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1 (화)

  • 맑음속초15.5℃
  • 맑음21.6℃
  • 맑음철원22.1℃
  • 맑음동두천22.1℃
  • 맑음파주20.5℃
  • 맑음대관령12.1℃
  • 맑음춘천22.3℃
  • 안개백령도13.8℃
  • 맑음북강릉14.5℃
  • 맑음강릉16.7℃
  • 맑음동해15.1℃
  • 맑음서울22.8℃
  • 맑음인천18.8℃
  • 맑음원주23.3℃
  • 맑음울릉도12.4℃
  • 맑음수원19.7℃
  • 맑음영월20.1℃
  • 맑음충주20.9℃
  • 맑음서산19.3℃
  • 맑음울진14.9℃
  • 맑음청주22.7℃
  • 맑음대전20.9℃
  • 구름조금추풍령17.3℃
  • 맑음안동18.6℃
  • 맑음상주18.3℃
  • 구름조금포항15.6℃
  • 맑음군산17.5℃
  • 구름조금대구17.7℃
  • 맑음전주19.5℃
  • 맑음울산14.5℃
  • 구름조금창원18.5℃
  • 구름많음광주22.0℃
  • 맑음부산16.8℃
  • 구름조금통영17.3℃
  • 구름조금목포17.9℃
  • 구름조금여수18.2℃
  • 구름많음흑산도15.1℃
  • 구름많음완도17.0℃
  • 구름조금고창
  • 구름조금순천17.9℃
  • 맑음홍성(예)20.5℃
  • 맑음20.7℃
  • 흐림제주19.3℃
  • 흐림고산18.2℃
  • 흐림성산18.2℃
  • 흐림서귀포18.6℃
  • 구름조금진주18.8℃
  • 맑음강화17.6℃
  • 맑음양평22.8℃
  • 맑음이천23.6℃
  • 맑음인제18.6℃
  • 맑음홍천21.6℃
  • 맑음태백13.6℃
  • 구름조금정선군18.8℃
  • 맑음제천19.2℃
  • 맑음보은18.1℃
  • 맑음천안21.7℃
  • 맑음보령17.0℃
  • 맑음부여22.6℃
  • 맑음금산21.4℃
  • 맑음21.4℃
  • 맑음부안18.1℃
  • 구름많음임실21.8℃
  • 구름조금정읍20.0℃
  • 구름조금남원23.4℃
  • 구름많음장수21.4℃
  • 구름조금고창군18.7℃
  • 구름많음영광군17.7℃
  • 구름조금김해시17.8℃
  • 구름조금순창군23.4℃
  • 구름조금북창원19.9℃
  • 구름조금양산시18.5℃
  • 구름조금보성군18.3℃
  • 구름조금강진군18.8℃
  • 구름조금장흥18.4℃
  • 구름많음해남18.3℃
  • 구름조금고흥17.3℃
  • 구름조금의령군20.4℃
  • 구름조금함양군21.5℃
  • 구름조금광양시19.6℃
  • 구름많음진도군17.5℃
  • 맑음봉화15.9℃
  • 맑음영주17.2℃
  • 맑음문경16.9℃
  • 맑음청송군14.5℃
  • 맑음영덕13.0℃
  • 맑음의성18.6℃
  • 맑음구미20.6℃
  • 맑음영천15.5℃
  • 맑음경주시15.7℃
  • 구름조금거창20.0℃
  • 구름조금합천22.1℃
  • 구름조금밀양19.8℃
  • 구름조금산청20.6℃
  • 구름조금거제16.8℃
  • 구름조금남해19.2℃
  • 구름조금18.7℃
만고충신'박제상'공을모신'효충사'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관광경영학박사'심상도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고/칼럼

만고충신'박제상'공을모신'효충사'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관광경영학박사'심상도

양산시 상북면 박제상길 11-1(소토리)에 있는 효충사(孝忠祠)는 박제상 공의 유적이다. 신라시대 만고 충신 박제상 공의 생가로 구성되고 있으며, 사당 안에는 박제상 공과 그의 

 

1. 신라 최고의 충신

 

 

양산시 상북면 박제상길 11-1(소토리)에 있는 효충사(孝忠祠)는 박제상 공의 유적이다. 신라시대 만고 충신 박제상 공의 생가로 구성되고 있으며, 사당 안에는 박제상 공과 그의 아들 백결선생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사당 앞에는 박제상의 업적을 적은 효충사 석비가 세워져 있다.

 

 

박제상 공의 호는 관설당(觀雪堂),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9세손, 제5대 파사왕 5세손이다. 내물왕 7년(362년) 9월에 삽량주 소토리에서 태어나 성장한 공은 학업과 출사를 위해 왕경인 서라벌(경주) 치산 아래 삼강동으로 이거하여 수학하였다.

 

 

눌지왕 2년(418)에 고구려에 들어가 볼모로 잡혀 있던 왕제(王弟) 복호(卜好)를 데려오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역시 볼모로 잡혀 있던 왕제(王弟) 미사흔(味斯欣)을 계교로 탈출시키고 자신은 스스로 잡히는 몸이 되어 순국하였다. 시호는 충렬공이다.

 

 

양산의 춘추공원에는 양산을 대표하는 역사적 위인 세 명의 삼조의열을 모신 충렬사가 있다. 충렬사에는 신라 최고의 충신 박제상 공, 고려시대 양주방어사 김원현 공, 임진왜랜 때 동래성에서 순국한 양산군수 조영규 공의 위패를 모시고 그 공을 기리고 있다.

 

 

왜국에 볼모로 가 있는 미사흔(未斯欣)을 구하고자 박제상을 주축으로 신자천(申自天), 배중량(裵仲良)이 모의한 후, 왜에 망명한 것으로 가장하여 도착하였다. “신라 왕이 나의 부모를 죽이고 나를 해치려 하므로 도망쳐 왔소.”하니 왜왕은 그 말을 곧이듣고 장차 신라를 칠 때 미사흔과 박제상을 앞잡이로 삼고자 그들을 끌어들였다.

 

 

어느 정도 신임을 받게 된 박제상은 미사흔을 데리고 바다에 나가 뱃놀이를 하면서 탈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중,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해무가 끼자 재빨리 미사흔을 몰래 탈출시켰다. 미사흔을 떠나보낸 후 숙소로 돌아온 박제상은, 왕자를 구하기 위한 계책이었음을 왜왕에게 밝혔다. 왜왕은 박제상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회유하여 신하를 삼고자 하였다.

 

 

“나는 계림(鷄林)의 신하이다. 나는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망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며 계림의 모진 종아리는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을 것이다.” 하며 저항하였다. 왜왕은 분노하여 고문했다. 박제상이 발바닥을 멋겨 갈대밭을 끌고 다녀도 굴하지 않고 불에 달군 철판 위로 끌고 다녀도 끝내 굴복하지 않으니 왜왕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시켰다가 마침내 장작불에 태워 죽이고 목을 베었다.

 

 

부사로 갔던 김철복(金轍復)이 말을 끌고 가서 박제상의 의복을 수습하고 매장하여 이 사실을 혈서로 써 말의 입에 물리고 채찍을 쳐 바다로 쫓고 자결하였다. 말이 신라로 돌아와 궁궐 앞에 이르러 혈서를 토하고 죽으니 왕이 그 혈서를 읽고 크게 슬퍼하며 대아찬에 추증하고 양산에 비를 세워 충절을 기리도록 했다.

 

 

왕은 이 소문을 듣고 애통해하며 박제상을 대아찬으로 추층하고, 그의 가족들에게 후하게 물건을 하사하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제상의 둘째 딸을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함으로써 은혜에 보답케 하였다. 처음 미사흔이 돌아올 때 대왕은 6부에 명령하여 멀리 나가서 그를 맞게 하였으며, 그를 만나게 되자 손을 잡고 서로 울었다. 형제들이 모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마음껏 즐겼으며, 왕이 가무를 스스로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는데, 지금 향악 가운데의 우식곡(憂息曲)이 그것이다.

 

 

2. 박제상 공 동상

 

양산시는 양산 출신인 박제상의 충절 정신을 기리고자 2016년 6월 9일 공의 사당이 있는 효충사에 동상을 건립하고 제막식을 하였다. 2015년 2월 상북면민들이 풍력발전기금 1억 2천 3백만 원을 양산시에 기부하여 효충공원내 박제상 공의 동상 건립을 요청하였다. 양산시에서 2015년 1회 추경예산에 반영하고 2015년 5월 부시장을 위원장으로 총 11명으로 동상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2015년 7월부터 타시군 벤치마킹과 4차례 자문회의를 거쳐 종류, 형태 규모 등을 결정하고 2015년 11월 동상제작 설치 사업을 공모하여 응모 작품에 대해 7명의 평가위원이 심사하여 아트인페이스 업체가 선정되어 12월에 계약을 체결하였다.

6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 통해 철저한 고증과 자문으로 여러 차례의 수정 보완을 거쳐 2016년 5월 19일 동상을 제작 설치 완료하였다. 이에 따른 제작기간은 5개월, 소요사업비는 1억 2천 9백 5십만 원으로 풍력발전기금 1억 2천 3백만 원, 시비 6백 5십만 원이 소요되었다.

 

 

공의 동상 제작을 위해 지역원로, 영해 박씨 문중 관련자, 관련 교수 등 11명으로 동상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타시군 벤치마킹, 회의를 한 결과 충신으로의 강한 인상과 신라 관복의 세밀함을 표현하기 위하여 석상보다 청동 브론즈로 제작하기로 하였다. 형태는 공의 중앙관인으로 간관, 이찬, 삽량주 간 등 관직을 고려하여 무인보다는 문인에 가깝다는 결론으로 좌상을 결정하였다.

 

 

삼국시대 인물로 의복, 관모, 관식 등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여 복식, 조형 등 전문가 6명을 소위원회로 구성하여 추진하였다. 공의 신분과 출신 및 주요 일대기를 통하여 유형을 장유와 바지, 절풍형 관모에 조익식 관을 삽식하고 의장미를 갖추어 위엄과 당당한 이미지로 제작하였다. 관모는 통일신라 절풍형 관모를 기본으로 황남대총, 양산부부총 등 동시대 출토유물을 상호 비교한 후 동상의 크기에 적합한 미적 형태와 비를 조정하였다.

 

 

조형은 초상화를 근거하여 위엄과 강하고 흔들림이 없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충신열사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동산은 인체 비율의 적정성을 반영하고 전체적으로 규사 주물로 제작하고, 얼굴과 허리띠, 손 등 세밀한 부분은 밀납 주물로 제작하였다. 동상과 좌대의 높이는 효충공원의 규모와 주변환경, 그리고 탐방객들의 시선 등을 고려하였다. 동상의 높이 2m, 좌대 1.5m, 바닥직경 6m이다.

 

 

3. 효충역사공원의 시비

 

효충사 경내에는 박제상의 충절을 기리는 시비가 세워졌다. 조선시대 관료들이 남긴 박제상 공을 추모하는 시는 돌에 새겨져 참배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조선통신사가 양산을 거쳐갈 때 정사, 부사 등은 효충사를 찾아 참배하고 많은 추모 시를 남겼다. 적국인 일본으로 떠나는 통신사 일행은 박제상 공이 왕자를 구출하기 위해 왜국에 가서 목숨 걸고 행했던 충절을 되새기며 비장한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1) 눌지왕(訥祗王) 우식곡(憂息曲)

눌지 마립간(訥祗 麻立干 : 재위 417년~458년)은 신라의 제19대 임금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최초로 마립간의 칭호를 사용한 임금이다. 신라본기에서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길 “마립간이란 방언으로 말뚝을 이른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는데 관위에 따라 배치했다. 즉 임금의 말뚝을 위주로 신하의 말뚝들을 그 아래 벌였으니 왕호를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은 김씨이며, 내지왕(內知王)이라고도 부른다. 포항중성리신라비에는 내지왕(乃智王)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내물마립간이고, 어머니는 미추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이며, 또는 내례길포부인(內禮吉怖夫人), 내례희부인(內禮希夫人)이라고도 전한다. 비는 실성이사금의 딸이다.

 

내물 이사금이 재위 37년인 392년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를 보냈는데, 401년에 귀국해 내물마립간에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실성이 이에 한을 품고 내물의 아들 눌지를 몰아내고 동생 복호와 미사흔을 각각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냈다. 그 뒤 고구려 사람을 시켜 눌지를 살해하려 했으나 오히려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정변을 일으킨 눌지가 실성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그의 왕위 계승에 고구려의 힘이 작용하였다. 복호와 미사흔은 418년 박제상을 시켜 돌아오게 했다.

 

그러나 즉위 후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418년에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동생 복호(卜好)를 고구려에서 탈출시켰다. 또한 왜(倭)와의 화호(和好)를 위해 실성마립간 때 볼모로 보내졌던 동생 미사흔(未斯欣)도 귀국시켰다. 고구려와는 424년에 사신을 보내어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고구려의 평양천도 이후의 남진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433년에는 종래 적대적 관계에 있던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440년 왜가 두 차례에 걸쳐 남쪽과 동쪽 변경을 침입, 백성들을 납치했다. 444년 음력 4월에는 왜가 보다 대규모로 쳐 와, 금성을 열흘간 에워쌌으나 군량이 떨어져 도망쳤다. 임금이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추격해 독산 동쪽에서 싸웠으나, 신라군 장병 절반이 넘게 죽었다. 임금이 패해 말을 버리고 산 위에 올라, 적들이 여러 겹으로 에워싸는데, 안개가 짙게 끼어 간신히 왜군의 눈으로부터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눌지왕은 두 아우를 찾아 크게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고 우식곡(憂息曲)이란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박제상의 죽음을 접하고 매우 슬퍼하였다. 우식곡은 동도악부(東都樂府) 7수 중의 하나이다. 『시경』에 상체화(常棣華)는 상체꽃(常棣花)을 의미하는데, 형제에 비유하였다. 상체꽃이 한데 다닥다닥 붙어있기 때문이다. 부상은 해 뜨는 곳에 있다는 나무 이름으로 동쪽에 위치한 왜국을 비유한 말이다.

 

“常棣華隨風落扶桑 상체꽃 바람따라 부상에 떨어지니,/ 扶常萬里鯨鯢浪 부상 만리에 고래 물결 사납구나./ 縱有音書誰得將 비록 서신이 있은들 누가 가져올 수 있으랴!/ 常棣華隨風返鷄林 상체꽃 바람따라 계림에 돌아오니,/ 鷄林春色擁雙闕 계림의 봄빛이 쌍궐에 둘렀네./ 友于歡情如許深 우애의 즐거운 정 이렇게 깊구나.”

 

2) 김종직(金宗直) 양산의 징심헌에서 차운하다(梁山澄心軒 次韻)

김종직의 자(字)는 계온(季溫), 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세조 때에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적으로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졌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여 성종 초에 경연관, 함양군수(咸陽郡守), 참교(參校), 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승정원도승지, 이조 참판, 동지경연사, 한성부 판윤, 공조 참판, 형조 판서,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의 한사람이자 중시조격이다. 그러나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김종직은 자신을 전별(餞別)하는 문인들을 ‘우리당’(吾黨)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을 종주로 삼았던 정치세력이 사림(士林)이다. 이를 통상 붕당 정치의 시원으로 간주한다.

 

정여창, 최부(崔溥), 김굉필, 이목, 권경유, 김안국, 김정국, 김일손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고,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그의 손제자였다. 남효온과 남곤, 송석충, 김전, 이심원도 그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항우의 초 회왕 살해에 비유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기록에 남겼으나 그 자신은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후일 비판을 받았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당했다. 밀양에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이때 호랑이가 나타나 찢어진 시신을 지키며 몇 날 며칠을 슬퍼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시신을 거두어 이장하여 안장한 이후에도 호랑이는 무덤을 지키다 결국 그 앞에서 죽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가엾이 여겨 김종직 묘 옆에 호랑이 무덤을 따로 만들어주었다고 전해진다.

사망 직후 그에게는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가 1494년(성종 24) 문간(文簡)으로 개정되었다. 다시 1708년(숙종 34년) 원래의 시호대로 회복되어 문충으로 다시 복작되었다.

“봄경치 아득하여 시야가 끝이 없는데,/ 나그네 정은 쓸쓸해라 도리어 가을 같구려./ 세간의 시비 분쟁 부질없는 일에 대해선,/ 맑은 강 마주해 앉아 시름을 말하지 말아야지.”

 

3) 김일손(金馹孫) 양산 징심헌 점필재 선생 운을 따라(梁山郡澄心軒 謹次佔先生韻)

김일손(1464년~1498년)은 조선 성종, 연산군 때의 문신이며 학자, 사관, 시인이다.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성종 때 문장실력을 높게 평가받아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활동했다.

이때 공문서인 사초에 왕실에 대한 유언비어,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 윤필상 등의 의혹 등 여러 소문들을 검증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사서에 기록해 물의를 빚었고, 거기에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세조를 비난한 목적으로 사초(史草)에 실었고 이것을 국문 도중에 드러나 반역죄로 사형당한다.

그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 윤필상, 이극돈(李克墩), 임사홍 등 훈구파(勳舊派) 학자들과 학조 등 승려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신랄하게 지적과 규탄했다. 그의 가족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해 자손이 끊겼지만 큰 형 김준손(金駿孫)의 차남 김대장(金大壯)이 출계(出系)하여 그의 대(代)를 이었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었고, 문민(文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승정원 도승지가 추증되었다. 충청남도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 경북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탁영문집』이 있다.

“한 구비 긴 강은 만고에 흐르고/ 쓸쓸한 대잎은 몇 년이나 겪었나?/ 효충동 안에는 이제 주인이 없어./ 푸른 풀만 해마다 몰래 근심 자아내네.”

 

4) 서거정(徐居正) 양산(梁山) 징심헌(澄心軒)

서거정(1420년~1488년)은 조선 문종, 세조, 성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여섯 임금을 섬겼다.

1444년(세종 26) 문과에 급제하여 사재감 직장(直長)을 지내고 이조 참의, 사헌부 대사헌(1478년), 의정부 좌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1451년(문종 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 부수찬(副修撰), 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

1456년(세조 2) 문과중시에 급제, 이듬해 문신정시에 장원했다. 후에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어 146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문장과 시(詩)를 논하여 해동(海東)의 기재(奇才)라는 찬탄을 받았다.

세조 때 『경국대전』, 성종 때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책의 편찬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또한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한글로 번역했다. 사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경상도 대구의 구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사가정역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푸르디 푸르고 영롱한 만 그루 대나무 숲에,/ 다시 경관 좋은 징심헌 한 채가 자리하였네./ 바람이 잔물결 불어라 잔물결마다 옥이요./ 성긴 발에 달빛 스며라 조각조각 황금일세./ 신선의 무리 불러서 함께 학 타고 가고파./ 좋은 시구를 큰 소리로 읊조리고 있노라니/ 난간 기대 생각에 젖는 걸 아는 이 없어라./ 천 갈래 이별의 시름에 밤은 깊어만 가네.”

 

5) 이사경(李士慶) 징심헌 차운(澄心軒 次韻)

이사경의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이선(而善), 호는 쌍곡(雙谷). 이집(李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랑 이신충(李藎忠)이다. 아버지는 생원 이계인(李啓仁)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첨정(僉正) 이극강(李克綱)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생원시에 합격하고, 1601년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전적, 정언, 병조좌랑, 삼화현령 등을 역임하였다. 1606년 예조좌랑을 거쳐 정언, 지평이 되고, 1613년(광해군 5)에 성천부사로 나갔다가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란하였던 관사의 화재로 파직되었다.

 

1618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대사간에 승진하였다. 이때 인목대비(仁穆大妃)는 존호를 삭제당하고 서궁(西宮)에 유폐되어 있었는데, 경상도관찰사 윤훤(尹暄)과 충청도관찰사 이춘원(李春元)이 진선장(進膳狀)에서 폐모에 대한 존칭을 그대로 쓴 것을 묵인하여 준 것이 말썽이 되자 사직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이사경의 역량이 널리 인정되어 다시 승지, 병조, 예조의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청렴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백세토록 맑은 강은 지금도 흐르는데,/ 다짐하고 님 떠난 지 몇 가을이 흘렀던가? /충신의 의기로써 죽음 길을 택하실 때,/ 대장부 굳은 마음, 집 시름도 잊으셨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만고충신 박제상 공, 그의 아들 박문량 공이 태어난 양산시에서 효충사를 정비하고 동상도 건립하는 등 추모사업을 계속해왔다. 효충사의 부지가 협소하여 추가적으로 토지를 매입하고 주차장을 증설하는 등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앞으로 좀 더 보완사업을 펼쳐 양산을 대표하는 위인의 탄생지에 걸맞은 위상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YNEWS 심상도 총괄위원장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