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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전투에서'송상현'동래부사를도운'조영규'양산군수/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관광경영학박사/심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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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동래성전투에서'송상현'동래부사를도운'조영규'양산군수/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관광경영학박사/심상도

임진왜란때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한 조영규(趙英圭) 양산군수와 효자인 그의 아들 조정로(趙廷老)의 충효정신을 기리는 정려각이 전남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에 있다. 조선시대 나



 

1. 조영규 양산군수와 아들 조정로의 정려각

 

 

임진왜란때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한 조영규(趙英圭) 양산군수와 효자인 그의 아들 조정로(趙廷老)의 충효정신을 기리는 정려각이 전남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에 있다. 조선시대 나라에서 내린 정려각으로 1985년 2월 15일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었다.

 

 

조영규(趙英圭, 1535∼1592)의 본관은 직산(稷山)이고 자는 옥첨(玉瞻)이다. 그는 장성군 백암리에서 조준(趙準)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과에 올라 용천부사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며, 청렴결백의 목민관으로 유명하였다. 조영규는 1554년(명종 9년)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초관(訓練院哨官), 사복시 주부, 제주판관, 무장현감, 영암군수, 용천부사, 낙안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양산군수로 있으면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동래성을 수비하다가 전사하였다. 호조참판에 추증되고 양산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그의 아들 조정로(趙廷老)는 아버지의 시신을 다 수습하지 못해 평생 죄인으로 자처하다 세상을 마쳤다. 사후에 선무랑(宣武郞) 빙고별검(氷庫別檢)에 증직되고 정려가 내려졌다.

 

 

이후 1669년(현종 10)에 송준길(宋浚吉)이 이들 부자의 일을 아뢰어 조영규 양산군수는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이 정려각은 그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왕명으로 건립되었고, 1849년(헌종 15년)에 중수되었다. 정려각은 앞면 2칸, 옆면 1칸의 맞배집이며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안에는 충신 조영규와 효자 조정로의 명정 편액과 ‘조씨충효정려중수기(趙氏忠孝旌閭重修記)’가 있다.

 

 

조영규는 본관이 직산이며 명종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7곳의 수령을 거쳐 양산군수로 부임해 임진왜란을 당했다. 왜군이 밀려오자 경상좌병사 이각은 도망쳤으나 동래부사 송상현 공과 함께 동래성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순국하여 동래의 안락서원, 부산 충렬사, 양산 충렬사, 그리고 장성의 모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직산 조씨는 고려말에 장성군 북일면 누태마을로 입향했다가 조영규 군수의 조부 때 장성군 북이면 백암으로 이거했는데 후손은 그곳에 3~4호 살고 있다고 한다.

 

 

충렬사는 조영규와 백수회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696년(숙종 22) 양산군수 조무훈(曺武勛)에 의해 양산읍성 내의 동쪽에 세워졌다. 그후 1788년(정조 12)에는 영조 때의 양산군수 권만이 추가로 합향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자, 1870~1873년 양산군수로 재임한 손상일(孫相馹)을 중심으로 철거된 충렬사 자리에 호조참판 조공비(趙公碑)를 세우고 치제(致祭)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치제는 중단되고 조공비는 양산시 북부동 옛 양산군청 뒤 느티나무 고목 아래와 논밭에 버려져 있었다. 이 비석은 해방 이후 양산 춘추계(春秋稧)에 의해 다시 수습되어, 1949년 준공된 양산시 강서동 춘추원(春秋園)의 삼조의열단(三朝義烈壇)에 모셔져 있다. 삼조의열단은 현재 충렬사로 정비되어 있으며 경내에 삼조의열비가 있다. 증호조참판 조공비는 세 개의 비석 중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2. 임진왜란과 제승방략

 

임진왜란 때 조영규 양산군수가 동래읍성으로 달려가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동래성을 수비하다가 전사한 이유는 조선시대 군사전략인 제승방략(制勝方略) 때문이었다. 전쟁 혹은 변란이 일어났을 때 각 지역의 수령이 소속 군사를 이끌고 거점 지역으로 이동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의 지휘를 받는 군사 전략이다. ‘제승(制勝)’이란 적을 제압하여 승리로 이끈다는 뜻이다.

 

 

조선 전기 국방 체제는 1457년(세조 3) 만들어진 진관체제(鎭管體制)였다. 진관체제는 병력 이동 없이 행정 단위에 따라 소속 지역을 지키는 전략이었기 때문에 많은 군사와 군비(軍費)를 발생시켰다. 또한 진관체제는 군사를 분산시키게 되므로 상습적으로 침입을 당하는 지역이나 군사 요충지를 선별하여 병력을 집중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골칫거리였던 북방 여진족과 남해안 왜구와 벌이는 소규모 국지전에 대처하기에는 비효율적이었다.

 

 

전국을 군사지대화하고 방위망화했던 진관체제는 성립기반이 지나치게 광범위한 것으로 실제 유사시에는 오히려 무력함을 드러내고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무력함은 국가의 경제기반 등이 허약했고, 지방의 행정관인 문관 수령이 군사지휘권을 겸하게 됨으로써 군사를 잘 알지 못하여 국방에 무관심하게 되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진관체제 아래의 정병과 수군 등은 정해진 기한의 복무를 마치면 농민으로 돌아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으나 또한 요역(徭役)을 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요역은 국가가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는 수취제도이다. 요부(徭賦), 잡역(雜役), 호역(戶役), 역역(力役), 부역(賦役) 등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들에게 보인(保人)이 설정되기는 했으나 단위 보인의 수가 감소되고 있었으며 종래까지의 자연호 단위의 경제권을 위협하는 요소까지 있어 군사의 부담 능력을 더욱 가중시켰다. 보인은 군(軍)에 직접 복무하지 아니하던 병역 의무자로서 정군(正軍) 한 명에 대하여 두 명에서 네 명씩 배당하여, 실제로 복무하는 대신에 베나 무명 따위를 나라에 바쳤다.

 

 

조선 정부는 1510년(중종 5) 일어난 삼포왜란을 계기로 하여 전투가 벌어지는 거점 지역에 각 진관의 수령이 휘하 군사들을 이동시키고, 중앙 정부에서 보낸 군사 전문 지휘관의 지휘를 받는 전략, 곧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방어 체제를 구축하였다. 조선 정부는 비전문가가 지휘하는 분산적 방어 시스템을 전문가가 지휘하는 집중적 방어 시스템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변방의 국지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같은 전면전에서 제승방략 체제는 매우 취약하였다. 집중적 방어 거점 지역이 함락될 경우 후방에서 방어선을 다시 형성할 방법이 없었으며, 중앙 지휘관이 전선에 도착하는 시간보다 적의 진격이 빠를 경우 전장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일본군이 삽시간에 수도를 함락시키는 것으로 현실화 되었다. 결국 임진왜란 이후 국방 체제는 제승방략 체제의 취약점을 보완하여 중앙군을 강화한 5군영과 지방군을 강화한 속오군으로 크게 변화하였다.

 

 

동래성 전투를 도운 양산군수 조영규, 경상좌병사 이각, 울산군수 이언함 등은 국방 전략인 제승방략에 의거하여 나라의 부름에 따라 동래성으로 갔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다. 조영규 양산군수는 동래성에 가서 송상현 동래부사를 만난 후 양산에 계신 노모와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약속하고 되돌아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양산을 대표하는 삼조의열로 추앙받고 있다.

 

 

반면 경상좌병사 이각은 송상현 부사에게 자신은 성밖에서 싸우겠다고 거짓말을 하며 살기위해 동래성 북문을 통해 달아났다. 동래부순절도에도 이각의 도주행각이 그려져 있어 비겁한 인물로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울산군수 이언함도 일본군에 포로가 되어 왜장이 선조 임금에게 주는 서찰을 받고 석방되어 임무도 수행하지 않고 오명을 남겼다.

 

3. 부산 충렬사 정화기념비 내용과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

 

일제시대에는 동래 유림에 의해 봉행되는 충렬사 제향이 민족정기를 북돋운다고 하여 일제가 방해했기 때문에 보수하지 못하여 건물이 낡고 허물어져 갔다. 박정희 대통령 관심 덕분에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정화공사를 통해 성역화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1991년에는 임진왜란 때 동래부지역 전투에 참가하여 순절하거나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된 자 중에서 조사 미비로 누락된 66명에 대한 공적을 확인하여 13명을 추가로 모셨고, 1997년에 다시 3위, 2003년에 1위, 2006년에 1위를 각각 추가로 모셨다. 현재는 25,600평의 경내에 본전 외에 15채의 건물이 있으며, 93위(본전 89, 의열각 4)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매년 5월 25일에는 온 시민의 정성으로 제향을 올린다.

 

1978년 5월 이주홍 짓고 배재식 쓴 부산 충렬사 정화기념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 침략해 침략해왔던 1592년 4월 13일은 우리 한민족으로서 천추에 잊지 못할 통탄의 날이 된다. 고려조 때에 몽고군이 우리 나라를 침공했고, 그 뒤 조선왕조 때에는 청군이 침략해 왔던 적이 있으나 임진왜란의 불행은 이들의 외침보다 몇 갑절이 더 뼈저리게 느껴지는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경제정책의 빈곤 위에 당쟁으로 국론이 통일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 국방이 부실해졌던 까닭에 더욱 큰 희생을 당해야 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적에 대한 적개심과 아울러 우리 스스로에 대한 회한이 동시에 통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맨 먼저의 적의 침공을 받은 부산지방의 성주와 백성들은 일치단결 최후까지 싸워 그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던 것이다.

 

부산이 없으면 동래가 없고 동래가 없으면 나라 전체가 어찌될지 모를 사정을 누구보다 절감했던 동래부사 송상현과 부산첨사 정발, 다대첨사 윤흥신은 적을 맞아 싸운 첫날에 각각 장렬한 전사를 했고 뜻을 같이한 양산군수 조영규, 교수 노개방, 교생 문덕겸 등도 나라의 편안에 승화되는 드높음을 몸으로서 통감하지 않고서야 어찌 군관민 남녀노소 모두가 한 덩어리 지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으며 칠년전쟁에 동래 수영에서 일어난 수많은 의병의 봉기가 이분들의 순절한 높은 뜻과 어찌 무관하겠는가?

 

적이 피신하라는 권유에도 응함이 없이 마지막 나라에 하직하는 북향요배하고 부친에게 글을 남겨 나라의 위급함에는 태산 같은 부모의 은혜도 뒤로 돌리지 않을 수 없음을 표한 뒤 태연자약하게 죽음에 나아간 송상현의 늠름한 태도 그대로 대의의 무거움 앞엔 개인의 목숨이 홍모같이 가벼운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희박한 곳에 나라의 번영을 생각할 수 없고, 나라의 안보사상이 미약한 곳에 나라의 태평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진리일 진데, 이곳에 충렬사를 세워 순국선열들을 추모해 왔음은 다름 아닌 이들 선열들의 충절을 만고에 기리려는 것이 어니와, 이번에 박정희 대통령의 분부로 문화공보부와 부산직할시가 경역을 크게 중수 확장하여 정화사업을 완수한 뜻도 이분 선열들의 충절을 국민의 호국정신으로 받들어 총화단결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고 민족중흥의 역사적 대업을 이룩하려 함에 있는 것이니, 이제 우리는 선영의 영령에 부끄럼이 없게 그 막중한 은혜를 충성으로써 갚고 후손을 만대 반석위에 안주케 할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어 멸사봉공 살신성인할 것을 굳게 맹세해야 할 것이다.”

 

 4. 부산 충렬사 정화사업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

 

박정희 대통령은 1978년 7월 21일 부산 충렬사 정화사업 준공식에 참석, 테이프를 끊고 경내를 돌아본 뒤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화기념비 앞에 20년생 주목 한 그루를 기념식수하고 관리사무소에 들러 “충렬사를 새로 단장하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라고 직원들을 칭찬하였다.

박대통령은 최석원 부산시장의 안내로 충렬사 사당에 국화 화롱을 헌화한 뒤 분향재배하고 참예록에 서명했다. 박대통령은 충렬사 본전 안을 돌아보고 임진왜란 때 분전한 정운 장군과 무명전사들의 위패들도 함께 모신 것은 잘한 일이라고 치하했다.

 

박대통령은 충렬사 건축내용을 살펴보고 “이제 이런 사적의 건축기술이 상당히 좋아졌으며 경내의 축대도 잘 쌓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의열각에도 분향재배하고 기념관에 들러 임진왜란 때 분전 순국한 송상현 동래부사 등의 유품과 임진왜란 기록화 등을 돌아보고 기록화를 그린 서울대 정창섭 교수, 부산대 이의주 교수에게 “그림들이 잘되었으며 앞으로 수백 년, 수천 년 뒤에는 명화로 남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안락서원의 중심건물이었던 소행당의 한국식 마루가 넓은 것을 보고 “집을 지을 때 한국식으로 방과 마루를 이렇게 지으면 멋이 있습니다” 하면서 “집 크기가 옛날 집과 꼭 같습니까?”하고 묻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정화사업기념비(무게 18t)가 둥근 북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이 기념비를 조각한 한인성 부산대 교수에게 ”기념비 모양을 둥글게 한 것은 좋은 착상이고 조각도 잘 되어 있군요.“하고 격려했다.

 

5. 부산 충렬사 정화사업에 대한 비화

 

부산시보(2012년 11월 29일)에 충렬사 정화사업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충남 아산의 현충사 성역화로 전 국민의 이목이 아산으로 집중되던 때가 있었다. 1975년 5월 25일, 당시 부산시 문화계장이던 김부환(73) 씨는 부산 충렬사 제향을 마친 뒤 시장을 모시고 오는 차 안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시장님, 일년에 4억 원씩 3년간 12억 원만 주시면 아산 현충사 못잖게 충렬사를 정화해서 부산시민 정신의 구심점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부산시장은 박영수 씨. ”이 사람아, 내가 부산시장을 천년, 만년 한단 말인가?“ 그 한마디로 정화사업은 물 건너간 듯싶었다. 문화계장을 3번째 하고 있던 김부환 씨는 부산시에서는 만년 문화계장을 못 벗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 8월 자청을 해서 상공부 소속 마산수출자유지역으로 근무처를 옮겼다. 5개월여가 지난 1977년 1월 느닷없이 박 시장이 그를 불렀다.

 

”이 사람아, 상공부에서 국가에 충성하나, 부산시에서 충성하나 똑 같은 것 아닌가? 자네는 사학과를 나와서 문화재 업무에 흥미가 있고, 언젠가 나에게 12억 원만 주면 충렬사를 정화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15억 원 예산을 확보했으니 나를 좀 도와주게.“

부산시의 유능한 사무관들을 제쳐두고 ”나를 좀 도와주게!“ 하는 겸손한 시장의 뜻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상공부 근무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부산시로 돌아왔다. 그것도 신설된 부산시 문화재과장으로 승진해서 돌아오니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러웠다. 지방행정사무관으로 승진한 지 2년이 겨우 지난 시점에 과장 승진이었으니 주위의 따가운 질시와 견제가 상상을 초월했다.

온갖 질시와 견제 속에서 충렬사 정화작업이 시작됐다. 지금 같으면 시민 반대에 막혀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충렬사 주변의 교회와 집들을 철거하고, 부지 7만 6천 33㎡를 확장했다. 난제가 첩첩산중이었다. 무엇보다 공사감독은 도시계획국장, 문화재 고증은 문화재과장 책임 아래 시행되는 것이어서 국장과 과장 사이에 사사건건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일부 국장, 구청장들은 서로 잘 보이려고 시장에게 아부성 제안이나 건의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일일이 해명하고 설득하느라 일은 쉽사리 진척되지 않았다. 정확한 지적은 열 번, 백 번이라도 고쳐야 하겠으나 그렇지 못한 지적이 문제였다. 더러는 귀가 솔깃해진 시장까지 설득하고 해명하자니,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입술을 깨물어가며 처음 해결한 일은 기념관 안에 전시할 기록화로 100호 정도 크기의 16점을 제작하는 것으로 조잡하게 계획된 것을 한국에서 가장 큰 3천호 크기 2점과 300호 크기 4점으로 압축했다.

 

기존 계획을 뒤집는 것인데다 예산까지 더 드는 것이어서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재를 올려도 결재가 나지 않았다. 견디다 못해 라인을 생략하고 시장 결재를 바로 받아 시행에 들어갔다. 윗분들에게는 그것이 두고두고 눈엣가시였다. 점잖기로 소문난 김학중 당시 부시장 앞에서도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 미대 정창섭 교수에게 의뢰해 ‘부산분전순국도’, 부산대 이의주 교수에게 의뢰해 ‘동래보국충정도’를 완성했다. 당시 그린 그림들은 지금도 한국기록화 역사상 가장 큰 대작으로 충렬사에 자리 잡고 있다.

 

공사가 한창일 때 최석원 시장이 부임했다. 부임한 지 두 달이나 되었을까. 어느 날 시장께서 급히 찾는다는 전갈을 듣고 바람처럼 달려갔다. ”자네 눈에 색맹 있나?“ 밑도 끝도 없이 질문이 쏟아졌다. 어리둥절해 눈만 껌벅이고 있는데, ”시장이 묻는데 대답을 안 하느냐“고 재차 윽박지르는 바람에 한다는 대답이 지금 생각해도 빙긋이 웃음이 난다. ”예, 최근에 색맹검사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입학시험 칠 때 색맹검사를 했는데, 그때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럼 충렬사 정당에 청기와를 올린다고 해놓고 왜 옥기와를 올렸소. 그리고 기와는 검어야 하는데 왜 희다 검다 하는 불량품을 사용했소. 당장 기와를 교체하시오.“ 어디서 또, 무슨 말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시장을 이해시키기 위해 가마에서 기와가 구워지는 과정, 고려청자의 빛깔, 문화재 보수공사에 쓴 청기와 견본과 사진첩을 만들었다.

 

기와는 보통 800~900도 사이에서 구우면 검은색이 되지만, 더 잘 굽기 위해 1천 100도로 열을 가하면 은회색이 나오고, 은회색 기와가 10년 이상 세월이 흐르면 검어지게 된다는 보고서를 올려도 막무가내였다. 기와를 교체하라는 불호령뿐이었다.

 

5천만 원이 넘는 관급 기와를, 그것도 하자가 없는데 무슨 재주로 교체를 한단 말인가. 2주에 한 번씩 개최하는 대책회의 때마다 터지고 깨졌지만 묘책이 없었다. 주위에서는 위로는커녕 한술 더 떠서 교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쪽으로 의견을 몰아갔다.

 

골머리를 싸매고 있던 1978년 1월, 오후 4시쯤 진해 별장에 계시던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 사전예고도 없이 충렬사 현장으로 시찰을 나온다는 전갈이 떨어졌다. 서둘러 시장님과 브리핑 차트판을 들고 안락로터리를 돌아 대통령께서 하차하는 지점에 대기했다. 박 대통령이 탄 차가 시장이 서 있는 바로 앞에 섰다. 대통령께서는 한 발은 땅에, 한 발은 차 안에 두고 미처 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충렬사를 쳐다보시더니 ”야, 충렬사 기와 잘 입혔다“고 첫 말씀을 던졌다. 그 뒤의 대책회의부터는 기와 이야기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3개월의 고심이 눈 녹듯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에서 당파싸움을 하며 국방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하여 국토는 유린되고 백성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난세에 충신이 나온다고 동래부사 송상현 공, 조영규 양산군수는 압도적인 숫자의 왜군에게 맞서며 용감하게 싸우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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