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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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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양산 땅 구포를 되찾기 위한 양산군민들의 노력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양산향교 앞의 비석림 사이에 세 개의 비석이 있는데, 이를 구포 복설비(龜浦 復設碑)라고 한다.

이는 영상대감(領相大監) 이유원(李裕元)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군수(郡守) 어윤중(魚允中)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군수(郡守) 이능화(李能華)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를 말한다. 영상대감 이유원 영세불망비 뒷면에 ‘구포복설 장두(狀頭)’라 해서 세 명의 유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조선 고종 6년(1869년)에 양산군 소속이던 구포(龜浦)로 불리는 좌이면(左耳面)이 동래군에 강제 편입되어 빼앗기게 되었을 때 양산군민들은 이를 되찾기 위해 들고 일어났다. 당시 동래부사는 정3품 당상관(堂上官)인 정현덕 부사였는데, 권력자인 대원군의 신임을 받고 있어 항의해도 소용이 없었다.


구포는 수운창과 선착장을 갖춘 유통과 물류의 중심지였다. 수운창은 조창(漕倉)으로 조세로 거둔 현물을 모아 보관하고 이를 중앙에 수송하기 위해 수로연변에 설치한 창고 및 이 일을 담당하던 기관이었다. 구포지역은 백성들이 이동하고 물류가 유통되는 요지로서 세수가 엄청났다. 구포는 장사를 통해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세금 수입도 막대하여 동래군에 그냥 넘겨줄 수는 없었다.
양산의 유림(孺林)에서 우석규(禹錫奎), 서상로(徐相魯), 이기수(李基洙) 세 사람을 공의(公議)로 추대하여 중앙 관리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한양으로 보냈다. 시골 선비들로서 백방으로 노력해도 연줄이 닿지 않아 임금이나 고위 관료들에게 직접 뜻을 전달할 수 없었다.
구포를 양산으로 환속하고자 하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귀향하기에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고심 끝에 관료들의 관심을 끌어낼 방법을 강구하였다. 최후 수단으로 목숨 걸고 목멱산(남산) 봉수대에 몰래 가서 밤에 봉화(烽火)를 올리기로 하였다. 목멱산 봉수대는 각 지방에서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올리는 봉화가 최종적으로 모이는 중요한 봉수대였다. 만일 허위로 봉화를 올리면 엄한 처벌을 받게 된다.
거짓으로 봉화를 올린 이들은 결국 포졸에게 체포되어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되었다. 사건의 자초지종이 영상(領相)대감 이유원(李裕元)에게 보고되자 대감은 삼인의 의기(義氣)를 가상히 여겨 봉수대 봉화 사건을 면책하였다. 이들의 상소를 수용하여 고종 12년(1875년)에 구포(좌이면)를 양산군에 환속토록 조치하였다. 정현덕 부사는 그 전해에 파직되어 유배 중이었다. 이 세 비석은 구포를 되찾았다는 뜻의 구포복설비(龜浦復設碑)라고 한다.
‘영상대감 이유원 영세불망비’는 구포를 양산군에 복원 조치한 영상대감의 은혜를 기리는 비석이며, ‘군수 어윤중 영세불망비’는 복원될 때 군수의 공덕을 기린 것이고, ‘군수 이능화 애민선정비’는 비석을 건립할 당시의(1879년) 군수 공덕을 기린 것이다. 이 세 비석은 양산의 내원사 입구 국도변에 세워져 있다가 현재는 양산 향교 앞으로 옮겨 세워져 보존되고 있다.
양산시립박물관은 개관 4주년을 기념해 2017년 4월 11일부터 6월 25일까지 특별기획전 ‘삼인행(三人行) 1874, 한양으로 간 세 사람’을 개최한 바 있다.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봉홧불을 피워 구포를 지킨 양산 사람들의 고향 사랑을 담은 구포 환속과정을 시간순으로, 입체적으로 스토리텔링하여 전시하였다.
양산시립박물관에서 마련한 특별기획전은 부산 구포 환속문서를 통해 양산의 옛 땅이었던 구포의 역사를 살펴보고 환속과정을 통해 양산의 선조들이 보여준 애향심을 재조명하기 위하여 개최되었다. 특별기획전에는 양산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구포복설(龜浦復設) 상서문(上書文) 12점을 비롯해 구포 관련 역사 자료 100여 점이 전시되었다.
상서문에는 구포가 500년간 양산에 속해 있었으며 당시 구포의 가구 수가 1만호에 달하고 세금의 수입도 구포를 제외한 양산지역을 다 합한 것보다 100배나 많아 구포가 동래에 귀속될 경우 양산이 직면할 재정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구포는 1904년 다시 동래 땅이 되었다. 양산군의 선조들이 구포를 동래에 부당하게 빼앗겼을 때 용감하게 목숨 걸고 지킨 애향심은 후세들이 본받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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