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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공부인과관련된유적,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관광경영학박사'심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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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박제상공부인과관련된유적,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관광경영학박사'심상도'

박제상의 충절에 대해 조선시대 숙종은 ‘신라 천년의 으뜸가는 충신이다’라고 했고 정조는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은 만세에 걸친다’라고 극찬했으며 1,500여 년이 지난 

 

1. 벌지지의 역사적 내력

 

 

박제상의 충절에 대해 조선시대 숙종은 ‘신라 천년의 으뜸가는 충신이다’라고 했고 정조는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은 만세에 걸친다’라고 극찬했으며 1,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국민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슬품과 그리움에 겨워 통곡하다가 죽어 치술령 산신모가 되니, 백성들은 부인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치술령곡'이라는 노래를 지어 되새겼다. ‘치술령곡’은 신라 때 노래로 내용은 전하지 않고 『증보문헌비고』(1908년)에 그 유래만을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박제상을 기다리는 부인의 유적에 대한 내력을 알려주고 있다. 신라충신 박제상공 부인 유적(新羅忠臣朴堤上公夫人遺蹟), 처음 제상이 떠날 때 그 부인(夫人)이 듣고 쫓아가다가 미치지 못하고, 망덕사문(望德寺門)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드러누워 길이 부르짖었으므로 그로부터 그 모래벌을 ‘장사(長沙)’라고 한다. 그 친척 두 사람이 그를 부액하여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땅을 ‘벌지지(伐知旨)’라 하였다.

 

 

이런 연유로 지명이 벌지지가 됐다. 뻗치다의 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 ‘伐知旨(벌지지)’가 된 것이다. 벌지지를 양지버들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7번 국도변에 있는 경주 사천왕사터 건너편이 망덕사터이다. 망덕사터 앞 남천변에 '장사벌지지(長沙伐知旨)'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경주 화랑교육원 가는 길에서 남천다리 건너기 전 좌회전하여 제방길로 가면 벌지지가 나온다. 차량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외통길이다. 망덕사 근처에는 박제상의 부인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아들 문량이 치술령으로 옮겼다가 다시 치술령 아래 만화리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2. 박제상공 부인의 원찰인 망덕사

 

경주 낭산(狼山)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사천왕사와 마주하고 있다. 처음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라 문무왕 또는 신문왕 때로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 19년(679)에 중국 당나라가 침입하자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확인하려 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사천왕사 건너편에 이 절을 지어 보여주었고, 당나라의 덕을 우러른다는 의미에서 망덕사(望德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효소왕 1년(692)에 다시 지어 완공하였다.

 

 

당고종은 악붕귀(樂鵬龜)라는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 박문준이 말한 절이 정말로 당 황제의 만수무강을 비는 절이 맞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사천왕사는 실제로는 당나라 같은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만든 절이므로 당나라의 조사를 받으면 들통날 것이 뻔했기에, 신라 조정은 당나라 사신 악붕귀에게 보여주기용으로 미리 사천왕사 남쪽에 새 절을 날림으로 지었으니 바로 망덕사다.

 

 

예상대로 악붕귀는 오자마자 먼저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천왕사에 들르고 싶다고 말했다. 신라인들이 악붕귀를 망덕사로 인도해 보냈더니, 그도 뭔가 미리 입수한 정보가 있는지 망덕사의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라고 하면서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신라에서 악붕귀에게 금 1천 냥을 주어 매수했다. 사신은 귀국 후 당고종에게 황제의 수명을 축하하는 절이 맞더라고 거짓 보고를 올린 덕에 무사히 넘어갔다.

 

 

경덕왕 14년(755)에 탑이 흔들렸는데, 마침 중국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으므로 신라사람들은 당나라를 위해 지은 절이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훗날 경덕왕 때인 755년에 13층짜리 두 탑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떨어졌다 붙었다 하며 곧 넘어질 듯하고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진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그해 당나라에서는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혼란스러웠기에 당나라와 연관된 이 절이 거기에 감응한 것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동사강목에 의하면 798년과 804년에도 두 탑이 서로 부딪히도록 흔들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유사』에는 절을 지은 후 잔치를 베풀 때 효소왕이 진신석가를 알아보지 못하여 조롱을 당했다는 이야기, 『반야경』을 베껴 쓰다가 죽은 승려 선율이 불경의 완성을 위하여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절터는 낭산(狼山) 남쪽의 사천왕사에서 남쪽으로 좀 더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 끝부분은 경사가 급한 편이고, 그 남쪽에는 남천(南川)이 흐른다. 현재 동서 목탑터와 금당(金堂)터, 강당(講堂)터, 중문(中門)터, 회랑(廻廊)터 등이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또한 남쪽에는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서쪽에는 망덕사지 당간지주(보물 제69호)가 자리하고 있는데 원래의 위치는 아닌 듯하다.

1969년∼1971년 3차례에 걸쳐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굴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금당터는 축소된 것으로, 원래의 받침 부분 너비가 동서(東西) 방향으로 좀 더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이 있던 자리에는 받침돌 아래의 바닥돌과 계단의 바닥돌이 남아 있으며, 동탑에도 대부분의 주춧돌이 원래의 위치에 남아 있다.

 

 

중문터와 동서 회랑은 받침 부분의 범위가 확인된 정도지만, 회랑은 일부 자연석 또는 벽돌로 된 받침돌만 확인되었다. 특히 금당과 회랑 사이에는 익랑(翼廊)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어, 신라의 쌍탑 가람에서 익랑이 필수적이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강당터는 훼손이 심하여 받침 부분의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으나, 주변에서 발견된 유구(遺構)로 보아 조선시대까지 작은 암자 등이 자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문 앞 경사진 곳에는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거대한 돌계단이 있는데, 이것은 불국사의 경우와 같이 중문 앞에 규모가 큰 계단을 설치하는 방식이 당시 사찰 조영의 일반적인 사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망덕사지와 사천왕사지는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7번 국도(산업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사천왕사지의 기단 복원, 경역 정비공사가 지난 2월부터 올 연말까지 진행되고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높은 공사 가림막이 처져 있어 사천왕사지 경내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천왕사지 주차장에서 선덕여왕릉으로 가는 길이 있다. 가까운 곳에 신문왕릉도 있어 둘러볼 역사유적이 많다.

 

 

망덕사는 박제상 공의 부인인 금교부인의 영혼을 달래는 원찰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망덕사지를 둘러보면 벌지지와 매우 가깝고 규모가 아주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논에 벼가 자라는 가을까지는 전체를 둘러보기 힘들지만 겨울철에 답사하면 논으로 들러가 망덕사의 석축 돌도 둘러볼 수 있다.

 

3. 박제상 공이 왜국으로 떠난 율포

 

공이 눌지왕의 동생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왜국으로 떠난 발선처(發船處)는 삼국유사에 나와 있다. “제상이 집에도 들르지 않고 길을 떠나 곧바로 율포(栗浦) 바닷가에 도착했다. 아내가 뒤쫓아와 율포에 이르러 보니, 남편은 이미 배에 오른 뒤였다.”고 나와 있다. 율포는 지금의 울산광역시 북구 강동동 바닷가다. 유포 석보에 ‘신라충신 박제상공 사왜시발선처(使倭時發船處)’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석굴암연구회가 1989년 10월에 세웠는데, 글씨는 오제봉이 썼다.

 

우리나라의 동해 율포에서 흘러간 물은 박제상 공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대마도 미나토 마을에 바로 닿는다고 한다. 미나토의 방파제에 가면 한글이 적힌 쓰레기들이 많이 떠내려와 있다고 한다. 박제상은 이 물결을 역으로 이용하여 신라 왕자를 탈출시킨 후 자신은 잡혀서 처형당했다.

 

유포 석보를 보기 위해 새로 조성된 주차장에 도착하여 보니 안내 표지판이 없어 찾기가 힘들었다. 도로변 인도를 따라 약간 올라가니 집이 나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사왜시발선처 비석과 유사한 것이 보였다. 마당에 큰 개가 앉아 있었는데, 다가가니 갑자기 뛰쳐나와 깜짝 놀랐다. 다행히 목줄이 있어 물리지는 않았다. 할 수 없이 주차장으로 되돌아왔다.

 

주차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강동초등학교 건물이 보였고, 토종닭, 오리백숙 전문의 식당 ‘향나무집’이 보였다. 마침 밭에서 일하는 할아버지를 만나 물어보니 유포 석보를 올라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주차장에 도착한 동네 아주머니가 주차 후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주었다. 유포 석보로 올라가는 길이 제대로 없고 풀도 무성하다고 얘기하였다.

 

폐가 담장 옆으로 난 길은 풀이 무성하여 매우 위험하게 보였다. 혹시 뱀이 나올지도 모르는 위험한 길이었다. 올라가는 길이 이길 밖에 없기에 큰 풀을 밟으며 집 옆으로 해서 언덕으로 올라갔다. 바로 안내판이 보이고, 옛 성벽의 흔적인 돌무더기도 나타났다. 사진을 찍고 ‘사왜시발선처’ 비석을 찍으려고 약간 올라가니 아까 만났던 개가 또 으르렁거렸다. 마침 주인  아주머니가 마당에 나왔다가 개를 꼭 안으며 날뛰지 못하도록 진정을 시켰다.

 

유포 석보의 낮은 성벽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드넓은 동해 바다가 잘 보인다. 발선처를 놓고도 주장이 엇갈린다. 경주 사람들은 지금의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 진리마을 바닷가라고 한다. 현대중공업의 여름휴양소가 설치돼 있는 곳이다. 곰솔로 뒤덮인 마을 뒤편 언덕에서 박제상의 부인이 떠나는 남편을 바라다 봤다고 한다.

 

석보 정상 쪽으로 올라가니 군데군데 성벽의 흔적이 보였다. “이 문화재는 ‘울산문화재돌봄사업단’이 보호, 관리하고 있습니다,”라는 팻말이 소나무에 걸려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자항이 잘 보였다. 한참 올라가니 농막과 같은 임시 거주지가 나타났다. 풀을 베고, 안내표지판도 설치하여 유포 석보 둘레길이 잘 정비되었으면 좋겠다.

 

일제강점기 때 정자항에 방파제를 쌓을 때 이곳 석보의 큰 돌을 뽑아서 공사하는 바람에 성벽의 원형이 거의 파괴되고 말았다. 미처 가져가지 못한 성벽 잔해만 남아서 옛 역사를 유추할 수 있다. 산의 능선을 따라 토성처럼 보이는 석보의 흔적은 남아 있다.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 2권, 단종 즉위년 8월 1일 신유 3번째 기사에 유포 석보 축성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1452년, 충청, 전라, 경상도 도체찰사 정분(鄭苯)이 아뢰기를, “청컨대 종사관(從事官) 김순(金淳)을 경상도에 보내어 군사 7천 5백 명을 뽑아서 울산(蔚山), 유포(柳浦)에 석보(石堡)를 쌓게 하여 좌도 도만호(左道都萬戶), 우도 도만호(右道都萬戶)로 하여금 병선(兵船)을 거느리고 수호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단종실록 3권, 단종 즉위년 9월 6일 을미 3번째 기사 1452년,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이제 듣건대 여러 고을의 축성의 역사(役事)를 파하였다고 하지만, 아직 파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금년에 밀, 보리와 올곡(早穀), 늦곡(晩穀)이 모두 여물지 못하여 백성의 생활이 가히 걱정스럽습니다. 변읍(邊邑)의 성참(城塹), 적대(敵臺)의 수축 및 유포의 석보(石堡)와 영광, 함흥의 읍성(邑城) 역사를, 청컨대 모두 정지하소서.”하고 건의하니 따랐다.

 

세조실록 6권, 세조 3년 1월 29일 갑오 5번째 기사 1457년, 병조에서 경상도 유포, 웅천과 전라도 강진에 성을 축조가 급함을 아뢰었다.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충청도(忠淸道)의 도순찰사(道巡察使) 박강(朴薑)과 부사(副使) 구치관(具致寬) 등이 치계(馳啓)하기를, 울산은 유포(柳浦)에 다만 목책(木柵)만 설치하고 있으니 방어(防禦)가 허소(虛疎)하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본포(本浦) 옛 연대(煙臺)의 남쪽에 석보(石堡)를 축조해야 할 것입니다.”고 건의하였다. “반드시 풍년을 기다려서 이를 축조(築造)한다면 지완(遲緩)될 듯하오니, 청컨대 가까운 여러 고을 사람을 부역(赴役)시켜 이를 축조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실록 14권, 세조 4년 10월 9일 계해 3번째 기사 1458년, 병조에서 도절제사영을 건조하고, 유포의 석보를 쌓는 일에 관해 아뢰었다. “지난번에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건조하는 것과 유포(柳浦)의 석보(石堡)를 쌓고 진주성(晉州城)을 쌓는 것을 일시에 거행하기가 어려워서 이를 정지하였습니다. 지금 진주성은 이미 정지시켰으니, 청컨대 절제사영을 건조하게 하고, 유포의 석보를 쌓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4. 유포 석보

 

동진(東津)은 울산광역시 울주 지역의 옛 지명으로 이칭으로 율포현(栗浦縣)이라고 하였다. 본래 신라의 율포현(栗浦縣)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년) 동진현(東津縣)으로 고쳐 임관군(臨關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태조 때 울산군으로 이속하였고, 1018년(현종 9년) 유포진첨사(柳浦鎭僉使)를 설치하였다.

 

1397년(태조 6년 유포석보(柳浦石堡)를 두어 병마절제사가 다스리게 하였으며 유포면(柳浦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895년(고종 32) 강동면으로 개명하여 울산군에 속하였으나, 1962년 울산시가 생기면서 울주군 관할이 되었다.

 

동진현이 있던 당시의 북쪽은 약장(約章), 서쪽은 임관(臨關), 남쪽은 울주와 접하고 있었다. 신라 때에는 경주의 동쪽 외곽을 방위하는 군사적인 요충일 뿐만 아니라 경주의 외항(外港)으로서 해상교통상 매우 중요하였다.

 

조선 초기 동진과 인접한 감포에 감포진(甘浦鎭)을 두었고, 동진의 진산인 하서지(下西知)에 봉수대가 있어 북쪽의 독산(禿山), 남쪽의 남목천(南木川) 봉수와 연결되었다. 교통망은 장기(長鬐)와 울산을 연결하는 해안도로가 발달하였고, 임관을 거쳐 경주와 연결될 수 있었다.

 

유포 석보는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동에 있었던 경상도좌병영의 보조적 군사시설이었다. 석보의 군사들은 적의 침략해 올 경우 상황을 파악하여 사령부인 경상좌병영에 보고하고, 인근 주민을 대피시키며, 동시에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투를 하는 소규모 성(城)인 방어진지다. 현대 군사적 개념으로 하면 보(堡)는 중대, 그보다 상급 부대인 진(鎭)은 대대에 해당한다.

 

유포 석보의 전체 둘레는 755m 정도이며, 구릉 기슭의 낮은 평지와 계곡을 성안으로 삼고 그 주위에 성벽을 쌓았다. 현재 가장 잘 남아 있는 동문(東門) 근처 성벽의 높이는 2m 20cm 정도이다.

 

만고충신 박제상 공과 열부(烈婦)인 그의 부인에 대한 역사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시대가 변해도 국가를 지키는 충신은 변함없이 높게 평가받고, 그 반대로 나라에 해를 끼치는 역적은 두고두고 지탄받게 된다. 남편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지킨 박제상 공의 부인은 열부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애국심, 충성심, 사랑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켜야 할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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