 각이지거나 반듯한 것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고 기울고 찌그러진 그릇을 얻으면 값진 보배로 여겨 비단보에 열 겹 싸서 다투어 자랑하였다. 그 풍속이 괴이함이 이러하다.」

 

일본에서 보고 들은 행정, 지리, 문화, 풍속 등을 망라하여 정보를 취합한 글로써 다기에 관해 조선 지식인의 입장에서 서술하였다. 당시 오리베 의장 양식의 유행으로 조선에까지 견본을 보내 조선 흙과 불로 만들도록 주문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조선 말차 음용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다시(茶詩)로 유추할 수 있고 당시 분청사기를 많이 사용하던 시기이므로 일본에 건너간 분청다완과 동일한 미감과 정서가 초암차(草庵茶)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상황의 연장선에서 부산요 축요(築窯)의 필요성을 느낀 일본 다이묘(大名)와 다인들의 요구에 의하며 부산요의 특유한 다완인 고혼(御本) 다완이 탄생되었다.

  조선과 일본에서 다완에 관한 관점의 충돌은 1657년에 일어났다. 『변례집요』에 의하면 별차왜(別差倭)항 병신년(1656) 12월에 대마도주가 중병에 걸려 의원을 청하는 서계(書契)를 가지고 나왔으므로 조정에서는 주부 한형국을 내려보내 도해(渡海) 하도록 조치했다. 한형국은 을미 통신사 사행 때 의관(醫官)으로 수행한 경력이 인정되어 소통사1인, 소동1인, 사령2인, 노자1인을 거느리고 1657년 정유년에 도해 하였으며, 일본 측 기록 『매일기(每日記)』에는 정월 6일 엄원(嚴原)에 도착했으며 도주를 치료하였고, 그 후 가지고 간 다완 300개를 매각하려 하였으나 다완으로 부적합하여 돌려보냈다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다완은 제한된 규격과 변화가 수반 되어야 함으로 짧은 시간에 전문성 없이 주변요에 급조하여 만든 다완은 기준이 맞지 않았다. 한형국은 2월19일에 호행차왜 등원차(藤原次)와 귀국한다.

  위 사건이 일어난 정유년(1657)년은 두모포요(豆毛浦窯)에서 다완이 생산되던 시기임에도 위와 같이 밀거래를 시도했다는 것은 일본에서 고려다완의 인기가 매우 높았음을 방증하는 사례로 이는 현재의 언어를 사용하면 도자의 한류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고려다완에 대한 한류는 서계에 의한 구청 외에 조선 다완의 밀무역이 빈번히 일어나는 계기가 되며 무오년(1678) 문위역관(問慰譯官) 김근행(金謹行) 외 수역 2인의 4123개의 조선 다완 밀수 사건으로도 확인할 수 있으며 무오년은 초량왜관 시대의 원년이다.

 

 

Ⅲ. 부산요의 始末

 

  신해년(1611)에 김해 사기장(沙器匠)에게 부탁하여 만들어 보낸 어소환 계열 김해다완들의 소장 약보(略譜)를 보면 당시 유명한 다인들이나 다이묘들의 소장 내역이 상세히 적혀 있으며 귀한 대접을 받았다. 일본은 이를 계기로 다완 제작에 직접 관여하여 조선의 맛이 나면서 다인들의 취향에 맞는 다완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왜인구청등록(倭人求請謄錄)』 경진년(1640) 5월19일자 홍희남(洪喜男)과 김근행(金謹行)의 수본(手本)에서 도주가 직접 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중략... 찻잔 만드는 일에는 귀국 사정에 폐단이 많다는 것은 저희도 잘 알지만 대군 이하 장관들이 모두 구하니 달리 대어 쓸 곳도 없어서 부득이 사람을 보내 제조하는데....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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