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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 동래부사와 동래읍성, 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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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송상현 동래부사와 동래읍성, 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과 안락동, 명륜동, 칠산동, 명장동 일대에 있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1972년 6월 26일 부

 

1. 동래읍성의 역사

 

 

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과 안락동, 명륜동, 칠산동, 명장동 일대에 있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

 

 

역사적으로 삼한시대부터 동래에는 거칠산국, 내산국, 장산국, 독로국 등으로 불린 작은 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나오는 1021년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는 지역으로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이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진성과 함께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현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송상현 공의 충절 때문에 동래읍성은 역사에 찬란하게 기록되었다. 동래읍성은 충렬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동래읍성 북문, 북장대, 서장대는 출입이 자유로우나 동장대는 충렬사를 통해 들어가야 한다. 동장대는 인생문에서 올라가도 되지만 일요일에는 개방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부분 보수되었던 성을 1731년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그 규모를 훨씬 크게 고쳐 쌓았다. 이때의 성이 지금 흔적으로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였다. 읍성에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인생문, 암문이 있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에는 지희루, 서문에는 심성루, 남문에는 무우루, 암문에는 은일루가 각각 있었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과 뒤쪽의 주조문을 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남문에는 양 날개가 달린 듯 좌우로 뻗은 성벽인 익성이 있고, 나머지 3개의 문에는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해, 성문 밖으로 원형이나 방형으로 쌓은 옹성을 두어 적으로부터 성을 방어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시가지 정비계획 등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마안산을 중심으로 산지에만 성곽 모습이 남았다. 최근 부산광역시에서 일부 성곽과 성문을 복원하였다. 성내에 북문,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 인생문이 복원되었고 성벽도 부분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대한민국에서 대표적인 읍성이다.

 

 

일반적으로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동래읍성은 마안산을 거쳐 구릉지와 동래 시가지의 평탄한 지역을 포함하여 쌓은 읍성으로, 고려말에 축조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현종 12년(1021)에 동래읍성을 수리하였으며, 그 뒤 우왕 13년(1387)에 왜구를 막기 위해 동래성을 크게 고쳐 쌓아 둘레가 3,090자, 높이 13자라고 전한다고 기록되었다.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인 이 성은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부산진성과 함께 왜적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7년(1731)에 다시 증축하여 당시 규모가 둘레 1,729자였고, 4곳에 문을 만들었다.

 

 

부산 동래읍성 6개 문 중 하나인 '인생문(人生門)'의 성곽 일부가 2005년 3월 복원되었으나 부실공사로 10년 만인 2015년 9월 17일 붕괴되었다. 부실 공사로 무너진 동래읍성 인생문이 조선시대에 제작된 설계도 ‘축성계초’를 활용해 2017년 9월 복구되었다.

 

 

동래읍성을 답사해보니 공원처럼 잘 꾸며져 있어 산책과 등산하기에 좋았다. 동래읍성 성곽 옆으로 편백나무 숲이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고, 황토길도 있어 많은 부산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편백나무 숲길에는 시비도 있고, 과거의 인물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잘 되어 있어 걷는데 지루하지 않았다. 송상현 동래부사라는 역사적 위인 덕분에 동래읍성, 동래사적공원은 부산시민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동래읍성 북문 앞에는 조선 세종 때 과학자인 장영실의 이름을 딴 장영실과학동산, 동래읍성역사관이 있어 역사, 교육 투어에 알맞은 곳이었다.

 

 

동래읍성축제는 동래구 주관으로 매년 10월 동래읍성 주변에서 개최되는 역사체험형 마을축제, 지역축제, 역사축제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동래성을 공격할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과 성민들이 왜적에 맞서 결사항전하던 당시의 전투상황을 재현하고 읍성의 생활상을 직접 체험하는 역사체험형 축제이다. 송상현 동래부사는 동래읍성축제를 통해 부산시민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다.

 

 

2. 임진왜란 때 페허가 된 동래성을 수축한 기록인 내주축성비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는 1731년(영조 7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을 고쳐 쌓은 내력과 동원 인원, 규모 등을 적어 건립하였다. 비의 크기는 높이 270㎝, 너비 107㎝로 큰 규모이다. 비석의 머리 부분인 이수(螭首)에는 한 쌍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며, 재질은 화강암으로 기단 부분인 비대(碑臺)에는 연꽃무늬가 소박하게 양각되어 있다.

 

 

비석 주위에 주춧돌이 남아 있어 비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내주축성비는 조선 시대 동래성 연구의 가장 정확한 자료가 되는 동시에 조선 후기 성축사(城築史)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조선 후기 국방사 및 지역사 연구에 가치가 있는 문화재로 평가된다.

일제강점기 때 금강공원으로 옮겨진 내주축성비와 이섭교비가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금강공원 내 케이블카 탑승대에서 산 쪽으로 200여 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들 비석은 일제강점기 시절 한 일본인이 금강원이라는 개인 별장을 만들면서 내부를 꾸미기 위해 임의로 옮긴 것이다. 이섭교비는 1694년 조선 숙종 때 현재의 수안동과 연산동을 잇기 위해 수영천에 놓았던 이섭교의 완공을 기념해 세운 비석으로, 이섭교 옆으로 이전하였다.

 

내주축성비는 영조 7년(1731년)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확장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1735년 세워진 비석이다. 처음엔 동래읍성 남문 밖에 세워져 있었으나, 여러 차례 읍성 안팎으로 옮겨 다니다 일제강점기 때 금강공원으로 이전됐다. 동래구는 이 비석을 현재 복원된 동래읍성 북문 인근에 2012년 9월 이전하였다.

 

동래경찰서가 있는 동래읍성 남문 인근에는 비석을 설치할 공간이 없고 마지막으로 비석이 옮겨진 자리가 어디인지 명확하지 않아 최근 복원한 북문 인근에 이전하였다. 앞면에는 축성에 관한 사실을 20행으로 기록하고, 뒷면에는 축성에 종사한 임원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비의 앞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승훈랑 행황산도 찰방 김광악 기. 유학 송광제 서. 통훈대부 행현풍 현감 유우기 전. 금상(今上) 9년 계축(癸丑)년[1733, 영조 9년] 겨울에 광악(光岳)은 승정원의 당후(堂后)에 있게 되어 경연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떤 중신이 임금 앞에서 평양에 성을 쌓는 일을 계획하며 ‘만약 정언섭이 동래성을 쌓았던 일과 같이 그 고을 신하가 스스로 하도록 청을 들어 준다면 국고를 쓰지 않고 백성의 힘을 고갈시키지 않아도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산도 찰방은 현재 양산시 물금읍 서부마을에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일기에 적어 승정원에 보관하였다. 이듬해 봄에 황산(黃山)의 역승(驛丞)이 되었을 때 동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는데, 동래 사람은 정공의 치적에 훌륭한 것이 많다고 칭송하였다. 동래의 선비 중에 송광순(宋光洵)이 성을 쌓을 때의 사적을 기록한 책 두 권을 가져 와서 나에게 비문을 청하였는데 대여섯 번이나 청하여 포기하지 않으므로 나는 결국 사양할 수 없었다. 그 도면과 기록을 살펴보니 동래는 임진년에 성이 함락된 후부터 140여 년 사이에 그 주변의 옛터가 무너져 백성들의 집이 되어 한 조각의 울타리를 친 설비도 없게 되었다.

 

공이 처음 이곳에 와서 변방의 설비가 어설픈 것을 크게 두려워하고 장마 대비하여 보수하는 계획은 시절이 태평하더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여 개연히 보수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날 밤 바깥사람 모르게 미복(微服)으로 몰래 나가 성터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왔다.

 

드디어 계획을 확정하고 장계(狀啓)를 띄우니 당시의 관찰사 조공(趙公)[조현명(趙顯命)]과 뜻이 잘 맞아 그것을 도와주었다. 신해(辛亥)년[1731] 정월 정묘에 성터를 측량하고 일을 분담하여 각 패장(牌將)에게 맡기니 기기와 물자 및 인력은 오래전부터 비축해 두었던 것이라 한 가지도 모자란 것이 없었다.

 

이에 바람 만난 불처럼 명령을 내리니 감히 거역하는 자가 없었다. 땅을 파니 해골이 쌓여 있었고, 옆에 화살촉이 있었으니 임진왜란 때 전사한 병사들이었다. 종이와 베로 염을 하여 관에 넣어 제사를 지내고 묻어 주었다.

 

그 후에 발견된 해골은 모두 이렇게 해 주었다. 날마다 일하는 곳을 돌며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의 작업을 살펴 벌할 것은 조금도 늦추지 않고 상줄 것은 반드시 상을 주었고 술과 음식을 먹이고 돈과 베를 아낌없이 주었다. 그래서 장수와 병사들이 다투어 힘을 내고 기뻐 뛰어다니며 모두 사력을 다하였다.

 

그해 4월 성이 완성되고 5월에 성문이 완성되었으며 7월에는 문루가 완성되니 공사를 시작한 지 백여 일 만에 견고하게 우뚝 솟은 성이 마치 귀신이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둘레가 2,280보(步)로서 8리(里)[약 3.14㎞] 정도 되고 높이가 수십 자가 되었으며 길이는 전보다 길어졌고 돌도 모두 새 것을 썼다. 일꾼 5만 2천명, 쌀 4,500섬, 베 1,550필, 돈 1만 3천 냥을 썼는데 모두 공이 낸 것이니 정말로 백성에게 걷은 것도 아니고 국고를 축낸 것도 아니다.

 

공사를 다 마치자 장수와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 돈과 곡식을 넉넉히 나누어 주었으며, 네 곳의 장교들에게 각기 문루에 술자리를 설치하고 음악을 연주하게 하여 마음껏 놀게 하였다. 8월 기유에 잔치를 열어 낙성하니 관찰사 조현명 공과 좌병사(左兵使) 이복휴(李復休) 공, 그리고 여러 고을 수령과 각 진(鎭)에서 모두 와서 모였다.

 

얼마 후 또 성을 지키는 데 양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해서 따로 조미(租米) 4,000여 섬을 준비하여 창고를 설치하고 ‘수성창(守成倉)’이라 이름을 붙이고 군대가 필요할 때 쓰게 하였다. 부지런하고 민첩한 무인 5명에게 그 일을 맡기고 급료를 주었으며 특별히 수첩 군관(守堞軍官) 200명을 뽑아 부역을 덜어 주고 성을 지키게 하였다.

 

시설이 견고하고 오래가지만 그래도 무비(武備) 때문에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해서 읍의 서쪽 몇 리 되는 곳에 서재를 세워 ‘시술재(時述齋)’라 이름을 붙이고 읍의 자제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삼으니 가르침에 요령이 있었고 음식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공과 같은 이는 근본이 되는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나는 책을 덮고 탄식하며 말한다. 지혜로써 계획을 시작하였고 용단으로 일을 결정하였으며 은혜로써 무리를 모았고 검약하게 재물을 모아 나라 일에 썼으니 몸은 한때 수고로운 일을 맡았지만 나라 위해 천백 년의 굳은 방비를 도모한 것이다. 무비를 갖추고 나서 문교(文敎)로 근본을 돌려놓았으니 이 한 가지 일에서 모든 것이 아름답게 되었다.

 

지난날 경연 자리에서 이야기된 것은 그중 한두 가지 뿐이었다. 손순(孫順)이 임금의 포상을 받을 때, 임금이 ‘나는 이제 남쪽을 근심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그 후에 호서 절도사로 나아갔고 승정원을 거쳐 동도(東都)의 책임자가 되었으니 이유가 있다.

 

숭정 기원 후 92년 을묘[1735] 10월 일 세움. 건륭 을유[1765] 가을 농주산에서 이전해 세움. 감관 박사연, 좌수 이중열, 색 김응윤, 후에 경진(1820년) 가을에 이전해 세움. 도감 정상언, 좌수 신태규, 감관 장우일.

 

3. 송공단

 

송공단(宋公壇)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시장길 27 (복천동)에 있으며,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1호(1972.6.26.)이다. 동래시장 바로 앞에 있다. 동래부 동헌도 송공단에서 동래시장을 돌아서 약간 걸어가면 나온다.

 

송공단은 1742년(영조 18년) 동래부사 김석일이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 공이 순절한 정원루가 있던 곳에 설치한 단으로서, 송상현 공을 비롯하여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을 모신 곳이다. 송공단이 세워지기 전에는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현 동래경찰서 자리)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분들의 전망제단을 세워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첨사 정발,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을 비롯한 순절 의사들을 모셨다. 이 제단을 1742년(영조18년) 송공단이 세워지자 그곳으로 옮겼다.

 

송공단은 동서남북의 4단으로 되어 있는데 북단에는 송상현 동래부사, 조영규 양산군수, 동래교수 노개방, 동단에는 유생 문덕겸, 비장 송봉수, 김희수, 겸인 신여로, 서단에는 노개방의 부인, 송상현의 애첩 금섬, 정발의 첩 애향, 남단에는 향리 송백, 부민 김상과 이촌녀(二村女) 및 무명 전망인을 모시고 매년 4월 15일 관에서 제사를 올렸다.

 

1760년(영조 36년)에는 동래부사 홍명한이 사림의 공의(公義)에 따라서 부산첨사 정발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부사맹 이정헌을 모셨으며, 1766년(영조 42년)에는 다대첨사 윤흥신, 유생 양조한을 기리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후 동래성에서 순절하지 않은 분들은 제사를 모시지 않았으며, 부산진에서 순절한 분들은 정공단, 그리고 다대포에서 순절한 분들은 윤공단으로 옮겨서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는 매년 순절한 날인 음력 4월 15일에 (재)동래기영회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송공단이 세워진 정원루(靖遠樓)는 원래 동래동헌 객사에 딸린 누각이다. 정원루는 조선 세종 28년에 김시로 동래부사가 만들고, 신숙주가 일본 등 변방을 조용하게 한다는 뜻으로 정원(靖遠)으로 이름을 지었다.

 

1442년 조선통신사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실사학자 신숙주는 일본을 무시하고 깔본 다른 사신과 달리 일본이 앞으로 조선에 큰 우환이 될 것으로 보았다. ”일본인들은 사나워 의리로 굴복키 어렵다. 군사로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정원루 기문“. 신숙주 당시 일본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세운 무로마치 막부가 쇠퇴하고 일본 66주간의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시기로 일본인의 호전적이고 조직적인 전투장면을 보고 그들은 타고난 싸움꾼으로 그 화가 조선에 미칠 것을 알았다.

 

4. 동래부동헌

 

동래부동헌은 조선시대 동래부사가 집무를 하던 곳이다. 현재와 대비한다면 동래부동헌은 부산시청이고, 동래부사는 부산시장이다. 조선시대 255명의 동래부사가 정치, 행정, 외교 업무를 하면서 동래의 엄청난 역사가 고스란히 이곳에 담겨 있다. 주소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이다. ‘동래부동헌’의 수안동(壽安洞)의 유래는, 으뜸 되는 관아 안이라는 뜻의 수안(首安), 또는 땅을 조금만 파도 물이 나오는 등 물이 흔하다고 수안(水安), 동래성 수문안의 동네라는 설이 있다.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동래부동헌은 아헌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수령이 일을 처리하던 곳이다. 따라서 동헌은 관아 건물 가운데서 중심이 되는 건물이고, 동래는 일본과 국방, 외교상 요충지여서 정3품 당상관인 부사가 재직하였다. 이곳을 거쳐간 부사만도 1547년에 최초로 임명된 이윤암 부사부터 1895년 사임한 정인학 부사까지 349년 동안 모두 255명에 이른다.

 

동래부동헌 충신당 (東萊府東軒 忠信堂)은 1636년(인조 14)에 동래부사 정양필이 창건하고, 1711년(숙종 37) 동래부사 이정신이 충신당으로 편액을 붙여 조선시대 말기까지 동헌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사용되다가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됨에 따라 양산군 보건소 동래지소로 사용되었고, 1977년 부산광역시에서 매입하여 초석 이상을 해체, 복원하여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원래 양옆에는 방, 가운데는 마루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동래군청 등으로 사용되면서 벽면, 평면구조, 천장, 마루 등이 교체, 보수되어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고, 현재와 같이 방은 모두 없어진 대신 마루로 바뀌었다. 현재의 현판은 독립운동가 한형석 선생의 글씨다.

 

건물의 구조는, 아헌인 충신당의 좌우에 동・서익랑(東西翼廊)과 대문, 바깥 대문이었던 동래도호아문(東萊都護衙門),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이 부속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서익랑은 파괴되고, 철거되었다. 망미루와 독진대아문은 지금의 금강공원 입구와 금강공원 안으로 옮겨 세웠다.

 

충신당과 대문만 본래의 위치에 보존되어 있으나, 부지(敷地)는 축소되었고, 원래 떨어져 있었던 동익랑이 충신당에 너무 가까이 이건 되어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철거됐던 부사의 휴식처 혹은 무관들의 대기소였던 ‘독경당’과 동래부사를 호위하는 비장의 처소인 ‘찬주헌’을 2014년 3월 복원했다.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5호인 ‘독진대아문’은 1636년 동래부사 정양필이 동헌 정당(正堂)인 충신당과 함께 지은 것으로 동래부 동헌의 바깥 대문이다. 1655년(효종 6) 동래부의 군사권이 경상좌병영 휘하 경주진영에서 동래독진(東萊獨鎭)으로 독립, 승격되었음을 알리는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이란 현판이 정면에 걸려 있다.

 

망미루 (望美樓, 42.97㎡)는 1742년(영조 18년)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이 동래부 청사인 동헌(東軒) 앞에 세운 문루이다. 옛날 한양으로부터 부임해온 어느 동래부사가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이 누각을 망미루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919년 동래의 3․1운동은 이 누각에서의 만세 삼창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면에는 동래도호아문(東萊都護衙門)이라고 쓰여진 큰 편액이 걸려 있고, 후면에는 망미루(望美樓)라는 큰 편액이 걸려 있다. 1895년(고종 32)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사영(東萊觀察使營)으로 승격됨에 따라 일명 포정사(布政司)라고도 불렀다. 누각 위에는 동래성 4대문의 여는 시각과 정오를 알리기 위해 치는 큰 북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시가지 정리계획에 따라 아무런 연고도 없는 금강공원으로 이전하였다가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고마청(雇馬廳)’은 조선시대까지 가장 빠른 운송수단이자 중요한 군수물자인 말을 관리하던 관청 건물로 일제강점기 멸실, 훼손됐다가 동래부동헌 정비사업으로 목조건물 2동(92.9㎡) 규모로 2015년 12월 23일에 복원되었다. 완대헌(緩帶軒)은 동래부사가 허리띠를 풀고 쉬는 휴식공간으로 1636년 동래부사 정양필이 충신당과 함께 지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구는 사업비 26억 원으로 부지를 사들이고 설계와 부산시문화재위원회 심의 등을 거쳐 2018년 7월 16일 여덟 칸의 기와지붕 목조 건물 완대헌을 복원했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 맞서 싸우며 장렬하게 순절한 송상현 동래부사는 조선시대 동래부사 255명 중 가장 청사에 빛나는 인물로 부산시민과 한국인에게 기억되고 있다. 청주 충렬사, 부산 충렬사, 동래읍성을 차례대로 답사하며 송상현 공의 우국충정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감사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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